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전두환 정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주변의 한 켠에서는 음습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시대 공권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사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사적 폭력’에는 암살, 테러, 비리조작, 스켄들 날조 또는 과장 등이 동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아무리 뒤져봐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아서 재물이나 감투로 유혹할 수도 없고, 재산이 없어서 이를 강탈한 방법도, 잡지 발행 과정을 정보기관이 훤히 꿰고 있어서 세무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마침 그런 ‘헛점’이 있었다.

함석헌의 외조카라는 조순명이 1982년 7월 합동 출판사에서 사생활 문제 등을 담은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운명의 여인>, <나이롱 단식>, <사탄아 물러가라> 등 저주 섞인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함석헌에게 “거짓말쟁이”, “색마”, “후안무치” 등 극렬한 용어로 비난해왔다고 한다. 조순명은 이후 1986년에 이 책의 증보판을 펴냈다. 그리고 1992년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를 홍익재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증보판을 낼 때에는 초판 때보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책 제목도 <왠말인가 함석헌>으로 바꾸어서 간행했다. 조순명은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건만, 두번째 역시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석 2)고 서문에서 썼다.

1982년 <거짓 예언자>가 나왔을 때 함석헌의 주위에서는 이를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이 책에 대해 외면하였다. 독자들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외도’와 관련한 소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거짓 예언자>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김용준 교수의 지적이다.

나는 지난 번에 함 선생님이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풍문에 여러 말들이 떠돌았지만 확실치도 않다. 이런 풍문을 여기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다만 씨알농장에서 자진해서 선생님의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과의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의 은사인 김석목 교수에게 고백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주석 3)

함석헌이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오모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참회를 거듭했다. 당시 44일 간의 긴 단식 기도에는 이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었다. 1960년 9월(30일)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함석헌의 편지에도 ‘참회’의 내용이 엿보인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 선생(유영모-필자)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십시오. 아아! (주석 4)

함석헌의 이런 ‘외도’를 빌미로 조순명은 줄기차게 ‘외삼촌’을 비방하고 다녔다.
<거짓 예언자>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웬말인가 함석헌>에 이어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을 두 권으로 묶어 펴냈다. 이를 두고 함석헌과 오랜 교분을 가졌던 김용준은 ‘정보기관의 후원’이라 지적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에게는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운동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석 5)

한국현대사에는 독재자가 적대시하는 인물들에 관한 각종 위서(僞書)가 끊이지 않았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시역의 고민>, 김대중을 음해한 함윤식의 <동교동 25시>, 최근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의 책, 그리고 <거짓예언자 함석헌>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별개로 함석헌의 도덕적 일탈행위는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비판의 대상이다. 도덕성의 상징인 재야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실수였다. 그는 80회 생신 자리를 비롯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였다.


주석
2> 조순명,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 홍익재, 1997.
3> 김용준, 앞의 책, 126~127쪽.
4> 앞의 책, 127쪽, 재인용.
5> 앞의 책, 135쪽.

 

 


01.jpg
0.01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19 08:00 김삼웅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외상으로 들여온 민주주의가 4ㆍ19혁명으로 많은 시민ㆍ학생들의 피를 흘렸지만, 5ㆍ16도벌꾼들의 도끼질을 당하면서 지체아가 되었다. 긴 세월 학생, 민주인사들의 수혈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민주주의의 가녀린 묘목은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새 순이 돋고 부활하는 듯 보였다.

장장 18년의 군부독재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시대가 오는 것으로 알고 환호하였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없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유신잔당의 퇴진과 악덕기업의 처벌을 주장하는 정당한 요구였다. 여전히 신군부의 계엄사령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있었으나 긴 세월 움츠렸던 기자들도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릴만큼 화창난만하다. 생명이 약동하여 만화백초가 다투어 피어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5월은 4월을 대신하여 ‘잔인한 계절’로 바뀌고 있었다. 5ㆍ16쿠데타 때문이었다. 다시 정치의 계절 5월을 맞은 국민은 지난 폭압의 세월보다 새 시대에 희망을 걸었다.

간혹 외신에서 불길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보도관제로 일반 국민은 전두환 일당의 음모를 까맣게 몰랐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근거없이 낙관론을 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차 5월 16일 제주에 머물고 있었다.
서남동 교수와 제주학생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5ㆍ17전국계엄 확대조치 소식을 들었다. 사실상 전두환의 군사변란이었다. 5월 17일 자정에 서남동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고, 함석헌은 이날 오후에 서울 자택에 연금되었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이란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투입을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시켰다. 그리고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부대를 은밀히 파견했다.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했다. 정치활동의 중지와 옥내외 시위금지, 언론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 비상계엄령이었다.

이어서 18일 새벽에는 김대중ㆍ김상현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 등 거물급 26명을 구속하고, 김영삼을 자택에 연금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관련자 수십명도 이날을 전후하여 구속하였다. 5ㆍ17군사반란이 자행된 것이다.

5월 18일부터 광주시민들이 군사변란에 저항하자 신군부는 학생,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정권찬탈에 나섰다. 사망 240명, 행방불명 409명, 부상 2052명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군부는 이미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비상계엄령의 국회통보 절차조차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켰다. 헌정유린이고 국가변란이었다.

신군부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면서 권력을 도득하고, 이땅에서는 18년 전의 5월보다 더 잔혹한 5월이 반복되었다.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되풀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두 번씩이나 비극으로 반복되었다. 함석헌은 위험을 무릅쓰고 5월 26일 광주항쟁의 현장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가누기 어려운 분노를 삼켜야 했다.

7월호 <씨알의 소리>에는 분노에 떨리는 손으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제목은 <治人事天莫若人-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데는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다>를 썼다.

옛날 두목지(杜牧之)란 사람의 아방궁부(阿房宮賦)라는 글이 있습니다. 명문이라고 이름이 높습니다. 내용인 즉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그것이 옳은 이치로 된 것이 아니고 강제로 억지로 된 것이므로 그것을 위압으로 천하 민중의 기운을 죽임으로써 하려고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는데, 몇 날이 못가고 망했다.

