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25 08:00 김삼웅

 

노태우 정권은 방북인사들을 용공으로 매도하고, 족벌신문ㆍ어용방송들이 덩달아 붉은 색칠을 하면서 한국사회는 살얼음판의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음모가들에게는 일을 꾸밀 절호의 기회였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내키지 않는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선 패배와 더불어 총선에서도 제2야당으로 밀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제3야당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던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공안분위기를 틈타 야합하면서, 정계는 다시 한번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노무현 의원.

 

1990년 1월 22일 이들 세 사람은 3당 야합을 통해 거대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
6월 항쟁으로 어렵게 돌린 역사의 물굽이가 다시 역류하는 반동이었다. 3당야합은 정치지형의 변개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민주화의 역류와 보수화를 불러왔다.

5공청산은 물건너가고 부동산가격 폭등사태, 물가고, 증시침체, 토지공개념 후퇴와 금융실명제 보류 등 경제난국이 가속화되었다. 거대 여당으로 변신해 오만불손해진 민자당 정권은 임시국회에서 방송법, 국군조직법, 광주관련법, 추경예산 등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일당독재식 국정운영으로 일관하였다.

전민련은 안팎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1989년 4월부터 몰아닥친 공안정국의 탄압과, 영등포을구 재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하고, 5월부터 이른바 ‘합법정당논쟁’이라는 내부적 혼란에 빠져든 것이다. 합법정당논쟁은 전민련 내부 각 정파간에 이해와 불신을 불러왔다. 이우재ㆍ장기표ㆍ조춘구 등은 전민련에서 합법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1989년 9월 26일 전민련 2차 중앙위원회에서 전민련을 탈퇴하고, ‘새정당창건을 위한 임시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서 민중정당 건설의 주체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연락사무소는 이미 1989년 9월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진보적 대중정당건설을 위한 준비모임’과 통합, ‘진보정당결성을 위한 정치연합’을 발족시켰다.

이후 전민련 2차 대의원대회에서 합법정당 건설안이 부결된 후 1990년 3월 12일 계훈제ㆍ박형규ㆍ이소선ㆍ백기완 등 전민련 고문 4인이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 결성을 제안, 3월 21일 진보정당 준비모임 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민연추 결성에 동참할 것을 발표함으로써 4월 13일 447명의 민연추 추진위원이 참가, 백기완ㆍ이우재ㆍ고영구 등 공동대표를 선출하는 등 공식적인 체계를 갖추고 출범했다. 이로써 전민련은 분열되고 말았다.

김근태는 ‘합법정당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잔류를 선언하였다.
“신식민지 파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민족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는 합법정당의 건설이 아니라 민족민주전선의 강화와 제도정치 공간에서 공개정치부대를 구축, 단일한 민주연합당을 추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합법정당을 주장한 그룹은 대의원대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민련을 박차고 나가 민중정당을 결성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40대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자주ㆍ민주ㆍ통일을 목표로 출범한 전민련 지도부는 김근태, 그만 ‘외롭게’ 남게 되어버린 것이다. 전민련 잔류를 선언한 그는 그 후 어수선한 조직을 재정비,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던 도중 당국에 의해 구속되고 만 것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남은 자’들과 5월 9일 전국 18개 지역에서 회원ㆍ시민 20만여 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민자당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국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 21개 도시에서 1,192명이 연행되고 그 중 55명 구속, 79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날 저녁 김근태는 전민련 주최로 제주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뒤늦게 전민련 결성 선언문과 사업계획서가 국보법 위반이란 혐의였다. 노태우 정부가 갑자기 김근태를 구속한 것은 그가 평민당ㆍ꼬마민주당ㆍ재야가 통합하여 거대 민자당에 대항하려는 민주 연합체의 구성 준비 작업 때문이었다. 당시 김근태는 이 작업에 몰두하여 상당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민자당 합당의 야합성을 규탄하고 흔들리는 민생문제를 효과적으로 제기하기 위해서 전민련 결성 이후 성장하고 있던 각급 대중단체를 전민련의 주도로 국민연합에 결집시켰다. 전교조ㆍ전농ㆍ전노협ㆍ전대협 등이 두루 포괄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 국민연합 조직을 갖고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맞서기 시작했다. 상당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일부 간부들이 나감으로써 위상이 저하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 정치적 영향력이 전민련에 남아 있었다. 당시 나는 재야 일부의 역량과 평민당, 작은 민주당이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민주연합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전민련 내부의 정치역량을 우선 설득하고 전민련 바깥에 있는 민주대연합을 찬성하는 분들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함께 참여하도록 말이다. 또한 독자정당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다.(…)

머지않아 비공식적으로나마 각 부문의 합석이 기대되는 시점에서 권력은 나를 구속했다. 이런 논의의 진전 자체를 차단하고자 했다. 1990년 5월 공안정국에서 나는 이처럼 다시 구속되었던 것이다.
(주석 11)

김근태가 ‘합법정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고 전민련에 잔류한 것은 타협을 모르는 외곬수이거나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완고성 때문이 아니었다. 노태우 군부정권의 본질과 보수야당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별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강력한 재야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6공화국의 공간에서 특히 3당 야합으로 인한 거대 민자당이 지배하는 ‘1점반 정당체제’에서, 전민련 이탈파들이 추진한 ‘합법정당론’ 은 설 자리가 없었다. 실제로 ‘민중당’과 ‘한겨레민주당’ 등 진보정당들은 원내 진출에 실패하면서 존재가치 이외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전민련은 반신불수가 되고 공안정국과 19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역량의 분산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1990년 4월 9일, <월간 말>이 주최한 <민족민주운동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란 주제의 긴급토론에서 현 시국을 대단히 위기로 분석했다. “지금 우리 운동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지배세력은 부분적인 의사개량화조치를 통해 민족민주운동의 전투적인 부분과 변혁적, 원칙적 관점을 유지하는 운동에 대해 집중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 탄압 앞에서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략계획조차 크게 동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라고 분석ㆍ평가하였다.

그의 분석은 정확했고 현실로 나타났다.


주석
10> 이재화, 앞의 책, 167쪽.
11> 김근태, <아직도 벗지 못한 공안의 굴레>, <분단시대의
피고들-한승헌선생화갑기념 논집>, 46~47쪽, 범우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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