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5 08:00 김삼웅

 

 

김근태가 학생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재야운동을 통해 추구해온 일관된 가치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치개혁을 통해 인권이 보장되고,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서민들의 생계가 보장되어야만, 이를 통해 평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1997년 12월의 대선을 앞두고 김근태는 어느 때보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김영삼 정권의 정치ㆍ정책 실패로 국가경제가 위기에 직면해 있고, 중소상공인들과 서민생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러 구원투수가 바로 김대중 후보라고 판단하였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대통령선거 수도권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대통령선거전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회의원, 국민회의 부총재의 직위에서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리더로서 최선을 하였다. 의정활동은 제쳐두더라도 지방유세, 언론상대 토론회 등 가능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권력에 대한 야심에서가 아니라 정권교체는 시대적 당위이고 사명이라고 인식한 때문이다.

더 이상 분단ㆍ냉전ㆍ군부독재의 잔재 세력이 권력을 독식하면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민족사를 오염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김근태의 솔직한 심경이고 염원이었다. 그래서 대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지난날 깨끗하고 꿋꿋하게 살아온 행적이 많은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대선에서 표로 연결되었을 터였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선에서 국민회의는 승리했다. 김대중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초 이회창 후보가 집권여당의 프레미엄을 업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50% 이상의 승세를 잡았으나, 두 아들의 병역문제 등이 불거지고, 김영삼 정부의 경제실정으로 인한 IMF 사태가 일어나면서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운 김대중의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여 중후반 이후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제15대 대선도 과거 선거처럼 집권세력에 의한 각종 용공음해와 불법 탈법의 선거운동이 자행되었다. 특히 김대중 후보에 대한 극심한 매카시즘 공세가 전개되어 선거전을 정책대결이 아닌 색깔론으로 몰아갔다. 보수족벌 언론사는 기사와 논평을 통해 노골적으로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배척하면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시키는 등 낯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대중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대규모 청중동원의 연설회 대신에 몇차례 TV토론회가 열려서 유권자들이 후보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제위기를 맞아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김대중의 역량이 높이 평가되었다. 여기에 DJP 연합과 여당의 분열이 작용하여 정부수립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창업과 쿠데타ㆍ혁명ㆍ정변ㆍ반정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권력변환이 있었지만, 피지배 계층이 평화적 방법으로 권력을 교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60년 민주당의 집권은 4월혁명을 통해 일어난 ‘혁명과정의 선거’로 취득한 정권교체이고, 1992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은 3당 야합으로 얻어진, 군사정권의 모태에서 발생한 것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민회의의 대선 승리는 김대중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김근태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긴 세월 동안 모진 고문과 박해를 받으며 싸웠던 것이다. 평화적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은 그의 오랜 꿈이고 소망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약체였다. 국회는 여전히 한나라당이 지배하고 지난 반세기 이상 군사정권과 유착하면서 성장해 온 거대 족벌신문과 지식인 그룹, 그리고 “정권을 빼앗겼다”고 앙앙불락하는 특정지역의 기득권 세력이 버티면서 사사건건 새정부를 헐뜯었다.

‘국민의 정부’의 권력은 탄생 때부터 많은 고민을 안고 출발했다. 김 대통령은 유효 투표의 40.3%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이회창 후보보다 겨우 39만 표 앞선 것이었다. 승부를 가른 이 39만 표는 김종필 총리의 지지기반인 충청권에서 나타난 김대중-이회창 후보간 표차와 정확히 일치하는 수치다. 김 총리가 공동정권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야당으로 입장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원내 제1당으로 막강한 국회 권력을 갖고 있었다. 39만 표의 격차에서 짐작되듯 표의 동서 양분 현상은 과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지난해 6월의 지방선거와 두 차례의 재ㆍ보궐선거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말하자면 김대중 대통령의 권력은 소수정권인데다 그나마 권력이 나뉜 연합 정권의 구조적 취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주석 3)


주석
3> 전영기,
, <월간중앙 WIN>, 1999년 2월호.


02.jpg
0.03MB
01.jpg
0.02MB

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7월 3일 열린 제184회 임시국회에서 국민회의의 대표연설자로 선정되었다.
정당대표의 국회 기조연설은 오랜 관행으로, 국회의원이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하지만 총재나 부총재급이 아닌 평의원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기회다. 김근태는 의정생활 1년여 만에 제1야당의 대표연설을 하게 되었다.

보좌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며칠 동안 대표연설문을 작성하였다.
대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국민회의의 당면 과제와 정책, 현실적 이슈를 많이 담았다. 대표연설은 개인의 정견ㆍ정책보다 당의 입장을 천명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치철학을 제시하는 기회로 삼았다. 반응은 뜨거웠다. 그의 위상이 한층 돋보이는 성공적인 연설이었다.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설문 제목은 <‘질서 있는 변화’로 ‘새정치’를 열자>였다.
김근태는 이날 연설에서 정부에 “대선자금 한보진실 밝히고 사과할 것” “중립내각 구성하여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할 것”과 “남북국회회담” “두 전직 대통령 사과하면 용서ㆍ화해” “자민련과 공동집권 실현으로, 국민기대 부응” 등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연설 요지.