그 원인이 뭐냐? 스스로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악으로 억지로 했기 때문이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 가서 누구나 보는 사람이 책을 덮어놓고는 긴 한숨을 쉬고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절이 있습니다.(한문 생략)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고 감히 노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외로운 한 지아비(진시황) 마음이 날로 갈수록 교만하고 완고하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그것이 도리어 천하 인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이곳 저곳서 반군이
일어나 아우성을 치게 되어, 어떤 군대를 가지고도 깨칠 수 없다던 함곡관이
그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후략)

욧점을 말한다면, 씨알 하나에 있습니다. 씨알 사랑하면 나라 될 것이고,
씨알 사랑 아니하면 진시황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 오래갈 수 없고 훗 사람이
불쌍히 여길 것 뿐일 것입니다.
(주석 1)

제95호(1980년7월호)

무서운 글이다. 함석헌은 광주시민 학살과 민주헌정을 짓밟는 전두환을 진시황에 비유하면서 반드시 망하는 날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계엄령의 서릿발치는 5공 초기에 쓰인 글이다. 5ㆍ16때 <5ㆍ16을 어떻게 볼까?> 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검열에서 무사했다. 무식한 검열관들이 놓친 것이다. 옛날 고사를 끌어와 현실을 비판한 함석헌의 전략이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7월 31일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언론통폐합의 조치로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씨알의 소리>를 폐간시켰다.
1970년 4월 창간하여 통권 95권을 발행하고, 1970년 5월의 폐간 이후 두번째 당한 폐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약된 인쇄소가 아니라는 이유라도 댔지만 전두환은 그런 저런 이유도 없었다. 막무가내 막가파식이었다. 함석헌은 망연자실의 상태에서 영구독자 및 정기독자들에게 구독료 환불의 통지를 보냈으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잡지의 운명과 함께 환불은 거부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씨알의 소리>는 죽여도 ‘씨알’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80년 7월호, 6~7쪽.

 


01.jpg
0.21MB
02.jpg
0.22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8 08:00 김삼웅

 

 

제91호(1980년1.2월호합본호)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씨알의 소리>는 힘겨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0ㆍ26사태 이후 사실상 처음 발행한 1980년 1,2월 신년호에서 함석헌은 <민족적 비전을 기르라>는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와 시론으로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를 썼다. '편지’의 한 대목이다.

80년대 들었다고 무엇을 조금 아노라는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 댑니다. 씨알은 그 소리에 끌려들어 가서는 아니됩니다. 지나간 일을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70년대가 됐을 때 어떠했습니까? 그때도 지금 같이 떠들었고, 큰 소리를 펑펑 했습니다. 그때에 그 해 79년 10월 26일에 시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 놈이 하나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70년대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정치 설계나 해설처럼 실없는 것은 없습니다. (주석 14)

정치선동꾼이나 기회주의 언론인들의 시세영합적인 설계나 해설에 함부로 현혹되지 말고 시국을 바로 보라는 내용이다.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 글은 11월 23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의 설교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강연에서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낌새)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시대의 낌새’를 알아차리도록 경고하였다. 글의 도입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통령 자리를 맡는 분이 이것을 ‘위기관리내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만큼 위태한 대목에 부딪쳤습니다. 위태하다는 것은 역사의 나가는 길이 갑자기, 미리 짐작도 못하게, 굉장히 험한 난관에 빠졌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가 아주 망해버리던가, 그렇지 않으면 설혹 살아 남는다 해도 제대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 발전의 길을 밟게 되려면 몇 십년, 혹 몇 백년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자칫하다가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아주 덮어놓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신을 톡톡히 차리기만 하면,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앞 이빨로 물어 멈추고 다시 그것을 잽싸게 시위에 먹여 돌이켜 쏘아 적장을 잡는 옛 명장의 솜씨같이, 나라를 건질 뿐 아니라 전화위복으로 민족의 빛을 더하게 할 수 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다가는”입니다.
(주석 15)

계엄령 선포로 언론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씨알의 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글도 사전검열 때문에 12ㆍ12사태 등을 직접 거론하지 못하고 “자칫하다가는” 식의 표현으로 에둘러 쓴 것이다. “다시 군인이 정치에 나오다가는”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겨온 하나회 출신 신군부는 정치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서울의 봄’은 점차 짙은 안개 속에 덮혀갔다.

함석헌은 2월 29일 복권이 되었다. 무슨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치하에서 반독재ㆍ반유신 투쟁을 벌이다 투옥, 자격정지 등을 받았던 민주인사들에 대한 자격회복이었다. 이날 687명이 함께 복권되었다. 함석헌은 3월호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권>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나는 정치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고, 징역을 시킨다 했더라도 억울하단 맘도, 밉단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풀어줬다 해도 속임 없는 말로 고맙단 생각 조금도 없었으니, 이제 와서 복권 어쩌고 해도 별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속임 없는 말이다. 왜 그랬나? 나도 사람이고, 그러는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국가(정부)란 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서 벗어버려야 하는 낡은 옷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석 16)

여기서 함석헌의 아나키즘적 성향을 다시 살피게 한다. 그의 탈권력, 탈국가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 즈음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가 복권조치를 한 것은 씨알의 입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그런 이상이면 이제라도 씨알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어진 일일 것이다.” (주석 17)

제93호(1980년4월호, 창간 10주년 기념호)

1980년 4월은 함석헌이 70대 이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독재정권의 갖은 탄압을 견뎌 가면서 발행해 온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이 되는 달이었다. 3, 4월이 되면서 지층에서는 혹독한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상에서는 새봄이 오는 듯 제법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함석헌도 대학가는 물론 각종 사회단체와 언론의 초청으로 강연, 인터뷰를 하였다. 그때 마다 ‘시대의 징조’를 설명하면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경계하였다.

1980년 4월호 <씨알의 소리>는 모처럼 126쪽에 이르는 두툼한 지면으로 제작되었다. 10주년기념호였다. 함석헌은 4ㆍ19 스무돌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에게 4ㆍ19는 무엇인가>라는 장문의 평론을 실었다. CBS 공개방송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그리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세, 어떡허지?>를 썼다. 이 글에서는 고난에 찼던 지난 10년을 되돌아 본다.

