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7 08:00 김삼웅

 

 

쿠데타세력은 1961년 10월 진보성향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사회당 간부 최백근을 처형하고 혁신계 인사들을 중형에 처하는가 하면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하여 구정치인들을 묶고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을 구축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이에 항의하여 하야하자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대통령권한대행까지 꿰찼다.

박정희의 ‘원대복귀’ 혁명공약은 헌신짝이 되고, 그가 노골적인 정치참여의 의지를 내보이는 가운데 12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고, 몇 차례의 번의를 거듭한 끝에 12월 27일 대통령 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5ㆍ16쿠데타가 권력찬탈을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1950년 3월 28일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간행했던 것을 1961년 겨울 한 달 동안 해인사에서 대대적인 개작을 하여 간행하였다. 제목도 ‘성서적’을 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었다. 개정신판은 1962년 3월 일우사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개정판을 내고 제목을 바꾸면서도 1950년판의 ‘서문’을 ‘머릿말’로만 바꾸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를 실었다. 왜 그랬을까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성서적 입장’의 제거가 “사슴에게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고, “성서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입장에서야만 역사는 쓸 수 있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런데 개정판에서 ‘뜻으로 본’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뒤에 다시 간행한 책의 서문이다.

그래서 책을 내게 되는 전해 겨울 해인사에 한 달 가 있으면서 전체에 걸쳐 크게 수정을 하여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석 1)

내가 보기에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1962년 2월 30일자로 일우사에서 종서로 발행된 (456쪽 정가 2,500환) 것이 정본이 아닌가 싶다. 저자 스스로 꼼꼼히 교정을 보아서 오탈자도 거의 없다. 말미에는 유달영의 <책 끝에 붙이는 글>을 실었다. 표지 안쪽에는 회갑날의 저자 흑백 사진도 실렸다.

또한 1950년과 1954년 재판본에 비해 1962년 판본에는 제4부가 추가되었다.
제4부 <생활에 나타난 고민하는 모습>에 <고난의 의미>,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이 추가된 것이다. 이후 몇 곳 출판사가 바뀌면서 나온 책은 1962년 판본을 횡서로 고치고, 유달영의 발문을 제한 것이 대부분이다.

함석헌의 주저인 이 책의 기조(基調)는 ‘고난의 사관’이다. 신라의 통일 이래 한민족이 걸어온 길은 고난이었다는 주장이다. 당당하게 출발하여 열국시대를 거치고 풀무 속에 다듬어진 삼국시대에 고구려 아닌 신라가 통일을 주도하면서 광대한 대륙을 잃게 되고, 그 땅에 고려가 세워졌으나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 민족사의 고난이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성계의 덕 없는 창업, 사대주의를 국시로 내걸고 나라를 세움으로써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수난인가? 두 말할 것 없이 그 다하지 못한 책임 때문이요, 그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이조(李朝) 한 대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면 중축이 부러진 역사다. 축이 부러진 수레가 어찌 나갈 수 있을까? 정도 없이 국민 이상도 없이, 수레의 바퀴 같은 모든 제도 조직이 있다 한들 어떻게 역사의 진행이 있을 수 있을까? 수레의 가장 중요한 것이 축이 둣이 역사에 가장 요긴한 것도 민족정신이요 국민 이상이다.

중축 없는 바퀴를 밀면 밀수록 더 어지러이 이리 굴고 저리 굴듯이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 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수난이다.
(주석 2)

함석헌은 동명왕ㆍ혁거세ㆍ온조ㆍ왕건까지 관인대도(寬仁大度)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성계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사대국시를 비판한다.

중축이 부러진 역사! 그것이 욿은 제도를 밟아 바른 길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500년 동안의 일은 그저 어긋남이요. 거꾸러짐이요. 깨짐이다. 당초부터 이소사대(以小事大)를 표어로 삼고 된 구차한 건국인지라, 구차 아닌 것이 없다. 내 나라를 가지고도 남에게 줬다가 다시 빌어 받기에 힘이 들었고, 내 스스로 된 임금이건만 남의 승인을 얻기에 부끄럼이 그지 없었다. 그러면서도 두 세 임금과 신하를 내놓고는 분해 하지도 아쉬워 하지도 않고 멍청하고 있었다. (주석 3)

함석헌의 이 책에는 ‘조선’을 ‘이조’로 표기하는 등 용어 사용에서 ‘한계’도 없지 않다. 우리 역사에 ‘이조’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조선’을 ‘이조’ 또는 ‘이씨조선’ 라고 쓴 것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대한)이 한 왕조가 못 되고, ‘이씨’의 씨족사회라고 비하하는 뜻으로 이런 용어를 써 온 것이다. 교과서는 물론 역사학자들의 연구서적도 마찬가지였다. 함석헌 역시 이 책을 펴낼 때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E. H.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내용이나,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사관”은 알아도, 신채호의 “역사란 아(我)와 비야(非我)의 투쟁과정”이란 말은 잘 모른다. 또한 함석헌의 씨알사관에도 백지상태다.

지나간 것(과거)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금(현금)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기록하고 알려해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석 4)

다음은 연구가와 언론에서 많이 인용하는 부문이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주석 5)

이 책의 마지막 부문은 이렇게 장식된다.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6)

함석헌의 사관은 강단사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과거의 다수한 사가들이 공정한 역사를 쓰기 위하여 해석 없는 사실기록을 하다가 수십 백권의 납골당명록(納骨堂名錄) 만을 쓰고 만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역사는 아니다. (주석 7)

사실 기록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역사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납골당명록’ 만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함석헌은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과거란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이고, 역사적 사실이란 현재와의 관련에서 선택된 유의의(有意義)한 것이고, 의미 없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의 중요성은 그 의미에 있다. 따라서 역사서술은, 그 의미 있는 사실들을 인과관계적 상호연관의 연쇄 속에 통일적인 체계로 엮어야 한다. 그 체계는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부분들이 전체에서 유리될 수 없다.” (주석 8)


주석
1> <네째 판에 부치는 말>, <전집> 1, 18쪽.
2> <뜻으로 본 한국역사>, 223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227쪽.
4> 앞의 책, 229쪽.
5> 앞의 책, 302쪽.
6> 앞의 책, 452쪽.
7>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3쪽,
1954년판.
8> 노명식, <한국의 역사가 함석헌>, <한국사시민강좌> 제20집, 121쪽, 일조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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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6 08:00 김삼웅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흉상.ⓒ오마이뉴스 권우성

쿠데타세력은 <사상계>가 서점에 깔린지 4, 5일이 지나서 장준하와 취재부장 고성훈을 체포했다. 장준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의 집무실로 끌려갔다.
김종필은 장준하에게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따위 글을 도대체 어떤 저의로 갖다가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과업 수행과정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는 거 아니오? 이것을 싣게 된 목적과 경위를 말해보시오.”하고 마치 죄인 다루듯이 윽박질렀다.

