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석방 환영식


 출감하는 일에 익숙해 진 나는 죄수복을 벗고 오랜 만에 입어 볼 사회복을 준비해서
 미리 교도소 담장 안쪽 교무 행정실로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혜숙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교도소 담장 안쪽은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에 혜숙이 담장 안으로 들어 오기는
 내가 출감하는 날 직계 가족 보호자의 신분으로 일종의 특별한 경우다.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애타게 기다렸던 표정으로 반갑게 웃고 있을 혜숙을 찾았다.

 그런 내 아내 혜숙의 모습이 으레 제일 먼저 눈에 뜨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혜숙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깐 자리를 비웠나?......

 

 "권사님! 고생 많으셨지요?...... 몸은 괜찮으시고?......"

 

 "예,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밖에 한 40 여 분이 마중 와 계셔요......
 여기 옷을 챙겨 왔는데 갈아 입으시지요......"

 

 안부를 나누고 출소 절차를 밟고 하는데 정작 혜숙은 보이지 않는다.

 왜 안 보이는지 설명도 없다.

 

 내 아내 혜숙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마도 난리가 나고 천지가 개벽이 되더라도
 꼭 와 있을 자리에 혜숙이 없다......

 

 도대체 이럴 수가 없다.
 대신에 다니던 교회 조승혁 목사님과 장로님이 와 계시다.


▲ 대전교도소


 절차를 마치고 감옥문을 나서자마자 '와 - !!!' 하는 함성과 함께
 '님을 위한 행진곡' 등 노래가 힘차게 터져 나온다.

 

 그리운 얼굴들이 짙은 어둠 사이로 하나 둘 눈에 띈다.


 그 당시 국회의원으로 있던 이 철
 그 후에 국회의원과 장관에 오른 김영환

 국무총리에 오른 이해찬
 김학민 강성구 강은기 등등


 아내 혜숙이 안 보이는 대신인가?

 그날따라 그 멀고 외진 곳까지 친구들과 선후배 동료들이 꽤 많이 마중을 나왔다.

 

 새벽 4 시부터 기다려야 하니까 인근 여관장에서 단체로 숙박하고
 서둘러서 나온 모습들이다.


 너무도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껴안고 등을 두드리고 안부를 나누고 하다가
 자리를 정돈하고 식순을 갖춘 출감 환영식이 이어졌다.

 

 이 철과 이해찬 등 몇몇 동료들이 민주화에 대한 나의 신념과 헌신 고난에 찬 역경을 치하하는 환영사를 하고

 어둠과 적막, 억압을 갈라버리듯 다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합창을 했다.

 

 그리고는 교도소 담 안을 향해 '양심수를 석방하라~~~!!!... 민주 인사 석방하라~~~!!!'
 고 한 목소리로 외쳐 댔다.

 

 그러자 때맞추듯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반갑고 감격스러운 해후였지만 꼭 와 있어야 할 사람이 빠져 버린 이상한 출감 환영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누구든 붙잡고 우리 혜숙이 어쩐 일이냐고
 무슨 곡절이라도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악수하고 껴안고 그간의 안부를 나누는 데 예의가 아닌 듯  싶기도 해서
 답답한 마음 그냥 가슴에 안고 대전 시내로 들어 서서
 다함께 새벽 해장을 하며 회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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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위암이요 ! ! !


대전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조승혁 목사님과 자리를 같이 했다.
오랜 만에 만나서 나누고 싶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웬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은채 자꾸 끊어지고 막혔다.

무언가 주저주저 하시는 것 같고 얼버무리시는 것 같다.
점점 더 불길한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면서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던 내가 먼저 말문을 열어야 했다.

"저...... 목사님... 저희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우리집 사람한테 혹시......"

"으~~~흠...... 말미를 꺼내기가 좀 어려워서......
사실은 집사님이 며칠 전에 병원에 입원했어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을 요???...... 무슨......???"

"...... 위암 수술......"

"예엣???....."

순간 나는 목사님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숨이 콰~악 막혀 왔다.

핏줄기가 온통 머리를 향해서 짜르르 몰려드는 듯했다.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머리로 등줄기로 식은 땀이 솟아 흘렀다.

"일단... 수술은 잘 끝났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문제예요......"

'???......암이라고???...... 무슨 암???...... 위암???......
그냥 힘들어서 몸이 좀 허약해 진 게 아니고 암???......
피곤이 겹쳐서 영양 주사 맞을 정도가 아니고 암???
감기 몸살도 아니고 암???
게다가 내가 없이... 나도 모르게 혜숙이 수술을 받았다고???
이걸 날더러 믿으라구???......
이걸 어떻게 믿어!!!......
아니야!!! 우리 혜숙이......말도 안 돼!!!'

내 머리 속은 청천벽력으로 얻어 맞은 듯 온통 뒤죽박죽이다.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그리고 내가 꼭 알아야 할 일을......
내가 허락하고 동의해야 될 일을......
내가 없는데서... 내가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 한 결과를......
내가 왜 전해서 들어야 하는 건데???......'

나는 믿을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건 무효였다.

'맞다!!!...... 맞아!!!...... 무효다 무효!!!......'

"원래 몸이 좀 약해 보이긴 해도...
우리 혜숙이 그럴 리 없을 텐데요???"

