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012/12/08 08:00 김삼웅

 

 

함석헌의 치열하고 파란많은 생애를 예증이나 하듯이, 그가 태어난 이후 한반도 주변의 파고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갔다. 두 살이 되던 해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용암포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두만강ㆍ압록강 유역의 삼림 벌채권을 얻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경제ㆍ군사적 침투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용암포는 압록강 유역에서 베어 낸 목재가 모이는 곳이다. 러시아는 용암포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망루를 설치하는 등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과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대치하게 되었다.

세 살 때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것도 접전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고,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등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러일전쟁은 어린 함석헌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자기집 사랑채에 다수의 일본군이 머문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일본군은 용암포의 아라사(러시아)를 몰아낸다는 구실로 진주하여 한동안 함석헌의 집에 주둔하였다.

함석헌은 뒷날 어른들로부터 당시 일본군의 행패를 듣게 되고, 주민들이 어떻게 일본군과 대처했으며, 총소리에 놀라 달아난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싸우는 모습의 전쟁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어린 시절 그의 심중에는 외세의 분탕질이 아우라로 자리잡았다.

어수선하고 살벌한 국경 마을에서도 함석헌은 총명하게 자랐다.
별세할 때까지 가졌던 선풍도골의 잘 생긴 얼굴은 타고난 귀골이었다. 미모의 얼굴에 두뇌도 총명하여 첫 돌 전에 말을 다 하고, 여섯 살에 큰 누이와 고모가 공부하는 곁에서 천자문을 익혔다.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다섯 살에 서당 삼천재(三遷 )를 다니다가, 서당이 기독교 학교 덕일(德一) 소학교로 바뀌면서 신식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집안 아저씨뻘 되는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것이다. 덕일소학교는 서당과는 달리 역사, 산술, 지리, 유년필독 등을 가르쳤다. 함석헌이 어린 나이에 신식교육을 받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어린 함석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함일형이다. 그가 아명 애놈으로 불릴 때, 항렬자 석(錫)자와 불화 변(火)의 법 헌(憲)자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불화 변의 헌(櫶)자는 자전에도 없는 글자여서 그냥 법 헌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1959년 자서전에서 이름과 관련, 다음과 같이 썼다.

당초에는 ‘헌’ 자를 불 ‘火’ 변에 憲을 한 자를 주었다.
석은 항열자요, 정말 내 것은 헌(헌)인데, 한문을 잘 아는 학자인 그가 왜 자전에도 없는 글자를 지어주었던지,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은 자전에 없는 자라 해서 불 ‘火’를 떼어버리고 憲만을 쓰게 됐다.

내 성격을 미리 알고 뜨거움이 부족한 듯해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를 주었듯이 일부러 불을 붙여주었던 것인지, 혹은 본래 성격대로 되노라고 불이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나는 오늘날 불이 그리운데 불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이름대로 되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잃었던 불 도로 찾아 볼 ‘火’변에 쓰고 싶다.
(주석 4)

함석헌보다 한 해 뒤에 태어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朴烈)은 본명이 박준식이었다.
그러나 서당에 다닐 때 자기는 기질로 보아 스스로 열(烈)이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썼다. 실제로 그는 이름대로 치렬하게 일제와 싸웠다.

<초의 불꽃>을 쓴 프랑스의 과학철학자ㆍ사상가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초의 불꽃은 현실에서 현실을 초월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불꽃은 탈 때 하나의 살아있는 실체가 되며, 그 실체는 거기에서 타오르고 환하게 된다. 실로 여러 가지 존재가 불꽃에서 그 실체를 얻고 있다.”
“촛불은 원래 혼자이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혼자서 꿈꾸는 것, 이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불꽃은 하나의 꽃이다. 불꽃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친 불의 다리이며,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끝없는 공전이며, 철학자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주석 5)

소년 함석헌에게서 불(불꽃)을 연상한 함일형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농민운동에 앞장서고, 1898년 용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용천부사의 해임을 주장하는 등 선각자였다. 고향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함석헌을 기독교에 인도한 것도 그였으며, 신식 체조를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함일형은 함석헌 일가에 민족주의의 혼을 심어 주었다.


