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5 08:00 김삼웅

 

 

 

김근태가 대선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개인적 야망때문만이 아니었다.
원내에 진출한 이래 동료 의원들과 언론, 국민은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고, 여론조사에서 ‘차기’ 유력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민주화운동 전력과 능력, 신사적인 의정활동이 드러난 것이다.

김근태는 1998년 8월, <신동아>가 실시한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에 선정되고, <뉴스피플>의 1999년 1월에 ‘가장 기대되고 호감가는 정치인’ 1위에 뽑혔으며, 4월에는 <일요신문>의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리더’ 1위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 27일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가 정치부 기자 202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정직성, 언행일치, 공정한 처신, 모범적 의정활동 등의 항목에서 압도적인 득표를 기록한 김근태를 백봉 신사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그는 네 차례나 이 상을 수상했다.

앞의 <신동아>가 ‘의원들이 뽑은 상대당의 우수의원’(설문응답 171명)에서 야당의원이 뽑은 우수 여당의원에 ‘실력 및 성실성’의 항목에서 김근태(8표)ㆍ조순형(6표)ㆍ정세균(4표), ‘매너’ 부문에서 김근태ㆍ김원길ㆍ강창희ㆍ이협ㆍ조순형ㆍ조순승 순위였다. 여당의원이 뽑은 우수 야당의원은 이미경ㆍ김기춘 등이 윗자리를 차지했다.

<시사저널>이 1999년 11월 실시한 ‘21세기 한국을 이끌어 갈 가장 적합한 정치인’의 여론조사는 김민석(1), 이회창(2), 이인제(3), 김근태(4), 노무현(5)의 순위로 선정되고, <한겨레21>이 2000년 5월 8일 국회의원 당선자 273명을 대상으로 ‘네티즌이 뽑은 16대 국회 예비스타’에는 김민석ㆍ임종석ㆍ추미애에 이어 4위에 올랐다. 2000년 6월 25일부터 4일간 사이버 정치증권 시장인 포스탁(www.posdaq.co.kr)이 시민 1,031명을 대상(복수응답 7,217표)를 상대로 실시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20~30대 네티즌들은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후보 가운데 김근태 의원을 가장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근태가 894표(12.4%)로 최다득표를 하고, 한화갑 881표(12.2%), 이인제 829표(11.5%), 정동영 811표(11.2%), 박상천 849표(9.0%), 김민석 644표(8.9%), 추미애 507표(7.0%) 순이었다.

<뉴스피플>은 1999년 12월 16일치에 ‘21세기 한국을 이끌 뉴리더 21인’을 선정 발표했다.
이회창, 김대중, 이건희, 정몽준, 박원순, 김근태, 이인제, 정몽구, 김민석, 정명훈, 정주영 순이었다. 같은 무렵 <경향신문>이 조사한 국회 여야 의원을 통틀어 가장 진보적 의원에는 김근태(60), 이부영(31), 김문수(20), 김원웅(19), 임종석(19), 김민석(12), 이창복(11), 이재정(10), 이해찬(7)으로 김근태가 진보의 기수로 선정되었다.

 



 

대학교수들이 실시한 국회의원 299명 중 가장 진보성향의 국회의원에는 김근태가 압도적으로 1위에 뽑혔다. 지식인과 정치부 기자들은 그를 ‘차기 1순위’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뉴스메이커> 1999년 12월 9일치는 ‘차세대 지도자 집중분석 시리즈’를 싣고 김근태 국민회의 부총재를 ‘집중분석’했다. 이 기사는 ‘전문가들이 지적한 10대 장점과 10대 단점’을 제시했다.

전문가들이 지적한 10대 장점과 10대 단점

장점                           
1. 민주화의 희생자라는 인식
2. 재야 출신의 도덕성
3. 진보적이고 개혁적 이미지
4. 활발한 의정 활동(기초에 충실)
5. 인간적 친화력이 뛰어남
6.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음
7. 지역감정에서 자유스러움
8. 치밀하고 합리적인 성격
9. 부인 인재근씨의 지명도
10. 폭넓은 대인 관계

단점

1. 이미지가 가벼워 보임
2. 학자적 스타일
3. 행정 경험이 없음
4. 정치적 리더십이 검증되지 못함
5. 재야 출신 이미지
6. 대중적 인지도가 낮음
7. 정치적 지역 기반 취약
8. 국가적 정책 제시가 미흡
9. 당내 기반 취약
10. 3김 극복 결단력 부족

<뉴스메이커>는 또 역학자 마의천(六甲의 저자)의 김근태 ‘관상평’을 실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00년에는 제2의 성城 구축한다”

학변동오지상(鶴變冬烏之相), 두루미가 찬 겨울 까마귀로 변하여 소나무에 앉아 먹이를 노리는 형상이다.
얼굴이 긴 장안(長顔)에 눈빛이 야릇하여 심오함과 일을 도모함에 묘미가 있다. 이마가 직립해 학업 운은 있으나 이마 양옆 부위가 협소해 초년에 뜻을 펴지 못하는 불운이 있다.

자신의 웅지를 피려는 투자에 찬 기(氣)가 충족돼 있으나 신(神)이 부족해 40세 이전까지 몽유(夢遊)할 뿐이다. 얼굴이 바람 풍(風)자 형으로 인생 풍파는 거세지만 뼈가 곧고 면모가 청수해 그 뜻이 고원(高遠)하다.

눈썹이 양분해 형제 동기의 덕은 없으나, 어미 간문골이 둥그린 태를 이루고 있어 처자 덕은 있다. 얼굴 중심인 비량(鼻粱ㆍ콧등)이 틀어져 45세 이전에는 늪에 빠져 인생을 자탄한다. 그러나 법령선이 곧고 양 턱 부위가 힘있게 뻗어 노년은 평안하고 진취적이다.

