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Landscape. 1909.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70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Vasilievich Kandinsky, 1866 ~ 1944)는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이다.  
피카소와 마티스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최초의 현대 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다.  
거기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다. 

1896년에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1922년에서 1933년까지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나치로 인해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고  
1944년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프랑스어: Neuilly-sur-Seine)에서 사망하였다. 

 

Sketch for composition V. 1911.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95 x 13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이 작품으로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 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즉흥 Improvisation> 시리즈, <인상 Impression> 시리즈와 아울러  
<구성 Composition>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 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 · 우발적 · 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 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으로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Sketch for composition VI, 1913. Series : Compositions.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300 x 1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는 실제 장면에 기초해서 추상화를 그리곤 했다. 
그림을 보면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절제된 폭력, 오른쪽에 충돌하고 있는 두 척의 배, 
크게 흔들리고 있는 노, 가운데 배처럼 생긴 형체는 거대한 파도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다. 
밝은색의 사선은 대포를 암시하고 오른쪽 위에는 로마군기가 보인다. 
이 그림은 어느 해전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어느 시대의 그것과 같이 이 작품도 거칠고 혼란스럽다.

이 장면은 다분히 폭력적이고 칸딘스키는 이 그림을 통해 
배나 폭풍우를 표현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런 느낌을 전해주려 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와 형상만을 이용했다. 
이 그림을 언뜻 보면 어두운 그림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절제되어 있는 여러 부분으로 인해 경쾌한 작품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 칸딘스키의 이러한 그림들은 
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미움을 받았다.

 

Landscape. 1913. by Wassily Kandinsky. oil on canvas, 
88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3

칸딘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962)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그림 공부를 착실히 한 표현주의 화가였다. 
당시 여성화가에 대한 위상이 좋지 않았던 시절, 
둘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칸딘스키 36세, 뮌터 나이 25세 의 뮌헨의 작은 마을
무르나우(Murnau)에서 만나 사랑하며 함께 그림과 여행을 즐기게 된다. 

두 사람은 바이에른 지방의 무르나우에서 동거를 하며 활발한 예술 활동을 했다. 
1911년에 창립된 '청기사'와 교류하며 활동을 하였으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청기사파는 자연적으로 해산이 되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떠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고,  
꾸준한 서신 교환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1915년 스톡홀름에서 둘은 잠시의 만남이 있었지만,  
이는 이후의 오랜 동안 이별하게 되었다.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뮌터는 그를 기다렸지만,  
칸딘스키는 1917년 러시아에서 장군의 딸과 결혼한다. 

칸딘스키를 기다리던 뮌터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뮌터는 한동안 그림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후에도 칸딘스키와 함께했던 무르나우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뮌터의 작품에는  
그녀 삶의 모든 정서와 풍경이 담겨져 있다. 
맑고 상징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단순한 형태 
그리고 검고 뚜렷한 윤곽선으로 내면의 정서를 담아 형상화하였다.

무르나우에 남겨진 칸딘스키의 작품을 나치로부터 온전하게 지켜낸 뮌터는  
후에 자신의 작품과 함께 뮌헨 시립미술관에 모두 기증하고 
1962년 8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상] Wassily Kandinsky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Little schoolgirl, 1907.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3 x 9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르 포코니에 (Henri Victor Gabriel Le Fauconnier 1881~1946)는 
헤스딘(Hesdin)에서 태어난 프랑스 입체파 화가였다. 
1901년 앙리 포코니에는 프랑스 북부에서 파리로 이주하여 법을 공부한 후 
장 폴 로렌스 (Jean-Paul Laurens)의 스튜디오에서 회화 수업에 참석한 다음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에서 회화 수업을 들었다. 
그는 그의 이름을 Fauconnier에서 Le Fauconnier로 변경하고 1904년과 1905년 
살롱 데 인디펜던트(Salon des Indépendants)에서 전시하여 Henri Matisse 와 일치하는 대담한 색상을 구현다. 
그는 1907년 에 브리타니로 이주하여 플루 마낙의 바위 풍경을 
단순한 형태를 구분하는 두꺼운 외곽선으로 갈색과 녹색의 징계 톤이 특징인 원형 입체파 스타일로 그렸다.