주석
4> 함석헌, <물 아래서 올라와서>, <전집>, 89쪽.
5> 김삼웅, <백범김구 평전>, 30~31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

012/12/07 09:18 김삼웅

 

제국주의 열강의 땅따먹기 광풍이 동북아 끝자락까지 세차게 몰려오는 20세기 첫 해 한반도 북녘 용천에서 한 총명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한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함석헌(咸錫憲)이다. 1901년 양력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마을이다. 당시 사람들은 섬의 생김새가 사자와 비슷하다하여 사점이라 불렀다. 원래는 섬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좁은 바닷길을 매축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난 함석헌은 첫째와 둘째가 출생 뒤에 곧 사망하였으므로 실제로 장남이 되었다. 위로 누이 1명과 아래로 1남 2녀가 더 태어났다. 함석헌의 아명은 애놈이었다. 부모는 둘 다 16세 때에 결혼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농부이고, 가문은 벼슬한 선대가 없는 평민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스스로 ‘평안도 상놈’으로 자처하였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새 세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한반도에 굵직한 인물이 다수 태어났다.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군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1901년생 동갑내기들의 뚜렷한 족적과도 견줄 수 없었다. 예컨대 그의 말투대로 하자면, 춘사 나운규처럼 영화인도 못되고, 사회주의혁명가 박헌영처럼 해방투쟁가도 못되고, 장공 김재준처럼 기독교의 도착화도 실현시키지 못하고, 그리고 천재 시인 이상처럼 자기 몸을 던져 선구적인 시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주석 1)

1901년생 중에 여기에서 빠진 인물이 있다. 약산 김원봉이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3ㆍ1운동 뒤 만주로 망명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폭렬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조선의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평안북도 서단에 위치한 용천군은 동남쪽은 철산군, 동북쪽은 신의주시ㆍ의주군, 서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둥(安東)과 마주보며, 서남쪽은 황해와 접하고 있다.

용천은 예부터 민족의 아픔이 굽이굽이 서린 곳이다. 본래 안흥군이라 불렀으며, 993년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 장군의 활약으로 수복한 강동6주 가운데 한 곳이다.

1231년 몽골의 제1차 침입 때에는 몽골군에게 포위되었다가 항복하여 부사가 포로로 잡혀갔으며, 서북면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거란ㆍ몽골ㆍ홍건족 등이 침입할 때마다 성이 함락되는 등의 비운을 겪었다. 수난은 계속되어 1270년 원나라의 동녕성에 속하였다가, 1278년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정묘호란 때에는 이광립ㆍ이립ㆍ김우 등이 용골산성을 끝까지 사수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안극함ㆍ차원철ㆍ장후건 등이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당하고, 1811년 홍경래의 난군에는 용천군이 함락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1895년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부ㆍ군제를 실시할 때 용천군으로 개편되어 의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평안북도 용천군이 되었다. 함석헌이 자랄 때는 홍경래에 관한 구전 설화가 많이 전해왔다. 그는 홍경래를 남달리 흠모하였다.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점’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이란 말이다. 백두산에서 서남으로 내리닫는 맥이 끝에 와서 천마산을 일으켜서 삭주ㆍ의주ㆍ구성 세 고을의 만나는 곳이 되니, 그 산을 의주, 천마, 삭주 천마, 구성 천마, 소위 삼천마(三千摩)라고 부른다. 거기서 내려와서 의주의 백마산이 있고, 그 백마에서 떨어져 몇십 리 내려오다가 솟은 것이 용골산, 그 아래에는 평지가 계속되어 폭 560리의 살진 들이 열리는데, 그것이 용천군이다.

일망무제라 하고 싶은 마냥한 들이 이어닿아 여름에는 푸른 비단이요, 가을에는 황금바다다. 그러므로 인총(人總)이 배여 그 빽빽하기가 전라도와 같은 곳이다. 사점은 그 끝에 내려가 있는, 길이 십리도 못 되는 조그만 섬이다. 그것이 가장 큰 것이고, 그 부근 십 리 안 팎에 신점, 간염, 삽섬, 구염, 남경하는 졸망졸망한 섬 다섯이 있어 그것을 합해 사자육도(獅子六島)라 하는데, 수 백년 전부터 둑을 막아 육지에 대었으므로 이젠 이름만 섬이지 섬이 아니다. 땅은 살져서 곡식은 많이 나고, 바다의 고기잡이도 잘 되어 살기는 괜찮으나 워낙 교통이 불편한 곳인지라 사는 사람은 대개 가난하고 하잘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석 2)

인간은 자연(환경)의 산물이다. 함석헌이 태어나기 전이나 후에 그의 본향 용천은 ‘고난의 역사’ 중에서도 유독 수난이 심했던 곳이다. 반면에 일망무제의 바다와 넓은 평야, 수려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함 선생의 고향은 끝없이 파도치는 흰 물결이 서쪽 하늘에 맞닿는 황해 바닷가, 천마산 줄기의 백마산성 끝자락에 우뚝 솟은 용골산 아래, 여름에는 푸른 비단, 가을에는 황금 물결치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기름진 평야가 펼쳐지는 곳.