45~46세부터 운명이 환희적 전환기를 맞는다. 눈동자가 붉고 흐린 듯하나 눈빛에 은광(隱光)이 나와 탁기(濁氣)를 만회하고 주위의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중적이고 이단적인 성격이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 99년은 보이지 않는 고통이 따랐지만 기반을 닦고, 2000년 53~54세 운세는 강둑에 바늘구멍이 있어 배신의 통(通)이 있지만 제2의 성을 구축하는 성숙의 운력이다.

수지모야 무면수(誰知暮夜 無眠愁) 심해창파 자주망(深海滄波 自走忙) 수지북림 좌한구(須知北林 坐寒鳩) 갱위남류 금의맹(更爲南榴 錦衣甍).

긴 밤 잠 못 이루는 근심을 누가 알겠는가. 심해 창파 스스로 분주한 명이여.
모름지기 북림의 찬 비둘기는 알 것이다. 다시 남류의 호화스런 꾀꼬리가 될 것을.
(주석 2)

<대한매일>은 1999년 1월 7일치에서 ‘99년의 정치인 99인’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52.9%, 이회창 20.6%, 김종필 16.3%, 김민석 11.1%, 노무현 7.2%, 이인제 6.1%, 이해찬 4.7%, 김근태 4.2%, 조세형 4.2%, 강재섭 4%의 순으로 “99년 한국정치를 이끌어갈 가장 기대되거나 호감이 가는 정치인은 누구입니까”의 조사결과를 실었다.

<대한매일>의 주간 자매지 <뉴스피플>이 여론조사기관 한길리서치와 공동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반국민 6,000명과 각 분야 전문가 100명 씩을 조사대상으로 하였다.

<신동아>는 2001년 8월호에서 “한국의 21세기를 열어가는데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을 선정 발표했다. 중앙일간지와 방송기자 10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였다. 여야 구분 없이 3명까지 복수답변토록 한 조사결과 강재섭(1), 김근태(2), 이인제(3), 손학규(4), 김덕룡(5), 한화갑(6), 이부영(7), 노무현(8)의 순위로 나타났다.

정치개혁시민연대와 의회발전시민봉사단이 1999년 10월에 발표한 ‘98년 국정감사 모니터 활동결과’에서 김근태는 재경위의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선정되었다. 두 단체의 ‘상임위별 바람직한 의원’에도 김근태는 재경위의 대표로 뽑혔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김근태는 초선 시절부터 주목받는 정치인, 2000년대 한국을 이끌 정치 리더로 지목되었다. 여야의 쟁쟁한 다선 의원들을 제치고 상위권에 선정되고, 상임위와 국정감사 활동에서도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신동아>는 2001년 9월호에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의 인간탐구’에서 “김근태의 이상주의 이인화의 영웅주의”를 함께 실었다.

정치부 기자나 지식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지도자’ 선정 조사에서 그가 몇 년 째 1위를 차지한 것은 반갑다. ‘믿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인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또 민주화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으로 해서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한 징표라는 분석 때문이다.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와 대중적 인지도를 일치시키는 일은 정치 전략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므로 필자의 영역 밖이다.(…)

더 개인적인 이유로 필자는 김근태가 정치인으로 꼭 성공하길 바란다. 김근태 같은 사람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인간적인 걱정 때문이다. 김근태는 그런 ‘희망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주석 3)


주석
2> <뉴스메이커>, 1999년 12월 9일.
3> <신동아>, 2001년 9월호,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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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4 08:00 김삼웅

 

 

김근태 의원과 부인 인씨가 후원의 밤에서 희망돼지모임 회원들에게 희망돼지 저금통을 전달받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근태의 성실한 의정활동과 폭넓은 대내외 활동에도 대중적 인기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어느 주간지가 “재목은 대통령감, 인지도는 시장감”(<시사저널>)이라고 뽑을만큼 다른 ‘잠룡’들에 비해 지지율이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의 책무’를 생각하면서 경선출마를 서둘렀다.

능력이나 인품과 대중성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의 정치풍토는 더욱 그런 편이다. 연꽃은 흙탕물에서도 곱게 피지만 흙탕물 못지 않는 한국 정계의 탁류에서 식견과 품성이 우수한 사람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김근태는 당내 대선 경선을 앞두고 여러날 고심을 거듭했다.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 때에도 돈이 없어 쩔쩔맸던 터였다. 최고위원 경선이 지역주의와 돈이 당락을 좌우하는 것을 지켜보던 터라 고심은 더욱 짙었다.

김근태는 2001년 5월 작가 공지영과 가진 인터뷰에서 “나도 정치적으로 폭발할 기회가 온다”면서 대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긴 대담에서 공지영이 뽑은 발문에서 이즈음 김근태의 고뇌의 일단을 살피게 된다.

“정당 내부의 민주화를 이뤄야 합니다. 집권민주당 역시 이념과 정책과 역사성에서는 민주정당이지만 그 행태와 정책 실현의 과정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맹목적 지역주의, 그에 기초한 보수체제와의 연결고리를 혁파해야 합니다.”

“정치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져요. 높은 수준에서 보면 다 똑같이 보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사회, 좀더 땀흘리는 사람이 공정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의원들에게는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고, 그것과 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준엄한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라는 것은 법치주의ㆍ법치사회를 만들고자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은 포용할 수 있어야 돼요. 포용이 아니면 적어도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있어야 되지요.…자기 세력을 특별하게 규정하면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다 상대편으로 쫓아내는 결과로 나타나고, 그래서 소수화시키면서 어려움이 발생하죠.”