나는 별 일도 아닐 일을 가지고 목사님께서 고연히 남 속을 뒤집어 놓고 난리인가......
하듯 언짢은 말투로 내 뱉었다.

"받아 들이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요......
3 기에서 4 기 사이라던데 여하튼 마음을 굳게 가져야 돼요......
본인하고 식구들은 아직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자~알 대처하시구요....."

목사님은 내 아내 혜숙이 앞으로 3 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될 꺼라는 말씀을 완곡하게 흘리셨다.

하지만 나는 머리 속에서 계속 '무효!!!'라고
부정하면서 안간힘으로 떼를 쓰고 있었다.




 

08. 어머니 - 나의 어머니


감옥에 영치되어 있던 책과 소지품을 담은
군대용 더블백만한 보따리를 들고 집에 들어 섰다.

집안이 조용하다.
기척을 느끼셨는지 어머니께서 달려 나오신다.
오랜 만에 뵙는 모습이다.


▲ 김정열(金貞烈)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내가 네 번씩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 면회를 거의 오지 않던 분이시다.
재판받는 법정에도 나오시지 않았다.

내가 74 년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사건으로 첫 번째 구속되었을 때다.
다른 동료 학생 어머니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자식에 대해
무슨 소식과 정보라도 귀동냥할 수 있을까... 해서 면회도 안 되는 서울구치소 앞에
매일매일 모여 웬종일 서성이다 돌아가곤 하셨다.

함께 구속자 가족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시기도 하고 종교 단체와 인권 단체를 찾아 다니면서
관심과 지원을 이루어 내기도 하셨다.

그런데 내 어머니는 그런저런 모임에 한 번도 나타난 적 없고
연락도 소식도 전혀 없으셨다.

어쩌다 피치 못할 모임에는
어머니 대신으로 아버님이 참석하셨다.

그래서였던가?
그 당시 나에게는 어머니가 안 계시거나 친어머니가 아닐 꺼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 부모님들 뿐만 아니라 내 동료 선후배들까지
나를 그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는 오산 시내 한복판에서 조산원을 운영하셨다.

그리고 경기도 화성군 보건소에서 오랜동안 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어머니(김정열 金貞烈)는 1918년 5월 1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김현찬(金鉉贊) 목사와 박철미(朴撤䓺) 사모 슬하에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같은 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함남노회 김현찬(金鉉贊) 목사를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해삼위)에 선교사로 파송하여
어머니는 어린 시절을 초대교회 해외선교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내셨다.



▲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海蔘威)


나의 외할아버지 김현철 목사님은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시면서도

만주 용정과 명동 훈춘 함흥 등지로 부흥 목회를 다니셨다.




▲ 1920. 09. 09 동아일보 기사.


1920년 동아일보 09.09일자 신문 보도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톡에 파송된 해삼교회(海參敎會) 김현철 목사가
함흥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내도하여 복음강연회를 열고
수백 명의 청중에게 오묘한 진리를 강연하여 대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산회하였다더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휨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어
1922년에는 해삼교회(海參敎會)를 중심으로 교회당 34개, 목사 5인, 장로 8인,
소학교 6개, 야학교 35개, 주일학교 15개, 등록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갖추게 되어
시베리아 노회를 설립할 정도로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박용규 저, 한국기독교회사 2권 중에서)


1931년 부친 김현찬 목사가 함흥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자
어머니는 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셨다.


함흥중앙교회는 북장로회 선교사인 스왈른(W. L. Swallen: 所安論) 목사가 
1896년 8월 1일에 2층 양옥 예배당을 지었다.


3․1 운동 때는 스왈른(W. L. Swallen: 所安論) 목사에 이어

캐나다 장로교의 맥레(D.M. McRae:馬具禮)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소방기구인 쇠갈퀴를 마구 휘둘러 대는 광경을 본 맥레 선교사는 경찰서장에게
“학생들의 머리에 불이 붙었느냐? 왜 쇠갈퀴를 휘두르냐?”
고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외할아버지가 담임하셨던 함흥 중앙교회


▲ 1932년 (昭和 7년)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어머니 상장.


함흥은 기독교가 비교적 일찍 들어갔고, 대단히 왕성했던 곳이다.
한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YMCA운동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 함흥이다.


함흥에는 기독교기관이 여럿 있었다.
영생학교(永生學校)와 영생여학교, YMCA와 남녀성경학원이 있었고, 제혜병원이 있었다.

이런 기관들이 모두 함흥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설립되거나 운영되었다.


함흥중앙교회 사택은 방이 18 개와 거실 화장실 합하면 21 개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면서 집안 청소하는 일이 가장 싫고 지긋지긋하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더우기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는 원산도립병원 기숙사 생활을 하셔서

평생을 큰 집이라면 질색을 하셨다.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소풍


▲ 가사 교육 중인 어머니 (뒷줄 가운데)


나는 평생을 살아 오는 동안 어머니께 '이 녀석' 하는 욕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

또한 어머니께서 이웃과 말다툼을 한다거나 언성을 높여 따지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자라면서 혼이나 야단은 많이 받아 보았지만 언성이 집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만큼이다.

어머니는 누구를 대하든지 항상 친절하고 단정한 예절이 몸에 배어 있으시다.


