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

013/01/30 08:00 김삼웅

 

 

1975.4.12 전남 광주 '광주민주회복 강연회' 함석헌, 천관우 (김녹영,김은경,박세정)

함석헌은 언론을 통한 저항이 한계에 놓이면서 행동으로 나섰다.
1971년 4월 14일 서울대 등 전국 12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위원장 심재권)을 조직하고, 15일에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에 대한 외부의 압력을 배격하는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면서 전국 언론계로 확산되었다. 19일에는 1970년대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국민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김재준ㆍ이병린ㆍ천관우를 대표위원으로, 계훈제ㆍ김정례ㆍ법정ㆍ신순언ㆍ이호철ㆍ조향록ㆍ한철하가 운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함석헌은 당시 해외 여행 중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가 1972년 4월 19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대표위원으로 추가 선출되었다. 출범 뒤 국민협의회는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 발표, 인권탄압 사례조사 등을 실시하면서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선의 좌절에 이은 10월 15일의 위수령, 10ㆍ17 유신변란으로 한때 위축되기도 했으나 함석헌의 참여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전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함석헌은 12월 13일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등 재야 인사 11명과 시국간담회를 갖고 박정희에게 보내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건의서>를 채택했다. 또 같은 날 국민협의회도 긴급 회동하여 시국간담회를 열고 ‘건의서’를 보냈다. ‘건의서’는 “현 시국은 민주주의 체제를 근본부터 또는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억눌린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아니하고는 중대한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면서 민주회복을 촉구하였다.

함석헌은 장준하ㆍ천관우ㆍ계훈제ㆍ백기완 등과 함께 10월 24일 서울 YMCA 회관 2층에 모여서 각계 인사 30인의 서명 아래 헌법개정청원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이날부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개헌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장준하가 낭독한 <개헌청원서명운동취지서>는 “오늘의 사태는 경제의 파탄, 민심혼란, 남북긴장의 재현이라는 상황 속에는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일고 있는 자유화의 요구”로 요약된다고 말하고, “현행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100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유신체제에 대항 정면도전이었다. 연말연시를 통해 서명운동이 급속히 확대되자 정부는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이 벌이는 “사회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라고 몰아부쳤다. 이어서 1973년 1월 8일 긴급조치 1ㆍ2호를 선포, 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및 헌법 개폐를 주장ㆍ발의ㆍ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긴급조치 1ㆍ2호 선포에 따라 장준하와 백기완은 구속되고, 함석헌은 천관우ㆍ안병무ㆍ문동환ㆍ법정ㆍ김숭경ㆍ김윤수ㆍ계훈제 등과 함께 연행되어 수사기관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유신반대운동이 거세지면서 정부는 문인간첩단사건과 민청학련사건 등을 날조하는 한편 민주인사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제2차 인혁당사건을 조작하면서 공안정국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들었다.

함석헌은 9월 23일 국민협의회 김재준ㆍ천관우 대표와 공동으로 유신체제를 규탄하고 구속 인사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일로 세 사람은 당일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10월 24일 동아일보 편집국, 방송국 기자 180여 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이어 농성을 시작하자 함석헌은 현장을 방문하여 기자들을 격려했다.

유신체제의 포악성이 날로 심해지면서 민주세력의 저항도 그만큼 강화되었다.
1974년 11월 27일 정계, 천주교, 기독교, 불교, 언론계, 학계, 문인ㆍ법조인ㆍ여성계 등 각계 인사 71명이 기독교회관에서 <국민선언>을 발표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를 결성했다. 이전의 ‘국민협의회’를 더욱 확대하여 다수의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토록 한 것이다.

‘국민회의’는 12월 25일 서울 YMCA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발족을 선언하면서 상임대표에 윤형중, 대표위원에 함석헌ㆍ이병린ㆍ이태영ㆍ양일동ㆍ강원룡ㆍ천관우ㆍ김정한 등 10인을 선출하고 대변인에 함세웅 신부를 임명했다. 한때 지상 논쟁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윤형중 신부와는 함께 반독재 투쟁의 동지가 되었다.

