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서 힘겹게 싸우면서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늘 생각하고 책 읽고 글 쓰고 행동하였다. 생각하는 사람, 탐구하는 지식인, 행동하는 실천인이다. 그에게 나이는 시쳇말로 숫자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늙어가는 데 비해 그는 정신적으로 학문적으로 성숙해갔다. 그만큼 사유와 독서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져갔다.

갈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여 잡지에 연재하고, 동양고전을 풀이하고, 여행기를 쓰는 등, 4,50대의 학자가 하기도 어려운 작업을 계속하였다. 학문의 질양면에서 어느 학자도 따르기 쉽지 않았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6년 6월호에 “한국사상의 발굴과 창조”를 특집으로 꾸미면서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번역하여 실었다. 백낙청의 <분단시대 문학의 사상>, 김경재의 <기독교사상과 한국사상>, 이경식의 <한국정치사상의 모색>이 함께 실렸다.

함석헌은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중에 우선 3장만 번역하여 여기에 실었다. 이때까지도 한문으로 쓰인 이 책의 한글 번역이 없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도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관심 분야가 유ㆍ불을 비롯 기독교사상, 인도사상, 힌두교경전 등 미치지 않는 부문이 드물지만 도교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동양 고전은 20대 시절부터 그의 책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닦고 익힌 한문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0년대 중반부터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장자>와 <소요유>, <제물론> 등을 번역했다.

뿐만 아니라 맹자의 <맹자>, 굴원의 <어부사>, 왕양명의 <대학문>, 두보의 <병거행>, 문천상의 <정기가>등을 강론, 풀이하였다. 불교 경전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법정 스님이 머문 여수 불일암을 찾아서는 “나도 나이만 젊었으면 승려가 되었으면 싶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천착하면서 씨알들에게 쉽게 풀이하여 읽혔으며, 고전풀이 시민 강좌를 통해 대중화하려고 애썼다. 그의 성서와 고전 강좌에는 많은 시민이 참석하였다.

"오늘날 씨알이 씨알 노릇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옛글, 곧 고전을 고쳐 읽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옛글이다. 이날까지 서양문명, 더구나 물질주의적인 문명이 주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동양은 오랜 정신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 눌려서 거의 그 값을 인정받지 못했고, 동양사람 자신까지 동양의 생각을 업신여겨왔다. 더구나 종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그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들었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참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동양 소리를 하게 됐다.” (주석 5)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이후 연속적으로 ‘씨알의 옛글풀이’를 이 잡지에 연재하였다.
그의 한문실력은 ‘오산 도깨비’의 소문이 빈말이 아닐 만큼 출중해서 거침이 없었다. 단순히 번역 수준을 넘어서 주석을 달아 ‘함석헌식 해석’을 시도하였다. 동양의 대표적 고전을 자신의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더불어 생의 활력으로 삼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아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해주는 산 영(靈)이었지 결코 죽은 글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다 알지 못해도 좋다.

마찬가지로 이 몇 십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ㆍ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道)에 가깝다”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莫之野)에 심어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소요유>), 이 양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주석 6)

함석헌은 공자와 맹자의 철학보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더 좋아했다. “유교는 실천도덕으로 단계적으로 지도하자는 것이요, 노ㆍ장의 가르침은 궁국의 자리를 뚫어 단번에 현실을 초월하는 자리에 가자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자연 예수가 밤에 찾아와서 “선생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인 줄 압니다”한 니고데모에 대해,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하여 첫머리에서부터 까버리던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후에도 두고두고 논쟁이 있었다.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 같이 노자ㆍ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길은 좁고 험하다고 했던 것 같이, 노자는 자기의 길을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주석 7)

함석헌이 특히 노자에 매료된 것은 그의 평화주의 사상때문이었다.

“나는 노자를 평화주의의 첫째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이사야가 있어 ‘칼을 보습을 만들 것’을 외친 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노자처럼 시종일관해서 순수한 평화주위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더구나 그것이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리고 장자는 그것을 우주적인 나팔로써 외쳤다.” (주석 8)

노자와 장자는 함석헌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제자는 실천교사가 되었다. 그는 노ㆍ장을 닮고자 했고, 해서 그의 사유와 행동에는 2000년이 넘는 시차에도 스승들의 체온이 스민다. 기독교와 노ㆍ장철학, 인도사상, 힌두교사상을 통섭하는 그의 사유의 세계는 가히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접한다.

“사람의 마음이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 구속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소한 생각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자유하는 초월적 정신계에 사는 것”이라 풀이한 소요유에서 함석헌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함석헌이 동양고전 중에서도 가장 즐겼던 것의 하나가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였다. 일찍이 안중근이 소시적에 암송하고,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도 놓지 않았던 글이다. 함석헌은 특유의 문장으로 풀이했다.

정 기 가

하늘 땅에 빠른 숨 있어서
온 가지 흐르는 꼴 지어냈으니
아래선 가람이며 뫼가 되었고
위에선 해요 별이 됐으며
사람에서 허허라 부르는 것이
누리에 또한 가득 들어 찼더라(…)
제(齊)에 있어서 태사의 글
진(晋)에 있어서 동고의 붓
진(秦)에 있어서 장랑의 망치
한(漢)에 있어서 소무의 절개
엄 장군의 머리가 됐고
희 시중의 피가 됐으며
장 저양의 이가 됐고
안 성산의 혀가 됐더라
혹은 요동의 삿갓되어
맑은 뜻 어름 눈을 가다듬었고
혹은 출사표 되어
그 장렬함, 귀신을 울렸으며
혹은 강 건너는 뱃대 되어
분한 한숨 오랑캐를 삼켰고
혹은 도둑 치는 홑 되어
안 된 놈 대가리가 부셔졌더라.(…)
아아, 슬프다, 이 진탕 속이
나의 즐거운 나라 됐구나
어찌 무슨 다른 잔재주 있어
음양이 도둑질 못한 것일까
돌아보아 이 속에 깜작이는 빛
우러러 저기 떠도는 흰 구름
푸른 하늘인들 다하라만은
어진이들 가신 날은 이미 저물어도
그 본 때는 아직 엊그제로다
처마 밑에 책 펴 읽고나니
옛 길 내 낮을 비쳐 주노나.
(주석 9)


주석
5> 함석헌, <옛글 고쳐씹기>, <전집 20>, 13쪽, 한길사, 1982.
6> 앞의 책, 26쪽.
7> 앞의 책, 29쪽.
8> 앞의 책, 31쪽.
9> 함석헌, <하늘땅에 바른 숨 있어>, 279~281쪽(발췌), 삼만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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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0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6년 1ㆍ2월호부터 표지 뒷면에 <우리의 내세우는 것>을 제정하여 실었다.
일종의 사시(社是)인 셈인데, 8가지를 들었다. <씨알의 소리>의 나갈 길과 존재 목적을 뚜렷하게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신념의 일단이기도 하다.