“저는 사회심리적으로 한국사회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미국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가면 한국 국민의 심리가 어떨까… 걱정되요. 국민통합은 지역주의 때문에 이뤄지지 않고, 정치참여는 불신 때문에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매우 좁습니다.”
(주석 1)

중국의 근대혁명을 주도한 문인 루쉰의 산문에 ‘불의 얼음’이란 대목이 나온다. 표면은 얼음처럼 차갑지만 그 안은 용암처럼 뜨겁게 분출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김근태를 여기에 대입하면 맞을 듯 하다.

김근태는 2002년 2월에 시작되는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후보를 뽑는 국민경선에 나서기로 했다. 1년 전 기존의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고, 김근태는 상임고문에 추대되어 당의 중진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참이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개혁진보세력이 다시 정권을 맡아서 민주화와 서민생계, 그리고 남북관계를 더욱 화해협력 체제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정신이라 믿었다. 보수세력이 반세기 이상 한국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빈부ㆍ지역ㆍ도농ㆍ남녀ㆍ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가져오고, 남북 대결을 불러온 파행성을 김대중의 5년 집권으로는 바로잡기 어렵다는 것이 김근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주석
1> <월간중앙>, 2001년 5월호, 136~148쪽,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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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2000년대를 맞아 한 개인의 부하(負荷)로만 환원되기 어려운 역사의 책무를 감내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 천년이 열리고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전과 냉전으로 반세기 이상 대치ㆍ대결해온 남북이 정상회담을 통해 6ㆍ15선언을 채택하는 등 화해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여전히 원초적인 대결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수구정치세력과 정치권력화된 수구신문은 진보개혁진영을 적대시하였다. 그런가하면 IMF극복과정에서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구조는 빈부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노동자들은 실업과 극심한 생활고에 내몰렸다. 개혁세력이라는 집권 민주당은 여전히 20세기적 파당과 패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김근태의 대선경선 준비는 오래 전부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변형윤ㆍ고은 등 재야 인사와 당내에서는 이재정ㆍ장영달ㆍ임종석ㆍ이창복ㆍ김태홍ㆍ신기남 의원 등 쇄신파 의원 10여 명이 도왔다.

그는 우선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현장에서 살피기 위해 1999년 4월 14일부터 10일간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과거 여느 대권 주자들처럼 미국 조야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 정부지도자회의’ 한국대표로 초청된 것이다.

당시 김근태는 국민회의 전자정부구현정책기획단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방미 중 시애틀에서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와 점심을 함께하면서 전자정부구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방안 등에 의견을 나누었다.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동북아 정세와 남북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워싱턴에서는 한반도 핵대사를 지낸 로버트 갈루치 조지 워싱턴대 교수와 만나 ‘21세기 한반도문제’를 논의하였다.

김근태의 체미 기간 활동은 과거 어느 정치인보다 활발했다. 그의 위상에 따른 결과였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고, 특히 국민회의와 소원한 편인 미국 공화당쪽 인사들과도 폭넓게 만났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엘 고어 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앤드루 쿠오모 주택개발부장관 등과도 만나 양국의 현안을 심도 있게 나누었다. LA에서는 UCLA와 USC에서 강의하고 코리아 엑스포 개막식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김근태는 2001년 1월에 다시 미국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아들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정부 대표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1월 17일부터 10박 11일간 방미하게 되었다. 다른 대선 주자들이 자신의 후원회 참석 등에 비중을 둔데 비해 그는 워싱턴 에틀란틱 카운슬과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안보문제에 대해 강연하고, 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 공화당 행정부 출신 데이비드 드눈 교수, 컬럼비아 대학 레온 시걸박사 등을 차례로 만나 한국의 대북 정책방향 등을 설명했다.

또 데이비드 웅거 <뉴욕타임즈> 논설위원,
칼럼니스트인 플레리트 교수와 만나 미국 언론이 대북포용 정책을 지지하도록 촉구했다. 미주에서는 1997년에 변호사ㆍ종교인ㆍ미디어 전문가ㆍ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김근태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 방문길에서 김근태는 모든 일정을 영사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후원회의 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후원회 간부들은 민주ㆍ공화 양당의 뉴저지주 지사 후보가 앞다투어 김근태를 면담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뿌듯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후 미주지부 후원회는 한반도재단의 미주지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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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

012/10/12 08:00 김삼웅

 

 

2006년 7월 10일 오전 영등포 열린우리당 당사에서 열린 상임고문단 회의에서 정대철 상임고문등이 김한길 원내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근태는 일관성이 있는 인물이다. 신념과 소신이 정해지면 외압이나 상황에 따라 표변하거나 말을 바꾼 적이 거의 없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나 정치활동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당내 민주화와 국정 개혁을 위해서는 동교동계의 해체가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믿었다. 다음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다. 인터뷰어 윤석진 차장은 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낮은 목소리로 ‘은인자중’하던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마침내 투사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번 당ㆍ정ㆍ청 인사를 계기로 김 최고위원은 당을 무력화시키는 동교동계의 전횡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다. 김 최고위원의 이번 투쟁 목표는 동교동계 해체, 지금까지 동교동을 향한 공격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자칫 정치생명을 잃을지도 모를 모험적 투쟁에 김 최고위원이 먼저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어본다.
(주석 23)

김근태는 “현실적으로 동교동계 해체가 가능하리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답변한다.

