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3/01 08:00 김삼웅

 

 

 

필자는 2001년 3월 <대한매일> 주필로 재직할 때 ‘김삼웅 칼럼’에서 <진짜 언론인 함석헌 100주년>을 기고한 바 있다

오늘 (13일)은 함석헌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함석헌은 역사연구가ㆍ사상가ㆍ민권운동가ㆍ잡지발행인 등 여러가지로 분류되지만 ‘진짜 언론인’도 한 범주라 하겠다.

언론인이면 언론인이지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고 진실한 사람과 위선자가 있듯이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 독재와 냉전시대에 사이비언론(인)이 득세하고 판칠 때 함석헌이야말로 진짜 언론인의 역할을 했다. 제도언론에 지면이 허용될 때는 할 말을 하고, 지면이 봉쇄당할 때는 ‘언론게릴라전’을 펴면서 독재와 냉전세력과 싸웠다.

최근 어떤 신문이 ‘할 말은 하는 신문’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그런 신문이 독재에 침묵하거나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함석헌은 진짜 할 말을 했다. 억압시대에는 비굴하고 민주시대에는 방종하는 사이비 비판이 아니라 남들이 입을 다물 때, 천지가 암흑에 덮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친일언론이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갈 때 함석헌은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만들며 어둠에 묻힌 조선역사를 쓰다가 투옥되고,자유당 천하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어용족 또는 만송족(晩松族)일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썼다가 감옥엘 갔다. 5·16쿠데타로 온 세상이 공포에 싸일 때는 <5ㆍ16을 어떻게 볼까>란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정치군인들에게 할 말을 다한 것이다. 당시 족벌언론이 쓴 쿠데타 지지 사설과 기사,논평은 한국언론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독재권력이 강화되면서 지식인은 두 갈래 부류로 나타났다. 저항과 타협의 길이었다. 저항자는 설 땅을 잃고 타협자는 풍요가 따랐다. 고려무인정권 때도 그랬고 일제식민시대도 그랬다. 그리고 비굴하게 타협하면서 무인정권과 식민통치를 찬양한 세력이 당대의 주류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석헌 등 진짜 비판자는 도태되고 사이비들이 득세하여 사세를 키우고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전두환 정권에서 이런 현상은 절정을 이루었다.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함석헌은 제도언론인들에게 ‘언론게릴라전’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언론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게릴라전술로 언론투쟁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게릴라전은 정규군이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특수임무가 요구될 때 전개된다. 신문사주와 간부들이 군사독재와 유착된 상태에서 언론의 정상적 기능(정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게릴라전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목마른 외침은 빈 산의 메아리에 그쳤다. 독재의 짓누름도 심했지만 그들이 던져준 이권과 고깃덩이도 만만찮았다. 또 긴 세월 길들여진 보신주의 언론인들이 게릴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배부르고 비대해졌다. 특히 일부 양심적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었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진짜 저항언론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직접 게릴라전에 나섰다.

함석헌은 사이비들처럼 사주의 지침이나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하는 따위의 언론인과는 격이 달랐다. 군사독재를 준엄하게 비판하다가도 통일문제에는 지극히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북을 믿고 북은 남을 믿고 일어섭시다.”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30여 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읽어도 감동을 준다. 참 글은 이렇게 이념과 시공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 진짜 언론인이었던 송건호 씨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다. 신문기자나 논설위원의 경력은 없지만 타고난 언론인이란 두가지 논거를 들었다.

첫째, 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다. 언론인과 비언론인의 구분은 문장이 쉬운가 난삽한가라면 함 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쉽다.

둘째, 시대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나날의 시사문제에 날카롭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 이면에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 날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함석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고 용기의 원천은 역사의식이었다. 역사의식이 없는 용기는 풍차에 칼질하는 만용이거나 멧돼지의 저돌성이다. 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 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
(주석 7)

함석헌은 일제의 패악이 천지를 뒤덮을 때 1930년 <성서조선> 제22호에 <의인은 멸절하였는가>에서 “구원 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仁者)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라고 기구하였다.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무리에서 절규한다.

“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 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7> <대한매일>, 2001년 3월 1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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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8 08:00 김삼웅

 

 

제100호(1989년 4월호)

함석헌이 생전에 그토록 기대했던 <씨알의 소리> 통권 100호는 그가 세상을 뜬 뒤에 나왔다. ‘통권100호 기념호’로 나온 “함석헌 추모특집” 형태의 4월호였다. 새 발행인이 된 김용준은 <선생님의 ‘글쎄’가 그리워집니다>에서 “편집위원들이 모여 <씨알의 소리>를 계속 펴나가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전했다.

통권 100호의 특집 ① “함석헌 선생의 인간과 사상”에는 노명식의 <함석헌의 고난사관>, 송건호의 <언론인으로서의 함석헌>, 김경재의 <함석헌의 종교사상>, 송현의 <시인 함석헌 연구>, 김영호의 <함석헌과 동양사상>, 이윤구의 <하늘만 믿은 님과 퀘이커 신앙>, 송기득의 <함석헌의 대듦, 그 삶과 얼과 생각>이 실렸다.

특집② “함석헌 선생과 나” 에는 장기려ㆍ김대중ㆍ김영삼ㆍ최태사ㆍ이태영ㆍ법정ㆍ서영훈ㆍ김상근ㆍ원경선ㆍ다나까ㆍ한승헌ㆍ강기철ㆍ장기홍ㆍ김숭경ㆍ배영기ㆍ문대골이 쓴 각각의 사연이 담겼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박재순의 <씨알의 소리와 씨알의 사상>, <씨알의 소리 총목차>, <사진으로 보는 함석헌 선생> 등 내용면에서 ‘함석헌 추모특집’에 모자라지 않았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이 시대, 이 세기,
우리들의 이 시대의 한 의인 가셨느니.
참 사람 사랑의 사람
자유의 사람 가셨느니.