ㅇ 씨알의 소리는 순수하게 씨알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기 교육의 기구입니다.
ㅇ 씨알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ㅇ 씨알의소리는 어떤 종교ㆍ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ㅇ 씨알의 소리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ㅇ 씨알은 어떤 형태의 권력 숭배도 반대합니다.
ㅇ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ㅇ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 나가려고 힘씁니다.
ㅇ 씨알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래로 삼습니다.
(주석 1)

이것은 함석헌의 기본철학이고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새삼 통권 50호인 1976년 신년호에 이와 같은 사시를 내걸게 되었을까. 한 해 전에 인혁당 관련 8명의 처형과 긴급조치 9호의 발동, 장준하의 의문사 등을 목격하면서 유신체제와의 정면 싸움을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나타난다.

이즈음 함석헌의 관심은 국내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고, 1976년 1월 중국에서는 실용주의 노선의 주은래가 사망했다. 그래서 중국의 국가주의의 팽창을 우려했다. <씨알의 소리>에 쓴 <세계구원의 꿈>이라는 대논설은 그의 폭넓은 국제정세, 특히 중국관을 투시한다. 40여 년이 되는 오늘에도 생명력이 넘치는 논설이다.

앞을 내다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다.
지금 중국은 공산국가요 아직 세계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긴장 속에 있지만 나는 공산주의는 그리 두렵지 않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인데 사상은 아무리 험악하다 하더라도 멀지 않아 변하는 날이 올 것이다. 두려운 것은 민족감정 혹 국가주의적 횡포다. 그것은 좀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세계 여러 약소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의 국가주의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완전히 그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려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는 두 진영이 일반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 강력한 폭력 밑에 통일이 됐고 남들은 거의 바닥이 난 천연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그동안 오래 서구 세력에 눌렸던 반감은 불같이 솟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큰 나라로 강해질 때 주위에 대한 그 교만과 횡포가 얼마나 할까? 지나간 긴 역사에 비추어 보아 거의 확실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턱 밑에 있는 우리 운명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그것을 일찍이 곤륜산에서 내리 구르는 바위 앞에 놓인 달걀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남북이 이렇게 갈라져 싸우는 이 민족은 참 어리석은 민족이다. 예로부터 생각있는 선인들이 우리의 소량(小量)과 천식(淺識)을 걱정해 지적해 오지만, 참말 새삼 걱정되는 일이다.
(주석 2)

함석헌은 우리가 살 길은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에 앞장 서는 것과 “동남아의 군소국이 그것(공동체-필자)을 만들어야 한다”고 방법론을 제시한다. 함석헌은 이어진 글에서 “우리 이상대로 한다면 세계가 한 나라가 되고 그 다음 각 지역별로 자치하는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지만,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우선 그 중간 과정으로 몇 개의 연방이 있어서 마치 미합중국 모양으로 대소에 관계 없이 한 표의 권리를 가지고 연합해 나가야 할 것” (주석 3)이라 피력한다.

함석헌은 이 책에 김계숙(건국대) 교수의 <영구평화란 가능할 것인가>를 실어 자신의 ‘세계구원의 꿈’을 밑받침하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한다. 김계숙은 “인류의 앞날은 몰락이나 평화냐 하는 준엄한 양자택일의 위기에 직면하여 참다운 민주주의적 이념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류가 최선을 다할 때에 비로소 영구평화는 가능할 것이다” (주석 4)라고, ‘민주주의적 이념의 구현’을 제시한다. 이것은 함석헌이 추구하는 길이었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6년 1,2월호, 2쪽.
2> <세계구원의 꿈>, <씨알의 소리>, 1976년 1,2월호, 27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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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8 08:00 김삼웅

 

 

함석헌에게 ‘씨알’이 정신적ㆍ이데올로기적인 호라면 바보새ㆍ신천옹ㆍ알바트로스는 상대적이라 해도 될 듯하다. 그는 살아온 방식이 바보스러웠다. 항일운동을 하고도 남한에서 애국자연하지 않았고, 반독재투쟁을 하고도 4월혁명과 10ㆍ26사태 뒤에 민주인사연하지 않았다. 특히 반독재투쟁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새ㆍ신천옹ㆍ알바트로스로 자처한 호는 적격이다.

1962 일우사

함석헌은 한때 ‘넝마주이’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1961년 8월 평론집 <인간혁명>을 내면서 서문을 <한 넝마주이의 말>이라고 붙였다. 민중의 쓰레기, 역사의 쓰레기를 좁은 넝마주이라는 것이다.

“민중아, 네 가슴은 쓰레기통이지! 못 받을 것 없이 다 받아가지고 거기서 재생을 시켜 보자. 네가 쓰레기통이 되면 나는 넝마주의가 되마. 인생의 넝마, 역사의 넝마 주워보자! 내 말은 쓰레기통 뒤지는 넝마의 말이다.” (주석 23)

넝마주이는 바보새와 알바트로스와 상통하는 것 같다. 함석헌에게 이것들은 한 묶음이다. 그의 ‘넝마철학’을 더 들어보자.

세상은 살게 마련이다. 쓰레기를 더럽다고 버리는 양반 집이 있는가 하면 또 그것으로 살아간다고 사자는 사람이 있다. 주워 모은 쓰레기 사겠다기에 가져다 팔았더니 국가재건최고회의 어느 어른이 나를 “정신분열증 들린 사람 같다”고 했다고 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보니 넝마주의쯤은 미친놈으로 뵈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내 눈에는 사람이란 다 내 친구, 곧 넝마를 주워 먹고 사는 것으로만 보여서 한 말인데, 재건이라 하면서 재생의 진리를 모르나 봐. 아기씨의 고운 살갗이 새우, 조개를 통째 먹고 된 것인 줄 모르고, 영웅 선비의 훌륭한 이론, 옛 사람의 먹고 난 찌꺼기 모아놓은 것인 줄 모르나 봐! 세상 제일 큰 넝마주이, 우리 왕초가 누군지 아느냐? 천지의 쓰레기통을 안고 있는 하나님이다. (주석 24)

좀 뒷날 얘기지만, 1982년 1월 한 출판사는 함석헌의 수상록을 펴내면서 <바보새>란 제목을 부쳤다.
당시는 <씨알의 소리》가 두번째 폐간기였다. 편집위원을 지냈던 법정 스님이 서문을 썼다.

