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7 08:00 김삼웅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명상과 독서를 하는 한편 또 한 권의 저서를 펴내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오산고보에 재직하면서 1936년 5월호부터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연재하였다. ‘조선역사’의 자매 편인 셈이다. <성서조선> 제88호부터 110호까지 2년여에 걸쳐 연재한 세계역사였다. <성서조선>이 폐간되면서 이 연재도 중단되었다. 함석헌은 해방 뒤 <영단(靈斷)>에 썼던 글까지 모아 책으로 묶었다.

함석헌은 해인사에서 ‘조선역사’를 보완, 개작한 것과는 달리 ‘세계역사’는 예전에 쓴 글 중에 골라서 펴냈다. 제목도 ‘성서적 입장에서 본’을 빼고 <역사와 민족>으로 바꾸었다.

<성서조선>이나 <영단>에 냈던 글을 묶어 책으로 내자는 의견이 왔습니다. 그럴 때 나는 반대했습니다. 내자는 이의 말은, 그 글들이 나왔을 때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말하자면 한 구석에서 된 것이니 이제 그것을 다시 내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으므로 그럴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자는 이의 주장은 또 이러했습니다.

지금 생각이라고 다 옳은 것도 아니요, 옛날 생각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며 또 일단 내는 다음에는, 내 생각이라 해서, 거기 독재권을 쓸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번 의논이 오고 간 끝에 그 중에서 비교적 내 마음에 허락이 되는 것을 후린 것이 이것입니다.
(주석 12)

함석헌은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그리고 동기집회에서 발표한 기독교사를 3부 자매편으로 낼 계획이었으나 ‘기독교사’는 원고를 잃어서 영영 햇볕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정말 어려운데 빠졌습니다. 정말 깊이 생각할 때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고 ‘어떻게, 어떻게’ 하고 ‘방안’을 찾아서 미치나, 방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 그 자체가 잘못됐는데, 깊이 생각이라 했지만, 무엇이 깊은 것이겠습니까? 독자적으로, 나로서 하는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뒤져 왔던 방구석을 또 다시 뒤지는 모양으로 그런 심리로 지나간 날에 했던 생각을 또 다시 뒤집어 봅니다.
(주석 13)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일반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데 비해 <역사와 민족>은 덜 알려진 편이다. 책은 △ 서언 - 우리들의 세계역사, 성서사관과 진화론에 이어 △ 창시시대 △ 성장기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로 큰 장을 나누었다.

△ 창시시대 - 1. 우주의 창조. 2. 생명의 창조. 3, 인류의 출현까지. 4. 인류의 진화. 5. 인간의 특질. △ 성장기 - 1. 석기시대. 2. 지리와 인종의 배포. 3. 요람 안의 여러 운명. 4. 종교. 5. 무력국가.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 1. 서풍의 노래. 2.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3. 순교의 정신. 4. 하나님의 정의. 5. 산 신앙. 6. 무교회 신앙과 조선. 7. 존재하는 종교. 8. 제2의 종교개혁. 성삼문과 스테반. △ 20세기의 출애굽 - 1.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애소랜도의 발시로 구성되었다.

함석헌은 이 책의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근본 정신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라는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명사는 그 사물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가 지는 성질을 단적으로 잘 나타낸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의 근본이 되는 프로테스트 라는 말은 번역하여서 ‘반항한다’, ‘항의한다’, ‘선언한다’, ‘공증한다’ 등의 말로 된다. 대체로 말해서 자기의 주장을 공공연히 선언 증거한다는 말로 전투적 기분이 짙은 말이다. 곧 의가 불의에, 진리가 사론에, 선이 악에 강압을 받을 때에 프로테스탄트가 일어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프로테스탄트, 그 주의를 프로테스탄티즘이라 한다. 이 명사의 해석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위인(爲人)이 어떠함은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이 명사가 프로테스탄트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고, 반대자가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제 2스파에르회의 때에 정통파 구교 사람들이 그 결정한 법안에 반항한다 하여서 그들을 불러 프로테스탄트 곧 반항자라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후에는 자타가 다 승인하여 공용하게 되었다.
(주석 14)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잇고자 하였고, 그 정신으로 압제자들에게 대들었다. 기독교가 근본정신을 잃고 타락하자 이를 비판하고, 독재권력과 야합하자 거침없이 떠났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본인 성서를 죽는 날까지 놓지 않았다. 그 대신 저항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 그 원류를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의 배후에는 중세의 종교적 질곡에 반항하는 문예부흥 이래의 자유사상, 인문주의사상이 흘러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불충분하다. 한층 더 올라가서 바울주의에서 우리는 근원은 찾을 수 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무엇보다 자유독립의 사람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 의식주의(儀式主義)의 묵은 물결이 때때로 침입하려는 모양을 보고는 그는 열화 같이 일어서서 신앙의 자유독립을 외쳤다. 갈라디아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를 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의문(儀文)의 노예가 아니요, 신앙에 의한 자유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여 온 유대교도들을 상대로 싸우는 바울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석 15)

함석헌은 또 이 책의 <하나님의 정의>편에서, 양심이 마비되고 진실을 보는 눈이 까막눈이 된 사람들을 질타한다.

눈먼자야, 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네가 죽음 구렁이 속에 빠져죽고 생각이 없거든 두드려라. 열심히 두드려라. 정의의 빛이 있을 지어라 하며. 그러면 네 눈을 덮은 두터운 암흑의 빗장이 깨어지고, 눈이 부신 정의의 빛이 스스로 나타나 네 앞을 환하게 비칠 것이다. 만고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정의다. (주석 16)


주석
12> 함석헌, <역사와 민족>, 머리말, 제일출판사, 1964.
13> 앞과 같음.
14> 앞의 책, 242~246쪽.
15> 앞의 책, 249쪽.
16> 앞의 책,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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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6 08:00 김삼웅

 

 

플리커(@Dan Stovall)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투항이나 패배주의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었다. 독재세력과 싸우되 비폭력으로 저항하자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사상을 배운 것이다. 그의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면서 “진리는 곧을 때는 금강석 같으면서도 연할 때는 꽃 같은 것이다”란 신념대로였다. “오직 비폭력만이 인류의 희망”이란 간디의 철학은 바로 함석헌의 철학이었다. <사상계> 1967년 2월호에 쓴 <저항의 철학>에서 잘 나타난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 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주석 7)

다음은 앞 장에서도 인용하였지만, 함석헌의 저항사상의 핵심 부문이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즉,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쏟아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神),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다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주석 8)

함석헌의 저항정신을 연구한 송기득(한신대) 전 교수는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 (주석 9)고 분석한다.