그 암담하고 처절한
악의 시대 횡포의 시대의 상처투성이의
그 하늘의 사람 빛의 사람의
형형한 정기,
질풍노도로 한 시대를 깨우쳤느니.

불의ㆍ무도ㆍ악을 쳐
번개처럼 번뜩이고,
사랑에는 촉촉한 봄비로 스며,
빛의 길 참의 길을
밝혀 가셨느니.

아, 불의 자유, 불의 사랑, 불의 의지 그 활력,
스스로 안에 삭혀 눈물 머금던
겨레사랑, 인간사랑, 인류사랑 끝없이
불멸의 넋 활활 태운
이 시대의 의인,
불의 사람 참의사람 가시었느니.
(주석 6)

인물은 두 가지 형태로 역사에 남는다. 생전에 세상을 요란하게 했던 인물 중에는 갈수록 세월의 더께에 묻혀 망각되는 경우, 세찬 풍상과 인위의 작용에도 씻기지 안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경우다. 함석헌의 경우는 기념사업과 연구사업이 활발하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인상’으로 조명된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이사장이 장기려 ⟶ 이문영 ⟶ 김경재 ⟶ 문대골 ⟶ 김조년으로 이어지고, <씨알의 소리>도 격월간으로 최근 (2013년 봄)까지 김조년 교수가 발행 겸 주간을 맡아 통권 226호를 발간하였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함석헌 탄신 100주년인 2001년 3월 13일 한국언론재단(프레스센터)에서 추념 및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추념 메시지에서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요 문필가였으며, 행동하는 지성이었고,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던 어두웠던 시절, 선생은 태산처럼 우뚝 서서 저와 민주화 동지들을 지탱해주고, 지도하시고 이끌어 오신 큰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3월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충신교회에서도 열리고, 3월 13일 오산학교에서도 학생, 교사,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오산학교 동창회는 1994년 2월 <함석헌선생추모문집>을 편찬했다.
고인의 희귀한 사진 화보와 부록으로 저술, 연설의 목록을 연대별로 정리하여 연구에 도움을 준다. 문집에는 육필 원고가 실리고, 오산학교 후배로서 함석헌이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할 때 도움을 준 최태사의 글, 50년 동안 지켜보았다는 최진삼의 기록 등 값진 내용이 많다. 60여 년 전 오산학교 제자였던 안이현ㆍ김극진ㆍ이동순ㆍ임상흠ㆍ김창화ㆍ윤창흠ㆍ이용서ㆍ왕지균ㆍ이기백ㆍ김경옥ㆍ선우양국 등의 회고담에서 ‘교사 함석헌’의 모습과 비화, 일화를 듣게된다.

오산학교 30회 졸업생인 역사학자 이기백은 <함 선생의 속마음>에서 일제가 학교에서 일본어를 상용토록 했는데도 여전히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갑자기 장학관과 교장이 교실로 들이닥치자 유창한 일본어로 강의를 한 ‘현장’을 소개했다. 함석헌이 얼마 뒤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 이와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이기백은 적었다.

‘씨알사상’을 되살리는 <함석헌연구>지가 2010년 봄부터 씨알사상연구원에서 반년간으로 발행되고, 제22차 세계철학대회가 2008년 8월 서울대학교에서 ‘유영모ㆍ함석헌사상연구’를 주제로 열렸다.

2009년 7월에는 ‘제1차 한ㆍ일 철학포럼이 일본에서 열렸다. 한ㆍ일 두 나라 철학자 30여명이 모인 철학포럼은 함석헌과 유영모, 다나카 쇼조, 아라이 오스이의 사상을 탐구하면서 “씨알사상은 생태계를 구할 대안”이라는 데 뜻을 모았다. 2010년에 함석헌 사상을 본격 연구하는 ‘씨알학회’(회장 이규성)가 창립되었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해마다 ‘씨알모임’ 의 행사를 갖고, 씨알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씨알정신 승계와 확장에 노력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소재 함석헌기념사업회관에는 고인의 각종 저서와 자료,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주석
6> <씨알의 소리>, 1989년 4월호,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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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7 08:00 김삼웅

 

 

늙어가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맑은 정신으로 청청하게 활동하고 글을 쓰던 함석헌이 큰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나이는 이미 미수(米壽)에 이르렀다. 거인은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서울대병원 12층 108호실에서였다.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가 추대되었다. 장례는 2월 8일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거행되었다. 2,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거인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장지는 연천군 진곡읍 감파리 마차산 기슭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8월 15일,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2006년 10월 19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는 2001년 4월 ‘이달의 문화인물’ 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함석헌은 1988년 11월 22일 오산고등학교 전제현 교장에게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남강(남강 이승훈 - 저자) 선생께서 이루지 못하신 소원을 내 유해를 가지고라도 이루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내 뼈를 골격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생들이 공부하게 해 주시고 내 대뇌와 심장 등 모든 장기도 방부제에 담아서 두고 공부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살던 작은 집과 터가 있는데 그것도 남강재단에 드리니 써주세요. (주석 4)

함석헌의 ‘표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준비 과정에서 유체를 표본으로 만들었을 경우 보관문제와 자칫 우상의 대상이 되어 고인의 뜻과는 달리 이용될 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으로도 어려운 문제라는 의견에 따라 유택에 안장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지인들에게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라” 면서 “만일 누가 비석을 세운다면 벼락을 쳐서라도 부셔버리겠다” 고 당부하였다. 지인들이 후대를 위해서라도 무슨 말이라도 새겨야 한다고 설득하자 “정말 무슨 말을 쓰고 싶으면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라는 그 말만 조그마하게 써 달라”고 하였다.