“바보새(信天翁)을 좋아한다는 선생님, 아니 바보새처럼 살아가시는 선생님! 이 수상록은 바보새처럼 살아가려는 많은 씨알들에게 글들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읽겠습니다.” (주석 25)

1961 일우사

함석헌이 1948년 쯤 지은 시 <수평선 너머>에는 이미 알바트로스를 ‘예감’하고 있었다.
바다! 넓이 끝없이 까만
깊이 한없이 아득한! 바다 또 바다! 저 바다 너머는 무엇이 있나?!! 물결
앞에도 앞에도 푸른 푸른 . 옆에도 옆에도 하얀 하얀
물결 또 물결
이 물결 뒤에는 또 무엇이 있나?
(후략)
(주석 26)

함석헌은 노년에 알바트로스를 좋아하고 이 새를 바보새라고 이름하면서 자기를 신천옹이라 하였다.

“유동식 교수의 함석헌의 기독교 중심사상을 소개하는 글에서 신천옹인 자신을 바보새에 비유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알바트로스는 거대한 새지만 바보스럽고 부끄러워하는 연약한 마음의 새이고 독수리 같은 사나운 새는 아니라는 것이다. 바보새는 하늘을 믿고 좋아하며 하늘을 날기를 좋아하고 우주를 바라보며 밤낮을 날고 있는 새로서 죽을 때까지 날다. 떨어지는 고상한 새임을 함선생은 자랑하며 존경하고 귀여워했던 것 같고 이것을 거룩하고 신비스럽게 느끼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주석 27)

‘바보’새, 씨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씨알은, 민중은 교활한 출세주의자보다 바보스러운 함석헌을 더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함석헌은 ‘겉으로가 아니라 속내가 알짬 씨알이고 들사람이다. 권력은 탐하고 부를 추구하고 종교나 교육계의 자리를 원했다면, 그의 능력이나 성실성과 치열함으로써 얼마든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들사람이고 야인정신이기 때문에 세속의 부나 관직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어리숙하고 바보스럽고 타산적이지 못하고 처세에 약하고 세상의 물정을 잘 몰랐다.
그는 자신을 우리말로 바보새, 한자로 신천옹(信天翁), 영어로 알바트로스(allbatros)라고 부르는 ‘바보새’가 되었다. 바보새를 닮았고, 휘호에도 신천을 낙관으로 썼다. 프랑스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는 가난한 민중, 소외된 자, 고아, 창녀들을 노래하며 그들의 벗이 된 ‘저주받은’ 시인이다.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렸다.

뱃사람들은 자주 장난거리로
항해의 벗인 양
뱃길따라 미끄러지는 선박을 뒤쫒는
아주 커다란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간판 위에 막 던져진 순간.
이 창공의 임금님은 힘들게 노를 젓듯
조롱을 받으면서
그 큼직한 흰 날개를 질질 끌어댄다.(후략)
(주석 28)

함석헌이야말로 20세기 알바트로스다. 장자, 노자, 제논, 디오게네스, 플로티노스, 두보, 비용, 김시습, 이탁오, 브르노, 이달, 허균, 스피노자, 소로, 셀리, 하이네, 조르주 상드, 애드가 앨런 포우, 보들레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혼과 얼과 행동이 전해지고 융합된 바보새이고 신천옹이고 알바트로스다. 


주석
23> <인간혁명>, 머리말, 제일출판사, 1961.
24> 앞과 같음.
25> <함석헌 수상록 바보새>, 12쪽, 동광출판사, 1982.
26> <수평선 너머>, 78쪽.
27> 김해암, <함석헌과 알바트로스의 비유>, <씨알의 소리>, 2010년 9ㆍ10호, 108쪽.
28> 이치석, 앞의 책, 35~36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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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7 08:00 김삼웅

 

 

제44호(1975년6월호)

날조된 인혁당사건으로 애꿎은 청년 8명의 사형 집행 소식을 전해 듣고 에둘러 썼다. 직설로는 책이 나가지 못한 때문이다.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달려가다가 집앞에서 경찰에 저지당하고 쓴 글이다.

<사상계>에 ‘장준하사단’이 있었듯이, <씨알의 소리>에는 ‘함석헌 사단’이라 일컬어도 될 일군 지식인그룹이 있었다.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박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식자들이었다.

송건호ㆍ장준하ㆍ김성식ㆍ김재준ㆍ김경재ㆍ이태영ㆍ계훈제ㆍ이문영ㆍ오충일ㆍ전경연ㆍ신복룡ㆍ한승헌ㆍ법정ㆍ이병린ㆍ문동환ㆍ장일조ㆍ안병무ㆍ고은ㆍ백기완ㆍ김관석ㆍ김승훈ㆍ김찬국ㆍ김동길 등이 정기적으로 또는 가끔씩 글을 썼다. 물론 원고료는 지급되지 않았다.(필자도 몇 차례 기고하였다)

함석헌은 결절이나 정보기관에 구금되기를 수없이 하면서도 그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은 해오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1974년 여름 중정에 끌려갔다와서는 간접요법으로 이를 피력한 바 있다.

얼마 전 남산(중정-필자)에 가서 이틀 동안 참선을 하고 왔습니다. 정말 참선입니다. 골목의 친구들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데 거기 사람들과는 참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치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논리도 소용없었습니다. 통치 않는 문답을 자꾸 거듭하면서 지연 신경이 흥분합니다. 흥분하면 아니되겠기에 참습니다. 대답해도 못 알아 듣기에 잠잠합니다. 잠잠하면 왜 대답이 없느냐고 찌릅니다. 그래도 잠잠하긴 참 힘듭니다. 그래 정신을 모으고 참선을 했습니다. (주석 20)

유신의 광기가 극심했던 1975년, 동아일보가 정부의 탄압에 굴복하여 114명의 기자를 해고하고, 긴급조치 7호의 선포와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 서울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긴급조치 항의 할복자살, 긴급조치 9호 선포, 사회안전법 제정, 장준하 의문사 등이 잇따른 해였다.

