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전설적인 테너 이인범과 어머니



나의 외할아버지 김현철 목사님 이후 함흥중앙교회 담임으로 시무한 이학봉(李學鳳) 목사님은

해방 후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를 당했는데 연세대 음대학장을 지낸 테너 이인범(李仁範) 교수의 부친이시다.

<순교자>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작가 김은국(金恩國)씨는 이학봉 목사님의 외손자다.


어머니는 영생여고보와 함남도립함흥의료원 간호부 조산부 과정을 다니던 중 방학이 되면

네 살 연상인 테너 이인범(李仁範 1914~1973) 교수가 이끄는 중창단원으로 뽑혀서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성가를 공연하고 선교활동을 하셨다.


중창단원으로 때로는  함경남도 원산 출신 가수 김정구(金貞九 1916~1998)와
목사의 딸로 평안남도 강서 출신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 1919 ~ 1995년) 등도 함께 합류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평소에도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을 좋아하시고 아주 구성지게 잘 부르셨다.


이인범은 40년대와 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테너 가수였고, 

연세대 음악대학장으로 재직한 60년대에도 대학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내면서 무대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음악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3년에 한번은 꼭 독창회를 열었고

'한국오페라단'을 창립해서 이 땅에 오페라의 씨를 심고 가꾸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인범은 평양 숭실중학 시절부터 음악회마다 독창을 도맡다시피 했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남자가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없어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연희전문에는 음대가 없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유학생인 김영환이 일본에서 귀국해서
연희전문학교에 양악대와 합창단을 조직하고 평양을 비롯한 전국 공연을 다니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김영환이 사임한 뒤 연희전문은 후임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중이던 현제명을 불러들여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전국 최고의 음악그룹으로 향상시켰다.


이인범은 현제명을 사사하며 음악부에 들어가 연희4중창단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제1 테너를 맡아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을 보면 이미 전국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테너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으로 훗날 한양대학교를 설립하고 총장을 역임한 작곡가 바리톤 김연준,
1950∼60년대 미국의소리(VOA) 방송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아나운서 황재경(베이스)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모윤숙의 동생인 모기윤 등이 당시 이인범과 함께 활동한 학생들이다.


▲ 1936년 연희전문4중창단. 왼쪽부터 이인범 모기윤 김도집 김연준


이인범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일본고등음악원 유학 중이던 1939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한 전일본음악콩쿠르 성악부에서 수석 입상을 차지한 일이다.


이인범은 1등 없는 2등상을 받았는데,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한국인이라고 1등상을 주지 않는 심사위원들에 대해 커다란 비난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 수상은 재일 한국 유학생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용기를 얻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듬해 도쿄에서 기념독창회를 가졌는데
이 독창회는 이인범이 천부의 미성과 음악적 재질을 가진 당대의 독보적인 테너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음악회였다.


이인범은 시원하고 맑게 트인 미성(美聲)을 올곧게 뻗쳐내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세계의 3대 테너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꼽는데
이중에서도 파바로티의 팬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그가 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이인범의 오페라 몇 곡에 대해 전문가들은 결코 이인범이 파바로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지금 이런 테너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세계 최고급의 가수로 각광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 무렵 1953년 10월의 어느 일요일,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이정자가 셋집 부엌에서 석유곤로를 다루다 화재가 났다.

당시는 휘발유가 석유보다 싼 시절이어서 업자들이 석유에 몰래 휘발유를 섞어 팔던 때였다.


휘발유 때문에 삽시간에 불이 부엌에 옮겨 붙자 달려가 곤로를 밖으로 들고 나오던 이인범은
얼굴과 목, 어깨 부분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고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얼굴이 나무등걸처럼 심하게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코와 입으로는 도저히 소리를 뽑아낼 수도, 무대에 설 수도 없게 되었다.


전국을 사로잡던 대스타가 더이상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30대 후반의 창창한 젊은 이인범은 절망 속에서 나뒹굴었다.


당시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이 이인범을

일본의 유명한 병원으로 보내 정형수술을 받도록 지원을 해주기도 했지만

옛날의 준수한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인범은 그냥 무너지지는 않았다.
순교당한 지조 있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2년 여 동안의 절망과 어둠 속에서 그는 신앙의 힘으로,
피를 토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섰다.


1956년 5월 8일 명동 시립극장에서 열린 이인범 재기독창회.
대형 사고를 당해 사라진 이인범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장안은 들끓었다.


매표가 시작되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립극장부터 명동입구까지 장사진이 펼쳐졌다.
공연 전날 표가 매진된 그의 재기독창회는 한국 공연사상 최초의 매진 이벤트를 기록한 하나의 사건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단 신협 단장 이해랑과 배우 최남현이 분장실로 달려왔다.
얼굴에 분을 칠하고 상처를 가리려 도와줬으나 왼쪽에만 겨우 분이 먹을 뿐이었다.


무대에 올라간 이인범은 말했다.


“악단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진 지 3년,

이 추한 모습을 하고 음악을 할 것인가, 아주 단념해 버리고 말 것인가.
그동안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탄식 속에서

재기와 실망의 십자로를 방황하며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며

불우한 환경을 망각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내 외양은 변하였으나 음성은 되찾았다는 데에 감사하며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 테너 이인범 교수


그는 한쪽 얼굴을 가리려고 객석을 향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서서
첫곡 스트라델라의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순 장내는 고요해졌다.
몇 년 만인가. 어떤 고비를 지나왔던가.


이인범의 노래는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극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최초로 불러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만든 가곡 ‘가고파’를 비롯해
‘발렌치아’ ‘카바티나’ ‘쿠유스 아니맘’ 같은 고난도의 오페라곡들이 메아리쳤다.


관중들은 절정의 도가니 속에서 박수를 멈추지 못했다. 대성공이었다.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부인 이정자 씨가 음악회 처음부터 끝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반주를 했다는 사실도 대서특필되었다.


아내 이씨는 황해도 이름 있는 의사 가문의 딸로
최초의 피아니스트인 김영환을 사사한 숙명여대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사고 이후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살림과 자녀교육, 남편의 치료 뒷바라지에 헌신을 다했던 희생적인 여인이었다.


훗날 많은 이인범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불멸의 스타로 더욱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점에 있다.


재기독창회에 성공하면서 이인범은 1961년부터 연세대 음대교수로 재직했고
66년부터 73년 타계할 때까지는 음대학장으로 봉직했다.


타계할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는 음대 학생들이 준비하는 오페라 연습소리를 들으며
하루빨리 일어나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채 60이 안 된 안타까운 나이였다.


나는 자라면서 테너 이인범의 노래를 어머니따라 수없이 들어왔다.

그가 화상을 입었을 때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어쩔줄 몰라 하셨고

재기독창회 때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신문을 보면서 안도하셨다.


연세대에 입학하고 나는 음대학장이던 이인범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채플시간이나 음악회에서 직접 듣고 보면서 각별한 감동을 받았다.


그의 딸 이방숙(李芳淑) 피아니스트는 아버지에 이어

1992∼94년에 연세대 음대학장을 지내면서

부녀(父女)가 연세대 음대학장을 역임한 드문 기록을 세웠다.


▲ 테너 이인범의 딸 피아니스트 이방숙 교수


이방숙 교수는
“아버지는 녹음기가 평생의 친구였다. 그만큼 자신의 노래에 대해 철저히 연구를 하며 사셨다.
화상을 입은 이후 출타를 할 때는 모자를 쓰고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셨다.
한탄처럼 자가용이 한 대 있었으면 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두고두고 그 말씀이 걸린다”

고 술회했다.


이인범은 화상을 당한 이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벽에 붙여놓고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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