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월간 <말> 합본호

 

 

내가 '나눔기획'을 차린 소식이
주변에 점점 알려 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아내가 위암에 걸려 죽어 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병 구완도 제대로 못 한 채
돈을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행여나 내 마음이 다치거나 상처 받을새라
각별한 조심과 배려를 더 해 주었다.

그 당시 월간 <말> 지 사장으로 있던
김태홍 선배에게서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김태홍(1942 ~ 2011) 전 국회의원


김태홍 선배는 한국일보와 합동통신에서
외신부 기자로 있던 언론인 출신이고 
나중에는 광주 북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80 년 계엄 치하에서
기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라 할 수 있는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맡아
언론 검열 철폐 및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벌인 죄로 계엄 당국에 의해 구속 수감되고
신문사에서도 해직되었다.

"최 형을 이 고생하도록 놔 둔다는 것은 우리 주변 모두의 수치예요.
부끄러움이고 후안무치한 일이지...
요즘 <말> 지 사정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전두환 정권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 이후로
<말> 지는 오히려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소.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그런데 마침 <말> 지 창간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간행된 것을
보도지침 폭로 기사 내용까지 수록해서 합본호로 만들기로 했는데
기왕이면 당신이 좀 맡아 주었으면 좋겠소...
그래야 우리도 안심할 수 있겠고...
비용은 한 천 여 만 원 들텐데 필요한대로 먼저 가져다 쓰시고..."

<말> 지는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월간 <씨알의 소리>가 1980 년 7 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의해 폐간된 이후로

이 땅의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잡지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1950 년대부터 60 년대 말까지는
장준하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발행한 <사상계>가 있고
박 정권에 의해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

그 뒤를 이어 1970 년부터 80 년까지
함석헌 선생을 발행인으로 한 <씨알의 소리>가 있다.

<씨알의 소리> 역시 전두환에 의해 강제 폐간된 이후
무려 5 년 여의 공백기를 지난 1985 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 지가 있어
우리 나라 월간 잡지 역사의 전통과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75 년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과
1980 년 계엄 하에서 역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기자들은
1984 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설립했다.

그동안 거리로 내쫓긴 해직 기자들은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글과 각종 성명서를 통해, 때로는 거리 시위를 통해
언론의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러다가 구속되고 옥고를 치루면서까지
자유 언론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 왔다.

하지만 정작 언론 매체를 스스로 만들어서
실천적 활동을 벌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85 년 5 월 월간 <말> 지를 창간하게 되고
이를 모태로 해서 1988 년에는 급기야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기까지 이르르게 되는 것이다.

김태홍 사장은 내게 각별히 부탁한다.

"월간 <말> 지 합본호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제작해 줄 사람이
아마도 최 형 말고는 없을 것 같소... 

최형 입장에서야 어디 이 정도를 가지고 두려워서 못 할 분은 아니잖소...
그러니 가급적 조심해서 꼭 해 내 주기를 바랄 뿐이요..."

그 때 상황으로는 실로 엄청난 주문이었다.
인쇄량은 물론이거니와 양장 특수 제본을 비밀리에 해 낸다는 게
여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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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외상 매입을 자산 삼아

 

 

책상 하나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더 큰 사무실이 필요했다.
당장에 작업을 진행시킬 직원이 필요했다.

시작한 지 보름 만에 사무실을 옮겼다.
출판 편집 경력 15 년 이상되는 베테랑급으로 우선 두 분을 간부 직원으로 초빙했다.

그래도 모자랐다.
다시 보름 만에 20 여 평되는 사무실을 구해 이사했다.
직원도 여섯 분으로 늘었다.

내가 두 번째로 직장 생활을 했던 도서출판 현암사 조근태 사장을 찾아 갔다.
조 사장은 이미 나의 형편과 사정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계셨다.

 

 

▲ 현암사 조근태 사장 (1942 ~ 2010 )


"최 선생! 사업을 하게 되면 무슨 사업이든 부채를 지게 마련이오.
5 천 만 원이란 부채는 사업 규모에 따라서 별 거 아닐 수도 있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외상 매입 부채가 한 5 천 만 원에서 늘 깔려 있도록 사업 규모를 키워 놓으면...
재정적인 문제도 어렵지 않게 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께요.
나도 최 선생을 위해서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우선 아무런 시설도 없고 거래처도 없을 테니까 내가 그것을 맡아 주겠소...
제일 큰 부담이 원재료인 종이값일텐데...
내가 거래하는 지업사에 특별히 부탁해 놓을테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주문해서 갖다 쓰시고 여유가 생기면 갚도록 하시오...
그밖에 인쇄소나 제본소도 필요하다면 소개해 주겠소...
그리고 한 가지 더... 혹시 정히 필요하다면...
우리 현암사 어음을 발행해 드릴 테니까 그리 아시고요...
아마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꺼요..."

