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우리 민족의 식생활

 

 

냉온욕을 실습하고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돌아오니
장 선생은 목욕 후 1 시간 동안은 풍욕을 쉬어야 한다면서도
우리에게 이야기를 계속한다.

우리나라는 오랜 옛적부터 가축을 길러 왔지만
잡아 먹기 위해서 기르는 경우는 드물었단다.

곡식과 채식을 위주로 식생활을 삼아 왔고
고기는 명절이나 특별한 잔치날 등
1 년에 서너 차례 정도 먹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수천년 동안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까
우리의 신체도 그런 조건에 알맞게 맞춰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체를 보면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다.
대개 상체에 비해서 하체가 짧다.

채식하는 동물들이 허리가 길단다.
허리가 긴 것은 장이 길기 때문이란다.

채소와 곡식을 흡수하고 소화해서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한 다음에 배설하기 위해서는
장이 길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허리가 길다는 것이다.

또한 채소나 곡식은 소화되는 과정에서
독소가 별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장에 오래 머물러 있어도 큰 피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기처럼 단백질과 지방질이 많은 음식물은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고
분해되는 과정에서 독이 많이 발생한단다.

그러므로 육식을 할 경우
소화하고 흡수하고 배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빨라야 하는데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그에 알맞게 장이 짧아야 했다는 것이다.

장 선생의 이야기는 종횡무진으로 거침없이 이어진다.

요즈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염려스러운 게
한 두가지가 아니란다.
우선 몸이 허약하고 참을성이 없고 이기적이라는 거다.

조금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린단다.
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처럼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한단다.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어 가는 건가?
부모의 과잉 보호 때문이란다.

강하게 키워야 하는데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부모들이 매를 들거나
따끔하게 타이르지를 않는단다.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생활 환경에 문제가 있어서란다.

요즈음 어머니들은 아이를 출산할 때
정상 분만이 가능한 경우라도 대부분 제왕절개를 한다.
아니면 촉진제를 맞거나 흡인기로 뽑아 내기도 한다.

수술로 칼을 대고 약물을 투입하고 흡인기로 뽑아 내고 하니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단다.

더우기 아이들은 엄마 젖을 먹고 자라야 하는데
대부분 우유에 의존하고 있다.

우유는 송아지 먹거리다.
소가 유순하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동물이고 짐승이다.
사람보다 지능이 떨어지고 셈판이 없으며 포악하다.

송아지 먹거리를 아기 인간이 먹고 자라는데
셈판없고 포악해 지는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엄마 품에 안겨 엄마 젖을 먹으면서
엄마로부터 따뜻한 정을 듬뿍 받고 자라야 할 아이가
혼자서 벌렁 누어 플라스틱 젖병을 저 혼자 쥐고
소 젖을 빨아 먹고 자라야 하니
아이가 장차 어찌 되겠는가?

유아기를 지나 아동기에 접어 들면서도 마찬가지란다.
요즈음 아이들은 우유와 라면, 과자, 빵, 햄 소시지 등등
가공 식품들을 주로 먹고 자란다.

사랑과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기계가 만든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자란다.
우리 사회가 점점 포악해 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동물들도 일반적으로 육식 동물은 성질이 포악하고 급한데
채식 동물은 느긋하고 유순한 경향이 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육식을 위주로 하는 서양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동적이고 공격적인데 비해
채식을 위주로 하는 동양 사람들의 정서는 정적이고 온순하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이 곧 보약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순환계의 원리에 따라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에 맞는 음식을 조절해서 먹었다.

여름이면 찬 음식인 보리밥으로 내장을 서늘하게 조절했다.
수박, 참외, 포도 등 과일도 모두 더위를 이겨내도록
조절하는 차가운 먹거리다.
겨울이면 쌀밥과 고춧가루, 무, 김치 등으로 몸을 보호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 음식에는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 온
조상들의 비법과 혼이 깃들어 있다.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고유의 음식으로
건강을 지키며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토불이다.
조상들의 식생활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그야말로 거침없고 숨쉴새 없이
종횡무진으로 끝도없이 이어지는 장 선생의 이야기는
점심상이 차려졌다는 전갈을 받고도
식사가 차려진 안방으로 건너 가는 중에도
식사 중에도 계속된다.

된장과 고추장, 제철에 난 각종 야채
현미 잡곡밥 등등으로 상이 가득하다.
김과 조개젓, 고등어구이 등
바다에서 나는 음식도 곁들여 있다.

상추와 깻잎쌈에 삼겹살이나 소고기를 얹고
싸 먹는 일이야 흔하지만
나는 거기에 생선을 얹어 싸 먹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생선은 비린 음식이라서
그냥 밥과 함께 따로 먹는 것인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 선생 댁 식구들 모두가
고등어구이를 야채쌈에 싸 먹는 것을 보고
나도 그렇게 따라 해 보았다.

선입견으로는 야채쌈에 배어 있는 물기와 생선기름이 섞여서
느끼한 비린내가 역겨움을 더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맛이 그렇게 고소하고 쫄깃쫄깃하면서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로부터 10 여 년 후에
간호사로 아내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처제가
아내와 똑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또다시 아연 긴장했다.

그 때 혜숙의 수술 주치의였던 김용일 박사는
삼성병원으로 옮겨 있었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처제는 십 수 년간 근무하던 한양대 병원을 휴직하고
삼성병원에 입원해서 김용일 박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처제는 항암제 치료와 방사선 치료 과정을 온전히 끝마쳤다.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처제는 내 주선으로
산 좋고 물 좋은 충북 제천군 백운면 도동계곡 마을에서
자연 건강식으로 생활하는 가정에 요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장 선생 댁에서 야채쌈에 싸 먹던 맛을 떠올리면서
처제를 방문할 때마다 얼음에 재 놓은 고등어를
여러 박스씩 차에 싣고 갔다.

첩첩산골 도동계곡 마을에서
제철에 난 각종 야채와 알맞게 구운 고등어를 싸 먹는 맛은
역시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장 선생 댁 식구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끼니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밑반찬과 국, 찌게류 등등을
나는 유심히 살피고 맛을 보았다.

하지만 혜숙은 그 싱싱하고 맛난 음식들을
어느 것 하나에도 맛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먹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속에서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잘라 낸 위를 대신해서 장으로 연결해 놓은 부위가
아마도 제 역할과 기능을 전혀 못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맴돌면서 마음이 불안해 진다.

함께 식사하는 이들 모두가 긴장하면서
혜숙이 무엇을 먹는지 얼마만큼 먹는지를
은연 중에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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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죽염과 생수

 


장 선생은 중간중간 우리가 풍욕하는 시간을 빼고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말씀을 이어간다.

우리 조상들이 소금을 볶아 먹고
죽염을 만들어 먹었던 것에서
우리는 참으로 조상들의 먹거리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단다.

