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6 08:00 김삼웅

 

 

“자유는 한번 싹트면 엄청난 속도로 자라는 나무” - (조지 워싱턴)라고 한다는데, 한국의 경우는 예외인 것 같다. 또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 (제퍼슨)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것 같다.

4월혁명, 반유신투쟁,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가에서 한국(인)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최근 북아프리카, 중남미 일부 아랍 국민들의 항쟁을 제외하면 한국의 민주화투쟁은 반세기 이상 앞선다. 다시 구속된 김근태는 결연한 자세로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한번은 검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10년 정도 손아래였을 그 검사는 이름이 문성우였던가. 신문조서를 받겠다고 했다. 진술거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우선 포승과 수갑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더니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고 자기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검사실 내에서 지휘권은 당신에게 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서의 임의성 성립을 위해서 수갑과 포승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으니 되풀이하여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라고만 했다. 그 전에 이 검사방에 왔을 때는 언제나 수갑과 포승을 풀었는데, 위에서 한번 본떼를 보여주라는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술을 거부한다. 이것을 고지한 이상 퇴거할 자유가 없다. 이렇게 포박한 상태로 진술을 거부하고 있는 나에게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 것은 피고인에 대한 학대행위라고 하면서 신랄한 말싸움을 1시간 정도 벌였다. 그후 다시는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도저히 재판을 받을 수가 없었다. 첫 공판에 나가 모두진술을 통해 이것은 정치적 보복이기 때문에 나는 ‘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와버렸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7년 구형에 3년 선고였다. 거의 같은 죄목(?)으로 재판받았던 이부영 씨 10월, 이창복 씨 1년에 비해 중형이었다. 재판 거부에 대한 보복이었다.
(주석 12)

김근태는 1990년 5월 9일 민자당반대 시위 및 전민련 결성과 관련하여 구속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검사의 기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이 복사품과 같은 재판에서 7년 구형에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와 상고심에서 2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검사와 판사가 과격, 급진, 선동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미국 작가 마이클 무어의 “진실은 선동적인 것처럼 보이고, 상식은 급진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안양교도소에서 두번째 옥살이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국보법 7조 1항과 집시법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김근태의 서울상대 한참 선배이기도 하는 민족경제학자 박현채는 “역사에 충실한 삶이란 오늘에 있어 보상받지 아니하고, 오늘에 있어 보상받길 원하지 않는 삶이다.”고 다짐하면서 ‘역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정계진출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첫번째는 민청련에, 두번째는 전민련의 활동에 충실하다가 다시 갇힌 신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서울과는 그리 멀지 않아서 부인과 동지들이 면회오는데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별 두 개가 되면서 옥살이의 이력도 붙고, 수사ㆍ재판과정에서 육체적 고문은 없어서 그냥저냥 견딜만 했다.

1991년 1월 초 안양교도소에서 딸 병민이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병민이는 어느새 아홉 살 소녀가 되었다.

귀여운 우리 아가씨, 병민아!
편지가 늦어서 미안하다. 너한테서 온 두 통의 편지는 받았고, 하나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란다. 그 동안 서울에서 안양으로 아버지가 이사를 해서 그렇단다. 주로 아버지의 게으름 탓 때문이지만 지난 6개월 여의 교도소 생활중 이 편지가 내가 쓰는 첫 번째 편지이다.

있잖니, 병민아, 사람이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속이 텅 비고 메마르게 되는 법인데, 지난 2년 동안 아버지는 끊임없이 말을 해야 했고, 그것도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했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침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영향이 너에게까지 가고 말았구나. 답장을 안 한다고 네가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지금 부랴부랴 방에 돌아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해해줄 수 있겠니, 병민아.

네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 ‘예감’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사용한 네 글을 보면서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러웠단다. 면회 때 엄마와 아버지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마구 웃었단다. 그랬더니 모두 속으로는 아버지의 기분을 알아주면서도 그러는 나보고 “푼수” “얼간이”라고 놀려대더라. 아마 다른 경우에 이런 얘기 들으면 언짢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아버지는 낄낄대고 웃었다.

병민아, 그래 네 예감대로 아버지는 올해 안에는 못 나갈 것 같다. 너와 네 오빠 병준이, 엄마 등 사랑하는 우리끼리 함께 얼굴 보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슬픔이지.

자상한 아빠가 귀염둥이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보통사람의 꿈이 배인다. 그 무렵 병민이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근태의 편지는 이어진다.