그 때 조 사장의 도움과 제안은
내게 크나큰 의욕과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세 번씩이나 울먹이며 피마르는 심정으로
주저주저하며 안쓰런 표정으로
사정하던 혜숙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혜숙에게 속삭였다.

"내 꼭 올해 안으로... 6 개월 안으로 빚을 갚을께...
몸조리 잘 하고 살아 있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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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고
그 후 협의회 총무를 맡았던 김동완 목사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김동완 목사는 내가 소속된 감리교단의
교회 개혁과 사회 운동을 실천적으로 대표해 오던 분이다.

 

▲ 김동완 목사 (1942 ~ 2007 )


김동완 목사는 일찌기 박형규 목사와 더불어 빈민 운동과 노동 운동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오면서 세 차례나 구속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나와 혜숙은 김동완 목사와 각별한 관계로
함께 기독학생 운동을 하기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난리야!...
우리 혜숙 씨 병 구완도 못 하고...
세상에 최 아무개가 이렇게 돼도 되는 거야???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구!!!
당신이 감옥 들어가기 전 기사연(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있을 때
당신들이 계획하고 준비해 왔던 '1970 년대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를
우리 인권위원회에서 펴 내기로 했소...
기사연에서 내게 되면 정보 기관의 압력을 버텨 내기도 어렵고
위험할 것 같아서 우리가 내기로 한 거요...
어차피 당신들이 계획하고 준비해 온 거니까
기왕이면 직접 맡아서 출판까지 해 주시오...
예산은 한 1 천 5 백 여 만 원을 당신도 알다시피 별도 통장으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가져다 쓰고..."

원고를 가져 왔다. 실로 엄청난 양이다.
4 . 6 배판으로 2,200 여 페이지 가량 되는 분량이다.
당시 20 여 평형 아파트 값이 천 여 만 원 할 때던가 그랬다.

상황이 또 바뀌었다.
공타기로 조판하기에는 어느 세월에 마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첨단 컴퓨터 기술을 응용해서 마악 새로 개발해 시중에 나온
전산 조판기를 구입해야 했다.

다시 보름 만에 사무실을 40 여 평으로 늘리고
최신형 한컴 전산 조판기 4 대와 사진식자기 1 대를 리스로 구입했다.

<말> 지를 비밀리에 인쇄하기 위해서 서울 시내에는 3 대밖에 없다는
미국산 최신형 4 절 마스터 인쇄기도 리스로 구입했다.

구입 비용이 6 천 여 만 원에 달했다.
15 평 남짓 되는 인쇄 공장도 별도로 마련했다.

직원도 20 여 명으로 늘었다.
시작한 지 40 여 일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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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마지막 예배

 

 

한편 혜숙은 이제
죽음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단계도 지나 있는 듯 싶다.

앞으로 몇 날을 더 살 수 있을지
내일이건 모래건 숨이 끊어지면 그냥 죽는거지 하는 표정이다.

의학 용어로 터미널 (Terminal) 상태...
우리 말로 풀자면 종착역 종점에 임박해 있는 상태다.

7 월 첫째 주...
혜숙이 여러 달 동안 교회에 나가지 못하자
담임이신 조승혁 목사님과 교인들이 심방을 오셨다.

목사님과 교인들 모두 혜숙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 심방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조 목사님의 심방 예배가
마지막일 꺼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 조승혁 목사 (1935 ~ 2014 )


혜숙이 자신도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예식이 되겠구나 싶단다.

혜숙은 교인들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듯
목사님과 교인들이 대문으로 들어 서는 기척에
벌떡 일어서서 울음으로 맞이한다.

방이며 마루 가득히 둘러 앉아 예배드리는 동안 내내
혜숙은 엎드려 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흑흑거렸다.