차나 술을 따를 때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밝은 미소를 머금고

왼손은 주전자 밑을 바치고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따르신다.


1936년 3월 함경남도립 함흥의료원으로 진학하여 간호부 조산부 과정를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결혼 전까지 기숙사 생활을 하셨다.


▲ 1936년 (昭和 11년) 함경남도립 함흥의료원 졸업증서


▲ 1939년(昭和 14年) 3월 23일 어머니 간호부 면허증.


▲ 원산도립병원 소아과 기념사진


▲ 일본 규슈(九州)의 오이타현(大分縣)에 속해 있는 벳푸시(別府市) 수학여행 (앞줄 왼쪽이 어머니)

    비둘기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으신 모습~


▲ 벳푸시(別府市)는 대규모 관광지이며 벳푸만에 접해 있다.


▲ 벳푸시(別府市)는 온천 휴양지로 유명하다.


▲ 벳푸시(別府市)에는 약 3000개가 넘는 온천이 있고 대중탕만도 약 170여 개에 이른다.


▲ 벳푸시(別府市) 天神町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 벳푸시(別府市)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 벳푸시(別府市)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6․25 전쟁으로 월남한 함흥중앙교회 교인들은 서울 남산 서쪽 자락에 반성교회를 세웠고
반성교회는 이후 한성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월남한 어머니의 친척들은 대체로 한성교회를 다녔고 나와 내 누이도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한성교회를 다니면서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 등으로 봉사했다.


영생학교는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56년 4월 1일 영생여고보 동창생들이 자금을 모금하고 출연하여 모교 재건위원회를 발족하고

1978년 4월 영생학원을 설립했다.

1990년 1월 남녀공학 7학급으로 영생고등학교가 인가되고 3월 개교하여 제1회 입학식을 가졌다. 


▲ 1990년에 재건된 영생고등학교의 교훈탑. 이 교훈탑은 한신대학교에서 기증했다.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 영생고등학교 교정




09. 전설적인 테너 이인범과 어머니



나의 외할아버지 김현철 목사님 이후 함흥중앙교회 담임으로 시무한 이학봉(李學鳳) 목사님은

해방 후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를 당했는데 연세대 음대학장을 지낸 테너 이인범(李仁範) 교수의 부친이시다.

<순교자>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작가 김은국(金恩國)씨는 이학봉 목사님의 외손자다.


어머니는 영생여고보와 함남도립함흥의료원 간호부 조산부 과정을 다니던 중 방학이 되면

네 살 연상인 테너 이인범(李仁範 1914~1973) 교수가 이끄는 중창단원으로 뽑혀서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성가를 공연하고 선교활동을 하셨다.


중창단원으로 때로는  함경남도 원산 출신 가수 김정구(金貞九 1916~1998)와
목사의 딸로 평안남도 강서 출신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 1919 ~ 1995년) 등도 함께 합류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평소에도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을 좋아하시고 아주 구성지게 잘 부르셨다.


이인범은 40년대와 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테너 가수였고, 

연세대 음악대학장으로 재직한 60년대에도 대학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내면서 무대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음악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3년에 한번은 꼭 독창회를 열었고

'한국오페라단'을 창립해서 이 땅에 오페라의 씨를 심고 가꾸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인범은 평양 숭실중학 시절부터 음악회마다 독창을 도맡다시피 했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남자가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없어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음대가 없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유학생인 김영환이 일본에서 귀국해서
연희전문학교에 양악대와 합창단을 조직하고 평양을 비롯한 전국 공연을 다니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김영환이 사임한 뒤 연희전문은 후임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중이던 현제명을 불러들여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전국 최고의 음악그룹으로 향상시켰다.


이인범은 현제명을 사사하며 음악부에 들어가 연희4중창단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제1 테너를 맡아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을 보면 이미 전국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테너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으로 훗날 한양대학교를 설립하고 총장을 역임한 작곡가 바리톤 김연준,
1950∼60년대 미국의소리(VOA) 방송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아나운서 황재경(베이스)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모윤숙의 동생인 모기윤 등이 당시 이인범과 함께 활동한 학생들이다.


▲ 1936년 연희전문4중창단. 왼쪽부터 이인범 모기윤 김도집 김연준


이인범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일본고등음악원 유학 중이던 1939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한 전일본음악콩쿠르 성악부에서 수석 입상을 차지한 일이다.


이인범은 1등 없는 2등상을 받았는데,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한국인이라고 1등상을 주지 않는 심사위원들에 대해 커다란 비난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 수상은 재일 한국 유학생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용기를 얻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듬해 도쿄에서 기념독창회를 가졌는데
이 독창회는 이인범이 천부의 미성과 음악적 재질을 가진 당대의 독보적인 테너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음악회였다.


이인범은 시원하고 맑게 트인 미성(美聲)을 올곧게 뻗쳐내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세계의 3대 테너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꼽는데
이중에서도 파바로티의 팬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그가 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이인범의 오페라 몇 곡에 대해 전문가들은 결코 이인범이 파바로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지금 이런 테너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세계 최고급의 가수로 각광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 무렵 1953년 10월의 어느 일요일,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이정자가 셋집 부엌에서 석유곤로를 다루다 화재가 났다.