그런 이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네가 차와 부딪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떠했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니. 막막함이었다. 뒷머리가 뻗뻗해지고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사람의 생명은 정말로 귀중하다. 그것은 절대 자체이고 거기에 부담을 주고 위해를 가하는 모든 것은 악이고, 우리는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 네 말대로 네가 옳았다고 아버지는 믿으며 운전기사가 잘못한 것이겠지만 이와 같은 일이 비슷하게라도 앞으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병민아, 교통질서는 사람간의 약속인데도 서로 갈 길이 바쁘다고 때로 욕심을 내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다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네가 미리 방비하도록 해야 된단다.

병민아, 시험을 잘 봤다면서.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너의 두 번째 편지의 맨 앞에 시험 얘기가 있었지. 그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일을 책임있게 해야 한다고 너희들에게 말했던 일, 어쩌다가 너희들을 야단쳤던 일, 그리고 몇 번인가 때리기조차 했던 일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너희들이 아버지의 얘기를 시험점수 잘 따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싶어 착잡해졌다. 이런 말 저런 말이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학교 공부를 우습게 생각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시험점수 잘 받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친구들과도 잘 안 놀고 미워하기까지 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도 모두 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버지는 정말로 반대한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651쪽.
13>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33쪽,
한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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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25 08:00 김삼웅

 

노태우 정권은 방북인사들을 용공으로 매도하고, 족벌신문ㆍ어용방송들이 덩달아 붉은 색칠을 하면서 한국사회는 살얼음판의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음모가들에게는 일을 꾸밀 절호의 기회였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내키지 않는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선 패배와 더불어 총선에서도 제2야당으로 밀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제3야당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던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공안분위기를 틈타 야합하면서, 정계는 다시 한번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노무현 의원.

 

1990년 1월 22일 이들 세 사람은 3당 야합을 통해 거대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
6월 항쟁으로 어렵게 돌린 역사의 물굽이가 다시 역류하는 반동이었다. 3당야합은 정치지형의 변개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민주화의 역류와 보수화를 불러왔다.

5공청산은 물건너가고 부동산가격 폭등사태, 물가고, 증시침체, 토지공개념 후퇴와 금융실명제 보류 등 경제난국이 가속화되었다. 거대 여당으로 변신해 오만불손해진 민자당 정권은 임시국회에서 방송법, 국군조직법, 광주관련법, 추경예산 등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일당독재식 국정운영으로 일관하였다.

전민련은 안팎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1989년 4월부터 몰아닥친 공안정국의 탄압과, 영등포을구 재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하고, 5월부터 이른바 ‘합법정당논쟁’이라는 내부적 혼란에 빠져든 것이다. 합법정당논쟁은 전민련 내부 각 정파간에 이해와 불신을 불러왔다. 이우재ㆍ장기표ㆍ조춘구 등은 전민련에서 합법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1989년 9월 26일 전민련 2차 중앙위원회에서 전민련을 탈퇴하고, ‘새정당창건을 위한 임시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서 민중정당 건설의 주체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연락사무소는 이미 1989년 9월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진보적 대중정당건설을 위한 준비모임’과 통합, ‘진보정당결성을 위한 정치연합’을 발족시켰다.

이후 전민련 2차 대의원대회에서 합법정당 건설안이 부결된 후 1990년 3월 12일 계훈제ㆍ박형규ㆍ이소선ㆍ백기완 등 전민련 고문 4인이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 결성을 제안, 3월 21일 진보정당 준비모임 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민연추 결성에 동참할 것을 발표함으로써 4월 13일 447명의 민연추 추진위원이 참가, 백기완ㆍ이우재ㆍ고영구 등 공동대표를 선출하는 등 공식적인 체계를 갖추고 출범했다. 이로써 전민련은 분열되고 말았다.