장준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부탁하여 원고를 실었고, 남의 글을 전체를 보고 평가해야지 부분적인 대목을 가지고 말하느냐고 젊잖게 따졌다. 궁지에 몰린 김종필은 장도영(5·16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을 맡고, 장준하 대면 전날 반혁명죄로 구속 -필자)과 동향이라, 그의 사주를 받는 것이 아니냐고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김종필은 심지어 함석헌이 정치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생뚱한 질문을 하였고, 장준하가 그를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질타했다.

함석헌은 끌어가지 못했다. 3년 전 이승만 정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이유로 끌어다가 20일간 투옥하는 등 ‘서툰 짓’을 한 이래 그의 존재는 아무리 쿠데타세력이라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우뚝한 민중의, 씨알의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 - 김종필은 이승만보다는 한 수 위였다. 정치적으로 더욱 교활해진 것이다.

쿠데타 주체들 사이에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의 구속 여부를 둘러싸고 투표까지 했다는 설이 있다.

“노명식(전한림대 인문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이 때의 함석헌은 3년 전의 함석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 풍문으로는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을 구금할 것인가를 두고 투표를 했는데 3대 3으로 팽팽히 맞섰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회의에 참석하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부표를 던지는 바람에 찬성 3표, 반대 4표로 함석헌은 구금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풍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은 군에서 정군운동을 하다가 예편되어 실직상태일 때 장준하가 책임자로 있던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에 취직하겠다고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마침 장준하가 부재중이어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이를 두고 장준하는 뒷날 자신이 그때 김종필을 만나 직원으로 채용했었다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김종필은 젊은 시절 <사상계>를 읽었고, 함석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보 업무에 종사하다보니, 그를 구속하여 국제적으로 특히 미국 조야의 여론이 비등할 것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함석헌은 구속을 면했지만, 이로써 그의 용기와 저항정신, 정치평론의 입지와 위상은 따를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제까지는 주로 종교비평의 글을 많이 썼으나, 5ㆍ16 비판부터는 정치비평가의 일역을 도맡게 되었다. 쿠데타세력이 당초 ‘원대복귀’의 약속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정치비평의 논설을 쏟아냈다. 한 정치학자는 “함석헌이 사상ㆍ종교ㆍ철학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한 정치 사상가의 면모와 민주화에 앞장서서 반독재 투쟁을 한 정치행동가로서의 행보 외에도,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 등에 게재한 글을 통해 정치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선구적으로 시도하였다고 본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정치평론은 시비곡직을 떠나서 성역을 두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를 피해가거나 둔사로 어물쩍 넘어가는 여타의 식자들과는 달랐다. 이승만ㆍ박정희를 표적으로 삼았다. 감히 따르기 어려운 일을 그는 해냈다. <할 말이 있다>와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독재자와 군부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이었다.



주석
31> 장준하, <사상계지수난사>, <장준하문집> 3, 사상, 1985, 32쪽.
32> 김용준, 앞의 책, 143쪽.
33> 이동수, <함석헌과 정치평론>, <한국정치학 회보>, 2001년 겨울호,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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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

013/01/05 08:00 김삼웅

 

 

 

4ㆍ19 뒤 한 때의 혼란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혼란상이었다. 일부 학생과 혁신계의 과도한 주장도 있었지만,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차츰 진정되어갔다. 연말부터는 정국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민주당의 분당사태로 장면 정부가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군사쿠데타의 요인이 될 수는 없다.

함석헌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1961년 5월 16일,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반란군의 주모자 박정희가 일본군 다카키 마사오인 것 같다는 장준하의 말을 듣고는 분노와 함께 허탈감을 가누기 어려웠다. 반란군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권을 장악, 4월혁명으로 태어난 장면 정부를 타도했다. 쿠데타를 첫 모의한 시점은 1960년 9월 10일이다. 이들은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가 좌절되고, 5월 12일로 연기했다가 16일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반란군은 최고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입법ㆍ행정권과 사법의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국회ㆍ정당ㆍ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미군정 3년과 이승만 12년 독재에 시달려온 국민은 4월혁명으로 짧은 기간이나마 모처럼 자유를 찾았다가 1년여 만에 다시 포악한 군사독재를 맞게 되었다. 언론은 사전 검열로 군사반란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언론인ㆍ지식인들이 겁을 먹고 비판은커녕 사실 보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였다.

함석헌은 절망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일본 군부의 정치개입과 군국주의가 어떻게 득세하고, 얼마나 폐악을 저질렀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감이 더욱 깊었다. <사상계>는 6월호 제작이 거의 진행된 와중에 5ㆍ16을 겪으면서 권두언과 화보 그리고 편집후기에 쿠데타의 내용이 실렸다.

필자의 주관인지는 몰라도 <사상계> 15년의 역사에서 1961년 6월호의 권두언, 화보, 편집후기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화보 <혁명 새벽에 오다>에서는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물사진과 함께 24컷으로 장식했다. 1년 여 전 “민중의 승리 기념호”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기명으로 실린 권두언 <5ㆍ16혁명과 민족의 진로>는 아무리 계엄하의 상황이라 해도 이것이 과연 <사상계>의 권두언일까 싶을 정도의 글이다. (주석 25)

박정희 추종자들은 이 대목을 들어 장준하도 5ㆍ16쿠데타를 지지했다고 선전한다. ‘오해’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합법 정권이 총칼로 전복되고, 정부 각료를 비롯하여 수천 명이 갖가지 이유로 체포ㆍ구금되고 국회가 해산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 장준하나 <사상계> 편집위원들이라고 어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준하와 <사상계>의 일탈은 오래가지 않았다. 7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회복하여 군사반란 세력에 포문을 열었다. 함석헌이 저격수로 나섰다. 7월호 권두논문으로 36쪽에서 47쪽까지에 실린 200자 100매 분량의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란군 세력의 서릿발치는 계엄하에서 쓰이고 게재되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각오하고 글을 쓰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결심을 하고 실었다.

글은 어떤 내용인가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썼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일제 패망 뒤에 광복군이 되거나, 해방 후 독립만세를 부른 것과 비유된다.
함석헌은 논설의 말미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

“3년 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 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 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주석 26)

함석헌은 먼저 5ㆍ16쿠데타가 가져온 공포분위기를 지적한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인이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칼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 난 국민은 아무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나게 하여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 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주석 27)

함석헌은 5ㆍ16을 준열하게 비판했다. 4월의 학생들이 잎이라면 5월의 군인들은 꽃이라는 비유를 들어 조속히 부대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최근까지 박정희 추종자와 사이비 언론인 중에는, 함석헌이 5ㆍ16을 꽃에 비유할 정도로 지지했노라는 허튼 언설을 편다.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거두절미한 것이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ㆍ16은 꽃 한 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잎은 영원히 남아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5ㆍ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혀져야 한다. 노량진두에서 많지는 않지만 흐른 피는, 그 알고 모르고를 물을 것 없이 전국민이 스스로 흘려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하여 한 번 잠깐 할 것이요, 될수록은 없어야 하는 것이요, 있다 하여도 곧 잊혀야 하는 것이다. (주석 28)

함석헌은 5ㆍ16의 군사반란을 결코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하지 못한다. 어떤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선의로 했다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의는 아니다. (주석 29)

한 사학자는 함석헌의 이 글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놨다.

