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1 08:00 김삼웅

 

 

1960년대는 <사상계>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민족주의세력이 이를 매국외교라 단정하면서 <사상계>는 반대투쟁의 본영이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더 많은 글을 이 지면에 쓰게 되고, 잡지의 권위와 파워가 그만큼 신장되었다.

<5ㆍ16을 어떻게 볼까?>에서부터 함석헌과 군부정권의 첨예한 대립각이 세워졌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3년 3월호에 <우리 민족의 이상>, 4월호에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 8월호에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 9월호에 <한일회담을 집어치우라>, 10월호에 <새 혁명>, 1964년 3월호에 <양한재조재차일념>, 4월호에 <매국외교를 반대한다>, 9월호에 <우리는 알았다>, 1965년 1월호에 <비폭력혁명>, 5월호에 <세번째 국민에게 부르짖는 말>, 10월호에 <싸움은 이제부터>, 12월호에 <대담-민중의 증언>, 1966년 3월호에 <레지스탕스>, 5월호에 <우리 역사와 민족의 생활신념>, 1967년 1월호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 2월호에 <저항의 철학>, 4월호에 <4자회담 좌담회>, 1968년 4월호에 <혁명의 철학>, 5월호에 <혁명공약의 행방>, 7월호에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남한산성)>, 8월호에 같은 연재 2회로 <행주산성>, 10월호에 같은 연재 3회로 <사상계>를 각각 썼다.

이 시기 함석헌은 60대 초ㆍ중반기의 나이였다.
왕성한 필력이고 놀라운 정력이었다. 모두 다 열정을 쏟은 글이고 그때마다 정치적ㆍ사회적 파장이 컸다. 그는 어느 언론인보다 많은 글을 쓰고, 어떤 학자보다 심도 있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67년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사상계>의 판권이 부완혁에게 넘어가면서 이 잡지에 글쓰기는 다소 뜸해졌다. 1968년 7월호부터 ‘역사의 격전지’ 연재는 현장(현지)을 탐방하여 다큐멘터리방식으로 집필할 계획이었다. 1회에 남한산성과 2회에 행주산성에 이어 3회에는 <사상계>를 찾아서 그 피어린 격전지의 사력을 집필하였다. 당시 <사상계>는 장준하와 부완혁 사이에 판권 문제를 둘러싸고 ‘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상계가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가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되고 부완혁이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됩니다. 누가 이겨도 사상계는 자살입니다. 두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는 것 그것을 바루 듣는다면 이렇습니다.

“사상계가 죽게 됐습니다. 제발 살려줍시오.”

사상계가 다 죽게 되어도 누가 살려 주려고 들지도 힘을 쓰지도 않기 때문에 내분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적인 시비를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그름은 개인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5ㆍ16에 대하여는 그 일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도덕적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도학선생의 도덕이 나라와 시대를 못 건지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동시에 그 역사적 시점에서는 박 모나 김 모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됐던가 하는 것을 가려내어야 역사는 구원됩니다. 사상계의 비극의 원인은 개인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주석 30)

함석헌은 <사상계>의 분열이 장준하와 부완혁 간의 사적 이해관계가 아닌 군사정권의 탄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5ㆍ16쿠데타를 주동한 인물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만 ‘격전’의 원인을 알게 된다고 풀이한다.

격전지가 남한산성에 있는 줄 알고, 행주산성에 있는 줄 알고, 한라산 백록담에 있는 줄 알고 헤매이며 눈물 뿌렸던 나는 어리석었습니다. 서로 목을 찔러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비참한 자살적인 전쟁의 격전지는 다른 데 아닌 서울 복판에 있습니다. 대강이를 개구리 얻어 문 독사처럼 내저으며 근대화라 발전이라 미쳐 돌아가는 이 수도 서울에 있습니다. 인권선언을 내붙인 유엔의 깃발과 자유평등을 그 건국정신으로 한다면서 월남전쟁을 하는 값으로 자유를 부르짖고 일어나던 체코가 소련군대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체 외면하는 대미국의 국기가 펄펄 날리고 있는 이 서울에 있습니다.

함석헌에게 <사상계>의 ‘격전’은 지난날 어느 ‘역사적 격전지’에 못지않는 아픔의 상처였다. 날이 갈수록 이빨과 발톱이 날카로워지는 독재 세력에 맞설 언론매체란 <사상계>밖에 없는 터에, 이곳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상계 하다가 망하는 것이 그리 큰 일 입니까? 그것은 크고 작은 허다한 자살, 자살의 탈을 쓴 살인이 이 수도를 휩쓸고 있는 것을 절규하는 부르짖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인 마지막 촛불이 꺼진다면 그어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사상계를 이날껏, 읽는 사람이거나 아니 읽는 사람이거나, 단 하나의 바른 말하는 잡지라고 했지오? 5천년 문화민족이노라고 하면서 신문잡지를 몇 천 몇 백으로 하면서 ‘단 하나’ 라는 말도 부끄럽지만 또 지나친 과장인지도 모르지만 부끄러운 과장일수록 그 단 하나의 촛불이 꺼지도록 두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주석 31)

함석헌은 굴욕회담의 격동기에 <사상계>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ㆍ잡지에도 적지 않은 글을 썼다.

<경향신문>(1963. 7. 8)에 <그 사람들은 살았더라>, <한국일보>(1963.7.22)에 <누구 믿을 때 아니다>, <신세계>(1963. 9)에 <나는 왜 갑자기 돌아왔나>, <경향신문>(1963. 9.9~10)에 <국민의 당 여러분께 애원합니다>, <소설계>(1963. 10)에 <호소, 국민에게 다시 호소한다>, <동아일보>(1963.10.14)에 <한 발걸음 바로 앞에서>, <20세기 사상강좌 5>(1964, 박우사)에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동아일보>(1964. 1~10), <새해의 말씀>, <조선일보>(1964.1.28)에 <3천만 앞에 또 한번 부르짖는다>, 같은 신문(1964. 3. 5)에 <휴전에서 군정종식까지>, <동아일보>(1964.8.26)에 <데모학생을 건집시다>, <조선일보>(1964.9.6)에 <이 나라의 오늘을 말한다>, <인물계>(1964. 9.10)에 <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올 다이제스트>(1964. 12)에 <준비 없는 통일 말하지 말라>, <크리스찬 신문>(1965. 2. 13)에 <우리의 살길은 무엇인가>, <경향신문>(1965.2.19)에 <일본은 대답하라>, <동아일보>(1965.7.1~2)에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신동아>(1965.10)에 <대학이란 무엇이냐>, <종교계>(1966.1)에 <대중과 종교>, <여상>(1966.2)에 <우리들의 비너스에게 주는 말>, <종교계>(1966.7.8)에 <종교인은 죽었다>, <조선일보>(1968.4.10~12)에 <미국문명과 흑인문제>, 같은 신문(1968. 6.23)에 <개화백경> 등을 집필하였다. (주석 32)

함석헌이 이 무렵에 얼마나 많은 글을 쓰면서 매국외교를 반대하고, 씨알의 시대정신을 일깨우며, 언론ㆍ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중심매체는 <사상계>였다. 이 잡지가 박정권의 탄압으로 고사상태가 되고, 일시 부완혁에게 넘겨주었던 판권이 회수되지 못하면서, 함석헌과 장준하는 매체를 잃은 ‘삼손’이 되었다. 