송기득의 분석대로 함석헌의 저항은 역사적이었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그의 저항은 소련,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에게까지 이어진다.

“정치가 깡패식 폭력주의로서 민중을 억압하는 채제로 나갈 때 그것은 함석헌에게 있어서 무섭게 저항하는 상대로 부상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어떤 이유로서도 민중을 억누를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주석 10)

함석헌이 좋아했던 러시아의 저항인 베르쟈예프는 “나는 일생을 통하여 저항인이었다”고 고백할만큼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역사의 위대한 반역에 모두 찬성투표를 한다고 했다. 루소의 ‘자연’의 반역, 프랑스혁명의 반역, 객체의 권력에 대한 관념론의 반역,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역, 이성과 도덕에 대한 니체의 반역, 사회에 대한 입센의 반역, 역사와 운명에 대한 톨스토이의 반역 등 모두가 베르자예프의 반역과 동질적인 것이었다.” (주석 11)는 평가는 함석헌이 이은 비판과 저항정신이다.


주석
7> <사상계>, 1967년 2월호, 10쪽.
8> 앞의 책, 13쪽.
9>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 인간, 역사>, 88~89쪽.
10> 앞의 책, 89쪽.
11> 신민현, <저항의 자유인 베르쟈예프>, <기독교사상>, 1970년 4월호,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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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5 08:00 김삼웅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을 다시 키워 소련을 봉쇄하려 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협정을 밀고 나갔다. 1964년 6월 3일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정부는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정권타도와 국가변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날조하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이것 역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써먹은 공안카드의 효시가 되었다.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야당의원 61명이 총사퇴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 베트남파병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학생시위가 격화되면서 정부는 무장군인들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난입시키고,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해방 20년 만에 일본군 출신 대통령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 처리하고 말았다. 정부는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마침내 국민의 뜻에 배치되는 협정이 이루어졌다.

함석헌은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국민에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다. 그처럼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호소해도 국민은 정권의 폭력성에 겁을 먹고, 그리고 구차스런 먹고 살기의 일상 때문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씨알농장 동지들이 땅을 개간해 농장을 일군 안반덕 골짜기였다. 이곳에서 오랜 명상과 자책으로 날들을 보냈다.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인간의 장래>, <과거의 비전> 등을 읽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함석헌이 “떼이야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소개된 그의 기사를 우연히 읽은 직후였다.” (주석 1) 이후부터는 그의 모든 책을 구해 읽고 특히 <인간현상>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원어는 프랑스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리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예요? 현상의 세계, 물질세계라 그렇게 말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주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주석 2)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파묻혀 샤르댕의 ‘인간현상’에 몰두하게 된 것은 “역사를 위한 투쟁을 좀 더 확실하게 인간의 미래를 위한 투쟁과 일치시켜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주석 3) 함석헌은 이어서 샤르댕의 <인간의 장래>를 읽고, 그의 주장대로 “인간의 미래와 미래의 세계가 ‘폭력도 없고 증오심도 없는’ 인간의 세계화(Plane'tarisation)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던 피(血)의 전체주의에 대한 사랑의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비폭력혁명>을 썼다. 장준하가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면서 그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이제 날로 흉포해진 박정희 정권에 대응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통한 줄기찬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 글을 썼다.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이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럽게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석 5)

함석헌은 생애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을 추구했다. 비폭력 투쟁의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상대에게도) 양심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도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개인이나 국가를 넘어 국제간에도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말 문제되는 것은 민족감정은 아닙니다. 그것을 타고 들어가기 쉬운 폭력주의, 침략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주의를 잘 이해하면 각 민족이 서로 제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잘 화합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폭력주의는 서로 경쟁이 아니고 문제가 있는 때에도 자기희생에 의하여 서로 저쪽의 속에 숨어 있는 좋은 힘을 끌어내도록 하자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6)

함석헌의 비폭력주의운동에 대해 더러는 비판하거나 오해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씨알들의 생존권을 박탈한 무리들을 방치, 방관하려느냐는 반박이 따랐다. 하지만 그의 비폭력주의는 정확하게는 ‘비폭력저항운동’이다.

알제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 신학자 카잘리스는 “폭력에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과 속박하게 하는 폭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속박의 폭력’에 저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이 극에 달하고 있을 즈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폭력이란 도덕적 정당성이 없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고 짓밟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 정권은 구조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쿠데타 자체가 폭력이고, 따라서 폭력정권이었다.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대학에 무장군인들을 투입하여 제압했다. 씨알이 현대무기로 무장한 군경에 당해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을 제시한 것이다. 간디가 걸었던 길이다. 비폭력을 통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폭력세력을 제압하자는 주장이었다.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501쪽.
2> 함석헌, <내면의 예수>, <전집> 19, 140쪽.
3> 이치석, 앞의 책, 504쪽.
4> 앞의 책, 504~505쪽, 재인용.
5> <사상계>, 1965년 1월호, 41쪽.
6>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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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반역사적, 반민족적인 굴욕회담의 강행에 믿을 것은 국민의 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절절한 심경으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민족혼을 이어온 국민의 정신을 일깨운다.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렇게도 모르나? 이 4천년 넘는 역사가 무슨 역사인가? 결국 고난의 역사가 아닌가? 왜 고난인가? 제 정신 하나 부족했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요, 욕 아닌가?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주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부족은 하지만, 그 때문에 늘 욕은 봤지만, 그래도 제 정신을 아주 잃지는 않고 지켜왔기 때문 아닌가? 4천년 동안 먹고 입고 놀아온 것이 귀한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중국에 압박을 받아도 중국 사람이 못 되고, ‘만주 되놈’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되놈이 못되며, ‘왜놈’의 짓밟음을 입으면서도 왜놈이 못돼 버린 그것, 그 무엇, 그 정신이 귀하지 않은가? 미약은 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보배요, 실날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생명 아닌가? 실로 우리가 해방을 당한 것은 우리 생활이 풍부해서도 아니요 우리 기술이 높아서도 아니다. 거지같은 생활이요 뒤떨어진 기술이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이란 정신 하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 31)

함석헌은 정치군부세력과 이에 놀아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규탄한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의 생명이 되는 이 정신은 잊고 그것을 일부러 짓밟으면서 남의 세력을 힘입어 부흥을 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 일부 물욕과 권세에 미친, 민족과 역사를 모르는 정치인이란 것들은 비록 더럽고 옅은 이기주의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민중이 그것을 능히 막아내지 못하고 주춤하고 서서 걱정만 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하고 못생긴 일인가?