김근태는 ‘합법정당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잔류를 선언하였다.
“신식민지 파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민족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는 합법정당의 건설이 아니라 민족민주전선의 강화와 제도정치 공간에서 공개정치부대를 구축, 단일한 민주연합당을 추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합법정당을 주장한 그룹은 대의원대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민련을 박차고 나가 민중정당을 결성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40대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자주ㆍ민주ㆍ통일을 목표로 출범한 전민련 지도부는 김근태, 그만 ‘외롭게’ 남게 되어버린 것이다. 전민련 잔류를 선언한 그는 그 후 어수선한 조직을 재정비,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던 도중 당국에 의해 구속되고 만 것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남은 자’들과 5월 9일 전국 18개 지역에서 회원ㆍ시민 20만여 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민자당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국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 21개 도시에서 1,192명이 연행되고 그 중 55명 구속, 79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날 저녁 김근태는 전민련 주최로 제주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뒤늦게 전민련 결성 선언문과 사업계획서가 국보법 위반이란 혐의였다. 노태우 정부가 갑자기 김근태를 구속한 것은 그가 평민당ㆍ꼬마민주당ㆍ재야가 통합하여 거대 민자당에 대항하려는 민주 연합체의 구성 준비 작업 때문이었다. 당시 김근태는 이 작업에 몰두하여 상당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민자당 합당의 야합성을 규탄하고 흔들리는 민생문제를 효과적으로 제기하기 위해서 전민련 결성 이후 성장하고 있던 각급 대중단체를 전민련의 주도로 국민연합에 결집시켰다. 전교조ㆍ전농ㆍ전노협ㆍ전대협 등이 두루 포괄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 국민연합 조직을 갖고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맞서기 시작했다. 상당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일부 간부들이 나감으로써 위상이 저하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 정치적 영향력이 전민련에 남아 있었다. 당시 나는 재야 일부의 역량과 평민당, 작은 민주당이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민주연합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전민련 내부의 정치역량을 우선 설득하고 전민련 바깥에 있는 민주대연합을 찬성하는 분들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함께 참여하도록 말이다. 또한 독자정당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다.(…)

머지않아 비공식적으로나마 각 부문의 합석이 기대되는 시점에서 권력은 나를 구속했다. 이런 논의의 진전 자체를 차단하고자 했다. 1990년 5월 공안정국에서 나는 이처럼 다시 구속되었던 것이다.
(주석 11)

김근태가 ‘합법정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고 전민련에 잔류한 것은 타협을 모르는 외곬수이거나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완고성 때문이 아니었다. 노태우 군부정권의 본질과 보수야당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별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강력한 재야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6공화국의 공간에서 특히 3당 야합으로 인한 거대 민자당이 지배하는 ‘1점반 정당체제’에서, 전민련 이탈파들이 추진한 ‘합법정당론’ 은 설 자리가 없었다. 실제로 ‘민중당’과 ‘한겨레민주당’ 등 진보정당들은 원내 진출에 실패하면서 존재가치 이외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전민련은 반신불수가 되고 공안정국과 19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역량의 분산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1990년 4월 9일, <월간 말>이 주최한 <민족민주운동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란 주제의 긴급토론에서 현 시국을 대단히 위기로 분석했다. “지금 우리 운동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지배세력은 부분적인 의사개량화조치를 통해 민족민주운동의 전투적인 부분과 변혁적, 원칙적 관점을 유지하는 운동에 대해 집중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 탄압 앞에서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략계획조차 크게 동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라고 분석ㆍ평가하였다.

그의 분석은 정확했고 현실로 나타났다.


주석
10> 이재화, 앞의 책, 167쪽.
11> 김근태, <아직도 벗지 못한 공안의 굴레>, <분단시대의
피고들-한승헌선생화갑기념 논집>, 46~47쪽, 범우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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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4 08:00 김삼웅

 

현대판 민족개조론자

김근태는 1989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노동문학>에 알맹이 있는 칼럼 몇 편을 썼다.
노동운동 출신으로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있던 그로서는 짧은 칼럼이지만 열성을 다한 글이다.

4월호에는 ‘민주운동가’ 란 직함으로 <현대판 민족개조론자>란 제목의 칼럼이었다.
이 책에는 고은ㆍ노무현ㆍ신경림ㆍ박현채ㆍ윤구병ㆍ이호철ㆍ이오덕ㆍ유시춘 등 낯익은 필자들이 함께하였다. 김근태의 글은 민족의식, 민족자주의 얼이 깃든 보기드문 격문이다.

반미감정은 열등감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한국민을 대표하여 미국에 가 있는 대사도 한몫 끼고 있다. 미국 텔레비전에 나가서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분명히 말하자면 이렇다. 반미 감정은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격렬한 정서이며, 또한 우리에게 열등감을 강요하고 강제해 온 외세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다. 그에 대한 올바르고 과학적인 인식의 출발인 것이다. 이른바 반미 감정은 한때 유행하는 그런 감정이 아닌 것이다. 무차별한 농ㆍ축산물 수입 개방 압력 앞에 맞서 싸우는 근로농민 계층, 가파른 원화 절상 압력으로 고통 받는 중소기업주들,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비열하게 탄압하는 미국 자본에 맞서 분노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렇게 여기에 굳세게 모여 있지 않은가.