가능합니다. 내가 다소 과격하게 발언했는데, 동교동은 현재 민주당의 하나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교동계가 민주당의 하나회라는 취지보다 동교동의 문제는 대통령께서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보좌해야 하는데, 그 언로를, 눈과 귀를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자기들끼리 비공식 모임과 테이블에서 의논한 것을 사후에 당ㆍ정ㆍ청에서 그런 방식으로 밀고가도록 한다는 것은 당ㆍ정ㆍ청의 책임있는 사람들 전부를 아주 깊은 소외감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이번 인사도 그렇구요. 그래서 내가 그들만의 잔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중요한 위치에 배치된 사람들이 전부 동교동 사람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동교동 사람들에게 선택되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가 막힌 현실이죠. 그러니 동교동이 만나는 테이블과 그렇게 해서 의사가 결정되는 체계가 중단돼야죠. 사람들이 그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이 올 수 있어야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참으로 위험한 상황으로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주석 24)

김근태는 그러나 김 대통령이나 동교동계를 비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가장 앞서 방어에 나섰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 족벌보수신문과 한나라당이 일체가 되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하였다. 대부분의 여당의원들이 침묵할 때 김근태는 노무현 의원과 함께 거대 언론의 횡포에 맞섰다.

 


국세청은 2001년 6월 29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6개 언론사에 대해 탈세혐의로 검찰 고발 방침을 발표했다. 이주성 조사 2국장이 동아일보사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2월 8일부터 중앙 언론사 23곳을 골라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김영삼 정부가 거대 신문사들의 탈세 혐의 등을 잡고도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덮어두었다. 이로 인해 언론계 안팎에서는 오래 전부터 권ㆍ언 유착설이 나돌았다. 국세청 조사결과, 탈루 소득액 1조 3,594억 원과 법인세 등 5,056억 원이 드러났다. 이중 절반 이상이 조ㆍ중ㆍ동에서 나왔다. 증여세와 법인세 탈세,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언론사 사주들이 검찰에 고발 당하고 구속되었다. 2006년 6월 대법원은 세금포탈 혐의 등으로 이들에게 징역형(집행유예)과 거액의 벌금 추징을 선고했다.

보수수구 신문들은 유신ㆍ5공을 거치면서 거대 족벌기업으로 성장하고 독재권력과 유착했다. 그리고 민주인사, 민주정권 특히 김대중 정부에는 사사건건 비난하고 헐뜯었다. 세무조사 이후에는 ‘언론탄압’을 내세우며 시시비비 아닌 비비(非非)만을 일삼았다. 여당 소속 의원들은 거대 신문들에 찍힐까봐 몸을 사리고 침묵했다. 김근태는 달랐다. 그는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며 정치권의 간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0년 12월 8일, 종로 YMCA에서 국세청 앞으로 행진하는 <언론사 세무조사 촉구대회> 참가자들.

 

 

김근태 최고위원은 3일 기자 간담회에서 엄정하고 공정한 검찰수사를 위해 정치권 발언자제를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은 검찰수사에 대해 “국세청 조사보다 갈등을 유발할 수 있고 민감한 사안이다. 엄정하고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영향력 있는 사람의 발언이 절제돼야한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 세무조사를 잘했다는 의견이 70%를 넘지만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의견도 50%가 넘는 점을 지적하며 “현재 국민들의 심리상태를 볼 때 우리사회는 국론분열의 위험성이 있다”며 검찰조사가 엄정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를 통해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얻어야 “검찰도 발전하고 오늘의 상황이 국민들의 공감 위에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날 정대철 최고위원의 ‘사주 구속 신중론ㆍ국정조사 수용’ 발언에 대해 “검찰수사가 종료된 후 국정조사를 검토할 수 있지만 그전까지 정치인의 발언은 사법행정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공정성과 신뢰성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최고위원은 “검찰 수사 후 사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가 최대의 고비”라며 “정치권에서 코멘트해선 안 된다. 검찰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정치권의 영향력 행사를 거듭 반대했다.

한나라당의 색깔론 공세에 대해 김 최고위원은 “한나라당 주장에 좌절감을 느낀다”며 “어떻게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과 세무조사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 의심스럽고, 설혹 연결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적 근거 없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색깔론은 군사독재적 수법”이라며 “색깔론을 통해 지역 분열주의를 자극하고 그에 동조하는 국민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퇴행적이며(야당측 주장인) ‘3김 극복’ 과도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주석 25)


주석
23> <월간중앙>, 2001년 10월호, 146쪽.
24> 앞의 책, 148~149쪽.
25> <내일신문>, 2001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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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11 08:00 김삼웅

 

 

 

2002년 11월 7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김홍일 의원 후원회에는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김근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면전에서 최고 권력자에게 간언은 여간해서 쉽지 않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지난 해 12월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 최고위원들의 청와대 회동에서 김근태 최고위원은 가장 먼저 발언했다. 그 핵심은 첫째, 당정의 핵심 포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교체해야 한다. 둘째, 비공식 보고라인을 제거해야 한다. 셋째, 이러한 일을 늦출 경우 당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맨 마지막에 발언한 정동영 최고위원의 ‘권노갑 퇴진 발언’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을 뿐 김 최고위원의 발언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석 18)

김근태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에게 간곡하게 개혁을 주문했다.
“대통령께서는 개혁이 성공해야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개혁이 중단되면 정권재창출은 물론이고 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가서는 개혁이 안 됩니다.” (주석 19)고 간언했다.