‘질서 있는 변화’로 ‘새정치’를 열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당 야합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신한국당 정권은 총체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신한국당 정권은 정말로 엄청난 국민적 혼란과 국가적 혼돈을 낳고 말았습니다. 신한국당 정권에서 총리로, 당대표로, 장관으로 권력을 누려온 여당의 경선주자들은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뼈아픈 반성은 커녕 모든 책임을 김영삼 대통령에게만 떠넘기면서 권력잡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런 일입니다. 그런 태도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여당 경선에 정책대결은 없습니다. 줄세우기와 세몰이, 지역감정도 노골적으로 조장하고 있습니다. 국민분열 정권으로는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무한경쟁의 국제화 시대에 한 나라의 외교역량은 그 나라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외교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외교역량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당은 국제사회에서 오랜 교분과 일관된 태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런 실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의 중심에 서는 경제외교를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들로부터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신명과 의욕이 생겨야 합니다.

다가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새로운 세기를 여는 정부를 선택하게 됩니다. 돈 안드는 선거, 깨끗한 정치는 이제 움직일 수 없는 국민적 합의입니다. 이점에서 선거방송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의 확보는 정치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치개혁특위의 여야 동수구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지만 우리는 일단 국회를 열자고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경기의 규칙에 해당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논의하는 정치개혁특위 구성을 1:1로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수십년 동안 국회의 관행이기도 합니다. 이를 반대하는 신한국당 정권이 진정으로 정치제도 개혁에 나설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진정으로 정치개혁 의지가 있다면 ‘중대결심’ 운운할 것이 아니라 집권당 총재로서 정부여당의 안을 먼저 국회에 내놓아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92년 대선자금과 한보사태의 진상을 국민 앞에 밝히고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정권재창출의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중립내각을 구성하여 다가올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하겠다고 결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렇게 결단한다면 국민 모두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서 나와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역사와 국민 앞에 사과할 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질서 있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기업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에서 기업하기 가장 편한 나라로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구석구석 썩어서 돈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통하지 않는 이 숨막히는 사회에서 좀 공평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정의로운 사회로의 변화, 남북간 전쟁의 공포에서 평화와 통일의 시대가 열리는 변화, 세대 갈등에서 노ㆍ장ㆍ청이 하나로 화합하는 변화, 차별과 분열에서 화해와 통합으로 뭉쳐지는 변화, 행복한 가정이 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는 변화, 그리하여 신명나는 국민이 되고 신기운이 힘차게 세계속으로 뻗어나가는 변화를 국민여러분께서는 오히려 간절하게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야당에서 여당으로 정권을 교체할 줄 아는 나라만이 그런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유민주연합과 우리가 손잡고 두 당의 공동집권을 실현하여 국민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겠습니다. 국민 앞에 반드시 결실로 보답하겠습니다.
(주석 2)


주석
2> <새 정치뉴스>, 1997년 7월 7일~24일치.


01.jpg
0.08MB

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당내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국민회의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동교동계가 일사분란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주류가 되었다. 김상현ㆍ정대철 등 비주류가 있었지만, 경륜ㆍ투쟁ㆍ경력의 면에서 김대중의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오래 전부터 김대중의 역량이나 인격을 존중해왔으나 친동교동계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비주류의 위치에서 비판과 견제를 통해 당내민주화를 추동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믿고 그 길을 택하였다.
원칙과 정도를 중시해온 그의 경력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국민회의는 5월 19일 서울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대통령후보와 총재를 선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당내에서는 누가 봐도 대세로 굳어진 김대중을 추대하자는 측과 민주정당의 전통을 살려 경선을 하자는 측으로 갈라졌다.

김대중 진영은 하나마나인 경선으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고, 집권세력에 공작의 빌미를 줘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에 대해 비주류 측은 정권교체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민경선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김근태는 단연 국민경선제의 주장을 폈다. 언론을 통해 이를 밝히고 당기관지의 찬반 토론에 나섰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정권교체 실현위해 국민경선제 필요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한다. 천금같은 이번 기회에 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역사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국민의 5%도 안 되는 사람만이 김영삼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지난 3.5 보궐선거의 결과는 이를 입증한다. 그럼에도 우리 역시 국민에게 폭넓게 신망 받고 있지 못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유효한 지난 4.11 총선의 패배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권교체에 대한 염원이 현재의 야당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로 연결되고 있지 않은 오늘의 상황은 무엇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우리는 대선에서 YS라는 후보와 싸우는 것이 아니며 YS를 탈색한 후보와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누가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제1야당이며 민주정통세력인 우리 당이 먼저 해야 한다.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 양보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난점이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정권교체를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우리가 쇄신하고 국민적인 참여가 지원한다면 해 볼 수 있다. 국민에게 감동의 순간을 마련하고 준비해야 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국민경선제를 비판한다면 정권교체를 실현할 어떤 방안을 가지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경선제는 야권에서 대통령후보로 나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합의하여 경선의 관리주체를 만들고 후보로 등록한 다음, 등록한 후보들이 10~15개 권역을 순회하며 국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호소하고 1일 당원으로 등록하는 선거인단을 모집하여 경선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때 각 권역은 인구비례에 의해 대의원 숫자가 배정되며 이 숫자를 가장 많이 확보한 후보가 야권의 단일후보로 확정되어 후보지명 대회를 거친 뒤 본선에 나서게 된다.

이미 일본 신진당과 대만 민진당에서도 이와 유사한 국민참여 경선의 실시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두 나라에 비해 정치의식 수준이 뒤지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더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다. 야당간의 정치적 흥정만으로 본선에서 승리 가능성을 높일 수는 없다.

국민경선제가 필요하다.