“그 잘못을 꾸짖는 준엄한 질타이기는 하나 그저 질타에 그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타이르듯이 무엇이 잘못이며 그 잘못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가를 누누이 설명한다. 쿠데타는 크게 잘못된 불장난이지만, 이제는 어차피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첨에 약속한 대로 하루라도 속히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쿠데타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하였지만, 혁명이 무엇인지나 알고 했느냐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주석 30)

함석헌의 글이 세상에 나오면서 민중은 막혔던 숨통이 다소나마 터지는 듯한 쾌감을 느끼고, 지식인ㆍ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처신에 몸 둘 바를 몰라했으며, 쿠데타 주역들은 분개했다.


주석
25> 김삼웅, <장준하 평전>, 423쪽, 시대의 창, 2009.
26> <사상계>, 1961년 7월호.
27> <사상계>, 1961년 7월호.
28> 앞과 같음.
29> 앞의 책.
30>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 608쪽, 인간과 자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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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필화사건 이후 정열적으로 글을 썼다.
주로 <사상계>의 지면이지만 <사조(思潮)>와 <신태양>, <새벽> 등 월간지에도 기고하였다. <나의 인생시초(詩抄)>, <사자냐 아메바냐>, <새 삶의 길>, <정치와 종교>, <우리가 어찌할꼬>, <겨울이 만일 온다면>, <때가 오고 있다>, <물 아래서 올라와서>, <나라는 망하고>, <3ㆍ1정신>,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백두산 호랑이>, <남강ㆍ도산ㆍ고당>, <사모님론>, <이단자가 되기까지>, <내 것이냐 카에자의 것이냐>, <한배움>, <38선을 넘나들어>, <들사람 얼(야인정신)>, <씨알의 설움>, <평화적 공존은 가능한가>, <간디의 아슈람>, <에밀레> 등이다. <사상계>에 쓴 글은 일종의 자서전적인 글이다. (주석 18)

1959년 1월호 <새벽>에 쓴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씨알의 꿈틀거림을 내다보는 예언서와 같은 글이었다. 이승만의 노욕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보안법 개정을 통해 비판세력을 탄압하면서 1959년 4월 30일 야당지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사망했는데도 부통령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조기에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야당 유세장에 못가도록 일요일에 등교시킨 데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1960년 초부터 3월 1일까지 44일 동안 자신과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을 벌였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의 수단으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단식에 앞서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취재 기자의 전언이다.

단식으로 함 선생의 용모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 우선 머리와 수염을 깎은 것이다. 그리고 어딘지 핏기가 가시고 피로가 느껴진다. “철저히 단식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 설탕물도 먹구….” 결국 문제는 ‘마음이 맑아지고’ 참회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시며 앞으로도 글도 쓰지 않고 참회의 고행을 계속함으로 2개월 동안은 글도 안 쓰고 발표도 안 하실 작정이라고 하시며 극구 “거 좀 내 얘기 안 나오게 해줘! 글이 문제야 말이 문제야, 난 죄인이야!” - 함 선생의 간곡한 말씀에 기자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하시던 함 선생, 모 신문을 읽으시더니, “학원의 자유, 정치 도구화 반대라, 그래 일요일에 학교 나오라는 사람이 나쁘지, 건 잘못했구만, 학생이 어디 나쁜가. 젊은 기백으로 의당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 사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한심해, 쩍 하면 도미(渡美)한다 빽찾구. 학생 나무랄 것 있나. 교육자가 나빠. 학생들 말이 교수들의 강의에 환멸을 느낀대요. 교수들이 사상이 있어야지.
(주석 19)

함석헌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가 없는 3ㆍ15 관권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에 항의하는 마산의거에 이어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온 함석헌은 종로 2가 100번지 사상계사에서 장준하와 함께 시위대열을 지켜보았다.

“4월 19일 두 분(함석헌과 장준하-필자)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한청빌딩에서 지켜보시던 모습은 묵묵히 역사의 격류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주석 20)

4ㆍ19날 시위 시민ㆍ학생들은 종로 화신 앞에서 종로 5가까지 한 길을 가득 메웠을 적에 한청빌딩의 사상계 깃발을 보고 격려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답례하면서, 이름 없는 민초들이, 씨알들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학생과 시민들은 이승만 12년 독재와 자유당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체세력이 없는 혁명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의 몫이 되었다. 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당이 되면서 분열하고 무능함을 내보였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1년 1월호에 <국민감정과 혁명완수>를 썼다. 혁명 뒤의 혼란과 민주당의 분열상에 분노하는 글이다.

“4ㆍ19혁명은 실패다. 허정 과도정부는 그만두고 장면의 정부는 이날까지 해논 것이 무엇인가? 당파싸움하는 동안에 겨울은 다 되고, 생산기관 하나 신통히 돌아가는 것 없고, 민중은 못 살겠다고만 하는데, 농 안에 가뒀던 쥐는 다 도망가고…." (주석 21)

‘농 안에 가뒀던 쥐’는 이승만의 하와이 탈출과 부정선거 원흉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법망을 피한 것을 지적한 내용이다.

새로 쥐를 잡지는 못하나마, 잡아 준 쥐도 놓쳐? 나는 사형 폐지 주장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원흉이라고 죽여야 한다는 것 아니요, 또 나 자신이 이승만이요 자유당인 판에, 감히 애국심의 전매특허나 하는 듯 엄벌주의 주장할 양심도 없지만, 정권을 쥐고 민중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으로써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 하면 깨끗이 손을 떼는 것이고, 놔주면 놔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음 분명히 처리를 했어야지,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다 놓쳐버렸다. 대체 왜 다 잡아 논 쥐를 못먹나? 이 고양이가 벌써 늙었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도둑질을 해 배가 불렀나?
(주석 22)

함석헌은 4ㆍ19가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를 ‘헛총’이었기 때문이라 비유하였다. 역설논법이다. 당시 세간에 ‘헛총’이란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4ㆍ19는 실패다. 왜 실패했나?
헛총이었기 때문이다. 4ㆍ19혁명은 헛총이다. 헛총 쏜 학생들이 잘못이란 말은 아니다. 헛총 쏜 것 잘했지. 마땅히 헛총이어야지. 헛총의 뜻은 무엇인가?

이 도둑놈들아 물러가라.
아니 물러가면 쏜다.
우리게 정말 총알 있다.
그러나 너희를 사람으로 본다.

하는 뜻이 들어 있다. 헛총을 쏘면 사람으로 대접한 것이요, 알을 넣어서 쏘면 짐승으로 여긴 것이다. 마음은 헛총에 맞아 살아나는 것이요, 살은 알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허칙실(虛則實)이요 실칙허(實則虛)다. 학생들 잘했다.

그런데 왜 실패했나? 쏜 것은 도둑놈 쫓으려고 쏜 것인데, 앞에 있던 몇 놈은 사람다운 정신을 차려서는 아니지만 앞에 있었던 만큼 혼쌀이 나서 도망을 쳤는데, 뒤에 섰고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것들도 맘은 같은 도둑인지라 알이 아니든 줄 알자 기어 든 것이다.
(주석 23)

함석헌은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완수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말미에서 예언가와 같은 말을 남긴다.