 

Village in the mountains, 1910.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74 x 9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앙리 포코니에는 개인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폴 세잔(Paul Cézanne)의 영향으로 그는 자신의 입체파 형태를 개발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 시작될 때 앙리 포코니에는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6년 동안 머물렀다. 
당시 그의 작품은 입체파와 표현주의를 결합하여 네덜란드에서 상당한 성공과 영향력을 가져왔다. 
그는 1920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그의 그림이 더욱 사실적이 되었다.
그는 파리 (1946)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Lake, 1911.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92 x 7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ignal, 1915. by Henri Le Fauconnier, oil on canvas, 80 x 9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Luxembourg Gardens. Monument to Chopin,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8 x 4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 1910)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가난한 배관공의 자제로, 프랑스 마옌 데파르트망(Department) 라발에서 태어났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 없이, 파리 세관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어떠한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30대 중반에 이미 환상과 전설, 원시성이 서식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독학으로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기에 ‘일요화가’의 대명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이 시기에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되었다.

1885년부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후 
18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과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앙리 루소의 작품은 초기에는 그가 독학으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과 
어색한 인체 비례, 환상과 사실의 색다른 조합 등의 이유로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후에 <경악(驚愕 : 숲속의 폭풍 1891)> <잠자는 집시, 1897> <뱀을 부리는 여인, 1907>
<시인의 영감, 1909>과 같은 그의 그림은 참신성과 원시적인 자연스러움을 근거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원시림과 같은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성, 
강렬한 색채는 현대예술의 거장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앙리 루소는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연대 음악대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가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제대하였고, 
파리에서 모친과 함께 살며 서기로 있다가 71년 첫 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연고지에서 파리시 입시세관(入市稅關) 직원이 되었다. 
이때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 루소라는 별명 혹은 애칭을 얻게 된다. 

이후 22년간 세관원 생활을 계속하다가, 49세가 되던 해에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나온다. 
루소는 매달 받는 연금 50프랑만으로는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어 
공예 학교에 나가 소묘도 가르치고 그의 화실에서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View of the area from the Vanves Gate, 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31 x 4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루소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5세 때 10년 아래인 15세의 크레망스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다섯 명이 죽고 크레망스마저 1888년 34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여 년 동안을 부인 없이 지낸 루소는 55세 때인 1899년 미망인인 조세핀누와 재혼했는데 
조세핀누 역시 4년 후인 1903년에 사망하고 만다. 
루소는 1890년에 그린 <나 자신, 초상 : 풍경>이란 작품 팔레트 뒷면에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써 넣어 먼저 간 크레망스를 추모하고, 재혼한 조세핀누의 건강을 빌었다.

1884년 루소는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그는 미술관에 의해 모사증을 받았는데, 이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18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의 출품은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개설, 가르치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A tiger attacking a bull. In the rainforest, 1908~1909. by Henri Rousseau. oil on canvas, 4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오늘날 루소를 환상적인 천재로, 또는 입체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기록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상과 전설, 그리고 단순화된 형태와 기하학적인 구성에 연유한다. 
그의 그림은 전문적인 기교보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열정을 통해 
원시적인 세계를 환상에 기반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서투름과 투박한 뒤에서 역설적이게도 숭고한 신비로움을 준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 사이에 일어난 기존 가치관의 전도와 새로운 가치 기준, 
새 질서에의 욕구 의지는 급속한 템포로 예술 분야의 변혁을 촉구했고, 
특히 유럽의 정신 세계는 세기말적인 ‘~주의(-ism)의 과잉', '사상의 혼돈'이 찬양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루소의 어린이 같고 환상적인 화풍은 
회화사의 새로운 시도로 평가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사실주의 기법과 닮아 있으나 
실제로 화폭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인물의 신체 비례는 너무나 어색하고 과장되어 있고, 
등장하는 동식물 또한 자연과 닮아 있지 않아 
오히려 추상적 형태보다 환상성을 더욱 자극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우거진 나뭇잎이나 풀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커다란 잎사귀 몇 개를 그려 우거진 나무로 표현하였고 
풀의 모양에 있어서도 실제의 형태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그렸다. 

열대의 밀림에 신비롭게 된 꽃도 루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며, 
거기에 배치되는 하나하나의 장면도 루소의 공상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루소가 그린 밀림 지대에는 건조한 초원에서 서식하는 사자가 살고 있고 
미녀가 숲속에서 나체로 드러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밀림의 생태적인 현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상념 속의 열대 밀림을 창작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어느 미술 사학자가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에게 루소가 그린 열대 식물의 

진/부 감정을 위촉한 결과 실존하는 식물과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회답해 왔다고도 한다.