나는 글을 깎이울 때 살을 깎이우는 것 같았고, 붓을 깎이울 때 등뼈를 꺾이우는 것 같았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사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가 갈렸지만 이는 풀을 갈아 생명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대적을 물고 찢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물면 어서 더 물게 하고 짓밟으면 어서 더 짓밟히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있어 외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했습니다. 나더러는 원수 갚을 생각 말라 했습니다. (주석 18)

창간 10주년 행사는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4월 18일 서울 강연회를 기점으로 대구, 부산, 전주, 광주를 1차로 하고, 제주ㆍ청주, 원주, 대전, 청주를 2차 계획으로 잡았다.

YWCA 대강당에서 열린 서울 강연회는 1,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연사는 함석헌ㆍ안병무, 대구는 함석헌ㆍ김용준ㆍ송건호, 부산과 전주는 함석헌ㆍ송건호가 각각 나서고, 광주는 함석헌과 장을병이 맡았다. 가는 곳마다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많은 시민이 모여 함석헌과 연사들을 환영하고, 그간 <씨알의 소리>의 역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화창한 5월의 푸른 하늘에 서리를 품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주석
14> <씨알의 소리>, 1980년 1,2월호, 6~7쪽.
15> 앞의 책, 63~64쪽.
16> <씨알의 소리>, 1980년 3월호, 4쪽.
17> 앞의 책, 9쪽.
18> <씨알의 소리>, 1980년 4월호, 7쪽.

 




01.jpg
0.24MB
02.jpg
0.24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7 08:00 김삼웅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1980 보도사진연감

함석헌은 해외여행의 복이 없었는지 모른다. 1963년 모처럼 세계일주 여행길에 5ㆍ16주체들이 공약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데 이어, 이번에도 퀘이커의 도움으로 세계여행 중 10.26사태 소식을 듣고 여행을 중단한 채 돌아왔다. 박정희와는 전생에 악연이 켜켜히 쌓였던 것 같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박정희의 불행한 최후를 ‘예측’하고 있었다. 특히 가장 사랑하고 ‘대통령감’으로 기대했던 장준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는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 측근은 증언한다.

어느 날이었다. 원효로 선생님댁이자 <씨알의 소리>사를 찾아온 몇몇 씨알들과 함 선생님은 대화 중 말씀하신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내가 그의 끝을 보기 쉽지….” 하시고 더 말씀을 잇지 않으셨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를 가리키고, ‘끝’이란 ‘박정희의 최후’를 가르킨다. 풀어서 말하면 “내가 박정희의 최후를 볼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어떤 분노나 감정으로 한 말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군사정권과 함 선생님만큼 철저하게 싸운 사람도 없지만, 대적이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된다 하시고 언제나 평상심으로 돌아와 꽃을 가꾸시고, 뜰을 쓸고, 기도와 명상 가운데, 자연스럽게 느껴진 어떤 영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석 12)

함석헌의 저항의 대상은 법과 제도 또는 체제이지 결코 개인은 아니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개인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위치나 권력을 탐하여 반독재 저항운동에 앞장선 것도 아니었다.

한때 사회 일각에서 그를 대통령후보 또는 야당 당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1969년 가을, 박정희의 3선개헌 반대투쟁 과정에서 신민당 당수 유진오가 병으로 쓰러지고, 야당은 와해 위기에 내몰렸을 때였다.

이무렵 재야인사 영입케이스로 야당 당수가 됐던 유진오 씨가 물러나고 야당의 새 당수를 뽑아야 할 때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야당 정치계에서 함석헌 선생을 당수로 모셔야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졌던 것 같다. 국민의 지지를 받고 박정권에 대해 당당히 맞설 인물로 함 선생님 외에 다른 인물이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진 듯 했다. 그래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위시한 중진 인물들이 줄줄이 원효로 함 선생님 댁을 찾아왔다. 정일형 박사, 윤보선 전대통령까지 찾아와 함 선생님을 설득한 것으로 안다. 정치계뿐만 아니라 재야 지성인들까지 가세하여 함 선생님께 권유했다고 들었다. 재야 지성인들이 함 선생님이 야당 당수가 되어야한다는 이유는 있었다. 지금까지의 야당은 야당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야당이었다. 진정한 야당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치를 바로잡고 요즘 말대로 ‘물갈이’를 하기 위해서는 함 선생님 같은 참신한 인물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석 13)

이같은 요청을 함석헌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결코 성격이 정치적이지 못하고 그런 역량도 없다는 뜻이었다. 1963년 가을 쿠데타 세력이 민정이양을 둘러싸고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면서 일부에서 함석헌을 범야단일후보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때도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함석헌은 자유당 말기 윤형중 신부와 논쟁을 할 때 “모가지가 아흔 아홉 번 잘려도 대통령은 아니한다”고 호언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달면서 “부통령만 돼도 백주에 경찰이 총을 쏘는 데”(장면 부통령에 대한 경찰의 암살음모)라고 예시를 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지배자가 되는 것, 즉 감투를 쓰고 누구를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장로, 목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고, 이승만을 쫓아내고도 장면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글과 말이 순수하고 무게가 실린 것은 개인적 이해를 떠나 공론(公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권과 지배가 없는 무권력주의의 진정한 아나키스트였다. 퀘이커에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함석헌이 해외순방 중일 때 박정희 정권은 도처에서 말기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새벽 2시에 이른바 ‘101호 작전’을 개시, 경찰 1천여 명을 당사에 난입시켜 노동자들은 끌어내고, 당직자와 취재기자들까지 무차별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박정권은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회견을 빌미로 김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등 단말마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야당 의원들의 국회농성에 동조하여 종교계, 해직 언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민주단체들이 반유신투쟁에 떨쳐나서고, 마침내 10월 16일 부산대학생 4천여 명의 궐기를 시작으로 부마 민주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 저녁 7시경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성들을 불러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5·16쿠데타로부터 18년 6개월, 유신변란으로부터 7년 여 만이다. 그날은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부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면서 11월 15일 귀국하였다. 절대권력자가 장기독재 끝에 절명하면서 정국은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혼돈에 빠져들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유신세력은 여전히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재야 민주인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투쟁에 나섰다. 11월 24일 YWCA집회를 통해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를 통한 대통령선거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체의 집회가 금지된 계엄상태에서 ‘위장결혼식’을 이유로 재야인사들이 모이게 되고, 선언문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거국내각 수립하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고 시위에 나섰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계엄사는 양순직ㆍ박종태ㆍ백기완ㆍ임채정 등 14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포고령위반으로 처벌되었다.