주석
30> <사상계>, 1968년 10월호, 21쪽.
31> 앞의 책, 22쪽.
32> 정현필, 앞의 글,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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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0 08:00 김삼웅

 

 

1959 백죽문화사

함석헌은 해외 순방 중이던 1962년 12월 국내에서 <생활철학>이란 단행본을 서광사에서 출간했다.
4ㆍ19 이후에 신문ㆍ잡지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1959년 3월에 출간한 <새 시대의 전망>이래 두번째 펴낸 평론집이다. <새 시대의 전망>은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제되어 발행되었다.

<생활철학>의 서문에서 저자는 ‘누에의 철학’을 강조한다. 미국 벤틀 힐에서 쓴 글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닮았으니 푸른 뽕을 먹어 흰 실을 뱉는 신비의 누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같지 않은가? 어떤 이는 호랑이라 하고 어떤 이는 토끼라 하지만 차라리 누에라 할 것이다.
힘을 자랑하고 싶으면 호랑이라 할 것이고, 업신여기려면 토끼라 하겠지만, 이럴 것도 저럴 것도 아니요, 누에처럼 겸손히 누에처럼 부지런히, 누에처럼 평화롭게 살 것이니라. 그 땅만 아니라, 그 사람도 누에 같다. 그럼 또 누에와 같이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 힘은 비록 약하고, 그 입은 비록 적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것 아니어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먹는 날, 천하라고 다 먹을 수 있다. 유교문화도 옴질옴질, 불교문화도 옴질옴질, 기독교문화도 옴질옴질, 과학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정신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다툴 것 없이, 시기할 것 없이, 떠밀면 돌아눕고, 뺏으면 또 다시 가 붙으면서, 소리도 없이, 떠듦도 없이 먹고는 자고, 자고 나면 한 껍질 벗고, 새로 나서 또 먹어서 애기 잠, 두 잠, 석 잠, 그리고 한 잠을 자고 나면 백옥(白玉) 같은 문화의 전당 지을 수 있지 않겠나?

누에 - 번데기 - 나비의 생활철학이야말로, 씨알의 생활철학이다.
(주석 23)

함석헌의 글 ‘누에의 철학’은 연구가들이 놓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머리말은 그의 어느 글 보다 의미와 상징성이 깊은 내용은 담고 있다. 하여 책의 내용보다 ‘누에의 철학’을 소개하기로 한다.

잠사(蠶史)란 말이 있겄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이른 말이다. 그가 흉노와 싸우다가 져서 항복한 이릉(李陵)이를 동정해서, 잘못이라 하지 않았다는 죄로 임금이 노하여, 궁형(宮刑)곧 자지를 잘라서 잠실 속에 던졌다. 잠실은 감옥이란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사기>를 씀에 임금이 도로 좋아해서 중서경(中書令)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 잠실 속에서 쓰고, 그 때문에 살아나온 것이라 해서 잠사라 한다.

예로부터 정치한다는 것들이 그랬다.
제게 나쁘면 남의 생명 뿌리라도 자르고, 제게 좋으면 벼슬 주고 그러니 오늘 와서 보면 누가 정말 무서운가?
사마천의 자지를 잘랐던 임금인가? 그 잠실에서 실 뽑듯하는 글로 그것을 뚫고 나왔고, 그 뿐 아니라 오늘까지 살아, 그 따위 정치가란 것들은 목을 자르는 역사가인가?
(주석 24)

함석헌은 이름 없는 씨알을 누에에 비유하면서 권력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가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도 한 마리 누에로 자처했다.

번쩍 번쩍하는 네 옷이 그게 무어냐? 네 군복에 흔들흔들 춤을 추는 그 솥 다리가 그게 어디서 온 거냐? 얼마나 많은 누에가 죽어서야 된지 아느냐?
한 번 번드쳐, 빛 나라에 날아 보자던 나비를, 그 잠을 채 자기 전 그 집을 뺏고, 그 몸을 솥에 삶아 살로 뽑아내서 짠 것이 그 비단, 그 영광 아니냐?
살아나면 그리스도가 될 얼마나 많은 씨을 죽이고, 그 공로를 빼앗서 되는 너희 권력이요, 너희 도덕이요, 너희 종교요, 너희 명예인 줄 아느냐?
비단을 짜기 위해, 누에치는 계집의 손에서 고치를 뺏지 마라. 실을 뽑기 위해, 애매한 번데기를 솥에 삶지 마라.
한 잠을 자려고, 이 벤들 힐 뽕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나를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내가 채 변화하기 전에 너희가 내 무덤을 연다면, 가락꼬치나 미운 돌밖에 있을 것이 없느니라.
(주석 25)

함석헌은 안반덕 산골짜기에 머물 때 장준하의 요청으로 또 한 편의 평론을 썼다. <레지스탕스>였다. 자신이 ‘신을사조약’이라 명명한 한일조약 이후 <사상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필자들은 글 쓰기를 망설이고, 인쇄소도 압력을 받았다. 그래서 신년호와 2월호의 발간이 늦어졌다며, 장준하는 추락하는 국민정신을 살리는 것과 항거 정신에 대해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러 날 망설임 끝에 찬 바람이 흔들리는 촛불 앞에 정좌하여 필을 들었다. 이 평론 역시 밑 줄을 치고 읽을 대목이 많다.

생명의 길은 끊임없는 반항의 길이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생명 있기 전에 무엇이 있던 것 아니요, 생명이 다 산 다음에 또 무엇이 있을 것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이외를 생각할 수 없다. 생명이 처음이며 끝이요, 생명이 목적이며 수단이다. 다른 무엇이 또 있어서 생명의 가는 길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니고, 생명 그 자체가 규정이요 범주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되려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26)

함석헌은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비록 당장은 권력이 승리하고 패악이 선을 누르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진보하고 선이 승리한다고 믿었다.

“역사는 절대의 진보요. 인생은 절대의 긍정이다. 작게 보면 진보의 시대도 있고 퇴보의 시대도 있으나 그것은 마치 올라가는 산길에, 한때 내려간 언덕도 결국 올라간 길인 것 같이, 스스로의 뜻이 목적이 되는 전체의 과정에서 볼 때, 다 진보의 과정이다.” (주석 27)

한·일협정 비준 반대

함석헌은 한일조약 비준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정신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항거정신을 잃어버린 국민정신에 대해 비판한다.

