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28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세상이 다 아는 대로 비폭력 저항주의자이다.
이에 따라 반체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이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주의를 두고 저항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짓’ 이라며 못마땅해 하였다. 역사적 허무주의나 패배주의가 아니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반항은 하지만 미워하지 말고 싸움은 하지만 주먹질을 말라”고 비폭력 저항을 주창하였다. 그렇지만 함석헌은 딱 한 차례 ‘폭력’을 사용한 적이 있다. 성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 함석헌도 구조악 또는 공권력에 의한 현장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한 것이다. 여성인권운동가 이우정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은,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실천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던 때의 일이다. 농성을 하던 기자들을 깡패와 경찰을 투입해서 끌어내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많이 구타를 당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무자비한 폭력에 항의하고, 부패정권의 포악을 폭로하는 증인이 되고자 해서였다.

우리가 도착해서 항의나 시위를 할 사이도 없이 함 선생님과 나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와 공덕귀 선생님(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은 경찰차에 쑤셔넣듯이 떠밀려 태워졌다. 그런데 함 선생이 벼락같이 소리를 치시더니 우리를 떠미는 순경의 뺨을 후려치시는 것이었다. 순경도 우리도 갑작스런 함선생의 행동에 잠시 벙벙했다. 나는 경찰차 (4인승의 조그만 차였다) 속에서 공 선생님과 함께 함 선생님을 놀리면서 실컷 웃었다.

왜냐하면 항상 비폭력투쟁을 강조하시면서 젊은이들이 경찰에 대해 욕을 하거나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을 극구 말리시고 경계하시던 분이 느닷없이 경찰의 뺨을 후려치셨기 때문이다. (…) 나는 함 선생님을 그렇게 분노케 한 것은 당신이 경찰에 떠밀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 선생님과 나를 그렇게도 거칠게 질질 끌고 가서 차 속에 쑤셔 넣는 것을 보시고 격노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한 자를 함부로 다루는 권력의 횡포에 참으실 수 없는 분노를 느끼셨던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가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느냐고 물어도 쑥스러운 듯이 그냥 웃기만 하시던 모습은 꼭 부끄럼 타는 소년과 같았고, 그 인상은 지금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
  (주석 9)

함석헌은 어느 글에서 “이성과 감정이 대립할 때 감정의 편에 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말을 액면대로 이성 보다는 감정을 택한다는 것으로 치부하면 서툰 분석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자인 함석헌의 비폭력사상은 폭력으로 무장한 구조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본제국주의,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 치열하게 저항한 것은 그것이 비인간적인 구조악의 폭력이기 때문이었다.

송기득은 “저항하는 사람이 영웅주의에 빠지면 참 저항자가 되지 못한다.” (주석 10)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에 순응하여 이미 말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만 함석헌이 경찰관의 뺨을 때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감정적이거나 권력주의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행동인이었던 그는 스스로 용기를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살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했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각오로서 싸울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죽을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려고 도망하거나 빌붙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석 11)

함석헌의 비폭력저항은 간디의 불살생 비폭력사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다음에 인용한 <간디의 참모습>에서도 밝혔듯이 간디와 함석헌은 “싸울 실력이 없거든 폭력을 써서라도” 대적할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함석헌 저항사상의 본질이고, 철학이고, 실천윤리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 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주석 12)

신학자 안병무에 따르면 “함석헌은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 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우찌무라에게서 성서, 타골, 칼라일, 라스키, 노자, 장자, 바가받 기타에서 최근의 데미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주석 13)라고 분석한다.


주석
9> 이우정,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 <나의 스승 함석헌>, 김용준 엮음, 해동문화사.
10>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 인간 역사 -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한길사.
11> <간디의 참모습>, <함석헌수상록, 바보새>, 동광출판사.
12> 송기득, 앞의 책.
13> 안병무, "순수와 저항의 길", <씨알 인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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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27 09:00 김삼웅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러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
(주석 1)

함석헌은 본디 태어나기를 온순한 천성을 갖고 세상에 나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겸손과 겸양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말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저항의 인물이 되고 그 저항을 통해서 항일, 반소, 반분단, 반독재투쟁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씨알의 올갱이가 되었다.

