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과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교회 성당이다.
이 성당 이름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믿음의 조상의 아들’이지 
그리스정교나 동방정교, 혹은 카돌릭에서 말하는 성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 이삭은 ‘이삭 달마시안’이라고도 불리우는 
지중해 북동쪽의 작은 나라 달마시아의 성인이다.   

근데 왜 하필이면 그 먼 곳의 성인의 이름을 이 성당에다가 가져다 붙였을까? 
성 이삭의 축일이 5월 30일이었는데 그 날이 바로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란다. 
표면적으로는 정교 성인을 위한 성당을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지었지만 
그 저의에는 당시 막강한 권력의 정점에 있던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첫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은 1707년 표트르 대제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세워졌다. 
길이 18m, 폭 9m, 높이 4~4.5m의 목조 건물로 된 소박한 규모였으며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나 강가에 너무 가까이 지은 탓에 건설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건물에 사용된 자재가 썩기 시작했다. 

이에 1717년 원로원 광장으로 부지를 옮겨 공사에 들어가 
1727년 두 번째 대성당을 지었고, 바로크풍의 종탑도 추가했다. 
하지만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735년에 벼락을 맞아 불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다시금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대성당은 예카테리나 2세 때인 1761년 건설을 시작해 
약 40년 후 파벨 1세 때인 1802년 5월 30일에 축성되었다.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이 완성된 뒤 겨우 6년밖에 지나지 않은 1808년,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설계 공모를 몇 차례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구스틴 드 베탕쿠르(Agustín de Betancourt, 1758-1824)에게 
새로운 성당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베탕쿠르는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까지 무명인 20대 후반 젊은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1858)을 공사 책임자로 선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엄한 건물을 원하자 
몽페랑은 신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성당의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정하고 
코린트식 열주와 박공지붕으로 된 파사드를 네 면에 두며, 
높게 세운 드럼 위에 43m 높이 돔을 얹는 대담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본격적인 공사는 1818년 2월 20일에 황제의 승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 
몽페랑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성당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대를 매립해 세운 도시기 때문에, 
공사 현장의 지반을 충분히 다지지 않으면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파서 물을 퍼내고 길이 6.5 m, 두께 26~28 cm인 
나무 말뚝 10,762개를 수직으로 박는 기초 공사에는 5년이 소요되었다.

한편 성당의 파사드에 세울 원기둥 48개는 핀란드에서 채석한 화강암 원석을 
바지선에 실어 운송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에 달했다. 
기둥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만 3년 가까이 걸렸고(1828~1830) 
매끄럽게 연마하는 데 다시 4년 여가 더 걸렸다. 
각 파사드마다 12개씩 원기둥을 세웠고, 
그 위를 덮은 박공지붕은 12사도의 청동상으로 장식했다. 
그동안 벽돌공들은 성당의 주요 벽체와 볼트 천장을 마무리 지었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40년 간 계속된 공사 끝에 마침내 1858년 5월 31일 네 번째 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신성한 건물에 동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사 기간 내내 
4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로지 인력으로만 건물을 지었다. 
공사 책임자인 몽페랑은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7월 10일에 
72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사회 치고 역술을 즐기는 러시아에서 
당시의 유명한 점장이가 성당이 완공되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초창기에 예언했다는 것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 건설을 담당한 크리스토퍼 렌처럼 몽페랑 역시 
자신이 설계한 대성당이 완공되는 것을 지켜본, 유럽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운 건축가였지만 사후에 받은 대우는 렌보다 못했다. 

몽페랑은 평생을 바쳐 지은 성 이사악 대성당에 묻히기를 바랐고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줄 것을 러시아 정부에 청원했지만 
황제는 몽페랑이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당 내의 매장을 거부했다. 
결국 몽페랑의 유해는 아내가 프랑스로 운구해 그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혔다.

 

상공에서 본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튀어 나온 건물의 주요 볼륨 모서리에는 4개의 
작은 종탑이 있어 사원의 실루엣을 성공적으로 보완한다. 
그들은 종탑 자체의 규모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는 
가벼운 금박 돔으로 완성되었으므로 메인 돔보다 훨씬 작다. 
대성당의 피라미드 구조로 인해 메인 돔이 있는 거대한 드럼 위로 
역동성과 열망이 생기고 건물 전체가 주변 공간과 연결된다. 