함 선생의 그 한없이 넓은 가슴은 하늘과 맞닿는 황해가 낳은 것이고,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는 용의 골격 같이 굳세고 준엄한 용골산이 낳은 것이고, 그 인자하고 온화한 마음씨는 비단같이 펼쳐진 용천 평야가 낳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주석 3)

함석헌의 부모는 1894년에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이 해 8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평안북도 철산 가두섬으로 피난하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폐허상태였다.

아버지는 평범한 소작농이었으나 그림을 잘 그리고, 가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할 만큼 손재주가 있었다.
20세 무렵까지 서당에 다니고, 청년이 되어서는 스스로 한의술을 공부하여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나서 농어민들을 치료해주었다. 아버지는 중년에 기독교에 귀의하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교회 장로가 되었다. 정의감이 강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한의사로 번 돈을 교회ㆍ학교 설립에 내놓았다. 함석헌은 아버지로부터 이런 성품을 타고났다.

어머니는 용천 진고지(진곶) 마을 농부의 둘째 딸이었다. 부모는 역시 소작농이었다. 어머니는 매우 부지런하여 농삿일은 물론 무명베, 삼베, 명주를 잘 짜고, 베틀이 방을 가득 차지하여 ‘장베틀집’으로 불렸다. 50이 넘어서야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만큼 정신력이 강하고 인자하였다. 함석헌의 빼어난 정신력은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었다. “내 사상의 밑돌을 어머니가 놔주셨다”고 했다.


주석
1> 이치석, <씨알 함석헌 평전>, 35쪽, 시대의 창, 2005.
2> 함석헌, <물 아래서 올라와서>, <함석헌전집 4권>, 한길사. (이후 <전집>표기)
3>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 82쪽, 인간과 자연사, 2002.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6 09:02 김삼웅

 

 

함석헌이 좋아하는 인물은 김시습이었다. 둘은 닮은 데가 많았다.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세조치세)에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가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통곡하던 바로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일까?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대고 싼 것이지 뭐냐? 칼을 뽑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 전설, 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봐라! 두고 봐라! 한이 뼈에 사무쳤다니 원수라도 갚을까 봐 겁이 나 그러냐? 비겁하다! 그게 아니다. 미친 체 오줌을 싸는 것은 원수 갚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비겁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에서 싸는 오줌이 아니야. 오줌 쌈을 받는 놈보다는 스스로 좀 넓고 큰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야. 소원이야 예수처럼 죽으면서도 죽이는 놈을 위해 복을 빌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만한 얼의 실력은 없으니, 오줌이라도 싸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장자, 휘트맨 등 들사람의 정신을 소개하면서 참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함석헌은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 없어 이꼴이다. …들사람이어 옵시사! 와서 이 다 썩어져 가는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함석헌의 이 글은 5.16 쿠데타로 기백을 잃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한줄기 석간수처럼 목마름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한 마리 ‘야생마’처럼 포악한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주의와 씨알의 권리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들(野)’은 거칠고 투박함을 상징한다. 그 대신 순수하고 자연적인 힘을 갖는다. 옛날에는 지배세력은 성(城) 안에 살고 피지배층은 성 밖에 살았다. 성 밖의 씨알ㆍ민초ㆍ백성들이 성안 귀족들을 먹여 살렸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성을 지키려 싸우다 죽었다. 들은 이들의 백골로 덮히고, 부토가 되어 씨앗을 키웠다.

함석헌의 ‘들사람론’은 현실적 ‘약은 문화인’과 대비된다.

그럼 달리는 차 같은 이 시대 풍조에 어떻게 하나? 누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브레이크를 밟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 죽더라도 휩쓰는 이 물결을 막으려 홀몸으로 나서는 야인, 들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이 없어 이꼴이다.

함석헌은 태어나기를 평안도 용천 바닷가 상민출신의 야인이었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도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배경도 들사람의 상황이었다. 나라가 망할 무렵(1901년)에 태어나 감수성이 예민한 19세 때에 3ㆍ1운동을 겪었다. 오산학교에서 들사람 류영모ㆍ이승훈ㆍ안창호ㆍ조만식을 만나면서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 유학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야인사상에 접하게 되면서 함석헌의 ‘들사람’의 혼이 성장한다.

