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주치의와 대면


드디어 내 아내 혜숙의 온전한 보호자로
주치의 김용일 박사와 마주 앉았다.

재판장 앞인지... 저승사자 앞인지...
뒤엉킨 심사로.....


▲ 주치의 김용일 박사


김용일 박사는 68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78년부터 94년까지 한양대의대 일반외과 교수를 거쳐
94년부터 삼성서울병원 외과에서 일반외과장, 소화기센터장, 성대의대 주임교수 등을 역임한
소화기암 수술분야에 대가이시다.

내 후배 동료이자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굳이 따라 들어와 옆자리에 배석했다.

판결문과 형량 그리고 운명을
직접 확인하고 증거하려는 듯.....

법정에서처럼
인정 신문부터 시작한다.

"부군 되신다고요?......

그동안 어떻게......?"

당연했을 김용일 박사의 첫 번째 신문 사항에 대한 답변부터
그러고보니 나는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순간 뭐라고 진술해야 할지 당황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 두리번거리는 사이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눈치빠르게 수습하려 나섰다.

"오늘 아침에 대전 교도소 감옥에서 마~악 나왔어요...
그동안 1 년 반두 넘게 징역살다가요......"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했다.
나보다도 처남과 처제는 더 했다.

김용일 박사는 더욱 더 놀란 표정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면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천영초 역시

이거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던지
뒤따라 놀라면서 어쩔줄 몰라 했다.

한동안 혼란스럽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천영초는 기왕에 내친김이라 싶었던지 한번 더 까발리면서
진술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해 준다.

"저.... 우리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었어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석방된 거라구요......"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감옥을 네 번씩 살고
그 안에서 절도 사기 횡령 등 파렴치범들과
강도 강간 폭력 등 흉악범들을 셀 수 없이 만나고 보아 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밖에서 만나거나 본 적은 없다.
내가 가까이 알거나 그저 막연하게나마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징역을 살았다는 말조차 전해 들은 기억도 없다.

사람사는 세상이 이토록 천차만별인데
밑도끝도 없이 징역형을 살다가 새벽에 감옥문을 나섰다는 사람을
오후에 탁자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마주 앉아 상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김용일 박사를 저으기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 법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제서야 해외에서
마~악 돌아왔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사람이

아무리 사정이 그렇더라도
좀 더 빨리 올 수는 없었느냐고 지적하면서

뭔놈의 사정인지 환자 대신으로
따끔하게 훈계 한 번 하고 넘어 가려던 주치의는
느닷없는 상황 변화에 충격을 받을 만했다.

계속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긴장이 감싸고 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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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형만은 면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하고
고운 모습에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
김용일 박사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기왕에 들통났으니 하는 말인데...
이날 이때껏 생명과 재산을 바쳐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고통당하고 감옥살이 하다가
지금 마~악 출소해서 나왔는데.....

양식있는 분이라면 나를 또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그러면 벌 받을 꺼라고
항의하고
싶 - 었 - 다.

"이렇게 뒤늦게 찾아 뵙게 돼 죄송합니다...
저는 사정을 전혀 몰랐습니다.
여기로 오는 동안 잠깐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도무지 무슨 얘긴지 못 알아 듣겠는데...
제 처는 어떻습니까?...
지금 어떤 상탠가요???......"

판결을 구했다.
기적과 희망을 갖게 해 달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우선..... 수술은 자~알 되었습니다.....
이제 환자가 최선을 다 해서 견뎌내고
투병 생활도 잘 해야겠지요.
가족의 도움도 절대적으로 필요하구요....."

그러면 그렇지... 수술이 자~알 되었다잖냐...
혜숙은 최선을 다 할꺼야...
가족들도 절대적으루 도울 꺼고...
희망이다!!!...
기적이다!!!......

김용일 박사는 왼손을 내밀어
주먹을 쥐고 설명했다.

처음 암세포가 발생한 곳이
주먹 바깥등 넓은 부위로

신경세포가 몰려있는
주먹 안쪽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무딘 부위라 했다.