19세기 중반까지 겨울궁전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에서나 성당의 빛나는 금빛 돔을 바라볼 수 있다. 
주철로 건축된 성 이삭 대성당의 돔은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건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소련 시대에 정교회가 탄압받으면서 그 때부터는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사용되지만 1990년부터 일정한 날에는 정교회 행사를 다시 열고 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둥과 벽에서 총알자국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성 이삭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
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종교용 건물로서의 이용이 재개하고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남쪽과 서쪽 외관을 따라 
해군성과 궁전광장, 네바 강으로 이어지고 동쪽에 성 이삭 대성당이 있다. 
공원을 벗어나 네바강 쪽으로 나가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세나츠카야 광장 복판에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성당을 마주 보며 세워져 있다.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 (Alexander Garden)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에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2세기 로마 대리석상 '파르네스의 헤라클레스' 복제품이 서 있다.
조금 지친듯한 헤라클레스가 사자 가죽을 씌운 자기 몽둥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원엔 고골리부터 글린카, 고르바초프에 이르는 여러 작가, 정치인의 조각상도 있다.

 

성 이삭 성당 (St Isaac Cathedral)

정면은 높이 17m, 무게 114 톤의 화강암 기둥이 있는 현관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둥은 사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화강암 기둥 위에 설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 (St. Isaac 's Cathedral)은 세련된 화강암 기둥과 대리석이 사용된 
외부 장식에 있는 러시아 고전주의의 기념물의 유일한 기념물이다. 
현관의 짙은 빨간색 기둥, 메인 돔의 열주 및 회색 대리석 벽 클래딩과 
금박 돔이 있는 건물 지하의 멋진 조합은 전체 구조에 의식적인 느낌을 준다. 

대성당의 현관은 웅장함과 고귀함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6열로 된 현관 하나는 네바(Neva) 강과 청동 기수(Bronze Horseman)상을 향해 
북쪽을 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성 이삭 광장(St. Isaac 's Square)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성전의 두 입구는 도시 계획 기능으로 인해 제단과 관련하여 측면으로 판명되었다. 
성전의 제단은 서쪽에 대칭으로 반복되는 8열 현관으로 외부에 표시되어 있다. 

대성당 벽의 매끄러운 평면은 상단에 거대한 판금과 

볼류트가 있는 커다란 아치형 창문으로 잘린다. 
건물의 웅장함한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건축가 몽페랑은 창문과 문의 크기를 
엄청나게 늘려 사원의 실제 크기에 대한 생각을 왜곡했다. 
동쪽 외관을 제외하고 세 개의 외부 문은 각각 

42평방 미터 크기의 현관과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벽의 전체 평면의 1/3은 불필요하게 주요 주문보다 

우세한 거대한 다락방으로 채워져 있다. 
그 크기는 세 번째 성 이삭 대성당의 동쪽 정면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봉헌된 부분은 해체할 수 없었다. 
몽페랑은 4개의 종탑의 수직 관절과 벽의 윗부분에 모돈이 있는 
수평 처마 장식으로 거대한 다락방을 다소 부드럽게 했다. 
모서리에 위치한 기둥은 건물의 주요 구획의 수직적 특성을 강조한다. 

성 이삭 대성당은 기념비적이며 장식적인 예술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대성당의 건축은 회화 및 조각과 직접적인 예술적 관계에 있다. 
외관의 장식용 솔루션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조각에 의해 결정된다. 

관람 파트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며 매표소에서 각각 따로 표를 판매한다. 
ISIC 카드 소지자 기준으로 두 곳 모두 입장하는데 300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한 곳은 콜로네이드. 즉 성당 돔 지붕 테두리에 올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나머지 한 곳이 
성당 내부 겸 박물관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성당 내부에서는 200루블에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성당 한쪽 구석에서 200루블에 기념 주화를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다.

내부관람 시 특정구역을 제외하고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있다. 
여느 정교회 성당이 그러하듯 오후 6시에 매표소가 문을 닫은 뒤로는 
저녁기도 예식인 만과가 시작되고, 관광객 또한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단 이때부터는 기도예식을 진행하므로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고, 
최대한 조용히 둘러보다가 나감을 추천한다. 
이때에는 당연하게도 여성 관광객들은 정교회 규칙에 따라 머리 부분에 천을 둘러야 한다.

 

성 이삭 성당 3D 레이아웃

메인 종은 이삭의 이미지와 표트르 1세부터 니콜라스 1 세까지 
러시아 주권을 묘사하는 5개의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 
외관 장식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빼어나다.
페디먼트 옅은 부조, 천사 동상, 외부 문 디자인은 성 이삭 대성당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사원의 각 건축 세부 사항은 매우 상징적이다. 
정면은 흉내낼 수 없는 조각 주제로 장식되어 있다.