“길가의 막돌을 되는대로 던지는 듯 한 이 글을 다 썼는데 때 아닌 겨울 장마가 한 주일이냐 계속하다가 해가 나나보다 했더니 또 눈을 뿌린다. 그것은 무슨 예언인가?” (주석 24)


주석
18> 정현필 정리, <함석헌 저작 연대별 분류>, <함석헌 연구>, 제3권 제1호, 2012.
19> S기(記), <단식 44일 끝나다>, <세계>, 1960년 4월호.
20> 이문휘, <문화강연회 가치를 높이 들고>,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50년과 장준하>, 1995.
21> <사상계>, 1961년 1월호, 권두논단.
22> 앞과 같음.
23> 앞과 같음.
24>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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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3 08:00 김삼웅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말기적인 전재를 일삼았다.
58년 연초 형법의 언론보도 규제 조항으로 언론기본권을 제약하고,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당 간부 7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5월 2일 실시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관권이 동원된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126석(민주당 79석)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함석헌의 필봉은 이 지점에서 더욱 날을 세운다.

선거를 하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는 팔고 억지를 쓰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 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 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나? 칼은 있기는 있나? 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치한 벼슬아치들이 칼이 있을까? 정육점의 칼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 (주석 14)

이 글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정부는 함석헌을 구속했다. 8월 8일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구속 이유는 남한을 ‘꼭두각시’라 하여 정부를 부정하는 이적행위를 했다고 몰았다. 20대의 젊은 담당 형사는 함석헌을 수사하면서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았다. 자식보다 어린 경찰의 만행 앞에 참담함을 가누기 어려웠다.

트레이드마크처럼된 수염은 소련군에 잡혀있을 때 깎지 못하고, 38선을 넘으면서 그대로 두었던 것이 자라서 상징처럼 되었다. 경찰은 일제나 소련군 치하와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일선 형사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이문동’과 ‘남산’, 전두환 정권의 ‘남영동’이 집권자의 의지의 발현이듯이 자유당 정권기의 경찰은 이승만의 수족이었다.

함석헌은 ‘꼭두각시’의 두목을 비롯하여 수족들의 사냥감이 되었으나, 민중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사상계>는 불티나게 팔렸다. 정의와 진실에 목말라했던 씨알들에게 모처럼 들려주는 청량수였다. 원래 이 글에는 제목이 없었던 것을 편집자 계창호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붙인 것이다.
(주석 15)

그런데 사장 장준하의 이름으로 쓴 <사상계> 8월호 권두언 말미에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우리 겨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깊이 반성할 때는 왔다고 본다. 의(義)의 씨를 뿌려야 의의 열매는 거두어 진다”고 쓴 것으로 보아 장준하의 뜻이 배인 것 같다. <사상계> 8월호에는 ‘실존주의 특집’과 주요한의 <우리의 비원>, 유기천의 <자유사회>, 김팔봉의 <우리가 걸어온 30년> 등 읽을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단연 돋보이는 글은 함석헌의 이 논설이었다.

함석헌은 검찰의 불기소처분으로 20일 만에 서울시경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딱히 보안법으로 얽을 조항이 없었고 국민의 비등한 여론때문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이승만 정권은 농성중인 야당 의원들을(무술경위들을 동원하여) 지하실에 감금하고 신국가보안법을 변칙 처리했다. 내용 중에는 “허위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하는 행위”를 끼워넣었다. 함석헌 류의 정부 비판을 봉쇄하려는 언론탄압용 조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함석헌은 정치평론, 바꿔 말해서 독재비판의 험난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석방된 함석헌은 9월호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를 통해 다시 소신을 밝혔다. “정부를 비난했기 때문에 정부를 부인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게 무슨 정부요, 관청이냐?’ 하는 말을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 들으면 물론 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말을 중공이나 소련보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욕을 하는 것은 하리만큼 사랑하고 믿고 기대하기 때문 아닌가?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 받는 자보다 도량이 넓고 커야 할 것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투옥에도 필화에도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충견이 된 지식인과 언론인의 핏발 선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피력한다.

나는 앞으로도 싸움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잘못이 있다면 나 자신이나 남이나 우리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다. 그것이 나의 나라에 대한 충성이요 동포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결코 감정으로, 미움으로는 아니 하기로 맹세한다. 감히 장담을 하리오마는 적어도 그리하고자 힘쓸 것이요, 하나님이 그 실력 주시기를 겸손히 빌 것이다. (주석 17)

이 해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로 월남 이상재 언론상을 받았다.
글을 문제삼아 감옥에 가두는 권력이 있는가 하면 상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유당 독재 12년 동안에 함석헌만큼 이승만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는 일제 36년과 군정ㆍ전쟁ㆍ이승만 독재를 겪으면서 몸을 사리고 순치된 지식인ㆍ언론인들의 비판정신을 일깨우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14> 앞의 책.
15> 계창호, <젊은 날을 불사른 사상계>, 장준하 선생 추모문집위원회 편,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나남출판, 1995.
16> <사상계>, 1958년 9월호.
17>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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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

013/01/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농사꾼 생활을 한 지 1년 여 만인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썼다. 6ㆍ25전쟁 발발 8주년을 되돌아보면서 한국 사회를 진단해달라는 장준하의 주문이었다. 그래서 부제를 “6ㆍ25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달았다.

이 글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로 기독교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지 2년여 만에, <할 말이 있다>는 평론으로 한국사회에 충격을 준 지 1년 반 만에, 이번에는 기독교계의 울타리를 넘어 전사회적으로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 타격을 준 명논설이었다. 대 정치발언이고 본격적인 첫 정치평론에 속한다. 이 글을 통해 함석헌은 민중 속으로 들어오고, 씨알의 대변인이 되고, 독재 권력으로부터 1급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도합 여섯번째의 투옥이고, 남한에서는 첫번째 옥고가 되었다. 이승만 시대의 대표적 필화사건이고 <사상계>가 날개돋힌 듯이 팔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구어체 문장 즉 ‘함석헌 문체’로 쓴 첫 정치평론이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한자(문)에 중독되면서 고유한 민족언어를 상실하게 되었다. 지배층ㆍ지식인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조선 중기에 허균과 김만중이 한글로 소설을 썼는가 하면, 후기에는 일군의 중인ㆍ서얼들이 패관체(稗官體)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쓰인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런데 호학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패관체를 쓰는 사람을 문책하고, 향후 문체가 불순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전통적인 한문체의 글쓰기만 허용됨으로써 이후에는 <열하일기>와 같은 책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뒤에는 일본식 문체와 영어식 문체까지 극성을 부리면서 우리 말, 우리 글의 문체는 설 땅을 찾지 못하였다. 함석헌이 <할 말이 있다>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부터 본격적인 구어체 문장, 씨알의 언어를 되찾아 쓰게 되었다.