혹시 신경세포가 몰려 있는
안쪽 부위에서 발생했더라면...
좀 더 빨리 통증을 느낄 수가 있고

그런만큼 좀 더 일찍 발견할 수가 있었을 테고...
이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을 꺼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암세포가 위 전체로 다 퍼진 다음에서라야...
환자가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환자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암세포가 위뿐만 아니라...
비장과 췌장 일부에까지 번진...
다 음 이 었 다 고 한 다 . . . . . .

환자가 젊다는 것도...
병이 악화된 요인이라 한다......


사람이 젊고 건강한 만큼...
암세포도 젊고 건강하다는...
것 이 다 . . . . . .

내시경 검사 결과로는...
위암 4 기로 나타나서...
과연 수술이 가능한지...
자신이 없 었 다 고 한 다 . . . . . .

더군다나...
1 차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라서...
더더욱 수술하기가...
꺼 려 졌 다 고 한 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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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수술할 수 있어서 다행



 하지만 경기중고등학교 후배인 육동휘 원장과 처남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처제

 

 그리고 이네들과 연고있는 주위 분들의
 간곡하고 애절한 부탁을...


 때로는 강요를 저버릴 수 없어
 결심하고 수술에 들어 갔단다.

 

 일단 열어 보니까
 도로 닫아 버릴 상황은 아니었단다.

 

 그래서 최선을 다 해
 수술할 수 있었단다.

 

 위는 전체를 다 잘라 냈고...
 위 부근에 있는 비장과 췌장도...
 일부를 잘라 냈단다......
 
 주변과 임파선으로 전이된 암세포도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해서 찾아 내어
 제 거 했 단 다.


 결과적으로
 수술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수술도 매우 자~알 되었다는 말씀이시다.

 

 앞으로가 문제인데...
 창자와 창자를 바로 이어 놓은 상태라서


 위 역할을 창자가 맡아 할 수 있도록
 환자는 항상 조심하고
 참고 견뎌내야 한단다...

 
암세포가 더이상 전이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호자와 온 가족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란다...

 

 나는 김용일 박사의 말씀 가운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내용이 담긴 대목에서는
 차마 알아 듣기에 치를 떨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에만
 집요하게 매달리려고 발버둥을 쳐 댔다.


 " 그렇다면... 앞으로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리 자상하고 성의껏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귀를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청한 상태에서 불쑥 튀어 나온 내 말에


 김용일 박사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머~엉하니 바라본다.

 

 한참을 그러더니
 환자의 의학적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19. 십중팔구는 죽는 병
   
 

 " 암에 대한 생존 가망성을...
 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5 년 생존율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위암으로 진단받게 되면...
 앞으로 5 년을 생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5 년을 견디고 무사히 넘기면
 암에서 해방된 것으로 보는 거지요.
 나라에 따라서는 7 년 생존율을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마는.....


 5 년을 생존할 수 있는 가망성의 정도에 따라서
 의학적으로 1 기에서 4 기까지로 구분하고 있어요.....
 위암 4 기라고 하면 보통 말기라고도 하는데...
 5 년을 생존할 수 있는 가망성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박혜숙 환자의 경우에는 내시경과 조직검사 결과로는
 말기암으로 판단했는데...
 수술하고 나서 보다 정밀하게 검사한 바로는
 3 기에서 말기로 진행하는 상태로 밝혀 졌습니다....."


 나는 온 몸이 조여 들면서
 또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또다시 재판장의 심판을 받는
 피고인의 심정이 되고

 하느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는
 죄인의 심정이 되었다.


 " 그럼... 제 처의 5 년 생존율은 어떻게?..."

 " 한 15 퍼센트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 
 

 아~~~!
 이게 무슨 말인가......!


 뒤집어 말하면 사망 가능성이 85 퍼센트란 말 아닌가......!
 내 사랑 혜숙이 십중팔구는 죽는다는 말 아닌가......!

 

 나는 치떨리는 가슴을 쓸어 앉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댔다.

 

 아~~~! 내가 정신차려야지...
 혜숙이 겪어야 할 공포와 절망을
 당장 어떻게 해야 하나......