함석헌은 아직 긴 여행의 노독이 풀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노령을 이유로 구속을 면했지만, 박정희가 암살 당한 이후에도 다시 구금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되었다.

 


979년 10월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항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 정당성이 취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MBC

독재자가 암살되고 외신에서는 ‘서울의 봄’을 보도하기 시작했으나 정치의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 하나회 출신들이 하극상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한국의 정세는 또 새로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함석헌은 12ㆍ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계엄사 검찰부에 의해 12월 27일 다시 소환되었다.
군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받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승냥이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해가 바뀐 1980년 2월 25일 함석헌은 군법회의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 면제 처분을 받았다. 신군부도 그의 위상에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주석
12> 박선균, <씨알 소리 이야기>, 108쪽, 도서출판 선, 2005.
13> 앞의 책, 100~101쪽.





01.jpg
0.1MB
02.jpg
0.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6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79년 8월 11일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로 출발하였다. 국내사정이 어려웠으나 이 회의는 빠지기 어려운 국제대회였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퀘이커의 주요 인물로 인정되었다. 이에 앞서 194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2월 26일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이어서 3월 5일에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를 대표하여 바우만 여사가 노벨평화상 추천서를 갖고 함석헌을 찾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ㆍ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기구 및 간호원 파견과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적 모금운동 등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평가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1월 24일자의 전문을 통해 “한국의 함석헌을 1979년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한다. 함석헌은 정의와 인권을 위하여 비폭력적 운동으로 일생 동안 헌신했고, 세계평화를 위한 씨알들을 상징화하고 있으며 고취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또 1월 31일자 소개 편지에서는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실현에 대한 함 선생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정의를 방해하는 것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은, 그의 깊은 종교적 신앙으로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반대하는 현정부일지라도 그의 반대는 정권욕이나 개인의 이득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함 선생은 그의 동포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투옥하는 자들과 또는 그를 제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함 선생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것은 그가 깊히 염려하고 사랑하는 모든 한국사람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주석 8)

함석헌은 자신이 이와 같은 노벨평화상에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퀘이커들이 나를 추천한 것 같으나 사실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겸손해하였다. 그의 노벨상 추천 소식은 2월 26일치 <중앙일보>가 <워싱턴 스타>를 인용, 1단 기사로 보도했을 뿐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외면하였다.

함석헌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250여 명의 퀘이커들과 회의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갔다. 함부르크, 괴칭겐,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헤이그에서는 이준 열사 묘소를 참배하고 영국으로 들어갔다. 여행 중에는 그 나라 퀘이커들과 한인교회,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숙식을 해결하고, 간혹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안내를 받기도 했다. 캐나다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피츠버그에 머물던 중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고, 11월 15일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 귀국하였다.

해외에 머물면서도 ‘씨알의 독자들’을 위해 여러 차례 <해외 통신> 보냈다. 이 소식은 <씨알의 소리> 에 실렸다. 스위스 베른에서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도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어떤 할머니가 조그마한 싼 물건을 내밀면서 “뉴멕스코연회에서 왔습니다. 우리 연회 어떤 부인이 이것을 주면서, 대회에 가서 누구나 줌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드리라고 했는데, 내가 보니 당신이면 될 듯해 드립니다.” 했습니다. 놀라면서 그것을 받아 그 속에 든 것을 꺼내보니, 은으로 조그만 비둘기를 만들어 가슴에 차도록 한 것입니다. 나는 뭐라 말 할 수, 사양조차 할 수 없어, 그저 절을 하고 받았습니다. 노벨상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조그만 표적인 줄 압니다.(주석 9)

함석헌은 이번 해외순방에 두 가지 목적을 두었다고 밝혔다.

“하나는 세계 각지의 퀘이커들을 찾아보는 것이고 그 담은 또 간 곳 마다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퀘이커들 찾는 것은 본래 퀘이커 협의회에서 나를 초청해 주었고 세계일주를 하며 각지의 모임과 혹은 개인을 찾아보도록 일정을 꾸며주었기 때문입니다. 협의회가 그렇게 한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나는 나로 하여금 세계 각지에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될수록 한국의 진상을 알려주도록 하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도 좀 더 경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석 10)

함석헌은 평화주의자였다.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독재와 반국가주의, 국제적으로는 반제국주의와 반침략주의를 주창하면서 싸워온 것은 궁극적으로 국제평화의 실현에 있었다.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에 “평화”를 특집으로 꾸미고 송건호ㆍ김용준ㆍ김동길과 함께 <세계평화의 이상과 그 실현을 위한 문제>를 주제로 하는 좌담회를 연 겻도 그 일환이었다. 함석헌은 이 좌담에서 우리나라가 단군신화에서부터 평화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난 우리나라도 고대 처음에 있어서는, 우연히 됐는지 어떻게 됐는지 그걸 고증할 수가 없지만, 단군신화에서부터 전쟁이야기는 없이 개국을 했다고 하는건 퍽 크게 우리로서는 아주 주목할 점이라고 그렇게 보는데, 서양처럼 전쟁을 꼭 해가지고 나라를 세웠다든지, 동양에서 일본만 해도 역사 처음에는 전쟁으로 개국을 했다고 그러고, 아마 세계 어느 나라의 처음치고 싸움 없이 개국했다는 건 별로 없을 거고…. (주석 11)

주석
8> <씨알의 소리>, 1979년 3월호, 102쪽.
9> <씨알의 소리>, 1979년 10월호, <해외통신> 제3신, 9~10쪽.
10> 앞의 책, 27쪽.
11>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 30쪽.