나는 혜숙과 만난 이래로
이처럼 절망적인 혜숙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혜숙은 체신이니 뭐니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 하나님!!! 왜 이 여인을 데려 가시려는 겁니까?...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열망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로운 길을 걸어 온 여인이
왜 민주화 되는 세상,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어 온 남편을 뒷바리지하고
어려운 동료들을 보살펴 온 당신의 귀하고 의로운 따님을
주님! 데려 가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할 소중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사오니
할 일 많은 이 여인을 주님!!!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조승혁 목사님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 몸에 땀을 흠뻑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참석한 교인들도 모두 울고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목사님은 교회가 세워진 이래 이처럼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전 교인이 합심된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다고 하신다.

안수 기도 중에 조승혁 목사님은 배와 등허리 쪽으로 심한 통증을 느끼셨단다.
통증을 견디다 못 해 기도 소리가 더 커졌다고 한다.

함께 울고 통곡하고 기도하던 혜숙은 마음이 조금 평온해 지는 듯 했다.
그날 밤 혜숙은 오랜 만에 모처럼 잠을 편하게 들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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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죽으면 죽으리라

 

 

이튿날 혜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픈데 먹을 것 좀 달라고 했다.
수술 이후 처음으로 혜숙은 자기 의지로 자기 욕구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 반갑고 신이 나신 듯
밝고 환한 표정으로 물으신다.

"에미야~~~ 배가 고프다고?...
무얼 먹고 싶어? 무슨 반찬을 해 줄까?"

"조기 반찬이 먹고 싶어요"

혜숙이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책을 읽어 보니
지은이 오혜령도 암 수술을 받고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다가
끝내 배에 복수가 가득차고 의학적으로 터미널 상태에 다달았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나서
맨 먼저 먹고 싶었던 것이 조기 반찬이었다는 거다.

오혜령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를 마치자마자 이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며 평온해 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가득 찼던 복수가 점점 빠지고
암 세포의 진행이 멈추더라는 것이다.

혜숙은 오혜령의 수기에서처럼
자신도 그렇게 소생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게다.

암 환자의 심리적 변화에서
제 1 단계인 부정하고 거부하는 상태에서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모든 것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상태...

그러고 그러다가 자포자기하고
한없이 무력해 지는 상태를 지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려는 단계까지 예외없이 겪어 온 혜숙은

이제 이 모든 단계들이 때때로 혼재되어 나타나면서
그래도 살아 나야 한다는 희망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어머니는 조기반찬에 자연식 야채로
상을 가득히 채워 놓으셨다.

어머니와 나는 혜숙이 얼마나 먹을까...
먹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을까...
기대하고 염려하면서 지켜 보았다.

혜숙은 입에 넣자마자
먹은 음식들을 토해 내느라 정신 없어 했다.

하지만 혜숙은 토하면서도 먹기를 계속했다.
먹으면 토하고... 먹고 토하고......

물만 먹어도 토하고
먹은 것보다 더 토하곤 했다.

이후부터 혜숙은 토하면서 죽도 먹고
조기 반찬도 먹고 했다.

그래. 먹어야 한다.
먹자. 먹자.

혜숙은 죽기 살기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혜숙은 생기가 돌면서
삶의 의욕이 생기는 듯 했다.

비록 토하더라도 먹는 재미
씹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제일 맛있는 것이 물이라고 했다.
그즈음 해서 나는 생수기를 들여 놓았다.

의학적으로는 대책이 없고 방법도 없는 터미널 상태지만
혜숙은 그 날부터 풍욕과 냉온욕 그리고 간간이 먹어 대는 일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맏아들이 친구들을 몰고 집에 와도 개의치 않고
맞바람 치도록 창문과 방문을 열어 놓고는 벌거벗은 채로 풍욕을 하고
하루에 한 번 목욕탕에 가서 냉온욕을 하고 왔다.


밤에는 마고약을 배에 얹고 잤다.
하루에 풍욕 8 번 냉온욕 1 번 마고약 1 번

그렇게 석 달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혜숙은 필사적으로...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작정하듯 매달렸다.

그즈음 해서 혜숙은 기도에도 열심이었다.
이제껏 살아 오면서 잘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지금껏 마음 속 깊이...
가장 꺼림직하게 남아 있는 게 무언가...
무엇을 제일 잘못하고 있었나...
혜숙은 곰곰 생각하고 따져 보았단다.

1 번 2 번 순서를 달아 적어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들이
모두 마음에 걸리고 한도 끝도 없이 나오더란다.
한 30 여 가지를 적어 놓았단다.

가장 마음에 걸리고 잘못한 일은
시어머니를 마음 속 깊이 공경하지 못했던 거란다.

