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422번 홀은 강렬한 색상의 페인팅이 주된 역할을 하는 

야수파(fauvist)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의 모든 그림은 20 세기 초반에 제작되었다. 
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야수파의 운동이다.

야수파는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 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이 있었다.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한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야수파의 주요한 화가로는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문하생인 
앙리 마티스(Henri Émile-Benoit Matisse),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라울 뒤피(Raoul Dufy),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등이, 
또 개인적인 교우를 통하여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진 푸이(Jean Puy),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는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에 서서 이론적인 기반에서보다 기성 회화에 대하여 
어떻게 하든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젊은 패기와 야심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들이 당면한 적으로 삼은 것은 시각의 진실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였으며, 
따라서 이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선배 고흐의 격정과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은 그들을 한결같이 분발하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파괴와 혁신에 불타는 야수파의 유일한 무기는 색채였다. 
그것도 빛깔의 인상을 조금씩 칠해 가는 타율적인 색채가 아니고, 
단숨으로 캔버스에 범람시킨 강렬한 원색,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雷管)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원색이 작렬(炸裂)하는 가운데 감성의 해방과 자아의 고양(高揚)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담한 연소를 다하려고 하였다. 

 

Room of fauvist Artist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이러한 젊은 생명력의 연소와 그것이 기성 회화에 끼친 적잖은 충격에 
그들의 야수 중에도 야수다운 영역이 있으며, 거기에 포비슴이 수행한 
역사적인 역할의 거의 전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러한 패기에 앞서서 확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같은 세대라고 하는 친밀감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포비즘 운동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빨랐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이미 클럽으로서의 결속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티스는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마르케는 중후한 풍경화로, 
드랭은 고전으로, 그리고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본을 딴 엄밀한 화면 구성으로, 
각자가 자기 본래의 자질을 지향하여 떨어져 나갔다.

 
관점을 바꾸어 말한다면 밖으로 향했던 혁신의 기개에 불탄 젊은이들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은 것이
 클럽으로서의 포비즘의 의미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비즘은 에콜(流派)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고하는 화려한 '색의 계절풍(季節風)'이었다.

이처럼 야수파는 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의 미술활동이었지만 
20세기 현대미술의 신호탄과 같은 주요 사조로써 평가된다. 
그 이유는 야수주의를 시작으로 화가의 주관이 색채로 표출되는, 
즉 관념적 사상이 색채로써 표출될 수 있는 색채의 추상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야수파의 화가들은 하늘과 바다는 푸른색, 나무가 울창한 산은 초록색이라는 
색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써 개성 강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3세계 미술의 성향인 원시주의(Primitivism)에 
영향을 받아 더욱 과감하고 강렬하게 색채를 왜곡해 나갔다. 
여기에 더해진 생략된 묘사와 허술한 표현 그리고 성의없어 보이는 
붓질의 흔적이 더해진 야수파의 작품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추한 그림 ’ 
그리고 ‘미치광이의 반란’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들은 야수파의 작품들을 야수적이라고비꼬았으며, 
'야수파'의 미술적 사조에 가담된 화가들을 ‘야수들’이라 조롱하는 가운데 
'야수파'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Red dancer,1907.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99.7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1877~1968)은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이다.
1877년 1월 26일 로테르담에 가까운 구시가지인 항구도시 델프스하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되던 1892년 
로테르담의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과정에서 공부한 그는 많은 시간을 부둣가에 나와 

선원들과 매춘부들을 스케치하며 보냈다. 
1897년 공부를 마치고 파리로 가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간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사풍자 잡지에 삽화 그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반 동겐은 마티스 이후 야수파를 일군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특히 감각적으로 그린 여인의 초상화들로 유명하다. 
선원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낸 그는 
가난한 집안의 사정 때문에 1896~1898년에서야 