소금에는 인체에 유익한 각종 유기물질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서해의 바닷물과 햇빛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천혜의 양분이 들어 있단다.

하지만 소금에는 인체에 해를 끼치는
무서운 핵비소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 핵비소를 제거하고
인체에 유익한 물질만 남기기 위해서
볶은소금과 죽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죽염은 서해에서 얻은 토반염을
대나무에 넣어 황토흙으로 막고
소나무 장작불로 아홉 번을 구어서 만든 것이란다.

이 과정에서 핵비소는 대나무 속의 유황정과 화합해서
약성만 남게 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소금은
악성 종양 등 인체 내의 극심한 염증을 바로고칠 수 있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는 것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그는 조상들의 지혜 또한 놀랍단다.
천연 소금을 장독에 담고 햇볕에 쪼여서
핵비소를 중화시키는 데다가
콩과 밀가루 등의 곡식을 섞어 만든 간장, 된장, 고추장은
최상의 염분과 단백질을 지닌 보약 식품이란 것이다.

암 환자들은 특히 생수를 많이 마셔야 한단다.
끓인 물은 산소를 비롯해서 인체에 유익한 물질뿐만 아니라
생수의 생명력인 기(氣)가 없어져 버린단다.

우리 사회에서 기생충과 전염성 질환이 크게 번졌을 때는
물을 끓여 먹어야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단다.

끓인 물을 화초에 계속해서 뿌려 주면
화초가 자라지 못하고 시들시들하다가 결국 죽고 마는데
이는 생수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생물이 자라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되는 것이란다.

생수를 자주 마시고 또 많이 마시기 위해서는
늘 생수병과 죽염을 가지고 다니란다.
물이 안 먹힐 때는 맛이 짠 죽염가루를 입에 넣고
물을 마시라는 거다.

물을 끓여 먹기 보다는 수돗물을 그냥 먹는 게 좋단다.
생수를 구하기 번거로우면 수돗물을 정수해 마시란다.

장 선생 댁 거실에는 커다란 정수기가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정수기가 그리 보급되지 않을 때여서
가정에 정수기를 들여 놓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장 선생은 혜숙의 병을 고치려거든 무엇보다도
집에 정수기를 꼭 들여 놓으라고 한다.

나는 죽염과 생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리가 있겠다 싶었다.

어렵거나 힘든 일도 아니고
굳이 시간을 더 쪼개거나 맞추어야 되는 일도 아니고
아무튼 우리는 가급적 죽염과 생수를 자주 먹고 마시기로 했다.

하지만 생수를 구하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수기를 구입하려 해도 가정용으로 나온 것이 없을 적이다.
마침 청주에서 사업하는 대학교 후배 노영민(전 국회의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식당용 정수기를 보내 주었다.

이후부터 십 수 년 동안 정수기는
언제나 우리집 냉장고 옆에 자리하면서
우리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과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혜숙은 늘 죽염을 가까이에 준비해 두고 있었다.
몇 년이 흐른 뒤 정수기는 모든 가정의 생활 필수품이 되었고
생수는 어느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음료수가 되었다.

죽염으로 만든 치약이 등장하면서
나는 그것을 특별히 애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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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우리 옷 문화와 민족 의학

 

 

우리는 하루 종일 풍욕하랴 운동하랴 냉온욕하랴
그것도 모자라 마그밀을 복용하면서
화장실에 시도때도 없이 드나들랴
쉴새없이 들려오는 장 선생의 말씀 들으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스스로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따라하기 바쁘다.

이튿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풍욕하고
냉온욕 실습하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장 선생 댁에 들어 선다.

우리도 그만 좀 쉬었으면 좋으련만
장 선생은 우리의 절박한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그런 건지
아직도 믿고 따르지 못하는 우리 마음을 읽고
아예 더세게 내갈겨서 말뚝을 콱 박아 두려고 그런 건지
돌아오자마자 우리에게 오더니 쉴틈없이 이야기한다.

우리 선조들의 옷 문화는 자연 건강법과 관련이 깊단다.
여성들의 장신구인 은비녀를 보더라도
은(銀)은 해독 작용이 강한 물질이란다.

장신구이면서 동시에 해독 작용을 이용한 건강법에서
유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경우에 대님을 찼는데
혈액순환과 치질 예방에 발목을 묶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요법이 없단다.

요즈음 각종 난치병이 급증하고 있는 원인이
나일론 등 화학 섬유에 꽉 조이는 옷을 입는 데서 생기는 경우도 있단다.

화학섬유는 공기를 차단해서 피부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되고
이것이 각종 피부병의 원인이 된다는 거다.

피부는 호흡과 배설 작용 등으로
우리의 건강에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데
이런 피부를 꽉 조이는 옷으로 감싸고 밀폐시켜서
온전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우리 민족 전통에 도무지 맞지 않는 서구식 옷 문화를
무분별하게 도입한 결과로 말미암아서
많은 부작용이 따르고 있단다.

신발도 사람의 발 구조에 맞아야 하는데
사람들의 발은 13 도 각도로 되어 있고
이 각도에서 활동하기도 가장 편하게 되어 있단다.

그런데 하이힐을 신게 되면 발의 각도가 비정상으로 높아져서
자궁의 위치가 비틀어지게 되고
현대 여성에게 자궁암이 많은 원인 중에 하나도
바로 이 하이힐 때문일 것이란다.

여성들이 애용하는 화장품도
요즈음 생산되는 것들은 대부분 계면 활성제를 쓰는데
그처럼 독한 약물질을 피부에 직접 묻히고 발라서
피부를 공기와 차단시키고 피부호흡을 방해하니까
얼굴에 피부병이 생기는 것이란다.

옷을 헐렁하게 입고 속옷이라도 반드시
천연섬유로 만든 옷을 입어야 한단다.

우리 옷 문화를 되찾는 것이 바로 건강을 찾는 일이고
이는 서구식 옷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단다.

장 선생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횡무진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혜숙과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풍욕을 하기 위해 녹음기를 옮겨 놓는다.

그제서야 장 선생은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나" 하면서 자리를 물리신다.

혜숙과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옷을 벗는다.
경쾌한 음악과 맑은 목소리에 따라 풍욕을 실습한다.

풍욕을 하면서 나는 혜숙과 의논한다.

장 선생은 최소한 보름 정도는 치료를 받고
교육과 실습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병원에 가서 매일 받아야 하는 방사선 치료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가 끌려 내려 온 것이 금요일 오후이고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서
방사선 치료를 계속해서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혜숙은 걱정이 앞선단다.
장 선생이 저토록 열성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지도하시고
더군다나 방사선 치료를 핵폭탄 쏘이는 거라면서
펄펄 뛰고 계신데 우리를 쉽게 놓아 주겠냐는 거다.