 " 선생님! 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지요?...
 제 처는 지금 위암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나본데요...
 직업이 약사이다 보니까 치료받는 과정에서
 당장 이상해 할테고 어차피 알게 될 텐데요...
 그럴 때마다 겪게 될 절망과 공포를
 견뎌 내기도 어려울 테고요......"



 

20. 암 환자의 심리 변화

 


 김용일 박사
 한동안 뜸을 드린다.

 

 그제서야 말귀를 알아 듯나 싶었던지
 벙벙하던 표정이 조금씩 풀어 지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제정신 못 차리고
 뒤죽박죽인 내 심리 상태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듯했다.


 " 암 환자의 심리와 심경의 변화 상태에 대해서도
 연구한 결과가 보고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맨 처음... 자신이 암에 걸리고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암 환자는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으로 반응합니다.


 첫 번째 단계로 자신의 병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심리 상태입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이 병원 이 의사가 알지도 못하고 그런다고...
 나는 암에 걸릴 몸이 아니라고...
 어디서 이따위 병원 이따위 의사가 있느냐고...
 다른 병원에 가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을 놓치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그야말로 손을 댈 수 없게 돼서야
 다시 찾아 오는 경우도 있고요...
 설혹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심리로 반응한다는 거지요...
 
 두 번째 단계로는 증오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몸이 점점 쇄약해 지고 통증이 심해지면서
 암이라는 사실을... 죽음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르게 되면...
 환자는 세상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심리 상태를 겪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을 증오하게 되고 아름다운 생물을 저주합니다.

 내가 왜... 왜 나만 이 세상만물 생명체를 두고 죽어 없어져야 하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미웁고 싫어 지게 되지요...... 


 세 번째 단계는 그러다가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증오하고 저주하다가 지치고 지쳐서
 세상을 포기하고 자기자신을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절망에서 헤어나 죽음과 협상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로 환자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 아주 피폐해 지기도 하구요.....
 시기적으로는 환자마다 제각기 다른데...
 이 상태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오기도 합니다.
 죽기 하루 이틀 전... 몇 시간 전까지 밀려 가서야 오기두 하고요......


 마지악 5 단계는 자포자기한 후에 자기 삶을 정리하고 안정하는 단곕니다.
 종교적으로 깊이 위로받고 안정하기도 하고...
 살아 남아 있어야 할 가족을 위해서 삶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 들이게 됩니다.


 대개의 환자들은 이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암이라는 사실을...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보호자가 끝끝내 환자에게 밝혀 주지 않는 경향이 심해서
 대부분 2 단계나 3 단계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보호자의 심리 상태도 애증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보호자는 4 단계를 다 거칩니다.


 아무래도 환자 자신보다야 생명에 대한 여유...
 생명에 대한 여유가 있을 테니까요......"



 

21. 15 퍼센트에 매달리고...

 

 아~~~!
 혜숙의 삶이


 내 사랑 혜숙의 생명이
 나와 혜숙의 운명이 이 지경이 되다니......

 

 그런데... 그러면...
 앞으로 닥쳐 오는 절망과 공포...
 나와 혜숙의 운명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그렇지!!!
 생존율이 있지...


 15 퍼센트가 있지...

 혜숙이 꼭 죽는 건 아니지!!!

 가망이 있는 거야!......

 

 혜숙은 이 날 이 때껏
 남들에게 그리 뒤떨어지지 않아 왔어...

 

 15 퍼센트가 뭐야???
 어디에 내 놔도... 뭐를 해도...
 5 퍼센트 안에도 들겠다...

 

 달리기도 잘 한다고 그랬지 참...
 나는 중간 정도밖에 못 했던 그누무 달리기를
 혜숙은 수송초등학교에서도 선수로 뽑혔다고 그랬어...

 공부로라면야 더 말 할 것 없고... 

 

 혜숙은 뭐를 해도
 맘 먹고 하겠다면 100 명 중 15 등 안에는 들꺼야...

 아니아니 5 등 3 등 안에도 들 수 있을꺼야...

 

 그러려면 혜숙이 스스로가
 용기를 가져야 될 꺼야...

 

 맘 먹고 싸울 준비하고 
 극복해 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될 꺼야...

