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6 08:00 김삼웅

 

 

“자유는 한번 싹트면 엄청난 속도로 자라는 나무” - (조지 워싱턴)라고 한다는데, 한국의 경우는 예외인 것 같다. 또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 (제퍼슨)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것 같다.

4월혁명, 반유신투쟁,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가에서 한국(인)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최근 북아프리카, 중남미 일부 아랍 국민들의 항쟁을 제외하면 한국의 민주화투쟁은 반세기 이상 앞선다. 다시 구속된 김근태는 결연한 자세로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한번은 검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10년 정도 손아래였을 그 검사는 이름이 문성우였던가. 신문조서를 받겠다고 했다. 진술거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우선 포승과 수갑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더니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고 자기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검사실 내에서 지휘권은 당신에게 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서의 임의성 성립을 위해서 수갑과 포승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으니 되풀이하여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라고만 했다. 그 전에 이 검사방에 왔을 때는 언제나 수갑과 포승을 풀었는데, 위에서 한번 본떼를 보여주라는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술을 거부한다. 이것을 고지한 이상 퇴거할 자유가 없다. 이렇게 포박한 상태로 진술을 거부하고 있는 나에게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 것은 피고인에 대한 학대행위라고 하면서 신랄한 말싸움을 1시간 정도 벌였다. 그후 다시는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도저히 재판을 받을 수가 없었다. 첫 공판에 나가 모두진술을 통해 이것은 정치적 보복이기 때문에 나는 ‘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와버렸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7년 구형에 3년 선고였다. 거의 같은 죄목(?)으로 재판받았던 이부영 씨 10월, 이창복 씨 1년에 비해 중형이었다. 재판 거부에 대한 보복이었다.
(주석 12)

김근태는 1990년 5월 9일 민자당반대 시위 및 전민련 결성과 관련하여 구속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검사의 기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이 복사품과 같은 재판에서 7년 구형에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와 상고심에서 2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검사와 판사가 과격, 급진, 선동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미국 작가 마이클 무어의 “진실은 선동적인 것처럼 보이고, 상식은 급진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안양교도소에서 두번째 옥살이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국보법 7조 1항과 집시법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김근태의 서울상대 한참 선배이기도 하는 민족경제학자 박현채는 “역사에 충실한 삶이란 오늘에 있어 보상받지 아니하고, 오늘에 있어 보상받길 원하지 않는 삶이다.”고 다짐하면서 ‘역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정계진출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첫번째는 민청련에, 두번째는 전민련의 활동에 충실하다가 다시 갇힌 신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서울과는 그리 멀지 않아서 부인과 동지들이 면회오는데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별 두 개가 되면서 옥살이의 이력도 붙고, 수사ㆍ재판과정에서 육체적 고문은 없어서 그냥저냥 견딜만 했다.

1991년 1월 초 안양교도소에서 딸 병민이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병민이는 어느새 아홉 살 소녀가 되었다.

귀여운 우리 아가씨, 병민아!
편지가 늦어서 미안하다. 너한테서 온 두 통의 편지는 받았고, 하나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란다. 그 동안 서울에서 안양으로 아버지가 이사를 해서 그렇단다. 주로 아버지의 게으름 탓 때문이지만 지난 6개월 여의 교도소 생활중 이 편지가 내가 쓰는 첫 번째 편지이다.

있잖니, 병민아, 사람이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속이 텅 비고 메마르게 되는 법인데, 지난 2년 동안 아버지는 끊임없이 말을 해야 했고, 그것도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했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침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영향이 너에게까지 가고 말았구나. 답장을 안 한다고 네가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지금 부랴부랴 방에 돌아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해해줄 수 있겠니, 병민아.

네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 ‘예감’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사용한 네 글을 보면서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러웠단다. 면회 때 엄마와 아버지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마구 웃었단다. 그랬더니 모두 속으로는 아버지의 기분을 알아주면서도 그러는 나보고 “푼수” “얼간이”라고 놀려대더라. 아마 다른 경우에 이런 얘기 들으면 언짢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아버지는 낄낄대고 웃었다.

병민아, 그래 네 예감대로 아버지는 올해 안에는 못 나갈 것 같다. 너와 네 오빠 병준이, 엄마 등 사랑하는 우리끼리 함께 얼굴 보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슬픔이지.

자상한 아빠가 귀염둥이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보통사람의 꿈이 배인다. 그 무렵 병민이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근태의 편지는 이어진다.

그런 이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네가 차와 부딪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떠했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니. 막막함이었다. 뒷머리가 뻗뻗해지고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사람의 생명은 정말로 귀중하다. 그것은 절대 자체이고 거기에 부담을 주고 위해를 가하는 모든 것은 악이고, 우리는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 네 말대로 네가 옳았다고 아버지는 믿으며 운전기사가 잘못한 것이겠지만 이와 같은 일이 비슷하게라도 앞으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병민아, 교통질서는 사람간의 약속인데도 서로 갈 길이 바쁘다고 때로 욕심을 내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다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네가 미리 방비하도록 해야 된단다.

병민아, 시험을 잘 봤다면서.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너의 두 번째 편지의 맨 앞에 시험 얘기가 있었지. 그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일을 책임있게 해야 한다고 너희들에게 말했던 일, 어쩌다가 너희들을 야단쳤던 일, 그리고 몇 번인가 때리기조차 했던 일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너희들이 아버지의 얘기를 시험점수 잘 따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싶어 착잡해졌다. 이런 말 저런 말이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학교 공부를 우습게 생각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시험점수 잘 받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친구들과도 잘 안 놀고 미워하기까지 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도 모두 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버지는 정말로 반대한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651쪽.
13>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33쪽,
한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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