김근태는 청와대 회동에서 김대통령과 민주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변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하려면 도덕적 신뢰라는 동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국무총리, 당대표, 비서실장 등 당과 행정부의 핵심인사와 운영방식의 전면적인 교체와 변화를 요구했다. 김근태는 이어서 대통령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 격무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혼자서 어떻게 모든 일을 다합니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니까 업무량이 과도한 겁니다. 그렇다면 장관이라도 유능해야 하는데 DJP공조로 인재 풀은 적고 그나마 나머지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등용하니까 일을 맡기고 논의할만한 장관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주석 20)

김근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핵심 측근들에게 개혁을 촉구했다.
반세기만의 정권교체로 수립된 DJ정권이 실패하면 정권재창출도, 민주주의의 발전도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교동 실세그룹과 충돌하기 일쑤였다. 김대중이 동교동계 실세인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을 민주당 대표로 지명하자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다음은 한 언론의 보도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재야민주화운동 시절의 투사로 되돌아간 것 같다.”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한광옥 대표 지명에 반대하면서 동교동계를 향해 연일 적격탄을 퍼붓자 당내에선 “늦었지만 진짜 투사가 된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왠 민주투사냐” “투사로 나선 것은 좋지만 한 발 늦었다” 등 여러 갈래 평가가 나왔다. 재야시절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을 지내며 투옥됐던 김 최고위원은 9월 1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비장한 표정으로 “지난 날 민주화운동 할 때가 생각난다. 김근태가 투쟁하다가 고립되면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이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자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동교동 해체 주장은 당을 해체하란 말이나 다름 없다”고 반박하면서 양측 갈등이 확산되었다. 당내 뿌리와 한 갈래 줄기 간의 싸움으로 비유되는 양측 대결은 미국의 테러 참사로 일단 잠복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표면화할 것으로 보인다.
(주석 21)

 


2003년 2월, 청와대를 떠나 동교동으로 돌아오는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동교동계 인사들.

 

김근태의 ‘민주당개혁론’은 멈추지 않았다.
‘동교동계의 해체’까지 들고나왔다. 김대중이 고난을 받을 때 그와 함께해 온 동교동계가 집권 뒤 기득세력화 하면서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김근태의 판단이었다.

대통령 임기 중반기에 권력의 핵심에 도전하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차기 대권 후보를 겨냥하는 처지에서 당내 최대 계보인 동교동계와 척지는 일은 정치적 자살골에 속하는 일이었다. 한 언론의 머리 부문이다.

최근 TV 토론회에 참가해 논리적이고 신사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혀 정치인으로서 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는 김근태 최고위원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비논리적이고 목소리만 큰 정치인과는 사뭇 다르다.

김 의원의 팬클럽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선두주자에서 집권당의 차기 대권후보로 변한 그에게 기대하는 국민의 관심은 크다. 이 시대가 새로운 정치문화와 정치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김 위원은 잘 알고 있다.

지금 김 최고위원은 차기 대권의 중심에 서 있다. 자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세계화를 잘 알고 있으며 책임감이 있는 정치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김 위원은 사실상 자신의 대선캠프인 한반도포럼의 지부 확장과 지구당원 상대 강연, 지역구민 직접 접촉 등을 통해 대중 속으로 다가가는 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2006년 11월 2일 저녁 김대중 도서관 후원회 행사에서 김대중 전대통령과 참석인사들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최근 김 위원은 당내 특정계보인 ‘동교동계’의 해체를 거듭 공개요구하고 있다.
“당의 공적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선 비공식라인이 더 이상 작동돼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동교동계를 거론하며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하나회’가 있었듯이 민주주의 정권에서의 ‘하나회’가 돼선 안 된다”는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탄생이 그들만의 잔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독점과 전횡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김 위원은 이같은 상황이 시정되지 않으면 국민의 냉소와 패배주의가 심화되면서 민심 이반이 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석 22)


주석
18> <대통령이 변해야 산다>, <신동아>, 2001년 7월호, 92쪽.
19> 앞과 같음.
20> 앞의 책, 94쪽.
21>
2001. 9. 27. 1990년.
22> <내외저널>, 2001년 10월호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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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10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대단히 청렴결백한 정치인이다. 그의 집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다들 믿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3선 의원에 장관을 지낸 사람의 집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전세를 맴돌다가 1994년 도봉구 변두리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처음으로 장만했다. 저서 <남영동>과 <우리 가는 이 길은>,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등의 인세와 친척의 도움으로였다. 이 집은 모처럼 네 식구가 오랫동안 오순도순 살게 되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 집의 단촐한 부엌살림과 가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집이 왜 이렇게 썰렁하게 텅 비어있냐고 놀린다. 집권당의 최고위원 집이라고 하면 외제 가구도 보이고 화장대도 있을법하지만 부인 인재근 여사와 김 의원은 그런 화려함을 한번도 경험하지도 또 원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조금 모이면 얼른 나누고 사는 두 사람, 이런 양심에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주는 것일게다.(…)

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끔씩은 구멍난 양말을 신고서도 국사에 열심이고, 단벌신사임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넉넉한 모습을 본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노트나 만년필, 그가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우리 모두가 매일 쓰고 있는 물건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주석 14)

김근태는 국회의원 시절 세비와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는 성금으로 지구당을 관리하고 의정활동을 하였다. 대선 후보경선에 나섰을 때는 ‘GT클럽’이라는 자발적인 정치 후원과 팬클럽이 조직되어, 어느 정도 지원을 받게 되었다. 미약하지만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분들이 돼지저금통을 모아서 전달해주신 취지는, “김근태 너무 상처 받지 마라, 우리가 있다. 함께 가자” 이런 뜻이라고 본다.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꼭 옛날 군사독재 시절 데모하고 피신할 때 “우리집에 와서 숨어라”고 성원해주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가슴에서 눈물이 난다. 물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정치자금을 대신할 만한 액수는 못 된다.

나는 정치자금을 정말 투명하게 해야 하고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선 보상이 따르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정 보조를 중앙당으로 하지 말고 국회의원들한테 해줘서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국고보조를 그만큼 늘리는 매칭펀드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석 15)

정치인이 어느 정도 위상에 올라가면 계보를 거느리고 연구소를 차리고, 사조직을 하다보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그리되면 기업에서는 ‘보험금’이 들어오고, 상임위의 유관 기관에서는 후원금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이권과 거래되기도 한다. ‘떡고물’을 만지다보면 차기와 노후를 위한 축재가 생기고 집이 넓어지면 가구도 차츰 외제로 바뀌게 된다.