함석헌은 이해 6월호에 <수선화에게 배우라>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정치적 폭염과 살을 에는 찬서리가 교차되는 시국에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신선한 산문이었다. 그는 시론, 평론, 사론 등에서 독특한 문제를 보이지만 산문체 글쓰기가 일품이다.

수선을 왜 수선(水仙)이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생활 양식을 보면 과련 탈속한 신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여름날 사나운 볕(폭양)의 찌고 내리지짐을 넝쿨식의 복종이나 응달에 피는 꽃식의 아첨으로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막의 드문 오아시스의 종려 야자식으로 간신히 지하수의 샘에 뿌리를 박고 버티어 봄으로 지내는데, 이 연한 수선은 종려식의 영웅주의를 나타낼 맘도 없지만 또 넝쿨식의 아첨도 차마 할 수 없어 겸손의 길을 취해 신선답게 굴복도 대항도 아니하고 써늘하게 땅 속에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하여 들어오는 악(惡)을 제 속에서 장차 올 랄을 위한 신비론 선(善)의 양식으로 전환을 시킵시다. 그러니 결코 잠이 아닙니다. 때를 거꾸로 이용하는 지혜의 싸움입니다. (주석 21)

함석헌의 글은 그것이 평론이든 사론이든 사론이든 산문이든 서한문이든 각기 ‘글 말’이 있고, ‘속내’가 깊고, ‘여운’이 남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수선은 높은 지대가 아니라 낮은 누습한 늪 지대에 잘 됩니다. 높은 지대는 살고 싶다는 강자에게 주십시오. 뺏는대로 뺏기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땅 속에서가 아니고는 살아 지낼 수 없는 사회의 누습 지대를 하늘만 주는 땅으로 알고 여름 잠을 자십시오. 봄이 올 때 조그만 한들 바람만 불어도 억억만만이 일시에 춤을 추어 부르는 황금 노래는 씨알이 아니고는 못할 것입니다.” (주석 22)


주석
20> 함석헌, <모산 야우(毛山 夜雨)>, <씨알의 소리>, 1974년 10월호, 8쪽.
21> <씨알의 소리>, 1975년 6월호 4~5쪽.
22> 앞의 책,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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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6 08:00 김삼웅

 

 

제32호(1974년4,5월호)

<씨알의 소리>에 대한 박정권의 억누름은 날이 갈수록 악랄하고 고약해져갔다.

 

1974년 4ㆍ5월호에는 표지에 함석헌의 <민청학련사건의 반성>이 검은 바탕이 흰 활자로 맨 위에 소개되었다. 한데 이 글은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중정의 짓이었다. 대신 서울대학교 가정대학 <아람> 제2호에 썼던 <인도의 지성 간디>로 그 자리를 메꿨다.

민청학련사건은 박정권이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면서 날조한 사건이었다. 함석헌은 정부의 처사를 통렬히 비판하였는데, 이를 통째로 뽑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뽑히고 잘리고 한 원고가 적지 않았다. 이 글 이전부터, 그러니까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부터 정부는 언론을 검열하면서 특히 <씨알의 소리>에는 강도가 심했다.

1974년에서 1975년 사이는 이른바 유신헌법 하의 대통령 긴급조치를 마구 휘두르던 때다.
<씨알의 소리>는 이때에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고 또한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벼락처럼 떨어지면서 씨알에 대한 압수, 사전검열, 연행, 연금, 조사는 가속화되었다. 74년 1월호 4천부가 전부 압수당하고, 직원이 끌려가고, 함선생님이 연행되고, 장준하 편집위원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이 선고되고, 동년 4월 20일 씨알 창간 4주년 기념강연 후 김동길 편집위원이 민청사건으로 끌려가 15년 선고를 받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우리의 반성>(함석헌), <기원 2000년의 한국>(김동길), <학법의 한계>(박형규)는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었으나 전면 삭제된 것이다.
(주석 15)

박정권은 귀에 거슬리는 내용은 필자가 누구이건 가리지 않고 전면 삭제 또는 부분 삭제를 자행했다. 1974~1975년 <씨알의 소리>에서 전면 삭제된 글과 필자는 다음과 같다.

<양심 선언>(김상진), <박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김상진), <고 김상진군의 영전에 이 노래를 바친다>(고은), <오둘툴 보고서>(채광석), <총>(양성우), <친구에게>(유시산), <만세>(김가영),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우리의 반성>(함석헌), <한국의 정치현실>(김대중), <기원 2000년의 한국>(김동길), <올바른 국민총회의 실현>(장을병), <악법의 한계>(박형규), <동아일보사태의 진상>(장윤환), <조선일보사태의 진상>(정태기), <동아일보경영주에게>(표문태), <백골도 산다>(오충일), <여기 그러한 현실>(함세웅), <제3시국선언문,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선언문, 서울대학교 비상총학생회>. (주석 16)

1976~1977년 정부의 <씨알의 소리>전면 및 부분 삭제분은 다음과 같다.

<씨알들의 소리>(조남기),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양성우), <나도 한번 효도하고 싶네>(김경락), <모깃불 외 3편>(박몽구),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쭈구렁 밤송이의 한숨>(함석헌), <씨알의 제소리>(함석헌), <슬픈 노래를 부르자>(함석헌), <정신 바짝 차려!>(함석헌), <우리는 임자다, 종이 아니다>(고은), <박동선사건의 의미>(한완상), <1977년을 돌아보며>(법정), <장준하선생 2주기, 영원한 추모>(계훈제), <테러의 문학>(송기원), <갇혀 있는 자유에게>(이현주), <목소리>(김경수), <수기, 평화시장에서>(전태일), <전태일 7주기 추도사>(전국노조 청계피복지부), <누가 이참의 바통을 받을 것인가?>(함석헌). (주석 17)

1976년부터 1977년 사이에는 <씨알의 소리>가 찢기고 잘리고 상처받아 가장 약화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1976년 3월 1일 신구교 통합 미사 후 구국선언문 발표로 3ㆍ1명동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함석헌 선생, 안병무 박사 등 구국선언문서명자 전원이 연행됐고, 3월 3일 <씨알의 소리> 사무실과 함 선생님 가택 전체가 수색당했다.

