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어머니 - 나의 어머니


감옥에 영치되어 있던 책과 소지품을 담은
군대용 더블백만한 보따리를 들고 집에 들어 섰다.

집안이 조용하다.
기척을 느끼셨는지 어머니께서 달려 나오신다.
오랜 만에 뵙는 모습이다.


▲ 김정열(金貞烈)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내가 네 번씩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 면회를 거의 오지 않던 분이시다.
재판받는 법정에도 나오시지 않았다.

내가 74 년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사건으로 첫 번째 구속되었을 때다.
다른 동료 학생 어머니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자식에 대해
무슨 소식과 정보라도 귀동냥할 수 있을까... 해서 면회도 안 되는 서울구치소 앞에
매일매일 모여 웬종일 서성이다 돌아가곤 하셨다.

함께 구속자 가족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시기도 하고 종교 단체와 인권 단체를 찾아 다니면서
관심과 지원을 이루어 내기도 하셨다.

그런데 내 어머니는 그런저런 모임에 한 번도 나타난 적 없고
연락도 소식도 전혀 없으셨다.

어쩌다 피치 못할 모임에는
어머니 대신으로 아버님이 참석하셨다.

그래서였던가?
그 당시 나에게는 어머니가 안 계시거나 친어머니가 아닐 꺼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 부모님들 뿐만 아니라 내 동료 선후배들까지
나를 그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는 오산 시내 한복판에서 조산원을 운영하셨다.

그리고 경기도 화성군 보건소에서 오랜동안 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어머니(김정열 金貞烈)는 1918년 5월 1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김현찬(金鉉贊) 목사와 박철미(朴撤䓺) 사모 슬하에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같은 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함남노회 김현찬(金鉉贊) 목사를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해삼위)에 선교사로 파송하여
어머니는 어린 시절을 초대교회 해외선교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내셨다.



▲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海蔘威)


나의 외할아버지 김현철 목사님은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시면서도

만주 용정과 명동 훈춘 함흥 등지로 부흥 목회를 다니셨다.




▲ 1920. 09. 09 동아일보 기사.


1920년 동아일보 09.09일자 신문 보도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톡에 파송된 해삼교회(海參敎會) 김현철 목사가
함흥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내도하여 복음강연회를 열고
수백 명의 청중에게 오묘한 진리를 강연하여 대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산회하였다더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휨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어
1922년에는 해삼교회(海參敎會)를 중심으로 교회당 34개, 목사 5인, 장로 8인,
소학교 6개, 야학교 35개, 주일학교 15개, 등록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갖추게 되어
시베리아 노회를 설립할 정도로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박용규 저, 한국기독교회사 2권 중에서)


1931년 부친 김현찬 목사가 함흥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자
어머니는 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셨다.


함흥중앙교회는 북장로회 선교사인 스왈른(W. L. Swallen: 所安論) 목사가 
1896년 8월 1일에 2층 양옥 예배당을 지었다.


3․1 운동 때는 스왈른(W. L. Swallen: 所安論) 목사에 이어

캐나다 장로교의 맥레(D.M. McRae:馬具禮)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소방기구인 쇠갈퀴를 마구 휘둘러 대는 광경을 본 맥레 선교사는 경찰서장에게
“학생들의 머리에 불이 붙었느냐? 왜 쇠갈퀴를 휘두르냐?”
고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외할아버지가 담임하셨던 함흥 중앙교회


▲ 1932년 (昭和 7년)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어머니 상장.


함흥은 기독교가 비교적 일찍 들어갔고, 대단히 왕성했던 곳이다.
한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YMCA운동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 함흥이다.


함흥에는 기독교기관이 여럿 있었다.
영생학교(永生學校)와 영생여학교, YMCA와 남녀성경학원이 있었고, 제혜병원이 있었다.

이런 기관들이 모두 함흥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설립되거나 운영되었다.


함흥중앙교회 사택은 방이 18 개와 거실 화장실 합하면 21 개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면서 집안 청소하는 일이 가장 싫고 지긋지긋하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더우기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는 원산도립병원 기숙사 생활을 하셔서

평생을 큰 집이라면 질색을 하셨다.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소풍


▲ 가사 교육 중인 어머니 (뒷줄 가운데)


나는 평생을 살아 오는 동안 어머니께 '이 녀석' 하는 욕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

또한 어머니께서 이웃과 말다툼을 한다거나 언성을 높여 따지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자라면서 혼이나 야단은 많이 받아 보았지만 언성이 집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만큼이다.

어머니는 누구를 대하든지 항상 친절하고 단정한 예절이 몸에 배어 있으시다.


차나 술을 따를 때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밝은 미소를 머금고

왼손은 주전자 밑을 바치고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따르신다.


1936년 3월 함경남도립 함흥의료원으로 진학하여 간호부 조산부 과정를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결혼 전까지 기숙사 생활을 하셨다.


▲ 1936년 (昭和 11년) 함경남도립 함흥의료원 졸업증서


▲ 1939년(昭和 14年) 3월 23일 어머니 간호부 면허증.


▲ 원산도립병원 소아과 기념사진


▲ 일본 규슈(九州)의 오이타현(大分縣)에 속해 있는 벳푸시(別府市) 수학여행 (앞줄 왼쪽이 어머니)

    비둘기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으신 모습~


▲ 벳푸시(別府市)는 대규모 관광지이며 벳푸만에 접해 있다.


▲ 벳푸시(別府市)는 온천 휴양지로 유명하다.


▲ 벳푸시(別府市)에는 약 3000개가 넘는 온천이 있고 대중탕만도 약 170여 개에 이른다.


▲ 벳푸시(別府市) 天神町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 벳푸시(別府市)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 벳푸시(別府市) 노구치 요시노리(野口)병원



6․25 전쟁으로 월남한 함흥중앙교회 교인들은 서울 남산 서쪽 자락에 반성교회를 세웠고
반성교회는 이후 한성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월남한 어머니의 친척들은 대체로 한성교회를 다녔고 나와 내 누이도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한성교회를 다니면서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 등으로 봉사했다.


영생학교는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56년 4월 1일 영생여고보 동창생들이 자금을 모금하고 출연하여 모교 재건위원회를 발족하고

1978년 4월 영생학원을 설립했다.

1990년 1월 남녀공학 7학급으로 영생고등학교가 인가되고 3월 개교하여 제1회 입학식을 가졌다. 


▲ 1990년에 재건된 영생고등학교의 교훈탑. 이 교훈탑은 한신대학교에서 기증했다.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 영생고등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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