첫째, 야당이 나뉜 상태에서 후보가 난립하여 서로 대립하는 것보다 출마를 원하는 야당후보가 공정한 관리하에 국민경선을 통해 야권의 단일후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야권의 힘의 소진을 막고 국민의 힘을 결집시키게 될 것이다. 비용의 문제는 경선참여 후보간의 약정과 선언을 통해 깨끗한 선거의 모범을 야당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둘째, 국민경선은 전국의 지역을 순회하며 시차를 두고 시행하는 것이며 국민과 언론의 감시 하에 치러지는 것이며, 국민과 언론의 감시 하에 치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당이나 안기부의 공작을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여당이나 안기부에 의한 동원이 발각될 경우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쪽은 오히려 여권일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공작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정치와 정당의 쇄신을 이루고 국민이 정치의 주인으로, 정당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국민과 정당, 정치의 거리가 좁혀져야 한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지우고 국민 스스로가 공직후보를 공천하는 제도의 정착이 정치의 선진화를 앞당길 것이다.

국민이 원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이 단결하고 쇄신하여 수권세력으로 결집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국민의 뜻을 받들어 정치쇄신과 정당쇄신을 이루고 야권의 후보를 공개적이고 엄정한 경선을 통해 단일화 할 수 있다면 다가올 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국민회의는 경선제를 받아들여 전당대회를 열었다.
대의원 4,368명과 참관인 등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대회는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대중이 총투표수 4,157표 중 3,223표(77.5%)를 얻어 967표(21.8%)를 얻은 정대철을 크게 눌렀다. 총재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73.5%의 득표로 김상현을 압도했다. 국민회의는 국민경선제를 채택함으로써 모양새도 보기 좋고 국민의 관심도 불러모아 전당대회가 흥행을 이룰 수 있었다. 김근태는 크게 보람을 느꼈다.

이날 전당대회는 또 부총재 11명도 선출하였다. 김근태는 자력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제 영입케이스 부총재에서 당원들의 직선에 의해 부총재가 된 것이다. 그것도 동교동계의 지원이나 비주류 측의 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선택으로, 자력에 의해 당선된 것이다.

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유신과 5공체제에서 온 몸을 던져 싸우다가 입당한 김근태를 높이 평가하여, 계파의 소속감을 떠나서 그를 지지한 것이다.

김대중이 국민회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면서 대선 정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한국당은 보수언론을 매개로 대대적인 DJ 흠집내기에 나섰다. 예의 색깔론과 천문학적인 정치자금 은닉설이었다.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는 김대중이 670억 원 규모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허위로 밝혀졌다. 대선을 앞두고 ‘아니면 말고’ 식의 저질 폭로전이었다.

오히려 14대 대선 당시 신한국당이 3,000억 원 규모의 대선자금을 기업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뒷날 드러났다.


주석
1> 국민회의 기관지 <새정치뉴스>, 1997년 4월 1일~10일치.


01.jpg
1.06MB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2 08:00 김삼웅

 

사람이 출세하면 목이 굳어진다고들 한다. 특히 정치 속물들이 의원 뱃지를 달거나 청와대에 들어가면 목에 기브스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근태는 늘 자성하는 마음으로 의정활동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어려웠던 지난 날을 잊지 않으려고 서민들의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틈이 나면 지역구의 어려운 고아나 독거노인들을 찾았다.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수배 중일 때 가족의 생계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친구들이 가족을 격려하려고 김근태의 집을 찾았다가 단칸방에서 아내 인재근과 갓난 아기 병준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을지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김근태는 평생을 서민들을 위해 살고자 마음을 다지고 다졌다.

그리고 겸손하고 도덕적 바탕에서 원칙과 상식을 지키면서 정치활동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자세는 재선에 이어 장관이 되고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강경한 투사라는 인상을 먼저 떠올립니다. 정계에 나온 뒤의 나의 모습이나 행보를 보고서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지하고 원만한 것은 좋은데 유약해 보인다, 너무 점잖고 도덕적이다. 논리적이어서 차가워 보인다고도 합니다. 최근에는 균형감각이 있고, 내재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는, 과분한 평가도 듣곤 합니다.

칭찬이든 비판이든 모두 달게 듣고자 합니다. 또한 반성도 하고 때론 힘도 얻습니다. 그런 평가들이 ‘나’라는 사람 됨됨이와 꼭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크게 틀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은 도덕적인 자신감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갖추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더 나은 내일에의 비전을 가질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내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주석 18)

국회의원 김근태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투명한 의정활동으로 우선 유관기관과 기업인들이 긴장했다. 그리고 여의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각종 로비스트들이 겁을 먹었다. 그에게는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후원금이 모이지 않았고, 명절 때이면 국회 의원회관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선물 꾸러미가 그의 방은 피해갔다.

새로운 정치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나는 그 출발점이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민주적 공천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감기관에는 후원회 초청장을 돌리지 않았다. 한 번도 촌지를 주지 않은 나를 이해해주는 기자들이 고맙다. 당론과 다르게도 투표할 수 있는 크로스보팅과 표결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는 표결실명제를 통해서 정책 투명성을 높일 수 있게 되면 참으로 좋겠다.
(주석 19)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은 김영삼 정권의 야당 파괴를 막고 차기 집권을 위해 자민련 총재 김종필과 연합을 서둘렀다. 두 총재는 5월 4일 국회에서 전격 회동하고 대여 공동투쟁을 다짐했다. 이것은 사실상 DJP공조의 신호탄이 되었다. 두 김 총재는 △ 검찰의 표적수사 중단 △ 과반수 확보 중단 △ 입당자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면서,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15대 국회 원구성을 거부키로 합의했다.