창간 기념행사는 76년, 77년 모두 거부당했고,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도회, 전태일 6주기 추도회를 <씨알의 소리>주관으로 열려고 장소 계약까지 했으나 좌절되었고, 76년 8월 28일 명동사건으로 함석헌 선생,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 등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의 선고를 받았다. 77년 3월 18일 함석헌 선생 77회 생신기념모임까지도 장소불허로 흥사단 뒤뜰에서 겨우 열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만 2천부까지 <씨알의 소리>가 75년 하반기부터 철저한 사전검열로 인해 떨어지기 시작하여 2500부까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문공부가 정보부는 인쇄 직전 최종 교정지를 인쇄소를 통해 두 벌을 내 가지고 붉은 줄을 치고 있었다.
(주석 18)

해방 뒤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 중에서 <씨알의 소리>만큼 정부의 심한 탄압으로 찢기고 얼룩진 잡지는 없을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일제에 못지않았고 무원칙했다. 독재정권의 야수적인 탄압에도 함석헌의 의지와 필격은 꺽이지 않았다. 온갖 억누름 속에서도 잡지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었다.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편집장도 박선균ㆍ박청수ㆍ박선균ㆍ정연주ㆍ최민화ㆍ박선균으로 이어졌다.
함석헌은 독재정권의 탄압에 찢기는 아픔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씨알 여러분, 나는 요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때로는 거의 나를 잃어버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나를 잃어서는 아니되지요. 나는 나의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여러분의 나요, 민족의 나요 인류의 나요, 하나님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육중한 기계가 악마 같은 입을 벌이고 그 아래 들어오는 쇳덩이 나무통을 덜커덕 덜커덕 짤르듯이 사형! 사형! 사형!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미칠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살았더냐?
이 꼴을 왜 보아야 하느냐?
인생의 말로가 어쩌면 이렇게도 참혹하냐?
아, 하나님 맙시사!
(주석 19)

주석
15> 박선균, <금지된 씨알의 소리>, 24쪽, 생각사, 1987.
16> 앞의 책, 6~7쪽.
17> 앞의 책, 7~8쪽.
18> 앞의 책, 166쪽.
19> 함석헌, <밤숨을 끊지 말라>, <씨알의 소리>, 1974년 7월호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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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5 08:00 김삼웅

 

 

제31호(1974년3월호)

1974년 3월호에는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하면서 오랫동안 함석헌을 지켜보아온 박선균이 <74회 생신 맞은 함선생님>을 기고하였다. 글은 10여 일 동안 독감으로 누워계셨다는 소식부터 삶의 역정과 가족의 근황까지 전한다.

그동안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들이 표현했듯이 “마지막 남은 지사적 사상가요”, “씨알철학의 야인이요”, “개성 있는 역사가요”, “한국의 간디요”, “진리의 화살맞은 사람이요”, “민족적 대서사시인이요”, “한국의 목소리”라고 했지만, 선생님의 정신적 고향은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때로는 HㆍG 윌스, 앨도우스 헉슬리, 제럴드 허드 등 서구적 사상가에 심취되기도 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 하고 바보새(信天翁)이라 이름 지었다. 나를 때는 2미터나 되는 날개로 끝없는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지상에 내려앉으면 걷는 것이 서투르고 고기잡을 줄 몰라 먹다남은 찌꺼기를 먹고산다는 바보새. 선생님이 왜 ‘바보새’라고 부르시는지 그 뜻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석 13)

함석헌의 아호처럼 된 ‘바보새’얘기는 뒤로 미루고, 근황과 가족문제를 인용한다. 이 무렵 치열했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선생님은 요즘 자신의 삶의 동그라미를 마주 그리시겠다는 씨알 집필 외에도 계속 바쁜 일정을 보내시는 편이다. 주일예배(봉원동 퀘이커 모임 오전 10시), 성서모임(명동가톨릭여학생회관 주일 오후 3시), 고전강좌(정동 전센기념관 매월 요일 오후 7시), 부산모임(복음병원 매월 둘째 주일 오후 3시)등을 이끌어 오시고 있다.

선생님의 슬하에는 2남 5녀가 있으나 장남과 장녀는 이북에서 월남하지 못하고 말았다. 금년 73세인 사모님 황득순 여사는 와병으로 기동을 못하신 지가 만 5년, 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사모님의 간호에 또한 여념이 없으시다.
(주석 14)

주석
13> <씨알의 소리>, 1974년 3월호, 71쪽.
14>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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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4 08:00 김삼웅

 

 

제30호(1974년1,2월호)

함석헌은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서 독재와 맞서 투옥ㆍ연행ㆍ연금을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씨알의 소리>는 꾸준히 발행하였다. 압수와 제작방해가 심했으나 결단코 멈추지 않았다. 1973년 11월호부터는 50쪽 분량으로 축소되었다. 비용문제도 없지 않았으나 당국의 방해로 원고가 통째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1974년 신년호는 1,2월호 합병이었다. 함석헌은 <망(亡) 불망(不忘)>을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의 제목으로 붙였다. 잡지를 계속 펴내게 되는 속내를 들려주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씨알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나 개인으로는 페스질롯지의 이른바 “채 익지 못하고 버러지 먹고 병들어 여름철에 빨리 떨어지는 과일”의 심정이었습니다. 올차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이것으로나마 석어 나를 낳고 길러준 그 뿌리로 돌아가 거름이 돼보잔 생각이었습니다. 그후 몇몇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카네기의 스스로 쓴 그의 묘비의 글귀를 자주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위대한 많은 사람들을 자기 위주에 모았던 카네기”라고 했다는. 확실히 지금 씨알의 소리를 놓고 모인 중만한 동지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없는 어진 마음들이라고 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 분에 넘치는 양심들이요 핵심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 어려운 상황에서 견디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 드리기 전에 여러분이 이미 잘아시는 중 압니다마는 이 소리의 목적은 지식을 전해드리자는 것도 아니요, 소위 말하는 교양도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뜻 하나를 키워가자는 것뿐입니다. 장작은 마주 대여야 불길이 서고, 눈은 마주 보여야 사랑이 생기고, 뜻은 마주 잡아야 위로 솟습니다. 우리 뜻을 길러 이 역사의 흐름을 돌려가야 합니다.
(주석 11)

함석헌은 1973년 여름 천안 - 온양 사이의 모산(毛山)에 있는 구화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였다. 천안의 씨알농장을 처분하여 그동안 밀린 빚을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인수한 것이다. 어떤 분이 17년 동안 운영해오던 것을 씨알농장처럼 이것도 떠맡아 경영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 소식을 <망불망>에 상세히 전한다.