 

사원의 돔

4 개의 거대한 철탑 위에 놓인 메인 돔의 높이는 69m, 측면 본당의 높이는 28m이다. 
돔을 받치는 각 기둥은 특별히 개발된 설계에 따라 들어 올려졌다. 
100kg의 순금이 기둥의 도금에 사용되었다. 
대성당 콜로네이드는 도심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이다. 
대성당의 돔은 핀란드 만에서도 볼 수 있다.

평일, 공휴일 및 일요일에 하루 16시간 동안 4만 농노가 역사적인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농노 건축업자의 4분의 1이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1842년에 대성당은 3,200만 은 루블을 사용하여 세워졌다. 
대성당은 1858년 5월 30일에 봉헌되었고 예배를 위해 개장했다.

 

사원의 돔

건축가 몽페랑(Montferrand)은 40년 동안 장기 건설을 했다. 
전설에 따르면 점쟁이는 사원이 건축 된 후 건축가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몽페랑은 건축에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몽페랑은 작업 완료 후 한 달 남짓 후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 2 세가 성전을 조사하던 중 성도들의 조각품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달마티아의 이삭, 몽페랑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24천사가 돔 아랫부분을 에워싸고 있다. 
이 천사상은 거푸집에 지어부어 만드는 전통적 청동 주물 방식이 아니라 
전기 도금법을 응용해 정밀하게 뜨는 전기주물(electrotyping) 방식을 처음 적용한 동상이라고 한다.

돔에 금을 입힐 때도 당시로는 첨단 방식인 스프레이 페인팅을 했는데 
금 녹이는 용해액에 수은이 함유돼 금물을 뿌리던 인부 60명이 

수은 증기를 쐬고 중독돼 죽었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공습의 표적이 되지 않게 하려고 돔에 잿빛 칠을 했다. ​
돔 아래 둥글게 난간을 두른 곳이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전망대이다.

 

정면 윗쪽의 삼각박공 조각

장식 조각의 위치는 건물의 주요 부분에 해당하여 별도의 건축 덩어리를 통합하고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의 전환을 시각적으로 부드럽게 하여 
구조의 개별 요소의 역할과 중요성을 높여 준다. 

19세기 초 건물의 엄격함과 고상한 단순함은 화려함과 효과를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벽의 가소성을 강화하여 페디먼트의 매끄러운 들판을 복잡한 옅은 부조로 채운다. 
이 모든 것이 성 이삭 대성당의 외부 장식에 완전히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성전 내부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외부 조각 

네 귀퉁이에 ​천사상과 불 밝히는 받침대를 세웠다.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인 조각품은 사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 졌을 뿐만 아니라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에서 정교회와 러시아 군주제, 러시아 차르의 숭배를 강조했다.

 

외부 조각

 

북쪽 삼각박공 조각

네바 강 쪽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북쪽 삼각박공에 새긴 부조상의 주제는 
조각가 ‘레 무아(F. Lemer)’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중앙은 무덤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이고 양쪽에는 천사상과 무덤을 지키는 군인과 여인들이 보인다.  
박공 상부에는 제자 요한 동상, 왼쪽에는 베드로, 오른쪽에는 바울의 동상이 있다
아래 길게 새긴 글귀는 "신이여, 왕이 당신의 권능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이다. 
'왕'은 표트르대제를 가리킨다.

 

남쪽 삼각박공

남쪽 현관의 벽에는 성모 마리아와 자녀, 측면에는 동방 박사가 있다. 
거대한 청동 고부조의 변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강력한 금속 보강재로 둘러싸여 있으며 수많은 핀으로 고정되었다. 
덕분에 높은 부조는 처마 장식에 놓이지 않고 대리석 클래딩을 파괴하지 않는다. 

대성당의 현관은 사도의 부조와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모서리는 램프로 천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완성하고 
메인 돔의 난간에는 24개의 천사 동상이 있다. 

 

동쪽 삼각박공

4면 박공마다 부조상을 새겼는데 동쪽 박공은 성 이삭이 4세기 로마황제 발렌스를 
가로막고 서서 계속 가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리는 장면이다. 
조각과 건축 형태의 합성 관점에서 볼 때 동부 현관의 구호가 가장 성공적이다. 

 

사도 요한 조각

박공 위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다.  
곁에 있는 독수리는 요한복음을 상징 한다.