 


01.jpg
0.07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5 08:00 김삼웅

 

 

산모에게 네 속에 있는 애기가 나올 때가 되어서 그런데 이제 나와야지. 낳는 것 네 책임이야. 이런 진통을 겪어야 돼. 그렇게 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낳을 작정을 하면 고통을 넘어설 수가 있어요.

함석헌은 지금이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진통기’로 보았다. 아무리 포악한 권력이라도 결코 민중의 항거를 언제까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씨알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맹자의 말을 인용한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길 때(天將降大任於是人也)
우선 그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必先苦其心志)

이 말은 생명의 법칙이 그렇다는 거예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한단 이 말이에요.

함석헌은 자신의 고통을 비롯하여 국민의 고난을 새시대를 열기 위한 하늘의 시련으로 인식하면서 두려움 없이 독재정권과 싸웠다. 싸우고 싸우다보니 어둠은 더욱 짙어갔으나 국민을 배반한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함석헌 선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

1979년 3ㆍ1절 60주년을 앞둔 함석헌의 감회가 각별했다. 18세 때 3ㆍ1운동에 참여한 이래 40여 년이 더 지난 세월이다. 해방된 나라는 두 쪽이 나고, 가족을 남겨두고 택한 남쪽에서는 백색독재에 이어 군사독재가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달랬다.
생각해 보라. 이렇게 죽은 민족이 어디 있나? 감각이 있고, 의분이 있고 결단이 있나?
금년이 3.1운동의 예순 돌이니, 한번 크게 뜻 있는 기념을 하여, 침체해 가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날이 심해가는 사회부정의를 일소하여, 두 동강이 난 나라를 어서 빨리 하나로 묶고, 남북이 하나로 어우러져 회개와 용서의 눈물로 이 강산을 적시고 감사와 희망의 노래로 저 산천초목을 들뛰게 하며, 그리하여 세대의 모든 압박당하고 찌저진 민족으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하잔 생각을 어느 누가 아니했겠느냐?

함석헌은 이같은 심경에서 다시 행동에 나섰다. 1979년 3월 1일, 3ㆍ1운동 60주년인 이날 재야 민주인사들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민민연합)을 결성했다. 김대중의 석방을 계기로 그동안 다소 미온적이던 ‘국민연합’을 확대 개편하여 ‘민민연합’으로 확대한 것이다. ‘민민연합’은 윤보선ㆍ함석헌ㆍ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면서 전권을 3인 의장단에 맡기고, 보다 광범한 활동과 조직기반을 위해 지방조직에 착수했다.

‘민민연합’은 3월 4일 <발족선언문>을 통해 유신체제 철폐와 민주정부 수립을 당면목표로 밝히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평화적으로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5월 1일에는 3인 의장단 명의로 최근 사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민주인사들에 대한 장기 연금과 구치소 내의 심각한 인권침해, 폭행사건과 인권유린 사태를 검찰에 고발하고,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함석헌은 이 <발족선언문>을 힘차게 낭독했다.

권력과 부조리의 구조를 비판하는 모임에서 그가 글을 읽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그러한 기회에 ‘낭독 전문가’가 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나이로 보아 비교적 젊은 것들이 읽지 못하는 일들을 그는 서슴치 않고 해낸다. 후배들이 선생님께 낭독을 부탁하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태연하게 허락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젊음 앞에 부끄러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늙은 젊은이,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불과 같은 의지와 어울리고 있는 늙은 젊은이, 바로 그가 멋쟁이 함석헌이다.

정부는 반체제 투쟁과정에서 시국선언문의 낭독자, 집필자, 서명자 순으로 체포한다. 그래서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공동대표 체제를 갖추고, 서명자도 명망가들을 동원한다. 구속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다. 또 발표자는 명망가 중에서도 저명 인사를 택한다. 잡혀가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선정된 함석헌은 각종 시국선언의 낭독을 한 번도 꺼리지 않았다. 해서 구속, 연행된 일이 수없이 많았다.

6월 23일에는 함석헌ㆍ윤보선 등 20여 명이 화신백화점 앞에서 카터 방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이번에도 연행되었다가 다음날 풀려났다. 박정권은 7월 31일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김영삼 총재의 대정부 질의 내용(개헌)을 게재한 것을 문제 삼아 문부식 주간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8월 9일에는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 명이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시국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가 5ㆍ16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지 18년 째였다. 함석헌은 거듭 ‘시대의 징조’를 느끼면서 반독재 투쟁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주석
4> <씨알의 소리>, 1977년 7월호, 22쪽.
5> 앞의 책, 23쪽.
6> <씨알의 소리>, 1979년 3월호, <가시나무 가지의 외침>, 4쪽.
7> 한완상, <평화주의자 함석헌의 멋>,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 69쪽.

 




01.jpg
0.01MB
02.gif
0.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4 08:00 김삼웅

 

 

함석헌에게 박정희라는 통치자와 유신체제는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다.
무고한 인명의 살상과 인권유린, 헌정질서 파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해서 끝없는 비판에 나서게 되고, 저항의 횃불을 내릴 수 없었다. 압제가 있는 곳에 저항이 따른다는 것은 그의 오랜 신념이었다.

유신체제에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변형된 선거제에 의해 두번째 치른 총선이었다.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함으로써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선거제였다. 이같은 구도에서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 여당인 공화당이 31.7%를 얻어 야당이 1.1%를 더 득표했다. 하지만 국회의석은 야당이 3분의 1석에도 이르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에 앞서 7월 6일 이번에도 체육관 선거를 통해 99.9%의 득표로 5선 대통령이 되었다.

근대적 정당제도가 생기게 된 것은 반란단체를 만들지 못하게, 그리고 선거제도는 폭력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유신체제는 정당과 선거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상이 파괴되면 변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유신체제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데모와 각종 시위는 시민저항권사상의 발로이고 정당한 생존권투쟁이었다.