한 때는 여러 백명 학생이 있었는데 중학교가 지역제로 된 이후 학생을 천안, 온양에 대부분 뺏기고 지금은 130명 가량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맡은 이후 교사진영을 새로이 했고 건축하다 말고 내버려두었던 교사를 수리하고 변소를 새로 짓고 하나씩 정돈을 하여 자라나는 생명에 맞는 환경을 만들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듯이 무슨 자금이 넉넉히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도 해야할 일이니 무슨 손을 댄 것입니다. 나는 맡아 놓기는 하고도 “왜 내게는 되지 않을 일만이 오느냐”고 몇 번이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동안 계선생(계훈제-필자)이 교장으로 가 계셨고, 나는 이따금밖에 못갔습니다.

그러나 장차로는 이것을 직업학교로 충실시켜 가자는 계획입니다. 생활교육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씨알교육의 터를 닦자는 생각입니다.
(주석 12)

함석헌은 민족의 선각자들이 오산에 민족학교 오산고보를 세우고, 자신도 거기서 민족혼과 민중의 얼을 배웠듯이, 오산에 그와 같은 학교를 만들어 씨알교육의 전당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제치하와 크게 다르지 않는 유신치하에서 ‘민족학교’의 운영이 순탄할리는 없었다. 얼마 뒤에 이 학교의 운영을 접었다.

주석
11> <씨알의 소리>, 1974년 1,2 합병호, 4쪽.
12> 앞의 책,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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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3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8월호에 <민족통일의 구상①>의 주제를 발표하고, 천관우ㆍ안병무ㆍ장준하ㆍ선우휘ㆍ김용준ㆍ법정 등과 토론 내용을 실었다. 이어서 9월호에는 <5천만 동포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말>을 통해 남북의 위정자와 양측의 동포들이 하나가 되어 통일을 이루자고 호소한다. 이번 호에는 특히 장준하의 필생의 역작으로 평가되는 <민족주의자의 길>이 함께 실렸다.

1972년 11월호에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를 쓰고, 12월호에는 갈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전문 번역하여 실었다. 37~101쪽에 걸친 파격적인 시도였다. 10월 17일 갑작스런 유신선포와 계엄령으로 불가피하게 택하게 된 듯 하다. 이 글은 1964년 함석헌이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했던 것을 대폭 수정하고 첨가하여 실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이 20년 가까워 오지만 오늘까지 잊지 못하는 글입니다. 첫 번 번역판을 낸 것만도 10년이 넘습니다. 이것을 낸 후 친구를 많이 얻었고, 곧 다 팔려서 당시 인쇄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출판사 사정으로 이날껏 못했습니다.” (주석 7)라고 저간의 사정을 밝혔다.

유신체제는 <씨알의 소리>에게 힘겨운 시대였다. 기획, 편집, 경영에서 어려움이 겹쳤다. 우선 계엄사의 검열이 심했다. 1973년 1월호에는 준비된 글이 대부분 빠지고 갈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를 새로 번역 연재하고 <세계구원과 양심의 자유>를 썼다. 2월호의 <끝까지 버티는 것이 씨알이다>에서는 검열의 상황에서도 ‘할 말’을 했다.

“바람의 칼보다 집의 칼이 더 사납고 어름의 조여듬보다 제도의 조여듬이 더 고약합니다. 끝까지 꺼지지 않는 불을 혈관 속에 품고 버티어야 하고, 마침내는 폭발하는 기운으로 때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주석 8)라고 의지를 천명한다.

함석헌은 씨알에게 유신의 폭압에서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일이 있을까?’ 생각이 되는 모든 현상은 이러한 역사적 전통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텨야 합니다. 버티지 못하면 둘이 다 죽습니다. 죽기로써 버티면 둘이 다 구원됩니다.” (주석 9)

함석헌은 유신의 폭압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씨알의 소리>를 통해 민중을 일깨우고 위로하는 글쓰기를 계속하였다. 1973년 3월호의 <통욕 3ㆍ1절>, <참 목자의 모습>, 4월호의 <4ㆍ19는 혁명이다>, 5월호의 <젊은 세대에게 주는 말>, 6월호의 <한국역사의 의미 - 김동길과 대담>, 7월호의 <정치와 미신>, 8월호의 <형벌과 인간>, 9월호의 <내가 겪은 관동대진재>, 10월호의 <외래문물의 호수와 민족문화의 위기 - 안병무ㆍ김동길ㆍ장준하와 대담>, 11월호의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 12월호의 <안창호를 내놔라>등을 연달아 썼다.

유신체제와 거듭 선포한 긴급조치로도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분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학생ㆍ종교인ㆍ문인ㆍ언론인들의 저항이 불물처럼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1973년 11월 5일 함석헌은 서울 YMCA 강당에서 강기철ㆍ법정ㆍ지학순ㆍ조향록ㆍ김재준ㆍ천관우ㆍ홍남순ㆍ계훈지ㆍ정수일 등 15인이 서명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에서 ‘강요된 침묵’에 함거하고, “인권과 민권을 기본으로 했던 민주체제 재건을 위해 전 국민이 각자의 위치에서 궐기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서 “현 정권의 독재정치는 국내외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국민을 처해 놓았다. 권력에 의한 법치 원칙 파괴, 정보정치로 인한 불신 풍조, 특권층의 부정부패, 빈부격차 극심, 집회ㆍ언론ㆍ학원ㆍ종교의 자유 억압, 3권 장악에 의한 독재체제 구축을 규탄한다”면서 유신체제를 정면 비판하였다. (주석 10)

함석헌은 노령을 돌보지않고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섰다. 1973년 11월 16일, 한국 신학대학 교수들의 삭발과 학생들의 단식투쟁을 격려차 방문했다가 고려대 이발관으로 직행하여 정만수의 손을 빌어 삭발하고 단식에 동참하였다.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천안 씨알농장에서 40일간 단식, 1965년 7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비준저지 투쟁 과정에서 14일 간의 삭발ㆍ단식에 이어 세 번째였다.

하지만 72세의 나이에 1일1식으로 버티던 그에게 삭발 단식은 쉽게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장준하 등 편집위원들이 달려와 만류하면서 단식투쟁은 2일만에 그쳤으나,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반독재 진영에서 잇따른 단식투쟁이 전개되었다.

긴급조치 시대에 함석헌은 크고 작은 시국사건에 앞장서거나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와 경찰에 잡혀가기를 밥먹듯이 하였다. 자료에 남아 있는 것만도 그렇다. 가택 연금 등은 일일이 기록하기 어렵다.