당시는 휘발유가 석유보다 싼 시절이어서 업자들이 석유에 몰래 휘발유를 섞어 팔던 때였다.


휘발유 때문에 삽시간에 불이 부엌에 옮겨 붙자 달려가 곤로를 밖으로 들고 나오던 이인범은
얼굴과 목, 어깨 부분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고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얼굴이 나무등걸처럼 심하게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코와 입으로는 도저히 소리를 뽑아낼 수도, 무대에 설 수도 없게 되었다.


전국을 사로잡던 대스타가 더이상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30대 후반의 창창한 젊은 이인범은 절망 속에서 나뒹굴었다.


당시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이 이인범을

일본의 유명한 병원으로 보내 정형수술을 받도록 지원을 해주기도 했지만

옛날의 준수한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인범은 그냥 무너지지는 않았다.
순교당한 지조 있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2년 여 동안의 절망과 어둠 속에서 그는 신앙의 힘으로,
피를 토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섰다.


1956년 5월 8일 명동 시립극장에서 열린 이인범 재기독창회.
대형 사고를 당해 사라진 이인범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장안은 들끓었다.


매표가 시작되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립극장부터 명동입구까지 장사진이 펼쳐졌다.
공연 전날 표가 매진된 그의 재기독창회는 한국 공연사상 최초의 매진 이벤트를 기록한 하나의 사건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단 신협 단장 이해랑과 배우 최남현이 분장실로 달려왔다.
얼굴에 분을 칠하고 상처를 가리려 도와줬으나 왼쪽에만 겨우 분이 먹을 뿐이었다.


무대에 올라간 이인범은 말했다.


“악단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진 지 3년,

이 추한 모습을 하고 음악을 할 것인가, 아주 단념해 버리고 말 것인가.
그동안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탄식 속에서

재기와 실망의 십자로를 방황하며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며

불우한 환경을 망각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내 외양은 변하였으나 음성은 되찾았다는 데에 감사하며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 테너 이인범 교수


그는 한쪽 얼굴을 가리려고 객석을 향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서서
첫곡 스트라델라의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순 장내는 고요해졌다.
몇 년 만인가. 어떤 고비를 지나왔던가.


이인범의 노래는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극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최초로 불러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만든 가곡 ‘가고파’를 비롯해
‘발렌치아’ ‘카바티나’ ‘쿠유스 아니맘’ 같은 고난도의 오페라곡들이 메아리쳤다.


관중들은 절정의 도가니 속에서 박수를 멈추지 못했다. 대성공이었다.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부인 이정자 씨가 음악회 처음부터 끝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반주를 했다는 사실도 대서특필되었다.


아내 이씨는 황해도 이름 있는 의사 가문의 딸로
최초의 피아니스트인 김영환을 사사한 숙명여대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사고 이후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살림과 자녀교육, 남편의 치료 뒷바라지에 헌신을 다했던 희생적인 여인이었다.


훗날 많은 이인범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불멸의 스타로 더욱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에 있다.


재기독창회에 성공하면서 이인범은 1961년부터 연세대 음대교수로 재직했고
66년부터 73년 타계할 때까지는 음대학장으로 봉직했다.


타계할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는 음대 학생들이 준비하는 오페라 연습소리를 들으며
하루빨리 일어나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채 60이 안 된 안타까운 나이였다.


나는 자라면서 테너 이인범의 노래를 어머니따라 수없이 들어왔다.

그가 화상을 입었을 때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어쩔줄 몰라 하셨고

재기독창회 때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신문을 보면서 안도하셨다.


연세대에 입학하고 나는 음대학장이던 이인범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채플시간이나 음악회에서 직접 듣고 보면서 각별한 감동을 받았다.


그의 딸 이방숙(李芳淑) 피아니스트는 아버지에 이어

1992∼94년에 연세대 음대학장을 지내면서

부녀(父女)가 연세대 음대학장을 역임한 드문 기록을 세웠다.


▲ 테너 이인범의 딸 피아니스트 이방숙 교수


이방숙 교수는
“아버지는 녹음기가 평생의 친구였다. 그만큼 자신의 노래에 대해 철저히 연구를 하며 사셨다.
화상을 입은 이후 출타를 할 때는 모자를 쓰고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셨다.
한탄처럼 자가용이 한 대 있었으면 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두고두고 그 말씀이 걸린다”

고 술회했다.


이인범은 화상을 당한 이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벽에 붙여놓고 살았다고 한다.




10. 가정을 지키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노래는 참으로 맑고 고왔다.

내심으로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완고한 집안 분위기에 엄두를 못냈다고 하셨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어머니가 부르시는 브람스의 자장가와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들고 깨고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 원산도립병원에 근무할 때 기타 치며 노래하는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앉으나 서나, 방에서 부엌에서, 시시때때로 노래 부르기를 즐기셨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연수교육장에서, 수학여행 등 각종 모임에서는 어머니께 으례 노래 부르시도록 요청했고

어머니 노래는 어디서나, 어느 모임에서나 가장 인기있고 단연 돋보이는 행사였다.


▲ 축음기를 들으시는 어머니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창립하고 이어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황석영 김종철 김민기 채희완 등이 두어 차례 우리집에서 모임을 갖고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나는 어머니께 노래를 청했다.