함석헌은 1965년 8월 30일 재야ㆍ종교계ㆍ학계ㆍ문인ㆍ예비역 장성 등 각 분야 지도급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의 상임대표로 선출되어 박정권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을 지도하였다. 정부에 굴욕회담을 중지시킬 것을 호소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서울법대생 90여 명이 단식에 들어갔다. 졸도하는 학생이 생겼다. 함석헌은 ‘신을사조약’으로 명명된 한일협정을 정치문제가 아닌 하나의 죄악으로 인식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비폭력 투쟁의 방법은 단식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보았다. 이번에도 삭발을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약없는 단식에 들어갔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단식의 절박한 이유를 밝혔다.

오늘부터 문제의 해결이 나는 때까지 단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여 얻은 뜻을 여러분 앞에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내 죄를 회개함으로써 내 혼을 맑히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다시 한 번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정부 당국에 대하여 정성껏 반성을 독촉해보기 위해서입니다. 근본 문제는 내 죄에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동안 여러분은 제게 유언 중 무언 중 민중을 대표한 발언권을 허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은 힘이 없었습니다. 옳은 듯 하면서 악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의도 씨알 스스로의 의요, 죄악도 씨알 스스로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진정한 국민운동에만 있습니다.
(주석 32)

한 연구가는 함석헌의 단식투쟁을 두고 “단식이라는 희생적 저항권을 강력한 도덕적 무기로 삼고, 굴욕외교에 대한 민족적 수치를 개인의 죄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자각시키기 위한 자신의 도덕적 입헌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놓을 줄 아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고 분석하고 “그것은 역사를 도덕적 의미의 행위로 인식한 자신의 역사관에 충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주석 33)고 평가했다.

어느 시대나 권력의 비호를 받은 어용 곡필배가 있다. 언론계나 학계에서 많이 서식한다. 함석헌의 신문 연재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중상모략하는 글이 쏟아졌다. 7월 26일부터 4일간 <서울신문>에 <억지울음 속에 숨은 음모 - 함석헌 씨의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를 박함>이란 글이 연재되었다. 박달수라는 가명으로 쓰인 이 글은 반지성, 비상식의 인신공격이었다.

‘박달나무’ 또는 ‘박달몽둥이’를 뜻하는 익명의 박달수는 언론계의 중진 모씨로 알려졌으나 끝내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박달나무’는 “협조와 건설을 부르짖는 이 나라에서 분열과 파괴를 노리는 씨의 악랄한 매명 선동, 안정과 긍정을 찾고 있는 이 날 이 겨레에 불안과 부정을 던져주는 씨의 너무나 역리적인 소영주의의….”라고 매도하고, 그는 함석헌이 “노망하여 명예욕을 채워보고자” 날뛰고 있다고 비난했다.
(주석 34)


주석
31> 앞의 책, 22~23쪽.
32>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동아일보>, 1965년 7월 1일치.
33> 이치석, 앞의 책, 498쪽.
34> <서울신문>, 1963년 7월 26~30일치.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3 08:00 김삼웅

 

 

정치권력에 맛이 들린 박정희세력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함석헌이 황야에서 아무리 목메이게 외치고 글을 써도 그들은 들은 채도 않고 오히려 선동가로 몰아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켜 미ㆍ일ㆍ한 동맹체제화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1961년 6월 케네디ㆍ이께다(池田)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ㆍ케네디 회담을 통해 이 문제가 깊숙히 논의되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원에 목을 매단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였다.

<사상계> 1964년 3월호에 함석헌은 비감한 마음으로 <양한재조 재차일념(兩韓再造在此一念)>을 썼다.
평소 한자 제목을 잘 붙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달랐다. 편집자는 “한 마음 한 끝 먹고 조선을 새겨 보니 조은 땅 조은 빛이 한 글월 피웠구나. 한 조선 첨서 한난걸할 알속에 지키네”란 알듯 모를 듯한 발문을 붙였다.

우리는 또 다시 “나라를 지키자”고 외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됐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부끄럽고 분한 일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남이 다 잘 사는 이 때에, 우리 만이 못 살고 밤낮이 이꼴이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분하다는 것은 했으면 했을 것인데 번히 알고 못하니 분하지 않습니까?

함석헌은 자신들이 일제감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할 때에,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동포들에게 총질을 한 친일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마땅히 요구해야 할 청구권과 문화재 반환 등이 묵살당한 데 하염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 글을 썼다. 박정희 권력의 비리와 인권탄압,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당시의 상황이 한말의 망국기와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요새 나라 꼴 그 때와 꼭 같습니다. 한일회담, 그 때의 5조약, 7조약, 맺으려던 꼴과 꼭 같고, 창가학회니 뭐니 그 때의 흑룡회, 일진회와 터럭도 다를 것 없습니다. 그 때에도 미ㆍ러ㆍ중이 뒤에서 어물어물하다 우리를 팔아넘기더니, 오늘도 또 셋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나라를 지키자!”하는 글을 짓게 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교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석헌의 이 글의 핵심은 후반 다음의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 옛날 나라가 일본 침략자들 때문에 위태했을 때 그것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이성계를 나가 맞으며 최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三韓再造 在此一擧 (삼한재조 재차일거)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이성계가 가슴 속에 나라라는 일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거(一擧)는 삼한을 재조(再造) 못하고 잃는 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또 다시 나라는 남으로 일본침략주의의, 북으로 중공침략주의의 엿봄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보내며,

兩韓再造 在此一念

이라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일념을 품었습니까?
나라가 임(臨) 하옵소서!
일체 중생이 다 이 한 나라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또 씨알에게!

- 念, 念, 念 , 아멘.
(주석 29)

박정희의 대일 굴욕회담이 강행되면서 장준하는 1965년 <사상계> 긴급증간호를 발행했다.
160쪽 전 지면을 털어 <신을사조약의 해부>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이 책은 야당, 재야ㆍ학생들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의 이론적 전거가 되었다.

