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2 12:06 김삼웅
민청련은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전초기지가 되고 김근태와 간부, 회원들은 전위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민청련의 투쟁이 강화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가중되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집행부의 연행 횟수가 늘어나고, 사무실 압수ㆍ수색도 잦았다. 정부는 각 부문운동 단체들과 연대투쟁의 발원지가 민청련이란 사실을 알고 강도 높은 탄압을 자행하였다.
1985년 10월 14일 민청련 지도위원 (계훈제ㆍ백기완ㆍ이우정ㆍ고은ㆍ김병걸 등 32인)들은 <민청련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다-모든 민주세력과 더불어 민청련 파괴음모를 저지할 것을 결의하며>란 결의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민청련 탄압ㆍ파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다음은 요지.
우리 지도위원들은 전두환 정권에게 엄숙히 경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애국적인 학생ㆍ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 중 극히 일부분만을 뽑아서 용공으로 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 2년여 동안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민청련을 학생들의 배후로 조작하여 탄압하려는 한심스런 작태에 우리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배후 및 용공조작이 애국적인 청년ㆍ학생들을 탄압하려는 명분의 조작일 뿐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단계적으로 분리, 탄압하려는 간교한 술책임을 직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그것은 전체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전면적 파괴공작의 명백한 신호로 간주하고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공동대처를 모색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전두환 정권에게 간곡히 충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고 광주민중학살을 비롯한 자신의 과오를 분명히 시인하면서 스스로 퇴진하는 길만이 민족사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주석 3)
김근태가 주도하는 민청련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던 그동안 금기사항이 된 문제를 제기했다.
‘광주학살진상규명과 전두환 책임추궁’을 이슈화한 것이다. 그리고 겸양과 포용 정신으로 각급 부문운동 그룹과 연대하여 5공정권과 대결하면서 전두환 세력을 코너로 몰았다. 그렇지 않아도 2ㆍ12총선 국면과 제12대 국회에서 야당의 활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던 참이었다. 청년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를 찍었다.
총선의 패배로 휘청거리던 5공 정권은 점차 활성화되어 가는 학생, 재야, 민중운동의 도전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시 탄압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타겟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의 연결고리인 민청련이었다.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려다가 국내의 반발과 미국의 불승인으로 철회돼, 정치적 위신이 실추된 전두환 정권은 그 제물로 민청련과 김근태를 선택한 것이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김근태 전 의장을 서부경찰서에서 구류 만기일인 9월 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참혹한 고문을 했다. (주석 4)
민청련은 1985년 8월 10일 마포구 신수동 소재 신촌교회에서 제5차 총회를 열었다. 여기서 김근태가 물러나고 새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한경남 전 부의장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은 최민화 전 부의장, 김희택 전 운영위원장, 구속 중인 김병곤 전 상임위원장을 선출하는 등 임원진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당시 김근태 의장은 2년 간의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심신이 지쳐있었는데다가, 김병곤 상임위원장의 경고 쪽지 (김병곤은 검찰에 구속 중에 곧 김근태를 체포할 것 같다는 쪽지를 통해 알려 왔다 - 필자)와 같이 구속된 황인화 한국기독청년협회(Eye) 총무부장 선을 통하여 전달된 기독교권의 우려의 목소리로 인해 이미 표적이 된 사실과 함께, 탄압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민청련 단체를 보호하려면 의장직에 있을 수 없다는 판단에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주석 5)
김근태의 운명 앞에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 왔다. 지금까지는 용케 피해 오고, 민청련을 이끌면서는 몇 차례 집시법 위반 정도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궁지에 몰린 5공 학살자들에게는 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압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래 그 시대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를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삼았다. 거기에는 이성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려는 배제의 효과도 고려된다. 역대 독재정권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처지가 되면 어김없이 공안사건을 날조하여 국민을 속이고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럴 때면 제물이 필요했다.
주석
3> <민주화의 길> 제11호, 2~3쪽, (발췌)
4> 김재하, 앞의 책, 164쪽.
5>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33쪽.
1985년 10월 14일 민청련 지도위원 (계훈제ㆍ백기완ㆍ이우정ㆍ고은ㆍ김병걸 등 32인)들은 <민청련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다-모든 민주세력과 더불어 민청련 파괴음모를 저지할 것을 결의하며>란 결의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민청련 탄압ㆍ파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다음은 요지.
우리 지도위원들은 전두환 정권에게 엄숙히 경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애국적인 학생ㆍ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 중 극히 일부분만을 뽑아서 용공으로 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 2년여 동안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민청련을 학생들의 배후로 조작하여 탄압하려는 한심스런 작태에 우리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배후 및 용공조작이 애국적인 청년ㆍ학생들을 탄압하려는 명분의 조작일 뿐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단계적으로 분리, 탄압하려는 간교한 술책임을 직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그것은 전체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전면적 파괴공작의 명백한 신호로 간주하고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공동대처를 모색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전두환 정권에게 간곡히 충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고 광주민중학살을 비롯한 자신의 과오를 분명히 시인하면서 스스로 퇴진하는 길만이 민족사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주석 3)
김근태가 주도하는 민청련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던 그동안 금기사항이 된 문제를 제기했다.
‘광주학살진상규명과 전두환 책임추궁’을 이슈화한 것이다. 그리고 겸양과 포용 정신으로 각급 부문운동 그룹과 연대하여 5공정권과 대결하면서 전두환 세력을 코너로 몰았다. 그렇지 않아도 2ㆍ12총선 국면과 제12대 국회에서 야당의 활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던 참이었다. 청년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를 찍었다.
총선의 패배로 휘청거리던 5공 정권은 점차 활성화되어 가는 학생, 재야, 민중운동의 도전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시 탄압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타겟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의 연결고리인 민청련이었다.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려다가 국내의 반발과 미국의 불승인으로 철회돼, 정치적 위신이 실추된 전두환 정권은 그 제물로 민청련과 김근태를 선택한 것이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김근태 전 의장을 서부경찰서에서 구류 만기일인 9월 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참혹한 고문을 했다. (주석 4)
민청련은 1985년 8월 10일 마포구 신수동 소재 신촌교회에서 제5차 총회를 열었다. 여기서 김근태가 물러나고 새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한경남 전 부의장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은 최민화 전 부의장, 김희택 전 운영위원장, 구속 중인 김병곤 전 상임위원장을 선출하는 등 임원진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당시 김근태 의장은 2년 간의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심신이 지쳐있었는데다가, 김병곤 상임위원장의 경고 쪽지 (김병곤은 검찰에 구속 중에 곧 김근태를 체포할 것 같다는 쪽지를 통해 알려 왔다 - 필자)와 같이 구속된 황인화 한국기독청년협회(Eye) 총무부장 선을 통하여 전달된 기독교권의 우려의 목소리로 인해 이미 표적이 된 사실과 함께, 탄압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민청련 단체를 보호하려면 의장직에 있을 수 없다는 판단에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주석 5)
김근태의 운명 앞에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 왔다. 지금까지는 용케 피해 오고, 민청련을 이끌면서는 몇 차례 집시법 위반 정도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궁지에 몰린 5공 학살자들에게는 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압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래 그 시대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를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삼았다. 거기에는 이성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려는 배제의 효과도 고려된다. 역대 독재정권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처지가 되면 어김없이 공안사건을 날조하여 국민을 속이고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럴 때면 제물이 필요했다.
주석
3> <민주화의 길> 제11호, 2~3쪽, (발췌)
4> 김재하, 앞의 책, 164쪽.
5>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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