6ㆍ25 싸움은 아직 우리 목에 씌워져 있는 올가미요 목구멍에 걸려 있는 불덩이다. 어떤 불덩이도 삼켜져 목구멍을 내려가면 되건만 이것은 아직 목구멍에 걸려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므로 밥을 먹을 수 없고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울 수도 없는 것이다. 어서 이것을 삼켜 내려야 한다. 혹은 이 올가미를 벗어버려야 한다. (주석 11)

6ㆍ25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가 처한 질곡과 올가미를 비판한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집에서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소통할 수는 있지 않았나? 지금 그것도 못해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ㆍ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ㆍ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는가?

이 부문이 이승만의 심기를 거슬리게 되고,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아가는 충견들의 충성심을 발로하게 만들었다. 이승만의 심기를 건드린 대목이 신랄하다.

그렇게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날 아침까지 몰랐으니 정말 몰랐던가? 알고도 일부러 두었는가? 몰랐다면 성의없고 어리석고, 알았다면 국민을 팔아넘긴 악질이다. 그러고는 밤이 깊도록 서울을 절대로 아니 버린다고 열 번 스무 번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저희들도 서로 살겠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피란한 것은 아니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 그저 나도 너도 피란가서 다시 거기서 만났으니 또 사무라고 본 것 뿐이었다. 민중이 신용 아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석 12)

자유당 전성기에 이승만의 실정을 이만큼 정곡을 찔러 비판한 논객은 일찌기 없었다. 이 글이 처음이었다. 북한군은 6월 25일 새벽 4시, 10개 사단 병력으로 24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침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에야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보고를 받았다. 6시간 30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서울 사수’의 거짓 방송을 녹음으로 틀어놓고 6월 27일 새벽 2시에 국회에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줄행랑을 쳤다. 함석헌이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비판은 이어진다.

전쟁이 지나간 오후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은 진 것 아닌가? 어찌 승전 축하를 할까?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 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노자(老子)는 전쟁에 이기면 상례(喪禮)로 처한다 했건마는, 하기는 제2국민병 사건을 만들어 내고 졸병의 옷ㆍ밥을 깎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과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일까? (주석 13)


주석
11>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년 8월호.
12> 앞과 같음.
13>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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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57년 3월 충남 천안으로 이주하였다.
30년간(당시) 이발사로 일하면서 농지를 사모은 정만수가 농장을 만들어서 경영을 맡긴 것이다. 그는 일제말기 천안 자기 집에서 농촌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치다가 위험인물로 찍혀 1년 간 옥고 끝에 해방되던 해 3월에 풀려난 기독교인이다.

6ㆍ25전쟁 때에는 부산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여 마침 함석헌의 강의를 듣게 되고 이어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읽었다. 이어서 부산 YMCA에서 함석헌의 <성경>, <노자>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종교와 사상에 뜻을 같이 하였다.

전후에는 서울의 중앙대, 고대 등 대학구내에서 이발사를 하면서 틈틈이 땅을 사모아 농장을 조성하여 함석헌을 초청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20년간 더 이발사를 하였다.

나는 일생을 남의 머리를 깎으며 살아왔다. 수 없는 사람의 머리가 내 손을 거쳐 갔지만 함 선생만한 머리를 지닌 사람이 없구나! 지금도 선생은 꼭 내손에 의해 이발을 하고 가신다. 나는 이 천직처럼 살아온 이발로 이제 선생을 이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람으로 만족한다. (주석 7)

함석헌은 정만수의 제안을 처음에는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선량한 사람이 평생 이발을 하여 마련한 농장을 인수하여 경영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부탁이 워낙 강하고 진정성이 있어서 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 농장을 간디가 요하네스버그에서 톨스토이 농장을 운영하면서 60명 동지들과 일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해 보잔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장이름을 ‘씨알농장’이라 지었다. ‘씨알’이란 이름의 본격 사용은 이때가 처음이다. 물론 이 용어는 유영모가 ‘창안’한 것이다.

“언젠가 대학(大學) 강의를 하시다가 ‘대학지도 재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大學之道 在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풀이하시는데 ‘한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뭄에 있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민(民)을 씨알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이 참 좋아서 기회 있는대로 써 와서 이제 10년이 넘습니다.” (주석 8)

함석헌은 이 농장에 ‘씨알농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농장은 본래 땅주인이던 정만수 님이 30년 이발장이로 푼푼이 모아 얻은 돈으로 장차 어두운 농촌을 비추는 등불을 켜보자는 뜻으로 남 돌아도 아니 보는 묵은 데를 사서 해방 직후 과일 나무를 심은 것으로 시작됐고, 그후 김병태 님이 그것을 맡아 그 목적으로 강당까지 짓기 시작했던 것을 경영이 어려워져 그만두게 될 형편에 빠져 내가 맡게 되었다. 정성은 물론 모자라고 사업의 재주가 도무지 없는 나로서 스스로 그 적당치 않은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은, 하나는 정님(정만수-필자)의 막아낼 수 없는 간청이요, 하나는 오산시절 이래로 그리는 나의 농촌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 (주석 9)

씨알농장의 운영은 쉽지가 않았다. 본래 농민이 아닌 그로서 그곳 농민들과 어울리기 어려웠고, 당시 농촌 현실에서 집단형 농업이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방 농민과는 친구가 됐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못하는 것은 내 죄다.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글공부 한 것이 죄가 되어 이러는 듯하다.(…) 우리 살림이라야 별것 없다. 4시면 일어나 찬물로 잘 때 씻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나 부르고 한 시간 명상이나 하고 보리밥에 배를 불린 다음엔 어둡도록 땅 파는 일이요, 짐승에 모이 주는 일이요, 10시에는 내일 해가 틀림없이 머리 위에 뜰 것을 믿고 누더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친구가 있다면 봄에는 새벽 4시부터 반주를 해주는 푸른 공중의 종달새요, 가을엔 밤이 늦도록 노래하는 벽 틈의 귀뚜라미다.
(주석 10)

함석헌은 씨알농장에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농삿일을 하고 닭을 길렀다. 평평한 농지에는 보리ㆍ고구마ㆍ콩을 심고, 비탈진 땅엔 복숭아와 사과 등 과수나무를 심었다. 청년 몇 명이 참여하여 일손을 돕고, 밤이면 이들에게 강의하고 토론을 하였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뒷날 이 책을 번역하여 펴냈다.


주석
7> 정만수, <존경하는 함석헌선생>, <세계>, 1960년 4월호.
8> 함석헌, <씨알>, <씨알의 소리>, 창간호, 1970년 4월호.
9> 함석헌, <씨알의 설움>, <전집> 4, 72쪽.
10> 앞의 책, 73~74쪽.