혜숙은 시어머니에 대해 마음 속으로 불편해 하고 짜증 낸 것을
첫 번째로 삼아 회개했다.

돌이켜 보고 뉘우치며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 기도를 하는데
해도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제목이 해결되어야 다음 순서로 넘어 갈 텐데...
너무 오래 걸리더란다.

그래도 철저하지 못했다면서
두고두고 아쉬웠단다.

회개 기도를 하면서 혜숙은 마음을 비우고
성격도 많이 변했다.

혜숙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야만 되는
이과 전공 출신이어선지 성격도 좀 원칙적인 편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좀 까다롭고
힘에 겨운 일을 잘 참아 내지 못한다.
곧잘 실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혜숙은 자신의 이러한 성격을
모두 다 비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시건방진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넉넉하게 편안하게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했다.

한 달 쯤 지나자
혜숙은 체중이 5 백 그램 정도 늘었다.

혜숙은 체중이 늘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며
사소한 일에도 자주 웃고 즐거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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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 / 89. 가족 여행

 

지금까지의 그리 짧지 않은 이야기들은
내 아내 혜숙이 1987 년 4 월 암 수술을 받고
그 해 7 월 중순 경까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내 인생에 너무 충격적이고
그만큼 힘들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인가
3 개월 여 동안의 이야기로는
너무 길고 지루한 점 없지 않았다.

이제 호흡을 좀 빨리 해서
마무리 정리를 해야겠다.

1985 년 7 월 마지막 주간에
우리 가족은 다함께 동해안에서 휴가를 보냈다.

어머니와 두 아이까지 모두 함께 여행하기로는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때 혜숙은 내게 조용히 임신한 사실을 알리고 
꼭 건강하게 낳고 싶다고 했다. 

 

나는 뜻밖의 통보(?)에 약간 멈칫했지만
이내 고마운 마음에 손을 꼬~옥 잡고
격려의 뜻을 담아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다.

 

이처럼 온 가족이 함께 단란하게 여행하는 것이 
혹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를 모델로 삼아 사진 찍기에 바빴다. 
 

무려 여덟 통을 찍었다. 
이 사진들은 지금도 우리집 앨범에 담겨 
암울했던 가운데서도 한때나마 즐거웠던 가족 분위기를 소중하게 밝혀 주고 있다.

 

오색약수터 근처에 숙소를 마련하고 

탐방로를 따라 선녀탕과 금강문을 지나 용소폭포에 닿았다.

 

▲ 1985년 7월, 막내 중현이를 임신하고 설악산 용소폭포 앞에서


용소폭포는 높이 약 10m, 소 깊이 약 7m로, 
이 소에서 살던 천년 묵은 암수 이무기 두 마리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다가
숫놈만 승천하고 암놈은 미처 준비가 안 된 탓에
이곳에서 굳어져 바위와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4 년 뒤
막내 중현이가 세 돌 되는 해 여름
우리 가족은 또다시 동해안과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때에 어머니는 힘이 드실 것 같다고 집에 계셨다.

초등학교 5 학년이던 딸 사옥이와 3 학년이던 아들 중수에게
체력 단련도 시킬 겸 해서 설악산 금강굴을 향해 올라갔다.

비선대에 이르러 우리는 주변의 경관에 취해서
잠시 쉬고 있었다.

거울처럼 해맑은 물 하며 물줄기에 곱게 다듬어진 웅장한 바위들은
깍아 세운듯한 산줄기를 배경으로 자연이 빗어 놓은 아름다움을 한껏 빛내주고 있다.

비선대에서 흘러 내리는 물은 이내 큰 바위를 굽이쳐 폭포로 변한다.
폭포 위로는 비선대 각자바위에서 연못으로 건너가는 사다리형 다리가 놓여 있었다.

 

▲ 설악산 비선대

 

▲ 비선대 각자바위 : 비선대 암반에 새겨진 각자로 세로로 내려 쓴 글씨가 선명하다.

 

세 아이와 우리 부부는 각자바위 아래 다리를 건너

위에 보이는 고인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취한 듯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 댔다. 

세살배기 막내 중현이도 신명이 났던지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잠깐 절경을 둘러보는 사이에 
막내 중현이는 사다리형 다리가 신기했던지 
그 쪽으로 다가가 사다리 사이에 팔을 걸치고 폭포 위에 서 있었다. 