함석헌은 이 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모르나? 이제 우리가 아무리 지식 기술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우주적인 크고 높은 정신에 철저하다면, 소련이나 미국의 지금 앞선 것쯤은 문제 아닐 것이다.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생각과 정력을 몇 해나 더 민중을 누르고 짜먹을 수 있나 거기만 쓴단 말이냐? 너희 생각이 그렇게 작고 비루하니까 너희 자식들이 저렇게 망나니가 되지. 그러나 이제라도 아니 늦다!
빈 들에 외치라!

함석헌이 살아 온 시대적 배경, 분단ㆍ6ㆍ25전쟁ㆍ연이은 독재정치는 그의 야인정신을 저항정신으로 체화시킨다. 그가 걸어온, 걷고자 한 야인의 길은 권력ㆍ종파ㆍ세력ㆍ집단화를 거부하는, 순수 재야의 들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글은 비중이 실렸으며 그의 노선은 민중이 따랐다.

야인정신에 함께하기 마련인 저항정신으로 하여, 함석헌은 폭압의 시대에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척박한 이 땅의 들길에서 반독재와 평화통일, 그리고 씨알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의 소금수레를 끄는 야생마의 역할을 다 하였다.

 

 



01.jpg
1.51MB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5 08:00 김삼웅

 

함석헌이 방점을 찍고자 한 부문은 권력을 우습게 여기는 엄자릉의 자유혼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한 개 선비로서 일어나 어지러워 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전쟁이 다 끝나고 천하가 완전히 제 손아귀에 들어온 줄을 알게된 담, 맘에 좀 불안을 느꼈다. 이제 천하에 나를 칭찬 아니할 놈이 없고, 내게 복종 아니할 놈이 없건만, 단 하나 한 사내만이 맘에 걸린다. 그것은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광무제의 동창 벗이었다.

한 가지 성현의 도를 닦는 시절 서로 맘을 알아주는 벗으로 허락을 했었고, 높은 이상과 도타운 덕에 있어 그가 자기보다 한 걸음을 내켜 드딘 줄을 아는 광무제는 첨의 선비의 뜻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자릉이가 자기를 속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줄을 알았다. 그 생각을 하면 앞에 네 발로 기며 아첨하는 소위 만조백관이란 것들이 보기도 싫었다. 그래 사람을 부춘산에 보내 냇가에 낚시질하는 엄자릉이를 데려오라 했다.

자릉이 따라왔다. 대신이오 무어요 하는 물건들이 뜰 아래 두 줄로 버텨 서서 감히 우러러도 못보는 데를 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 앉은 곳으로 쑥 올라갔다.

“아. 문숙(文叔)이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에 몇 해의 전쟁이오 나라요, 정치요, 천자요, 그런 것은 당초에 코 끝에 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하들은 어쩔줄을 몰랐다. 광무도 도량이 넓다고는 하나 짐승처럼 부려먹는 신하들 앞에서 제 위에 또 권위가 있는 것을 허락해 보여 주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릉이를 신하 대접을 했다가는 당장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고 물론 자릉이 그럴 이도 없겠지만 광무의 맘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인지 모르는 기(氣)에 눌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신하들 보고는 “너희들은 물러가라, 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정을 좀 풀련다.”했다. 밤새 이야기를 하다 잤다.

천문을 보는 신하가 허방지방 들어와 “큰일 났습니다.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했으니 무슨 일이 일삼는지 모르겠습니다.”했다. 태백이란 지금말로 금성인데 옛 사람 생각에 그것은 임금을 표시한다 했다. 객성이란 다른 별이란 말이다. 임금을 절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엄자릉이 자면서 광무의 배 위에다 다리를 펴 올려놓고 잤더라는 것이다. 그래 후의 시인이 자릉의 그 기상을 대신 말하여,

萬事無心一釣竿 (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 (삼공불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 (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萬世間 (야기허명만세간)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시대라
삼공벼슬 준다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날려
온세상에 퍼졌구나.

함석헌이 이 무렵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엄자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이 가장 따르고자 했던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이 아닐까.

세조 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소식을 듣고 중이 되어 독서와 저작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유교와 불교의 정신에 통달하고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당대에 으뜸이었으며 산천을 주유하고, 권력자들을 타매했던 ‘무관의 제왕’이었다. 매월당은 함석헌 그 자신이다.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

012/12/04 08:00 김삼웅

 

함석헌의 글은 이어진다.