1978년 1월 19일 함석헌은 정구영ㆍ지학순ㆍ천관우ㆍ박형규ㆍ조화순 등 재야 지도자들과 <민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유신체제하의 모든 선거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양대 선거를 보이콧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서 2월 24일에는 윤보선 등 각계 인사 66명과 유신체제와 학원 및 언론 탄압을 비판하는 <3ㆍ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정보부에 연행되어 3월 1일까지 구금당하였다.

유신체제 붕괴의 서막인 YH사건이 터졌다.
5월 9일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불법해고와 부당감원, 전직, 감봉, 인권유린 등에 항의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함석헌은 거듭 양대선거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 5월 18일 이희호 등 양심수 가족들과 투표용지 소각식을 갖고, 해직교수, 해직 언론인, 재야 인사들과 함께 유신철폐, 체육관선거 시정 등을 요구하는 <오늘의 우리 주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제도언론에서는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6월 2일에는 구속자 가족들과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기독교회관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과 대치했다.

함석헌은 6월 2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박형규 등 민주인사를 비롯하여 대학생 1,000여 명과 함께 유신체제 비판과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유신체제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날 시위대는 경찰의 폭력으로 해산되었다가 다시 모여 “유신철폐”, “박정희 퇴진” 등의 구호와 반체제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인근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양심수들도 때를 맞춰 유신반대를 주장하며 옥중농성을 벌였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20여 명과 가톨릭 신부 5명이 구속되고, 함석헌도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7월 5일 함석헌ㆍ문익환 등 각계 인사 402명은 ‘민주주의국민연합’(국민연합)을 발족했다. 서명 인사들의 연금 사태로 창립총회는 유산되었으나, 민주인사 402명 및 12개 재야 단체가 공동 서명한 <민주국민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도 제도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퇴약볕이나 혹한의 추위를 가리지 않고 반유신 시위에 참석했다. 그리고 경찰(전경)과 대치하는 맨 앞줄에 섰다. 학생들과 재야 단체에서 집회, 시위에 초청하면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지식인들과 외면하는 언론에 의분을 느꼈다.

함석헌에게 ‘의분(indignation)'이란 용어가 마음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있었다. 3ㆍ1운동 때 우리를 도왔던 스코필드 박사의 위급 소식을 듣고 병원에 위문 갔을 때, 그가 손을 꼭 잡으면서 “한국 사람들 의분을 몰라요!” 했다는 것이다. (주석 1) 이후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의분을 느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저항의 길을 시지프처럼 걸었다.

재판에 왔다갔다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외국신문, 잡지의 기자들을 만났는데 (국내의 기자는 정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게 조직의 능력과 상대의 앞을 내다볼만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나는 성공이거나 실패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은 없고, 다만 이것이 내 할 의무이기 때문에 할 뿐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은 이상, 몇 해가 되겠는지 몇십 몇백 년이 되겠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마침내는 우리가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에는 까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낯빚을 고쳐서 알았노라 동의를 했습니다. (주석 2)

함석헌은 1977년 7월 8일 기독교수협의회의 초청으로 ‘고난을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고난>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무렵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하여 여러 차례 강연을 했지만, 이날 강연장에는 수백 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함석헌은 이 강연에서 예언자적인 말을 남겼다.

지금 시점이 어려운 때에요. 애기가 꿈틀거리며 나오려고 그래요. 애기는 신시대 아니에요? 그런데 산모는 그걸 몰라. 그냥 고통스러워 해. 그래.

 


1978년 5월 8일 함석헌 선생님의 부인 황득순님의 장례식에서 말씀하시는 송두용선생. 뒷편에 서 계신 문익환, 백청수, 김제태 (오른쪽부터)

1976년 5월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 황득순이 눈을 감았다. 1917년 동갑내기로 결혼하여 61년을 살아온 아내였다. 10여 년 전부터 앓아누운 아내의 수발을 하면서 제대로 남편 역할을 하지 못한 통한을 삼켰다. 한 때는 외도로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있었다.

황득순은 글을 몰랐다. 해서 남편의 글을 한 편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아내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생들이 조혼의 아내를 버리고 신여성을 택할 때도 그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를 사랑하며 끝까지 지켰다. 아내는 남편이 평생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월급봉투를 갖다주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고 어려운 가계를 꾸렸다. 함석헌이 생애를 두고 저항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이같은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은은 읊었다.

함석헌옹 부인

세상에 바람 같은
훨훨 날아가는 학 같은
서천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그런 함석헌 옹에게 부인이 있다니
봉건시대 여성 호칭으로 부인 황씨
세상에 얼굴 한 번 내보이지 않은 채
영감은
온 세상의 얼굴인데
온 세상의 정신인데
부인 황씨 오래 몸져 누워

영감과 달리 몸집도 항아리처럼 큰 데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그 부은 얼굴 내보이지 않은 채
평생 불화 그대로
어느 날 숨졌다
그때에야 부랴부랴 사람들은
장례식 준비하였고
날씨는 사나운 개처럼 사납게 추웠다.
(주석 3)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7년 2월호, 3쪽.
2> 함석헌, <정신 바짝 차려>, <씨알의 소리>, 1997년 4, 5월호, 6쪽.
3> 고은, 앞의 책, 82~83쪽.

 


01.gif
0.19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3 08:00 김삼웅

 

 

1983년 12월 한길사

함석헌이 쓴 <마하트마 간디>에 대해 부문적으로 살펴보자. 간디의 길은 곧 함석헌의 길임을 보게 된다.

나는 꽃들을 사랑하지만 누가 묻기를 어느 꽃이 가장 아름다우냐 하면 대답을 못하고 “글쎄….”하고 만다.
여러 가지 책을 감격을 가지고 가장 읽지만 좋은 책을 골라 추천하라면 “글쎄….” 하다 마는 일이 많다.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요새 누가 만일 추천을 해달라고 청한다면, 그보다도 청이 오기 전에 내 편에서 권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자서전이다. 그것은 물론 내가 그 책을 지금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또 깊이 반성해 봐도 그런 것만이 아닌 것이 있다.
(주석 15)

인용문대로 함석헌은 이 무렵 <간디 자서전>을 번역하였다.
1927년과 1929년 마하데브 데자이가 1, 2권으로 번역한 영문판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간디는 1925년에 이 자서전을 썼다. <간디 자서전> 관련해서는 뒤로 미루고, 함석헌의 글을 다시 조명한다.