다시 위로 오르기가 어려웠던지 
중현이는 잡고 있던 사다리를 놓고 
밑으로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막내가 폭포 아래 낭떠러지로 
휩쓸려 떨어지리라 직감했다. 

중현이를 구해 낼 시간이 없었다.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것 외엔 방법도 없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연못에서 뛰쳐 나왔다. 

 

 

하지만 중현이는 이미 
물살에 몸의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더니 
거대한 폭포에 휩쓸려 낭떠러지 절벽으로 떠내려 갔다. 

이제 
중현이를 살릴 방법이 없다. 

나는 몸을 돌보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막바로 낭떠러지 절벽 폭포를 향해 몸을 내 던졌다. 

천만다행이게도 폭포에 미끄러져 내려 오는 중현이보다 
한 뼘 정도 먼저 떨어 질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바위에 부딪칠 찰라에 있는 
중현의 머리를 팔등으로 막아 냈다. 

중현이의 머리와 몸이 
내 팔등에 세차게 부딪쳤다. 

그리고는 퉁겨져 나와 
폭포를 타고 웅덩이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 
가라 앉는 중현이의 몸을 찾았다. 

잠시 후... 
나는 중현이를 받쳐 들고 
물 위로 떠올랐다. 

주위에 있던 관광객들이 모두 경악하면서 
삽시에 폭포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내가 중현이를 받쳐 들고 물 속에서 떠 오르자 
300 여 관광객들은 
"와 ㅡ !!!" 하는 함성과 함께 
힘차게 박수를 쳐 댔다. 

나는 새파랗게 질리고 놀란 중현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한동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관광객들은 팔과 팔을 이어서 
인간 밧줄을 만들어 중현이를 받아 올려 주었다. 

중현이가 무사하게 구출되는 순간 
다시 한번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중현이를 올려 보내고 
너무 긴장했던 탓에 호흡을 가다듬던 내가 
인간 밧줄을 잡고 마지막으로 기어 올랐을 때 
주위 분들 모두 비선대가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우렁찬 박수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설악산에 머물 기회가 있으면

나는 되도록 비선대를 찾아 옛 추억을 기린다. 

 

[영상] 비선대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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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DJ 진영과 재야 단체에서

 

 

대통령 선거가 중반으로 접어 들자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도 주문 물량이 쏟아져 들어 왔다.

구속과 망명과 가택 연금으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탓인지
김대중 후보는 조직과 재정이 김영삼 후보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종교 시민 사회 단체의 연합체인 민통련에서는
선거 운동 방침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으로 정했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 단일 후보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지지, 지원 활동을 벌여 나갔다.

87 년 6 월 민주시민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는 공정선거감시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전국적으로 부정 행위를 감시 고발하는 활동을 펴 나갔다.

나와 가까이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온 이들은
대부분 '김대중 선생 단일 후보 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
일부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본부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두 조직에서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곁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모금 운동은 그야말로 쇄도할만큼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 두 조직에서도 나에게 많은 일거리를 맡겼다.
서로가 어려운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관계로
나는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마련해서 차질이 없도록 홍보물을 만들어 납품했다.

민통련과 국민운동본부에 속한 부문과 지역 활동 단체들에서도
아연 활기를 띠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모든 단체마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선거 홍보물이었던만큼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새없이 거래처와 인쇄 골목을 누비고 뛰어 다녀야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2 월 말이 다가오는 즈음에
나는 혜숙이 부탁한 빚을 모두 청산했다.

혜숙에게는 정작
'1 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당신 가슴에 한을 남길지도모를
빚을 그 안에 꼭 갚고야 말테니까...'
하고 말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이 다짐했던대로 올 해 안에,
연말을 넘기지 않고 모두 갚게 된 것이다.

6 월 말에 시작해서 12 월까지
6 개월 만의 일이다.

1987 년 12 월 31 일 자정에
나는 혜숙과 함께 교회에 나갔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지나간 1 년 동안의 감회를 말하고
다가오는 새해에 바라는 소원을 종이에 써서 촛불에 태우는 순서가 있었다.

나는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되돌아 보자니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견딜 수 없어 한참을 울먹였다.

"여보! 나 해 냈어...
당신 가슴에 그토록 맺혀 있던 빚을 다 갚았어...
이제 당신이 해 낼 차례야...
당신이 내 부탁 들어 주어야 할 차례라구...
당신 살아야 해! 당신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구!!!..."