로테르담 예술학교에서 화가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보헤미안같은 생에 대한 태도와 미술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한 불만 등으로  
화가 마티누스 실트(Martinus Schilt)의 작업실 이층으로  옮긴 뒤 
이곳에서 삼년동안 지내게 되며 그동안 주로 창녀들이나 
배의 선원들을 그의 그림의 테마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퇴페적인 여자들의 그림들이 이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Antonia La Coquinera, 1906.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로테르담 왕립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20세 때인 1900년 파리에 옮겨간 후 
몽마르트르 지역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속에서 칠장이, 풍자 답지 삽화가, 
카페 예술가, 신문을 배달할만큼 가난에 찌들어진 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 몇몇 무정부주의자들과의 친분을 맺고 주간지에 그의 삽화를 기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소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던 반 동겐은 
1902년부터 점차 채색 중심의 대담한 화풍의 그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1904년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화랑에서 1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드레 드랭(Andrè Derain) 등과 함께 살롱 도톤전에 참여했다.

​이때 미술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이들의 작품을 두고 
‘레 포브(Les Fauves)' 즉, 야수들의 그림이라고 비꼬았다. 
반 동겐은 원색조의 강렬한 색채와 정적인 관능미가 돋보이는 
<팜므파탈 (Femme Fatale 1905)>을 출품하여 야수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Woman in black hat,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00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1906년 몽마르트르의 세탁선(바토 라부아르)으로 거주지를 옮겨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와 시인, 
음악가들과 친분을 맺고 그로부터 예술적인 영감을 받았다. 
이 때 피카소의 연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풍부한 예술적 토양과 환경 속에서 그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1906년 포비즘 운동에 참가하여 신선한 색채와 
힘세고 북돋운 것 같은 필치로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동겐은 1907년 피카소 그림의 판매인이었던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와 
계약을 맺은 뒤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당시 드레스덴에 본거지를 두었던 독일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cke)'에 참여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의 솔직하면서도 색채효과가 뛰어난 초상화 양식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선풍적으로 유행했다.​

한편, 반 동겐은 1908년 독일 표현주의 그룹인 다리파에 가담하여 
드레스덴에서 열린 다리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유일한 야수파 화가로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회화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Lucy and her partner, 1911.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130 x 9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주로 서커스나 카바레 같은 도시의 유흥시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여인들의 누드와 밤의 도시 생활을 주제로 택해 
감성적이면서도 긴장과 불안감이 엿보이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는 순수한 색채와 유혹적이되 정적인 관능미가 넘치는 인물 표현으로 
사교계의 큰 호응을 얻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는 
사교계의 공식적인 초상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후기에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미가 부각되었지만, 오히려 상류 사회의 호평을 받아 
저명인사나 유명 여배우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는 권력과 부로 치장된 화려한 외관 속에 감추어진 
부패하고 타락한 실상을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퇴폐적인 관능성을 견디어 낸 초상화를 그려 크게 인기를 얻었다. 
만년에는 사교계의 총아로서 오로지 유명인의 초상을 그렸다. 
초상화와 삽화를 그리는 화가로 서구에서는 마티스와 같이 야수파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겐은 풍부한 색채의 바다 풍경과 과감하고 간결한 양식의 파리 풍경도 여러 점 그렸다.

Spring, 1908. by Kees van Dongen. oil on canvas, 81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반 동겐은 초기에 인상파 풍(風)의 그림을 익히고 있었으나, 1906년 포브 운동에 참가하여 
생생한 원색을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그렸는데 당시는 마티스의 영향이 현저했다. 
후에는 드레스덴의 '브뤼케' 파(派)에도 가입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표현파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1905∼1913)의 제작을 동겐에게 있어서 절정이라고 보는 비평가가 많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초상화가로서의 재능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는 여기에 일찍이 공감해 마지않던 수틴의 작풍을 받아들여서 사교계의 히로인과 은행가 
그리고 무희 등을 신랄하게 그려 내어 그의 붓은 그들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 동겐이라고 하면 경묘한 필치로 표현한, 
세련된 부인들과 그녀들의 멋장이 유행 감각에만 맴돌았다고 평한다.