마케도니아 한 절반 야만의 자식인 알렉산더가 천하를 정복할 적에 당시 무화의 동산인 헬라를 말발굽 밑에 두루 짓밟았다. 감히 머리를 들 놈이 없었다. 오는 놈마다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디오게네스란 유명한 어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아이의 영웅심 자만심에, 으레 제가 나를 보러 오겠거니 했다. 기다려도 아니왔다. 약도 올랐고 호기심도 일어나고, 부하를 데리고 디오게네스 있는 곳을 찾아갔다.

가보니 늙은이 하나가 몸에는 누더기를 입고 머리는 언제 빗질을 했는지 메두사의 머리의 뱀처럼 흐트러졌는데, 바야흐로 나무통 옆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이 나무통은 그의 소유의 전부인데 낮에는 어디나 가고 싶은데로 그것을 굴려가지고 가고 밤에는 그 안에 들어가 자는 것이었다. 디오게네스는 누가 왔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젊은 영웅은 화가 났다.

“너 알렉산더를 모르나?”

제 이름만 들으면 나는 새도 떨어지고 울던 애기도 그치는줄만 아는 알렉산더는 맘속에 “저놈의 영감쟁이가 몰라 그러지 제가 정말 나인줄을 알면야 질겁을 해 벌떡 일어설테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한 소리였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놀라지도, 코를 찌긋도 않고 끼웃해 알렉산더를 물끄럼 보고 하는 말이 “너 디오게네스를 모르나?” 그러고는 목구멍에 침이 타 마르고 있는 젊은 정복자를 보고 “비켜, 해 드는 데 그림자져” 했다.

산림학파(山林學派)가 있었다. 조선조 10대 연산군 이후의 계속된 사화와 당쟁으로, 이를 피하여 정계를 떠나 강호(江湖)에 파묻혀 독서와 문장으로 세월을 보내던 학자ㆍ문인들이다. 서경덕ㆍ이황ㆍ조식ㆍ이이 등이 대표적인 강호파이다. 이들 역시 순수한 들사람은 아니다. 함석헌이 이 시기에 살았다면 혹시 이 부류에 들었을까 싶지만, 아닐 것이다.

함석헌의 뜻은 단호하다.

뼈다귀가 빠질 대로 다 빠지고 살이 썩을 대로 다 썩은 우리나라 이씨네 500년에 있어서도 그래도 무슨 기백이 남은 것이 있다면 상투 밑에서 고린내는 났을망정 한 줌 되는 산림학자 있지 않았나? 정몽주를 때려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선죽교에 피가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계ㆍ이방원을 만고의 죄인으로 규정짓는 민중의 판단이지, 왕위에 또 왕이 있단 말이지 무언가? 야차(夜叉) 같은 수양으로도 미친 녀석 같은 김시습을 어떻게나 모셔보려 애를 쓴 것은 무엇인가? 칼보다 더 무서운 칼이 있고 곤룡포보다 더 아름다운 옷이 있단 말이지.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3 10:00 김삼웅

 

 

우리 역사에서는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다.
야만인이라는 뜻이 담겼다. 사전에서는 야인을 ① 교양이 없고 예절을 모르는 사람 ②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 ③ 시골사람 ④ 야만인으로 표기한다.

함석헌은 야인을 ‘들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종합교양지 <새벽> 1959년 11월호에 함석헌은 ‘들사람 얼’이란 부제가 붙은 "야인정신"이란 글을 썼다.
함석헌은 20권에 이르는 전집이 간행될 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하였지만, 나는 그의 많은 글 중에서 한 편을 고르라 한다면 서슴지 않고 "야인정신"을 들겠다.

함석헌은 교육사상가, 언론인, 종교인, 역사학자, 민주화운동 지도자 등 다양하게 불린다.
실제로 ‘어느 하나’ 가 아니라 이들 모든 분야를 넘나들고 포괄하는 큰 그릇이었다. 그렇지만 나보고 누가 함석헌의 본령(本領)을 지적해보라면 서슴지 않고 ‘야인(野人)’, 바꿔말해서 ‘들사람’이라 하겠다. 단순히 관직이나 공직에 나가지 않았데서가 아니라 그의 품성과 생각과 활동이 ‘야인’이었다. ‘야인’, 곧 들사람 정신이야말로 함석헌의 본령이고 사상이고 행동철학의 준거가 되었다.