 

4면 박공을 따라  열 두 명의 사도상이 서 있는데 사진 왼쪽이 베드로, 오른쪽이 바울이다.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

 

서쪽 현관 "이삭(Isaac)은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축복합니다"의 
높은 부조는 엄격하게 대칭으로, 차분하게 지어졌다. 
부조의 구석에는 성 이삭 대성당의 모형이 손에 든 골동품 토가에 
몽페랑(O. Montferrand)의 조각상이 있다. 

페디먼트 꼭대기에는 네 명의 전도자의 상징이 있는 조각이 있다. 
서쪽에는 사자가 있는 마가, 남쪽에는 천사가 있는 마태, 
북쪽에는 독수리가 있는 요한, 동쪽에는 누가가 있는 송아지. 
북부 페디먼트의 성 베드로, 폴 및 전도자 요한은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고 
나머지 9개는 청동으로 주조도었다.

 

외부 조각 - 천사상

천사상은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천사의 옷과 날개가 벽에서 약간 튀어 나와 조각품이 점차 
벽면으로 이동하고 천사는 유기적인 건축 세부 사항처럼 보인다. 
다락방 천사와 램프가 달린 천사는 전기 도금으로 만들어지며 인공 녹청으로 덮여 있다.

 

풍부한 야외 조각품은 성 이삭 대성당의 외관에 시각적으로 
과부하가 걸리지만 동시에 화려함과 엄숙함을 선사한다. 

 

정면에 선 코린트식 기둥이 웅장하다. 

한 개 무게가 많게는 114톤이나 되는 붉은 화강암 기둥이 모두 112개다.​ 
중앙 돔은 ​순금을 입힌 것으로도 유명하다. 
돔 성당으로는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과 함께 세계 3대 성당에 꼽힌다고 한다.

 

붉은 화강암의 굵은 원주들이 받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많은 뛰어난 건축 기념물 중 성 이삭 대성당은 건축 및 장식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유색 돌이 비정상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그들은 화강암, 다양한 유형의 대리석, 쇼크샤(Shoksha) 반암, 각력암(breccia), 
순지트(shungite) 슬레이트, 공작석 및 청금석을 사용했다. 

건축가 몽페랑은 거친 나뭇결의 핀란드 화강암인 라파키비(Rapakivi) 화강암을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라파키비 화강암은 강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큰 블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구별된다. 
이 돌은 대성당의 주요 구조인 기초, 기단 및 112개의 기둥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화강암은 1740년대부터 개발된 거대한 비보르크 산괴의 영토에서 채굴되었다. 
피털락(Piterlax) 채석장은 핀란드 만 해안 근처의 여러 섬에 위치해 있어 
석재 블록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쉽게 운송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배를 타고 물에 의해 대성당의 건설 현장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의 기단 블록과 기둥을 연마하기로 결정했다. 
연마는 돌을 풍화로부터 보호하고 습기 침투를 방지하며 멋진 장식 효과를 주었다. 
붉은 화강암 기둥은 대리석 벽 클래딩의 밝은 회색 배경에 선명하게 눈에 띄며 
돔의 금과 결합하여 우아한 색 구성표를 나타낸다.  
따라서 성 이삭 대성당을 건설하는 동안 화강암은 

건설적인 것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다양한 종류의 대리석이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돌들은 다양한 색상이 될 수 있다. 
유색 대리석은 일반적으로 무늬가 있거나 줄무늬가 있다. 
처리하기 쉽지만 내구성이 떨어진다. 
대리석은 대기의 온도, 습도, 이산화황의 급격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건축에서는 외관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 이삭 대성당은 외관과 내부가 대리석으로 된 몇 안 되는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러스킬라(Ruskeala) 대리석은 성당의 정면에 사용되었다. 
이 돌의 퇴적물은 러스킬라 마을 근처의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18 세기 중반부터 개발되었다. 
러스킬라 대리석 채석장은 밝은 황록색에서 짙은 녹색까지 다양한 색상의 돌을 제공했다. 
대리석은 색상과 구조가 균일하지 않은 패턴으로 처리되어 쉽게 처리되고 거울 광택을 냈다. 