장례 뒤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족이 기념사업회 쪽에 돌책에 세울 고인의 말씀을 50~60자로 골라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이와 같은 거인의 생애를 50~60자로 압축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몇몇이 의논하여 유일한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고르기로 하였다.

“결국 생전에 함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고 생각되는 안병무 박사에게 의뢰했다. 안 박사님은 다음과 같은 시를 선정해 주셨다.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 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 중에서”
(주석 5)

함석헌 부부에게는 2남 5녀가 있었다.
장남 국용, 차남 우용, 장녀 은수, 차녀 은삼, 3녀 은자, 4녀 은화, 5녀 은선이다. 함석헌이 1947년 3월 월남한데 이어 차남이 1948년 6월 30일 용암포를 통해 단신 월남했다. 그리고 이어서 부인과 남은 가족이 1950년 월남하고, 어머니와 장남, 장녀는 용천에 그대로 남았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망한데 이어 장남이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는 장녀 은수가 살아 있었으나 함석헌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유영모처럼 매일 산 날짜를 그날그날 달력에 기록하였다. 탁상용 달력 1988년 8월 8일자에 31925를 기록한 것이 남았다. 8월 12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귀가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날짜로 정확히 31929일을 살았다.

1988년 5월의 화재로 장서 5천여 권이 다 소실된 이후 새로 준비한 1천여 권과 쌍문동의 낡은 집 한 채, 20여 권의 저서와 역서 몇 권이 유산의 전부였다. 함석헌 사상의 본향이고 <씨알의 소리>의 산실이었던 원효로 4가의 옛집과 부지 82평은 오산학교에서 운영하는 남강문화재단으로 기증,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함석헌의 별세 뒤 공석 중이던 <씨알의 소리> 발행인 및 편집인에는 1948년부터 함석헌을 사사하면서 고려대학에서 두 차례나 해직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김용준 박사가 선임되었다. <씨알의 소리> 후원회는 명칭을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로 바꾸고 후원회장 장기려 박사를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주석
4> 전제현 <함석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함석헌선생추모문집>, 324쪽, 오산학교동창회 편, 1994,.
5> <씨알의 소리>, 1989년 5월호,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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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6 08:00 김삼웅

 

 

노태우가 6.29 항복선언을 하던 날 함석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7월 13일 췌장, 담낭, 십이지장 등 종양부위의 절제수술이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입원 두 달 만인 8월 29일 잠시 퇴원했다가 9월 4일 백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수술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다. 군부독재의 항복선언의 날에 함석헌이 입원한 것은 하늘의 섭리였는지 모른다. 독재세력의 항복으로 이제 그의 저항도 마무리할 시점이라는 섭리였을까, 그는 ‘섭리사관’을 믿어왔었다.

함석헌은 재입원하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의 뜻을 밝히었다.
1980년 7월 강제폐간 당한 지 7년 째가 되었다. 6월 항쟁으로 5공세력의 기가 어느 정도 꺾이면서, 그리고 직선제 개헌과 대선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느리게나마 민주화가 진척되고는 있었다. 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악명 높은 언론기본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함석헌은 12월 22일 <씨알의 소리> 복간을 신청했다. 하지만 문공부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이 함께 출마하여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게되고, 6월항쟁은 결국 군부정권을 5년간 연장시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노태우 정권이 <씨알의 소리>의 복간을 미루게 된 정치적 백경이 되었다.

함석헌은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치않은 몸으로 단일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김대중ㆍ김영삼의 단일화가 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김이 각각 잇따라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후 그의 자택에는 양김과 그들의 측근들의 발길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를 예감한 듯 쌍문동 자택을 찾아온 양김 가운데 한 후보의 부인과 그 부인의 절친한 여성운동가 앞에서 <노자> 제29장의 한 구절을 써서 풀이해주었다고 한다.

將慾取天下而爲之 吳見基不得己 天下神器 不可爲也

장차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석 2)

제96호(1988년12월호) 복간호

6월 항쟁으로 민주세력이 집권하지는 못했으나, 1988년 4.26총선에서 여소야대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5공과 같은 폭압은 사라지고,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씨알의 소리>는 1988년 7월 18일 폐간 8년만에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등록번호 <라 - 3676>였다. 법적 처리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정부는 무려 7개월 만에 등록증을 내주었다. 군사독재 잔당들에게 함석헌과 <씨알의 소리>의 존재가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함석헌은 새편집위원으로 계훈제ㆍ김경제ㆍ김동길ㆍ김용준ㆍ김영호ㆍ노명식ㆍ법정ㆍ송건호ㆍ송기득ㆍ안병무ㆍ이태영ㆍ조요한ㆍ한승헌을 위촉하고, 이중 김용준(위원장)ㆍ김영호ㆍ한승헌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기획과 자문 역할을 맡겼다.

1988년 12월호로 복간호를 발행하였다. 200여 쪽에 내용도 풍부했다. 함석헌의 <절대승리>, 특집 <씨알ㆍ반핵ㆍ통일>, 조요한의 <군사문화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시론, 박두진의 축시 <깃발>, 김경재의 <자유혼, 인간 김재준>, 김준엽ㆍ송건호ㆍ법정ㆍ계훈제의 <복간축사> 등이 실렸다.

함석헌은 8년 만에 다시 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의 <씨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에서 통한의 사연을, 그러나 정제된 언어로 정리한다.