함석헌사상의 상징어인 ‘씨알’은 들사람의 올갱이다.
함석헌의 역사관, 교육관, 민중관, 언론관, 종교관은 하나같이 야인정신, 들사람 정신에서 발원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들사람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야인정신"은 이승만 폭정의 말기에 많은 지식인, 언론인, 문인, 종교인들이 ‘관제화’, ‘어용화’ 된 시점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 지식인ㆍ언론인들이 어용화된 시대에 함석헌은 광야에 선 모세처럼 ‘야인정신’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폭압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권력에 기웃거리는 청년, 교사, 언론인, 종교인, 학자, 문인들에게 ‘내리치는’ 채찍이었다.

<새벽> 24〜38쪽에 이르는 권두논설은 함석헌 특유의 쉬운 구어체로 쓰였다. 함석헌사상의 모태이기도 하는 ‘야인정신’을 보여주는 몇 대목을 살펴본다.

“임금이구 뭐고 내게 상관이 뭐야?”

요(堯)가 천하를 얻어 임금이 된 다음, 세상에서 자기의 다스림을 어찌하나 알아보려 한번은 시골을 나갔다. 밭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농사꾼을 보고 슬쩍, “당신은 우리나라 임금을 아시오?” 했다. 농부가 그 말을 듣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흙덩이만 까면서 하는 말이 “아, 내가 해 뜨면 나오고, 해 지면 들어가고, 내 손으로 우물 파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고, 임금이구 뭐구 내게 상관이 뭐야?” 했다.

요가 속으로 내가 나 있는 줄을 모르리만큼 했으니 어지간히 하기는 했구나 하면서도 아무래도 맘이 시원치 못했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하자는 맘이오 가르치잔 생각이므로 호강이나 세력을 부리잔 뜻은 없어, 집을 지어도 백성보다 나은 것이 겨우 흙으로 싼 새 층대에서 더한 것이 없었음을 자기도 스스로 알지만, 그래도 어쩐지 맘의 한 구석에 불만이 있었다.

그래 사람을 영천(潁川) 냇가에 보내어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전에 도를 같이 닦던 시절의 친구인 소부(巢父)ㆍ허유(許由)에게 가서, 나와서 벼슬을 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권했다. 그랬더니 소부가 그 말을 듣고는 “예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군”하고, 그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 허유가 송아지를 먹이면서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그 모양을 보고 “야, 그 물 더러워졌다. 그것 먹이면 내 송아지 더러워진다.”하고 끌고 위로 올라갔다.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순의 성군이나 소부ㆍ허유의 무욕정신, 탈권력에는 함석헌 자신의 무욕ㆍ야인정신이 배어 있음을 보게 된다.

“감탕속에 꼬리치고 싶다 해라”

장자(莊子)가 초나라에 갔다가 어느 냇가에서 낚시질을 했더니, 그 나라 임금이 듣고 신하를 보내어 예물을 잔뜩 가지고 와 하는 말이, “우리나라 임금이 선생님의 어지신 소문을 듣고, 꼭 오시어 우리나라를 위해 일을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했다.

장자 그 이야기를 듣더니 하는말이 “이애, 여기 제사 돼지가 있다. 그놈 살았을 때 진장속에 뒹굴고 있지만 제삿날이 오면 비단으로 입히고 정한 자리를 깔고 도마 위에 눕히고, 칼을 들어 잡는다. 그때 돼지가 되어 생각한다면 그렇게 죽는 것이 좋겠느냐? 또 너희나라 사당 안에 점치는 거북 껍질 있지, 그놈이 살았을 때 바닷가 감탕 속에 꼬리를 끌고 놀던것인데 한번 잡힌 즉 죽어 그 껍질을 미래를 점치는 신령이라 하여 비단보로 싸여 장안에 간직해 두게 되니, 거북이 되어 생각한다면 죽어서 그 영광을 받고 싶겠느냐? 감탕 속에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겠나?”했다.

왔던 사신의 대답이 “그야 물론 진장, 감탕 속에서 딩굴고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지오.”, “그렇다면, 가서 너희 임금보고, 나도 감탕속에 꼬리를 치고 싶다고 해라. 천하니 임금질이니 그게 다 뭐라더냐?” 하고 장자는 물 위에 낚시를 휙 던졌다.

조선시대에 사림(士林) 세력이 있었다. 7대 세조 때에 갈리기 시작한 유림의 파벌 중 하나로, 김종직ㆍ김숙자ㆍ김굉필ㆍ정여창ㆍ조위ㆍ김일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다. 9대 성종 때부터 관계에 등용되어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사림은 들사람, 야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권력을 추구했었다.


