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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같은 사람 / 고은 (시인) 

 

 

나는 1970년대 이래

역대 독재 체제와의 싸움을 통해서

그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동시대인의 한 사람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 참여자의 희생과 온갖 시련도

나 자신의 자그마한 고행과 더불어 얼마든지 증언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런 동지들과의 연대와 합치를 통해서

그 인간적인 미덕에 대해 한없는 매혹을 체험한 바도 없지 않다.

 

최민화 씨는 74년 이래 변함없는 이 세상의 후배로서

변함없는 친밀성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함석헌 선생의 각별한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선배에 대한 겸손과 동지에 대한 원만

그리고 후배들에게 대해

들녘과도 같은 덕성을 발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실로 풍운이 긴박한 개인 생활의 난관을 이겨내 왔다.

나는 그의 딸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와 격의없이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왔다.

 

이런 최민화 씨가 지난 날의 아슬아슬한 고행과

그 극복 과정을 기록한 책을 내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의 어제, 오늘 내일의 영광을 기원하는 바이다.

 

 1996년 3월 <우리는 하나> (최민화 저 / 현암사 간)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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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02. 박 씨의 시련


이튿날 새벽
형사들이 찾아 와 박 씨를 연행해 갔다.

그리고 그는 폭행치사죄로 구속되고
재판을 통해서 7 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살 때 일어난 일이니까
그가 만기 석방되려면 35 세가 된다.

이 일로 해서 그는 물론이려니와
그의 가정 또한 얼마나 큰 시련을 당했을까.

변호사 측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요구할 때마다
돈을 끌어대야 했고

결국에는 논과 밭을 떼어 팔아
재산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

초범이고 범죄의 동기와 죄명
연령과 석방 후의 생활 보호 관계 등 여건이 좋으니까
형기의 3 분의 1 정도 복역한 다음

가석방될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변호사 측의 말을 한가닥 기대로 삼고
그는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꿈에도 상상 못했던 별천지 지옥같은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동안
그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있는 가정을 한없이 그리워했고
산과 밭, 논과 들이 있는 고향을 한시도 잊은 적없다.

수형 생활에 따르는 규율을 어기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게 되면
2 년 반 후에는
그리운 처자식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하루하루를
마음 속 깊이 다짐하고 노력하면서 생활했다.

세월이 흐르고 2 년 반이 지난 무렵부터
그는 감형이나 가석방 이야기가 나돌 때마다
'만기병'을 앓아야 했다.

이번에는 꼭 나가서
아버님 회갑연을 차려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이번에는 정말로 꼭 나가서
귀여운 딸아이 손목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만 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께서 아들 걱정에
한숨과 눈물로 지새우시다가
몸져 앓아 누우셨다는데...

이번에도 못 나가면
생전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는
불행이 닥칠 것 같고
불효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살고 살다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그는 마침내 특별 가석방으로
감옥문을 나서게 되었다.

4 년 여 동안 '만기병'을 호되게 앓던 끝에
7 년 형의 만기를 사흘 남겨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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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네 번째 감옥문을 나서는 날



'감옥살이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되겠는지.....'

60 년대 말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87 년 4 월까지 18 년 여 동안
나는 연행과 징집 제적과 구속, 석방과 복학을 거듭하면서
군 복무와 네 번에 걸친 감옥살이로 6 년 6 개월을 사회와 격리된 채 지내 왔다.

그러고보니 한창 젊고 혈기 왕성한 시절을 3 분의 1 은 세상과 담을 쌓은채
'저 세상'에서 지낸 셈이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감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에 담아 두어야지.....'

온통 백색과 회색뿐인 교도소 담벽과 건물들 색깔하며 육중한 철판덩어리로 만들어서 열고 닫을 때마다
'탕!' '탕!' 귀가 멍멍하도록 요란한 굉음을 내갈기는 감방문

팔뚝이 드나들지 못 하도록 촘촘하게 박아 세운 철창...
사시사철 냉기가 어리는 마루바닥...
고요하다 못해 하수구 물 흐르는 소리마저 귀에 와 닿는 적막함...

오로지 그런 환경에서만 27세 숫총각에 들어 와서 환갑에 이르도록 36 년 째를 살고 있는...
그것도 모자라서 지구상에 인간이 생겨 난 이래로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의 생성과 번성과 소멸의 역사를 합하더라도
하나의 생명체를 그토록 강제해서 가두어 둔 적 없었을 무려 45 년이라는 세월 만에 석방된 김선명 선생을 비롯해서 

세계 최장기수 분들.....


▲ 무려 45년(1951~1996) 동안 수감되었다가 1996년 석방된 김선명 선생


그렇게 살다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서 시신으로 감옥문을 나서게 된 분들.....
1 평 정도 되는 대전 교도소 특별사동 독방에서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또 다른 세속적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뭔지 확실치는 않지만 불안했다.
특히 아내가 마지막 접견을 오지 않았던 것이 머리를 맴돌며 이상한 조짐으로 다가 왔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혹시 아내 혜숙의 건강이 안 좋은 건가???.....

내 아내 혜숙은 내가 구속되고 감옥살이를 할 때마다
옥바라지에 관한 한 뒤따를 자가 없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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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옥바라지


첫 번째로 감옥살이를 할 때다.
나는 74 년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그녀와 함께 구속되었다.

전국적으로 1 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행되어 조사받고 구속되었는데
이화여대 학생으로는 그녀가 유일하게 구속된 것이다.