박두진ㆍ박남수ㆍ조지훈의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연작시에 이어 함석헌의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란 권두시론, 백낙준의 <한국근대화와 일본침략>, 이범석의 <이제는 더 침묵할 수 없다>, 양호민ㆍ부완혁ㆍ정문기ㆍ김철ㆍ김원룡이 각 전문 분야에서 집필한 <한ㆍ일협정문의 분석>, 각계 지도급 인사 105인의 앙케트 <105인의 발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각계의 성명서가 실렸다.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 성명에는 김홍일ㆍ김재춘ㆍ박병권ㆍ박원빈ㆍ송요찬ㆍ손원일ㆍ이호ㆍ장덕창ㆍ조흥만ㆍ최경록 등이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장성들까지 참여하여, 국민이 얼마나 굴욕회담에 반대했는가를 보여주었다.

함석헌은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부제가 붙은 이 시론에서 처연한 심경으로 국민에 호소한다.

한국은 어디로 가나?
이 4천만 문화민족은 어떤 운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는가?
5천년 고난의 역사는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하고 있나?
지금 한ㆍ일조약의 비준이라는 한 순간을 놓고 민심은 마치 회오리바람 밑에 노는 물결처럼 미치고 있다.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것을 해서라도 기어이 이 조약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고, 정의와 자유의 정신에 불타는 학생들은 거기 대해 뭉치와 최루탄과 철창의 고통을 무릅쓰며 혹은 주린배,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단식을 하면서 싸우고 있고, 일반 국민은 그 두 사이에 불안과 의심과 분노와 두려움에 떨고 서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결정이 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 있다.
(주석 30)



주석
29> <사상계>, 1964년 3월호, 45쪽.
30> <사상계>, 긴급증간호, 20쪽,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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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2 08:00 김삼웅

 

 

귀국한 함석헌은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반대 투쟁에 나섰다.
7월 8일 오산학교 강당에서 강연한 것을 시작으로 그리고 언론 기고를 통해 정부의 실정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함석헌이 1963년 7월 16일치 <조선일보>에 쓴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는 글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이 신문은 <동아일보>와 함께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백지 사설’을 내는 등 언론의 상도를 걷고 있었다. 아직 박정희의 권력체제가 굳혀지기 전이다. 한 쪽을 다 차지한 이 논설은 ‘박정희님에게! 남은 길은 공약 준수뿐’, ‘정치인들에게! 민중은 다 알고 있다’, ‘지식인들에게! 모두 진정을 말하라’, ‘군인들에게! 정치가 혼란할수록 밖을 지켜주오’, ‘학생들에게! 역사의 대국(大局)을 내다 보라’는 주제로 전개되었다.

먼저 박정희에게는 “내가 당신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고도, 육군대장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라 전제하고, 여러 가지 잘못 중에 쿠데타를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고 질타했다. 이어서 “당신이 정말 나라를 사랑한다면 이제 남은 오직 하나의 길은 혁명공약을 깨끗이 지킬 태세를 민중 앞에 보여주는 일이다”고 권고했다.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에 대한 질책은 등에 식은 땀이 날 정도다.

지식인들 이제 어쩌렵니까? 종교가들 여러분 마음은 가륵한 줄 압니다마는 생각이 너무 좁습니다. 삼천만이 벙어리가 되고 앉은뱅이가 되는 데 기도는 무슨 기도를 한다고 불단, 성당, 기도원, 바위 밑에 중얼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나라의 구원을 내놓고 또 무슨 구원이 있단 말입니까?

신문인들 왜 그리 비겁합니까? 닭은 길러서 새벽 울음 한 번 듣자는 거요, 돼지는 먹여서 제삿날 한 번 잡자는 거요, 신문 잡지는 해서 필요한 때에 한 마디 하자는 것입니다. 새벽이 와도 울지도 않고 제삿날은 왔는데 도마위에 올라오기 싫다는 닭이나 돼지가 못 쓸 거라면 말을 할 때에 하지 않는 언론인도 못 쓸 것일 것입니다.

함석헌의 군인들에게 바라는 바는 간절했다.

“제발, 여러분의 자리를 한 순간도 떠나지 마십시오. 만일 한 때라도 떠난 분이 있거든 즉시로 돌아가주십시오. 요새 정국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정치에 관계하려는 일부 그릇된 생각을 하는 군인이 있으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러다가 내외의 환이 한꺼번에 일어납니다.”

학생들에게는 정부의 분열책에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대적이 노리는 것은 학원의 분열입니다. 하나되면 강하고 갈라지면 자멸하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어디서 오나? 순일치 못한 데서 옵니다. 저들은 여러분의 영웅심을 도박하려 할 것입니다. 권세와 이익을 약속하려 할 것입니다. 쓸데없는 이론의 대립을 시키려 할 것입니다. 가장 속기 쉬울 것은 감상적인 애국심을 가지고 흥분시키는 일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함석헌이 이 글에서 정작으로 하고 싶었던 대상은 민중이었다.

여러분 무조건 뭉쳐라. 복종해라. 하는 독재자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개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지만 그 하나는 분통에 들어가서 눌려서 똑같은 국수발로 나오는 밀가루 반죽같은 하나는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는 개성으로 하는 하나입니다. 3천만에서 2천 9백 9십 9만 9천 9백 99가 죽는 일이 있어도 남은 한 알 속에서 다시 전체를 찾고 살려낼 수 있는,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는 그런 개성적인 하나입니다.(…)

그럼 생각합시다!
그럼 꿈틀거립시다!
그럼 겁을 내지 말고 속에 있는 대로를 외칩시다!
자, 이젠 일어섭시다! 일어섭시다!

<조선일보>에 쓴 함석헌의 글이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반향이 뜨겁게 나타나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신사훈이 같은 신문(7월 26~8월 2일)에 7회에 걸쳐 반박하는 글을 썼다.

<함석헌 선생 사상을 비판하면서>란 제목부터가 이른바 ‘사상검증’이었다. 그는 함석헌의 주장을 신랄한 어조로 반박하면서 “함석헌의 사상은 공산주의자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용공으로 몰았다. 신사훈은 4월혁명 당시 학생들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은 어용교수였다.