 

 그런데......
 혜숙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약사니까
 어차피 자기 병을 서서히 알아 가게 될 꺼고


 그럴 때마다 부정하고 거부해야 하는 고통과
 증오하고 저주해야 하는 공포를...

 그러다가 자포자기하는 절망을 겪게 될 텐데......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혜숙이 지금 처해 있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대처해 나가는 게
 보다 효과적일 지도 몰라...

 

 혜숙이 맘 먹고 용기를 가지게 되면...
 희망을 가지고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면...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꺼야...
  .
  .
  .

15 퍼센트 안에는 들고도

남 을 꺼 야 ! ! ! . . . . . .




 

22. 보호자에게 맡겨진 생명



 나는 어느새 생존 가능성 15 퍼센트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정도면 우리 혜숙이 넉넉하게 극복해 낼 꺼라고
 거듭거듭 자위하고 있었다.

 

 " ... 아무래도 제 집사람에게 지금의 상태를
 사실대로 알렸으면 싶은데요... 어떨런지요?......"

 

 그렇겠지요?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면 내 사랑 혜숙은  비록 잠시...
 충격과 고통... 절망과 공포를 겪게 되겠지만
 아마도 다시금 용기와 의지를 다지게 될 껍니다.

 

 혜숙은 최선을 다 해서 극복해 갈 껍니다.
 나와 우리 가족 모두도
 다 함께 최선을 다해 나갈 꺼구요.....


 "...그 방법은 나라마다 일정치 않습니다.
 조상과 가족과 개개인에 대한 가치와 풍습이
 나라마다 혹은 민족과 지역마다 서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역사와 문화...전통적 환경 등등에서 볼 수 있는
 차별성하고도 관계가 있다는 보고도 있고요...


 미국에서는 의사가 환자 자신을 상대로
 모든 상태를 직접 다 이야기합니다.
 피치 못 할 사정이 없는 한...
 아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호자나 다른 가족에게는 절대 말 안 해요.


 보호자든 가족이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환자의 권리입니다.
 인간의 생명, 생명의 존엄성. 존엄성의 프라이버시는
 자기 자신, 즉 환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치료를 할 지, 말 지... 어떻게 할 지...
 이 모든 판단과 선택을 환자가 의사의 조언을 직접 듣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반반입니다.
 병원에 따라서, 의사에 따라서 환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보호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50 대 50 으로 반반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환자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로 퍼센트예요...
 보호자를 불러서 보호자에게만 알리고
 환자에게 알릴지 말지 하는 선택은 보호자에게 맡깁니다. "


 김용일 박사는 내 의도와는 달리
 교과서적으로만 말씀하신다.

 

 수많은 임상 경험과
 그에 따라 의학적으로 정리된 결과만 가지고


 인간미 없이... 인정사정 없이
 객관적인 이야기만 했다.


 나는 다시금 인간적으로 매달리고 싶었다.

 개개인 환자마다 구체적인 형편과 사정이 제각기 다를텐데...


 그렇게 인정사정 없이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구분해서
 획일적으로 정리된 결과로만 말씀하신다면.....

 

 그것 역시 환자에 대한 예단...
 생명에 대한 예단 아니겠느냐고
 매달려 호 소 하 고 싶 었 다 . . . . .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혜숙의 생명에 대한 희망...
 15 퍼센트의 가망성을 위해서

 나와 혜숙이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기로
 엄숙히 다짐하면서 맹세코자 하오니......

 

 김용일 박사님 께서도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을
 최대한으로 가져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나는 그토록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초조하고 애절한 심경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간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김용일 박사를 바라 보았다.


 " 그럼... 혹시...
 제가 보호자로서 부탁을 드리면...
 환자에게 상태를 직접 말씀해 주실 수는 있으시지요?... "


 김용일 박사는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뜸을 드렸다.


 " ... 글쎄요... "


 엉뚱하게도 나는
 다짐하고 맹세하고 매달리고 싶은 말 대신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잔인한 판결문을
 주치의인 김용일 박사에게 낭독해 달라고
 은근히 미루려 드는 것이었다.