나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나의 아내, 우리 혜숙이와
제발 헤어지는 일 없이 오래오래 함께 살게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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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분에 겨운 호사

 

 

혜숙의 건강은 나날이 좋아졌다.
새해 들어서는 몸무게가 48 kg 까지 올라 갔다.

혜숙은 배가 고파 했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승용차를 구입하고
주말마다 혜숙과 드라이브를 즐겼다.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 다녔다.
이제까지 살면서 해보지 못한 분에 겨운 호사였다.

혜숙도 건강에 자신이 있다며 운전 학원에 다녔다.
나는 혜숙과 보다 많은 추억을 남기기로 작정이나 한 듯
주말마다 전 국토를 누비다시피 했다.

온천을 찾아서, 음식점을 찾아서...
환상적인 드라이브 길을 찾아서...
동해로 남해로 서해로
산과 계곡과 바다로 여행을 다녔다.

혜숙은 그래도 성이 차지 않던지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가던지
헐고 다시 짓던지 하자고 졸랐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옥집에서 살았다.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 중턱에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만큼
마당도 넓고 솟을대문이 육중해 보이는 가옥이다.

동네 아이들이 솟을대문 계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이터를 삼고
상감마마 집이니 절간집이니 하고 불러대던 집이다.

하기사 겨울이면 웃풍이 세고 추워서 어머니께서도
부엌살림과 연탄 가는 일 등등으로 힘들어 하셨다.

혜숙은 다세대 주택으로 지어
좀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리저리 알아 보기까지 했는지
집터만 있으면 건축업자가 알아서 지어 준다고 했다.

전세를 내 주면 우리는 돈을 안 들이고도
한 층을 그냥 차지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몸도 성치 않은 혜숙이 간곡하게 바라기도 하고
살림을 맡아 하시는 어머니도 좀 편하실 것이라는 말에
집을 새로 짓기로 작정했다.

집안에 병고가 있거나 우환이 들면
집을 헐고 짓는 게 아니라는 풍습에
마음 한 편으로 찜찜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혜숙이 간절하게 바라고
어머니께서 편하시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앞서
건축업자를 선정하러 다녔다.

집을 짓는 동안 임시로 살 집을 마련해서
동네 이웃으로 이사했다.

반 지하실에 단칸방 두 개가 딸린 집이었다.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한 3 ~ 4 개월 기다리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온 식구가 견디기로 했다.

조승혁 목사님으로부터 안마에 능통하다는 분을 소개받았다.
주로 돈많은 재벌급이나 고위층을 상대하는 분인데
목사님의 각별한 부탁으로 시간을 낸다고 했다.

혜숙은 매일매일 두 시간 씩
그 분에게 안마를 받았다.

처음에 몇 번은 나와 어머니도 번갈아서 같이 받아 보았지만
나는 너무 아프기도 하고 시간 내기도 만만치 않아 그만 두었다.

하지만 혜숙은 좋아했다.
혈관과 경락을 지압으로 꼭꼭 집고 뼈마디마디와 내장 부위까지 맛사지하고나면
온몸이 그렇게 개운하고 시원할 수 없다고 했다.

 

 

 

94. 문익환 목사님의 방문

 

 

1988 년 8 월 하순 경 어느날 아침 시간에
문익환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문 목사님은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신지 한 달 남짓되었다.


어쩐 일이시냐고 여쭈니까
세민약국에 들러 우리집 위치를 알아 보고
집 근처에 와 계신데 집을 못 찾겠다는 거다.

문익환 목사님은 1975 년 나와 혜숙이 학생 운동을 할 적부터
각별한 인연으로 허물없을만큼 가까이 모시고 지내 왔다.


내가 감옥에 있을 적에도 약속 시간에 간격이 생길 때

두 어 차례 세민약국에 들러서 허물없이 쉬다 가곤 하셨단다.

특별히 내가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 일을 맡고 있을 적에는
문 목사님이 사모님을 통해 옥중에서 보내 주신 통일을 염원하는 시
"꿈을 비는 마음"을 우여곡절 끝에 곧바로 <씨알의 소리> 에 실릴 수 있어

목사님께서 명실공히 시인의 반열에 자리매김 하게 됨은 물론
이 후 목사님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시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85년 8월 함석헌 선생님께서 퀘이커 세계협회 종교대회 참석 차

멕시코와 미국, 카나다를 방문하시던 중에 함 선생님과 친분이 아주 두터운 목사님 한 분이

북한을 방문하고 함 선생님의 친종손을 만났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손자가

할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연이 적힌 편지와 가족 사진을 함 선생님께 전달한 적이 있다.

