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

012/07/24 08:00 김삼웅

 

고문(Torture)은 '몸을 비틀다'라는 라틴어 ‘torquere'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고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짐승의 행위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ㆍ야만의 행위다. 그래서 국제법과 국내법은 고문을 금지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간에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 세계인권선언 제1조.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 대한민국헌법 제11조 2항.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좌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력 또는 가혹행위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 대한민국 형법 제125조.

전두환 정권의 들러리 국회라는 평이 따르는 제11대 국회는 1983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14조 2항에서 “고문을 하여 사람을 치상케 한 때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치사케 한 때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국제엠네스티는 1973년 <고문폐지를 위한 국제엠네스티선언>에서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고문의 사용은 인간의 자유 및 생명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간주된다.
2. 고문은 여하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고문을 통한 효력의 폭력은 누증적 악순환을 초래한다. 고문은 전염병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퍼져 나간다. 고문은 고문당한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고문하는 사람을 야수화한다.
3. 인류의 양심에 부합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이러한 악을 근절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의무이다. 우리는 모든 정부가 고문을 금지하는 국내법과 국제법을 존중하고 또한 이를 개선할 것과 유엔결의 3059호를 수호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또한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및 직업상의 책무를 가진 제 인사 및 조직들이 전세계적인 고문폐지운동에 대하여 능동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요청한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말기의 <형법대전>에 따르면 죄인에게 채찍(볼기를 치는 작은 대)과 혁편(革鞭, 종아리를 치는 가죽띠)을 사용하는 정도의 고문이 있었다. 그러다가 국권을 빼앗기면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여 수많은 항일지사들을 죽였다. 병탄 초기의 105인사건과 일제말기 한국어학회사건 등이 대표적인 고문 사례로 꼽힌다.

이승만의 친일파 중용으로 일제의 악질 경찰이 그대로 국립경찰로 들어오면서 고문의 악습이 전해지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특무대 요원, 경찰 등 3천명을 뽑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면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기술은 이들을 통해 오롯이 5공으로 전수되었다.

김근태가 서부경찰서에서 잠을 깬 것은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반, 9월의 이 시각은 아직 미영(未明)이다. 이 시간 이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 악마들에게 사지가 찢기고 영혼이 파괴되는 한 마리 희생양이 되었다. 출감 뒤 그가 생생하게 기록한 <남영동>을 대본으로 그가 당한 고문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이 부문은 좀 지루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었으면 한다. 오늘 우리가 이 정도나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김근태 등 민주인사들의 희생과 투쟁의 댓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근태와 이근안을 착각하는 세대는 이것이 ‘신화’가 아닌 불과 30여년 전의 현실이었음을 인식했으면 싶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 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끼어 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7차례의 유치장 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난 2년 동안의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다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여다보고, 바람 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되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주석 11)

혁명가들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많은 편이다. 계산하고 타산에 밝은 사람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속된 이해와 이문을 따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낭만주의자들은 물질적 셈법보다 하늘의 별을 헤고, 호수의 포말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가망이 없는 혁명도 꿈꾸게 된다. 반독재 민주화운동가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김근태의 심중에도 낭만성이 켜켜이 쌓였다. 학창시절 그는 문학서적을 끼고 살았다.

신새벽 의경의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김근태는 자신이 풀려나는 것으로 알았다. 여전히 짐승들이 지배해온 5공의 권력 구조를 자세히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에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해지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고무풍선이 바늘에 찔려 별안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 한 사람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하거나 추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주석 12)

주석
11> 앞의 책, 40쪽.
12> 앞의 책,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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