또 5월 26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함께 대규모 합동집회를 열고 양당공조를 통해 ‘총선민의 수호투쟁’을 결의, 등원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두 당의 공조체제는 9월 정기국회에서 더욱 강화되어 10여 차례의 합동의총과 정책토론회, 양당 인사들간 식사모임 등으로 이어졌다.

1997년의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자민련이 후보 단일화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의원내각제 개헌에 대해 “15대 국회에서는 어려우나 16대에 가서는 추진할 수도 있다.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제 개헌을 선거공약으로 내걸 수 있다”는 등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이와 관련 김근태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오래 전부터 절체절명의 가치로 추구해 왔다. 박정희 정권 이래 36년 동안 철옹성을 쌓아오며 구축된 특정 지역의 패권주의를 깨뜨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현실정치의 장벽을 지켜보면서도 5ㆍ16군사쿠데타와 유신정변의 핵심 중의 한 사람인 김종필과의 정치연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의원총회와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하는 자민련과의 후보단일화 에 찬성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당 부총재의 위치에서 이같은 발언은 국민회의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김대중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원칙과 대의를 중시해온 그로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김근태가 원칙과 타협, 이상과 현실, 가치와 실용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대세는 이미 ‘DJP연합'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서둘렀다. 정치적 ‘친정’이기도 하지만, 옛 재야 시절 상당수 동지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은 4ㆍ11총선에서 대부분 낙마하고, 당내 갈등과 분열로 심한 내홍을 앓고 있었다. 자민련과의 연합도 중요하지만 정통민주세력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옳게 또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직 그러한 사실만으로서 능히 불행을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라는 베토벤의 말이 이즈음 김근태의 심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석
18> 김근태, <부드러운 힘>, <희망은 힘이 세다>, 22~23쪽.
19> 김근태, <시린 겨울을 보내며>, <희망은 힘이 세다>, 53쪽.


02.jpg
0.06MB
03.jpg
0.04MB
01.jpg
0.63MB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21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심성이나 행동방식은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나서길 즐겨하지 않았다. 직업 정치인으로서는 적격이지 못한 체질이다. 강준만 교수(전북대)의 평가다.

“김 부총재가 너무 솔직한 면이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지적해야겠다. 아니 그건 둔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오로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화를 냈겠지만, 나라 생각 이전에 중요한 게 개인의 밥그릇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제1야당 부총재 직함의 3선급 초선의원으로서 항상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한국의 정치판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강성발언이 항상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끄는데 비해 김근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발언을 하여 매스컴에서 묻히기 마련이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민첩하지 못하고 사색형이어서 여의도 정가에서는 ‘햄릿’이라는 평이 나돌았다.

요즘 김근태 부총재에게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햄릿’이 그것이다. 늘 고뇌하고 망설이는 듯한 태도가 그런 이미지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정치인 생활 동안 그는 선택이 쉽지 않은 일들을 연속적으로 겪어야 했다. 민주당에 입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했고, 국민회의가 창당되면서 민주당이 쪼개졌다. 그는 김 총재의 복귀와 신당 창당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4ㆍ11 총선 이후에는 신한국당의 야권에 대한 차별적인 검찰 수사와 여소야대 뒤집기 정국이 전개되었다.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이루면서 대여투쟁에 나섰고, 두 당의 연대는 대선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는 과거 민주세력을 탄압하던 보수세력과 연합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전술적으로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였다. 신한국당의 법안 날치기를 규탄하는 노동자들과 민주세력의 투쟁이 가속화되는 정국도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민회의는 뭐하는 당이냐, 김근태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하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이래저래 그는 괴롭다.
(주석 14)

김근태는 그러나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초심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애초 권력을 탐하여 정계에 입문한 것이 아니었기에 천박한 언술이나 대중영합의 포풀리즘에 기대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정치권은 비판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야유와 냉소를 고집한다면 정치권은 아예 붕괴돼 버릴 것이다. 정치권이 점차 발전되고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평가해 주는 일도 중요하다. 희망을 갖고 격려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뇌와 주저의 심경이었다. 좌절감도 깊었다. 반대로 투지도 생겼다. 정치세계는 나에게 ‘깊은 고뇌’와 ‘냉철한 교활함’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진실한 결단’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이에 응답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올 것이라 믿는다. (주석 15)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제도권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맑은 이성으로 판단하고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치판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판치는 곳이다. 여간 쉽지가 않았다.

현실 제도정치는 여전히 낯선 동네이다. 대단한 관심과 추적이 오랫동안 있어왔고 군사독재에 대항해 함께 어깨를 걸고 수십년 지내왔기 때문에 퍽 많이 안다고 내심 자부해왔는데도 그렇다. 우선 대표적인 지도급 인사들 말고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해서 그렇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말하는 어법과 문법도 다르고 역사성도 분명히 다른 바가 있다. 늘 신문이나 방송에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도 또 다른 긴장과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주석 16)

 



초선의원 김근태가 낯선 국회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을 즈음, 그가 예측한대로 총선 뒤의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날이 갈수록 실정과 부패가 거듭되면서 검찰과 정보기관에 정권의 안위를 의탁하는 형국이 되었다.

정부여당은 4ㆍ11 총선에서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야당 및 무소속 영입작전을 계속했다. 야권은 “정보기관이 나서 사법처리 등을 빌미로 공간과 협박으로 야당ㆍ무소속 의원들을 입당시키고 있다.”고 비난할만큼 정부 여당은 노골적으로 야당의 파괴활동에 나섰다. 이로써 자민련은 정당 존립 자체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실제로 민주당, 자민련, 무소속의원 10여 명이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회담을 거듭하면서 정부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공동전선을 폈다. 김영삼 정부의 독주는 계속되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여당 단독으로 본회의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등 11개 안건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군사정권의 행태를 방불케 하였다.