나는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다시 와서 치료를 받겠다 하고
정히 안 되면 도망이라도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풍욕이 끝나고 옷을 추스려 입자마자
장 선생이 다시 우리 방으로 들어 선다.

그리고는 특히 중한 암 환자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풍욕에 철저히 매달려야 한다면서
풍욕의 효과와 효능, 사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 간다.

나는 적당한 분위기에서 말머리를 돌려 놓고
우리의 이야기를 했다.

방사선 치료를 매일 3 주간 동안 받고 이제 2 주가 남았는데
여기에서 의학적 노력을 포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짜피 쉽지 않은 몸을 이끌고 받기 시작했는데
심리적으로도 그렇고 방사선 치료 과정을
일단 끝마쳐야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가야겠다고 했다.

장 선생은 내 얘기를 듣더니 낯빛이 달라지신다.
그러니까 암 환자 가운데 의사와 약사가
제일 골치를 썩인다고 했다.
치료하는데 제일 말을 안 듣는 집단이란 거다.

서양의학은 우리 몸의 병을 무려 17 만 여 가지로
구분해 놓고 있단다.

하지만 민족의학에서는 병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라는 견해에서 출발한다는 거다.

서양의학에서 소위 '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민족의학에서는 우리 몸이 음과 양의 부조화로 인해서
잠시 균형과 질서를 잃게 되었을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자연치유력이 작용하고 있는 상태와 그 현상으로 본다는 거다.

서양의학은 시체를 해부하고 실험하고 연구하면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인체를 부분적으로 해석하고
아픈 부위나 증상에 따라 병명을 제각각 다르게 붙이면서
서로 다른 처방으로 치료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병명에 따라서 진료 과목을 만들고
그때마다 전문의를 두어서 치료를 전담하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민족의학에서는 인체 조직을
마치 생명이 없는 시체나 기계의 한 부속물처럼 다루는
국부치료법으로는 결코 병을 완치시킬 수 없다고 본단다.

민족의학에서는 우리 몸을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치료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나중에 전해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 날, 장 선생은 광주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나를 좀 설득해 달라는 취지로 두루 전화를 하셨단다.

어쩐지 그날 저녁, 장 선생은 나에게 만나 볼 사람이 있으니
밖에 나가서 저녁 식사를 하자신다.

혜숙은 실습을 계속하도록 남겨 둔 채
나는 장 선생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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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발물 요법

 

 

그 날 이 강은 장두석 선생에 대해
민족생활의학을 일구어 내고 일으켜 세운 의인(醫人)이요
우리 민족의 민주사회 운동을 이끌고 실천하는 의인(義人)이라고
거듭 강조해 마지않았다.

나는 장 선생에 대한 신뢰가
이렇듯 절대적이다시피 할 수 있는가 새삼 의아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서양의학을 포기하고 민족생활의학에 매달리는 길을
선뜻 선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지적 관심을 가지고 열과 성을 다해서
나와 혜숙을 간절하게 설득하려는 소중한 분들의 뜻을
단숨에 거절하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복잡한 심사로 주저주저하던 끝에
나는 아내와 좀 더 의논을 해 보겠는데
아무래도 마지막 선택은 혜숙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말로 은근 슬쩍 돌려 버렸다.

그 즈음해서 자리를 비웠던 장 선생이 돌아 오셨다.
아마도 본인의 면전에서 하기에는
민망스런 이야기일 수밖에 없어 자리를 피하신 듯했다.

내게서 더 이상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 없자
자리를 함께 한 이들 모두 시무룩하고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분위기도 어색해졌다.

오랜 만의 해후를 마치고 장 선생 댁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장 선생께 아무래도 내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 갔다가
다시 찾아 뵈어야 되겠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니 혜숙은 녹음기를 틀어 놓고 풍욕하고 있다.
나는 혜숙에게 밖에서 문병란 선생과 이 강을 만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나눈 일들을 말해 주었다.

풍욕이 끝나자 장 선생이 기침을 하며 들어 오신다.
장 선생은 굳이 다음 날 올라가겠다면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우선 급한대로 몇 가지 실습할 일이 있다면서
발물 요법에 대해 설명한다.

섭씨 40 도 되는 더운물을 양동이에 담고 의자에 걸터 앉거나 누어서
발을 무릎 아래까지 잠기도록 물 속에 넣는다.
무릎 위로는 얼굴만 남기고 몸 전체를 담요로 덮는다.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더운물이 식지 않도록 계속 부으면서
물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물의 온도를 조금씩 올려 가면서 20 분 정도 지나면
물에 잠긴 발이 시뻘겋게 변하면서 온몸에 땀이 흐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각탕이라고도 하는데 20 분 후에는
발을 찬물에 2 ~ 3 분 정도 담근 다음 발을 꺼내 물기를 닦아 내고
땀이 다 나올 때까지 몸을 덥게 하고 계속 누어 있는다.

발물 요법 후에 몸이 너무 덥다고 갑자기 몸을 식히거나
바로 옷을 바꿔 입어서는 안 된다.

이 발물 요법은 냉해지기 쉬운 하체의 혈액 알칼리도를 높이고
동시에 발한(發汗)을 촉진하는 방법이란다.

또한 고열이나 미열, 신장병, 불면증, 당뇨병, 감기, 기침 등에
좋다고 한다.

우리는 발물 요법을 실습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집에서 당장에 실행하기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듯했고
다리가 시뻘개지면서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린 다음
몸을 닦고 나니 그리 개운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혜숙과 나는 이 후에 가끔씩 각탕을 하곤 했다.

 

 

 

70. 된장찜질과 마고약

 

 

각탕 실습을 끝내고 쉴 사이도 없이
장 선생은 우리에게 찜질요법에 대해서 설명한다.

찜질은 민간 치료 요법으로 우리 나라에서 널리 쓰여 왔는데
몸 표면에 뜨겁거나 찬 것 또는 자극적인 물질을
일정 시간 동안 얹어서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요법이란다.

찜질에는 온도에 따라 더운 찜질과 찬 찜질이 있는데
더운 찜질은 주로 피부와 혈관, 림프관들을 확장시켜서
피와 림프액의 순환을 도와 주고
염증과 병균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단다.

찬찜질은 피부를 수축시켜서 피를 멎게 해 주는데
상처가 곪는 것을 방지하고 열을 내려 주며 통증을 덜어 준단다.

찜질에는 물찜질, 얼음찜질, 모래 소금 된장찜질, 진흙찜질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장 선생은 혜숙에게 우선 급한대로
된장찜질만 실습하잔다.