함 선생님으로서는 근 45 년 여 만에
가족의 생사여부와 근황을 접하게 된 일이었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 목사님은 함 선생님 같은 분이 당당하고도 공개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다시 떳떳하게 한국으로 돌아 와야 비로소 총칼로 가로막힌 남북한 사이의 담을 헐어서
화해하게 하고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함께 북한을 방문하자고 막무가내로 권면했단다.

강권을 뿌리치고 그 해 연말 미국에서 돌아 온 함 선생님은
비밀하게 나를 불러 친손자의 편지와 북한에 있는 가족 사진을 보여 주시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저간의 일들을 내게 말씀해 주셨다.

얼마 후 내게 비밀히 이런 사연을 전해 들은 문 목사님은 무릎을 탁 치시면서

함 선생님을 영원히 살리고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다시면서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게 흥분해 마지 않으셨다.

그 후 문 목사님과 나는 함 선생님의 당당하고도 공개적인 방북에 대해
비밀스럽게 의견을 나누어 왔다.

하지만 이 일은 성사를 이루지 못한 채
함 선생님은 병고를 겪고 1989년 2월 4일 끝내 운명하셨다.


▲ 함석헌 선생님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 ~ 1989년 2월 4일)

함 선생님이 운명하시던 날 문 목사님은 나를 붙들고
이제 우리 민족의 큰 어른이시자 스승이 통일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셨으니
누가 그런 소임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면서 하염없이 울먹이셨다.

나는 오히려 문 목사님을 위로하면서
이제 그런 역할을 감싸 안고 감당하셔야 할 분은 문 목사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보름만인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님은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두차례 회담하여 통일 3단계 방안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셨다.


▲ 방북 중 문익환 목사님과 김일성 주석


결국 문 목사님은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고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한편
한국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잠입죄’로 투옥되셨고
1990년 10월 2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후 공안정국을 조성한 정부에 의해
1991년 6월 6일 재수감되고 이후 1993년 초 석방되신다.


다시 말머리로 돌아가

1986년 5월 20일 문익환 목사님은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셨다.

석방되시는 날 나는 당연히 교도소로 마중을 나갔어야 마땅한 일이거늘
석방 후 여러 날이 지나도록 먼저 찾아 뵙지를 못하고 뜻밖에도 목사님께서 오히려 먼저

안부를 여쭈면서 우리집 근처에 오셔서 서성이고 계시다니 몸둘바없고 말이 아닌 꼴이 되었다.

목사님 계신 곳으로 달려 나가 보니
한창 건축 중인 우리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계셨다.

집을 헐어서 다시 짓는 중이라고 설명드리고
임시로 거처하는 집으로 모시고 왔다.

박혜숙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지나다가
이렇게 불쑥 찾아 오게 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혜숙의 몸 상태와 그간의 과정을 말씀드렸다.
문 목사님 주재로 예배를 드렸다.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다보니
문 목사님은 우리 어머니와 동갑내기시다.

두 분이 고향 얘기며 집안 얘기를 나누신다.
문 목사님은 북간도 용정이 고향인데
사모님이신 박용길 장로님이 함경도이시다.

어머니 고향이 함경도 함흥이시고 어린 시절을 블라디보스톡에서 보내셨다.
함경도에서는 가장 역사가 깊고 제일 큰 초대 교회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외할아버님은 명예롭고 편안한 직임을 마다하시고 선교사를 자청해
우리 나라 목회자로는 처음으로 소련 땅 불라디보스토크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다.

어머니가 한 때 성장했던 불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나라의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활동했던 곳이다.

거기에서 어머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셨다.
큰오라버니는 고등보통학교에 다닐 적부터 독립 운동에 심취해서 활동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함흥으로 돌아와 함경도에서 제일 역사가 깊고
외할아버님이 담임하시던 함흥 중앙교회 소속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셨다.
그리고 함남도립간호전문학교를 나오셨다.

졸업 후 원산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던 어머니는
1940 년 결혼하면서 아버님 근무지를 따라 북간도로 가셨고
그곳에서 3 년 여 사시다가 1943 년 서울로 나오셨다.

문익환 목사님의 선친께서도 목사님이시다.
선친이신 문재린 목사님은 북간도와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셨다.