 

 뒤죽박죽 되어 버린 머리 속과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마디가 따로따로인 채로
 서로 전혀 연결이 안 된다.



 

23. 들통난 감옥살이

 


 " 주치의 선생님 만나 봤어?...
 어디에 가 있다 이제사 나타나느냐고 혼나지 않았어??? "

 

 혜숙은 밝게 웃으면서 나를 반긴다.
 자기 자신의 몸 상태야 별로 궁금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다는 표정이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감옥에 있다 나온 줄 모르고 계실텐데
 도대체 뭐라고 해명했느냐는 것이 오로지 궁금한 거다.


 혜숙을 어떤 낯으로 바라보고
 혜숙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갈피 잡을 수 없던 나로서는
 분위기를 받아 넘기기가 차라리 편했다.

 

 "... 으~~~응. 들통나 버렸어....."

 

 "... 에~~~엥??? "

 

 거두절미하고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대답하면서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문병 겸 출소 마중 겸 와 있던 사람들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듯한 내 모습에서
 느닷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분위기를 바꾸는데 한몫 거들어 주려는 듯
 모두들 소리내어 함께 웃었다.

 

 혜숙이만 혼자서
 무슨 농담을 그리 하느냐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 때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나섰다.

 

 " 아 글쎄 요 녀니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완조니 초칠해 버렸어야 ~ ...
 내 친구 혜숙이 신랑... 우리 선배가 어떤 분인데
 아직도 모르고 계신 거냐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얼릉 나서서 말 해 버렸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민주화 운동 하다가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나오는 길이라고...
 뭐 어떠니? !!!... "


 주치의 선생도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여겼던 탓에
 그만 본의아닌 실수를 저지르고 만 천영초는
 계속 당당하다.

 

 " 에구~~~ 잘했다 자~알 했어...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그렇지.....
 신랑이란 작자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여태 안 나타나나...
 혜숙이 남편한테 버림받은 여자 아닌가...
 제대로 말도 안 해 줘서 궁금해 주~욱 껐었을텐데.....
 어물어물 했다가는 신랑 몰골하며
 우리 혜숙이 체면만 더 깎일 뻔했자나? "

 

 나와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
 계속 감옥 안에서 고생하고 있던
 김근태 선배의 부인이자 혜숙의 친구인 인재근이

 달덩이같은 얼굴에 함지박만한 웃음끼로
 입심좋게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제서야 혜숙은
 이리 된 바에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보고 눈을 사~알짝 흘기더니
 웃음을 머금는다.


 주위에 많은 분들이
 혜숙의 생명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때로는 죽음의 사신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못하도록


 혜숙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아서

 주위에 많은 이들이
 배역과 역할을 나누어 맡아
 세련되게 종합 연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이미 연기하고 연출하는 이들은
 줄거리를... 혜숙의 운명을 다 알고 있는데

 정작 스토리의 주인공이자
 유일한 관객인 혜숙이만
 그 내용을 모르는 듯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데
 정작
 아내와 우리 가족만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24. 오랜만에 느끼는 숨결과 체온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서
 방문객의 발길도 멈추어 갔다.


 한양대학교 병원 20 층 병동 로비에서
 머얼리 한강과 금호동, 신당동 산 언덕을 바라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이 보이고
 그 사이에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베어 먹은 듯
 허옇게 드러난 산허리 중턱 공터에서는
 재개발 아파트를 세우느라
 한 밤에도 여념없다. 

 

 남산 꼭대기에
 불쑥 솟아 오른 타워는
 밤이 깊을수록
 휘황한 불빛아래
 모습이 더욱 선명하다.


 아~~~!
 시시각각 바뀌는 대자연의 변화
 인간의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변화
 이런 모든 것을 놔 두고
 내 사랑하는 혜숙이
 죽어 땅 속에 묻혀
 한 줌 흙으로
 썩어 가야 한단 말인가?......


 인기척이 있어
 번뜩 제정신을 찾으니
 어느새 혜숙이
 옆으로 다가와
 내게 팔짱을 껴 온다.

 

 오랜 만에
 꼬~~~옥
 껴안 듯
 힘 주어
 온다.