김근태는 예외였다. 그는 동료 의원이나 언론인 그리고 유관기관장들과 어울려 골프치거나 고급 요정에 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신체 단련과 운동을 위해 골프를 하라는 주문이 많았지만, 끝내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아직 체력도 괜찮고 정신력도 버틸 만하다. “나이가 더 들면 도봉산이 가까우니 산에 오르겠다”고 하면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들이나 대학 때의 친구들은 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망설임이 있다. 골프장 건설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고, 골프장에서 뿌려대는 농약이 식수로 흘러들고 있다는 주장이 걸린다. 대중화됐다고는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골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토요일이나 일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 또한 내 게으름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주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있는 어떤 친구들은 거리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의 그 고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이질감도 느끼는 모양이다. 아니 분명히 말하건대 적대감 같은 것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결정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거운 스트레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골프가 제일이라는 주장에 대해 나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중산층ㆍ서민들의 정서와 우리 사회 지도층이 필요로 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는 없을 것인가. 아직 그때는 오지 않고 있는 것인가. (주석 16)

김근태는 골프 대신 축구를 즐겼다. 새벽에 마을 학교 교정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차는 축구 말이다.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교정을 이리저리 뛰는 것을 즐겨한다. 끝난 뒤에는 ‘선수’들과 어울려 마을 어귀의 해장국집에 들러 푸짐하게 한 그릇을 비운다.

“나는 축구가 사람들이 만든 가장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이른 아침 한 경기를 뛰고 난 뒤, 땀 흐르는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전율이 참으로 좋다.” (주석 17)

김근태의 ‘축구예찬’이다.

 



김근태는 영화도 축구못지 않게 좋아했다. “일상생활에 윤기를 더해주는 영화의 매력”을 즐겼다. 두고 두고 인상 깊었던 영화로는, 독특한 페미니즘 영화인 <안토니아스 라인>, 감동적인 음악영화 <캔사스 시티>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같은 영화다. 젊은 시절에 봤던 <내일을 향해 쏴라>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팅>, 그리고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잊지 못한다. 감동적인 국산영화는 <서편제>,
등이 있다.

형님들과 누님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책과 접하게 되고, 그래서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또 5년 여의 옥살이와 긴 수배 기간에 책을 항상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책은 박경리의 <토지>와 김지하의 <황토>, 김용택의 <섬진강>,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든다.

김근태는 그림도 좋아하였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을 특히 좋아하여, 한때 그의 서가에는 복제품이 놓여 있었다.


주석
14> 박영숙, <주한 호주대사관 문화공보실장>, <푸른내일> 21호, 2001년 1월.
15> 김근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인물과 사상>2002년 7월호.
16> 김근태, <김미연과 봉숭아꽃>, <이코너미스트>, 1999년 11월 9일.
17> <내가 좋아하는 것들>, <희망은 힘이 세다>,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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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9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몇 해 뒤 경기도 여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이근안을 면회하였다.
2005년 음력 설 직전이다. 이 모 전의원의 면회를 갔다가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근안을 면회한 것이다. 이근안은 전국 수배령에도 그동안 용케 피신하다가 김근태 고문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 비로소 자수하여,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들어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키지 않았습니다.

내키지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습니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 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 망설였습니다. 면회를 가야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교도소 당국을 통해 이근안 씨의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주석 10)

고뇌하는 김근태의 모습이 역력하다. 감정과 이성,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제, 국민대통합의 슬로건과 끔찍했던 고문의 실상…. 심한 갈등 끝에 마침내 여주교도소로 그를 찾아갔다.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여전히 건장했지만 키가 나와 엇비슷했습니다. 고문당하고 욕먹고 그리고 소리 지르던 그때 그곳에서와는 엄청나게 달리….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 악수를 했습니다. 두 손을 잡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눈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 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제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주석 11)

김근태는 이근안의 면회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자칫 정치인의 쇼맨십으로 오해되는 것이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이 전의원을 면회했던 다른 의원에 의해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게 되고, 한바탕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김근태는 이를 대단히 곤혹스럽게 여겼다. “무엇보다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이같은 심경과 면회 사실을 <용서와 화해는 신의 영역…>이라는 짧은 글에 진솔하게 담았다.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저는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솔직히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합니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석 12)

‘용서’와 관련 국제적인 명저를 쓴 엘리스 칩톤은 <용서>의 서문 <용서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김근태의 심경을 헤아리면서 소개한다.

용서는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은 사람과 용서를 베푼 사람 모두를 치유한다.
옛말처럼, 받고자(get) 한다면 당신은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방에게 주어야(give) 한다.
이 경우 잊어버리고자(forget)한다면 당신은 먼저 용서해야(forgive)한다.
(주석 13)


주석
10> 김근태, <용서와 화해는 신의 영역…>, <일요일에 쓰는 편지>, 70쪽, 샛별D&P, 2007.
11> 앞의 책, 70~71쪽.
12> 앞의 책, 71쪽.
13> 엘리스 칩톤, 강미정 역 <용서>, 3쪽, 무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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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

012/10/08 08:00 김삼웅

 

 

 

김근태가 1991년 10월 중순에 가진 한 언론인터뷰가 보도되면서 정계와 시민사회에 뜨거운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에게 충격을 주고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이근안 전경감은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어두웠던 군사독재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지난 고문사건의 진상을 고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면, 그 손을 맞잡을 용의가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용서는 가치 있는 덕목임에 틀림없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면 영광이 돌아온다.”(구약성서 잠언 19:1),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신약성서 누가복음 6:37). 공자는 세상에 한 글자만 남긴다면 ‘용서할 서(恕)’자 라고 하였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김근태는 자신의 육신을 끔찍하게 고문하고 영혼을 파괴한 이근안이 고문사건의 “진상을 고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화해의 악수를 청한다면” 이란 전제로 용서의 뜻을 밝혔다. 30자가 넘은 전제를 2자로 압축하면 ‘용서’가 된다. 언론은 거두절미 ‘용서’의 단어를 주제어로 삼았다.