“어느 사람의 생애는 아니그럴까마는, 특히 간디의 일생은 마치 큰 나무의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날 때에는, 모든 도토리가 꼭 끝이 뵈는 도토리 알이듯이, 간디도 각별히 천재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자람에 따라 점점 그것이 보통이 아닌 위대함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해서 간디는 자기를 개발한 사람이다. 이 의미에서 내가 한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그의 말은 그대로 옳은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서전을 읽어가노라면 꼭 소금을 집어 먹는 것 같다. 언제든지 같은 맛이다. 같은 맛인데 싱거운 대목이 하나도 없다.”

“사람은 나기는 물질적인 존재로 나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인 존재에까지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이 힌두교의 올짬이라면, 인도 민족이 간디에게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간디 자신은 물론 그것을 아주 싫어했다. 참의 사람인 그가 그런 우상숭배적인 떠들썩을 좋아할 리 없다. 그러나 역사를 굽어보는 견지에서 한다면 그것은 역시 인도 씨알의 자기 발견의 한 발걸음, 나아가는 한발 걸음이라해야 할 것이다.”

“마하트마란 마하 곧 크다는 말과 아트만, 곧 영혼 혹은 자아라는 말을 합해서 만든 말인데 인도 역사에는 여러 마하트마가 있다. 민중에 의해서 불리워진 이름이지 어떤 제도에서 나온 자위가 아니다. 동양 말로는 대성(大聖)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인데 마하트마에 이르렀으니 m에서 M으로 올라간 것이다. 힌두교에서 인생의 목적이 self(小我)에서 Self(大我)의 발견에까지 가야한다는 그대로다.”

“그러면 간디를 마하트마에까지 올라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는 ‘힘’(진리-필자)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서전의 이름을 “나의 힘에 대한 실험”이라고 했다. 그 실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자기 일생을 하나의 실험으로 보는 데 간디의 간디된 점이 있다.”

“하나 더 말한다면, 그를 몰아 총알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지칠줄을 모르고 그저 올라만 가게한 것은 씨알에 대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자신이니, 박애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간디는 자기와 씨알의 구별이 없다. 자기가 곧 씨알이 돼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불가촉민제도를 철폐할 것을 주장했고, 완전히는 못되어도 제도상으로는 평등의 기초를 놓아 줄 수 있었다.”

“자서전을 읽어가며 놀랍고도 또 눈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저 페이지마다 사건마다 씨알, 씨알, 봉사, 봉사로 옷의 실밥처럼 무늬가 놓여있다는 점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간디 자서전을 번역하여 <나의 진리 실험이야기 - 간디 자서전>을 1983년에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기왕에 쓴 간디 관련 논설도 한데 묶였다.

여러 군데서 눈시울이 뜨거워 그냥 써 내려갈 수가 없어서 손수건을 찾곤 했다.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인격적 매력이라 할까. 영어로 한다면 참말 스위트한 점이 있다. 선배의 존경을 어쩌면 그렇게 하는지 자기의 위대함은 전면 잊고 그저 어린애처럼 선배를 위한다. 자기의 위대함을 잊으니 정말 위대하지 않겠는가? (주석 17)


주석
15>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 19쪽.
16>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 19~22쪽, 발췌.
17> <씨알의 소리>, 52쪽, 한길사, 1983.





02.jpg
0.06MB
01.jpg
0.02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2 08:00 김삼웅

 

 

마하트마 간디

함석헌이 영향을 받고 존경하는 인물은 한 둘이 아니었다. 신앙의 대상이 있었고, 역사관과 철학사상의 가르침도 있었다. 국내 인물로는 안창호ㆍ조만식ㆍ이승훈을 존경하고 유영모와 김교신과는 스승이고 친구의 ‘사우(師友)’ 관계였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함석헌이 으뜸으로 존경하는 대상이다. 간디는 함석헌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존경한다. 그런데 함석헌의 간디 존경은 남달랐다. 여러 차례 그와 관련 글을 쓰고, 자서전을 번역하고, 인도를 방문하여 그의 생가와 기념관 등을 찾았다. 간디는 함석헌의 멘토였다.

함석헌은 3ㆍ1운동 뒤 인도에서 사챠그라하운동을 벌일 때 간디를 처음 알았다.
그리고 로망로랑의 <간디전>을 읽었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일본어로 번역된 간디 관련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간디에 관한 글을 쓴 것은 <사상계> 1965년 4월호였다. <사상계>는 “위기를 이겨낸 인간상”을 특집으로 꾸미면서 함석헌은 <간디의 참 모습>을 썼다. 부제 “죽음을 이겨낸 간디는 목적보다도 수단의 옳음을 외쳤다”에 이 글의 올갱이가 담겼다고 하겠다.

함석헌은 간디가 죽은 1월 30일, 글 쓴 날로부터 17년 전, 1948년 간디가 세상을 떠난 날에 맞추어 이 글을 쓴다고 밝혔다. 띠엄 띠엄 소개한다.

 

“간디의 일생은 파란많은 일생이요, 그의 남겨 놓은 공적도 가지가지로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히말라야 같이 자꾸만 올라가는 길세요. 올라갈수록 더 험하고 험할수록 그 보여주는 시야가 더 넓습니다. 그것은 운명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행동의 사람인 그는 자연 용기를 귀히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살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하는 그러면서도 대적을 미워함 없이 죽을 각오로 대할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우다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려고 도망가거나 빌붙지 말라고 합니다.”