또 정부대변인 임성희 공보부장관은 같은 신문에 함석헌이 “종교의 탈을 쓰고 일부 정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의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매도하였다. 정부의 공식 논평인 것이다. 사심없는 함석헌의 충정어린 비판을 어용교수와 정부대변인이 반박을 한 것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저급한 수준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1963년 7월 22일 사상계 주최 함석헌선생 귀국 시국강연회

함석헌의 <조선일보> 기고문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자 이번에는 <동아일보>가 원고를 청탁했다. 자신들의 손으로는 박정희의 불의를 지적하지 못하고 함석헌의 글을 빌리고자 한 것이지만, 함석헌은 망설이지 않았다. <동아일보>에는 8월 16일치에 <왜 말을 못하게 하고 못 듣게 하나 - 정부 당국에 들이대는 말>로, 역시 한 면 전체에 실렸다. 정부는 이 무렵 함석헌의 강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옥내 집회는 장소를 빌려주지 못하게 하고, 옥외집회는 청중의 참여를 막았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당국의 강연 방해 사례를 일일이 고발했다. 그리고 ‘본론’을 편다.

묻노니, 정치당국 여러분, 낡은 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한 번 쓸어버리고, 경제부흥을 첫째로 해야겠다고 했고, 약속의 2년이 다 지난 오늘엔 그 기다렸다던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가”는 바로 다른 사람 아닌 ‘나’라고 해서 덧눌려 앉아 정권을 쥐려고 하는 여러분 당신들은, 이 나라를 어떤 나라로 알며 이 민중을 무엇으로 아나.(…)

당신들은 툭하면 선동이라 하고 유언비어라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봐. 누가 과연 민중의 가슴 속에 불이 일어나게 만들며, 누가 정말 터무니없는 쓸데없는 말을 해 돌리나 당신들은 그것도 모르리만큼 마음이 어두운가. 아니라면 어떤 한 문제만 너무 가까이 보기 때문에 전체의 대세가 가리워져 그러는 것 아닐까. 붇는 불을 끄자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면 말이 듣고 싶고 말을 하고 싶어 몰려드는 민중에 장소를 아니 주고 주최자에게 음성적인 압력을 더해서 헤쳐 보자는 것은 더 어리석지 않은가.(…)

당신들 마음엔 언론을 활짝 열어 놓으면 큰일이 날 것 같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반동적인 자리에 스스로 서는가. 왜 그렇게 스스로 압박자의 심리를 가지는가. 큰 일이 난다 해도 그것은 당신들이 지키고 있는 현 정부가 큰 일이 나면 낫지, 이 나라가 큰 일이 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당신들이 만든 정부가 곧 나라라고 그런 스스로 속고 남을 속이는 말 마. 그것은 루이 16세나 히틀러 같은 것들이나 할 소리다.(…)

나라를 위해 사회의 질서를 위해 언론을 취체한다는 그런 약은 소리 마. 나라가 뉘 나란데. 당신들이 무슨 걱정을 해. 공산당의 선전이 틈타겠으므로 그런다고 하지만, 그것도 맞지 않는 구실이다. 나는 서독에 가 봤어도, 국경에 경비원 하나 서 있지 않고, 길거리에 공산당 막으라는 표어 따위, 라인강가에 기적을 일으켰다면서도 ‘재건’이라는 구호 어디다 써붙인 것 못 보았다.(…)

다시금 정부 당국에 문노니, 당신들은 왜 우리들의 자유를 뺏고 짓밟는가. 우리는 목숨을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고 싶고,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고 싶기에 참을 수 있는 데 까지 참을 것이다. 그러나 참아도 참아도 대답이 아니 나오고 맨 것이 풀리지 않는 한 우리는 종시 노하고야 말 것이다.

말 못하는 민중이라 업신여기지 마. 어리석어 그런 것 아니다. 착해서 그러는 거지. 무지해 그러는 거 아니다. 도리가 우리 속에 있어 그러지. 겁나서 가만 있는 것 아니다. 크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이 민중을 뒤에 두고 나는 정부 당국에 묻는다. 민중이 내 말을 듣고 싶어 하는데, 왜 내가 말하는 것을 방해하나. 대답하라. 천하에 내놓고 대답하라. 대답이 나오는 대 까지 나는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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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3년 2월 영국 체류 중일 때 장준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군정 4년 연장을 시도하는 등 국내 정세가 위급하니, 이를 질타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상계>는 1963년 4월호를 ‘창간10주년 기념특대호’로 꾸미면서 권두에 함석헌의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실었다. 28~31쪽에 실린 짧은 글이지만, 그의 글 어느 것 못지 않는 알찬 내용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부제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가 의미하듯이, 주권자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였다.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묻느냐? 여러운 것 아니다. 간단명료하지 않으냐? 군인은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더라, 이야말로 사뭇 들어가는 칼 같이 뻔한 진리지.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거지, 무슨 복잡한 것이 있겠냐? 물러설 마음이 없기에 헌법개정이요, 민의요 하지, 깨끗이 물러서는 사람이 토론이 무슨 토론이냐? 군인은 깨끗해야 한다고 늘 하는 말 아닌가? 소견이 옳았거나 글렀거나, 하여간 생각에 군정을 꼭 해야겠다 하거든 군정이라 하고 해! 또 권력을 좀 쥐고 해 먹고 싶거든 그렇다 하고 해! 호랑이도 호랑이 노릇하고 독수리도 청천백일에 내놓고 남의 고기 먹는데 너라고 못할 것 없지. (주석 23)

함석헌은 예리한 필봉으로 부정어법을 통해 진정한 ‘군인정신’을 알리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군인’을 질타한다.

또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 말할까? 그것도 같은 말이다. 민중이 곧 일어서야지. 도대체 정권 넘겨준단 말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이 뉘건데 누가 뉘게 넘겨주어?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란 말을 벌써 몇 천 년 전 사람이 했는데 정권을 민중에게 넘겨주다니 그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나? 이양이란 글귀를 쓰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민중 모욕이다. 이양이 아니라 대정봉환(大政奉還)이지. 가져갔던 정권을 도로 바치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글귀를 쓰는 것은 민중을 속여 바치는 척 하면서도 속살로는 그냥 쥐고 있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글의 논점은 군인들이 탈취해간 정권을 꼼수 부리지 말고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천하는 천하요….”의 구절은 맹자의 주장을 상기시킨 대목이다.

