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정을 지키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노래는 참으로 맑고 고왔다.

내심으로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완고한 집안 분위기에 엄두를 못냈다고 하셨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어머니가 부르시는 브람스의 자장가와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들고 깨고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 원산도립병원에 근무할 때 기타 치며 노래하는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앉으나 서나, 방에서 부엌에서, 시시때때로 노래 부르기를 즐기셨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연수교육장에서, 수학여행 등 각종 모임에서는 어머니께 으례 노래 부르시도록 요청했고

어머니 노래는 어디서나, 어느 모임에서나 가장 인기있고 단연 돋보이는 행사였다.


▲ 축음기를 들으시는 어머니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창립하고 이어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황석영 김종철 김민기 채희완 등이 두어 차례 우리집에서 모임을 갖고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나는 어머니께 노래를 청했다.

어머니는 흘러간 옛노래부터 최근에 유행하는 노래까지 거의 전천후로 알고 계셨다.


그날은 아마도 모인 분들의 취향에 따라 특별히 독립운동가를 부탁드렸던 것 같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고향을 그리며 하염없이 불렀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애달프게 부르셨다.


1. 내 고향을 이별하고 타관에 나와
적적한 밤 홀로 앉아서 생각을 하니
답답한 마음 아 ㅡ 누가 위로해


2. 청천으로 날아가는 저 기럭떼야
너 가는 길 그리 바쁘냐 이내 회포를
우리 부모께 아 ㅡ 전해 주려마


3. 우리 집을 떠나 올 때 내 어머님이
문 앞에 나와 눈물 흘리며 잘 다녀 오라
하시던 말씀 아 ㅡ 귀에 쟁쟁타

 

4. 우리 집서 멀지 않아 좀 더 나가면
시내물이 졸졸 흐르고 내 어린 동생
놀던 그 형상 아 ㅡ 그리웁고나

 

5. 무릇 덥고 괴로웁던 긴 여름 날은
시원하게 다 지나가고 가을 아침에
부는 찬바람 아 ㅡ 적막하구나


참석한 이들은 감동과 충격에 젖어 말을 잊지 못했다.

김민기는 알고 계신 독립운동가를 더 불러달라고 간청했다.

어머니는 알고 있는 독립군가를 계속 부르셨다.


▲ 교회 행사에서 복음성가를 부르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아들 둘에 딸 셋인 집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가 어린이 동요를 작사 작곡하여 퍼트린 죄로 체포되고 구속 수감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석방되었지만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모임이 있고부터 노래분과 모임을 준비하는 이들이

우리집에 들러 어머니 노래를 채록해 가기도 했다.


1985년 5월 18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는 흥사단 대강당에서 개최하는 5.18광주민중항쟁 추모집회에

어머니를 초청하여 독립운동가 노래를 공연하시도록 했다. 


당시 살벌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어머니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 4곡을

실수없이 잘 부르셨고 집회도 성황리에 무사히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하나, 3부 42.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참조)


▲ 부모님 결혼식 사진


어머니는 1940년 만주에서 인쇄사업을 크게 하시던 아버님(최내길 崔乃吉)과 결혼 후

1943년 아버님 고향인 경기도 평택으로 이주하고 얼마후 장녀 최다미(崔多美)를 출산했다.


1949년 나를 낳으시고 1950년 한국전쟁 때는

화성군 동탄면 신리 큰댁으로 피난해서 2년 여를 계셨다.


▲ 1954년 경기도 조산원 자격시험 합격증서.


휴전이 되고 1954년 어머니는 경기도에시 실시한 조산원 자격시험에 합격하시고

1955년 경기도 오산에서 조산원 개업하셨다.


1964년 전국에 군 단위로 보건소가 생기고부터 1976년까지  

경기도 화성군보건소에서 가족계획지도원으로 근무하셨다.


재직 중에 경기도 전체를 대표해서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장을 비롯

국가 상장, 표창장 등을 다수 수여받으셨다.


▲ 1971년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장


아이를 낳을 때는 버~얼건 대낮을 놔두고 왜 그리도 해 떨어진 이후부터
다음날 해 뜰 무렵이 대부분이던지......

어머니는 출퇴근과 밤샘 왕진을 거듭하며 그야말로 밤낮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생활이셨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내가 서울로 유학가서 학생 운동을 하고 민주화 운동하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셨다.

내가 구속될 때마다 어머니는 하시는 일에 더 열심히 몰두하셨다.
나를 면회다니고 법정에 쫓아 다니고 모임과 집회에 찾아 다니고 하는 일들을
어머니는 하실 겨를도 없었거니와 아예 당신께서 하실 역할도 아니라고 여기셨다.

오히려 이 사회에서 독립해 살아가기가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기도 바쁜 세상에 학생 운동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할 새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이시다.

친정 오라버니가 일제 치하에서 독립 운동을 하시고

아버님도 초대교회 고명하신 목사님으로 지조를 지켜 오신 터라
그저 막무가내로 말리고 반대하진 않으셨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아까울 것 없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런 길로 들어서고
그런 과정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을 내심 못마땅해 하셨다.

내가 굳이 정의로운 신념을 가지고 이런 일을 계속한다면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시고
어머니라도 더 열심히 더 바쁘게 일을 하셔야 가정을 지키고 나를 지켜 줄 수 있다는 생각이시다.

당신께서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게 버텨 내셔야
결국 나를 이 험한 세상에서 지켜 낼 수 있다는 신념이시다.


하지만 내가 민청학련과 긴급조치9호 위반 등으로 구속되자

어머니는 1976년 강요에 의해 사표를 쓰고 공직에서 퇴직해야만 했다.


당시 어머니는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만큼 실망이 크셨고 오랜동안 실의에 빠지셨다.

나 또한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 간호장교로 복무하면서

장래 간호감을 목표로 삼고 월남전에 2차례씩 참전하는 등으로 경력을 관리해 오고 있던

나의 누이(최다미 崔多美, 1943년생) 또한 나로인해 사표를 쓰고 전역해야 했다.


1960년대부터 어머니는 오산감리교회 권사, 여선교회 회장, 수원서지방회 여선교회 회장 등으로 봉직하고
2000 ~ 2019년 현재 새문안교회 명예권사로 봉직하고 계시다.


오랜 만에 뵙는 어머니의 모습에 수심이 가득하신 듯하다.
지난 세 차례 출감했을 적에 뵙던 모습이 아닌 듯 느껴졌다.

그전에는 단정하고 밝은 표정으로 반갑고 다정하게 나를 껴안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내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오히려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시는 게 아닌가!
이런 적 없었는데.....

"고생 많았지?...... 몸은 괜찮아?......
어디 불편한데 없고?......"

"괜찮아요 어머니...... 우선 절부터 받으세요......"

눈시울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의 표정이 참으로 이런 적 없으셨다.

"애들은요???....."

낯선 사람을 만나 선문답 하듯 밑도끝도 없는 말을 여쭙고
오랜 만에 보는 집안 분위기를 어색하게 둘러 보았다.

"고운이랑 중수는 학교 갔고......
에미가 입원해 있어서......
막내는 교회 김순자 집사가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거기 가 있고... 에미 얘기는 들었어???......"

나는 어머니의 눈길을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외면하고 떨군 채 대답했다.

"예....."

어머니는 마중 나갔던 동료들이 으레 집으로 몰려 올 줄 아시고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으셨단다.

하지만 친구들과 선후배 동료들 모두 대전에서 해장을 한 터라서
나와 함께 아내 혜숙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갈 일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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