우리를 깔보고 모욕하고 괴롭히며 때로는 때리기까지 하는 저들에 대항하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이태원 밤거리에 2천여 명의 시민이 모여 노래를 그토록 비장하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행패 부리는 미군 병사들에 대해, 그들을 싸안고 도는 경찰들에 대해 새벽 2시 이태원 거리에서 그렇게 애국가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김근태는 화성군 사례 등을 예시하고 곧 ‘본론’으로 진입한다.

이런 우릴 보고도 여전히 위컴은 들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 박정희 군사 파쇼 시대에, 전두환의 초기에 우리는 들쥐처럼 눈을 내리깔고 어깨는 축 늘어뜨린 채 그렇게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결단코 더 이상 들쥐일 수는 없게 만든 장본인이야말로 위컴이고 글라이스틴이며 그러그러한 양키들인 것이다. 80년 서울의 봄의 좌절에서, 광주사태에서 드러났던 추악한 그들의 모습이 우리 내부의 자존심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우리는 부시 방한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들쥐로 고정시키려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민중을 억누르고 빼앗는 정치 군부, 특권적 관료 집단이 그들이다.
프란츠 파농이 비웃어 주었던 검은 피부, 흰 가면과 똑같은 누런 피부, 흰 가면을 쓰고 있는 집단들이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자치를 구걸하고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반민족세력의 후예인 것이다. 민족의 절대독립을 외치고 실천했던 위대한 애국자와 민중을 배반했던 수치스런 매국노들의 후예이다. 현대판 민족개조론자로서 여전히 “아직 우리는 열등합니다. 제발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꼴불견을 더 이상 봐 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안 될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석 6)


우리, 일어서야 한다


김근태는 이 해 6월호에는 다시 <우리, 일어서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 노태우 정권이 유화책을 내걸면서 이면에서는 수많은 청년학생, 민주인사, 노동자들을 구속한 사례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에게 89년 5월은 80년 5월이 되고 있다. ‘광주’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광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철규 형제의 처참한 죽음 속에서 ‘광주’는 저처럼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80년 합수부처럼 89년의 합수부는 우리에게 ‘광주’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귀 틀어막고 눈 내리깔고 비겁자처럼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김근태는 이 글에서 ‘이철규 변사사건’을 언급한다.
1989년 5월 1일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와 관련, 전남지역 합수부의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교지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과 4년)가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정국은 타살이냐 실족사냐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정부는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학생들을 대량 검거하였다.

이철규 형제의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의 광주’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광주, 항쟁하는 광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플랑크톤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우리에게 머뭇거림을 강제해 오는 저들의 시꺼먼 의도를 단호히 거부해야 된다.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수백 수천 명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 다시 나아가야 한다. 공장과 농촌에서 학교ㆍ교회ㆍ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거리거리에서 광범한 대중집회와 시위를 조직해 내야 한다. 특히 공장과 농촌에서 또한 거리에서 노동자와 근로농민이 주동이 되어 일어서야 한다.

광주와 이철규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그 책임자 처벌을 관철시키는 힘은 여기에 있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근원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지배권력의 탐욕과 증오심을 분쇄하는 곳에서만 승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가. 절대로 가능하다. 누가 감히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진하고 있는 민주의 저 굳센 발자국 소리가, 우렁찬 함성이 저렇게 파도치고 있지 않은가.
(주석 7)

<민족민주운동> 창간호 발언

김근태가 석방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인 1988년 9월 민청련은 부설기관으로 ‘민족민주운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민족민주운동의 과학적 이론정립과 정책수립역량의 제고에 보탬이 되고”,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후원 하에 연구소를 설립한다” 고 취지를 밝혔다.