한때 김근태가 몸담았던 통합민주당은 4ㆍ11총선에서 참패,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정부 여당의 ‘당선자 빼내기 공작’으로 당선자 15명 중 5명이 이탈하였다. 김원기ㆍ장을병 등 비주류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발족시키고, 총선 후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당선된 이기택 측은 이를 ‘해당행위’로 규정하여 민주당은 사실상 분당 상태가 되었다. 지리멸렬이었다. 정국은 1997년 겨울의 대선을 앞두고,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야권통합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도대체 야당에 들어간 김근태는 뭐 하고 있는 거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재야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질책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야당출입 기자들도 왜 본격적으로 발언을 하지 않는가 하고 걱정과 우정의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아직 낯설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착종이 순차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아 형광등처럼 껌벅껌벅 하기도 한다.… 지금은 참고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노리는 그런 방향이 아니라 보다 많은 책임 있는 사람들과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와 다리를 어떻게 놓아갈 것인가를 준비하고 타진하고 결단할 그 시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주석 17)

김근태는 대선을 앞두고 야권과 재야가 통합하는 ‘민주대통합’의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주석
13>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계간) 제10호, 70쪽.
14> <월간 말>, 1997년 2월호, 김경환 기자.
15> <일요서울>, 1999년 1월 24일, 엄상현 기자.
16> 김근태, <희망의 근거>, 420~421쪽.
17> 앞의 책, 422쪽.

  



01.jpg
1.07MB
02.jpg
0.87MB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0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초선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 외무통상위에서 전반기 의정활동을 시작하였다.
외통위는 국회의원들이 기피하는 상임위지만 그는 당당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의정활동을 하였다. 남북관계와 주변 4강외교에 대한 전문지식을 높이고자 관계 자료를 읽고 상임위의 정책질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가 따랐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 중의 하나였다. 국회 외통위의 가장 뛰어난 의원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후반기에는 재정경제위로 상임위가 바뀌었다. 재경위에서도 그의 활동은 돋보였다.

김 의원은 정치적 경력을 쌓기 위해 특유의 끈기와 성실로 의정활동에 전념하는 방식을 채택한 듯하다.
그는 15대 국회 전반기 의원평가에서 통일외무위원회의 가장 뛰어난 활동을 한 의원으로 선정됐다.(중앙일보 제4회 의원평가).

후반기 들어 재경위로 상임위를 옮긴 김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우리나라 법인(法人)의 기밀비ㆍ접대비의 규모를 밝혀내는 등 눈부신 활동력을 보여줬다. 한건주의나 비약적 성장보다 치밀한 사전준비와 실력 쌓기를 중시하는 장기전ㆍ지구전(持久戰)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지구전적 인물’이다. 혹은 대기만성(大器晩成) 형일 수도 있다.
(주석 10)

김근태는 30년에 걸친 재야투쟁의 길에서 현실 정치인이 되어 지역구를 관리하고 민원을 챙기는 일에 능숙하지 않았다. 또한 오랜 재야활동으로 인해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한계도 따랐다. 하지만 몸에 밴 성실성과 부드러운 심성, 공부하는 모습은 곧 여의도 정가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근태 의원을 몇 번 만나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보통 ‘재야출신 치고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역시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재야’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재야’라는 말이 주는 비타협성, 강경함, 완고함 같은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답변이 이어지곤 한다.

사실 ‘진지하고 매너가 부드러우면서 사고가 유연하고 합리적' 이라는 김 의원에 대한 평가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단순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한 시대의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품성들을 그가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 성품이 갖춰졌다는 것과 정치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정치리더로 발돋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대중성이다. 타고난 대중성이 부족하면 대중적 이미지를 창조해내려는 노력도 리더를 꿈꾸는 정치인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석 11)

 



원칙과 정의를 주장하던 재야운동에서 현실정치인의 길은 그에게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정치적 쇼를 할 줄 모르고, 여느 정치인들처럼 언론을 활용하는 방법도 몰랐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신문 사진과 TV화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보도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자리를 선정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 부총재는 확실히 낙제생임에 틀림없다. 지난 3일 민주당 서울시장 경선대회를 참관할 때도 그는 단상 맨 뒷줄 한귀퉁이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다른 부총재들이 앞줄 중앙에 당당히 자리를 잡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또 지난달 28일 이기택 총재 일행과 대구 가스폭발사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일행의 후미로 밀려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있었다.

다소 소극적인 그의 태도에 대해 주변에서 조언도 많았다 한다. 특히 이해찬 의원으로부터는 “김 부총재가 소극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개인은 물론 국민회의, 재야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과감히 앞에 나서야 한다”는 코치를 받기도 했다고.

그는 민주당에 입당한 국민회의 출신이 당내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가 오는 통합협상에서 합의된 8월 전당대회 이후 부총제직 보장을 사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처음부터 개인의 몫을 챙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총재직을 사양하는 대신 국민회의에 약속된 지분을 더욱 확고히 보장받기 위한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정치판에는 도저히 통하지 않을 만큼 순진했음을 인정해야 했다.……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성품의 김 부총재지만 이에 대해서는 “당내 현실은 참으로 야박한 것 같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주석 12)


주석
10> 전영기, 앞의 책 <월간중앙 WIN>, 84쪽.
11> 앞과 같음.
12> <뉴스메이커>, 1995년 5월 18일자, 김근철 기자.