준비물은 왜된장과 복대, 온찜질팩, 거즈, 비닐, 반창고 등이다.
거즈 위에 왜된장을 덜어서 그 위에 비닐을 덮어 씌우는데
이때 된장의 너비가 30 ~ 40 cm 두께는 5 mm 되도록
손으로 판판하게 한 다음 모양은 복부에 올려 놓기 알맞도록
직사각형으로 만든다.

된장이 덮이지 않은 거즈의 나머지 부분을 안으로 접고
된장물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배꼽에 반창고나 두꺼운 종이를 바른 다음
거즈쪽이 복부에 맞닿도록 된장을 붙인다.

온찜질팩을 그 위에 올리고 복대를 고정시킨 다음
찜질을 시작한다.

된장찜질을 하면 열이 빠지고 변통이 생기며
호흡이 쉬워지고 복수가 흡수된단다.

그래서 복막염, 뇌일혈, 중풍, 폐결핵, 늑막염, 발열 등에
아주 효과가 있단다.

찜질을 하려면 보통 4 시간이 소요되는데
우리는 방법만 터득하기 위해서 2 시간 정도에 끝냈다.

이어서 모관 운동과 붕어 운동을 하고 풍욕을 한 다음
우리는 셋째 날을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에도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풍욕과 모관 붕어 운동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아침 식사 후에 장 선생은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배우고 익힌 것을 잘 시행하고 있으란다.

우리는 풍욕하고 합장합척과 등배 운동하고
다시 풍욕하고 냉온욕하고 풍욕하고 점심 식사한다.

오후 2 시쯤 되어서야 장 선생이 두툼한 짐가방을 들고 들어선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아무래도 오늘 떠나겠다는 결심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어제 밤 부랴부랴 급하게 부탁해서 밤새 만들어 놓은 마고약을
찾아 가지고 오는 길이라고 한다.

마고약은 산약인 마와 토란, 우리 밀가루, 볶은소금, 생강
등을 혼합해서 만든 것이란다.

장 선생은 우리에게 마고약 찜질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사용 방법은 된장찜질법과 비슷하다.

거즈와 비닐을 환부의 크기만하게 준비한다.
거즈 위에 마고약을 한두 숟갈 정도 덜어서 그 위에 비닐을 덮고
손으로 문질러 3 mm 두께로 납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거즈쪽이 환부에 닿도록 해서 5 시간 이상 붙여 둔다.
마고약이 말라버리면 효과가 없기 때문에
말랐을 때는 새로 갈아 주어야 한단다.

위암 환자에게 마고약만큼 좋은 것이 없단다.
마고약 찜질은 인체에 부작용이나 다른 어떤 부담도
전혀 주지 않으면서 방사선과 항암제 치료를 합친 것보다
효과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장 선생은 우리에게 방사선이나 항암제에 의존하지 말고
마고약 찜질에 매달려 보라고 마지막으로 신신당부 하신다.
특히 악성종양에 두루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된장찜질은 물기도 흐르고 냄새가 심해서 끝나고 난 후에도
목욕 할 때까지 온몸에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다시피한데
마고약은 냄새가 별로 없고
찜질하는 동안에 활동도 비교적 자유로워서 아주 편리하다.

혜숙은 마고약 찜질을 하면서 나와 함께 풍욕도 같이 한다.
마고약을 배에 찬 채로 우리는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차린다.

장 선생은 못내 안타깝고 아쉬워 하면서
자연 건강에 관해 참고할만한 서적 10 여 종과
반달형 나무베개, 마고약과 죽염, 볶은소금 등을 싸 주신다.

아직도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들에게 넣어 달라고
당신이 쓰신 책 50 여 권을 박스에 싸서
터미널까지 배웅 나와 배달로 부쳐 주신다.

우리는 3 박 4 일 동안
장 선생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일들을 곰곰히 더듬으며
서울로 올라 온다.

차창 밖으로는 5 월의 푸르름이 화창하고 싱그럽다.

 

 

 

69. 누어서 자는 게 소원



그 때 혜숙의 나이 34 살
여자로서 한창 젊디 젊은

어쩌면 미처 다 피어 보지도
맛보지도 못한 나이  

초등학교 3 학년 1 학년
갓 첫돌 지난 막내를 둔

세 아이의 엄마...

광주에 억지로 끌려 갔다 올라 와
방사선 치료를 받고
항암제를 맞는다. 

혜숙은 점점 더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한다.

물 한모금조차
삼키기를 힘들어 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마다
토해 내기 바쁘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먹은 것 없이도
헛구역질 해 대며 계속 토한다.

머리털은 뭉텅뭉텅 빠지고
곁에 화장지와 휴지통을 끼고 산다.

내장 속에 쓰디쓴 쓸개액과
아직 남아 있는 액체란 액체 

모두 입으로 토해져 올라오면서
혜숙은 더욱 고통스러워 한다.

식도와 콧잔등이
헐대로 헐고 망가져서
얼마나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던지

방바닥에 떼굴떼굴 나뒹굴며
고통을 호소한다.

학생 시절 
나를 그토록 따르고
사랑하던 혜숙이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하고
옥바라지 하던 여대생

그 여인을 두고서
' 앞으로는 내가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
결심하고 결혼했는데

이제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 해 볼 도리 없는 상황으로
점점 가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5 월 5 일
혜숙은 갓 돌 지난 막내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야외에 나가 보고 싶단다.

기왕이면 이대 민주동문회가 주최하는
어린이날 가족 행사가 있으니
같이 참석하잔다.

스스럼없는 동창 선후배들이 모이는 자리에
막내는 그렇다치고

나와 시어머니까지 
온 가족을 함께 동행하고 싶어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혜숙이 죽더라도 
철모르고 자랄 막내를
잘 지켜 봐 주고

자식들을 키워 줄
남편과 시어머니를 
스스럼없는 동창들에게
잘 부탁하겠다는 의미는 아닐까?

혜숙이 죽음을 준비하느라고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면서
몸서리쳐 진다.
. 
아내를 온전하게 지켜 내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선지

혜숙의 동창 선후배들과 그 가족을
집단적으로 만나기가 조금은 거북하다.

하지만 막내에게
무슨 기억 하나라도 더 남겨 주려는

엄마로서의 간절한 소원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혜숙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그날 혜숙의 동문들은
우리 가족이 나타나자
기대하지도 못한 일이라면서
반가워 어쩔줄 모른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서오능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엄마와 막내가 함께 노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보내 주기도 한다.

혜숙은 똑바로 누어서 잠들지를 못한다.

수술 중 위에 붙어 있는 횡경막도 함께 잘려 나가
구토하면서 올라 오는 걸 막아 주는 기능이 없어진 것이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 오면 
몸을 일으켜 앉아서 내려 보내고
가라 앉으면 다시 눕곤 한다.

앉았다 누었다 하기가 더 힘이 드는지
밤에는 아예 앉아서 잠들곤 한다.

