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9 08:00 김삼웅

 

 


아직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함석헌 필화사건’이 또 있었다.
1972년 9월 박정희의 유신변란 직전이다. 당시 제1야당 신민당은 과도체제로 김홍일 당수가 이끌고 있었다. 당기관지 <민주전선>은 함석헌을 인터뷰하여 1면 왼쪽 12단 크기로 실었다. 당시 야당은 분열된 상태이고 정부는 8ㆍ3긴급명령을 비롯, 유신쿠데타를 앞두고 음울한 분위기였다. 함석헌은 <자유는 자유로만 얻어진다>는 제하의 인터뷰에서 역사, 인권, 세계사, 시국 전반에 걸쳐 거침 없이 토로하였다. 발췌한다.

“이땅은 남북에 도사리고 있는 몇몇의 지배자ㆍ권력자들의 나라가 아니고 5천만 민중의 나라다.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주벌판 우거진 버들숲을 후려내고 백두산 천지에 내린 하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세운 것도 민중이요, 한반도 엉그러진 골짜기 가시덤불, 자갈밭을 고이 고르고 5대강 언덕 위에, 흐르는 물소리 속에 영원한 이상의 부름을 들어 금수강산의 글월을 짜낸 것도 민중이요, 동해의 쉴날 없이 들이치는 맑고 흐린 물결과 싸우며 하늬바람 마파람의 끊임없이 오고가는 부드럽고 사나운 날씨에 시달리어 5천년 파란곡절의 역사를 지켜온 것도 민중이다.”

“단군을 우리 민중이 세웠고 동명을 우리 민중이 뽑았으며 왕건을 우리 민중이 낳았고 사육신 생육신을 우리 민중이 길렀다. 삼신산 불로초를 캐어 신선을 기른 것이 민중, 이 씨알의 얼이라면 삼강오륜으로 예의지향을 열어 선비로 하여금 뽐내게 한 것은 이 씨알의 힘이라 할 것이요, 만 이천봉 금강 속에서 보살의 나라를 장엄시킨 것이 이 씨알의 슬기라면, 삼교포함 인내천의 주장 아래 제폭구민의 깃발을 든 것은 이 씨알의 의지라 할 것이다.”

“눈을 들어 세계를 보자. 국제정세의 변화란 세상이 알다시피 진정한 의미이거나 아니거나 역사의 대세는 화해무드다. 해방 이후 우리는 동서 양극의 틈바구니에 끼어 양단된 분단 민족으로서 통일을 바라왔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를 산채로 허리를 잘라 두 토막에 내고 그 핏덩어리에 소위 원조요, 협상이요, 국제회의요 하는 꼭두각시의 줄을 걸어 서로 싸움을 부추겨가면서 자기네의 그 침략주의 약탈주의의 실험을 해왔다. 미국이 차츰 미온적이며 중공, 일본의 수작이 저러는데, 우리 민족은 어쩌려는가?”

“지배자들의 잘못은 국민을 내놓고, 내놓을뿐 아니라 억누르고, 억누르다 모자라면 달래고 달래서 아니되면 속여서라도 혼자서만 해먹으려는 케케묵은 소위 지도자의 의식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국민의 지지 없는 줄 알기 때문에 폭력으로 눌렀고, 폭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민보다 외국세력과 더 친했고, 그 결과 대국에 대해 속국처럼 꼬리치며 쳐다 봐야 하는 따라지 정치가 됐다.”

“이럴 때 일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지식인들이 뼈가 빠진 무골충이 됐다. 이상한 일이다. 학문이람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다. 서양의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요, 서양의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은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느 정부나 정치가 정말 민중을 가르치고 선정을 하느냐는 그 언론정책을 보면 안다. 언론을 통제하는 것은 이유를 무엇에 부치거나 민중을 속이고 억누르려는 뱃속이다.

그럼 언론 집회의 자유가 없는 경우에 어떻게 이를 되찾느냐? 우리의 오늘 당면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해서 언론자유를 되찾을 것인가, 회답은 간단하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언론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만 해가지고는 소용이 없다. 자유라는 이름만 불러서 자유는 오지 않는다. 실제로 죄악적인 법을 무서워말고 할 말은 하고 쓸 글은 씀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면 감옥도 가고 징역도 살런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는 감옥에서 자기 알을 까고 나온다. 많은 자유투사들이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올 때 언론자유는 얻어질 것이다.” (주석 20)

박정희 정권은 이 신문을 당원과 일반에 배포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제삼지 않기로 신민당과 ‘묵계’하였다. 해서 함석헌의 이 인터뷰 기사는 보관지에만 남게 되었다.  

주석
20> <민주전선>, 1972년 9월 15일치(제87호), 인터뷰어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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