 

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2/12/31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자신의 존재와 <사상계>의 위상을 한층 돋보이게 한 글은 1957년 3월호에 쓴 <할 말이 있다>라는 글이다. ‘할 말’은 주권재민의 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지만,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부터 국민들은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권력은 반드시 변칙으로 종말을 고하고 만다.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다가 망했다. 함석헌의 이 논설은 <사상계>를 통한 최초의 대사회 발언이었다. 앞서 소개한 몇 편의 글이 대부분 기독교와 종교, 윤리 차원의 문제 제기였다면 이번 논설은 시사문제에 대한 함석헌의 본격적인 첫번째 노호(怒號)이었다.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베어도 또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풀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이 없이 나는 풀, 너는 조물주의 명함 아니냐? 푸른 너를 먹고 꾀꼬리는 노래하고 사자는 부르짖고, 썩어진 물에서나 마른 모래밭에서나 다름 없는 향기를 너는 뿜어내니 너는 신비의 것 아니냐?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오만 있어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할 말이 없어서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는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리집 같이 서 있는 학교 위에, 날아가는 돈 잡는다고 구더기 떼같이 밀려가는 군중들 위에, 그 군중을 또 박차고 먼지를 공중에 날리고 바람 같이 지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미친 년놈들 위에, 또 그 모든 것 다 보면서 나라 망하는 줄은 모르고 재미난 구경한다고 극장 앞에 입을 헤벌리고 줄지어 섰는 저 미친 젊은 놈 젊은 년들 위에 제발 구정물이라도 끼어 얹어 줍시사!

이렇게 되는 역사에 무슨 잠꼬대라고 언론 취재가 무어냐? 저와 조금 다르면 공산당이라, 비국민이라, 이단이라! 제발 그런 소리 맙시사! 시대착오다. 역사의 거꾸로 감이다. 하늘 명령 거스름이다. 그것으로 망한 우리나라 아닌가? 제발 이 민중이 할 말을 하게 하라! 마이다스야 벌써 죽은지가 오래지 않나? 나는 죽어도 말은 아니할 수 없다.

시시비비의 판단이야 없지 않지만 있는 소감을 발표했다가는 언제 판국이 바뀌어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알기 때문에 구차한 목숨 하나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벙어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민중이 무표정이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더 꺼림없이 하게 된다. 그러면 비겁한 민중은 더욱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 이리하여 원인이 결과를 낳고 결과가 원인이 되어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무언극의 역사가 엮어졌다. 참혹하지 않은가. 비통하지 않은가.

함석헌의 이 평론은 한국사회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다음은 장준하의 회상이다.

이 글은 <사상계>를 돋보이게 할 글이요, 함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놀라움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한 글이다. …각계의 반응은 충격적으로 나타났다. 시원하고 통쾌한 글이라는 사람, 독설이 심하다는 사람, 또 너무 독선적이라고 하는 사람, 하여간 우리 인텔리 사회에 크나큰 화제를 던진 글임에 틀림없었다. 1956년 1월호에 발표한 함 선생님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에서 크게 분개하여 <신세계>지에 반박 논문을 썼던 윤형중 신부는 이 글 <할 말이 있다>에 대한 반박 논문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를 기고해 왔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1)

함석헌의 이 글은 ‘논쟁’의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한국가톨릭을 대변해 온 윤형중 신부가 신랄한 반론을 제시하여 <사상계> 지상을 통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윤형중의 반론은 5월호 <사상계>에 게재되었다. 윤형중은 함석헌의 글을 극렬하게 반박한다. 심지어 ‘공산당의 오열(五列) 냄새’가 난다고까지 극언했다.

함 선생이 신부가 안 되겠다니 천만다행이다. 설령 신부가 되겠다 할지라도 천주교회는 ‘모가지가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함 선생 같은 욕설가, 험구가, 모든 것을 혼동시만 하여 도무지 분별할 줄 모르는 그런 인물을 신부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주석 2)

복음서를 손에 들고서 천당 지옥도 믿지 않는 미지근한 함 선생이요, 현실의 모든 방면에 대하여 그처럼 지독한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는 함 선생이면 복음서와 함께 그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현행 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에 본격적으로 입당함이 여하(如何)? (주석 3)

함석헌과 윤형중의 논전은 이어졌다. 함석헌이 <사상계> 1957년 6월호에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글을 통해 반론을 폈다. 그러나 글의 형식은 윤 신부를 직접 겨냥하지 않고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천하의 신부가 다 떠들어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들은 다 교회라는 제도 밑에, 교황이라는 낮도깨비 앞에 제 인격의 자존성을 내놓고, 의지의 자유를 빼앗기고, 판단의 자유를 팔아버린 사람들이니, ‘제 말’이라고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주석 4)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혀두고자 하는 말이 있다. 함석헌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형중은 뒷날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로서 유신체제와 싸우면서 함석헌과 ‘화해’하고 1979년 6월 15일 별세했다. 유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민주회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함석헌의 이 글에서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사상계>가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 중에서 일부를 삭제했다는 점이다.

“나는 윤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왜 없냐? 공개토론 하자는 데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비겁한 일인 듯 하나 겁이 나서는 아니다.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잡지사가 깎았다는 부분은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말이었다. 나는 사실은 내 성의껏 말한 담엔 어떤 일을 당해도 좋다 생각했다. 군인ㆍ경찰ㆍ위력도 두려워 하고 싶지 않은 데 신부 한 사람 두려워 할까?”

<사상계>가 함석헌의 글에서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부분을 삭제하고 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만 독재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라 ‘역린(逆鱗)’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준하는 아직 이승만 독재체제에 정면 도전을 머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저자)는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삭제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참으로 놀랐다.

함석헌의 반론에 대해 윤형중의 재반론이 <사상계> 7월호에 게재되었다. 그러는 동안 <사상계>는 시중의 화제가 되고 공전의 판매 부수를 늘리게 되었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5)

함석헌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작은 한옥을 지어 입주했다. 1956년의 일이다. ‘원효로 4가’는 이후 한국 인권운동의 거점이 되고, 저항언론 <씨알의 소리> 편집실이 되었다. 한 번의 대종교 발언으로 그의 글과 말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상계>는 거듭 거의 글을 청해 실었다. 기독교 비판 논설이 예상 외의 반향을 일으키고, 책의 판매도 크게 증가하면서 단골 필자로 모시게 되었다.

<사상계>와 인연을 맺게된 함석헌은 같은 해 4월호와 5월호에 <새 윤리>를 상하에 걸쳐 발표하고, 9월호에는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될 것인가>라는 좌담회에 유진오ㆍ백낙준ㆍ김필봉ㆍ윤일선과 함께 참가했다. 당대의 명사들이다.

이어서 10월호에 <진리에의 향수>, 12월호에 <사상과 실천>을 썼다. 그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했고, 그만큼 <사상계>의 지면은 충실해지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함석헌의 꿈은 사회적 명사가 되는 것도, 논객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청년을 키우면서 소박ㆍ단순하게 사는 것이었다. 평양송산농사학원을 운영한 것도 그런 꿈에서였다. 1941년 가을에는 단신으로 만주 길림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길림성 참사관으로 일하는 동생 함석창을 만나는 일과, 만주 어디에 묵은 땅을 구해서 이상촌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꿈이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이래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상촌ㆍ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오랜 열망이 있었다. 노자의 ‘이상사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칼빈의 ‘기독교국가’, 박지원의 ‘허생전’, 푸리에의 ‘노동사회의 유토피아’, 아나키스트들의 ‘절대공동체’가 이에 속한다.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중국과 몽골, 러시아 지역에 이상촌을 건설하고, 군사를 키워 일제와 싸우려는 비전을 제시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함석헌은 만주에서 실망하고 돌아왔다. 연암 박지원이 1780년 건륭제 축하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중원을 지나면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하며 목을 놓아 통곡했다는 사력을 떠올렸을 것이다.