연구소는 1989년 4월, <민족민주운동>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한국경제의 성장과 민족민주운동의 진로>를 탐색하는 기획좌담을 머릿기사로 실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신철영(서울 노동운동단체협의회 사무국장), 정태윤(진보정치연합 공동대표), 채만수(민족민주운동연구소 소장, 사회)가 참석했다. 주제는 ‘경제성장과 민민운동의 진로’였으나 토론 내용은 한국경제의 실상과 자본문제ㆍ노동ㆍ농민문제의 심각성,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민민운동의 역할 등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이 좌담에서 김근태는 대단히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상과대학출신으로서 한국경제의 실상을 전문가답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부분적인 획득, 몇가지 개량화 조치, 이런 것들이 남한사회의 현재 조건에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 속에서 현재의 상부구조ㆍ하부구조의 실제적인 조건에 비춰 봐도, 그런 단계적인 개량을 통해서 민중들의 삶이 향상되고 인간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는, 그런 길로 나갈 수 있는, 그런 길로 나갈 수 있다고는 볼 수 없고, 그렇게 봐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개량주의이고, 그런 개량주의는 우리의 조건 속에서 불가피하게 파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8)

김근태는 현 시국(당시)을 수구세력의 전략적 개량화 조치로 평가하면서 대단히 불안한 국면으로 인식한다. 한 대목을 더 발췌한다.

지배세력이 결정적인 궁지에 몰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의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을 획기적으로 역전시킬 필요가 있겠는가의 문제인데,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민중운동이 몇가지 개량조치 속에서 변혁운동 쪽으로 이끌려 올 것인지 아니면 체제내화되는 개량주의적운동으로 갈지가 아직 모호한 상태에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둘러싼 쟁투가 지금 실제로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지 않느냐 하는 판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린 공간에서는 탄압을 대비해야 되고 탄압시기에는 열림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균형된 자세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주석 9)


주석
6> <노동문학>, 1989년 4월호.
7> <노동문학>, 1989년 6월호.
8> <민족민주운동> 창간호, 28쪽, 아침, 1989.
9> 앞의 책,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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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3 08:00 김삼웅

 

늦봄 문익환 목사의 생전모습. 살아생전 그는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항상 있었다.ⓒ 김민수

 

김근태는 이론가이면서 전략가였다. 반군사정권, 반외세투쟁에 있어서는 명료한 이론과 함께 치밀한 조직과 연대를 통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과거의 재야ㆍ청년운동이 거칠게 조직되어 단발적으로 투쟁하다가 와해되곤 했던 경험에서 치열한 전략이 요구되었다. 그는 정책기획실장으로서 전민련의 이념과 조직을 총괄하면서 90년대초 노태우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다.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예의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다시 파쇼적인 통치로 본색을 드러냈다. 전민련 고문인 문익환 목사가 3월 25일 정경모ㆍ유원호와 함께 베이징을 경유하여 평양에 도착하고, 이에 앞서 3월 20일 작가 황석영의 방북사건 등을 공안정국의 빌미로 삼았다. 문익환은 평양공항에서 입북성명을 발표하여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정부는 문 목사 일행이 귀국하자마자 미리 발부받아 둔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여 김포공항에서 구속ㆍ수감했다. 이 사건은 공안정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4월 12일 이부영ㆍ조성우ㆍ권형택ㆍ이재오ㆍ이창복ㆍ배종렬ㆍ지선 스님 등 전민련 간부들을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14일에는 <한겨레> 논설고문인 리영희 교수를 북한 취재 계획과 관련하여 역시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5월 1일에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문익환 방북사건과 관련 혐의로 소환했다. 노태우 정권은 제1야당 총재까지 소환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위기 국면을 역전시키려 들었다.

4월 12일 전민련 의장단 등 간부들이 구속될 때 김근태는 빠져있었다.
외형상 고위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민련 창설 당시 그는 정책실장이었다. 김근태는 의장단과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흔들리자 1990년 3월 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조직을 유지하고 폭압적인 공안통치를 일삼는 노태우 정권과 맞장뜨기 위해서는 김근태가 다시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회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고난의 길이었다.

김근태의 능력과 역량, 전민련과 민주화운동 진영에서의 위상을 꿰고 있는 공안당국이 그를 방치할 리 없었다. 그들은 쇠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외부 환경은 다시 5공 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었다.