5천년 역사를 대체로 통틀어 볼 때, 이 민족이란 것이 무엇인가? 남의 세력에 기운을 못 펴고, 겨우 생존하여 온 사람들 아닌가? 백 가지 불행의 원인이 모두 거기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역사를 새로 짓는다는 이 마당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국민으로 하여금 먼저 쪽지를 펴고 내로라는 기상을 가지도록 길러 주는 일 아닌가? 한 마디로 해서 항거하는 정신의 고취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더 북돋고 가꾸어 주지는 못하고, 겨우 돋우려는 싹도 잘라 버리니 어떻게 하나?

숨김없이 말해보자. 한일조약이 아주 체결이 된 이후 오늘까지 얼마 아니되는 시일이나, 그 동안에 국민의 의기는 올라갔다고 할 것인가, 내려 갔다고 할 것인가?
(주석 28)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 은거할 만큼 굴욕회담 과정에서 보인 지식인들과 국민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그래서 국가(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국민의 의기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절감하면서, 이 원고를 썼다. 여전히 생명력이 있는 글이다.

나라는 하루만 하고 마는 것도 아니요 일부 사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닌데, 국민의 마음을 이꼴을 만들어 놓고는 도저히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의기 없는 국민을 가지고 무엇을 할 터인가? 제 나라 안에서도 감히 정치의 비평을 못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보자는 용기를 못내는 백성이 어떻게 외국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을까? 더구나 국민을 덮어 누르는 이 정책이 이 나라의 정치한다는 그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도 못되고 첨부터 남의 나라 세력에 끌려서 된 것임에서일까.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려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느냐고 네가 묻느냐? 그렇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하는 인격만이 할 수 있다. 노예에게는 도덕이 없다.
(주석 29)



주석
23> 함석헌, <생활철학>, 머리말, 서광사, 1962.
24> 앞과 같음.
25> 앞과 같음.
26> 함석헌, <레지스탕스>, <사상계>, 1966년 3월호.
27> 앞과 같음.
28> 앞의 책.
29>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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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9 08:00 김삼웅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게 된 박정희의 정치적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앞의 두 사안의 투쟁 과정에서 야당은 신한당과 민중당으로 갈라지고, 언론은 박정권의 회유와 탄압이라는 강온 전략에 말려 제 기능을 잃어갔다.

제6대 대통령선거가 1967년 5월 3일로 예정된 상태에서 야권은 윤보선ㆍ유진오ㆍ이범석ㆍ백낙준 등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되었다. 국민은 단일후보를 기대했으나 조정이 쉽지 않았다. 장준하가 중심이 되어 후보단일화 작업의 일환으로 ‘4자회담’을 주선했다. 거론 인사 4명을 모아 화합을 성사시킨 것이다.

곡절 끝에 윤보선이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장준하는 이범석이나 백낙준이 후보가 되기를 바랐으나 뜻대로는 아니었다. 윤보선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교체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위기를 맞은 박정희는 군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눈엣가시와 같은 장준하와 <사상계>에 보복의 칼을 뽑았다. 굴욕회담 반대의 이념적, 이론지적 역할의 중심에 장준하와 <사상계>가 있고, 그 배후에 함석헌의 존재에 주목한 것이다. 1965년 3월 중순 종로세무서 직원 10명이 사상계사에 들이닥쳐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10일 동안의 조사에도 꼬투리를 잡지 못하자, 이번에는 국세청의 증원부대까지 포함된 20여 명이 본사는 물론 인쇄소, 제본소, 지업상, 광고주, 지방 거래 서점까지 찾아가 이잡듯이 뒤졌다. 고사작전이었다. 또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도 ‘정치교수’로 찍어 대학에서 추방시키는 등 전방위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1966년 10월 26일 장준하는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었다.
그가 삼성계열사의 밀수행위 규탄대회에서 “박정희가 밀수왕초”라는 발언과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라는 발언 때문이었다. 광복군 장교출신 장준하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의 맞대결이었다.

<사상계>는 1967년 4월호에 ‘4자회담’을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를 마련한 것은 ‘4자회담’의 내막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의미가 있었다. 참석자는 함석헌ㆍ백낙준ㆍ이범석과 사회자 양호민이었다. 양호민은 당시 <사상계> 주간이었다.

좌담회에 참석한 함석헌은 “이번만은 정상적인 정권교체에만 국한되지 말고 한번 어려운 시국을 인식하여, 사람이야 누가 명색을 지고 나서든지간에, 중요한 이 시기에 공동의 정치책임으로 정치를 일신하는, 역사로 보면 나라를 건진다는 그런 의식에서 일을 한다면 공동으로 같은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이번에는 일이 되는가보다 해서, 국민이 갑자기 ‘4자회담’이 되는 것에 감흥을 올렸었는데, 그 후에 못된 것을 보고는 아주 섭섭하군요.” (주석 21) 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박정희는 두번째로 맞붙은 윤보선과의 접전에서 쉽게 승리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야당후보에 식상한 국민은 박정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정권의 탄압으로 <사상계>가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국가원수모독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장준하는 더 이상 언론인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박정희를 물리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나서는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6월 8일로 공고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함석헌은 이때 장준하의 선거연설원이 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민당에 입당원서를 냈다. 그리고 지원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세요.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은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주석 22)

함석헌은 장준하의 당선을 위해 선거구를 찾아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다. 후보는 감옥에 갇혀 있고, 자금도 조직도 없는 선거전이었다. 흰 두루마기, 흰 머리, 흰 수염의 함석헌이 연단에 서면 우선 호기심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고, 장준하와 박정희, 그동안 <사상계>의 역할 등을 이야기하면 박수가 쏟아졌다.

함석헌의 지원연설로 여론이 움직이고, 지식층을 중심으로 장준하의 독립운동과 <사상계>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선거 판세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정보기관이 장준하를 석방하는 것이 ‘동정여론’을 차단할 수 있다는 보고에 따라 정부는 투표 일주일 전에 그를 석방하였다. 석방된 후보의 얼굴이라도 보자는 유권자들이 몰려왔다.

대세는 장준하에게 쏠렸다. 5만 7천여 표(차점은 3만 5천여 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되었다.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준하는 당선되었으나 신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3ㆍ15가 무색케하는 관권ㆍ부정선거로 공화당이 압승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구상하면서 개헌선 확보를 위해 총선에서 부정을 자행한 것이다. 야당과 학생들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나섰다. 6월 9일 연세대에서 부정선거규탄시위가 일어난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박정권은 6월 15일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탄압하면서 거침없이 휴교령을 내리는 파스시트적 수법이었다. 


주석
21> <사상계>, 1969년 4월호, 20쪽.
22> 고성춘, <장준하선생의 옥중당선 이야기>, <민족혼ㆍ민주혼ㆍ자유혼>,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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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8 08:00 김삼웅

 

 

 

1999년 신문ㆍ방송ㆍ통신사ㆍ편집ㆍ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들에 의해 한국의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선정된 송건호는 1971년 <언론인 함석헌>을 썼다. 몇 대목을 뽑아본다.