파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안 반 동겐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지기도 하고 1908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키쉬너(E.L. Kirchner) 등 4명의 대학생들로 창립된 독일 인상파주의 그룹 
다리파(Die Bruecke/Bridge)의 회원이 되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그림들은 더 사실적으로 변하고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며 반 동겐은 1929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반 동겐은 1926년에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1927년에는 벨기에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929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반 동겐은 1959년부터 모나코에서 살았고, 
1968년 91세를 일기로 몬테카를로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Roofs and Cathedral in Rouen,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119 x 9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1879~1949)는 프랑스의 포비스트(야수파) 운동 예술가였다. 
프리에스는 오랜 조선소와 선장의 아들로 르 아브르(Le Havre)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96년 르 아브르의 미술학교(Le Havre School of Fine Arts)에서 
공부하는 동안 평생 친구인 뒤피(Raoul Dufy)를 만났다. 

 

Temptation (Adam and Eve),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73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와 뒤피는 1895~96년 더 많은 연구를 위해 장학금을 받고 함께 파리로 가서 
에콜 드 보자르에서 보나의 교실에 입실하고 귀스타브 모로의 교실에 있었던 
마티스(Henri Matisse), 마르케(Albert Marquet),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를 만났다. 
프리에스는 야수파의 일원이 되어 1907년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Tulips and daisies, 1910.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5 x 8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908년 프리에스는 노르망디(Normandy)로 돌아왔다. 
그는 1912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1914년까지 가르쳤고, 전쟁 기간 동안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919년 파리에서 다시 살았고 1949년 사망할 때까지 
툴롱과 쥐라 산맥으로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Still life with a statuette of Buddha, 1909.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1 x 4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프리에스의 생애의 마지막 30년 동안, 그는 이전 동료들과 
동시대 사람들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희미한 바로크 풍미는 그의 풍경, 정물화 및 인물화에 활력을 더했다.

 

Hill, 1908. by Otho Friez. oil on canvas, 61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생동감 넘치는 아라베스크와 야수파 시절의 화려한 색채를 포기한 프리에즈는 
더 냉정한 팔레트로 돌아와 논리적 구성, 단순한 색조, 볼륨의 견고함 및 
평면의 뚜렷한 분리에 대한 세잔(Cézanne)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Autumn works, 1907. by Otho Friez. oil on canvas, 54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0

 

프리에스는 194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파리 교외에 있는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에 묻혔다.

 

Rural landscape, 1910. by Auguste Chabo. oil on canvas, 77 x 10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차보드(Auguste Chabaud 1882~1955)는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그는 프랑스 남부 님(Nimes)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차보드는 아비뇽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합류했다. 
1899년에 그는 아카데미 줄리안(Academie Julian)과 에콜 데 보자르에서 
예술 훈련을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났다. 
1900년에 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그의 부모의 포도원으로 돌아왔다. 
그 사업이 그곳의 위기로 인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1년에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리를 다시 떠나야 했다. 
그는 배에서 일하면서 서아프리카 해안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파리의 밤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스튜디오가 있는 파리 인근 몽마르뜨에서 그는 파리 생활의 다양한 장면을 그렸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튀니지에서 군 복무하는 동안 차보드는 사람들과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이후 파리로 돌아와 야수파(Fauves)와 함께 전시했다. 
수년 동안 그의 파리의 밤 문화 그림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주제를 포기하자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차보드의 입체파 단계는 1911년에 시작되어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 그는 1913년 뉴욕을 포함하여 많은 전시회를 가졌으며 
그의 작품은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Vlaminck) 및 피카소(Picasso)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1920년부터 그는 "푸른 시대"를 보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유일한 색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사용했다. 
그때부터 그는 프랑스 남부에만 집중했다. 
그는 시골 생활, 농부, 알필(Alpilles)의 언덕과 산책로의 장면을 그렸다. 
그는 1955년 Graveson에서 사망했다.