그러나 러스킬라 대리석은 내후성이 충분하지 않으며 외부 장식에 사용될 때 중요한 단점이 있다. 
약 50-60 년 후에 부분 또는 전체 교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이삭 대성당의 정면은 그것과 마주하고 있으며, 
3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외부 문이 새겨진 문이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밝고 어두운 회색 대리석은 비스듬한 바둑판 케이지 형태로 성전 바닥을 포장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대성당 장식에서 티브디아(Tivdia) 대리석은 티브디아 마을 
북쪽의 칼렐리아(Karelia)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벨라야 고라(Belaya Gora) 광상에서 채굴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벨로고르스크(Belogorsk)라고 불렸다. 
색상에서 분홍색과 빨간색 톤이 우세한 것은 미네랄 적철광의 존재 때문이다. 
이 대리석은 석영 함량이 높기 때문에 매우 단단하며 가공 정도면에서 가장 복잡한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성당 내부에는 러시아산 석재와 함께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서 수입된 석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선 흰색 이탈리아 세라베초 대리석으로 벽이 마주보고 있다.
짙은 회 녹색 제노바와 노란색 시에나 대리석도 이탈리아에서 구입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붉은색 그리오토(griotto) 대리석은 프랑스 남부에서 가져왔다. 
이 돌은 짙은 체리 레드 또는 짙은 정맥과 작은 방해석 반점이 있는 밝은 빨간색이 매우 눈길을 끈다.
성 이삭 대성당은 실내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돌 바위가 장식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쇼크샤(Shoksha) 반암은 진한 빨강색 또는 체리색을 띠고 규암 그룹에 속한다. 
주된 암석 형성 물질은 석영이며, 그 입자는 석영 물질에 의해 밀도가 높은 덩어리로 접합된다.
색상은 철 안료의 존재에 의해 결정되므로 규암은 대부분 빨간색, 분홍색 또는 갈색이다. 

성 이삭 대성당의 석재가 채굴된 쇼크신스코예 광상은 러시아에서 200년 넘게 알려져 왔으며 
페트로자보츠크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오네가 호수 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구조상 쇼크샤 반암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내후성이 뛰어나다. 
가공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완벽하게 경면 마무리로 연마된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카렐리야(Karelia)에서는 각력암(breccia)도 채굴되었으며 복잡한 구성과 
구조의 암석으로 건물 장식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밀한 백운석-사문석 물질로 단단히 접합된 디아베이스 포르피라이트의 작은 조각으로 구성된다. 
이전에는이 ​​품종을 대리석이라고 했지만 더 취약했다. 
각력암의 추출 및 가공은 재료의 취약성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큰 블록이 떨어져 나갔을 때 돌은 상당히 강한 단일체의 인상을 주었지만, 
추가 가공, 특히 연마할 때 다양한 크기의 조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성 이삭 대성당의 장식용 돌

1m 40cm 높이의 벽과 철탑의 지하 부분에는 흰색 세라베조(Seravezzo)와 
분홍색 티브디안(Tivdian) 대리석이 있다. 
티브디안 광물 프레임에는 직사각형의 수평으로 길쭉한 패널과 둥근 격력암 메달이 있다. 
주각은 넓은 슬레이트 주각으로 바닥에서 끝나며 회색 대리석 바닥으로의 일종의 전환 역할을 한다. 

세라베조 대리석의 벽에는 약간 칙칙한 색조가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약하게 발음되는 패턴이 있다. 
흰색 카라라 대리석은 주 아이콘과 부 아이콘을 마주 보는 데 사용된다. 
주요 성상화 벽(iconostasis) 앞의 철탑 벽감과 난간 세부 사항도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주요 제단 측벽의 대리석 조각은 특별한 우아함으로 구별된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성당에는 3개의 청동으로 만든 대형 문이 3개 있는데 하나의 무게가 10톤 이라고 한다.
성경의 내용으로 장식한 조각들이 인상적이다.
출입문은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들어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출입문

10톤의 청동주물로 만든 출입문과 문에 새긴 정교한 조각들은 
하나의 청동주물을 통째로 조각한 것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성 이삭 성당은 옥상 전망대를 유료로 개방하고 있다. 
원통형의 125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10개 계단마다 번호가 쓰여져 있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 전망대에 올라가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 지는데 
도시를 한눈에 볼수 있어 인기가 있는 곳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의 앞쪽의 첨탑이 구 해군성 본부 건물이고 뒤쪽의 첨탑이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의 피터와 폴 대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남쪽 방향으로 멀리 푸른 돔이 보이는 곳이 카잔 성당이다.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사진 뒤쪽에 황금색 돔과 첨탑이 보이는 곳이 그리스도 부활성당(일명 : 피의 구원성당)

 

성 이삭 대성당 전망대
성당의 지붕에는 중앙 꾸뽈(돔)과 작은 꾸뽈(돔) 4개가 있는데, 
꾸뽈은 모두 붉은색 화강암 기둥이 둘러싸고 있다.

 

[영상] Saint Isaac's Cathedral in Saint Petersburg, Russia 외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