01.jpg
0.08MB
02.jpg
0.61MB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19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총선을 앞둔 1996년 3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제15대 총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해서는 국민회의가 원내 제1당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이번 총선은 김영삼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의 장입니다. 우리 국민은 이번엔 반드시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당은 정치노선에 따라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여야가 정치적 노선이나 역사적 뿌리에 있어서 별로 다르지 않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되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독일과 프랑스도 브란트와 미테랑이 집권하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주석 6)

김근태는 총선 이후의 정국을 진단한다. 대단히 예리한 분석이라는 평이 따랐다.

대략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먼저 신한국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제1당이 되었을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민주당과 자민련, 무소속을 끌어들여 여소야대를 뒤집으려 할 겁니다. 두 번째는 국민회의가 제1당이 되는 경우지요. 그러면 신한국당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민주당, 자민련과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시도할 겁니다. 세 번째는 어떤 당이 제1당이 되든 상관없이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가 대연정을 이루는 경우입니다. 실현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지만 그래도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주석 7)

김근태는 진정으로 재야와 제도권 야당의 결합을 바라왔다. 그것만이 공룡화된 군사정권 후예들의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19세기 말 개화파와 동학농민혁명 세력이 결속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총선 후에 격렬한 징계개편이 올 겁니다.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면 다시 한번 기회가 올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독자정당을 주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주관적인 열정과 초조함이 그 내면에 있어요. 그런 한편 개인적인 입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참으로 걱정스러운 상황입니다. 모두 다 눈앞의 현실만 염두에 두고 있지 중장기적인 계획이 없어요. 난 사실 이 기획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과연 진보진영의 집권전략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어요?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거야. 이건 일종의 거짓이야. 진정한 집권전략을 또다시 교란시키는 것이고... (주석 8)

그는 아직도 재야 일각에서 독자정당 준비를 하고 있음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지난 시기 자기의 생활을 헌신하고 바쳤던 젊은이들에게 간곡히 충고하고 싶습니다. 깊은 고뇌를 하는 것은 좋지만 상식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지요. 소위 진보진영이라면 70, 80년대에 군사독재와 몸으로 싸운 세력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들만으로 과연 집권이 가능하겠습니까? (주석 9)

김근태는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서울 도봉갑구에서 당선되었다.
1995년에 사면복권이 되어서 공직 후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민자당의 양경자 의원을 누르고 원내진출에 성공했다. 정치인으로서는 늦은 49세의 초선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재산은 2억 8천 900만으로 최하위의 수준이다. 이때 종로구에서 당선된 이명박의 재산은 262억 6,200만원이었다.

김근태는 당선되었으나 국민회의는 이번 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신장하지 못하였다.
선거결과 전국 253개 지역구 가운데 신한국당 121, 국민회의 66, 자민련 41, 민주당 9, 무소속 16석이었다. 전국구는 신한국당 18, 국민회의 13, 자민련 9, 민주당 6번까지 당선되었다.

국민회의는 전통적인 텃밭으로 알려진 수도권에서 1당을 신한국당에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47개의 의석이 걸린 서울에서 겨우 18석을 차지, 27석을 얻은 신한국당에 패배했다. 종로 이종찬, 중구 정대철, 성동을 조세형, 관악갑 한광옥, 중랑을 김덕규, 동작을 박실, 영등포갑 장석화 등 국민회의 중진들이 줄줄이 낙선되었다.

야권분열과 한 해 전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가 서울지역을 거의 휩쓸다시피한 데 대한 유권자의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었다.


주석
6> <월간 말>, 1996년 3월호, 52쪽, <김근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김경환 기자.
7> 앞의 책, 52~53쪽.
8> 앞의 책, 54쪽.
9> 앞의 책, 53쪽.


01.jpg
0.87MB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18 08:08 김삼웅

 

 

김근태가 국민회의에 참여할 당시 야권은 크게 분열돼 있었다. 김대중이 신당을 창당하면서 신당에 참여하지 않는 통합민주당으로 나누어졌다. 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민주당)으로 발돋움하면서 이기택 대표를 제치고 김원기ㆍ장을병을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1995년 12월 6일, 김영삼의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어 여전히 여당이 되고, 김대중이 국민회의를 창당,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또 이 해 벽두 김종필이 의원내각제를 기치로 내걸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 6ㆍ27 지방자치선거에서 크게 약진,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보수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언론에서 ‘신3김시대’라고 부를만큼 세 김씨가 호각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정통야당 세력이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는 무엇보다 야권통합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김근태는 사분오열, 지리멸렬 상태에서 노선투쟁에 빠진 민주당보다 국민회의를 택해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김대중을 통한 민주세력의 집권이 가장 가능성이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야권의 통합이 급선무였다.

민주대연합이 이뤄지면 개혁과 민주주의가 힘을 얻고 한반도 상황도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난관 때문에 이것이 당장은 힘들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야권통합을 주장한 것입니다. 강력한 야당은 김영삼 대통령의 수구화를 저지하고 그를 견인해 민주대연합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대교체는 과거 양 김씨가 민주화투쟁에 기여한 바를 냉소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대중을 동반하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지, 형식에 매달리면 세대교체만 한다고 지역정치 구도나 낡은 정치행태가 타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석 4)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있듯이 한국의 정치판은 변화와 변동의 파고가 심한 편이다.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는 듯 했지만 정당은 여전히 특정 인물중심으로 개편되거나 운영되었다. 국민회의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의 리더십에 크게 의존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신당창당에 즉각 검찰권을 발동하여 탄압했다.
국민회의 소속 박은태ㆍ최락도 의원과 최선길 노원구청장, 이창승 전주시장이 이런저런 이유로 구속되고, 종로구청장과 은평구청장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었다. 신당에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들의 참여를 막으려는 일종의 정치적 보복행위였다.