01.jpg
0.04MB

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2/02 08:00 김삼웅

 

 

함석헌의 생애는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3.1만세시위 참여, 계우회사건, 성서조선사건, 독서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고, 해방후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속되고, 월남해서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는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는 진짜 글을 통해 할 말을 하고, 제도 언론이 봉쇄당할 때는 온몸을 던져 행동으로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다. 언론이 압제자의 편이 되어 왜곡과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면서 직접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웠다.

그의 사상적 근저에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사상, 기독교의 박애정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자연주의와 초월사상이 녹들었지만, 본바탕의 정신은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비폭력사상은 저항이고 투쟁이었다. 휘트맨의 <풀잎>이나 쉘리의 <서풍>에서 보이듯이, 치열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고난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는 결코 유약한 선비나 초월적인 종교인, 관념론적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이라는 말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행동한 ‘싸우는 평화주의자’ 이다.

근자에 함석헌을 지나치게 종교의 테두리 특히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시도가 있다. 특히 종교ㆍ정신계의 지도자인 유영모 선생과 동렬화 시키려는 것은 함석헌의 본령인 저항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아닌가 싶다.
평안도 호랑이, 아니 조선의 호랑이에게서 어금니와 발톱과 날램과 용기를 빼버려서는 안된다.

옛글에 ‘화호불성반위구(畵虎不成反爲狗)’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하여 개를 그리게 된다”는 뜻이다.
함석헌의 모든 연구, 평가, 분석 은 마땅히 그의 투철한 저항사상 즉 비폭력 저항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함석헌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저항’ 바로 그것이다. 그의 저항정신은 오늘에 다시 발현이 요구된다.

 

 


01.jpg
0.06MB

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2/01 08:00 김삼웅

 

유신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면서 긴급조치를 통해 모든 비판세력에 족쇄를 채우고 개헌운동을 폭력으로 봉쇄시킬 때에 함석헌은 분연히 일어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은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3.1 명동선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선언문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권은 이 일을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몰아가면서 재야 지도급 인사들을 속속 구속했다. 구속자가 함석헌을 비롯, 김대중ㆍ윤보선ㆍ윤반웅ㆍ문익환ㆍ함세웅ㆍ신현봉ㆍ김승훈ㆍ이문영ㆍ서남동 등 18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이어 1979년 3월 1일에는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로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함석헌ㆍ김대중ㆍ윤보선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3.1 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 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자발적이며 초당적인 전체국민의 조직”으로서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함석헌은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연합’의 산하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13개 단체가 가입할만큼 반유신 저항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다.

함석헌의 반유신 저항운동은 지칠줄을 몰랐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었지만 유신권력을 둘러싸고 권력내부에서는 치열한 음모와 권력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12.12 사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안개정국’이란 표현이 언론에 공공연하게 쓰일 만큼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1월 24일 함석헌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결혼식을 가장하여 서울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백여 명은 △ 유신정권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 △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또한 △ 유신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 개입을 일체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검찰은 함석헌을 비롯 박종태ㆍ 양순직ㆍ김병걸 등 96명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했다.


 


01.jpg
0.03MB

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3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누가 뭐래도 저항적인 행동주의자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먹물쟁이가 아니라 치열하게 사유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투사이고 들사람이고 저항인이었다. 그에게서 행동과 실천성을 빼면 사상가이고, 철학자이고, 문명비평가이고 종교인이 된다. 시인이고 역사연구가이고 언론인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함석헌의 본령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식견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그런 식견과 학식은 행동과 실천을 위한 에너지요 무기요 군량미였을 뿐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 사상을 위한 사상,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학문, 실천을 위한 철학이었다. 그에게 행동과 실천을 배제한다면 평범한 저항적 지식인에 불과할 것이다.

함석헌의 생애를 추적하면 젊은 시절부터 투철한 행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일제식민지 시절에 대부분의 지식인이 침묵할 때 그는 성서조선사건, 계우회사건, 독서회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실제로 행동하고 그 행동의 결과 일제의 감옥에서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해방후 신의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북쪽에서 투옥되고 월남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체제에서 투옥되었다. 치열하게 저항하고 행동하다가 잡혀들어간 것이다. 그의 고난의 대부분이 말이나 글 때문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직접 행동하고 저항운동에 나선 적이 한 두차례가 아니었다.