저들은 씨알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았겠지만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법 없습니다. 죽이면 죽은 것 같으나 다시 살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같은 씨알입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은 나를 연금, 미행, 도청 등 갖은 방법을 다해 나의 입을 막고 나의 붓을 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전국 곳곳, 어느 산 어느 골짜기 골짜기마다 이름모를 수많은 씨알들의 꿈틀거림, 작은외침, 부르짖음이 함성이 되고, 마침내 도도한 물결을 이루어 불의의 세력들을 밀어부친 것이 작년 6월의 싸움이 아닙니까? 이때 나는 갑작스런 병을 얻어서 병원에 누워 있었고 마침내 대수술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병원을 드나들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주석 3)

함석헌은 퇴원을 했으나 노령인데다 큰 수술을 하여 건강이 예전치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건강체질과 정신력으로 <씨알의 소리> 발행에 전력하였다. 복간호에 이어 1988년 1.2월호에는 특별한 글을 쓰지 않았다. 4월호가 통권 100호이기에 여기 준비를 서둘렀다. 평상시라면 창간 10년에 통권 100호가 발행되지만 <씨알의 소리>는 독재와 싸우느라 두 차례나 목이 졸려서 19년 만에야 100호가 나오게 되었다. 통상적이라면 200호가 나올 시점이었다.

함석헌은 재복간과 100호 준비, 그리고 몇 차례 시국강연으로 다소 무리를 한 것인지, 8월 3일 서울대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1년 만이었다. 의사는 안정을 권하였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제24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노태우정부는 올림픽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 함석헌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올림픽개최의 날 노태우와 함께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서 평화의 문에 불을 지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공의 제2인자로서 헌정 유린과 인권탄압에 핵심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었다. 위기에 몰리자 6.29선언을 통해 국면을 전환하고, 야당분열의 선거전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나마 전두환과 다른 점이라면 1988년 7월 7일 ‘대북정책 특별선언’을 통해 대북 화해무드를 조성한 것이다.

함석헌이 민주진영 일부로부터 “망령이 들었다” 는 격한 비난을 들어가면서 병중의 몸으로 서울올림픽평화대회 추진위원장으로서 노태우와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이 된 것은 올림픽의 평화정신과, 대북 화해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삶과는 달리 군사정권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이에 앞서 1987년 10월 12일에는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인촌 언론상’을 수상했다.
인촌 김성수의 일제말기 친일행적을 둘러싸고 지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함석헌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인들과 <씨알의 소리>독자들이 이 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상을 수상했고, 상금 전액을 오산학교 남강문화재단에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그는 1984년 남강 이승훈을 기리는 ‘남강문화재단’을 오산학교에 설립하고 원고료와 강연료 등을 털어 기금으로 희사해왔었다.


주석
2> 이치석, 앞의 책, 637~638쪽, 재인용.
3> <씨알의 소리>, 복간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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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5 08:00 김삼웅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국민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언제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금단의 철벽에 도전하였다. 1982년 3월 18일 일군의 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면서 광주학살에 미국의 역할을 성토한 것이 반독재 항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서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되어 투쟁하면서 5공의 철옹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향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1984년 5월 18일 김영삼ㆍ김대중 계의 야당인사들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면서 저항운동은 야당 진영에까지 확대되었다.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선두 그룹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면서 연대를 이루어 온 재야인사들이 있었다. 1983년 5월 31일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광주학살 진상” 등을 요구하는 <긴급민주선언>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따라 6월 16일 양심수가족협의회가 NCC사무실에서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고, 이것은 고려대학을 필두로 대학가의 시위로 확산되었다.

시대는 다시 함석헌을 부르고 있었다. 함석헌이 새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전두환의 폭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면서, 5공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흉폭해지고 민심의 이반속도가 빨라졌다. 정부는 저항하는 민주인사들을 고문하고 용공으로 몰았다.

함석헌은 김재준ㆍ윤반웅ㆍ홍남순ㆍ이민우ㆍ문익환ㆍ지학순ㆍ김대중ㆍ김영삼 등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985년 11월 11일 <고문용공조작은 절대로 은폐될 수 없다>는 성명에 이어 농성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우리의 주장>에서 5가지를 주장했다.

-. 고문과 용공조작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수사기관원들을 색출ㆍ처단하라.
-. 국회에서 위증한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은 인책ㆍ사퇴하라.
-. 우종원 군의 사인을 공개수사를 통해 밝혀라.
-. 현정권은 다시는 고문 및 용공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민과 세계 앞에 공약하라.
-. 우리는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과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할 것이다.
(주석 1)

많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분신ㆍ투신ㆍ할복 등 극한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막나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함석헌 등 민주인사들은 1월 26일 기독교회관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모회준비위원회’ (추모위)의 발족식을 갖고,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규명과 이 땅에서 영원히 고문 등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추방하기 위한 국민연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박종철군 국민추모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추모위’는 이후 민주쟁취의 대장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함석헌은 6월 5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홍남순ㆍ강석주ㆍ문익환ㆍ윤공희ㆍ김지길ㆍ김대중ㆍ김영삼과 공동으로 고문을 맡아 이 단체를 이끌었다. ‘국민운동본부’ 는 전국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6월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함석헌은 많은 집회와 시위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고,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성명을 발표할 때이면 이를 낭독하였다.

시민의 궐기에 견디지 못한 신군부 정권은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수구세력의 교활한 국면 전환용 전략이었다. 그들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유화책을 쓰고, 가라앉은다 싶으면 다시 칼을 빼드는 숫법이었다. 최근에는 이명박이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리자 반성하는 듯 하다가 곧 공안카드를 꺼낸 바있다.

들불처럼 번지던 6월항쟁은 6.29선언과 함께 보수야당이 체제내로 귀환하면서 곧 대선 정국으로 전환되고, ‘전두환 타도’의 열기는 사라졌다. 이번에도 혁명적 열기로 치솟던 민중의 역량이 비등점에서 사그라지고 말았다. 매번 그랬다. 반유신 항쟁이 10.26사태로, 반전두환 6월항쟁이 6.29선언으로, 반이명박 촛불집회가 MB의 반성 발언으로 수그러들었다.