1974년 긴급조치 1, 2호 선포에 따라 1월 13일 천관우ㆍ안병무ㆍ문동환ㆍ법정 등과 함께 기관원에 연행되었다가 새벽에 귀가, 9월 23일 중정에 연행되어 3일만에 귀가, 1975년 1월 16일 중정에 연행, 3월 1일 자택 노상에서 경찰에 의해 2시간 연금, 이후 자택 연금 계속, 1976년 3월 2일 정보부에 연행, 3일 만에 귀가, 3월 3일 <씨알의 소리> 사무실 및 자택 수색, 3월 26일 3ㆍ1사건으로 불구속기소, 8월 21일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기독교회관 강당을 계약했으나 당국 저지로 무산, 11월 2일 중정의 전태일 열사 추모에서 집회금지, 1977년 7월 5일부터 3일간 자택연금, 11월 16일 대구강연 출발 경찰 폭력으로 저지, 1979년 3월 1일부터 10일간 가택연금, 3월 5일 검찰 소환, 3월 22일 목요기도회 참석 봉쇄한 경찰과 가두 대치, 3월 27일부터 4월 22일까지 가택연금, 6월 1일 금요기도회 참석 저지, 6월 2일 김대중 자택 방문차 출발 도중 경찰 대치로 두루마기 모두 찢겨, 6월 18일 윤형중 신부 장례식 참석 저지, 11월 24일 YMCA강당에서 통대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 참석 뒤 중부서에 연행, 다음날 새벽에 귀가했다가 계엄사에 다시 연행, 11월 26일 YMCA사건으로 계엄사에 또 연행되었다가 15일만인 12월 1일 귀가, 12월 27일 계엄사 검찰부에 소환되어 심문….

이것이 박정희 치하에서 당한 수난의 대강 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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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2장] 유신타도, 박정희와 전면대결

2013/02/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5년 징역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도 집행유예로 구속을 면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함석헌과 윤보선 등 노령 인사들을 수감하지 않았다. 정적 김대중을 구속하여 정치활동을 봉쇄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까닭이다. 또 국내외 언론을 감안하여 이들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하고 대법원의 원심확정에도 구속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여론 악화와 국제 인권단체들의 비난이 두려웠던 까닭이다.

모진 권력의 탄압에도 함석헌의 필봉은 결코 무뎌지지 않았다. 박정권의 폭압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비판은 강해졌다. 정부가 1976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자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2월호에 <비상사태에 대한 우리의 각오>란 시론을 실었다.

“국민을 소경 귀머거리로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큰일났으니 끽 소리 말고 우리 하라는 대로 해라? 어디로 가란 말인가? 죽을 길인가? 살 길인가?” (주석 1)고 따졌다.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언론이 더욱 위축되고 지식인, 정치인들이 숨을 죽일 때 그는 황야에서 외쳤다.

“비상시란다고 저마다 목을 움츠리고, 허리를 꾸부리고, 숨을 죽이고, 너도 나도 각각 제 살 실을 찾으려 제 발뿌리 앞만 보려 하지만, 그러다가는 죽는다. 누구만이 죽는 것 아니라 전체가 다 망하고 만다.” (주석 2)

1972년 3ㆍ1절을 앞두고 쓴 <3ㆍ1운동의 현재적 전개>에서는 “이런 때 3ㆍ1운동을 한 번 고쳐 씹어 볼 필요는 없을까?” 묻고 “3ㆍ1운동이라고 입으로는 염불처럼 외우면서도 사실로는 그 정신을 계획적으로 말살시켜 버리려는 운동이 대낮에 승냥이떼처럼 형행하고 있는 이때에 그 쉰세 돌을 맞이하게 됐다.” (주석 3)고 반 3ㆍ1운동 세력을 ‘승량이떼’로 비유하면서 비판했다.

정국이 경색되면서 <씨알의 소리>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번에는 ‘음성적’인 탄압이었다.

집에 돌아와 앉으면 발간했다가 경찰에 방해 받아 도로 걷어온 잡지 묶음이 시집갔다 쫓겨온 딸처럼 소리도 없이 우두커니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그 꼴을 어떻게 보랍니까? 내가 그 잡지를 시작할 때 어떤 마음으로 했는데? 딸 시집 보내는 정도 따위가 아닙니다. 정보부에서는 무슨 돈으로 하느냐 묻고 묻더랍니다마는, 무슨 돈이야? 이름 없고 돈 없는 씨알들이 푼푼이 보내준 돈이지, 글을 쓸 때 어떤 심정으로 누구 위해 쓰는데? (주석 4)

함석헌의 분노는 이어진다. 절절한 분노가 담긴다.

내가 정부 비판의 장본인이면 차라리 죽이거나 살리거나 나를 잡아가면 좋겠는데 나는 아니 잡아가고 공연히 시키는 대로 일하는 주위의 사람만 못살게 학대합니다. 그리고는 나를 가르쳐서는 노망한다 하고 버리고 떠나라고 이간을 시키고, 심지어는 지방의 독자로서 찾아왔던 사람까지 잡아다 고생을 시키는 일까지 있습니다. (주석 5)

<씨알의 소리>는 승소한 뒤에 발행한 제3호는 4천부, 제4호부터 5천부, 신년호인 6호를 각각 정기독자와 시중에서 판매하였다. 발행부수가 늘어나면서 정부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1972년 1월 13일 문대골 업무부장이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구타를 당하고, 종로서적센터의 총판계약이 이유 없이 해제되었다. 계약된 인쇄소도 해약을 통보하고, 2월 초부터는 시중서점에 배부된 2,000여 부가 경찰에 의해 판금되었다. 2, 3월 합본혼도 서점에서 판금되었다. 법도 상식도 없었다. 합법 절차에 따른 간행물을 정부기관이 일방적으로 판금을 시킨 것이다.

1972년 6, 7월 합본호에 쓴 함선헌의 <민족통합의 길>은 6월 20일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주최 강연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까. 어느 다른 민족이나 어떤 이데올로기 때문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이 국가지상주의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주주의 시대에 조타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신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 질 뿐입니다. 그래서 반대합니다. (주석 6)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이제까지의 적대정책을 버리고 금방 통일을 이루기나 할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사실은 국민을 속이는 정치놀음이었지만, 한 때나마 남북 겨레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1년 12월호 6쪽.
2> <씨알의 소리>, 1972년 1월호, 13쪽.
3> <씨알의 소리>, 1972년 2, 3월호, 6쪽.
4> <씨알의 소리>, 1972년 4월호, 6쪽, <춘래에 불사춘(春來不似春)>
5> 앞의 책, 7쪽.
6> <씨알의 소리>, 1972년 6, 7월호,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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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2/01 08:00 김삼웅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3ㆍ1운동 57주년을 기념하는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신구교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기도회는 예정대로 진행되다가 기도회가 끝날 무렵 이우정 전 서울여대 교수가 미리 준비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유신체제에 재야지도자들이 정면대결하는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이 일어났다.