“내가 반항을 좋아한다면 또 그만치 못지않게 순종, 온건, 평화도 좋아한다. 반항은 나의 후천적으로, 의식적으로, 뜻으로, 사상으로 하는 것인지 몰라도 평화는 내 선천적으로, 바탕으로, 감정으로 된 대로 하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온순으로 났다. 인간 세상에 나서부터 나는 우리 집안에서 싸우는 건 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다.”  (주석 2)

함석헌은 영국의 시인 셸리를 좋아했다.
특히 <서풍의 노래>를 좋아했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 라는 마지막 구절을 즐겨 인용하면서 셸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

서풍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어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항, 항의, 생명의 바탕이 만일 자유에 있다면, 그 자유는 구속하고 뺏으려는 세력이 밖에서 오고 말라붙으려는 제도, 전통의 때가 안에서 꺼려 할 때, 거기에 대해 일어나 겨루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귀한 도덕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영어를 나는 모르지만, 그 중에 resist란 말처럼 좋은 것은 없다. resit, revolt, protest... 다 좋은 말이다. 만일 resist란 말이 없다면 나는 영어를 아니 배울 것이다.”
(주석 3)

셸리의 저항정신은 함석헌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다.
resist(저항), revolt(반항), protest(항의)는 모두 저항정신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셸리의 <서풍의 노래>를 통해 포악한 독재에 시달리는 씨알들을 위로하면서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의 싯구는 분단과 냉전과 정치적 억압으로 신음하는 이 땅의 씨알에게 ‘새 봄’ 으로 상징되는 해방과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은 <저항의 철학> (주석 4)이란 글에서 보다 명료하게 제시된다. 그는 인격을 저항으로 인식한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고 서슴없이 갈파한다. 직접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주석 5)

함석헌은 저항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실천하였다. 저항에서 인격을 찾고, 인격의 원리로써 저항을 택한다. “인격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맨 끝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에 생명의 아주 낮은 원시적인 밑의 단계에 있어서도, 자유의 원리, 따라서 저항의 원리는 그 살림을 지배하고 있다” (주석 6)고 주장한다. 함석헌이 ‘저항’에 관해 얼마나 열정적인가를 살펴본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쏘아 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라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주석 7)

천지창조하려는 하나님 곧 물 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암탉이 알을 까려 품고 앉은 듯한, 무슨 큰일을 저지르려는 사람이 골똘히 생각을 하고 앉은 듯한, 그러한 모양을 표시하는 그 운동이란 말은, 곧 영겁의 침묵을 깨치려는 첫 말씀의 고민이요, 무한 깊음의 혼탁을 뚫고 나오려는 코스모스의 몸부림이요, 원시의 어둠을 한 칼에 쪼개려는 빛의 떨림이었다. (주석 8)


주석
1> 함석헌, <레지스땅스>, <사상계>, 1966년 3월호.
2> <겨울이 만일온다면>, <함석헌전집 4>, 한길사.
3> <겨울이 만일 온다면>, 앞의 책.
4> 함석헌,<저항의 철학>, <씨알은 외롭지 않다>, 휘문출판사.
5> 앞의 책.
6> 앞의 책.
7> 앞의 책.
8>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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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장] 연재를 시작하면서

2012/11/26 09:46 김삼웅

 

 

100년이나 500년 쯤 뒤 사가들이 20세기의 한국(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누구를 꼽을까.
이승만이나 박정희, 김일성이나 김정일 등 독재자는 아닐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통일운동의 역군 중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분야를 좁혀서(넓혀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라면 누굴 꼽을까.
한민족은 시대마다 빼어난 사상가를 배출하였다. 신라의 원효와 최치원, 고려의 대각국사와 정몽주, 조선조의 퇴계ㆍ율곡ㆍ남명ㆍ서산대사ㆍ다산 등이 꼽힌다.

20세기 한국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격동과 격변의 시대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처참한 식민시대, 독립운동, 해방, 외국 군정, 분단, 2개의 남북 정권, 동족상쟁, 독재, 냉전, 4월혁명, 군사쿠데타, 산업화, 민주화, 국제화 등 다른 나라 같으면 1000년 동안에 겪을까 말까 하는 일을 한민족은 100년 동안에 치뤘다. 여전히 분단상태는 지속되고, 내부 갈등은 치열하며, 낡은 자본주의체제(남한)와 쇠퇴한 공산주의체제(북한)가 대립하고 있다. 그 사이 수많은 인물이 명멸하였다.