혜숙은 앉아서 자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단다.

맘 편히 누어서 자 보는 게
그렇게 소원일 수가 없단다.



 

70. 미움과 증오와 저주


 

물 한 모금 먹어도 토하고
급기야는 침까지도 삼키지 못한 채
입 밖으로 질질 흐르는 모습...

머리털은 거의 다 빠지고 
핏기 없이 창백한 몰골...

혜숙은 암 환자의 마지막 모습으로
점점 변해 가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
건강한 것에 대한 증오도 나온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할 때면 
혜숙은 철딱서니 없는 미운애기처럼
공연히 짜증을 부린다.

밥을 꿀꺽 넘기는 소리 
수저와 밥상이 톡톡 부딪치치는 소리
김치 씹는 사각사각 소리 등등

평소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기억에 남겨 두려고 해도 더듬어지지 않는 소리 따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화를 낸다.

함께 식사를 하다가도 느닷없이
“그래! 맛있게 잘들 먹어!”
하고 신경질을 부리며 옆방으로 나가 버린다.

나와 시어머니를 대하는 표정도
점점 미움과 증오로 변해 간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배배 꼬인 꽈배기처럼 뒤틀려 나타난다.

언젠가는 내가 물 한 사발을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데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을 느껴
돌아 보니

혜숙이 증오서린 눈길로
나를 노려 보고 있다.

원혜영이 개발해 가져 온 야채 엑기스와 현미효소
김영인이 지어 준 보약
최정순이 한약재를 넣어 삶아 보내 준 개고기
연구원 식구가 보내 준 장어탕 등등

몸에 좋다는 음식과 보약을 버리기 아깝다며
한사코 시어머니께서 드시라 하고서도
막상 시어머니가 드시는 것을 보고는
얄미워 한다.

말 마디마디마다 평소처럼
정상적이지 않고
배배 꼬인 투로 변해 간다.

" 내가 싫지? 지금 내가 귀찮아 죽겠지? 피곤하지?
내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지? 그렇지?"

사실 나는 혜숙이 그럴 적마다
정말 피곤했다.

혜숙이 저토록 고통스러워 하니
나무랄 수도 없고

사랑하는 가족에게까지 이러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겐
정말 보여 주기 싫었다.
  
" 내가 죽을 것 같애? 나 안 죽을 꺼야! 
내가 살만큼 살다 죽을 꺼라구! "

신경질은 점점 더 날카로워 진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한 모습 자체를 미워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자기 혼자만이 겪고 있는 현실을 

혜숙은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죽어 가는 암 환자의 심리 상태에서 두 번째 단계를
혜숙은 예외 없이 겪고 있는 것이다.

너는 멀쩡하고 아무 걱정 없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어야 하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거부하고 부정하는
첫 번째 단계로 가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과 거부
증오와 저주가
뒤섞여서 나타나기도 한다. 

 

 

71. 사람 사람들 ㅡ 올곧은 사나이 설 훈

 


이 글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기록한 내용들을
가만히 되돌아 보니

내가 감옥에서 출소한 날부터
어린이 날까지...

그러니까 22 일 동안에 벌어 진
파란만장한 편린들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끝도 한도 없을 것 같다.

한 장면 한 장면 모두가
소중한 느낌이고 경험들이지만

이제 잊을 것은 잊고
지울 것은 지우고
버릴 것은 버려야겠다.

많은 이들이 혜숙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소식을 전하고 직접 찾아 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주위 분들에게
우리 집에 방문하는 일을
삼가하도록 부탁했다.

혜숙이 온종일
풍욕과 냉온욕, 마고약 찜질 등에
열중하고 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꺼려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데는 어쩌랴...

아주 지워 버릴 수만은 없는
방문객 두 경우만 더듬어 기록해 본다.

5 월 중순 경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있는 설 훈이
연락도 없이 집으로 찾아 왔다.


▲ 국회의원 설훈


설 훈은 마산 출신으로 70 년대 후반
고려대에 재학 중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9 호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그 후 80 년 5 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또다시 구속되었다.

함께 연루된 이들 가운데 나이가 어려 막내뻘이던 설 훈은
그 서슬퍼런 군법회의 법정 재판 과정에서 주눅들지 않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을 향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강렬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사나이 설 훈은
지역 연고와 배경 등이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부터 김대중 총재 비서와 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오로지 한 길로 향해 왔다.

설 훈은 1983 년 고려대 출신을 대표해서 나와 함께 민청련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고
내가 맡고 있던 운영위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85 년 2 월 12 일에 실시되는 제 12 대 국회의원 선거 대응 방침을 둘러싸고
견해 차이로 문제가 생겼다.

당시에 전두환 정권은 한 선거구마다 두 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 제도에서
집권 정당인 민정당이 목표하는 의석수를 무난하게 달성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야당이었다.
제 1 야당인 민한당은 정치 지도력이 애매모호하고 선명성도 부족했다.
전두환 정권과 집권 민정당의 2 중대라 불리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영삼 씨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김대중 씨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정치 사회적으로 절망적인 풍토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많은 후배들과 학생운동 진영에서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민주화보다도 혁명적 변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박정희의 5. 16 쿠데타와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 쿠데타가 10. 26 사건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12. 12 와 5. 18 로 이어지는 전두환 군부 중심의 쿠데타가 우리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적 권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적 절차를 가장한 국회의원 선거가 역사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일제 강점기 36 년 해방 이후 1 년도 채 안 되는 장면 정권을 빼고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30 년 여 독재 권력... 이어서 계속되는 전두환의 군부 독재 권력을
과연 민주적 절차로, 평화적으로 바꿔 낼 수가 있겠느냐는 거다.

한편으로 김영삼 김대중 씨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민우 씨를 총재로 내세워 신민당을 창당하고 후보 전술을 통한 절차적 변화를 모색 해 갔다.

신민당의 출현과 김영삼 김대중 씨의 정치 지원 활동으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대결의 분위기가 크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청년 운동을 대표하던 민청련에서는
후보 전술에는 반대하는 대신 군사 독재 정권을 물리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 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정치 사회 세력과
함께 연대해서 싸워 나가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 때 신민당에서는 설 훈에게 서울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분들도 설 훈에게 출마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설 훈은 고심하던 끝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민청련에서는 설 훈의 출마를 반대했다.


민족민주 운동의 정통성과 도덕성 선명성을 대표하는 민청련의 중요 간부가
정당에 가입하고 정치 일선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설 훈은 이에 맞서 민주화 운동 세력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해서
대중 정치 역량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민청련에서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설 훈을 제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당시에 나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새벽에 설 훈을 만나 설득했다.
그 날 아침 민청련은 사의를 받는 형식으로 설 훈을 면직시켰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전략 선거 지역이었던 성북구에는 설 훈 대신 이 철이 출마하게 되고
설 훈은 내게 퍼붓던 말 그대로 이 철을 당선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발벗고 나서서 열성을 다 했다.


