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1 08:00 김삼웅

 

 

1960년대는 <사상계>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민족주의세력이 이를 매국외교라 단정하면서 <사상계>는 반대투쟁의 본영이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더 많은 글을 이 지면에 쓰게 되고, 잡지의 권위와 파워가 그만큼 신장되었다.

<5ㆍ16을 어떻게 볼까?>에서부터 함석헌과 군부정권의 첨예한 대립각이 세워졌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3년 3월호에 <우리 민족의 이상>, 4월호에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 8월호에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 9월호에 <한일회담을 집어치우라>, 10월호에 <새 혁명>, 1964년 3월호에 <양한재조재차일념>, 4월호에 <매국외교를 반대한다>, 9월호에 <우리는 알았다>, 1965년 1월호에 <비폭력혁명>, 5월호에 <세번째 국민에게 부르짖는 말>, 10월호에 <싸움은 이제부터>, 12월호에 <대담-민중의 증언>, 1966년 3월호에 <레지스탕스>, 5월호에 <우리 역사와 민족의 생활신념>, 1967년 1월호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 2월호에 <저항의 철학>, 4월호에 <4자회담 좌담회>, 1968년 4월호에 <혁명의 철학>, 5월호에 <혁명공약의 행방>, 7월호에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남한산성)>, 8월호에 같은 연재 2회로 <행주산성>, 10월호에 같은 연재 3회로 <사상계>를 각각 썼다.

이 시기 함석헌은 60대 초ㆍ중반기의 나이였다.
왕성한 필력이고 놀라운 정력이었다. 모두 다 열정을 쏟은 글이고 그때마다 정치적ㆍ사회적 파장이 컸다. 그는 어느 언론인보다 많은 글을 쓰고, 어떤 학자보다 심도 있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67년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사상계>의 판권이 부완혁에게 넘어가면서 이 잡지에 글쓰기는 다소 뜸해졌다. 1968년 7월호부터 ‘역사의 격전지’ 연재는 현장(현지)을 탐방하여 다큐멘터리방식으로 집필할 계획이었다. 1회에 남한산성과 2회에 행주산성에 이어 3회에는 <사상계>를 찾아서 그 피어린 격전지의 사력을 집필하였다. 당시 <사상계>는 장준하와 부완혁 사이에 판권 문제를 둘러싸고 ‘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상계가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가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되고 부완혁이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됩니다. 누가 이겨도 사상계는 자살입니다. 두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는 것 그것을 바루 듣는다면 이렇습니다.

“사상계가 죽게 됐습니다. 제발 살려줍시오.”

사상계가 다 죽게 되어도 누가 살려 주려고 들지도 힘을 쓰지도 않기 때문에 내분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적인 시비를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그름은 개인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5ㆍ16에 대하여는 그 일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도덕적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도학선생의 도덕이 나라와 시대를 못 건지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동시에 그 역사적 시점에서는 박 모나 김 모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됐던가 하는 것을 가려내어야 역사는 구원됩니다. 사상계의 비극의 원인은 개인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주석 30)

함석헌은 <사상계>의 분열이 장준하와 부완혁 간의 사적 이해관계가 아닌 군사정권의 탄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5ㆍ16쿠데타를 주동한 인물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만 ‘격전’의 원인을 알게 된다고 풀이한다.

격전지가 남한산성에 있는 줄 알고, 행주산성에 있는 줄 알고, 한라산 백록담에 있는 줄 알고 헤매이며 눈물 뿌렸던 나는 어리석었습니다. 서로 목을 찔러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비참한 자살적인 전쟁의 격전지는 다른 데 아닌 서울 복판에 있습니다. 대강이를 개구리 얻어 문 독사처럼 내저으며 근대화라 발전이라 미쳐 돌아가는 이 수도 서울에 있습니다. 인권선언을 내붙인 유엔의 깃발과 자유평등을 그 건국정신으로 한다면서 월남전쟁을 하는 값으로 자유를 부르짖고 일어나던 체코가 소련군대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체 외면하는 대미국의 국기가 펄펄 날리고 있는 이 서울에 있습니다.

함석헌에게 <사상계>의 ‘격전’은 지난날 어느 ‘역사적 격전지’에 못지않는 아픔의 상처였다. 날이 갈수록 이빨과 발톱이 날카로워지는 독재 세력에 맞설 언론매체란 <사상계>밖에 없는 터에, 이곳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상계 하다가 망하는 것이 그리 큰 일 입니까? 그것은 크고 작은 허다한 자살, 자살의 탈을 쓴 살인이 이 수도를 휩쓸고 있는 것을 절규하는 부르짖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인 마지막 촛불이 꺼진다면 그어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사상계를 이날껏, 읽는 사람이거나 아니 읽는 사람이거나, 단 하나의 바른 말하는 잡지라고 했지오? 5천년 문화민족이노라고 하면서 신문잡지를 몇 천 몇 백으로 하면서 ‘단 하나’ 라는 말도 부끄럽지만 또 지나친 과장인지도 모르지만 부끄러운 과장일수록 그 단 하나의 촛불이 꺼지도록 두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주석 31)

함석헌은 굴욕회담의 격동기에 <사상계>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ㆍ잡지에도 적지 않은 글을 썼다.

<경향신문>(1963. 7. 8)에 <그 사람들은 살았더라>, <한국일보>(1963.7.22)에 <누구 믿을 때 아니다>, <신세계>(1963. 9)에 <나는 왜 갑자기 돌아왔나>, <경향신문>(1963. 9.9~10)에 <국민의 당 여러분께 애원합니다>, <소설계>(1963. 10)에 <호소, 국민에게 다시 호소한다>, <동아일보>(1963.10.14)에 <한 발걸음 바로 앞에서>, <20세기 사상강좌 5>(1964, 박우사)에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동아일보>(1964. 1~10), <새해의 말씀>, <조선일보>(1964.1.28)에 <3천만 앞에 또 한번 부르짖는다>, 같은 신문(1964. 3. 5)에 <휴전에서 군정종식까지>, <동아일보>(1964.8.26)에 <데모학생을 건집시다>, <조선일보>(1964.9.6)에 <이 나라의 오늘을 말한다>, <인물계>(1964. 9.10)에 <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올 다이제스트>(1964. 12)에 <준비 없는 통일 말하지 말라>, <크리스찬 신문>(1965. 2. 13)에 <우리의 살길은 무엇인가>, <경향신문>(1965.2.19)에 <일본은 대답하라>, <동아일보>(1965.7.1~2)에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신동아>(1965.10)에 <대학이란 무엇이냐>, <종교계>(1966.1)에 <대중과 종교>, <여상>(1966.2)에 <우리들의 비너스에게 주는 말>, <종교계>(1966.7.8)에 <종교인은 죽었다>, <조선일보>(1968.4.10~12)에 <미국문명과 흑인문제>, 같은 신문(1968. 6.23)에 <개화백경> 등을 집필하였다. (주석 32)

함석헌이 이 무렵에 얼마나 많은 글을 쓰면서 매국외교를 반대하고, 씨알의 시대정신을 일깨우며, 언론ㆍ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중심매체는 <사상계>였다. 이 잡지가 박정권의 탄압으로 고사상태가 되고, 일시 부완혁에게 넘겨주었던 판권이 회수되지 못하면서, 함석헌과 장준하는 매체를 잃은 ‘삼손’이 되었다. 


주석
30> <사상계>, 1968년 10월호, 21쪽.
31> 앞의 책, 22쪽.
32> 정현필, 앞의 글,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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