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9 08:00 김삼웅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새 시대의 종교>, <말씀살이(시)> 등이다.
그리고 <편지>란 잡지에도 <영원히 불어 오고 가는 바람소리>, <맘의 나라>, <속죄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버리는 것이냐>, <간디의 죽음> 등을 썼다. 기독교 관련 잡지여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함석헌이 일반 국민, 시민을 상대로 한 글쓰기는 <사상계> 1956년 1월호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시작으로 한다. 이 글은 무명의 그를 일약 한국사회의 대논객으로 부각시켰다. 당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마각이 드러나고 있던 시점이다. 1954년 5.20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금권ㆍ폭력선거로 승리한 것을 계기로 11월에는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을 감행하여 이승만의 3선의 길을 텄다.
1955년 9월의 <대구매일신문>의 필화사건은 언론탄압의 전초였다.
이승만은 1956년 5월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종교ㆍ문화ㆍ예술 단체를 어용화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특히 기독교계의 어용ㆍ부패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함석헌의 대사회 비판은 기독교계를 향했다. 그만큼 사랑하고 아낀 까닭에 아프게 때렸다. 그는 그동안 대사회 발언을 삼가고 있었다. 천성과 성품이 누구를 욕하거나 나무라지 못한 까닭이다.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비판에 나선 것은 역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을 것이다.
1959.9 사상계 사무실에서 시드니후크 박사, 장준하와 함께
1950~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사상계>는 지식인, 대학생의 필독서가 되고, 마치 지성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사상계>가 그만큼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 사장 장준하의 잡지에 대한 열정과 정론정신이 바탕이 되었지만, 함석헌의 날카로우면서도 천의무봉한 글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사상계> 1956년 1월호는 김형석 연세대 교수의 <인간의학과 현대철학>, 김성식 고대교수의 <대학과 세계정신>, 이숭녕 서울대 교수의 <나의 독서관> 등 꽤 읽을거리가 있는 편집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번 호에서 잡지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게 되고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함석헌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당시 함석헌은 무명인이었다. 서울 신촌에서 양계장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퀘이커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사상계>의 주간이던 안병욱이 함석헌의 인물됨을 듣고 장준하 사장에게 천거하여 글을 쓰게 한 것이 <한국 기독교는…>이었다. 이 글이 시쳇말로 히트를 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함석헌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상계>에 계속하여 비중 있는 글을 썼다. 그리고 ‘한국의 간디’라 불릴만큼 한국지성계의 큰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장준하와 만나면서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의 혈맹 관계가 되었다. 장준하에게 함석헌은 스승이고 동지였다.
안병욱 주간은 뒷날 회고에서 자신이 잡지를 만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함석헌 선생과 류달영 교수를 ‘발굴’한 일을 들었다. 그러면서 잡지 편집장의 큰 책무는 좋은 글을 받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좋은 필자를 발굴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주석 23)
안병욱에 의해 ‘발굴’된 함석헌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철학자, 반독재 인권운동가, 언론인, 역사연구가 등으로 불리면서 군사독재와 치열하게 싸운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몇 차례 추천되었으며 1970년대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씨알사상’을 정립하였다. 그 첫 출발이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평론이다.
이 글은 <사상계> 126쪽에서부터 140쪽까지,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의 평론이다.
원고 말미의 필자 소개는 ‘기독교인’이라고 명기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한국기독교를 비판한 셈이다. 한국기독교를 공개적으로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이는 함석헌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독교계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를 비난하는 소리도 높았다. 친여 성향으로 갓 창간한 월간 <세대>는 창간 2호인 7월호에 윤성범 교수의 <요한은 어디서 외쳤는가(함석헌론)>을 실었다. 윤성범은 함석헌을 선동가ㆍ이단자로 매도하였다.
함석헌의 첫 대사회 발언, 대종교 비판 발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여기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천주교나 기독교의 여러 파를 구별할 것 없이 다 한데 넣은 ‘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말은 해방 후 10년 동안 그 교회가 걸어 온 길을 주로 역사적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고 하는 말이다.”라고, 기독교 신구교를 싸잡아 비판하는 글임을 밝혔다. 그는 비판을 거부해 온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어느 종교도 다 신성불가침을 주장한다.