어머니는 흘러간 옛노래부터 최근에 유행하는 노래까지 거의 전천후로 알고 계셨다.


그날은 아마도 모인 분들의 취향에 따라 특별히 독립운동가를 부탁드렸던 것 같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고향을 그리며 하염없이 불렀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애달프게 부르셨다.


1. 내 고향을 이별하고 타관에 나와
적적한 밤 홀로 앉아서 생각을 하니
답답한 마음 아 ㅡ 누가 위로해


2. 청천으로 날아가는 저 기럭떼야
너 가는 길 그리 바쁘냐 이내 회포를
우리 부모께 아 ㅡ 전해 주려마


3. 우리 집을 떠나 올 때 내 어머님이
문 앞에 나와 눈물 흘리며 잘 다녀 오라
하시던 말씀 아 ㅡ 귀에 쟁쟁타

 

4. 우리 집서 멀지 않아 좀 더 나가면
시내물이 졸졸 흐르고 내 어린 동생
놀던 그 형상 아 ㅡ 그리웁고나

 

5. 무릇 덥고 괴로웁던 긴 여름 날은
시원하게 다 지나가고 가을 아침에
부는 찬바람 아 ㅡ 적막하구나


참석한 이들은 감동과 충격에 젖어 말을 잊지 못했다.

김민기는 알고 계신 독립운동가를 더 불러달라고 간청했다.

어머니는 알고 있는 독립군가를 계속 부르셨다.


▲ 교회 행사에서 복음성가를 부르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아들 둘에 딸 셋인 집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가 어린이 동요를 작사 작곡하여 퍼트린 죄로 체포되고 구속 수감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석방되었지만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모임이 있고부터 노래분과 모임을 준비하는 이들이

우리집에 들러 어머니 노래를 채록해 가기도 했다.


1985년 5월 18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는 흥사단 대강당에서 개최하는 5.18광주민중항쟁 추모집회에

어머니를 초청하여 독립운동가 노래를 공연하시도록 했다. 


당시 살벌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어머니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 4곡을

실수없이 잘 부르셨고 집회도 성황리에 무사히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하나, 3부 42.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참조)


▲ 부모님 결혼식 사진


어머니는 1940년 만주에서 인쇄사업을 크게 하시던 아버님(최내길 崔乃吉)과 결혼 후

1943년 아버님 고향인 경기도 평택으로 이주하고 얼마후 장녀 최다미(崔多美)를 출산했다.


1949년 나를 낳으시고 1950년 한국전쟁 때는

화성군 동탄면 신리 큰댁으로 피난해서 2년 여를 계셨다.


▲ 1954년 경기도 조산원 자격시험 합격증서.


휴전이 되고 1954년 어머니는 경기도에시 실시한 조산원 자격시험에 합격하시고

1955년 경기도 오산에서 조산원 개업하셨다.


1964년 전국에 군 단위로 보건소가 생기고부터 1976년까지  

경기도 화성군보건소에서 가족계획지도원으로 근무하셨다.


재직 중에 경기도 전체를 대표해서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장을 비롯

국가 상장, 표창장 등을 다수 수여받으셨다.


▲ 1971년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장


아이를 낳을 때는 버~얼건 대낮을 놔두고 왜 그리도 해 떨어진 이후부터
다음날 해 뜰 무렵이 대부분이던지......

어머니는 출퇴근과 밤샘 왕진을 거듭하며 그야말로 밤낮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생활이셨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내가 서울로 유학가서 학생 운동을 하고 민주화 운동하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셨다.

내가 구속될 때마다 어머니는 하시는 일에 더 열심히 몰두하셨다.
나를 면회다니고 법정에 쫓아 다니고 모임과 집회에 찾아 다니고 하는 일들을
어머니는 하실 겨를도 없었거니와 아예 당신께서 하실 역할도 아니라고 여기셨다.

오히려 이 사회에서 독립해 살아가기가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기도 바쁜 세상에 학생 운동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할 새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이시다.

친정 오라버니가 일제 치하에서 독립 운동을 하시고

아버님도 초대교회 고명하신 목사님으로 지조를 지켜 오신 터라
그저 막무가내로 말리고 반대하진 않으셨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아까울 것 없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런 길로 들어서고
그런 과정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을 내심 못마땅해 하셨다.

내가 굳이 정의로운 신념을 가지고 이런 일을 계속한다면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시고
어머니라도 더 열심히 더 바쁘게 일을 하셔야 가정을 지키고 나를 지켜 줄 수 있다는 생각이시다.

당신께서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게 버텨 내셔야
결국 나를 이 험한 세상에서 지켜 낼 수 있다는 신념이시다.


하지만 내가 민청학련과 긴급조치9호 위반 등으로 구속되자

어머니는 1976년 강요에 의해 사표를 쓰고 공직에서 퇴직해야만 했다.


당시 어머니는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만큼 실망이 크셨고 오랜동안 실의에 빠지셨다.

나 또한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 간호장교로 복무하면서

장래 간호감을 목표로 삼고 월남전에 2차례씩 참전하는 등으로 경력을 관리해 오고 있던

나의 누이(최다미 崔多美, 1943년생) 또한 나로인해 사표를 쓰고 전역해야 했다.