당초 잘못은 민중이 깨지 못한 데 있다. 민중 스스로가 제 노릇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됐지, 죽음으로 자유 지키는 민중에 도둑이 어디 둘 수 있나?
또 바른 길 말할까? 이것도 다 알면서 못 본척 하는 길이다. 무슨 길? 언론의 자유다. 민중이 깨는데 언론의 자유 없이 어떻게 되겠냐?
(주석 24)
 
박정희의 군정연장 의도가 노골화되면서 신문들은 점차 연골화되어 갔다.
쿠데타 초기에 <민족일보> 사장의 처형 등을 지켜보면서 공포감에 빠진 언론(인)은 ‘민정이양’의 공약이 군정연장에서 다시 민정참여로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는 데도 크게 비판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권한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감옥문 만이 정말 민정으로 건너가는 직통로다. 진리란 참 묘한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자들이 민중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감옥을 짓지만,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 가지고 나오는 것을 어찌하나? 그러므로 진리는 막강하다. 압박하는 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감옥을 넓히고 높일 것이다. 그러나 감옥이 넓어지고 높아질수록 자유의 길은 열리는 것을 어찌나.
민권을 찾고싶거든 감옥으로 들어가라!
살고 싶거든 죽음의 입으로 들어가라!
(주석 25)

함석헌이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에서 “불의한 시대에 의인의 갈 곳은 감옥뿐”이라 썼다. 함석헌의 이 시론이 소로와 맥이 닿아 있음을 본다. 함석헌이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쓴 <사상계> 4월호에는 창간 10주년 특집의 하나로 유진오ㆍ김팔봉ㆍ안수길ㆍ현승종ㆍ김성한ㆍ신상초ㆍ안병욱이 “나와 사상계”란 주제로 각기 인연과 사연을 피력했다. 당시 주간이던 안병욱의 글은 함석헌이 ‘세상에 불려나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소상하다.

연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 선생 댁에 들렸다.
지금은 원효로에 살고 계시지만 그때는 신촌 이대 앞에서 사셨다. 열 칸 쯤 되는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함 선생을 뵈었다. 두 칸쯤되는 장판방에 조그만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고 계시다가 반가히 맞아주셨다. 톨스토이는 바이블을 읽기 위해서 54세 때부터 히랍어공부를 시작했지만, 함 선생의 히랍어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대단하시다.

한자에 능하시고 영어를 잘하시지만 그런 빛이 통 없다. 오산고보에서 영어선생들이 모른 것이 있으면 함 선생한테 가서 물었다. 그는 정말 도깨비였다.

<사상계>에 글을 쓰시라고 하였더니 “내가 뭘” 하시면서 사양을 하신다. 그 후 몇 번 들렸다. 안 쓰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은 쓰셨다. 그후 내 성화에 못견뎌서 여러 번 쓰셨고, 쓰실 때마다 남이 못하는 소리를 하셨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소리를 쓸래면 뭣 때문에 글을 써, 글이란 나 아니면 못하는 소리를 써야 돼”.

언젠가 나 보고 하신 말씀이다. 글 다운 글을 쓰라고 책하시는 말씀 같았다.
<사상계>의 집필을 통하여 오산의 도깨비는 한국의 도깨비가 되었고, 그의 예리한 필봉은 독재정권의 아성을 겨누게 되었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함 선생의 글은 언제나 피의 맥박과 생명의 리듬이 약동했다.
(주석 26)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

함석헌이 유럽을 방문하고 있을 즈음 국내 정세에 더욱 소연해졌다. 군부세력이 4대의혹사건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이 돈으로 민정당을 사전 조직한데 이어 박정희는 민정 불참의 선서를 했다가 번복하여 민정 참여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大平) 일본 외상과 비밀 회동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무상공여 3억 달러, 상업차관 2억 달러로 대일 청구권 문제를 합의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함석헌은 귀국을 서둘렀다. 안병무의 회고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국서 온 신문을 보고 군정세력이 자리를 굳힌다는 사실과 대일(對日) 태도를 보고 선생님께 자극적인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선생님은 들었던 숟갈을 놓고 낙류(落류)하시면서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셨지요.” (주석 27)

이 부문과 관련, 함석헌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이던 인도여행 계획도 취소했지. 그래 돌아와서는 <사상계>의 장준하 한테 갔고 사상계사가 주최해서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대광학교 운동장에서도 강연을 했는데, 그때 사람이 8, 9만이나 모였다고 해요. 그게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면 시작인데, 나는 사회참여니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러던 중 6ㆍ3 데모가 터졌지. 이런 때 가만 드러누워 있으니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나와서 머리 깎고, 세상이 다 알거나 말거나 나대로 책임을 지는 생각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두 주일 단식하고 그랬지요. (주석 28)




주석
23> <사상계>, 1963년 4월호, 28~29쪽.
24> 앞의 책, 30쪽.
25> 앞의 책, 31쪽.
26>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266쪽.
27>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었는가 - 안병무와의 대담>, <씨알의 소리>, 4월 창간호, 1970년.
2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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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0 08:00 김삼웅

 

 

1963 영국 우드블록

함석헌은 1962년 2월 10일 미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예정으로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의 갑작스런 방미에는 세간의 의혹이 따랐다. 당시 미국무성은 후진국의 정계ㆍ학계ㆍ종교계 등의 중진급 인사들을 초청형식으로 미국으로 불렀다. 본질적으로는 미국에 우호적인 오피니언 리더를 양성하려는 전략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유당 시대부터 노태우정권기까지 적지 않은 ‘친미파’가 육성되었다.