함옹은 이른바 직업적 언론인으로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인물이면서도 이 양반이야말로 죽은 언론계가 언제나 생기와 양심과 용기를 붙어 넣어주는 참된 언론인으로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함옹을 누구도 언론인이라고 보지 않는데도 기실 이 분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아마 가장 진정한 언론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바로 이 점(자유롭고 독립된 지식인 - 필자)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칭 언론인이 구름처럼 많은 이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진짜 언론인으로서 활동해 온 것은 이 분의 그 아무것에도 매어 살지 않는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이 한 조건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함옹이 기자들이 우글우글한 신문사 밖에 있으면서도 빛나는 언론활동을 하게 된 것은 이른바 언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언론 활동이 상대적으로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직업적 언론인이 감히 엄두도 못내는 한 시대의 본질적 문제에 핵심을 찌르는 비판활동을 벌인다. 이런 때의 함옹 글은 비수보다도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글이 된다. 그래서 흔히 권력자들은 함옹을 옥에 가두기도 하고, 그가 내는 잡지를 압수처분하기도 하고, 그를 위협, 겁을 주기도 하고, 때론 미행ㆍ감시ㆍ연금하기도 하며 그의 글을 꺾으려고 하였다.

지킬만한 재산도 없고, 보호할 만한 감투도 없고, 유지하여야 할 정치적 지위도 없었다.
함옹은 철저하게 무욕하고 따라서 잃을 것이 없는 노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다. 그의 빛나는 언론활동은 바로 이러한 ‘무욕의 지위’에서 나온 정론이었다.
(주석 17)

송건호의 글을 인용한 것은 언론계 사주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에 거대한 사옥을 짓고, 언론인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제도언론의 타락에 대해 질타한 모습을 찾기 위해서이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7년 1월호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는 권두시론을 썼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장준하를 면회갔다가 청탁받아 쓴 글임을 서두에 밝혔다.

말인즉,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 했고 존슨이 온 것은 한국 청년의 피를 더 요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기 때문이라 하지만 그것은 꺼리가 될 뿐이고, 정말 까닭인즉 군사정권 이래 오늘까지 이 정권과 싸워왔기때문 아닌가? 존슨이 왔던 것이 월남전쟁 때문인 것은 과학적인 사실 아닌가? 대통령이 밀수 왕초라 하는 것은 춘추필법 아닌가? 이 나라 모든 일의 책임이 잘잘못 간에 나 대통령한테 돌아갈 것은 정한 일 아닌가? 그럴라기에 대통령으로 놓은 것이지, 만일 아무 책임 아니진다면 무슨 대통령이라 할 것이 있나? (주석 18)

함석헌은 송건호가 지적한대로 “언론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을 때 거침없이 이른바 ‘성역’을 비판하였다. 당시 언론은 박정희를 성역화하면서 직접 비판에서 비켜갔다. 함석헌은 예외였다.

좋기는, 이상대로 된다면, 현 대통령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한 번 용퇴를 하는 일이다. 공화당 당수를 그만두고 대통령 입후보를 아니할 것을 선언해 주는 일이다. 그렇기만 한다면 일은 훨씬 쉽고 나라를 위하여 참으로 축제할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설혹 그럴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 주위의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능히 물리치는 데가 그의 정치가로서의 성의와 역량을 증명하는 데다. 한 사람의 값이 큰 것을 또 한 번 생각한다. (주석 19)

함석헌은 박정희가 공화당 대표와 차기 대선 후보로 나오지 말고, 당장 하야할 것을 제의한다. 야당 대표라도 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함석헌이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는 언론(인)의 책임, 나아가서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한 족벌신문에 대해 ‘게릴라전’을 펴라는 주장이다. 해방 이후 이 같은 발언은 최초였다. 금단의 성역에 불화살을 쏘았다.

다음에 오는 선거가 성공이 되거나 실패가 되거나, 실패되면 될수록,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언론의 게릴라전이다. 국민의 양심을 대표하던 사상계가 경영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읽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계획적으로 하는 압박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에서 대규모의 정규군의 싸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게릴라전이 그 승부를 결정하듯이, 언론에서도 큰 신문 큰 잡지로 여론을 지배해가던 시기는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규군이 깨지면, 그 패잔부대를 무수한 게릴라부대로 재편성하여 대부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방방곡곡을 보내어 도리어 승리를 거둘 수 있듯이 우리 사상의 싸움에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전차 간에서나 버스 간에서나, 결혼식에서나 장례식에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우리의 정의혁명 사상을 고취하고 지금 잘못된 정치의 비판을 하자는 것이다.

새해에는 그대로만 올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정치, 정보정치, 당파주의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와야한다. 천지에 버젓한 정의혁명을 청천 백일에 내놓고 생활로 하잔 말이다.
(주석 20)

함석헌이 주창한 ‘언론게릴라전’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제도언론(인)의 과제가 되어 있는 한편 진보신문의 창간과 주간지, 월간지와 특히 인터넷신문과 방송, 각종 전자 매체가 속속 나타나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석
17> 송건호, <언론인 함석헌>, <씨알ㆍ인간ㆍ역사>, 26~29쪽, 발췌.
18> 함석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 <사상계>, 1967년 1월호, 16~17쪽.
19> 앞의 책, 20쪽.
20> 앞의 책,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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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7 08:00 김삼웅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명상과 독서를 하는 한편 또 한 권의 저서를 펴내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오산고보에 재직하면서 1936년 5월호부터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연재하였다. ‘조선역사’의 자매 편인 셈이다. <성서조선> 제88호부터 110호까지 2년여에 걸쳐 연재한 세계역사였다. <성서조선>이 폐간되면서 이 연재도 중단되었다. 함석헌은 해방 뒤 <영단(靈斷)>에 썼던 글까지 모아 책으로 묶었다.

함석헌은 해인사에서 ‘조선역사’를 보완, 개작한 것과는 달리 ‘세계역사’는 예전에 쓴 글 중에 골라서 펴냈다. 제목도 ‘성서적 입장에서 본’을 빼고 <역사와 민족>으로 바꾸었다.

<성서조선>이나 <영단>에 냈던 글을 묶어 책으로 내자는 의견이 왔습니다. 그럴 때 나는 반대했습니다. 내자는 이의 말은, 그 글들이 나왔을 때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말하자면 한 구석에서 된 것이니 이제 그것을 다시 내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으므로 그럴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자는 이의 주장은 또 이러했습니다.