89년 대학생으로 정부의 허락 없이 평양에 갔던 임수경 씨가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와야 할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 씨와 동행해 내려오도록 파송했다. 물론 신부는 자신이 보호하던 학생과 함께 옥에 갇혀야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1989년 5월 3일 부산동의대 사태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하고, 6월 27일 평민당 소속 서경원 의원이 방북한데 이어, 6월 30일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제3국을 통해 평양 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했다. 7월 7일에는 남한의 전대협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가 남북통일을 위한 공동투쟁 등 ‘남북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다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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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달라진 변화의 상황에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군부정권의 향방을 주시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였다. 그는 어떠한 절망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투지를 갖고 있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지만 김근태는 유난히 ‘희망’이란 단어를 자주 거론하는 정치인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95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도 <희망의 근거>다. 그런데 익숙한 일상의 언어가 시인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듯이 김근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희망은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주석 1)

이승만에 출산되고, 박정희에 양육되고, 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진 정치 군부는, 그리고 이들에 빌붙어 실세가 되고 치부에 성공한 보수세력은 전혀 민주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89년 1월 노태우 정부는 헝가리와 수교, 동구 공산권 국가와 첫 국교를 수립하는 등 열린 외교정책을 펴는 듯 하였다. 하지만 반공냉전 의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화만이 통일을 가져오고, 평화통일만이 민중의 생존권이 보장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노태우 군부정권과 타협적인 보수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재야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을 결속하는 일이었다.

반유신, 반5공 투쟁 과정에서 청년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자ㆍ농민ㆍ여성 등 기층민중세력의 성장이 있었다. 값진 희생이 따랐지만, 그동안 소수 운동권에 머물렀던 반독재 시민저항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태우 6공 정권에서는 다양한 시민단체가 결성되고 저항운동도 그만큼 튼실해졌다.

한 평자는 전민련의 창립과 관련,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썼다.

전민련은 분열과 무기력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 땅 민중들에게 희망과 신심을 안겨줄 강력한 단합된 구국운동 조직이고, 불신과 대립을 깨끗이 청산하고 단결과 투쟁의 길에 나선 모든 애국자ㆍ애국단체들의 합일된 의지의 결실체이며, 각계각층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중운동발전의 요구에 화답한 조직적 총화이다.

이제 전민련의 건설로 대중운동 속에 확고한 구심이 마련되어 우리 구국운동이 일대 전진을 기하게 되었고, 각계 민중에게는 전민련이라는 민중운동의 견인차, 응원군이 생겨남으로 해서 더욱 날카로운 불패의 투쟁의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며, 미-노태우 독재에게는 자신들의 패퇴와 종말을 앞당길 화약고이자, 저들의 매국적 소행을 가로막을 바위산이 등장한 것이 되었다.
(주석 2)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창립대회를 열고, 상임공동의장에 이부영, 공동의장에 이창복을 선출했다. 민통련의 발전적 해체와 재야ㆍ노동자ㆍ농민 등 8개 전국단위 부문운동 단체와 전국 12개 지역단체 및 200여개의 개별단체가 참여하는 해방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구국운동조직이라는 거대 협의체였다.

이날 전민련 대의원 총 1,103명 중 726명이 참석하고, 시민ㆍ학생 등 5,00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창립대회가 열렸다. 노동운동 영역 대의원 250명, 농민운동 대의원 230명을 비롯하여 청년ㆍ교육ㆍ종교ㆍ여성ㆍ비판적 지식인 등이 다수 참여했다.

6.29선언 1주기의 ‘정치적 선물공세’의 일환으로 88년 6월 3일, 2년 10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김근태 씨는 대선을 거치면서 민통련이 자중지란을 겪다가 결국 와해되고 말자 다시 운동진영을 결집, 대중투쟁을 펼칠 상시적인 공동투쟁체 건설이 시급하다고 판단, 이부영 씨등 출소한 40대 인사들과 함께 전민련 건설논의를 해나갔다. (주석 3)

전민련은 창립대회의 결성선언문과 사업계획 발표를 통해 대북관계 및 5공청산 등 대내외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전민련은 1988년의 3가지 과제를 목표로 제시했다.
첫째, 5공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한다.
둘째,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미국과 노태우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저지한다.
(주석 4)

전민련은 이와 같은 목표 아래 5공청산과 광주학살 원흉처단투쟁, 반민주악법 개폐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 등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전민련은 창립 다음날인 1월 21일 1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대학로에서 ‘노태우 정권의 민중운동 탄압 및 폭력테러 규탄대회’를 시작으로, 2월 18일에는 ‘광주학살 5공비리 민중생존권탄압 책임자 노태우ㆍ부시 규탄 국민투쟁 기간’을 선포하여 6공정권의 폭압에 정면 저항했다.