 

St. Trinity in Paris, 1911. by Albert Marche. oil on canvas, 81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알버트 마르쉐 (Albert Marche)의 작품은 다른 포브스의 그림과는 달리 
놀랍도록 단순하고 자연색의 변형이 거의 없는 색으로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쉐가 Fauvist 취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표현과 색상 및 구성 해법의 표현의 간결함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풍경에서 작가는 무한한 세계의 조화와 삶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르쉐는 연중 다른 시기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순수한 색채, 그래픽 윤곽은 그의 작품에 지각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Still life. Dishes, 1920. by Amede Ozanfan. oil on canvas, 72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아메데 오장팡 (Amédée Ozenfant 1886~1966)은 프랑스 입체파 화가이자 작가였다. 
1909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를 여행했고 
파리의 Collège de France에서 강의에 참석했다. 
1915년 Max Jacob 및 Guillaume Apollinaire 와 공동으로 오장팡은 1916년까지 편집한 
잡지 L' Elan을 창간했으며 그의 순수주의 이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거주지와 스튜디오에 
자신의 아틀리에인 l' Académie Ozenfant를 설립했다. 
그는 1936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그해 5월에 오장팡(Ozenfant)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한 후 약 2년 후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에 있는 Ozenfant School of Fine Arts는 1939년부터 1955년까지 운영되었다. 
그는 1944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장팡은 1955년 프랑스로 돌아와 1953년에 재귀화 될 때까지 미국에서 널리 가르치고 강의했다. 
그는 남은 생애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1966년 칸에서 사망했다.

 

Still life with a mirror, 1912.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92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6

 

Still life with a cat, 1921. by Jean Rod Joveno. oil on canvas, 78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Landscape, 1925. by Leopold Survage (Sturzwage), oil on canvas, 54.3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레오폴 쉬르바주 (Léopold Survage 1879~1968)는 핀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였다. 
22세에 심한 병을 앓은 후 쉬르바주는 그의 경력을 다시 생각하고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0년 모스크바에서 Jack of Diamonds 그룹과 함께 전시했으며 
1911년 Salon d 'Automne 에서 Archipenko의 촉구로 프랑스에서 자신의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1922년까지 쉬르바주는 신고전주의자들을 찬성하여 입체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쉬르바주는 상징과 신비주의에 점점 더 매료되었다. 

 

Postcard, 1932~1948.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92.3 x 6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 (Fernand Léger 1881~1955)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여 파리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배웠다. 
페르낭 레제는 인상파 마티스, 세잔의 영향을 받아 1911년경부터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여,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그는 기계적인 동적 미를 흡수하여 명쾌한 구도로 정물 · 인물을 그렸다. 

 

Composition, 1924. by Fernand Leger, oil on canvas, 73 x 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페르낭 레제는 뒤에 무대 장치와 영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순수 영화를 제창함으로써 전위 영화의 길을 열었다. 
1930년 전후부터 곡선을 자주 사용하고, 동적인 구도를 취하여 심리적인 표현을 더하였다. 
대표작으로 〈결혼식〉, 〈아담과 이브〉, 〈트럼프놀이〉등이 있다.

 

Court scene, 1928. by Eve Alix,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Green landscape, 1920~1921. by Andre Lot, oil on canvas, 5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7

 

Diana on the hunt,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310 x 13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Allegorical scene, late 19th - early 20th centuries. by Edmond Ann Antoine Tapisier, 
oil on canvas, 279.5 x 8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in Provence, 1928. by Alexander Truin. oil on canvas, 
50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figure, 1924. by Andre Favori, oil on canvas, 72 x 4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Number 437

 

Catching herring,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46 x 11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idge, 1964. by Andre Fougeron. oil on canvas, 19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44

 

Breton coast, 1911. by Leon Hubert. oil on canvas, 46 x 6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onoring the midshipman, 1950. by Guy de Vogue. oil on canvas, 
80 x 4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rotracted conversation, mid-19th century. by Karl Spitzweg (?). oil on canvas, 
68.5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late 19th century. by Caspar Ritter. oil on canvas, 
55 x 3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early 1890s.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61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Warrior with a banner, 1821. by Franz von Pieces. oil on canvas, 
59.6 x 4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athing Diana, 1872.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41.2 x 5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ea view, 1837. by Friedrich Preller. oil on canvas, 63 x 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Boy with dog, 19 century.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97 x 72.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emale portrait, around 1900. by Ludwig Hoffmann.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Forest landscape, around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by Fritz Ebel. oil on canvas, 

41 x 3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Landscape with a lake, 1840~1860. by Unknown German artist. oil on canvas, 

107 x 14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asant children,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by Edward Ackerman. oil on canvas, 

42 x 6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hipwrecked, 1855. by Johann Wilhelm Cordes. oil on canvas, 
120.5 x 18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Scenery, 1828. by Unknown artist. oil on canvas, 80 x 11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