지금 생각이라고 다 옳은 것도 아니요, 옛날 생각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며 또 일단 내는 다음에는, 내 생각이라 해서, 거기 독재권을 쓸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번 의논이 오고 간 끝에 그 중에서 비교적 내 마음에 허락이 되는 것을 후린 것이 이것입니다.
(주석 12)

함석헌은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그리고 동기집회에서 발표한 기독교사를 3부 자매편으로 낼 계획이었으나 ‘기독교사’는 원고를 잃어서 영영 햇볕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정말 어려운데 빠졌습니다. 정말 깊이 생각할 때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고 ‘어떻게, 어떻게’ 하고 ‘방안’을 찾아서 미치나, 방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 그 자체가 잘못됐는데, 깊이 생각이라 했지만, 무엇이 깊은 것이겠습니까? 독자적으로, 나로서 하는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뒤져 왔던 방구석을 또 다시 뒤지는 모양으로 그런 심리로 지나간 날에 했던 생각을 또 다시 뒤집어 봅니다.
(주석 13)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일반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데 비해 <역사와 민족>은 덜 알려진 편이다. 책은 △ 서언 - 우리들의 세계역사, 성서사관과 진화론에 이어 △ 창시시대 △ 성장기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로 큰 장을 나누었다.

△ 창시시대 - 1. 우주의 창조. 2. 생명의 창조. 3, 인류의 출현까지. 4. 인류의 진화. 5. 인간의 특질. △ 성장기 - 1. 석기시대. 2. 지리와 인종의 배포. 3. 요람 안의 여러 운명. 4. 종교. 5. 무력국가.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 1. 서풍의 노래. 2.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3. 순교의 정신. 4. 하나님의 정의. 5. 산 신앙. 6. 무교회 신앙과 조선. 7. 존재하는 종교. 8. 제2의 종교개혁. 성삼문과 스테반. △ 20세기의 출애굽 - 1.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애소랜도의 발시로 구성되었다.

함석헌은 이 책의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근본 정신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라는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명사는 그 사물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가 지는 성질을 단적으로 잘 나타낸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의 근본이 되는 프로테스트 라는 말은 번역하여서 ‘반항한다’, ‘항의한다’, ‘선언한다’, ‘공증한다’ 등의 말로 된다. 대체로 말해서 자기의 주장을 공공연히 선언 증거한다는 말로 전투적 기분이 짙은 말이다. 곧 의가 불의에, 진리가 사론에, 선이 악에 강압을 받을 때에 프로테스탄트가 일어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프로테스탄트, 그 주의를 프로테스탄티즘이라 한다. 이 명사의 해석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위인(爲人)이 어떠함은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이 명사가 프로테스탄트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고, 반대자가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제 2스파에르회의 때에 정통파 구교 사람들이 그 결정한 법안에 반항한다 하여서 그들을 불러 프로테스탄트 곧 반항자라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후에는 자타가 다 승인하여 공용하게 되었다.
(주석 14)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잇고자 하였고, 그 정신으로 압제자들에게 대들었다. 기독교가 근본정신을 잃고 타락하자 이를 비판하고, 독재권력과 야합하자 거침없이 떠났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본인 성서를 죽는 날까지 놓지 않았다. 그 대신 저항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 그 원류를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의 배후에는 중세의 종교적 질곡에 반항하는 문예부흥 이래의 자유사상, 인문주의사상이 흘러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불충분하다. 한층 더 올라가서 바울주의에서 우리는 근원은 찾을 수 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무엇보다 자유독립의 사람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 의식주의(儀式主義)의 묵은 물결이 때때로 침입하려는 모양을 보고는 그는 열화 같이 일어서서 신앙의 자유독립을 외쳤다. 갈라디아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를 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의문(儀文)의 노예가 아니요, 신앙에 의한 자유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여 온 유대교도들을 상대로 싸우는 바울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석 15)

함석헌은 또 이 책의 <하나님의 정의>편에서, 양심이 마비되고 진실을 보는 눈이 까막눈이 된 사람들을 질타한다.

눈먼자야, 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네가 죽음 구렁이 속에 빠져죽고 생각이 없거든 두드려라. 열심히 두드려라. 정의의 빛이 있을 지어라 하며. 그러면 네 눈을 덮은 두터운 암흑의 빗장이 깨어지고, 눈이 부신 정의의 빛이 스스로 나타나 네 앞을 환하게 비칠 것이다. 만고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정의다. (주석 16)


주석
12> 함석헌, <역사와 민족>, 머리말, 제일출판사, 1964.
13> 앞과 같음.
14> 앞의 책, 242~246쪽.
15> 앞의 책, 249쪽.
16> 앞의 책,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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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6 08:00 김삼웅

 

 

플리커(@Dan Stovall)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투항이나 패배주의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었다. 독재세력과 싸우되 비폭력으로 저항하자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사상을 배운 것이다. 그의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면서 “진리는 곧을 때는 금강석 같으면서도 연할 때는 꽃 같은 것이다”란 신념대로였다. “오직 비폭력만이 인류의 희망”이란 간디의 철학은 바로 함석헌의 철학이었다. <사상계> 1967년 2월호에 쓴 <저항의 철학>에서 잘 나타난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 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주석 7)

다음은 앞 장에서도 인용하였지만, 함석헌의 저항사상의 핵심 부문이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즉,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쏟아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神),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다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주석 8)

함석헌의 저항정신을 연구한 송기득(한신대) 전 교수는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 (주석 9)고 분석한다.

송기득의 분석대로 함석헌의 저항은 역사적이었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그의 저항은 소련,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에게까지 이어진다.

“정치가 깡패식 폭력주의로서 민중을 억압하는 채제로 나갈 때 그것은 함석헌에게 있어서 무섭게 저항하는 상대로 부상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어떤 이유로서도 민중을 억누를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주석 10)

함석헌이 좋아했던 러시아의 저항인 베르쟈예프는 “나는 일생을 통하여 저항인이었다”고 고백할만큼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역사의 위대한 반역에 모두 찬성투표를 한다고 했다. 루소의 ‘자연’의 반역, 프랑스혁명의 반역, 객체의 권력에 대한 관념론의 반역,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역, 이성과 도덕에 대한 니체의 반역, 사회에 대한 입센의 반역, 역사와 운명에 대한 톨스토이의 반역 등 모두가 베르자예프의 반역과 동질적인 것이었다.” (주석 11)는 평가는 함석헌이 이은 비판과 저항정신이다.


주석
7> <사상계>, 1967년 2월호, 10쪽.
8> 앞의 책, 13쪽.
9>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 인간, 역사>, 88~89쪽.
10> 앞의 책, 89쪽.
11> 신민현, <저항의 자유인 베르쟈예프>, <기독교사상>, 1970년 4월호,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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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5 08:00 김삼웅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을 다시 키워 소련을 봉쇄하려 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협정을 밀고 나갔다. 1964년 6월 3일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정부는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정권타도와 국가변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날조하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이것 역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써먹은 공안카드의 효시가 되었다.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야당의원 61명이 총사퇴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 베트남파병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학생시위가 격화되면서 정부는 무장군인들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난입시키고,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해방 20년 만에 일본군 출신 대통령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 처리하고 말았다. 정부는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마침내 국민의 뜻에 배치되는 협정이 이루어졌다.