‘비판’이라 할 때 교회는 본능적으로 수염을 끄들리는 봉건 귀족의 기분 같은 생각을 가진다. 사실 교회는 봉건제도의 뱃 속에서 설러져 나온 것이고, 아직도 그 젖 냄새를 못 버린 점이 많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지만, 해하려는 신성불가침은 없다. 비판 받아야 한다. 이젠 인간은 무반성 신뢰만이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어떤 종교경전도 그는 비판 없이 읽으려 하지는 않는다. 반성을 아니할 수가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함석헌이 대사회발언의 첫 목표를 한국교회에 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우리나라에 종교가 있다면 기독교다. 즉 국민의 양심 위에 결정적인 권위를 가지는 진리의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세계관 인생관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내부치는 교리와 실제가 다르고, 겉으로 뵈는 것과 속과가 같지 않은 듯 하고, 살았나 죽었나 의심이 나게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고신도(古神道)나 화랑도 모양으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아주 완전히 죽어버렸다면 문제없다. 그것은 식은 재다. 삼국시대의 불교나 이조시대의 유교 모양으로 인심 위에 산작용을 하고 있다면 또 문제없다. 그것은 산 불길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미지근한 재요 시들어가는 나무다. 지금 이 사회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구원을 위해 두 손을 내미는데, 교회는 왜 아무런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지 않을까?
당시 한국 기독교는 전후의 폐허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 아래서 침묵하거나 ‘국부 이승만’을 떠받들며 교세 키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먼저 한국종교사상사의 뿌리를 소개한다.
기독교가 본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들어 올 때는 정복적인 생명력을 가졌었다. 우리나라는 오랜 동안 사상으로 하면 고신도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이 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어 왔다. 물론 처음에는 고신도가 국민생활을 지도해왔을 것이고, 대륙으로부터 유교문화가 들어오자 도덕에 관한 한은 대체로 유교적인 것으로 대치가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사회생활의 실제 도덕에서는 높은 것이었으나, 세계관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세한 설명을 주는 것이 없음으로 고대의 고신도적인 것으로 내려오다가 불교가 당시의 중국에서 성했던 물질적ㆍ예술적인 문화를 타고 올 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대부분 불교적인 것으로 돼 버렸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정신계를 말하면 상반신 세계관적인데 관한 한 불교적 고신도적이었고, 하반신 도덕적인데 관한한 유교적이었다.
함석헌은 이어서 해방과 6ㆍ25 뒤 한국 기독교의 타락상을 분석한다.
그런데 38선이 갈라진 것을 당하고 교회는 어떻게 했나? 처음 흥분이 식고 미ㆍ소 양군의 주둔이라는 어쩔 수 없는 비애를 먹고는 그 다음 일어난 것은 예언이었다. 그래 저마다 예언이다. 3년 후에 통일이 된다, 5년 후에 된다, 어느 해는 예수가 재림하고 소련이 망한다, 이런 것이 유행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역사적 문제를 전연 우연한 것으로 안 심리다. 말은 우연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니 계획이니 예언이니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현실의 문구로 해석해 놓으면 우연이란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이 형식적, 관념적이고 실천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신계의 일과 현실적인 일을 혼동하여 하늘나라의 일을 곧 지상에서 보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는 역사에 대해 도덕적인 노력의 입장에 서지 않고 전연 자연현상에 대하는 모양으로 기다려서 결과를 얻으려는 심리에 빠진다. 고로 예언을 하게 된다. 정감록식으로 운명을 기다리는 심리가 암시되어 가지고 나온 특수 정신적 현상이 곧 예언이다. 그런 고로 몇 번 해보아도 들어맞지 않는 것을 안 요사이는 전연 그런 것은 죄다. 구약에 많이 있는 예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이 윤리적인 것이다. 국민의 갈 길을 지시해 힘쓰게 하자는 것이지 요행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주석
23>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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