‘국민회의’는 홍성우ㆍ한승헌ㆍ함세웅ㆍ김병걸ㆍ김정례ㆍ임재경 등 6인을 운영위원으로 하는 조직 체제를 갖추고, “범국민 단체로서 비정치 단체이며, 그 활동은 정치활동이 아닌 국민운동”으로 성격을 규정한 뒤 “자유, 평화, 양심”을 행동강령으로 선정하였다.

‘국민회의’는 이날 <국민선언>을 발표, ① 현행 헌법을 합리적 절차를 거쳐 민주헌법으로 대체 ② 복역ㆍ구속ㆍ연금 중인 모든 민주인사에 대한 석방과 정치적 권리회복, 언론자유 보장 ③ 국민의 최저생활 보장 ④ 민주체제의 재건 확립을 통한 민족통일 성취 등 6개항을 요구했다.

‘국민회의’가 선두에서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지역지부의 결성 등 전국적으로 호응을 받자, 박정권은 함석헌의 가택연금을 비롯하여, 서울대 백낙청 교수를 파면하고, 이병린 변호사의 구속, 한승헌 변호사를 반공법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등 갖가지 탄압을 자행했다.

함석헌은 1975년 1월 2일부터 공덕귀ㆍ이희호 등 70여 명과 구속자를 위한 정기 목요기도회를 조직하고, 매주 이 모임을 주도하면서 구속자 가족을 위로ㆍ격려했다.

박정권은 국민의 거센 반유신 운동에 대해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들고 나왔다.
독재자들이 흔히 꺼낸 국민투표는 세계적으로 부결된 사례가 없을만큼 국면돌파의 카드였다. 관권과 국가홍보기관을 총동원하고, 어용화된 언론기관이 찬성운동을 벌이게 되는 국민투표의 결과는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함석헌은 다시 강력한 저지투쟁에 앞장섰다. 장준하가 1975년 1월 8일 박정희에게 “민주헌정회복 촉구와 대통령 스스로의 개헌발의 및 거취결단 요구”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면서 정부와 재야는 더욱 격렬하게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함석헌은 ‘국민회의’ 지방지부 결성식에 초대되어 연설하고, 이 무렵 전국적인 언론인들의 민주화 요구 집회에 나가 격려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이듬해 1월 16일에는 ‘국민회의’ 성명과 관련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가 6시간 만인 밤늦게 풀려나고, 23일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전면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어서 2월 10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14개 단체와 공동으로 국민투표 거부를 촉구하고,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또 투표가 강행되는 2월 12일 김대중 등과 오전 7시부터 투표 종료시까지 명동성당에서 이를 거부하는 단식 기도회를 개최했다. 3월 1일에는 “독재 권력에 대해 무제한 투쟁하고 비타협ㆍ불복종으로 독재에 대항한다”는 내용의 <민주국민헌장>을 ‘국민회의’ 명의로 공표했다.

정부는 4월 9일 인혁당과 관련한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서도원ㆍ도예종ㆍ하지완ㆍ송상진ㆍ이수병ㆍ우흥선ㆍ김용원ㆍ여정남을 형 확정 하루만에 전격적으로 처형하는 잔혹성을 과시했다. 이날 함석헌은 자택에 연금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3일 만에 풀려서 12일 ‘국민회의’ 전남지부에서 개최한 시국강연회에 천관우와 함께 참석, 강연했다. 이날 2,000여 명의 광주시민이 참석했다.

정부는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서울 농대생 김상진 할복자살사건을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것이다. 내용은 △ 유언비어의 날조ㆍ유포 및 사실의 왜곡ㆍ전파행위금지 △ 집회ㆍ시위 또는 신문ㆍ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ㆍ선포하는 행위 금지 △ 수업ㆍ연구 또는 사전에 허가받은 것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ㆍ시위 정치관여행위 금지 △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 금지 △ 금지위반내용을 방송ㆍ보도ㆍ기타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ㆍ소지하는 행위 등을 금지시켰다.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하도록 하였다. 한마디로 문명국가에서는 사례를 찾기 어려운 초법적 전재적 폭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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