함석헌이 늘 걱정했던대로 국민적 ‘의분’ 이 모자랐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눈물로 전송하고, 박정희가 암살되어 장례를 치를 때 수많은 국민이 연도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폐되었을 때도 많은 국민(신도)들이 그를 찾아갔다. 인정이 많은 국민인지, 의분이 없는 국민인지, 그래서 압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일 터이다. 1911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독재 투쟁의 치열했던 것과도 비교된다.


주석
1> <6월항쟁 10주년기념자료집>, 45쪽,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엮음, 사계절,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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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4 08:00 김삼웅

 

 

983년 3월 한길사

함석헌의 80순을 넘긴 1982년 암담한 시국에서도 지인들이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씨알ㆍ인간ㆍ역사>라는 390쪽 분량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문집편집위원에는 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송건호ㆍ법정ㆍ안병무 등이 참여했다.
문집은 안병무의 <선생님께 드리는 글>, 박두진의 기념시 <빙원행>에 이어 제1부는 안병무의 <순수와 저항의 길>, 송건호의 <언론인 함석헌>. 김경제의 <뜻ㆍ역사ㆍ민족>, 송기득의 <함석헌의 저항론>을 묶었다.
제2부는 양호민의 <마르크스ㆍ레닌의 민족이론>, 박현채의 <한국농업의 상황과 농업혁명에의 길>, 장을병의 <평등이념의 정치적 접근>, 제3부는 안병무의 <세례요한과 예수>, 유동식의 <한국사상과 기독교신학>, 장일조의 <인간의 자기해방과정으로서의 역사>, 남정길의 <정의관념의 붕괴와 그 결과에 대한 고찰>, 제4부는 장회익의 <인간:우주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모형>, 김용준의 <분자생물학의 현재>, 장기홍의 <지구의 초기사>, 제5부는 김성식의 <이집트 문화의 재음미>, 김정환의 <페스탈로찌의 정치철학적 저작 연구>, 이태영의 <자녀의 양육에 관한 연구>가 쓰였다.

한길사는 1983년 3월부터 함석헌전집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1988년까지 20권의 전집을 펴냈다.
편집위원은 계훈제ㆍ고은ㆍ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법정ㆍ송건호ㆍ안병무로 구성되었다.
전집은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2. 인간혁명의 철학.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4.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5. 서풍의 노래.
6. 수평선 너머.
7. 간디의 참모습 / 간디 자서전.
8.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9. 역사와 민족.
10.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11. 두려워 말고 외치라.
12. 6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
13. 바가바드 기타.
1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5. 예언자 / 퀘이커 3백년 외.
16. 사람의 아들 예수 / 예언자 [칼린 지브란]
17. 민족통일의 길.
18. 씨알의 옛글 고쳐 읽기.
19. 영원의 뱃길.
20. 함석헌의 삶과 사상.
(주석 14)

당시 생존 인물의 저작물이 20권의 전집으로 묶여나온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함석헌은 80여 년의 생애에서 그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 인터뷰 그리고 여러 권을 번역한 노력의 결정이었다. 편집위원회의 간행사 몇 대목이다.

“이 시대에 살면서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삶과 뜻을 훌륭하다 칭찬하는 사람, 또는 부질없다 나무라는 사람, 또는 마땅치 않다 욕하는 사람이 다 있어 그 의견이 한결같을 수는 없으나, 그 누구도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해방 후 40여 년, 아니 그 이전 일제시대부터의 이 나라 이 민족 역사에 있어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그 현장에 있었고 또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함석헌이 어떤 사람인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성큼 ‘이런 사람이다’ 라고 대답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그런 인물이다. 금강산에는 만물상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무어라 이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런 면이 있는가 하면 또 저런 면이 있으니, 어떤 형용사도 그 바위산의 특정을 나타내지 못하여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붙였을 것이다.”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문인이면서 문인이 아닌 함석헌은 또한 종교인이면서 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를 배우고 우찌무라ㆍ유영모 같은 이들의 여향을 받았으며, 현재는 퀘이커 교도들 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그가 크리스찬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신앙의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에서 늘 살아왔지만 해방 이후 이땅의 가파른 정치사에 큰 선을 긋는 영향을 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 아니지만 칼날같은 날카로운 붓끝으로 한 시대의 잘못을 고발한 언론인이 또 누구이겠는가? 그의 붓끝을 따라 한 시대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만물상이기 때문에 뭐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몇 마디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죽어가는 시대의 양심’이다. 그는 ‘민중의 대변자’로서 ‘시대의 예언자’로서, 이 날 이 시간까지 살아왔다. 그는 ‘씨알’을 위해 씨알과 더불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면서 가시밭길 80년을 헤치고 예까지 걸어온 우리 시대의 자랑스런 얼굴이다. 에머슨이 ‘위대한 것은 오해받기 마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인간 함석헌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과 역사를 살아온 우리 시대의 참 인간상이다.”
(주석 15)

함석헌전집은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20권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인기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뒷날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이 전집의 많은 오ㆍ탈자를 비롯 문장의 부분적인 탈락 등편집상의 여러 가지 부실성을 들어 판매금지를 요구하고, 출판사가 이를 수용하면서 서점에서 절판되었다. 전집 편찬 이후에 발굴된 각종 자료까지 포함하여 새 전집의 발간이 기대된다. 