그 때는 세상이 하~~ 험악해서

구속된 학생들에게 접견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내가 소위 긴급조치 9 호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 그녀는 복학해서 3 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우리는 그때만해도 뜻을 같이하고 실천을 함께하는 선후배로, 학생운동의 동지로 만나던 사이였다.

내가 두 번째로 구속되자 그녀는 나서서 나의 옥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다니던 학교에서는 전공 과목과 수업 시간이 가장 많고 힘들다던 약학을 전공하면서
그녀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접견했다.

그뿐인가? 나의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 집을 수시로 왔다갔다하고
변호사를 만나고 인권 단체 사무실을 찾아 다니며 나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하는 일 등등으로
그녀는 그야말로 시간과 생활을 바쳤었다.

그렇게도 열성적이던 나에 대한 그녀의 옥바라지는
당시 서울 장안 대학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 년 여 만에 내가 감옥에서 석방되고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우리는 결혼했다.
이듬해 79 년 딸아이를 낳고 9 개월 여 만에 나는 또다시 박 대통령 시해 사태 직후에 일어난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시위 사건으로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 해서 세 번째로 구속되었다.

그때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계엄사령부 비상군법회의로 교도소로 면회를 다녔다.

하루도 빠짐없던 그녀가 어느날 접견을 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은 별의별 생각으로 뒤엉켰다.

'접견하러 오다가 쓰러진 건 아닌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됐을텐데...
아이를 출산한 건가???...
몸조리를 잘 해야 될텐데...
아마 한동안 면회 오기가 힘들겠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이튿날 아침 일찍 접견 소식이 왔다.

'...혜숙이 온 건가???..... 어머니시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나는 접견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혜숙의 밝은 표정이 눈에 화~~~악 들어 온다.

"어저께 마~니 기다렸지???......
어제도 올려구 그랬는데... 어머니가 하두 못 오게 말리셔서...
걱정 마~~니 했찌???... 그저께 자기 면회하고 약국에 있는데...
진통이 시작되는 거 같아서 약국 문 닫구 집으루 올라 갔어...
아들 났써... 저녁 8 시 경에... 살결이 허~어옇구 자~알 생겼써......"

'아!!! 그랬구나... 애를 낳는 날까지 접견을 왔었구나......'

"그런데 어떠케... 왜 왔어!!! 집에서 몸조리하구 있지!!!......"

"당신이 나 보구시포서 기다리구 있자나...
안 오면 걱정두 많을 꺼구... 첫 애 때보다 쉬웠어. 몸두 편하구......"

"그래두 찬바람 쐬믄 안 좋다는데...
이제 한동안 접견 오지 말구 집에서 몸조리나 잘 해....."

참으로 옥바라지하기를 이렇듯
온 몸과 영혼으로 하는 이가 있었을까???... 또 있을까???......

아내 혜숙은 그 흔한 산부인과 병원에도 가지 않고
세 아이를 모두 집에서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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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건강하십시요



 인신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는 미결 수용자의 신분으로 접견이 매일 허용된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징역형이 확정되면 기결수가 되어서 지방 교도소로 이감되고
 접견도 한 달에 한 두 번으로 제한된다.

 

 내 아내 혜숙은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구속될 때마다 미결수일 때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나를 접견했다.

 기결수일 때는 접견이 허용되는 만큼 단 한번도 빠진 적없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꼬박꼬박 찾아 다녔다.

 

 그런데 이상했다.
 

 청년 단체(민청련)를 조직 결성하고 집회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1 년 6 월의 형을 선고받은 나는 87 년 4 월 14 일로 만기를 채우고
 네 번째 감옥문을 나서게 되었다.

 

 대전교도소에서는 나에게 한 달에 두 번 접견을 허용했다.

 혜숙은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견하는 날을 미리 계획해서
 새벽 5 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첫 고속버스 편으로 출발해서
 언제나 아침 9 시 경 첫 번으로 나를 접견 왔었다.

 

 그런데 3 월 말과 4 월 초 두 번의 접견 기회를 혜숙은 지나쳤다.

 이런 적이 없었다.


 '집안에 무슨 피치 못할 일이 생긴건 아닌가???...
 혹시 혜숙이 병으로 쓰러진 건 아닌가???......'

 

 불안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단전 호흡을 하고 명상에 잠기도록 애써 가면서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해도 자꾸만 내 머리 속에서 맴돈다.

 

 동이 틀려면 아직 한 두 시간 쯤 더 남아 있을 새벽 4 시

 하루 중에 가장 어둠이 짙다는 시간에 깊은 적막을 깨고 철창문이 열렸다.

 

 마지 못해 하는 교도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나는 그야말로 '만기'도 없고 '만기병'도 앓아 본 적 없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여생을 칠흑같은 독방에서 지내야 하는지 기약할 수 없는
 세계 최장의 장기수 분들께 한분한분 작별 인사를 올렸다.


▲ 대전교도소


 "선생님!!!... 몸 건강하십시요...... 건강하세요 선생님......
 살아서 다시 뵙겠습니다...... 살아서 꼭 다시 만나요 선생님......"

 

 감옥 안에서도 겹겹으로 격리해서 감옥 속의 감옥으로 감시하고 관리하는 특별사동 문을 나서면서

 나는 다시 한번 짙은 어둠과 적막을 부숴 버리듯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쳐댔다.

 

 "선생님들!!!... 몸조리 잘 하시고 건강하십시요!!!......"

 "건강하신 몸으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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