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8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대구를 거쳐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한때 제주도에서 머물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성서집회를 계속하면서 피난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식민지를 함께 겪고 해방된 한민족이 동족상쟁을 하게 된 까닭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뒷날 이때의 생각을 다듬어 6ㆍ25전쟁에 대해 비중 있는 글을 썼다.
6ㆍ25 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 둘째 번 세계 전쟁을 마치려 하면서 러키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 동강이인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말이 하나요, 풍속ㆍ도덕이 하나요, 이날것 역사가 하나요, 이해 운명이 한 가지인 우리로서는 갈라질 아무런 터무니도 없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주석 16)
함석헌은 6·25전쟁의 원인으로 미ㆍ소 양대 블록의 세력다툼임을 들었다. 이어서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점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등을 거기 내놓았던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다.” (주석 17)
함석헌은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6ㆍ25 전쟁의 의미를 세계사적, 민족사적, 역사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이제 이 금수강산은 세계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영악한 일본이 먹었다가는 아니 토하고는 못 견딘 나라, 흉악한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 먹었던 나라, 이 나라에 중국이 도로 나오고, 만주가 또 오고, 러시아가 다시 오고, 첨으로 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이 또 왔다. 그 뿐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 사람 중의 잘난 것을 고르고 그 기계의 날카로운 것을 택하여 이 나라 강산을 두루 밟으며 3년을 어우러져 싸워, 붉은 피를 붓고 한데 엎어져 묻히었다. 이 나라는 인류의 제단, 유엔의 제단, 민족의 연합의 제단이 되었다. (주석 18)
부산에서 힘든 피난생활 중인 1952년 그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몇 동지들 앞에서 <흰 손>이라는 장편시를 낭송하였다. 이 시는 사실상 그의 ‘신앙고백’을 뜻하는 것이었다.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이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여봐라
예-이-
너 이 흰 손 가진 우상교도놈들을 끌어 내며
거룩한 내 집을 더럽히게 말라
믿어! 너희가 믿었느냐? 내 뜻대로 살았느냐?
나는 영원히 일하는 영, 사는 영
흰손 가진 너희를 나는 모른다. (주석 19)
함석헌은 이를 시점으로 무교회주의와 결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상 그것(흰 손)은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이날껏 정통적으로 인정해 오는 무교회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가르치는 십자가의 공로로 죄 대속함을 받는다는 믿기만 하면 된 다는 사상에 반대하고 그러기 위하여는 인격의 자주성을 살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20년대 내 마음 속에 싸우고 찾아온 결과였다.” (주석 20)고 밝혔다.
함석헌은 무교회에 머물지 않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둘째번 이유를 소개한다. 여기에 의미가 다 포함된 듯 해서다.
우리나라 모양이 이미 누가 열어놓은 길을 그저 따라만 가 가지고 되기에는 너무도 독특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만이 당하는, 우리만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당하고 있다. 백 년을 가다가도, 천 년을 가다가도, 내가, 우리가 하게 생겼지, 어디서 다 된 것을 빌어다 써가지고 될 수는 없다. 물건은 빌릴수가 있지만 정신이야, 믿음이야, 빌 수 없지 않은가? 자리가 더 좋은 것이 없으면 ‘다다미’를 살 수가 있고, 김치가 모자라면 ‘다꾸왕’을 써도 좋지만, 정치는 암만해도 야마도 다마시이(일본혼)를 가지고 우리를 다스릴 수, 될 수도 없고, 신앙도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가지고 우리를 살릴 수 없다.
무교회 신앙은 우치무라를 살리는 데 다 쓰고 털끝만큼도 남긴 것이 없다. 길이 길이 아니오 길 간 자리인 것 같이 신앙도 살고 난 자리뿐이다. 그러므로 나를 찾고 그것을 받들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 그러노라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무교회 빛깔이 차차 멀어지게 되었다. 남들이 주의시켜 줌을 받들고서야 내가 무교회 식이 아니고, 십자가 소리 적게 함을 알게 됐다. 나는 무교회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섭섭하게 받들었다. (주석 21)
함석헌은 1953년 가을에 서울로 올라왔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정부가 환도하면서 피난민들도 따라 올라왔다. 서울의 생활도 막막하기는 피난 부산과 다르지 않았다. 최태사와 친지들의 도움으로 서대문구 충정로 3가에 삶의 터를 잡았다.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가 신촌 이화여대 근처의 대현동에서 셋방살이를 하게 된다.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서울의 생활은 참담했다. 특히 월남한 피난민들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아가면서 중앙 신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전쟁이 터지자 무책임하게 도망쳤던 대통령 이승만은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자 북진통일론을 외치면서 점차 독재권력을 휘둘리기 시작했다.
함석헌 유영모
1955년 12월 14일은 함석헌이 태어난지 2만 날이었다. 이날 10여 명의 동지들이 신촌 그의 집에서 만둣국을 먹으며 2만일을 축하했다. 다석 유영모의 일기다.
오늘은 함석헌이 2만 날 되는 날이다. 신촌의 함 선생 댁에서 만둣국을 먹다. 2만 날 기념 만두로 포식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차라리 더 소중한 것은 앞으로 오고 오는 해를 잘 하고 잘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잘잘해는 2만 일이다. 1945년 4월 26일 김교신이 세상을 떠나고 그날 나는 20,133일, 함은 16,116일, 김교신은 16,080일 이었는데 벌써 3,885일이 지나가서 나는 24,017, 함은 20,000일 되었다. 오늘은 1955년 12월 14일이다. (주석 22)
주석
16>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 67쪽, 생각사, 1979.
17> 앞과 같음.
18>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403쪽, 일우사, 1962년.
19>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223~224쪽.
20> 함석헌, <말씀모임>, <전집> 3, 김용준, 앞의 책, 69쪽, 재인용.
21> 함석헌, <말씀 모임>, <전집> 3, 139쪽.
22> 김흥호 엮음, <다석일지(多夕日誌)>, 제1권, 김용준, 앞의 책,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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