이즈음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정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어서 5ㆍ18특별법 제정과 특검제 도입을 둘러싸고 정국은 또 한 차례 격랑에 빠져들었다.

국민회의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정기국회가 끝난 연말에 지역구 조직책 선정작업에 들어가 김근태는 20년 이상 살아온 서울 도봉구에 신청, 조직책으로 선정되었다. 이제 야당의 지구당위원장이 된 것이다.

김근태는 원외 지구당위원장과 제1야당의 부총재로서 정당(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의 정당구조상 원외의 부총재는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원칙을 지키면서 국민회의의 집권채비에 정력을 쏟았다. 이 시기의 김근태를 한 언론인은 ‘개방적 명분주의자’로 분류하였다.

95년 천정배ㆍ유선호ㆍ김영환ㆍ박용석 씨 등 쟁쟁한 인사들을 이끌고 마지막 재야인사로 제도권에 진입할 때도 민주당 지분 10%를 인정받고 들어가는 등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당시 김대중 총재와 대등한 협상당사자 자격이었다.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자기지분을 고집하지 않고 ‘정치를 배우는 자세’를 취했던 것은 김근태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아마추어 출신의 정치력의 한계 탓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근본을 중시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며 동시에 현실정치의 힘의 관계를 인정하는 실사구시형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말과 명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실세계의 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에서 그는 ‘개방적 명분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겠다.
(주석 5)


주석
4> 앞의 책, 115쪽.
5>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 <월간중앙WIN>, 1999년 1월호, 83쪽.

 


01.jpg
1.16MB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17 08:00 김삼웅

 

 

1995년은 김근태에게 새로운 삶의 시발점이 되었다.
황량한 재야에서 척박한 야당인이 된 것이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재야와 야당 사이에 큰 장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야당은 제도권에 속한다. 정당은 복수정당제가 헌법상으로 보장되면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한 시대의 해맑은 영혼이 시대정신을 구현하고자 들어 선 야당은 재야와는 또 다른 집단이었다.
시대의식이 없는 출세주의자들도 많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한 정상배도 적지 않았다. 유신ㆍ5공시대에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권력을 탐하는 기회주의자들, 돈 보따리나 한 때의 지명도로 비례대표 또는 말뚝만 박아도 당선되는 지역에서 공천받아 선량노릇을 하는 국회의원도 없지 않았다. 물론 반독재 투쟁에 몸 바쳐온 정통 야당인이 많았다.

김근태는 과거 두 차례에 걸쳐 정치인이 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1985년 2ㆍ12총선 당시 김영삼으로부터 종로구 출마 권유, 두 번째는 1991년 투옥 중일 때 김대중으로부터 신민당 부총재를 제의받았다. 김대중은 평민당에서 재야 인사들을 영입, 신민당으로 개편하면서 이우정ㆍ조세형 두 의원을 특사로 보내 입당을 제의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 다 운동진영 내부 조건이 성숙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야당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근태가 정치참여 바꿔 말해서 야당에 입당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94년까지 ‘마지막 재야’로 남아 있던 그는 1995년 초 평민당 후신인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통합해서 새민주당을 결성하자 부총재 직함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민주세력의 집권을 위해서 참여한 것이다. 정국이 크게 요동치고 있을 때였다.

제14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에 이어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통일운동에 전념해 온 김대중이 1995년 7월 1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집권 초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혁을 추진했던 김영삼 정부가 급속히 보수화하면서 국정운영의 난맥상을 보였다.

문민정부의 총체적 실패를 지켜보던 김대중은 그 대안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고, 6ㆍ27 지방자치 선거를 진두 지휘, 야당의 압승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국민회의는 8월 11일 신당발기인대회에 이어 9월 5일 창당대회를 열었다. 김근태는 김대중으로부터 신당 참여를 권유받았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실패로 자칫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게 되고, 남북관계는 전임 노태우 정부보다 훨씬 후퇴하고, 서민생계는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여기에 각종 대형참사까지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국정을 바로 잡을 대안세력이 요구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부총재로 영입되었다.
민주당이 이기택파와 반이기택파로 분열되어 심한 갈등을 빚으면서 김근태는 김대중의 국민회의에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부총재에는 김근태를 비롯, 김영배ㆍ박상규ㆍ신낙균ㆍ유재건ㆍ이종찬ㆍ정대철ㆍ조세형이 각각 선출되었다. 대부분 현역 의원이다.

지도위원에는 권노갑ㆍ길승흠ㆍ김봉호ㆍ김상현ㆍ김태식ㆍ김희선ㆍ라종일ㆍ유준상ㆍ신순범ㆍ신용석ㆍ안동선ㆍ이용희ㆍ정영모ㆍ정희경ㆍ천용택ㆍ한광옥ㆍ허재영, 원내총무에는 신기하, 사무총장에는 조순형, 정책위의장에는 손세일, 지방자치위원장에는 장석화, 대변인에는 박지원이 각각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제1야당의 최고지도부에 진입하게 되었다. 48세, 정치인으로는 늦깍이었다.