서울 성북구에서는 민정당 김정례, 민한당 조윤형, 신민당 이철이 출마했다.
김정례는 여성계의 대표적인 이물로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조윤형은 해방정국과 자유당 정권 때의 정치 거물 조병옥의 아들로 민한당의 중진이었다.


이에 맞서는 이철은 나와 함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었다.
이철은 자신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심하던 중
선거 포스터 문구를 "돌아온 정치 사형수"로 했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이 문구에 의해 이철에게는 신민당이라는 참신한 정당 소속에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의로운 투사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저항의 불씨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이민우는 정대철을, 이철은 조윤형을 물리쳤다.


이는 유권자들이 당시 제1야당인 민한당을 버리고

신민당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서울 전체를 보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은 전원 당선되었다.

반면 민한당은 강남구 단 1곳에서만 당선되는데 그쳤다.

강남구에서는 민정당이 낙선하고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되었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득표율이 민정당보다 15% 더 많았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압도적인 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민정당은 35.2% 신민당은 29.3% 민한당은 19.7% 국민당은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민한 두 야당의 득표율이 집권 여당보다 14% 앞섰다.
내용적으로는 민정당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 지각변동의 첫 파도는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여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이었다.


민한당은 결국 단 3명이 남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다음 13대 총선에서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철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당당하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때 어쨋거나
설 훈의 정치적 등장과 성장의 기회를
다치고 잘라 내는 악역을 맡았던 셈이다.

설 훈이 우리 집에 문병 오던 때
그는 동교동 자택에서 기관원에 둘러 싸여 연금 중이던
김대중 선생의 비서역을 맡고 있었다.

설 훈은 김대중 선생과 이희호 여사께서 형수가 위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계시고
" 병마에 쓰러지지말고 싸워서 꼭 쾌유하기를 바란다"
는 말씀을 전해 달라셨면서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나는 김대중 선생이 오랜 세월 투옥과 망명과 가택연금으로 생활 형편도 그리 만만치 않으실텐데
성의는 고맙게 받겠지만 봉투는 도로 가져가서 더 요긴한데 쓰시도록 해 달라고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설 훈은 보내신 분 뜻도 있는 거니까 약소하지만 형수님 치료비에 보태셔서
건강을 빨리 회복해야 될 꺼 아니냐면서 다시 내민다.

이 때 곁에 있던 혜숙이 느닷없이 소리를 지른다.

" 훈이 씨! 내가 암이라고 곧 죽을 것 같애?...
나 이 돈 없어도 안 죽어!...
나 그냥 내버려 두고 이거 필요없으니까 도루 가져가라구!..."

설 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이없어 한다.
그러다가 이게 웬 봉변이냐 싶던지 무안해 어쩔줄 몰라 한다.

" 형수요! 뭔 말을 그리 하요! 이 돈이 무슨 더러운 돈이요?
도둑질한 장물인 줄 아냔 말요!
보낸 분 성의도 있는 건데 이러믄 됩니꺼?!"

매사에 솔직 대담하고 직설적인 성품을 지닌 설 훈은
역시 자기 감정을 숨김없이 쏟아 붓는다.

이렇듯 혜숙은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갔다.
건강한 것을 공연히 미워했고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저주한다.
동정어린 관심에 증오를 품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가슴 속 깊이 배어 있는 동지애를
서로가 진하게 느끼면서 나는 설 훈에게 양해를 구했다.
설 훈이 던져 놓고 간 봉투 속에는 무려 100 만 원이 들어 있었다.

 


 

 

72. 욕쟁이 시인 채광석

 

 

87 년 6 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태 전 민청련이 운동 방침으로 정한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 라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 슬로건이
점차 신민당과 재야 모든 정치 사회 단체의 주요 운동 방침으로 되고

고문에 의한 서울대생 박종철 군 사망 사건과
서울대 여학생 권인숙 양에 대한 성 고문 사건
연세대 이한열 군의 최루탄 사망 사건 등등으로

고문 추방과 직선제 개헌 투쟁을 위한 국민운동 본부가
지역과 부문과 계층을 망라해서 발족되고

마침내는 6 월 민주대항쟁의 물결을 이루어 내고
투쟁 목표를 관철해 냈던 그 해 그 달...

어느 날 저녁 어스름한 무렵...
대문밖에서 나와 혜숙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대문 열고 나가 보니 채광석이다.
채광석은 바다 풍경이 아름답고 아름드리 송림으로 이름 난 안면도 출신이다.


▲ 채광석(蔡光錫, 1948년 7월 11일~ 1987년 7월 12일)


그는 서울대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71 년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군대에 강제 입영당하고
제대하고 복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 시위 사건으로 구속되어

2 년 6 개월 동안 감옥살이 하다가 80 년 봄에 다시 복학했지만
5.18 광주 사태 이후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다시 구속되었었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시인으로 문학 평론가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터였다.

채광석은 그 날 술이 얼큰한 상태로
문밖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혜숙이 보고 싶어 왔다면서 까만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더니
소고긴데 지나오다 보니까 요 아래에 정육점이 있어서 사 왔단다.

나는 속으로 평소에 채광석의 성품으로 보아
'친구집에 소고기를 사 들고 다닐 줄도 아나?' 하고 의아스러워 했다.

" 웬 일이냐?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 안주도 할 겸 우리 혜숙 씨랑 같이 먹을려고 그런다 임마."

채광석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 박혜숙! 당신 죽으면 안돼!..."
하고 점잖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서 고기를 빨리 구어 오라고 성화다.
고기를 구어 먹으면서 광석은 " 혜숙아! 이 고기 먹고 빨리 병 나아야 돼! "
하면서 입에 넣어 주려는 시늉을 부리기도 한다.

" 혜숙이 기지배야! 죽긴 왜 죽어! 죽으면 안 돼!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한이 맺혔는데 왜 죽어! 이 기지배야!
이제 민주화가 코 앞에 닥쳐 왔는데...
우리가 얼마나 바라던 건데...
억울하지도 않냐?...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 씨부랄누무 기지배야!"

술 처먹으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장안에 욕쟁이로 유명했던 그는
이날도 혜숙을 향해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우리 주위에서는 그의 욕설과 독설적 비난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혜숙은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뻗혀 있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넘기는 상태에서
고기를 굽고 역겨운 냄새까지 피워가며 술주정이라고 한다는 소리가

혜숙이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것을 전제로
금방 죽을 사람인 것을 전제로 해서

죽지 말라고
죽긴 왜 죽냐고
죽으면 억울하지도 않냐고
바짝바짝 약을 올리고 앉았으니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며
피가 마르도록 아둥바둥 살아날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의 입장에서
심사가 좋을리 있겠는가?