전민련은 2월 27일 회원 30여 명이 “부시 방한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며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미대사관 앞쪽으로 시위를 벌이다가 전원이 연행되었다. 3월 14일 전민련 주최로 8개 단체가 연합하여 ‘노정권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본부’ (공투본부) 결성식을 가진데 이어 3월 19일에는 공투본부 주최로 5,000여 명이 한양대 노천국장에서 ‘노태우정권 불신임투쟁 선포대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또 4월 2일에는 노운련ㆍ서총련 소속 회원 등 1,000여 명과 함께 동국대에서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강제진압 규탄대회’를 열었다.

1989년의 대정부 투쟁의 중심에는 전민련이 있었다. 전민련은 시민조직과 노동운동 단체들과 전두환 체포, 5공청산, 노태우 퇴진, 노동탄압 중지 등 핵심 이슈를 제시하면서 6공정권을 압박했다. 여기에는 김근태의 조직력과 정세분석에 힘 입은 바 적지않았다.

그는 “대선시기의 전술적 차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중층적 타협을 통해 신속히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이 ‘선 건설 후 내부투쟁’ 논리는 당시 운동의 통합을 요구하는 운동진영 내부의 정세와 결합하면서 강한 설득력을 가져나갔다. 그 후 전국적으로 지역민족민주협의회가 결성되면서 결국 89년 1월 전민련 발족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출소한 직후인 88년 7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 현황과 과제’ 라는 주제로 연설한 ‘2개의 전선론’은 현재까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민족민주연구소의 채만수 소장은 “그동안 추상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통일전선론을 크게 진전시킨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운동상황을 “민족민주전선, 즉 애국전선의 건설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다”고 파악하고, 애국전선의 건설에 관한 문제에서 “민족민주운동 전선의 즉각적인 건설을 주장하는 소시민적 포퓰리즘과 국민운동 수준에서의 연합을 주장하는 영향을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2개의 전선론을 폈다.

“현재 민족민주운동은 기층의 민중운동 역량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운동은 보수야권으로 불리는 제도정치권 그리고 재야운동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양자는 민주화 실천목표와 운동방식에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의 운동에는 명백한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민족민주전선과 국민전선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민족민주전선이 기본모순, 국민전선이 현시기 주요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강연은 향후 전민련의 위상과 발전전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주석 5)

주석
1> 정혜신, <희망의 근거가 됨직한 사람>, <신동아>, 2001년 9월호.
2> 이무명,
<애국민주운동론>, 270쪽, 녹두, 1989.
3> 이재화, 앞의 책, 166쪽.
4>
<민주화운동사연표>, 518쪽.
5> 이재화, 앞의 책,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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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2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86년 6월 30일 2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경주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가석방이었다. 그가 출소하게 된 데는 정치적 지형변동에 따른 조처였다. 정부는 6ㆍ29선언 2주년의 은사라고 생색을 냈다.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총선은 노태우의 민자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순위로 3야당이 일정한 의석을 갖고 포진하였다.

정국은 모처럼 야당이 주도하는 가운데 5공 청산과 민주화 추진이 진행되었다.
야당들은 사안에 따라 연대 혹은 합종을 택해가면서 경쟁적으로 정치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제24회 서울 올림픽으로 정치 현안은 스포츠 제전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김근태는 세월의 변조 속에서 모진 고문과 3년여의 옥고로 망가진 건강을 추스르는 한편 다시 행동에 나섰다. 첫 발언은 10월 22일 서울대 민추위위원장 문용식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이었다.

 


문용식과 박문식 등은 1984년 10월 7일 민주화추진위원회(일명 깃발 그룹)를 결성, 문용식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엇다. 민추위는 하부조직의 건설에 나서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고려대 등의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주학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민주학련 소속 대학생들은 11월 14일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 농성을 시작하면서 민중생존권 보장과 14개 항의 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또 민정당재집권저지투쟁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공안 당국은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 소속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민추위가 배후 조종한 것으로 판단하고, 문용식 등을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다. 김근태가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폭로한 것이다.