우리가 세기적인 고통과 질곡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세계적인 큰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다. 앞에서 열거한 대로 왕조시대에도 오뚝한 철학ㆍ사상가를 배출한 것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큰 사상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변화된 상황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세계의 문이 열리다보니 외국의 인물이 쏟아져 알려져서 비교되고, 여기에 식자들의 남의 것만 돋보이고 제것을 하찮게 여기는 사대근성이 한 몫을 한 결과였다. 먹물들은 외래사상과 외국인물만 연구하여 학위를 따고 학생들을 가르치니, 학생들은 또 그대로 답습한다.

인물다운 인물이 크기 어려운 풍토의 탓도 작용한다. 병아리 부화시설과 닭도리탕용 양계장에서는 봉황이 나오기 어렵고, 진학 시험과 취직 위주의 공ㆍ사 교육장으로 변한 개천에서는 용이 자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속에서도 돋보이는 듯 하면 톱질을 하거나, 정치권에서 채다가 ‘1회용 반창고’ 로 써먹는다.

식민지, 분단, 전쟁, 냉전,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속화(俗化) 만이 살아남는다는 시대상황도 큰 인물이 성장하지 못하는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반봉건, 반외세, 반분단, 반독재에 앞장섰던 선각자들의 처절한 운명을 지켜보면서, 이를 비켜가려는 안일주의 처세술이 생존의 법칙이 되다시피하였다.

독재세력과 보수언론의 비판자ㆍ반대자에 대한 도끼질과 가지치기는 생존권을 박탈하기 일쑤이고, 외세에 대한 정당한 저항은 안보의 이름으로 박멸의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재가 휴전선은 물론 국경선을 넘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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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인 인물이 있었다. 함석헌이다.
1901년 출생이니 20세기가 막 열리는 시대에 태어났다. 한반도에 먹구름이 몰려드는 불운한 시대였다. 젊은 나이에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명에 접한다. 많은 동시대인들이 뒷날 친일파가 되었지만 그는 반일사상에 투철하여 <성서조선>에 글을 썼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찍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해방과 함께 소련군에게 붙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고, 간신히 월남한 남한에서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를 만들다가 이승만에게 밉보여 투옥된다. 이후 가장 먼저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필화를 입었다. 박정희에게 함석헌은 제1의 강적이었다. 김종필은 함석헌의 5.16비판을 ‘정신분열증에 걸린 노인’ 이라 막말을 하고, 군사정권은 그의 말과 글을 막으려고 온갖 핍박과 탄압을 가하였다.

함석헌의 저항은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 이래 독재 권력의 신도로 전락한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종교계, 독재의 어용기관이 된 우골탑의 교육자, 민중의 소리를 배반한 채 독재와 야합한 족벌신문과 방송, 사이비 지식인들을 가차없이, 거침없이 비판하는, 한국의 소크라테스 역할을 하였다.

그는 중년 시기부터 1일 1식으로 먹는 것을 줄이고, 흰수염ㆍ흰옷ㆍ흰고무신으로 조선 정신을 이으면서, 먹물들이 민중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은 민중을 속이는 것이라고 질타하면서, 구어체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뜻을 폈다.

그는 민(중)을 뜻하는 ‘씨알’이라는 표기를 통해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80평생을 싸우면서 살았다. 한마디로 철저한 저항인이었다. 일제, 공산당,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비롯한 권력집단과, 씨알의 피를 빠는 지배세력에 저항하였다. 비폭력 저항이었다. 그래서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네임을 얻고, 한국의 모세, 한국의 간디라는 별칭이 따랐다.

함석헌과 관련해 지금까지 많은 책이 나오고, 적지 않은 글이 쓰여졌다. 그가 토해낸 글과 말이 20여 권의 전집으로 묶이고, 두 권의 평전이 나왔으며, 선생이 펴냈던 <씨알의 소리>가 지금도 격월간으로 간행되고 있다. 또 <함석헌연구>지가 반년 간으로 2호째 나왔다.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연구모임이 있으며 기념학회도 결성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함석헌 평전>을 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제목에 ‘저항인’ 이라는 부사를 부친 것은, 그의 생애가 온통 저항인이었는데, 마치 종교인, 재야사학자, 문필가, 시인 등으로 ‘왜소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맹호출림(猛虎出林)’ 의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그림으로써 함 선생의 본령과 실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서, 새로운 평전을 통해 본 모습에 접근하고자 한다. 강조하거니와 그는 88년 생애를 통해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특히 박정희와 전두환의 포악한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거의 모든 사건에는 빠지지 않고, 항상 저항의 대열에 앞장섰다. 우리 민주화투쟁의 전선에서 함석헌의 존재는 변수 아닌 상수였다. 그는 70이 넘고 80이 되어서도 반독재 투쟁에 어김없이 참여하였다.

