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7 08:00 김삼웅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뭐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 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또 수시로 해야 했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 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면서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되었습니다.
(주석 20)

김근태는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며칠 동안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고문자들은 잠을 재우지도 않았고 밥도 주지 않았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잠을 재우지 않아 허기진 육신은 처절하게 허물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9월 6일에는 점심 식사를 주었다. 음식을 보고 배가 고픈데도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의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것으로 악몽과 같은 고문이 끝난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식사는 ‘미끼’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설명하겠다.

고문자들은 미국 워싱턴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신기섭에 대해 캐물었다. 그는 1985년 2월 김대중이 귀국할 때 함께 동행할만큼 미국에서 한국민주화를 위해 애쓴 사람이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민청련 사무소를 들렸는데, 그를 간첩으로 엮으려는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김근태가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자 대화에서 별로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내면의 외침에 -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히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을 할 수는 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주석 21)

고문자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이성이나 인간성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고문을 하다가 제풀에 지치면 김근태의 생식기를 가르키며 히죽거렸다.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는 등 인격모독을 일삼았다. 히틀러의 비밀경찰도 이러지는 않았다.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부터 또 고문이 시작되었다. 잡혀와서 3일째 되는 날이다.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너 이새끼, 배후를 안 대?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께”라고 윤재호는 소리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동안 고문대를 정현규와 최상남이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고 하고, 고문기술자는 여러 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주석 22)


주석
20> 앞의 책, 53쪽.
21> 앞의 책, 58~59쪽.
22> 앞의 책,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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