구국선언문의 서명자는 함석헌을 비롯하여 윤보선ㆍ김대중ㆍ정일형ㆍ윤반웅ㆍ김승훈ㆍ안병무ㆍ이문영ㆍ서남동ㆍ장덕필ㆍ함세웅ㆍ김택암ㆍ이우정ㆍ문정현ㆍ이해동ㆍ김택암ㆍ은명기ㆍ문동환 등 정계ㆍ종교계ㆍ학계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이날 전격적으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문>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라고 하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결론에서 “이 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2년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다. ⓒ김대중평화센터

선언문을 발표한 재야인사들과 신도들을 명동성당을 내려오면서 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경찰은 이날 집회에 참석한 인사 가운데 이우정ㆍ장덕필ㆍ문동환ㆍ김승훈을 현장에서 연행하고, 일주일 사이에 선언문에 서명한 전원을 연행하였다. 윤보선만 전직대통령을 예우하여 불구속 입건하였다.

함석헌도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며칠 밤을 세우며 조사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일제시대, 이승만시대에 이어 박정희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대문구치소에만 세번째였다. 그러나 얼마 뒤 노령을 감안한 것인지, 그 위상을 고려한 것인지 구속에서 풀려나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3월 26일 구국선언 서명자 20명 중 김대중ㆍ문익환ㆍ함세웅ㆍ문동환ㆍ이문영ㆍ서남동ㆍ안병무ㆍ신현봉ㆍ이해동ㆍ윤반웅ㆍ문정현 등 11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함석헌ㆍ윤보선ㆍ정일형ㆍ이태영ㆍ이우정ㆍ김승훈ㆍ장덕필 등 7명은 불구속기소, 김택암ㆍ안충석 2명은 기소유예 처분했다.

함석헌 선생은 어느 때부터인가 거친 베옷 두루마기를 입고 출정했다.
판사가 왜 베옷을 입고 나왔냐고 묻는 것이다. 그 의도를 몰랐다면 그는 미련한 사람이다. 알고도 물었다면 그의 의도를 나타낼 기회를 준 셈이다. 함 선생은 물론 상복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즉각 “한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도 상복을 입어 애도를 나타내거늘, 하물며 양심도, 법도 그리고 나라가 죽었는데 상복을 안 입을 수 있느냐”고 반문함과 동시에 일장의 연설을 했다. 백발노인의 그 행동은 그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판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청중을 향하여 애족의 분노를 터뜨렸다. 언제나 잔잔한 웃음이 눈가에서 시작하여 얼굴 전체에 흐르는 그의 얼굴이 그렇게 사납고 분노에 찬 것은 처음보는 일이다. 정말 모든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주석 23)

1974.7.16 제헌절 강연회에서 이병린, 함석헌

삼복더위에 재판이 계속되었다. 당초 이 사건은 시위가 크게 벌어진 것도 아니고 시민들이 합세하지도 않아서 단순 집시법위반 정도로 다루려던 것을 박정희가 서명자 중에 김대중의 이름을 보고 ‘진노’하면서 대통령 ‘관심 사항’으로 격상되었다. 그래서 복중에 재판이 강행되었다. 함석헌에게는 10년 징역에 자격정지 10년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1976년 8월 28일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담당 재판부(재판장 전상석, 배석 재차룡ㆍ황우여)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형을 선고했다. 함석헌ㆍ김대중ㆍ윤보선ㆍ문익환에게는 각기 징역 8년과 자격정지 8년을, 문동환ㆍ문정현ㆍ신현봉ㆍ윤반응ㆍ이문영ㆍ이우정ㆍ이태영ㆍ정일형ㆍ함세웅 등 9명에게는 각기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서남동에게는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안병무ㆍ이해동에게는 각기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김승훈ㆍ장덕필에게는 각기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등의 불법성과 유신체제는 용인될 수 없는 악법이고 현정부 또한 악정을 하고 있으므로 이에 저항하여 유신헌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저항권이라는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사실을 왜곡 전파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왜곡 비방하면서 그의 폐지를 주장 선동하고 긴급조치 제9호를 공연히 비방하였다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검찰의 기소장과 재판부의 판결문이 복사판이었다.

함석헌 등 피고인 전원이 항소하였다.
항소심에 기대를 해서가 아니라 법정투쟁을 통해 소신을 밝히고 역사적 진실을 재판기록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연말의 항소심에 이어 상고심은 1977년 3월 22일 대법정에서 열렸다.

최종심에서 함석헌은 김대중ㆍ윤보선ㆍ문익환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서명자 대부분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제(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는 ① 민주구국선언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고 ② 긴급조치와 헌법을 비방하고 있으며 ③ 원심에 사실오인이 없고 공소사실은 인정된다는 판결 이유를 들어 피고인 전원에 대해 상고를 기각했다.

함석헌 등 피고인들은 “인간의 양심과 자연법 그리고 인간의 절대권과 우상화를 거부하는 신앙에 비추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반대한다. 그 긴급조치에 의해 이 법정에 섰으므로 마땅히 재판을 거부해야 할 일이니 우리들의 정당성과 양심을 밝히기 위해 재판에 임한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재판부의 판결을 비판하였다. 함석헌은 고령을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아 옥고를 치루지는 않았다.

함석헌은 3ㆍ1구국선언사건에서 5년 징역, 5년 자격정지에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심회의 일단을 밝혔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소위 3ㆍ1사건으로 인해 재판받으러 왔다갔다 하느라고 거의 모든 시간을 다 써버렸고, 이제 5년 징역에 5년 자격정지에 형집행정지라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나는 재판을 받을 때마다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제 손으로 독배를 들이마신 것은 결코 그 법을 옳다 생각해서도, 자기가 정말 죄를 지었다.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기의 옳은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자기를 죄 주고 죽이는 그 아테네 국민을 불쌍히 여겨 그도 하여금 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다. (주석 24)

주석
23> 안병무,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과 나>, <새롭게 타오르는 3ㆍ1민주구국선언>, 146쪽, 사계절, 1998.
24> 김용준, <긴급조치와 3.1민주구국선언>, <내가 본 함석헌>, 292~293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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