주석
14> <씨알ㆍ인간ㆍ역사>, 차례, 한길사, 1982.
15> <전집>, <함석헌전집 간행에 부쳐>, 3~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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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3 08:00 김삼웅

 

 

한승헌 변호사가 조작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생계형’으로 삼민출판사를 차렸다. 그리고 1982년 5월 함석헌의 <씨알의 옛글풀이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를 펴냈다. 그동안 <씨알의 소리> 등에 연재한 동양고전을 묶은 것이다. <제1장, 동양정신의 뿌리>, <제2장 장자>, <제3장 둬두는 정치 (속 장자)>, <제4장, 노자>, <제5장 맹자>, <제6장 잡편>이다. <예와 이제(古今)>이란 서문의 한 대목을 보자. 그의 고전에 관한 인식의 편린을 알게 된다.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옛길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다. 왜? 그 안에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기본적인 모습, 그리고 그렇게 살고 죽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야말로 초창시기기 때문에 사치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고, 비교적 간사한 지혜가 없이 순전히,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나도 인간답게 죽고 너도 인간답게 죽어, 이 인생을, 이 생명을 이 하늘을 한 뜻 속에 실현해보려고 애썼던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중략) 세상 풍조는 새것만을 좋아하고 옛것을 존중할 줄 모르지만 뜻 있는 이는 그렇지 않다. 옛날에 위대했던 이들은 예외 없이 다 옛길을 찾았다.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이 그것을 증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고등기술의 급작스런 발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변하는 새 풍조만을 따르고 옛 정신을 거의 무시하게 됐지만, 이대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주석 11)

이 책의 <잡편>에 풀이한 굴원(屈原)의 글 <고기잡이 늙은이가 묻기를>에서는 이 무렵 함석헌의 심기와 통함을 느끼게 한다.

굴원이 이미 내침을 받음에 강담에 놀아 못가에 걸으며, 읊조리니 낯빛이 바싹 마르고 모양이 마른 나무처럼 시들었더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보고 묻기를, 그대 삼려대부가 아닌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이르렀는고,

굴원이 가로되, 온 세상이 다 흐렸는데 나 홀로 맑았고,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었노라. 이러므로 내침을 보았노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가로되, 어진 이는 무엇에나 걸림이 없어 세상으로 더불어 잘 어울려 옮겨가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흐렸거든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으며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고. 그러고는 깊이 생각하고 높이 서서 스스로 내침을 받도록 하는고. 굴원이 가로되, 나는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이는 반드시 감투를 튕겨서 쓰고 새로 몸 씻는 이는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하니, 어찌 내 몸의 깨끗함을 가지고 남의 얼룩덜룩한 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소상강에 나가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 지언정 또 어찌 차마 희고도 흰 맑음을 가지고 더러운 세상의 티끌을 무릅쓸 수 있겠는가. 고기잡이 늙은이 빙긋이 웃고 뱃삯을 쳐 떠나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물 맑거들랑 내 갓끈을 씻읍세나, 창랑물 흐리거들랑 내 발을 씻읍세나. 드디어 가 버린 다음 서로 다시 말이 없더라.
(주석 12)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퀘이커교인으로 생활하였다. 세계적으로 연대를 갖고 국제 모임은 물론 국내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그리고 1985년 11월에는 삼민사에서 <현대의 선(禪)과 퀘이커신앙>을 편역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영문학자로서 일본 퀘이커의 원로인 이기에 유끼오의 <퀘이커의 길>은 1958년 호주 퀘이커 연회에서 퀘이커신앙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펴낸 것을, 그쪽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펴내기를 희망하여 번역하게 되었음을 서문에서 밝힌다.

이 책은 <제1부 기독교는 달라져야 한다>, <제2부 종교의 원천을 찾아서>, <제3부 퀘이커의 길>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함석헌이 퀘이커 예배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이고, 2부는 유끼오의 글을 조형균의 번역, 3부는 부길만이 각각 옮겼다. 함석헌은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 진실하고도 담대한 정신의 개척자들이 북아메리카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고, 인도에도 가고, 일본에까지 오면서도 오직 우리, 졸고 있는 은둔자라 불리던 우리에게만 늦었다. 그래서 인류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끔찍한 환난인 6ㆍ25에 와서야 비로소 그 개척자들의 발길이 우리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먼저 그 물결에 접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 수난의 여왕의 지침이 너무해서 그랬는지, 30년이 넘는 동안 우리는 이렇다할 만한 새 정신의 증거를 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차차 젊은 혼들로부터 “퀘이커란 무엇입니까” 하는 고마운 질문을 받게 된다. 지금 여기 펴내는 조그만 책자도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함으로써 새로 남의 꿈틀거림을 일으켜보자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주석 13)

여기서 함석헌의 책 얘기를 덧붙이기로 한다. 그의 사회적인 명성이 높아지면서 출판사들의 책 출판이 이어졌다. 1959년 3월 생각사에서 처음으로 펴낸 <새 시대의 전망>은 반응이 좋아지면서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재하여 몇 달 만에 5쇄까지 찍었다. 기왕에 발표했던 글을 묶은 책이다.

이에 앞서 1969년 1월 칼릴 지브란의 번역서 <예언자>가 삼중당에서, 역시 번역한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이 1976년 5월 한샘문화원에서 출판되었다. 1978년 10월 휘문출판사가 <씨알은 외롭지 않다>, 1979년 4월 동광출판사가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985년 11월 한길사가 산문을 모은 <들사람 얼>을 각각 펴냈다. 이들 책에는 중복된 내용이 많아서 독자들을 실망시켰다는 평도 따랐다. 휘문출판사는 1989년 “나의 인생관” 시리즈 10권을 편찬하면서 함석헌의 책을 <씨알은 외롭지 않다>라는 제목을 달아 펴냈다.


주석
11> 함석헌,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 5~6쪽, 삼민사, 1982.
12> 앞의 책, 315~316쪽.
13> 함석헌 외, <현대의 선과 퀘이커의 신앙>, 2~3쪽, 삼민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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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2 08:00 김삼웅

 

 

5공 시대에 잡지와 가진 인터뷰는 <월간 마당>이 처음이었다.
1981년 5월에 갓 창간한 잡지였다. 앞 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퀘이커 관련 회견이 중심이었다. 인터뷰어는 “꿋꿋한 허리, 정정한 목소리, 조리 있는 말은 80대 노인을 장년처럼 느끼게 한다”고 적었다. 이 잡지 25~37쪽에 실린 회견문 중에서 ‘발문’을 소개한다. 당시 함석헌의 정신을 살필 수 있다.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야.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스스로 절대화해서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하죠.”