함석헌의 경우는 달랐다. 주한미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이 <5ㆍ16을 어떻게 볼까?>를 영역하여 미국무성에 보내고, 국무성은 군사쿠데타의 와중에서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여 그를 초청한 것이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유럽, 인도, 아프리카의 콩고, 슈바이처가 사는 곳, 특히 퀘이커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케냐를 거쳐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출국하기 전날 밤을 밝혀 <수난의 여왕께 드리는 유언ㆍ예언 - 잠시 고국을 떠나면서>를 쓰고 한국을 떠났다. 이 글은 <사상계> 3월호에 실렸다. 편집자 이름으로 이같은 사실과 함께 귀국이 반년 내지 1년 후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 밤이 새면 나는 간다. 말은 미국을 간다지만 미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는 먼 나라를 향하여 가는 것이다. 계획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한 해 있다 돌아온다지만 한 해가 아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길이요, 세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바퀴를 도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이 불러서 간다지만 미국이란 것이 어디 있으며, 그 국무성이 어떻게 나를 부르며 내가 뭐하자고 그 명령에 복종할까? 미국이 어디 있을까? (주석 21)

함석헌은 이 글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길”이라 쓴 대로, 당초의 여정이 크게 앞당겨졌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단순한 ‘이별가’ 수준이 아니었다. 군부세력이 쉽게 민간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 어려움이 올 것을 예상했다.

“이제 어려움이 올 것이다. 역사는 싸움이다. 시대와 시대, 사상과 사상의 싸움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삼켜 버리기 전은 쉽지 않는 싸움이다. 시대를 넘겨 주기를 초등학교 교장이 졸업장을 주듯이 한 줄로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이날껏 자유는 인사로 얻어진 일이 없다. 기성복처럼 입혀줌을 받은 일이 없다.” (주석 22)

함석헌은 미국 여행 중에 국내 정세,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에는 탈권 당한 민주당 정부 요인과 5ㆍ16에 반대한 장성 등 정치망명자가 많았고, 교포들도 <사상계>에 쓴 그의 글을 연상하면서 사자후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내 문제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포들의 오해가 따랐으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국내에서는 날을 세워 군사독재를 비판하지만, 해외에 나와서는 삼가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는 생각이었다.

3개월 간의 미국 시찰을 마친 함석헌은 워싱턴 D.C 소재 물리학자 김용준 교수의 아파트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해외 순방중에도 이전부터 시작된 1일 1식과 한복차림을 유지하였다. 한인 교회를 비롯하여 교포들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지만,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아서 ‘함석헌 사쿠라’란 비난도 나돌았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모임인 펜들힐로 가서 지내다가 1963년 1월 초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서 버밍험에 있는 퀘이커대학 우드브록 컬리지에서 3월 말까지 한 학기를 보냈다. 이때에 퀘이커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퀘이커 교도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 서부 지역과 스코틀랜드, 글라스코, 에든버러를 돌아보았다. 4월 28일 독일로 건너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의 안내로 스위스, 핀란드, 노르웨이를 거쳐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주석
21> <사상계>, 1962년 3월호, 40쪽.
22> 앞의 책,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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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1년 8월 논설집 <인간혁명>을 일우사에서 펴냈다.
자유당 말기부터 최근까지 쓴 논설 10편이 실렸다. 이에 앞서 논설집 <새 시대의 전망>과 시집 <수평선 너머>, 번역서 칼 지브란의 <예언자>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속속 출간되었다. <인간혁명>은 두번째 논설집인 셈이다. 이 책은 군사쿠데타의 살벌한 상황에서도 1년 만에 4쇄를 찍을만큼 널리 읽혔다.

여기에 실린 논설은 <국민감정과 혁명완수>, <간디의 길>, <새나라 꿈틀거림>, <3ㆍ1정신>, <들사람 얼>, <크리스찬의 기백>, <하나님에 대한 태도>,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아름다움에 대하여>, <인간혁명>이다. 다음은 머릿말의 끝 부문이다.

친구여, 내가 주제넘게 왜 말을 하는지 아나? 깨쳐 말하면 싱거운 것이지만 정신이 분열됐다는 말까지 들은 담엔 부득이 깨쳐 말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내 죄를 속해 보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라, 전날의 점잖은 친구에게 버림을 당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 밖에는 지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밖에는 조금이라도 죄를 속해 봐야지.

죽어야 할 목숨이니 될수록 낮은 일을 해야지. 그러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 평생에 배운 것이 글인지라 부득이 붓대를 끄쩍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넝마장수 사상의 넝마장수가 된 것이다.

혁명, 그것은 넝마 모으기 아닐까?
(주석 15)

이 책에는 내가(필자) 함석헌의 많은 글 중에서 으뜸으로 평가하는, <들사람 얼>을 비롯하여 표제 논설 <인간혁명>과 그가 대단한 페미니스트임을 보여 주는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등은 반세기가 지냈지만 지금의 독자에게 읽혀도 생동감이 넘치는 내용이다. 좋은 문장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젊은 여성이라면?
생김생김을 관계 말고, 태어난 집안의 높고 낮음을 생각말고,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재주가 깊거나 옅거나, 그 차이를 도무지 보지 말고, 그저 젊은 여성이기만 한다면?
스물에서 마흔까지, 살갗에 꽃이 피어나 있으며, 숨에 향기가 들어 있고, 목소리에 사람의 혼을 어루만지고 흔드는 보드라움과 맑음이 잠겨 있고, 눈동자에 영원을 향해 애타는 속삭임이 들어 있는 때라면?
그것은 거룩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다.
젊은 여성의 할 일은 그 받아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깨달아 잘 쓰느냐 하는 데 있다.
잘 쓰면 심청이요, 잔 다크요, 마리아지. 잘못 쓰면 양귀비요, 크레오파트라요, 살로메지.
(주석 16)

함석헌은 여성을 ‘풀무’요 ‘용광로’라 했다.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풀무다. 모든 쇠붙이를 녹여 쇠를 만드는 용광로를 달구기 위해선 풀무가 있어야 한다. 글은 이어진다.

여자는 풀무요 용광로다.
산을 빼는 항우가 우미인 앞에서 녹아 버려 영웅답지 못하게 질질 울었다 해서가 아니요, 사자를 찢는 삼손이 드보라 앞에서 혼이 빠져 믿음의 사람답지 못하게 딩글었다 해서가 아니다.
모든 쇳돌, 모든 녹슨 파쇠가 반드시 한 번 풀무 속에 들어가 가지고야 찌끼를 벗고 새 쇠가 되어 나오듯이, 모든 역사 모든 문화의 낡은 찌끼와 썩음을 벗겨 치우고 새 시대를 짓는 새 사람은 반드시 여자의 탯집 속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의 갈려 새로워짐은 반드시 세 세대로야 되는 것인데, 새 세대의 양심의 클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잡힌다.
모든 혁명은 여자의 탯집 속에서 시작된다.
(주석 17)

함석헌의 여성론은 전통적인 여성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으로서 시대적인 사명과 함께 ‘여성스러움’을 강조한다. 한 대목을 더 들어보자.