고문의 피해자들, 폭력정권의 피해자와 그 희생자들은 김근태가 이근안을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군사독재의 피해자’ 라는 내용에도 심한 비판을 쏟아냈다. 김근태에게는 삼키기도 뱉기도 어려운 대목이었다.

이제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냐, 과거 정보기관의 윗선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체로 처벌받지 않고 유야무야 지나갔기 때문에 그 하수인들만이 사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반인간적인 고문을 직접 가한 사람을 ‘피해자’ 라고까지 말하며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케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조롱이고, 역사를 희화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이야기를, 잘 알려진 고문사건의 대표적인 경우인 내가 함으로써 다른 고문피해자들이나 가족들의 선택의 폭을 줄여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주석 8)

 

 


김근태는 심성이 선하고 부드러운 편이어서 진심으로 이근안을 용서하고자 했다. 그 역시 군사독재의 피해자란 것도 진정성 있는 말이었다. 다만 그가 먼저 용서를 빌고 참회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근안과 군사독재자들은 끝내 사죄하지 않았고, 정보기관의 ‘윗선’에 있던 자들도 전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고문의 피해자들은 대체로 용서를 하고자 하는데, 도리어 가해자들이 ‘시대상황’에 핑계를 대며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숨기려 들었다.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수감 중인 전두환ㆍ노태우를 풀어주었다. 선거과정에 대구에서는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고 국가예산을 지원하였다. 자신을 죽이려 한 가해자들을 용서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ㆍ노와 그 추종 세력은 사죄하지 않았고, 박정희기념관은 5ㆍ16쿠데타와 유신변란 따위를 미화하는, 박정희 우상화의 장으로 만들었다. 가해자들의 반성이 없는 ‘용서’의 뒤틀린 현상이라 하겠다.

뿐만이 아니다. 가해 세력에 대한 청산이 없으므로 하여 악의 뿌리와 가지가 번창하여 다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선량한 국민을 억압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용산참사와 민간인 사찰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그들은 민주체제를 역행하였다.

김근태의 고뇌에 찬 호소를 들어보자.

나는 간곡히 호소하고 싶다. 이분들의 깊은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사하고 말이다. 이른바 남아공연방의 ‘만델라 모델’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제는 모두 화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만델라 모델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반인간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백하는 경우에는 기소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스스로 결단을 하고,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할 때에만 화해와 화합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주석 9)


주석
8> 김근태, <내가 그에게 악수를 청한 까닭>, <희망은 힘이 세다>, 32~33쪽.
9> 앞의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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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7 08:00 김삼웅

 

 

 

김근태(전민련 정책실장)와 노무현(민주당 국회의원)은 1989년 2월 23일 한 여성지의 주선으로 한강변 포장마차에서 새벽 3시까지 소주잔을 나누며 대담하였다. 잡지사는 “재야 출신 국회의원과 재야운동가의 뜨거운 논쟁 6시간 생중계”란 제목으로, 흥미진진한 내용을 실었다.

“애초 두 사람이 만난 장소는 여의도의 맨하탄 호텔 1층 그릴. 그러나 두어마디 수인사가 오갈 때부터 마음이 통한 그들은 왠지 호텔 그릴 같은 데서 맥주를 들이키는 게 영 거북해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주종(酒種)을 바꾸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가까운 고수부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주석 6)

대담 중 두 사람은 김근태 고문, 노무현의 청문회 스타, ‘소파동’과 농민자살 문제,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 등을 폭넓게 나누었다. ‘재밌는’ 부문을 골랐다.

노무현 : 느낌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 몸에 익은 구면인 것 같은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늘 마음은 있었으면서도 기회가 오겠지 하며 기다렸지요.

김근태 : 저도 처음엔 노 의원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이런 저런 매스컴에 나오는 보도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그후 변호사란 비교적 보장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위대열에 끼어 구타당하고 끌려 다니기도 했다는 얘길 듣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 틀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했어요. 언젠가 만나지리라 했는데 그게 좀 늦어진 셈이지요.

노무현 : 전 김 선생님을 훨씬 오래 전부터 알았습니다. 83년부터 제가 운동권 조직을 변호사란 간판으로 뒤를 봐주고 있었을 때만해도 무슨 양심가인양 우쭐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김 선생님의 그 처절한 고문 진술을 들었을 때, 운동권에 뒷돈 좀 댄다고 으쓱했던 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습니다. 출옥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꼭 한 번 뵈어야겠다고 벌려 온 것이 그만….

노무현 : 고문 후유증으로 당분간 활동을 못 하시지 않나 했었는데 의외로 자리에 한번 눕지도 않고 일하시는 걸 보고 감탄했습니다. 근데 거, 무슨 돈도 좀 생기셨다지요? 그것마저 몽땅 다른 데 바치셨다면서요?

김근태 : (웃음) 작년에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받을 때 생긴 상금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그는 그 돈 3만 달러를 민청련 부설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설립 기금으로 내놓았다) 무슨 상 받았다는 부담에서 좀 해방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김근태 : 이런 말은 제가 직접 하긴 좀 쑥스런 질문이긴 하지만, 아까 기자가 꼭 좀 물어달라는 내용입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민가협에서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지 않았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야당에선 변변한 관심을 보여온 것 같지 않은데요.