함석헌은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국민에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다. 그처럼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호소해도 국민은 정권의 폭력성에 겁을 먹고, 그리고 구차스런 먹고 살기의 일상 때문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씨알농장 동지들이 땅을 개간해 농장을 일군 안반덕 골짜기였다. 이곳에서 오랜 명상과 자책으로 날들을 보냈다.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인간의 장래>, <과거의 비전> 등을 읽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함석헌이 “떼이야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소개된 그의 기사를 우연히 읽은 직후였다.” (주석 1) 이후부터는 그의 모든 책을 구해 읽고 특히 <인간현상>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원어는 프랑스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리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예요? 현상의 세계, 물질세계라 그렇게 말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주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주석 2)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파묻혀 샤르댕의 ‘인간현상’에 몰두하게 된 것은 “역사를 위한 투쟁을 좀 더 확실하게 인간의 미래를 위한 투쟁과 일치시켜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주석 3) 함석헌은 이어서 샤르댕의 <인간의 장래>를 읽고, 그의 주장대로 “인간의 미래와 미래의 세계가 ‘폭력도 없고 증오심도 없는’ 인간의 세계화(Plane'tarisation)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던 피(血)의 전체주의에 대한 사랑의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비폭력혁명>을 썼다. 장준하가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면서 그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이제 날로 흉포해진 박정희 정권에 대응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통한 줄기찬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 글을 썼다.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이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럽게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석 5)

함석헌은 생애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을 추구했다. 비폭력 투쟁의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상대에게도) 양심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도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개인이나 국가를 넘어 국제간에도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말 문제되는 것은 민족감정은 아닙니다. 그것을 타고 들어가기 쉬운 폭력주의, 침략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주의를 잘 이해하면 각 민족이 서로 제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잘 화합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폭력주의는 서로 경쟁이 아니고 문제가 있는 때에도 자기희생에 의하여 서로 저쪽의 속에 숨어 있는 좋은 힘을 끌어내도록 하자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6)

함석헌의 비폭력주의운동에 대해 더러는 비판하거나 오해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씨알들의 생존권을 박탈한 무리들을 방치, 방관하려느냐는 반박이 따랐다. 하지만 그의 비폭력주의는 정확하게는 ‘비폭력저항운동’이다.

알제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 신학자 카잘리스는 “폭력에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과 속박하게 하는 폭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속박의 폭력’에 저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이 극에 달하고 있을 즈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폭력이란 도덕적 정당성이 없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고 짓밟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 정권은 구조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쿠데타 자체가 폭력이고, 따라서 폭력정권이었다.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대학에 무장군인들을 투입하여 제압했다. 씨알이 현대무기로 무장한 군경에 당해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을 제시한 것이다. 간디가 걸었던 길이다. 비폭력을 통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폭력세력을 제압하자는 주장이었다.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501쪽.
2> 함석헌, <내면의 예수>, <전집> 19, 140쪽.
3> 이치석, 앞의 책, 504쪽.
4> 앞의 책, 504~505쪽, 재인용.
5> <사상계>, 1965년 1월호, 41쪽.
6>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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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반역사적, 반민족적인 굴욕회담의 강행에 믿을 것은 국민의 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절절한 심경으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민족혼을 이어온 국민의 정신을 일깨운다.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렇게도 모르나? 이 4천년 넘는 역사가 무슨 역사인가? 결국 고난의 역사가 아닌가? 왜 고난인가? 제 정신 하나 부족했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요, 욕 아닌가?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주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부족은 하지만, 그 때문에 늘 욕은 봤지만, 그래도 제 정신을 아주 잃지는 않고 지켜왔기 때문 아닌가? 4천년 동안 먹고 입고 놀아온 것이 귀한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중국에 압박을 받아도 중국 사람이 못 되고, ‘만주 되놈’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되놈이 못되며, ‘왜놈’의 짓밟음을 입으면서도 왜놈이 못돼 버린 그것, 그 무엇, 그 정신이 귀하지 않은가? 미약은 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보배요, 실날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생명 아닌가? 실로 우리가 해방을 당한 것은 우리 생활이 풍부해서도 아니요 우리 기술이 높아서도 아니다. 거지같은 생활이요 뒤떨어진 기술이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이란 정신 하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 31)

함석헌은 정치군부세력과 이에 놀아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규탄한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의 생명이 되는 이 정신은 잊고 그것을 일부러 짓밟으면서 남의 세력을 힘입어 부흥을 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 일부 물욕과 권세에 미친, 민족과 역사를 모르는 정치인이란 것들은 비록 더럽고 옅은 이기주의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민중이 그것을 능히 막아내지 못하고 주춤하고 서서 걱정만 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하고 못생긴 일인가?

함석헌은 1965년 8월 30일 재야ㆍ종교계ㆍ학계ㆍ문인ㆍ예비역 장성 등 각 분야 지도급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의 상임대표로 선출되어 박정권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을 지도하였다. 정부에 굴욕회담을 중지시킬 것을 호소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서울법대생 90여 명이 단식에 들어갔다. 졸도하는 학생이 생겼다. 함석헌은 ‘신을사조약’으로 명명된 한일협정을 정치문제가 아닌 하나의 죄악으로 인식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비폭력 투쟁의 방법은 단식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보았다. 이번에도 삭발을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약없는 단식에 들어갔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단식의 절박한 이유를 밝혔다.

오늘부터 문제의 해결이 나는 때까지 단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여 얻은 뜻을 여러분 앞에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내 죄를 회개함으로써 내 혼을 맑히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다시 한 번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정부 당국에 대하여 정성껏 반성을 독촉해보기 위해서입니다. 근본 문제는 내 죄에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동안 여러분은 제게 유언 중 무언 중 민중을 대표한 발언권을 허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은 힘이 없었습니다. 옳은 듯 하면서 악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의도 씨알 스스로의 의요, 죄악도 씨알 스스로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진정한 국민운동에만 있습니다.
(주석 32)

한 연구가는 함석헌의 단식투쟁을 두고 “단식이라는 희생적 저항권을 강력한 도덕적 무기로 삼고, 굴욕외교에 대한 민족적 수치를 개인의 죄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자각시키기 위한 자신의 도덕적 입헌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놓을 줄 아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고 분석하고 “그것은 역사를 도덕적 의미의 행위로 인식한 자신의 역사관에 충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주석 33)고 평가했다.

어느 시대나 권력의 비호를 받은 어용 곡필배가 있다. 언론계나 학계에서 많이 서식한다. 함석헌의 신문 연재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중상모략하는 글이 쏟아졌다. 7월 26일부터 4일간 <서울신문>에 <억지울음 속에 숨은 음모 - 함석헌 씨의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를 박함>이란 글이 연재되었다. 박달수라는 가명으로 쓰인 이 글은 반지성, 비상식의 인신공격이었다.

