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3 09:50 김삼웅

 

 

신변의 위기를 느낀 김근태는 제5차 민청련 총회도 참석하지 않고 은신하다가 8월 24일 옷을 갈아 입고, 민통련 이창복을 만나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서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의 미행을 당했다. 오랜 세월 수배 과정에서 피신에 이골이 난 김근태는 지하철을 타면서 경찰을 따돌리고, 민청련 사무실에 들렸다가 장충체육관 근처 커피숍으로 이창복을 만나러 갔다.

커피숍 근처에서 김근태는 미리 배치된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 등 1개 소대 병력에 의해 연행되기에 이르렀다. 민청련 의장을 사임한지 14일 만이다. 정보기관은 김근태와 이창복이 만나는 장소를 정확히 알고 경찰을 배치했다가 체포한 것이다. 전화를 도청한 것이다.

연행된 김근태 전 의장은 당시 위기감을 느끼고 도망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8월 26일 즉결심판에서 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한 유언비어 혐의로 구류 10일을 선고받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복역 중, 9월 4일 새벽 5시 30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이첩되어 6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구류 기간 중 집권세력의 강경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사하라는 명령과 지시를 경찰에 내리고, 이후 이첩시킨 대공분실에서 엄청난 고문을 자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주석 6)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의 체포와 함께 집행부 구속, 사무실 압수수색 등 민청련을 압살하고자 했다.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이 체포된 데 이어 9월 8일 중부서에 의해 사무실이 수색당하고, 9일에는 김희택 부의장과 서원기 집행국장이 긴급 수배되었다. 또 10월 1일에는 김종복 청년부장과 김희상 대변인 연행, 2일에는 최민화 부의장, 7일에는 권형택 사회부장이 각각 연행되었다. 이들에게는 집시법 정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이 적용되고, 10월 14일에는 체포하지 못한 민청련 임원진 전원에 대해 전국수배령이 내려졌다. 임원진의 가족들에게도 정보과 형사와 강력계 형사들이 동원되어 미행하였다.

5공 정권은 10월 29일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 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청련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주석 7)

정부당국의 날조된 발표는 순치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어용신문들은 “학내외 시위와 노사분규를 배후 조종”한 “자생적 사회주의 집단”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김근태의 정체가 ‘적색분자’라고 매도하였다.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언론에 의해 인격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빨갱이, 용공좌경, 종북, 적색분자라는 낙인은 사회적 매장을 의미하는 사형선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밖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질하는 시간에 김근태는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망적인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청련 활동 중에 여러 차례 정보기관의 간부와 요원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기관지 <민주화의 길>이 대학근처 서점을 통해 학생들 손으로 들어가고, 학생운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 민청련의 성명서와 선언문 내용이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 노동문제에 너무 자주 그리고 깊이 개입한다는 등의 이유였다. 김근태는 그럴 때마다 당당하게 해명하면서 민청련의 활동을 늦추지 않았다.

여러 통로를 통하여 다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의 대표였던 사람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김병곤 씨나 황인하 씨 경우처럼 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오히려 깊게 하는 시기로 삼자는 은밀하면서도 야무진 계획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주석 8)

김근태는 5공세력의 야수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 체제의 국군보안사 출신 전두환과 그 일당이 저지른 12ㆍ12하극상, 광주학살, 삼청교육대, 양심적 언론인, 정치인 탄압 등 잔인무도함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셈이다.

본인이 당한 끔직한 것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 자신을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핀으로 본인을 과녁에 고정시켜 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칼날을 소리없이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왔던, 반드시 불온ㆍ불순의 거대한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주석 9)

김근태는 5공 권력이 자신을 정치적 ‘과녁’으로 삼는 이유를 대강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게 그리고 민주화운동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협과 양보가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팍하게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의한 표적으로서 희생양으로서 본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주석 10)


주석
6> 앞의 책, 234쪽.
7>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1980년대편 2권>, 313쪽, 인물과 사상사, 2003
8> 김근태, <남영동>, 29~30쪽.
9> 앞의 책, 30쪽.
10> 앞의 책,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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