자유당 독재가 극에 이르렀을 때 충남 천안의 씨알농장에서 단식하면서 저항하고,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14일 동안이나 삭발 단식투쟁을 벌이고, 1974년 11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하여 한국신학대학생과 교수들이 삭발단식을 할 때, 이들을 격려차 방문했다가 거침없이 머리깎고 단식을 함께 하면서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런 행동과 저항이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례를 들려드리겠다.
1971년 4월 19일 김재준ㆍ이병린ㆍ천관우와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주도한 것은 함석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로 기록되는 ‘민수협’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박정권에 도전한 이가 다름아닌 함석헌이었던 것이다.

‘민수협’은 70년대말부터 3선개헌의 후유증에서 깨어난 각계 인사들이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발아되었다. 이들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정하고, 공명선거를 통해 1인 장기집권을 막아내고자 1970년 4월 8일 서울 YMCA에서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계 등 각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갖었다. 그리고 4・27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명을 다짐하는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한데 이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모임에서 김재준ㆍ천관우ㆍ이병린ㆍ이병용ㆍ장용ㆍ김정례 등 6인으로 준비소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4월 19일 ‘민수협’을 정식 발족시키고, 함석헌ㆍ김재준ㆍ이병린ㆍ천관우를 대표위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민수협’은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발표, 인권탄압 사례 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참관인단 구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최초의 재야민주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이후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 긴급조치 시대 재야단체의 모태가 되었다. ‘민수협’의 지도자가 바로 함석헌이었고, 그는 모든 재야세력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함석헌의 저항적인 실천운동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을 붙였다. 야당이 주최하는 전국적인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반민족적인 한일회담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한 1969년 박정권이 영구집권 야욕에서 자행한 3선개헌반대투쟁과 그 이후 반유신투쟁의 집회에서 어김없이 함석헌이 참석하여 사자후를 토해냈다.

 


01.gif
0.5MB

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29 08:00 김삼웅

 

신학자 김경재(한신대)는 “함석헌의 문화 종교적 삶의 자리는 계몽주의적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 자연과학과 종교의 화해, 동양문화와 서구 기독교문명의 지평융합 그리고 세계문명 전체가 영적으로 크게 한번 털갈이를 하려는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문명전환기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면서 “오산학교 학장시설 다석 류영모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청년시절 기본사상의 기틀을 닦고, 일본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 간디, 톨스토이, 주세페 마치니, H.G.웰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역사철학의 토양으로 삼았다.” (주석 14)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육화’된 저항사상은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먼저 출생지역을 들 수 있다.
그는 “서북 끄트머리 평북 용천군에서도 바닷가인 부라면 원성동이다. 그는 ‘물 아랫놈들,’ 즉 ‘감탕물 먹는 놈’ 으로 자라났다. 그곳은 일명 사자섬이라고 하는데 일찍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소박한 농민생활에 히브리적 바탕의 신앙이 뿌리를 내린 동리였다.” (주석 15)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섬’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 이란 말이다. …용천에서도 그 위대로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업신여겨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 하였다. 감탕이란 높은 지대의 흙이 비에 씻겨 흘러 바닷가에 내려가 가라앉아서 생긴 유기물질 많은 까만 충적토이므로 퍽 살찐 흙이나, 진흙이므로 샘물은 늘 흐리고 비가 오면 다니기가 참 불편한 흙이다. 그래 감탕물을 먹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그가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평안도 용천의 ‘상놈’으로 태어났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와 같은 태생적인 환경은 생애를 두고 저항정신의 기본바탕을 형성하였다.

두번째는 성장기의 배경이다.
나라가 망하기 시작하는 1901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망국을 지켜 보고 감수성이 예민한 19살 때 3․1 운동을 겪었다. 직접 3․1 항쟁에 참여하여 평양고보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후 오산학교에 들어가 류영모,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을 만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교보 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이 때 잔혹한 조선인학살을 지켜보면서 청년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의 참상을 ‘육화’시킨다. 동경유학 시절에 무교주의자 우찌무라를 만나고, 셸리의 <서풍의 노래>에 접하게 되고, 김교신 등 동지들을 만난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움트기 시작한 정신사적 토양이다.

세번째는 시대적 배경이다.
식민지, 해방, 분단, 동족상쟁, 미군정, 이승만 독재, 5․16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 ․17쿠데타 등 한국근현대사의 모순과 역리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평화주의였다.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네임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 일 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 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물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에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 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내고야 말리라.
(주석 17)


주석
14>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수신문>, 2003. 1. 1.
15> 안병무 , 앞의 책, <씨알 인간 역사>.
16> <물 아래서 올라와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한길사.
17> 함석헌, 앞의 책, <저항의 철학>.
 


02.jpg
0.06MB
01.jpg
0.01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