내 생각에도 옆지기 편이어서가 아니라
혜숙의 심사로야 당연하지...

참다 못한 혜숙이 소리를 지른다.

" 광석이 형! 형이나 몸조심 잘 해!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야!
형이 그렇게 술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지난 번처럼 교통사고 당해서
나보다 먼저 콱 죽어버릴지 어떻게 아냐구!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니까 형이나 조심해!
형이나 조심하라구!!!....."

몇 해 전 일이다.
이신범 유인태 최 열 조성우 채광석 등 친구들 여럿이
이대 앞에서 늦게까지 모임을 갖다가
혜숙이 운영하는 약국에 들러 한 잔 더 하고 가겠다고 자리를 옮기던 중에

채광석은 지하도로 건너기가 귀찮았던지
차가 질주하는 이대 입구 사거리를 가로지르다가 택시에 들이 받혔다.

이 광경을 처음 목격한 최 열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석을 부축하고
사고 택시에 태워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채광석이 술에 취하면
어디에서 재우거나 집에까지 바래다 주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을 빗대어서 화가 난 혜숙이
채광석을 향해 독설을 퍼 부은 것이다.

그 날, 나는 채광석과 함께 근무했던 후배를 불러내어
광석을 집에까지 바래다 주도록 부탁했다.

광석은 우리 집 대문을 넘자마자 골목을 나서면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 혜숙아! 혜숙이 기지배야!... 죽지 말아!...
죽으면 안 돼 이누무 씨부럴누무 기지배야!...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제 다 돼 가는데 씨부럴녀나!!!..."

채광석은...
6 월 민주대항쟁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결국 국민에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 29 항복 선언 직후

민주화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분위기에서
그 감격, 그 감동과 흥분에 취해
후배들과 날밤을 새고 새벽녁까지 어울리다가
우리 집 근처 아현동에서 질주하는 택시에 받혀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
.
우리 집에 다녀간 지 보름 남짓 만의 일이다.
.
.
나와 함께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한

친구이자 탁월한 시인이요 문학 평론가였던 채광석은
서른 아홉 나이로 그렇게 허망하게 요절한 것이다.


채광석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안면읍에서 출생,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83년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면서 백낙청, 김사인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문학논쟁에 참가했다.


창작 주체의 계급론적 차별성 문제,

수기의 문학 장르 가능성의 문제,

집단 창작의 문제, 문학 조직의 문제 등을 문단에 던지는 등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문단 평론계의 한 맥을 형성했다.


1974년 5월 22일 소위 오둘둘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40 여 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고

〈애국가〉, 〈검은 장갑〉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저서로 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 시집 《밧줄을 타며》,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사회문화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유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이 있다.

우리 동료 선후배들과 문인들은 ' 민족문학가 고 채광석 동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성대하게 꾸려 보냈다.


▲ 1987년 7월 14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고 채광석 시인의 장례식


그리고 1 주기와 2 주기에 맞춰
그의 전집 5 권을 펴냈다.

13 주기 기일이던 2000 년 7 월 12 일에는
안면도 휴양림 길목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 이 자리를 빌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73. 채광석 ㅡ 그를 다시 생각하며

 


이 글을 연재하면서
채광석의 혼령이 나에게
숨가삐 지나치지 말고 좀 쉬어 가라며
자꾸만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지...
한동안 도무지 글이 씌여지지 않는다.

그래... 이 눔아~~~!!!
오랜만에 너랑나랑 되지 못한 말이라도
주섬주섬 훌훌 털면서 회포나 풀어 보자꾸나...

그는 태안군 안면도 양지말에서
안면 면장을 지내시던 아버님과 어머님 슬하
4 남 2 녀 중 둘째로 태어 났다.

안면도 창기초등과 안면중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사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1 년 10 월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쿠데타 전초전으로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에 완전무장한 공수단 병력을 진주시켰고
학생들을 마치 전쟁포로처럼 취급하면서 연행하여
제적시키거나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위수령이 발동되던 다음날
채광석은 안면도 고향집에서 체포되고
그 길로 강제 입영되어 강원도 원통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군에서 만기 제대하고 복학한 광석은
1975 년 4 월 10 일, 서울대 농과대학생 김상진이
수원의 서울농대 교정에서 "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할복자살한 사건을 접하자마자 충격을 금치 못하고

5 월 22 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치루는 시위를 감행하는 등
소위 "오둘둘 사건"을 주동하여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무려 2 년 하고도 1 개월이 넘는 세월 옥고를 치루는 동안
그는 감옥에서 시(詩)작 활동에 열중하여 많은 옥중시를 남기고
훗날 결혼하게 되는 강정숙에게 쉴새없이 옥중 연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그 후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80 년 5 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계엄 쿠데타가 발동되자
채광석은 또 다시 체포되어 40 여 일 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82 년부터는 '시와 경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박노해 시인을 발굴하고

계간 '창작과 비평'과 시 전문지 '시인'등에
문학평론과 시 등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1984 년에는 나의 권면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현 민족예술인총연합 전신)를 창립하고
나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민족문학작가회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초대 총무간사를 맡아
이 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1985 년에는 나와 함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창립에 앞장서면서
나는 청년단체 대표위원을
광석은 문화예술분과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87 년 7 월 12 일...
연보를 보니까 그 놈 생일이던 바로 다음 날에...
여성단체연합에서 주최하는 민요한마당 행사에 참여한 후
귀가 도중 서울 마포구 아현초등학교 부근 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향년 39 세...
7 월 14 일, 재야 민주사회단체가 망라된 가운데
"민족시인 故 채광석 민주문화인葬"이 엄수되고
그의 유해는 팔당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 주기에 두 권, 2 주기에 세 권
길지 않은 이승의 세월에서 남긴 그의 전집이 완간되었고

그가 남긴 시 가운데
"기다림"과 "부활"은 비장한 곡으로 다듬어져
널리 불려지는 노랫말이 되었다.

10 주기 때 추모 문학의 밤 행사를...
13 주기를 맞이해서 마침내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던
광산 구중서 교수의 글씨와
조각가 김운성의 제작으로

안면도 휴양림에서 각계 각층 300 여 분이 참석한 가운데
채광석의 시비 제막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 후 대 여섯 차례 그의 시비를 들를 때마다
가족에게 동료 선후배들에게 무거운 짐 잔뜩 지워 놓고 요절한 놈 주제에

뭔 복을 타고 났길래
아름다운 풍광하며 우거진 송림
뭇사람들이 모이고 지나는 길목에
저리 보기드믈도록 빼어난 거처를 장만했나...