1960년대부터 어머니는 오산감리교회 권사, 여선교회 회장, 수원서지방회 여선교회 회장 등으로 봉직하고
2000 ~ 2019년 현재 새문안교회 명예권사로 봉직하고 계시다.


오랜 만에 뵙는 어머니의 모습에 수심이 가득하신 듯하다.
지난 세 차례 출감했을 적에 뵙던 모습이 아닌 듯 느껴졌다.

그전에는 단정하고 밝은 표정으로 반갑고 다정하게 나를 껴안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내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오히려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시는 게 아닌가!
이런 적 없었는데.....

"고생 많았지?...... 몸은 괜찮아?......
어디 불편한데 없고?......"

"괜찮아요 어머니...... 우선 절부터 받으세요......"

눈시울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의 표정이 참으로 이런 적 없으셨다.

"애들은요???....."

낯선 사람을 만나 선문답 하듯 밑도끝도 없는 말을 여쭙고
오랜 만에 보는 집안 분위기를 어색하게 둘러 보았다.

"고운이랑 중수는 학교 갔고......
에미가 입원해 있어서......
막내는 교회 김순자 집사가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거기 가 있고... 에미 얘기는 들었어???......"

나는 어머니의 눈길을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외면하고 떨군 채 대답했다.

"예....."

어머니는 마중 나갔던 동료들이 으레 집으로 몰려 올 줄 아시고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으셨단다.

하지만 친구들과 선후배 동료들 모두 대전에서 해장을 한 터라서
나와 함께 아내 혜숙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갈 일을 서둘렀다.



 

11. 혜숙을 품에 안고


온 몸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건가...
핏기 바랜 얼굴에 초점 잃은 눈망울로 허공을 두리번거리는 표정인가......
흐트러진 머리칼에 산소마스크를 입에 달고 눈을 감은 모습인가......

오랜 만에 달려 보는 서울의 풍경...
가로수며 빌딩이며 거리의 사람들하며 완연한 봄기운으로 약동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막막하고 절망어린 상념에 잡혀 정신이 혼미해 갔다.
그러다가도 나는 소스라치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아니지... 아니야!!! 그럴 수 없어!!!......

차는 어느새 이대입구에서 서소문과 시청앞을 지나 청계고가를 달리고 있다.
머~얼리 병원 건물이 보인다.


▲  한양대학교 병원


높게 치솟아 오른 한양대학교 병원 건물 어디에선가
내 아내 혜숙이 창문에서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가 타고 가는 차를 알아 보고 나를 알아보고 반가움에 겨워 기다릴 것 같았다.
빨리 오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빨리 갈께... 조금만 기다려... 이제 다 와 가니까......'

나는 어느새 아내 혜숙과 1 년 6 개월 여 만에 아무런 제약과 감시 없이 자유롭게 만나
손도 잡아 보고 꼭 껴앉고 입술도 맞추고 할 생각에

가슴이 들뜨고 설레는 기분으로 바뀌고 있다.

절망과 죽음의 공포에서 재회의 기쁨과 희망의 환희로
나는 극과 극을 천방지축으로 왔다갔다 했다.

한양대학교 병원 입원실......
눈에 띄게 깨끗한 환자복을 입은 혜숙이 나를 기다리며 출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던 듯

문을 열자마자 "왔구나!!!" 하면서
두 손을 번쩍 치켜 들고 침대 위에서 내려와 밝고 화~안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 나 많이 기다렸지???... 마지막 면회도 못 가고, 오늘도 못 가고...
웬 일인가 걱정되고 마아~니 불안했지???...... 몸은 괜찮아???......"

혜숙은 무엇보다도 나를 감옥에 두고 마지막 면회를 지나친 일과
출감하는 마중도 못 한 것을 오로지 미안해 했다.
내가 먼저 염려하고 안부를 물을 사이도 없이......

나는 혜숙을 침대에 눕히고 꼬~~~옥 껴안았다.
혜숙의 몸은 날개를 달고 공중에 떠 있는 듯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착한 사람......'

나는 한없이 착잡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혜숙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면 그렇지... 혜숙은 핏기 바랜 얼굴도 아니고 초점 잃은 눈망울도 아니다!!!......

흐트러진 머리칼도 아니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어 있는 모습도 아니다!!!......
혜숙은 시종 반가움에 겨워 입가에 밝은 웃음을 달고 있지 않는가???......
얼굴색도 뽀얀데다가 나처럼 들떠 있고 홍조끼까지 돌고 있지 않는가???......

혜숙은 눈망울도 똘망똘망했다.
여러날 입원해서인지 몸이 약간 야윈 것 같았다.



 

12. 아내를 지킨 사람들


그동안 혜숙의 병 간호는 구속되기 전까지 내가 근무하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직원들과
동료들, 교인들 그리고 처제가 맡아 왔단다.

처제는 한양대 병원 간호사...
혜숙은 마침 동생이 근무하는 병동에 입원해 있다.

미처 대전까지 마중하지 못한 선후배 동료들이
삼삼오오 입원실로 몰려 온다.

손위 처남은 고등학교 선생님...
학교 수업을 조정해서 양해 구하고 오후 2 시 경 도착했다.