‘박달나무’ 또는 ‘박달몽둥이’를 뜻하는 익명의 박달수는 언론계의 중진 모씨로 알려졌으나 끝내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박달나무’는 “협조와 건설을 부르짖는 이 나라에서 분열과 파괴를 노리는 씨의 악랄한 매명 선동, 안정과 긍정을 찾고 있는 이 날 이 겨레에 불안과 부정을 던져주는 씨의 너무나 역리적인 소영주의의….”라고 매도하고, 그는 함석헌이 “노망하여 명예욕을 채워보고자” 날뛰고 있다고 비난했다.
(주석 34)


주석
31> 앞의 책, 22~23쪽.
32>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동아일보>, 1965년 7월 1일치.
33> 이치석, 앞의 책, 498쪽.
34> <서울신문>, 1963년 7월 26~30일치.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3 08:00 김삼웅

 

 

정치권력에 맛이 들린 박정희세력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함석헌이 황야에서 아무리 목메이게 외치고 글을 써도 그들은 들은 채도 않고 오히려 선동가로 몰아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켜 미ㆍ일ㆍ한 동맹체제화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1961년 6월 케네디ㆍ이께다(池田)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ㆍ케네디 회담을 통해 이 문제가 깊숙히 논의되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원에 목을 매단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였다.

<사상계> 1964년 3월호에 함석헌은 비감한 마음으로 <양한재조 재차일념(兩韓再造在此一念)>을 썼다.
평소 한자 제목을 잘 붙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달랐다. 편집자는 “한 마음 한 끝 먹고 조선을 새겨 보니 조은 땅 조은 빛이 한 글월 피웠구나. 한 조선 첨서 한난걸할 알속에 지키네”란 알듯 모를 듯한 발문을 붙였다.

우리는 또 다시 “나라를 지키자”고 외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됐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부끄럽고 분한 일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남이 다 잘 사는 이 때에, 우리 만이 못 살고 밤낮이 이꼴이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분하다는 것은 했으면 했을 것인데 번히 알고 못하니 분하지 않습니까?

함석헌은 자신들이 일제감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할 때에,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동포들에게 총질을 한 친일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마땅히 요구해야 할 청구권과 문화재 반환 등이 묵살당한 데 하염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 글을 썼다. 박정희 권력의 비리와 인권탄압,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당시의 상황이 한말의 망국기와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요새 나라 꼴 그 때와 꼭 같습니다. 한일회담, 그 때의 5조약, 7조약, 맺으려던 꼴과 꼭 같고, 창가학회니 뭐니 그 때의 흑룡회, 일진회와 터럭도 다를 것 없습니다. 그 때에도 미ㆍ러ㆍ중이 뒤에서 어물어물하다 우리를 팔아넘기더니, 오늘도 또 셋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나라를 지키자!”하는 글을 짓게 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교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석헌의 이 글의 핵심은 후반 다음의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 옛날 나라가 일본 침략자들 때문에 위태했을 때 그것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이성계를 나가 맞으며 최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三韓再造 在此一擧 (삼한재조 재차일거)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이성계가 가슴 속에 나라라는 일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거(一擧)는 삼한을 재조(再造) 못하고 잃는 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또 다시 나라는 남으로 일본침략주의의, 북으로 중공침략주의의 엿봄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보내며,

兩韓再造 在此一念

이라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일념을 품었습니까?
나라가 임(臨) 하옵소서!
일체 중생이 다 이 한 나라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또 씨알에게!

- 念, 念, 念 , 아멘.
(주석 29)

박정희의 대일 굴욕회담이 강행되면서 장준하는 1965년 <사상계> 긴급증간호를 발행했다.
160쪽 전 지면을 털어 <신을사조약의 해부>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이 책은 야당, 재야ㆍ학생들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의 이론적 전거가 되었다.

박두진ㆍ박남수ㆍ조지훈의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연작시에 이어 함석헌의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란 권두시론, 백낙준의 <한국근대화와 일본침략>, 이범석의 <이제는 더 침묵할 수 없다>, 양호민ㆍ부완혁ㆍ정문기ㆍ김철ㆍ김원룡이 각 전문 분야에서 집필한 <한ㆍ일협정문의 분석>, 각계 지도급 인사 105인의 앙케트 <105인의 발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각계의 성명서가 실렸다.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 성명에는 김홍일ㆍ김재춘ㆍ박병권ㆍ박원빈ㆍ송요찬ㆍ손원일ㆍ이호ㆍ장덕창ㆍ조흥만ㆍ최경록 등이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장성들까지 참여하여, 국민이 얼마나 굴욕회담에 반대했는가를 보여주었다.

함석헌은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부제가 붙은 이 시론에서 처연한 심경으로 국민에 호소한다.

한국은 어디로 가나?
이 4천만 문화민족은 어떤 운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는가?
5천년 고난의 역사는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하고 있나?
지금 한ㆍ일조약의 비준이라는 한 순간을 놓고 민심은 마치 회오리바람 밑에 노는 물결처럼 미치고 있다.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것을 해서라도 기어이 이 조약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고, 정의와 자유의 정신에 불타는 학생들은 거기 대해 뭉치와 최루탄과 철창의 고통을 무릅쓰며 혹은 주린배,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단식을 하면서 싸우고 있고, 일반 국민은 그 두 사이에 불안과 의심과 분노와 두려움에 떨고 서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결정이 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 있다.
(주석 30)



주석
29> <사상계>, 1964년 3월호, 45쪽.
30> <사상계>, 긴급증간호, 20쪽,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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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2 08:00 김삼웅

 

 

귀국한 함석헌은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반대 투쟁에 나섰다.
7월 8일 오산학교 강당에서 강연한 것을 시작으로 그리고 언론 기고를 통해 정부의 실정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함석헌이 1963년 7월 16일치 <조선일보>에 쓴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는 글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이 신문은 <동아일보>와 함께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백지 사설’을 내는 등 언론의 상도를 걷고 있었다. 아직 박정희의 권력체제가 굳혀지기 전이다. 한 쪽을 다 차지한 이 논설은 ‘박정희님에게! 남은 길은 공약 준수뿐’, ‘정치인들에게! 민중은 다 알고 있다’, ‘지식인들에게! 모두 진정을 말하라’, ‘군인들에게! 정치가 혼란할수록 밖을 지켜주오’, ‘학생들에게! 역사의 대국(大局)을 내다 보라’는 주제로 전개되었다.

먼저 박정희에게는 “내가 당신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고도, 육군대장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라 전제하고, 여러 가지 잘못 중에 쿠데타를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고 질타했다. 이어서 “당신이 정말 나라를 사랑한다면 이제 남은 오직 하나의 길은 혁명공약을 깨끗이 지킬 태세를 민중 앞에 보여주는 일이다”고 권고했다.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에 대한 질책은 등에 식은 땀이 날 정도다.

지식인들 이제 어쩌렵니까? 종교가들 여러분 마음은 가륵한 줄 압니다마는 생각이 너무 좁습니다. 삼천만이 벙어리가 되고 앉은뱅이가 되는 데 기도는 무슨 기도를 한다고 불단, 성당, 기도원, 바위 밑에 중얼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나라의 구원을 내놓고 또 무슨 구원이 있단 말입니까?