이런 그에게 독재집단은 반체제 원흉, 기독교계와 학계는 이단자, 언론계는 독설가로 매도하였다. 대신 씨알들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의 대변자, ‘할 말’을 하는 지도자로 존경하였다. 권력욕이 없는 지도자, 정파를 뛰어넘는 지도자로 사랑하고 좋아하였다. 탈물욕, 탈권위의 그의 본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찾기 어려운 지도자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천착된 철학과 사상은 감히 누가 넘보기 어려웠다.

함석헌은 20세기 한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같은 시대는 물론 전 후사를 통해 그이 만큼 폭넓은 지식과 학문을 두루 갖춘 사람도 찾기 쉽지않다. 종교ㆍ역사ㆍ철학ㆍ사상ㆍ교육ㆍ언론ㆍ민중ㆍ평화ㆍ비폭력ㆍ인권ㆍ민족ㆍ여성ㆍ시ㆍ아나키즘ㆍ퀘이커ㆍ세계사에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갖고 이것을 통섭하는 거대한 지식체계, 학문세계를 이루었다.

그의 생애는 곧 한국현대사요, 그의 철학은 한국철학사요, 그의 저항운동은 반독재 민권운동사다. 그런가 하면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의 민족사관에 비견되는 독특한 씨알사관이고,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발행한 <씨알의 소리>는 한국민중언론의 통사다. 그의 구어체 문장과 문체는 외래어에 오염된 우리 말(글)의 복원이며, 거침없는 사유와 행동은 아나키스트의 전범이고, 문ㆍ사ㆍ철ㆍ시ㆍ서ㆍ화의 겸비는 조선 풍류사상의 정맥이다. 함석헌은 성인이 아니다. 그도 인간의 한계와 흠결이 있었다. 가정의 생계를 도외시하였고, 거대 담론에는 추상적인 내용이 많았다. 독선적인 언행도 적지 않았고, 중년에는 추종하는 젊은 여성과의 스캔들로 물의를 빚었다.

최근 번역되어 화제를 모은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한 명의 사상가가 20세기에 지울 수 없는 주요한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면, 그는 마르크스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마르크스는 21세기를 위해서 다시 한번 너무도 필요한 사상가이다.” 란 대목이 나온다. 마르크스를 함석헌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21세기에도 너무도 필요한 사상가이고 행동인이다.

그는 아무런 대가도, 어떠한 감투도 탐하지 않는, 보상이 없는 생애를 살았다. 그러면서 맨 정신으로 씨알의 신음소리를 듣고, 세상의 아픔을 대신 앓았다. 질곡의 20세기 한국의 씨알들에게 그나마 함석헌이 있어서 위로를 받고, 생명을 찾아 꿈틀거릴 수 있었다.

나는 10대 후반 <사상계>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제까지 나의 생각과 처신은 함 선생의 영향이 절대적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내 역사관의 지침이 되고, 그의 많은 글은 내가 살아오는데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7~80년대 여러 번 만나 인터뷰를 하고, <씨알의 소리>에도 몇 차례 글을 썼다. <씨알의 소리> 1975년 11월호에 장준하의 의문사 관련, <약사봉 계곡의 진혼곡>을 썼다가, 정보기관에 불려가 혼쭐이 나기도했다. 또 함 선생 사후에 일부 매체에 그의 언론사상과 역사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런 경험과 인식, 연구를 토대로 하여 <저항인 함석헌 평전>을 쓰고자 한다.
무딘 붓이라 고결한 혼과 폭넓은 사상, 거인의 발자취를 모두 담기가 쉽지 않겠지만, 열과 성을 다할 각오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생애를 추적하기보다 시대마다 불굴의 신념으로 전개된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그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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