내가 해야만 했을 절차적 법적 보호자 역할은 처남과 처제가 맡아 왔다.
처남과 처제 나를 불러 세우더니 우선 먼저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단다.
처제가 1인용 빈 병실로 오라버니와 나를 안내한다.

나보다 한 살 연하인 손위 처남 매우 심각하고 어두운 표정이다.
순간 내 머리 속은 마치 내가 만든 스위시 영상 작품처럼

스위시 영상 작품에서처럼 자~알 정리 정돈되고 정열된 시 문장이
한줄한줄 비~잉빙 돌고 뒤집어 지고, 글자 하나하나로 쪼개지고 흩어지고
낙엽처럼 눈송이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휘날리 듯

1 년 6 개월 여 만에 만나고 보듬는 재회의 기쁨과 환희
그렇게 그렇게 비~잉빙 돌고 뒤집어 지고
뇌세포 마디마디 억만의 조각으로 쪼개 지고 떨어져 나가고

또다시 지옥같은 절망과 죽음의 공포가
뇌리에 박히면서 몸서리쳐 온다.

지금 마~악 감옥에서 빠져 나와 경황없고 충격이 클 줄 알겠지만
어차피 매제가 1 차 보호자이니만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대처하고 준비해야 할 것 아니냐며 처남은 내게 말문을 튼다.

약국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빛이 꺼~어먹게 변하고
온 몸으로 시시각각 통증이 몰려 왔단다.

그럴 때마다 진통제를 집어 먹고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약국에 딸린 방에서 떼굴떼굴 구르고 링거 주사를 맞고 했단다.

처남과 처제가 빨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자 했지만
아내 혜숙은 얼마 안 있으면 내가 감옥에서 나올텐데 그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석방되면 같이 가겠노라고 한사코 거절했단다.

본래 위궤양이 있어 그런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다.

혜숙은 또 시어머니 칠순 잔치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단다.
그러다가 쓰러져 어느날 혜숙이 일어 나지 못했단다.

처남의 경기중 경기고 절친한 친구 중에
지역 인근 일대에서 제법 소문날 정도로 유명하게 내과병원을 운영하는 이가 있었다.

수유리 전철역 근처 '육동휘 내과'......
처남과 처제는 혜숙을 우선 그 병원으로 데려 갔단다.

두어 해 전에도 혜숙은 비슷한 증세로 집 가까운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은 적 있다.
그때 혜숙은 내시경 검사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던지
다시는 이런 검사 안 받겠다고 내게 여러번 얘기했었다.

그 당시 검사 결과로 담당 의사는 약국을 하면서 식사하는 시간과 양이 너무 불규칙하다 보니
위궤양이 좀 심해져서 그렇다고 했다.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고 자극성 있는 음식을 피하면 괜찮아 질 꺼랬다.

혜숙이 내시경 검사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위궤양의 정도를 밝히려고 그토록 고통스런 검사를 받는다면
나부터서라도 그리 쉽게 받아 들일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육동휘 원장은 새로 도입한 기계라서 수면 상태로 검사하기 때문에
그전처럼 통증을 느끼지 못할꺼라고 겨우겨우 달래고 달래 검사를 받게 했단다.
검사를 마치고 내시경을 꺼내는데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올라 왔단다.

육 원장은 증세가 심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소견에
여러 날 걸려야 하는 검사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했단다.

검사 결과 암세포가 위 전체적으로 퍼져 있어
수술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상태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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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술을 거부당하고


처남과 처제 그리고 육동휘 원장은

내가 석방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서

무엇보다 먼저 시급히 수술해야만 한다고 의견을 모았단다.

마침 한양대 병원에 육 원장과 처남의 경기중고등학교 선배로
위암 수술에서는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섭섭할 전문의가 계시고
처제가 간호사로 있어 바로 입원하고

이틀 만에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단다.

하지만 주치의 김용일 박사는 이미 수술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것 같다고
치유란 게 수술만이 능사겠느냐고 완곡하게 거절하시더란다.

남편은 왜 안 보이느냐고 1 차 보호자인 남편과 상의해야겠다고 하시더란다.
처남은 당황하고 다급해 졌단다.


여동생이 같은 병원 간호사인데 그 형부라는 양반이 이 시급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징역살이 하고 있는 중이라고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피치 못할 일로...
말 못 할 임무를 어깨에 얹고 해외에 나가 2 주 후에나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정인듯
얼버무려 넘기고는 처남이 전적으로 위임받아 놓았다고 했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술만은 꼭 받게 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김용일 박사 말씀인즉슨 열었다가 손도 못 대보고 도로 닫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일단 손을 댄다 하더라도 마무리를 못 하고 덮어야 할 수도 있단다.
그런 상태면 차라리 손을 안 대는 게 더 낫단다.

그런 상태에서 손을 댈 경우 환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생명이 3 ~ 4 개월 못 넘길 수도 있고 급기야는 수술 도중 사망할 수도 있는데
제아무리 막중한 사명인지 뭔지.....
1 차 보호자인 남편의 동의없이 어떻게 손 댈 수 있겠느냐는 거다.

처남과 처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술만은 꼭 받게 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환자의 여동생이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데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설혹 병원에 누가 되는 일 불미스런 일을 끼치기야 하겠느냐면서
선처해 달라고 매달렸단다.