 

Flowers, 1906.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81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 1882~1960)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릴의 에콜 데 보자르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드로잉을 공부하고 파리에 정착하였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풍으로 시작했는데 이후 피카소, 브라크, 후앙 그리 등과의
만남을 통해 입체주의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1917년에 처음 추상 작품을 제작하였고 추상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Mill on the Marne, 1911. by Auguste Herbin. oil on canvas, 22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Peonies, 1906. by Pierre-Paul Girieud.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피에르 폴 지리유드(Pierre-Paul Girieud 1876~1948)는 1876년 6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프로방스에서 자라 독학으로 화가가 된 그는 1900년에 군 복무를 마치고 
몽마르뜨의 테르트르 광장 근처로 이사한 후 현대 미술의 거장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앙리 망갱(Henri Charles Manguin), 

샤를 카무앙(Charles Camoin),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곳에서 피에르 지리유드는 몽마르뜨 크리에이티브 클러스터의 본사이자 
유명한 카페인 "Lapin Agile"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인 피에르 지리유드의 

그림에 대한 접근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그는 전통적 표현의 경계를 넘어 포비즘과 표현주의의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Quay Notre Dame in Le Havre, 1908. by Georges Dupuis. oil on canvas, 58 x 7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조르주 뒤푸이 (Georges Dupuis 1874-1932)는 프랑스 화가이다.

 

Portrait of Suzanne Dufy, the artist's sister, 1904. by Raoul Dufy. oil on canvas, 

46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라울 뒤피 (Raoul Dufy 18877~1953)는 프랑스의 화가로 
직물, 도자기 디자이너 사이에서 유행한 다채롭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877년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23세에 파리로 나와 오로지 
인상파의 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약간 어두운 색조로 그렸다. 
라울 뒤피가 자기의 묘화 과제에 대하여 스스로 계발(啓發)된 계기는 
마티스의 작품 <호사 · 정밀 · 쾌락>을 접한 때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린다고 하는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발명이라 할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상주의적인 리얼리즘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포비슴의 운동에 참가한 후부터 그는 자랑으로 여긴 속필(速筆)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삶의 기쁨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다. 
보트 경주, 수욕장 풍경, 길거리 축제 등 환희의 소리가 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그가 애호하는 모티프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큐비즘으로 접근했으며, 한때는 화상(畵商)도 위험시하는 

실험가인 척도 하였지만 그 금욕적인 분석과 구성의 수법은 결국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아 그는 또다시 자칭 '바캉스의 화가'로 회귀하였다. 
특히 그는 생활을 위하여 디자인을 하는 일에도 손을 대어 
장식 미술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아 그 힌트에 의하여 회화도 충실하였다.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09. by Jean Puy. oil on canvas, 131.5 x 9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1876 년 11월 8일 프랑스 로안에서 태어난 진 푸이(Jean Puy)는 

파리의 Académie Julian에서 공부하고 1905년에 다른 야수파(Fauves)와 함께

Salon de Indédependants 및 Salon d' Automne에 작품을 전시했다. 

 

Landscape, 1903. by Jean Puy. oil on canvas, 48.5 x 7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오늘날 진 푸이의 그림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런던의 Courtauld Institute of Art 등에 영구 소장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진 푸이는 1960년 3월 6일 프랑스 Roanne에서 사망했다. 

 

Landscape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50.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앙리 망갱 (Henri Charles Manguin 1874~1949)은 프랑스 야수파(Fauves) 화가였다.
앙리 망갱은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에게 사사하고 마티스(Henri Matisse ), 

마르케( Albert Marquet),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 등과 교유하며, 
1905년 살롱 도톤의 유명한 포비슴(野獸派) 출품 사건에 참가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만들어졌고,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듯이 격렬한 색채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으나, 
다른 포비스트에 비하면 종래의 형태나 구도에 집착하여, 

온화한 경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Path in Saint-Tropez, 190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73 x 9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Morning in the Cavaliere, 1906.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81.5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22

 

Flowers, 1915. by Henri Charles Manguin. oil on canvas, 41.7 x 33.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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