신문인들 왜 그리 비겁합니까? 닭은 길러서 새벽 울음 한 번 듣자는 거요, 돼지는 먹여서 제삿날 한 번 잡자는 거요, 신문 잡지는 해서 필요한 때에 한 마디 하자는 것입니다. 새벽이 와도 울지도 않고 제삿날은 왔는데 도마위에 올라오기 싫다는 닭이나 돼지가 못 쓸 거라면 말을 할 때에 하지 않는 언론인도 못 쓸 것일 것입니다.

함석헌의 군인들에게 바라는 바는 간절했다.

“제발, 여러분의 자리를 한 순간도 떠나지 마십시오. 만일 한 때라도 떠난 분이 있거든 즉시로 돌아가주십시오. 요새 정국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정치에 관계하려는 일부 그릇된 생각을 하는 군인이 있으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러다가 내외의 환이 한꺼번에 일어납니다.”

학생들에게는 정부의 분열책에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대적이 노리는 것은 학원의 분열입니다. 하나되면 강하고 갈라지면 자멸하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어디서 오나? 순일치 못한 데서 옵니다. 저들은 여러분의 영웅심을 도박하려 할 것입니다. 권세와 이익을 약속하려 할 것입니다. 쓸데없는 이론의 대립을 시키려 할 것입니다. 가장 속기 쉬울 것은 감상적인 애국심을 가지고 흥분시키는 일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함석헌이 이 글에서 정작으로 하고 싶었던 대상은 민중이었다.

여러분 무조건 뭉쳐라. 복종해라. 하는 독재자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개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지만 그 하나는 분통에 들어가서 눌려서 똑같은 국수발로 나오는 밀가루 반죽같은 하나는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는 개성으로 하는 하나입니다. 3천만에서 2천 9백 9십 9만 9천 9백 99가 죽는 일이 있어도 남은 한 알 속에서 다시 전체를 찾고 살려낼 수 있는,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는 그런 개성적인 하나입니다.(…)

그럼 생각합시다!
그럼 꿈틀거립시다!
그럼 겁을 내지 말고 속에 있는 대로를 외칩시다!
자, 이젠 일어섭시다! 일어섭시다!

<조선일보>에 쓴 함석헌의 글이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반향이 뜨겁게 나타나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신사훈이 같은 신문(7월 26~8월 2일)에 7회에 걸쳐 반박하는 글을 썼다.

<함석헌 선생 사상을 비판하면서>란 제목부터가 이른바 ‘사상검증’이었다. 그는 함석헌의 주장을 신랄한 어조로 반박하면서 “함석헌의 사상은 공산주의자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용공으로 몰았다. 신사훈은 4월혁명 당시 학생들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은 어용교수였다.

또 정부대변인 임성희 공보부장관은 같은 신문에 함석헌이 “종교의 탈을 쓰고 일부 정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의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매도하였다. 정부의 공식 논평인 것이다. 사심없는 함석헌의 충정어린 비판을 어용교수와 정부대변인이 반박을 한 것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저급한 수준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1963년 7월 22일 사상계 주최 함석헌선생 귀국 시국강연회

함석헌의 <조선일보> 기고문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자 이번에는 <동아일보>가 원고를 청탁했다. 자신들의 손으로는 박정희의 불의를 지적하지 못하고 함석헌의 글을 빌리고자 한 것이지만, 함석헌은 망설이지 않았다. <동아일보>에는 8월 16일치에 <왜 말을 못하게 하고 못 듣게 하나 - 정부 당국에 들이대는 말>로, 역시 한 면 전체에 실렸다. 정부는 이 무렵 함석헌의 강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옥내 집회는 장소를 빌려주지 못하게 하고, 옥외집회는 청중의 참여를 막았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당국의 강연 방해 사례를 일일이 고발했다. 그리고 ‘본론’을 편다.

묻노니, 정치당국 여러분, 낡은 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한 번 쓸어버리고, 경제부흥을 첫째로 해야겠다고 했고, 약속의 2년이 다 지난 오늘엔 그 기다렸다던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가”는 바로 다른 사람 아닌 ‘나’라고 해서 덧눌려 앉아 정권을 쥐려고 하는 여러분 당신들은, 이 나라를 어떤 나라로 알며 이 민중을 무엇으로 아나.(…)

당신들은 툭하면 선동이라 하고 유언비어라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봐. 누가 과연 민중의 가슴 속에 불이 일어나게 만들며, 누가 정말 터무니없는 쓸데없는 말을 해 돌리나 당신들은 그것도 모르리만큼 마음이 어두운가. 아니라면 어떤 한 문제만 너무 가까이 보기 때문에 전체의 대세가 가리워져 그러는 것 아닐까. 붇는 불을 끄자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면 말이 듣고 싶고 말을 하고 싶어 몰려드는 민중에 장소를 아니 주고 주최자에게 음성적인 압력을 더해서 헤쳐 보자는 것은 더 어리석지 않은가.(…)

당신들 마음엔 언론을 활짝 열어 놓으면 큰일이 날 것 같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반동적인 자리에 스스로 서는가. 왜 그렇게 스스로 압박자의 심리를 가지는가. 큰 일이 난다 해도 그것은 당신들이 지키고 있는 현 정부가 큰 일이 나면 낫지, 이 나라가 큰 일이 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당신들이 만든 정부가 곧 나라라고 그런 스스로 속고 남을 속이는 말 마. 그것은 루이 16세나 히틀러 같은 것들이나 할 소리다.(…)

나라를 위해 사회의 질서를 위해 언론을 취체한다는 그런 약은 소리 마. 나라가 뉘 나란데. 당신들이 무슨 걱정을 해. 공산당의 선전이 틈타겠으므로 그런다고 하지만, 그것도 맞지 않는 구실이다. 나는 서독에 가 봤어도, 국경에 경비원 하나 서 있지 않고, 길거리에 공산당 막으라는 표어 따위, 라인강가에 기적을 일으켰다면서도 ‘재건’이라는 구호 어디다 써붙인 것 못 보았다.(…)

다시금 정부 당국에 문노니, 당신들은 왜 우리들의 자유를 뺏고 짓밟는가. 우리는 목숨을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고 싶고,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고 싶기에 참을 수 있는 데 까지 참을 것이다. 그러나 참아도 참아도 대답이 아니 나오고 맨 것이 풀리지 않는 한 우리는 종시 노하고야 말 것이다.

말 못하는 민중이라 업신여기지 마. 어리석어 그런 것 아니다. 착해서 그러는 거지. 무지해 그러는 거 아니다. 도리가 우리 속에 있어 그러지. 겁나서 가만 있는 것 아니다. 크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이 민중을 뒤에 두고 나는 정부 당국에 묻는다. 민중이 내 말을 듣고 싶어 하는데, 왜 내가 말하는 것을 방해하나. 대답하라. 천하에 내놓고 대답하라. 대답이 나오는 대 까지 나는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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