노무현 : 민가협에서 수배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참 좋은 아이디어구나 싶었어요. 한편으론 국회에서 이근안 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해오지 않았다는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그래서 그 현상금을 제가 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민가협 쪽에서 반가와하실진 모르지만.

김근태 : 노 의원께선 세비갖고 여기저기 쪼개쓰기도 바쁘다고 하시던데…

노무현 : 변호사할 때 벌어둔 돈이 아직 조금 남아 있습니다. 정 안되면 우리 집사람에게 결혼 직전 했던 약속을 포기할 수도 있고요. 무슨 약속이냐면 고시 합격했으니 변호사 여편네로 더운물 찬물 나오는 팬션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거였어요. 이건 제가 정말 선생님께 부러운 점인데, 부인과 안팎이 다 그렇게 민중운동에 전념하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입니까.

여의도 고수부지 포장마차엔 늦은 손님마저 모두 다 뜨고 없었다.

현재 시간 새벽 두시 삼십분.
벌써 일곱 병의 소주병이 쓰러지고 안주는 거의 동이 났다. ‘이 잔만 들고 이젠 일어서시죠’ 하는 비서관들을 제치고 두 사람은 또 다시 “아줌마, 여기 한 병 더”를 외쳤다. (주석 7)


주석
6> <주부생활>, 1989년 3월호.
7>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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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6 08:00 김삼웅

 

 

 

고수(高手)는 고수끼리 알아보고 순수는 순수를 좋아한다.
2000년대 초 ‘포스트DJ’를 놓고 민주진영에서는 물밑 경쟁이 조용한 가운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큰 나무 아래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라기 어렵듯이, 야권에서는 70년대 이래 김대중ㆍ김영삼 두 거목 밑에서 양김에 버금가는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재야 쪽에서 차세대 지도자그룹이 성장하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김근태와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두각을 나타내며 13대 국회에 들어와, 3당야합을 거부하면서 ‘지역갈등해소’의 기치를 들고 낙선을 거듭하면서도 고난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근태가 재야에서 반유신ㆍ반5공 투쟁을 통해 재야의 대표 주자로 성장하고 있었다면, 노무현은 법조활동과 야당의 정치활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고난의 젊은날을 보냈으면서도 순수한 품성을 지닌 ‘비정치적인 정치인’이 되었다.

이들은 잠재적인 라이벌이면서도 서로를 존경하고 좋아하였다. 걸어온 길이 다르고, 정치적 환경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결곡한 삶의 역정과 따뜻하고 진솔한 품성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노무현의 얘기다. 당시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었다.

김근태 의원 때문에 나는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감격한 적이 있다.
1992년 8월, 그날은 그의 석방 환영회였다. 당시까지 나는 김 의원과 각별한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민주화운동을 함께해 온 동지의 심정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터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김 의원은 나를 가르켜 “이 시대의 의인이요. 정치적 희망” 이라며 당시 모였던 재야의 쟁쟁한 인사들 앞에서 소개를 했다. (주석 2)

김근태는 평소 성격상으로 치밀하고 신중한 태도와 함께 아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그가 노무현에게 “이 시대의 의인이요, 정치적 희망”이라 표현한 것이다. 의례적인 답례이긴 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느낀 ‘정제된’ 언사였다. 다음은 노무현의 김근태에 대한 평가다.

 



‘김ㆍ근ㆍ태’
이 이름 석 자는 지난 시절 내게 있어서 신비로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에 가장 치열했던 반독재 투쟁조직인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할 때였다. 당시 누구도 엄두를 못냈던 5ㆍ18추모식을 서울 한복판에서 최초로 가진 것과 그후 신문사회면 하단에 그의 구류 소식이 단골로 등장한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1985년 그에게 가해진 그 무시무시한 고문사건이다. ‘김근태’라는 이름이 내 뇌리에 경외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그 당시 나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다시피 하여 독재정권과 싸울 때였다. 그에게 가해진 고문에 대한 기록을 읽은 나는 전율했고, 이 사건을 당시 투쟁의 쟁점으로 삼아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부산 시민에게 알리기도 했다. (주석 3)

노무현은 이어서 “가장 원칙적이면서도 조직을 위해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분, 음모적이지 않고 책략에만 매달리지 않는 재야의 지도자”라고 김근태를 평한다. 이 말은 주객을 바꾸어 노무현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심정적’으로 통했다. 다시 노무현의 말이다.

살다보면 괜히 좋은 사람이 있다.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인데, 내게 특별히 잘해주거나 각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신뢰감이 가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김근태 의원이 바로 그런 분이다. 정치인은 욕심이 많다.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턱없는 욕심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만약 내가 김근태처럼 신중하고, 치밀하고, 의젓한 이미지를 갖고 싶어한다면 너무 큰 욕심을 낸다고 사람들이 비난할까 무섭다. (주석 4)

노무현의 김근태 평을 다소 길게 소개한 데는 까닭이 있다. 즉 다음의 글을 인용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노무현의 이같은 바람은 실제로 3년 뒤에 이루어졌다.

만약 우리나라의 미래를 앞두고 그와 내가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1:1 카운터 파트너가 되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될까.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한번 해봄직한 욕심이고 상상이지만 무척 행복할 것 같다. 서로 주어진 결과에 기꺼이 승복하고 나아가서는 적극 지지할 수 있는 그런 신뢰가 분명한 관계라고 단언한다. 혹은 다자간의 경쟁이 되면 제일 먼저 찾아가 “우리 같이 합시다”라는 이야기를 마음 터놓고 할 것 같다. (주석 5)

두 사람 관계는 제16대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수장과 각료관계로 이어진다.


주석
2> 노무현, <살다보면 괜히 좋은 사람이 있다>, <푸른내일> 14호, 1999년 5월.
3> 앞의 책.
4> 앞의 책.
5> 앞의 책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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