“그 다음 겸손입니다. 모든 위대한 인격이 다 그러한 것 같이, 이도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자신(自信)으로 하면 그렇게 자신이 강한 사람이 없건만 그러면서도 또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중의 하나는 “수단이 옳아야 옳다”는 것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목적이 옳으면 수단도 저절로 옳은 것이 된다” 하는 것이 그 정신입니다. 그러나 간디는 분명히, 절대적으로 주장합니다. 목적이 문제 아니라 수단이야말로 문제라고. 그리고 실제로 술책을 쓰지 않고 참대로 하면 일은 실패되는 것만 같지만 사실로는 그것이 이기는 길이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칠조차도 그 죽음 앞에 절하고 조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칠이 무엇입니까? 무너져가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충신이었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려는 폭력주의의 낡은 정치사상의 한 개 상징입니다. 그 처칠은 일찍이 간디가 원탁회의를 하기 위해 런던에 갈 때 “그 반 나체의 비렁벙이 중놈”을 어찌 우리 폐하의 어전에 서게 하느냐고 약이 올라 반대했고, 2차 대전 때에 인도는 절대로 독립을 주어서는 아니된다고 간디를 잡아 감옥에 넣도록 지시했던 사람입니다.”

“처칠은 물론 위대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더 위대합니다. 사람들이 처칠은 잊을 날이 올 것입니다. 간디를 잊을 날은 없을 것입니다. 간디는 무엇으로 죽음을 이겼습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주석 14)

제71호(1978년2월호)

함석헌은 <사상계> 1961년 2월호에 <간디의 길>, 서울대 가정대 <아람> 제2호에 <새 인도와 간디>를 쓰고,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에 “내가 존경하는 인물”을 특집으로 준비했다. 김성식의 <인물보다 업적을>, 함석헌의 <마하트마 간디>, 윤태림의 <윌리암 어네스트 하킴>, 송건호의 <서재필>, 전경연의 <옷도 A. 피터 선생>이 특집의 줄기였다.
<씨알의 소리> 1978년 2월호에는 “간디 서거 30주기 추모” 특집으로 <그는 어떻게 마하트마가 되었을까>(김동길), <간디가 던진 문제>(안병무)를 싣고, 같은 해 11월호에는 간디의 <비폭력의 원리>(이상진 역), 1979년 7월호에는 <간디의 평화단 운동>을 직접 번역하여 게재하는 등 간디에 대한 연구와 존경심을 계속하였다.



주석
14> <사상계>, 1965년 4월호, 234~240쪽, 발췌.

 

 


02.jpg
0.21MB
01.jpg
0.06MB

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

013/02/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학교 시절 유영모에게 <노자>를 처음 배웠다. 그리고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또 이질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를 믿고 인도철학을 배우면서, 고난의 삶을 지탱하였다. 항일ㆍ반소ㆍ반독재 투쟁의 질곡에서도 정신적으로는 노ㆍ장의 세계에서 ‘소요유’를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도 2차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는 동양고전 속에 지혜가 있지 않겠느냐, 자유하는 민중으로 가는데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 생각한데서 공맹이나 노장을 파기 시작한 거지요.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생각하자는 거지요. (주석 10)

함석헌은 가파른 생애만큼이나 정신적ㆍ종교적ㆍ학문적으로도 가파랐다. 그의 시대가 전통사회 - 식민지 - 분단 - 전쟁 - 독재로 점철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학문, 정신세계도 변화와 융합을 거듭하게 되었다.

한 연구가의 분석이다.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면서 유가와 노장은 물론 불교에까지 넘나들면서 진리관에 있어서는 일종의 진리다원론적인 진리관을 펼친다. 기독교와 노장은 매우 이질적인 것에 속한다. 기독교가 유일절대신을 섬기는 종교라면 노장은 창조적인 신의 개념을 부정하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自然而然)’과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화(自生自化)’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에게는 그것이 공존한다.

함석헌이 진리다원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초등학교 때에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대체로 기독교적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비록 기독교의 교리가 진리의 전부였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오산 시절에 종교를 과학적인 자리에서 바라보게 되면서부터 그것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주석 11)

함석헌은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이요, 그 알짬되는 진리에 있어서는 국경이나 시대를 초월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리다원설을 체득한다. 이로 인해 ‘정통기독교’ 측에서는 이단으로 배척했다. 그의 진리관은 기독교적인 유일신관을 뛰어넘고, 진리는 시대에 따라 적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가 말한 “불교의 조선, 유교의 조선, 기독교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불교, 유교,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맞닿는다.

그럼 여기서 다원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을 노장과 관련지어보자.
함석헌은 1978년 그의 나이 여든이 다 되었을 때 생각하는 방식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라는 사고방식은 안 된다는 말을 한다. 다원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노장의 말을 빌면 무위(無爲)의 정신으로 판단하라고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인도 판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고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 판단했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말은 함석헌이 노자의 말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인 “어진 이는 지어먹은 마음이 없고 씨알의 마음으로 삼는다”를 응용하여 말한 것이다. 함석헌이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전체의 자리에 서 있으면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비록 선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석 12)

1996 한길사. 함석헌 주석

함석헌은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하다는 <바가바드 기타>와 세계에서 가장 긴 시(詩)라고 하는 <마하바라타(Mahabharashtra)>를 번역하였다. 그는 ‘기타’를 번역하면서 간디 이야기를 서문에 썼다. 간디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이 책을 읽었고, 젊어서 공부할 때 이 책을 외우기 위해 아침마다 세수할 때는 그 한 절씩을 써붙여 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그것을 속으로 외웠다고 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을 밝힌다.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헌책 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에 <바가바드 기타>가 한 권 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 그 이래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읽습니다. (주석 13)

‘기타’의 연대는 기원전 4~5세기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신의 노래”라는 뜻을 갖는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한다. 함석헌의 번역으로 두 책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고, 우리나라는 이슬람경전의 무지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게 되었다.


주석
10> <전집>17, <언로 열려야 시민정신 깬다>.
11> 조민환, <함석헌의 노장이해>, <한국사상과 문화> 제11집, 229쪽, 수덕문화사, 2001.
12> 앞의 책, 231~232쪽.
13> <전집>13, 3~4쪽.




01.gif
0.04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