일제 말년에 만주를 여행한 일이 있는데, 혼자서 울음이 북받쳐 나와 참지 못한 일이 있다. 하나는 그 무연한 벌판을 보니 “원, 이놈들이 동지사(冬至使)랍시고 적어도 해마다 한 두 차례는 이 벌판을 봤을 텐데 이것 한 번 도로 찾아 살아보잔 생각은 못하였단 말이냐?” 하는 분한 생각에서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중국놈들, 만주놈이 일본 흉내 내려고 하는 꼴을 보고 “우리 꼴도 저 꼴이겠구나”하는 슬픈 생각에서였다. (주석 6)


주석
1> 장준하, <사상계지 수난사>, <장준하문집> 3, 134쪽.
2> 윤형중,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 <사상계>, 1957년 5월호, 45쪽.
3> 앞의 책, 49쪽.
4> <사상계>, 1957년 6월호, 282~283쪽.
5> 이 부문, 김삼웅, <장준하 평전>, 354~360쪽, 인용.
6>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27쪽.


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30 08:00 김삼웅

 

 

양복차림의 함석헌 선생(50년대)

함석헌은 기독교의 교파싸움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비판한다.

장로회가 2분(二分)이 되고 감리회가 2분이 되고 한 교회당 안에서 두 파가 대립해 예배를 드리고 경관을 출동시키고 교회당 차압을 하고, 천주교는 우리는 그런 싸움 아니한다 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마치 국민의 불평을 식민지전으로 전가시켜 겨우 통일을 유지해 가는 제국주의 국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다른 교파는 다 열교(裂敎)라는 것을 밤낮 선전해서만 유지되어가는 통일이다. 개신파에서 개종해 온 것을 선전 광고하는 것은 그것이 교파심 아니고 무엇인가?

종파 싸움은 기독교 저희끼리의 싸움을 하는 것은 외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근본으로 하면 일체 현세적인 것을 상대로 싸우잔 것인데 그 근본정신이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그칠 날이 없다. 그런데 외적이 없다는 것은 타협한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타협을 한 것은 속았기 때문이다. 교의 파쟁(派爭)이 일본시대에는 별로 없었다. 공산침략이 심할 때는 천주교와 개신파도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대적이 좀 멀어질 때 종파싸움은 맹렬히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인가? 대적을 전연 밖에서만 보았고 안에 보지 못한 것이다. 속았다는 것은 그것이다.

함석헌은 당시에 급속히 늘어나는 교회당의 문제에 대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한국기독교는 이승만ㆍ김영삼ㆍ이명박 장로 3인을 대통령으로 ‘배출’했다.

최근에 와서 오는 현상으로 교회당이 날마다 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 먼저 교회당은 무엇으로 그처럼 늘어갈까? 여러 말할 것 없이 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도 이때껏 어디서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보냈다는 것은 못들었고 인간이 지은 것들인데 인간이 지었다면 어디서 났거나 돈 있어서 된 것이지 건축자가 그저 지어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해방 후 날로 더 잘못되어가는 경제에 교회에는 어떻게 그런 돈이 있을까?

교회 경영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무슨 힘으로 되나? 소위 장로급이 중심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 장로란 결코 신앙의 계급이 아니다. 돈의 계급이지. 돈 있는 사람, 교회경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장로로 되도록 하는 것이오. 지금 교파쟁이 대부분 그 장로급을 중심으로 하고 하는 일 아닌가? 그럼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맘몬의 교회인가? 기독교인은 속죄를 받은 결과 이런 것도 죄로 아니 느끼리만큼 강철 심장이 되는가?

함석헌은 이 논설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교회의 증상은 고혈압이라 진단할 수밖에 없다. 뚱뚱하고 혈색도 좋고 손발이 뜨끈뜨끈한 듯하나 그것이 정말 건강일까? 일찍이 노쇠하는 경향 아닌가? 그러기에 이렇게 혼란해 가는 사회를 보고도 아무 용기를 내지 못한다. (…)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죽지 않았다가 변화하려면 산 공기와 일광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같이 중압하는 교회당의 무게 밑에서도 생명의 씨가 살려면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마셔야 할 것이다.

<사상계> 주간 안병욱의 회상이다.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글이다. 이 글 때문에 <사상계>가 일약 수천 부가 증가했다. 저마다 다투어서 사 읽었고,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읽은 뒤에 소감도 여러가지였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신랄한 경고요, 또 선생님 자신의 기독교관을 적은 것이다. 무교회주의자인 함 선생은 이 글에서 프로테스탄트도 공격했고 가톨릭도 내리쳤다. 기독교인들은 분개했고, 비 기독교인들은 쾌재를 외쳤다.
(주석 24)

장준하는 이 글이 발표된 뒤 안병욱과 함께 신촌 전셋집으로 함석헌을 찾아가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대현동에서 내가 만난 함 선생님은 ‘퍽 수줍어하는 잘생긴 노인’이라는 인상이다. 그렇게 겸허한 노인이 그렇게 격렬하고 날카롭고 무서운 글을 쓰시나 하는 놀라움을 곁들게 하였다. 별로 말씀은 아니 하시고 곁에서 안병욱 형이 이것저것 묻는 말에도, “글쎄, 그럴까, 하기는” 등 비교적 모호한 말 한 두 마디씩을 남기실 뿐이었다. 내가 <사상계>의 발간 취지를 대강 말씀드리고 나서, 앞으로는 <사상계>를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잡지라고 생각하시고 계속하여 글을 써 주십사 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글쎄요”라는 말씀만 남기실 뿐이었다. (주석 25)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은 지지와 성원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반대와 폄훼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은 천주교 명동성당 신부 윤형중이었다. 그는 <신세계> 9월호에 함석헌이 “일부 기독교도의 비행이나 경거망동을 기독교 전체에 뒤집어씌우면서 침소봉대한다고 격렬하게 반박했다. 두 사람은 얼마 뒤 본격적인 논쟁을 벌인다.


주석
24> 안병욱, <옆에서 지켜본 사상계 12년>, <사상계>, 1965년 4월호, 265쪽.
25> 장준하, 앞의 글,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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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환도 후에 <말씀>이라는 신앙잡지에 많은 글을 썼다.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새 시대의 종교>, <말씀살이(시)> 등이다.
그리고 <편지>란 잡지에도 <영원히 불어 오고 가는 바람소리>, <맘의 나라>, <속죄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버리는 것이냐>, <간디의 죽음> 등을 썼다. 기독교 관련 잡지여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함석헌이 일반 국민, 시민을 상대로 한 글쓰기는 <사상계> 1956년 1월호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시작으로 한다. 이 글은 무명의 그를 일약 한국사회의 대논객으로 부각시켰다. 당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마각이 드러나고 있던 시점이다. 1954년 5.20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금권ㆍ폭력선거로 승리한 것을 계기로 11월에는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을 감행하여 이승만의 3선의 길을 텄다.