제씨 되는 문동환 박사도 목사님이시다.
문동환 박사님은 일찌기 내가 대학에 다닐 적부터 우리를 지도해 주셨다.

문 목사님과 나의 어머니는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신다.
내가 잘 모르는 그 당시 상황과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되짚기도 하신다.

그러더니 서로 생일을 물으신다.
어머니는 1918 년 5 월 1 일 생이시다.
문 목사님은 한 달 늦은 6 월 생이시다.

동갑내기란게 그리도 반갑고 할 얘기가 많으신건지...
하긴 파란만장했던 민족사의 지나온 발자취를

동시대를 살아 왔던 분들이 만나서 되돌아 볼 때
한도 없고 끝도 없겠지 싶기도 하다.

문 목사님은 정말로 오랜만에
낯선 동갑내기 여인을 만나는 느낌이
이제까지 생사도 모르고 소식도 알 수 없던
그 옛날 옛적 소꿉 동무를 만난 기분이라고 했다.

어머니도 그러셨을까......
문 목사님이 자리를 일어 서시자
어머니는 나와 함께 문밖 골목 저편까지 나가
목사님을 배웅하고 차제에 공사 중인 집을
한바퀴 둘러 보신다.

 

 

 

95. 시련은 떠나지 않고

 

 

혜숙이 안마를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될 무렵이다.
갑자기 숨이 차 오른다고 했다.

숨을 못 쉬겠다며 입으로 허연 거품을 품어 냈다.
혜숙은 결혼하기 전에도 몸이 찬 편이었다.
가끔가다 손발이 저린다고도 했다.

혜숙은 처음에 오른쪽 눈꺼풀이 자꾸 내려 앉아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안과 병원을 찾아 다녔다.

종로 1 가 공안과에서는 우선 약을 복용하고
반응을 좀 지켜 보자고 했다.

영등포 김안과 병원으로 갔다.
역시 마찬가지로 좀 지켜 보자고 한다.

그러는 동안 혜숙은 안면이 저려 온다고 했다.
입술이 뻗뻗하게 마비된다고 한다.

말할 때마다 침을 흘리면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비 증세가 점점 목으로 안면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호흡 곤란까지 오게 되었다.

응급차에 싣고 한양대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원에서는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있었느냐면서
당장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암이 퍼져서 그런게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제발 그것 만은 아니기를 바라고 기도했다.

진찰 결과 중증근무력증이라고 한다.
근무력증은 세포와 세포를 이어 주는 신경이
마비되어 나타나는 병이란다.

처음에는 대개 눈꺼풀이 내려 앉으면서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환자들이 안과를 먼저 찾는다고 한다.

의식은 있어도 숨 쉴 수 있는 기력이 없을만큼
온몸이 마비되기도 한단다.

심한 경우 호흡 마비에까지 이르르면
순식간에 사망으로 이어 질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란다.
혜숙이 바로 그런 상태에까지 와 있단다.

혜숙은 산소호흡기가 갖추어져 있는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근무력증으로 인해 가슴 부위가 마비되어
자기 힘으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숙을 중환자실로 옮기는 데
장정 3 명이 달라 붙어도 들어 옮기기 힘들어 했다.
온몸이 마치 시체처럼 쫙 뻗고 굳어버린 탓이다.

숨을 쉬지 못하면 사람은 곧 죽고 만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말하는데
혜숙이 바로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혜숙은 잠을 자다가도 마비가 오면
가슴과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때면 중환자실에서도 응급 간호사가 달려들어
기도 확장 주사를 놓아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시간이 1 ~ 2 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혜숙은 그 사이를 견딜 수 없어
병실 건물에서 뛰어 내려 죽고 싶다고 했다.

한 번은 실제로 창문에 매달리고 흔들어 대면서
뛰어 내리려 발버둥을 쳐댔다.

기도 확장 주사를 맞으면 사람이 죽기 전에
오공에서 냄새 고약한 분비물이 새나오듯
그렇게 소변이며 분비물이 자꾸 나온단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숨을 쉬고부터
혜숙은 안정을 되찾은 듯 했지만
침대 시트에 오줌을 싼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환자의 마지막 모습
마지막 순간처럼......

하지만 의사들은 의학 기구가 현대화되고 발달해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한
중증근무력증으로는 쉽게 죽지 않는다고 했다.

호흡마비가 오더라도 산소호흡기를 사용하면
심장 괴사를 막을 수 있다는 거다.
그리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의사의 말에 큰 위안을 받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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