“기독교가 찾는 하나님이란 자리를 노장(老莊)이 말하면 도(道)라 하지 않겠는가,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면 다를 지 모르지만, 믿는 입장에선 그 자리가 같아.”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될려면 기독교인을 통해서 해야될 것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썩어가니 어떻게 해야될지! 그들이 도무지 이렇게 무식한 짓을 할 줄 몰랐어요.”

“이 도교(道敎)가 평화주의야요. 우리나라 선비사상도 그렇고, 단군신화에 전쟁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압박을 받으면서 비겁하게 달라져 버렸어.”

“진리가 다수에만 있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뜻에서 퀘이커에서는 다수 가결이 없어요. 전원일치제지요. 절대 서두르지 않고 토론을 충분히….”

“쓸데 없는 곳에 돈을 가장 많이 들여 하는 게 전쟁이니 최고의 사치지요. 실제로도 사치 생활과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기업 유지 위해 전쟁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을 만한 인격이 솔직한 말로 한 사람도 없다면 이것은 참 걱정 아닙니까? 재목은 길러야지 내 생각과 다르면….”

“난 흑백논리가 아주 싫어요. 이 우주의 본의가 뭔고 하니, 온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지요.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물었다.

“함 선생님을 비난한 책을 최근 서점 주인들이 진열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건 그러라고 그래요. 내버려 두라고 그래요. 나는 믿으니까. 하나님 일 아닌 것 없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걸 누가 어떻게 하겠나,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시갔디. 내 잘못이 없다는 것 아니야, 있기야 있지만…. 이런 것을 내가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한국의 지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시험인지도 몰라요.
(주석 9)

당시 정보기관의 후원으로 제작된 <위선자 함석헌> 등의 책을 서점 주인들이 판매를 거부하였다. 이런 경우는 찾기 드문 현상이었다. 함석헌은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함석헌은 1983년 5월에는 <신동아>에서 언론인 최일남과 인터뷰하였다. 5공체제에서 제도권 언론과는 쉽지 않았던 인터뷰였다. 최일남은 3년 전에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질문과 답변 몇 대목을 뽑았다.

- 민족주의가 왜 뒤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 한 민족에도 우리 편이 있고 우리 편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문제도 세계적으로 해석해야지 민족주의만으로 풀어가서는 안됩니다. 물론 민족 자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내셔널리즘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민족주의만 내세우는 걸 보면 안타까와요.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어요. 세계 인류가 같은 운명으로 나가야 합니다. 민족은 영원한 것이니까 그걸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기본이 민족에 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찬성할 수 없어요.

-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을 어떻게 보십니까?
◇ 맞아요. 자꾸 가르쳐야 합니다. 의식이 박약해요. 여기에는 언론의 힘이 큰데… 우리는 고려 이후부터 그랬습니다. 국민의 기운을 키워주어야 하고 이것은 정치의 양심입니다.

- 야인이란 말은 저같은 속물에게는 멋있게도 들립니다.
◇ 멋이란 것이 있나요. 우리나라는 껍데기만 보니까 그럴지 몰라도, 이상주의로 보는 게 옳습니다. 좀 경지를 높이자면 엄자릉(嚴子陵)이나 허유 소부(許由 巢父) 같은…. 그와 관련해서 한 마디 할 것은, 나는 굉장히 간소한 생활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 때로 좌절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살아오시는 동안에 말입니다.
◇ 마음은 약한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극복이 됩니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절대 긍정주의자입니다. 살고 싶다고 살고 안 살고 싶다고 안 살수 있습니까. 어떻든 살아야 하니까. 좌절까지는 모르지만 힘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정신 가다듬고 목숨 있는 한은 말입니다.

- 함석헌, 그는 평생 돈과는 인연이 먼 사람으로 보인다.
◇ 그래요. 돈 모을 줄 모르지만 생각도 안해봤으니까. 그 대신 나는 아끼는 사람입니다. 천성이 그래요. 물건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내게 돈은 없고, 돈이 나를 거쳐갈 뿐이지요. 1928년부터 38년까지 1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한 후로는 줄곧 무직자로 있었는데, 내 수중에는 무슨 형식으로든지 돈이 들어왔다가 나를 거쳐 나갑니다. 따라서 마음은 자유로와요. 살아가는데 걱정 안해요.

- 얼마 전 함옹의 조카되는 분이 분명히 함옹을 가리키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낸 일이 있다.
◇ 조카도 아닙니다. 괜히 그 놈이 그러는 거지. 개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에요. 책 보지도 않았습니다. 보나마나 그까짓거….

-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 내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후회는 안해요. 고통이 많으나, 그것은 어느 정도 적응해서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어서도 그렇겠으나, 노장자(老莊子) 사상의 도움이지요. 그분들도 우리 같은 처지를 겪으면서, 그 가운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터득한 분들이지요. 속된 얘기로 초탈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나와도 상관없어요. 자기 마음의 자유를 안 잊으니까. 그런 인생관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요. 감히 됐다 안 됐다는 말을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고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요.
(주석 10)

함석헌은 1982년 1월 30일 YMCA 강당에서 열린 간디 34주기 추모강연회에서 작심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내란음모라고 왜곡된 광주사태는 반드시 진실이 규명되고 바로 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석상에서 5공비판은 이것이 최초의 발언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 해 함석헌은 26년간 살았던 원효로 4가 70번지의 집에서 아들이 사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사하였다.
낡은 원효로 집을 혼자 관리하고 지내기가 어렵다. 쌍문동 집은 1985년 8월 28일 의문의 화재로 평생 아끼던 책과 자료가 몽땅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함석헌은 이 해 10월 퀘이커 세계협회의 초청으로 멕스코 종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다시 방문했다. 워싱턴 수도 장로회에서 <정치와 종교>, 워싱턴 한인교회에서 <그리스찬의 사명>, LA한인교회에서 <새사람>을 주제로 각각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는 일본 와세다 교회에서 <한국의 민중운동과 나의 걸어온 길>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두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끝내 그를 비껴갔다. 그의 꿈은 15년 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석
9> <월간 마당>, 1983년 8월호, 인터뷰어 한용상.
10> <신동아>, 1983년 10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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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절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국의 참담함에 절망하고,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정보기관의 음모에 비관하면서도, 자책을 거듭하였다. 잡지가 강제로 폐간되고, 언론이나 학계 어디를 둘러 봐도 의분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환경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전을 강의하고 씨알들의 모임에 달려갔다.