 



간디가 가는 길이 있고 네루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재야운동은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길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사회운동의 길은 간디의 길이고 정치운동의 길은 네루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은 서로 다르지만 지원하고 협력하는 길입니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제까지 걸어온 간디의 길에서 네루의 길로 접어들었다.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이 다른 것 같지만 목표와 지향은 다르지 않는 것이었다. 김근태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물론 내 개인적으로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을 동시에 다 갈수는 없지요. 나는 이제 네루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간디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함께할 생각입니다. 국민회의(재야 단체-필자)에서 김상근 목사님과 함세웅 신부님을 상임대표로 하고 저를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뽑은 것도 간디의 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인정한 것이지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도덕적 정당성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주석 2)

김근태는 자신의 행로를 두고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리고 해방 뒤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위대한 영혼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 투쟁을 벌일 때, 위대한 현실주의자 네루는 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간디에게는 간디의 길이, 네루에게는 네루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홀홀단신으로 평양으로 떠나시던 김구 선생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사진 속에서 선생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만일 그때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3)


주석
1> 조유식, <길 떠나는 김근태의 화두>, <월간 말>, 1995년 3월호, 113쪽.
2> 앞의 책, 114쪽.
3> 김근태, <기억에 관한 소고>, <희망은 힘이 세다>, 19쪽, 다우, 2001
.


02.jpg
0.87MB
01.jpg
2.84MB

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6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93년 7월초 미국 미시건대학의 초청으로 다시 미국을 방문하였다.
로버트 케네디상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어진 수배와 투옥으로 남들이 이웃집 드나들듯 하는 미국행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미시건대학은 초청장과 함께 여비 일체와 체류비까지 부담하여서 방미에 달리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미시건대학에서 특별 강연을 하기로 하였다.

김근태는 7월 10일 미시건대학 대강단에서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주의의 전망>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청중의 질문도 받았다.

당시 국내정세는 김영삼이 취임하면서 공직자 재산공개와 노태우 정권의 최대 의혹사건으로 떠오른 차세대전투기 도입 의혹 감사원 감사 등 개혁 드라이브로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김대중이 없는 민주당은 야당의 트레이드마크인 ‘개혁’을 정부 여당에 빼앗긴 채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위협받고 있었다.

김근태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민주주의를 전망하는 연설문을 준비하였다. 그는 대단히 합리적이어서 맹목적인 반대나 비난을 위한 비난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러나 현상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가식적인 것과 진실한 것을 구분하고 평가하는 예리한 지성을 갖췄다. 이 연설문에서도 그런 부분을 찾게 된다.

 



김영삼 정권 수립 이후 특히 개개인의 시민은 상당히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더 이상 공포와 모욕감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선거과정에서 찬성과 반대 어떤 쪽이었던 간에 자신들이 직접 참여하여 이뤄진 결과로 수립된 정부이고, 민간 출신이 최고 권력자가 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 여하튼 지난 시기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이제 그 고통스런 대결과 도덕적ㆍ정치적 책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대중적 분위기도 일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있다”라는 지배적 언술의 반복과 일부 비판적인 운동그룹의 ‘지금은 진보적 수준을 향한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주장도 결과적으로 더 이상 민주주의 실현을 둘러싼 논쟁과 대결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만들었다.
(주석 18)

김근태는 초기에 김영삼 정권의 실체를 벗겼다. 본질적으로 군사정권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아직도 감옥에는 많은 정치범이 있다. 지난 시기 절차적 민주주의를 난폭하게 유린했던 국가보안법은 개폐되지 않았으며, 최고 권력자는 앞으로도 계속 국보법을 유지하겠다고 천명하였다. 독소조항이 웅크리고 있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이나 노동관계법도 그대로이다. 이렇게 볼 때 최소한의 기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부분적 자유화는 실현되고 있으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석 19)

 



김근태는 두 차례나 국보법과 집시법의 희생자이고, 원래 노동운동 출신이기에 노동관계법의 독소조항이 얼마나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을 옥죄이고 있는가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이같은 악법이 개폐되지 않고 있는 ‘문민정부’를 진정한 민주정부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관해서도 예리한 메스를 가한다.

개혁이 지배적인 언술이 된 것은 김영삼 정권의 성립 이후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는 ‘개혁’이라는 슬로건 속에는 시대정신이 관철되고 있는 측면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 양측면은 반드시 상호배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요구로서의 진정한 ‘개혁’을 보다 힘차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이 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해 우리는 비판적으로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조건상 그리고 힘의 관계로 볼 때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개혁 이외에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는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함축이 그 속에 담길텐데 과연 그럴까? ‘개혁’이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 개혁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기보다 그것을 오히려 제한하고 망상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주석 20)

 



김영삼 정부의 ‘개혁’을 이처럼 예리하게 분석한 학자ㆍ언론인ㆍ야당정치인은 드물었다. 문민 정부의 개혁드라이브는 제도와 구조개혁이 아닌 현상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1년이 못가서 국회날치기, 남북갈등, 노동자탄압 등 ‘유사문민정부’ 로서의 허상을 드러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군부독재는 지역감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80년 이후 광주는 민주화 실현의 대장정에서 희생양이었고, 저항의 근거지였다. 호남에 적대하는 지역감정은 이제 민주주의 실현을 반대하는 악성의 퇴영적 본질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렇다면 이것은 이미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성과 양심 그리고 민주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까지 되고 있다해야 할 것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회피하면서 그것을 역사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선언하는 이른바 ‘문민정부’를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주석 21)


주석
18> 김근태, <희망의 근거>, 23쪽.
19> 앞의 책, 23~24쪽.
20> 앞의
책, 25쪽.
21> 앞의 책, 28쪽.

 


02.jpg
0.7MB
01.jpg
4.66MB
03.jpg
2.84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