처남은 워낙 다급했던 나머지 감옥에 있는 나와 상의할 겨를이 없었단다.
설사 그럴 겨를이 있었더라도 출감을 앞두고 그 안에서 내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싶었단다.

1 차 보호자...
1 차 보호자인 내 동의를 꼭 받아야겠다고 완강히 거절하면 대전 교도소로 달려 갈려고

했 었 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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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내가 지켜야


나는 피가 온 몸에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술술술 새나가는 것 같았다.

머리에 배어 있는 피가
등줄기로 마구 흘러 내리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왔다.
몸이 비틀리고 휘청거렸다.
털썩 주저 앉았다.
앞이 캄캄했다.

처남은 나를 부축하더니
당신이 잘 버텨 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무너지면 혜숙은 어떡하고
가정은 어떡하느냐고 했다.

혜숙은 전혀 모른다고 했다.
혜숙은 그저 위궤양이 심해서
간단한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안단다.
어머니도 아이들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지금부터는 모든 일을
내가 맡아서 판단하고 처리하고
헤쳐 나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처남과 처제에거 물었다.

수술 결과는 어떤가......
아내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처남은 지금 이 순간부터
혜숙의 보호자 역할을
전적으로 내가 맡아 나가야 한다고 했다.

우선 주치의를 만나서
직접 들어 보라고 했다.

모든 일을 직접 맡아서 알아 보고
처리해 나가야 할 꺼라고 했다.

참으로 지극히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나는 처남이 야속했다.

야속했다기보다는
치떨리는 절망과 공포의 나락에서
밀려드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외로움을 헤쳐 나갈 지푸라기가 필요했고
기댈 언덕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져 온 채로
지금 마~악 감옥에서 빠져 나왔는데.....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채로
감옥보다 더한 절망과 공포에 시달려
몸서리치고 있는데.....

하지만 처남의 말은 백번 옳다.
내가 버텨야 한다.

내가 맡아야 하고 내가 지켜야 한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헤쳐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아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지옥같은 고통과 절망과 공포는
나보다 훨씬 더 크고 심할 테니까.....

아~~~!
아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니.....
내 사랑 혜숙이 죽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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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식은 땀만 흐르고



감옥에서 출소할 때마다
나는 며칠 씩 미열이 오르고
식은 땀이 끈적지게 흐르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처음에는 까닭을 알 수 없어
그저 몸이 허해지고
골아서 그렇거니 했다.

그런데.....
석방될 때마다
되돌이병처럼 계속 반복해서 앓게 되자
왜 이럴까??? 하고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감옥에서는 독방에서
웬종일 앉아 있고 누어 있고
잠자는 게 일과인데......

그러면서도 저녁 잠에 떨어지면
아침 기상나팔 소리에
단잠 깨기에 여간 꾀를 부리곤했는데......

방안을 밤새도록 밝혀 놓는
전기불도 없고
잠자리도 더 편안한데
왜 이리 잠이 안 오나......

처음에는 여러날 계속되고 나서야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신경안정제를 꺼내 주셨다.
그 후부터서 출소할 때마다 나는 한 일주일 가량
잠자리에 들기 전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했다.

감옥 안에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모습
시야에 잡히는 풍경은 항상 일정하다.
색깔도 단순하다.

담벽은 온통 백색으로 칠해져 있고
건물 내부는 허리춤을 기준으로 해서
아래쪽은 회색이고 위쪽은 백색이다.

옷 색깔은 청색
그리고 하늘과 땅.....

오로지 똑같은 풍경만 있어 사시사철 그런 풍경만 볼 수 있고
그런 색깔 그런 풍경에만 젖어 지낸다.

그러다가 감옥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에 널려 있는 온갖 색상이 눈으로 입력되고
갖가지 풍경이 스치면서 머리 속에 잔영으로 남게 된다.

눈으로 코로 귀로 피부로 온몸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스쳐 지나고 느껴지는 세상의 온갖 모습들은
감옥 안에서 담아 낸 용량에 비하면 가히 견줄 수 없을만큼

커다란 육체적 정신적 환경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대단하고도 엄청난 혼란이다.
그러니 출소할 때마다 복잡다단한 혼란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한동안 식은땀이 흐르고 잠을 설쳐 댈 수밖에.....

나는 이미 온 몸이 식은땀에 젖을대로 젖어 있었다.
시시큼큼한 땀내가 진동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온통 기름으로 뒤집어 쓴 듯 온몸이 끈적거렸다.
그런 몰골로 망연자실해서 한동안 병실 벽에 몸을 의지하고 기대 있었다.

주치의 김용일 박사 방에서 진료실로 내려 오라는 전갈이 왔다.
처남과 처제 그리고 혜숙의 친구 천영초와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

나는 마치 재판정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마지막 판결을 받으러 가는 피고인의 심경이었다.

사형인지 무기 징역형인지.....
혹시라도 무죄 석방되는 기적은 없는지.....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심판하는
재판장의 처분을 받아야 하는
피고인의 심정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그보다 더더더더더.....

하느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는 심정이었다.

지옥인지.....
연옥인지.....

기적과 희망의 천국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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