<씨알의 소리> 강제 폐간 이후 함 선생님의 글이나 근황도 매스컴에서는 일체 보도금지 되었으나, 함 선생님은 노자(老子) 모임, 장자(莊子) 모임, 성서모임, 부산모임 등 정기집회와 용기를 가지고 선생님께 초청이 오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말씀을 계속하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선생님을 연금, 도청, 미행 등 각종 방법으로 선생님의 입을 봉하려고 온갖 탄압을 계속했다. (주석 6)

5ㆍ17쿠데타 세력은 5ㆍ16선배들의 판박이처럼 정치정화법을 만들어 구정치인들을 묶고 양심적 지식인, 언론인들을 추방하면서 5공권력을 구축했다. 광주학살의 잔혹상은 가끔 외국(인)을 통해서나 알려질 정도로 철저히 통제되었다.

1981년 초 오산학교에서는 동문들이 모여 함석헌을 동창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89년 2월 숨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함석헌은 1987년 10월 제11회 인촌 언론상을 받았는데, 상금 1천만원 전액을 오산학교에 기증하였다. 3월에는 몇 지인들이 YWCA 강당에서 80회 생신 강연회를 열어서 <되돌아보는 나의 일생>을 주제로 1시간 여 동안 강연하였다. 8월에는 퀘이커 모임을 원주에서 갖고 요한복음을 풀이하는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온갖 음해가 나부껴도 함석헌은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59년에 이미 다짐했던 길이었다.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걸이를 놓지 않으련다. 삼일운동이 몰아쳐 내세워준 이 걸음 늦추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뚱뚱해 앉았을는지 모르고, 세력 있는 자는 자가용 자동차 안에서 바아크샤처럼 드러누웠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으련다. 장안 길거리를 두리번거려도 내가 주워가지라고 떨어진 금덩이는 없을테니, 나는 가난한 순조선종 틈에 끼어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걷고 싶다. 영원히 영원히 빠르나 급하지는 않게, 뚜벅뚜벅 걸으나 느리지는 않게, 길이길이 걸었으면! (주석 7)

정치변혁기가 되면 어김없이 변절자가 생긴다. 정치인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되어 온 악습이었다. 잦은 정세의 격변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정치인, 지식인들의 신념과 절조가 낮은 까닭이다. 함석헌은 3ㆍ1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이래, 이 길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반제, 반공, 반독재의 길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981년 1월 동광출판사는 <함석헌 수상록 바보새>를 펴냈다.
기왕에 발표되었던 글을 묶어 낸 것이다. <안창호를 내놔라>, <남강 선생님 영 앞에>, <농촌을 살려야 한다>, <늙은 이의 옛날이야기>, <큰 도둑 작은 도둑>,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 <내가 맞은 8ㆍ15>,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예수의 비폭력 투쟁>, <간디의 참모습>, <벤들 힐의 명상>, <여자 한 사람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있다>등이 실렸다.

5공 초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비록 지난 글이라도 재생하여 씨알들에게 읽히자는 출판사의 뜻이었다. 기획 의도는 적중하여 짧은 기간에 몇 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함석헌은 1982년 가을 퀘이커 교인들의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젊은날의 스승이었던 우찌무라의 일화가 남아 있던 레딩을 찾았다. 연말에 귀국하였다.

1983년 5월 5일 좀 이색적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장소는 수유리 안병무 교수의 뜰이다. 신랑은 시인 고은, 신부는 이상화 교수, 주례는 함석헌이었다.
1979년 11월 24일 YMCA강당에서 통대 대통령선출 저지를 위한 위장 결혼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식 결혼식이었다. 신랑 고은은 당시 50세의 만혼, 주례 함석헌은 84세의 고령이었다. 함석헌의 주례사는 길기로 이미 소문이 난 터였다. 이날 주례사도 장장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신랑ㆍ신부나 결혼식 장소나, 하객이나 모두 시대와 불화하는 처지였다. 주례는 모처럼 할 말이 많았을 것이고, 듣는 하객들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고은은 오래 전부터 함석헌을 무척 존경하였다.
50 중년에 장가를 들면서 함석헌에게 주례를 맡긴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70년대에 <만인보>에서 <어린 함석헌의 스승>을 지었다.

어린 함석헌의 스승

어린 함석헌
평안북도 정주 서당훈장
붓글씨 쓰는 시간
훈장은 일어서서
엎드려
글자 한 자 한 자 쓰는 학동을 살폈다.

먹 확실히 갈고
붓 확실히 꼬나잡은 것도
공부라

훈장이 뒤에서 학동의 붓 낚아챈다
낚아채지는 놈
네끼 이놈

붓을 그렇게 힘없이 잡아서야
어찌 힘찬 글이 써지겠느냐

왜놈 글씨는 이쁘지만
조선 글씨는 첫째 힘차야 하느니라.
(주석 8)


주석
6> 박선균, 앞의 책, 170쪽.
7>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37쪽.
8> 고은 <만인보> 15, 176쪽, 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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