예로부터 착함과 슬기로움과 날쌤을 천하에 뚫린 세 덕이라 하지만, 그 덕을 다 갖추고라도 거기 만일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없다 해 봐! 그럼 인생이 어찌 됐을까?
또 요샛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목소리를 다투어 서로 부르짖지만, 그 두 가지 권리를 다 보장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 만일 조금이라도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들어있지 않다 해 봐! 그럼 이 세상이 어찌 됐을까?
그런데 길을 가노라면 하늘에서 받은 그 귀한 자격을 제 손으로 다 뜯어 망가치우고, 여성 아닌 여성, 여성도 남성도 아닌, 사람도 짐승도 아닌, 흉측하고도 가엾은 형상들이 어찌도 그리 많은가?
풀무가 깨졌으니 역사는 장차 어찌되는 것일까?
(주석 18)

함석헌의 이 책에는 또 그가 이화대학에서 한 강연 <아름다움에 대하여>가 실렸다. 내용 중에는 “너희의 너희 이상으로 잘 뵈잔 모든 허영심의 화장을 긁어 치워라”고 하면서 다음의 내용을 강조한다.

억만 년이나 살 듯 문화주택을 지어 단꿈에 취해 보자던 이 땅을 박차고 너희가 정말 영원 무한한 정신의 우주에 머리를 하늘 가에 대고 높이 선다면, 그런다면 그때 해 달이 너희 귀고리가 되고, 수없는 별들이 너희 머리에 보석이 되고, 흐르는 구름이 너희 어깨에 쇼율을 던지는데, 옷은 무슨 옷이 걱정이 되며 단장은 무슨 단장이 문제가 된단 말이냐? (주석 19)

이 구절에서 천의무봉한 사유의 세계와 함께 그의 여성관을 읽을 수 있다.

내 사랑아,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지, 어떤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냐? 무한을 안은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가장 작고 착한 마음이다. 네 마음 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 (주석 20)



주석
15> 함석헌, <인간혁명>, 7쪽, 일우사, 1961.
16> 앞의 책, 248~249쪽.
17> 앞의 책, 249~250쪽.
18> 앞의 책, 251쪽.
19> 앞의 책, 276쪽.
20>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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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8 08:00 김삼웅

 

 

1961년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개정판을 낸데 이어 12월에는 그동안에 쓴 시를 모아 시집 <수평선 너머>를 간행했다. 생각사에서 나온 이 시집은 6ㆍ25전쟁 전 개성에서 <영원의 젊은이>, 월남 뒤 공주에서 <장작불> 그리고 대전에서 <기러기>라는 프린트로 나왔던 것을 1953년 3월에 인쇄판으로 묶었고, 이번에 이 모든 것에서 고르고 장정을 바꾸어 새로 활자판으로 펴냈다.

함석헌은 이 시집에도 실린 초판 서문에서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낸 이유를 말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터면 하고 말터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주석 9)

함석헌은 <두 번째 내놓은 말>에서 개정판을 낸 이유를 설명한다.

남의 병신 자식을, 감추어 기르는, 사랑과 미움, 귀여움과 뉘우침, 불쌍히 여김과 죽기를 기다리는 감정이 한데 섞인, 원수의 아들을 한번 봤으면 그만이지 또 다시 보자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 아닌가? (주석 10)

이 시집에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비롯하여 120편이 실렸다. <선전>과 같은 격렬한 선언문 투의 시가 있는가 하면, <인생은 갈대>와 같은 서정시도 있다. 몇 절씩만 소개한다.

선전

이 세상의 주권자야, 나는 오늘 너를 향해 선전하노라.
네 힘이 아무리 강하고
네 법이 아무리 엄하고
네 조직이 아무리 치밀하여도
오늘부터 나는 네 시민이 아니도다,
나는 너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자유의 이름에서

친구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선생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나에게 속빈 말의 충고를 하였고
나에게 너희도 모르는 거짓 길을 가르쳤고
나에게 영원한 집을 찾지 말라 달래였으니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맹렬한 싸움을 시작하노라.
(주석 11)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여린 순 날카로운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란 뜻 하늘에 달뜻 컨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주석 12)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벗어나면서, 인제대학교 전 총장 이윤구의 안내로 퀘이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1953년에 쓴 시 <대선언>에서 이미 변화의 낌새를 찾을 수 있다.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옛날의 모험가 한 가지 노래하련다
나가는 역사의 수레채를 메고 달려나 보련다.
내 아직 얻었담도 아니요
허린 거울 속 보듯 내 눈에 희미는 하나
앞엣것 잡으려 뒤엣것 잊고 나는 닫노라
이제부터 나를 붙잡지 말라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리면서 약하면서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 하면서 어리석으면서

나는 산에 오르리라
거기는 꽃이 피는 곳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 같이
그 향 냄새 맡는 코를 미치고 기절케 하는 꽃
그 꽃을 맡기 전 나는 벌써 취했노라.
(주석 13)

중국 17세기 초의 문인, 문학이론가로 유명한 장유(張維)는 저서 <시사서(詩史序)>에서 시(詩)와 사(史)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상의 변화를 기록하고 득실을 밝히는 것이 사(史)이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서 음악과 어울리는 것이 시(詩)라고 하고, 그 둘은 서로 섞일 수도 없고 겸할 수도 없다고 했다. 사람은 재능이 한정되어 있어, 사가(史家)가 시인일 수 없고, 시인이 사가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뛰어난 시인은 그 두 영역의 구분을 넘어서서, 세상일에 대한 깊은 근심을 절실하게 나타내 사실의 핵심에 이른다고 했다.”
(주석 14)

3세기 전에 장유가 마치 함석헌을 예비하여 한 말 같이 들린다. ‘사가와 시인’의 좀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작업을 그는 해냈다. 뿐만 아니라 맹렬한 언론인과 격렬한 민권운동가로 이어진다.


주석
9> <수평선 너머>, 1953년 머릿말, 생각사, 1961.
10> 앞의 책, 9쪽.
11> 앞의 책, 191쪽.
12> 앞의 책, 36쪽.
13> <수평선 너머>, 170쪽.
14> 조동일, <한국시가의 역사의식>, 5쪽, 문예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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