1955년 9월의 <대구매일신문>의 필화사건은 언론탄압의 전초였다.
이승만은 1956년 5월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종교ㆍ문화ㆍ예술 단체를 어용화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특히 기독교계의 어용ㆍ부패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함석헌의 대사회 비판은 기독교계를 향했다. 그만큼 사랑하고 아낀 까닭에 아프게 때렸다. 그는 그동안 대사회 발언을 삼가고 있었다. 천성과 성품이 누구를 욕하거나 나무라지 못한 까닭이다.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비판에 나선 것은 역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을 것이다.
 

1959.9 사상계 사무실에서 시드니후크 박사, 장준하와 함께



1950~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사상계>는 지식인, 대학생의 필독서가 되고, 마치 지성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사상계>가 그만큼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 사장 장준하의 잡지에 대한 열정과 정론정신이 바탕이 되었지만, 함석헌의 날카로우면서도 천의무봉한 글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사상계> 1956년 1월호는 김형석 연세대 교수의 <인간의학과 현대철학>, 김성식 고대교수의 <대학과 세계정신>, 이숭녕 서울대 교수의 <나의 독서관> 등 꽤 읽을거리가 있는 편집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번 호에서 잡지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게 되고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함석헌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당시 함석헌은 무명인이었다. 서울 신촌에서 양계장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퀘이커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사상계>의 주간이던 안병욱이 함석헌의 인물됨을 듣고 장준하 사장에게 천거하여 글을 쓰게 한 것이 <한국 기독교는…>이었다. 이 글이 시쳇말로 히트를 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함석헌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상계>에 계속하여 비중 있는 글을 썼다. 그리고 ‘한국의 간디’라 불릴만큼 한국지성계의 큰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장준하와 만나면서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의 혈맹 관계가 되었다. 장준하에게 함석헌은 스승이고 동지였다.

안병욱 주간은 뒷날 회고에서 자신이 잡지를 만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함석헌 선생과 류달영 교수를 ‘발굴’한 일을 들었다. 그러면서 잡지 편집장의 큰 책무는 좋은 글을 받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좋은 필자를 발굴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주석 23)

안병욱에 의해 ‘발굴’된 함석헌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철학자, 반독재 인권운동가, 언론인, 역사연구가 등으로 불리면서 군사독재와 치열하게 싸운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몇 차례 추천되었으며 1970년대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씨알사상’을 정립하였다. 그 첫 출발이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평론이다.

이 글은 <사상계> 126쪽에서부터 140쪽까지,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의 평론이다.
원고 말미의 필자 소개는 ‘기독교인’이라고 명기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한국기독교를 비판한 셈이다. 한국기독교를 공개적으로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이는 함석헌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독교계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를 비난하는 소리도 높았다. 친여 성향으로 갓 창간한 월간 <세대>는 창간 2호인 7월호에 윤성범 교수의 <요한은 어디서 외쳤는가(함석헌론)>을 실었다. 윤성범은 함석헌을 선동가ㆍ이단자로 매도하였다.

함석헌의 첫 대사회 발언, 대종교 비판 발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여기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천주교나 기독교의 여러 파를 구별할 것 없이 다 한데 넣은 ‘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말은 해방 후 10년 동안 그 교회가 걸어 온 길을 주로 역사적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고 하는 말이다.”라고, 기독교 신구교를 싸잡아 비판하는 글임을 밝혔다. 그는 비판을 거부해 온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어느 종교도 다 신성불가침을 주장한다.
‘비판’이라 할 때 교회는 본능적으로 수염을 끄들리는 봉건 귀족의 기분 같은 생각을 가진다. 사실 교회는 봉건제도의 뱃 속에서 설러져 나온 것이고, 아직도 그 젖 냄새를 못 버린 점이 많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지만, 해하려는 신성불가침은 없다. 비판 받아야 한다. 이젠 인간은 무반성 신뢰만이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어떤 종교경전도 그는 비판 없이 읽으려 하지는 않는다. 반성을 아니할 수가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함석헌이 대사회발언의 첫 목표를 한국교회에 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우리나라에 종교가 있다면 기독교다. 즉 국민의 양심 위에 결정적인 권위를 가지는 진리의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세계관 인생관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내부치는 교리와 실제가 다르고, 겉으로 뵈는 것과 속과가 같지 않은 듯 하고, 살았나 죽었나 의심이 나게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고신도(古神道)나 화랑도 모양으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아주 완전히 죽어버렸다면 문제없다. 그것은 식은 재다. 삼국시대의 불교나 이조시대의 유교 모양으로 인심 위에 산작용을 하고 있다면 또 문제없다. 그것은 산 불길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미지근한 재요 시들어가는 나무다. 지금 이 사회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구원을 위해 두 손을 내미는데, 교회는 왜 아무런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지 않을까?

당시 한국 기독교는 전후의 폐허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 아래서 침묵하거나 ‘국부 이승만’을 떠받들며 교세 키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먼저 한국종교사상사의 뿌리를 소개한다.

기독교가 본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들어 올 때는 정복적인 생명력을 가졌었다. 우리나라는 오랜 동안 사상으로 하면 고신도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이 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어 왔다. 물론 처음에는 고신도가 국민생활을 지도해왔을 것이고, 대륙으로부터 유교문화가 들어오자 도덕에 관한 한은 대체로 유교적인 것으로 대치가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사회생활의 실제 도덕에서는 높은 것이었으나, 세계관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세한 설명을 주는 것이 없음으로 고대의 고신도적인 것으로 내려오다가 불교가 당시의 중국에서 성했던 물질적ㆍ예술적인 문화를 타고 올 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대부분 불교적인 것으로 돼 버렸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정신계를 말하면 상반신 세계관적인데 관한 한 불교적 고신도적이었고, 하반신 도덕적인데 관한한 유교적이었다.

함석헌은 이어서 해방과 6ㆍ25 뒤 한국 기독교의 타락상을 분석한다.

그런데 38선이 갈라진 것을 당하고 교회는 어떻게 했나? 처음 흥분이 식고 미ㆍ소 양군의 주둔이라는 어쩔 수 없는 비애를 먹고는 그 다음 일어난 것은 예언이었다. 그래 저마다 예언이다. 3년 후에 통일이 된다, 5년 후에 된다, 어느 해는 예수가 재림하고 소련이 망한다, 이런 것이 유행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역사적 문제를 전연 우연한 것으로 안 심리다. 말은 우연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니 계획이니 예언이니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현실의 문구로 해석해 놓으면 우연이란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이 형식적, 관념적이고 실천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신계의 일과 현실적인 일을 혼동하여 하늘나라의 일을 곧 지상에서 보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는 역사에 대해 도덕적인 노력의 입장에 서지 않고 전연 자연현상에 대하는 모양으로 기다려서 결과를 얻으려는 심리에 빠진다. 고로 예언을 하게 된다. 정감록식으로 운명을 기다리는 심리가 암시되어 가지고 나온 특수 정신적 현상이 곧 예언이다. 그런 고로 몇 번 해보아도 들어맞지 않는 것을 안 요사이는 전연 그런 것은 죄다. 구약에 많이 있는 예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이 윤리적인 것이다. 국민의 갈 길을 지시해 힘쓰게 하자는 것이지 요행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주석
23>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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