 

 그러고 보니
 1 년 6 개월 여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서도
 우리는
 아직
 한번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안아 보지도
 못 했 다.

 

 나도
 온 힘을
 팔뚝에 모아

 혜숙의
 팔을
 꼬~~~욱
 눌렀다.

 

 혜숙은
 왼손으로

 내 오른손 손바닥에
 자기 왼손바닥을
 밀착시켜 부비고는

 다시 힘 주어서
 손깍지를 낀다.

 

 그리고.....
 오른손을 돌려서
 내 오른쪽 겨드랑이
 안 쪽에 넣고
 쪼물럭 쪼물럭 한다.....

 

 머리를 기울여
 살며시
 내 어깨에
 올려 놓는다.....

 
 이만큼이나마
 혜숙의 숨결과
 체온을 느껴 보기도
 얼마만인가?.....
  
 그런 모습으로
 몸을 약간씩 좌우로 움직이면서

 

 서로의 숨결과 체온을
 맘껏 포근하게

 뜨겁게 뜨겁게
 느끼면서

 

 우리는 말없이

 하~~~안참
 서 있었다.

 

 혜숙은 정말로
 자기 병을 모르고 있는 걸까?.....
 눈치는 채고 있는 게 아닐까?.....

 

 혜숙에게 말을 해야 하나
 어쩌나.....

 

 어차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치료받는 과정에서 알 게
 될 텐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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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생일 선물



 밤이 깊어 지면서
 세상은 점점 고요해 지고
 병실의 불빛도 하나 둘 꺼져 간다.

 

 " 오늘이 중수 생일인거 알지?
 내가 중수한테 귀가 닳토록 얘기했어.
 우리 맏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해서 첫 번째 생일 맞는 날
 아빠가 외국에서 맛있는 거 많이 사 가지고 돌아오실 꺼라고.....
 중수하고 고운이가 아빠 많이 기다릴 꺼야.
 이제 빨리 집에 가 봐.
 학용품이랑 초콜릿이랑 준비해 놓았으니까
 외국에서 사 왔다구 선물로 주고..... "

 

 그랬던가.....
 내가 출소하는 날이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입학한 둘째애 생일과 한 날이라는 것은
 징역형이 확정될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하루종일
 그 일을 생각조차 못 한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첫째 딸 고운이와 둘째 아들 중수는 연년생이지만
 생월이 2 월과 4 월이어서
 3 월을 입학 기준으로 삼는 교육 연령으로는 2 년 차이다.

 그 당시 고운이는 3 학년, 중수는 1 학년이었다.

 

 혜숙은 내가 구속될 때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기를 꺼려 했다.

 

 아빠의 행동과 처신이
 부끄럽거나 명예롭지 못해서가 아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을 비롯한
 어른들 세계에서도
 각자가 처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따라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감옥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복잡미묘하고 다양할 터인데

 

 한창 철없이 뛰어 놀고
 자유롭게 활개치며 자라날 아이들에게
 시국이라든가 역사적 상황
 구속과 재판 등등 유별난 어른들 세계를
 굳이 드러내서 밝히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겠다고 여겼던 탓이다.

 

 갓난 아기 적에는
 혜숙이 내게 자랑삼아
 아이를 가끔 품에 안고 면회 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나는 혜숙이 아이들을 위해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받아 안고
 그만 눈시울이 시큼해 왔다.

 

 아직 철모를 아이들이 바라는
 아빠에 대한 기대가
 혹시라도 흠 잡히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아내의 마음이 가슴 속 깊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이처럼 정성스런 엄마의 선물을 받아 보는 것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절망어린 생각이
 내 가슴을 더욱 미어 왔다.

 

 차라리 엄마가 수술을 받고
 엄마의 생명이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지경에서도
 너희들을 위하고 사랑해서
 마련해 준 선물이었다고
 아이들에게 말 해야 옳지 않겠는가?......

 

 어찌 내가 이 지경에서
 아이들에 대한 엄마의 애틋한 사랑을...
 남편에 대한 아내의 배려를...


 혼자서 몽땅 가로채야 한단

 말 인 가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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