난... 난...
도대체가 어림도 없을 성 싶어
부러움을 한아름 안고 돌아서곤 했다.

2000 년 7 월 12 일
"안면도의 푸른솔로 살아 오라!"는 제하로
'채광석 시비 제막식 및 문학의 밤'
자료집에 실린 글 가운데 몇 편을 옮겨 적는다.


기 다 림 ㅡ 채광석 시비 수록시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이름모를 산새들 떼지어 날고
계곡의 물소리 감미롭게 적셔 오는
여기 이 외진 산골에서

맺힌 사연들을 새기고
구겨진 뜻들을 다리면서
기다림을 익히리라

카랑한 목을 뽑아 진리를 외우고
쌓이는 낙엽을 거느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다지다가

자유의 여신이 찾아오는 그 날
고이 목을 바치리라

대를 물려 가꿔도 빈터가 남는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전문 옮김)



채광석...
그는 진작부터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떠나기로 아예 작정하고 있었던가?

그의 시 "기다림"에서처럼
그는 경제 성장이 어떻고
마이 카 시대가 저떻고
다가오는 팔팔 올림픽이 어떻고
또 저떻고 하던 적에

자유와 민주와 평등
그리고 통일의 새 날을 위해
고독한 밭에 나가 불씨를 묻었다.

흥청이고 망청이는 도시에서
외진 산골에서

피맺힌 역사 한맺힌 이들의 사연들을
가슴 속 깊이 되새기고
뜨거운 불씨를 지피면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진리를 외치고
욕설을 퍼대며 불씨를 피우다가

자유의 여신이 활활 타오르는 그날
몸뚱이를 바치리라고 했다.

자기 목숨만으로 부족하면
대대손손 이어가며
불씨를 묻으리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광석의 몸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밧줄을 타며 ㅡ 채광석

밧줄을 탄다.

히말라야 산에 우리의 형제와 동료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도봉산 인수봉의 바위벽, 설악산 골짜기의 얼음벽
벽을 탄다 기어 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땡볕 아우성치는 여름이나
혹한 내리꽂히는 겨울이나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산 사나이들 밧줄을 탄다

비바람이 밀치고
설한풍이 손끝 발끝을 흔들고
뇌성벽력이 몰아친다 해도
밧줄을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목숨이기에
단속반원들 우르르 달겨들어 패대기치더라도
리어카는 우리들 목숨의 줄이므로

비루먹이고 병들게 하고
꼬드김 손찌검
발길질 똥바가지질 몽둥이질 이간질 쳐대도
노동 삼권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민주화는 통일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목숨을 탄다

민주 민족 민중의 산맥
우리의 선열과 형제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공장 농촌의 얼음벽 학교의 바위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 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아우성치는 압제의 손길
내리꽂히는 수탈의 손길을 뚫고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딸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민주주의여
통일이여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이여

(전문 옮김)


칠월의 거리에서 ㅡ 채광석 형에게
도종환(시인,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형이 새벽의 거리에서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난 지 십 년

나는 형이 묻힌 산엘 찾아가지 않았다
많은 날을 바람부는 거리에 서 있었다

형이 생각날 때면 시장 골목 목로주점 찾아가
후배들에게서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걱정하던 젖은 목소리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얼굴 떠올리며
급하게 소주잔을 뒤집었다

형이 떠나던 그해 여름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퍼붓는 빗발 피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짧은 생애 내내
이 시대의 머리 위로 퍼붓는 빗줄기 피하지 않고
형이 갔던 것처럼

나도 그 이후 십 년
피하지 않고 내 길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산 속이 아니라 이 거리 어딘가에
형이 함께 있으리라 믿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내동댕이 쳐진
노동자의 벗겨진 신발 옆에
형이 함께 있을 것 같았고

철거반원의 햄머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는 사람들 곁에
함께 악을 쓰다 두들겨 맞고 쓰러져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감옥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철문을 발로 차며 거세게 항의하다 끌려가
먹방으로 돌아와 긴 긴 사랑의 편지를 쓰며
밤을 새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내기 괜찮냐 이렇게 물으며
철창 너머 서 있을 것 같았다

망촛대 꺾어 흔들며
산비탈에 혼자 누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터를 잃고 쫓겨난 지 오래인 나를
사람들 사이에서 알아보곤 큰 소리로 이름 부르며
길 건너 달려올 것 같았다

자유와 밥과 사랑을 위해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을 타며
갈라진 땅의 모질고 큰 절망과
그 절망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것 같았다

칠월 어느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저녁이면
다 못한 이야기 너무 많아 무어라 무어라 소리지르며
길 저쪽으로 끝도 없이 걸어가고 있을 것 같았다

등만 보이며 젖어젖어 빗속으로
몸짓만 보이며 하염없이 빗속으로

(전문 옮김)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김진경 (시인)


어린 시절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는
산자락을 두른 저녁 연기를 뚫고
들릴 듯 말 듯 들판의 끝까지 쫓아와서는

개울창에 숨어 노는 우리들의 멱살을 붙잡아
여지없이 저녁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이 육실헐 눔 어디 가서 지랄허고 자빠진겨"

부르는 소리 뒤에 군시렁거리는
그 기름진 어머니 욕의 힘일 것이다.

채광석,
그는 욕을 할 줄 안 마지막 사람이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술 취한 한밤 전화기에 대고 퍼붓는
그의 기름진 욕을 거름 삼아

그의 소리는 푸르게 뻗어
암담한 저녁에도 여지없이 멱살을 잡아
우리를 목숨의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군시렁군시렁 욕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감시의 눈길을 피해 가야 하는
그 멀고 추운 길을
우리는 낄낄거리며 두려움 없이 걷곤 했다.

걸어서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그리운 집에 닿곤 했다.

아. 이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하나로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 사람은 많아도
욕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그 기름진 사랑을 퍼부을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 목숨의 밥상에 차려졌던
민주며 평등이며 정의며 사랑이며 하는 것들도
살아 남기 위해 위로만 뻗는 낙엽송 숲의 나무들처럼
멀쑥멀쑥 키만 커졌다. 마네킹 냄새가 난다.
아, 이 숲엔 부르는 소리가 없다.

아, 이 숲엔 우리가 함께 앉을 밥상이 없다.
아, 이 숲엔 그 모든 것을 키우는 기름진 사랑이 없다.

술 마시고 돌아오는 밤
깜빡이 등이 깨어지고 안테나가 부러진 차 앞에서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버릇대로
너만 혼자 잘 먹고 살면 되냐!

군시렁군시렁 욕을 퍼부으며 그가 찾아와
안테나를 부러트리고 등을 깨트린 것 같다.

돌아보면 담 모퉁이를 돌아가는
쓸쓸한 한 사내의 등이 보인다.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삶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랑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늘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

(전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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