김근태가 석방되었을 때에는 민청련은 정치상황의 변화와 주요 간부들의 장기 구속 등으로 거의 활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김근태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었으나 시대 상황의 변화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5ㆍ3 인천항쟁 이후 주요 간부 구속과 수배로 민청련의 역량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반면에 6ㆍ29선언으로 독재정권의 폭압적 성격이 약화됨으로써 열려진 공간은 엄청난 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탄압시기에 보여왔던 민주화운동진영에서의 선도적ㆍ지도적 역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86년 초에 회원들이 대거 탈퇴한데다가 김근태 전의장, 김병곤 전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 간부가 장기간 구속상태에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5ㆍ3인천항쟁을 빌미로 한 민통련을 비롯한 민주화운동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11월의 건국대 항쟁의 대학생 대량 구속 사태 등 탄압국면 속에서 공개정치투쟁을 표방하는 민청련의 활동 입지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9)

김근태는 민청련의 쇄락에 실망하면서도 절망하진 않았다.
새로운 희망을 걸었다. 먼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고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문 경찰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이 시급했다. 12월 15일 서울 고법의 제정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근안 전 경감이 수배되기에 이르렀다. 역시 정치지형의 변화때문이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정국은 일해재단 청문회를 시작으로 5공비리 청문회로 이어졌다.
노량진 수산시장 비리 사건으로 전두환의 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그리고 전두환의 처남 이창석이 공금 횡령 혐의로 각각 구속되었다. 11월 23일 전두환ㆍ이순자 부부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로 유배되었다.

새로운 정치질서가 잡혀가고 전두환이 몰락하면서, 세상의 관심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와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의 이른바 ‘3김’에 쏠렸다. 그리고 반독재 투쟁을 ‘적당히’ 했던 운동권 출신들이 야당에 들어가 ‘투사’가 되었다. 이 무렵 김근태의 심경은 할프단 라스무센의 다음의 싯구대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고문가해자도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몸도 아니다
죽음을 가져오는 라이플의 총신도
벽에 드리운 그림자도
땅거미 지는 저녁도 아니다
희미하게 빛나는
고통의 별들이 무수히 달려들 때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의
눈 먼 냉담함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이 해 9월 말 도서출판 중원문화를 통해 고문과 옥중기록을 묶어 <남영동>을 간행하였다. 독재정권의 야만적인 고문실상, 옥중 편지와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썼던 주요 논설 등을 실었다. 한국민주화운동사와 고문의 야만성을 폭로한 5공시대의 대표적 고발문학으로 꼽히는 책이 되었다.

이 책은 문익환의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의 서시에 이어,
제1부 :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① 예고되고 계획된 구속 ② 인간 도살장 남영동, 그곳에서 있었던 한 맺힌 내력 ③ 서울 구치소 ④ 지식인이여, 법관들이여 ⑤ 나는 처벌받을 수 없다.

제2부: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⑥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⑦ 민주주의를 향한 진군

발문 : 김근태 동지를 알자 / 문익환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원래 1987년 9월 김근태가 아직 경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즈음 민청련에서 <김근태 고문 및 옥중기록 - 이제 다시 일어나>란 제목으로 중원문화원에서 출판한 것을 제목을 바꾸어 재간한 것이다. 민청련은 서문에서 “고문이 남긴 육체적ㆍ정신적 폐허상태를 추스르며 다시 깨어 일어나는 한 인간의 희생과 재기의 처절한 과정을 그의 기록을 통해 밝혀내고자” 간행했다고 밝혔다. 서문은 이어진다.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 동지는 다른 어떤 점보다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이다. 한 단체의 대표로서, 남편으로서,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그의 절실한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김근태 동지의 이러한 진실성을 통하여 참 용기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주석 11)

주석
9>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47쪽.
10> 할프단 라스무센,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2>, 21쪽, 역사비평사, 2007.
11> <이제 다시 일어나>,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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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20 08:00 김삼웅

 

 

6월 항쟁의 열기 속에서 인재근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후보자로 남편과 함께 추천된 사실을 알았다. 그런 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그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이었다.

김대중 선생 비서진들에게서 얼핏 들으니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후보자로 우리 부부가 추천되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그 상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추천하는 정도로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어렵게 전화로 김대중 선생께 사양하는 뜻을 전했다. (주석 7)

인재근은 옥중의 남편과 이 상의 수상 여부를 놓고 상의했다. 부부는 미국이 그동안 한국에서 자행한 여러 가지 범죄적 행위에 미국인이 주는 상을 받는 데 대해 거부감이 생겼던 것이다. 분단과 국민의 반대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가장 잘 순종해주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을 지지해주고 “한국민들은 들쥐와 같다”는 따위의 망언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광주학살과 관련 미국의 행위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6월항쟁으로 따낸 대통령 직선제로 인해 대통령후보 단일화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우리 본부가 우리의 주체 역량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김대중 씨 비판적 지지를 표명할 당시 공교롭게 이 상의 수상자로 우리가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국내에 이러한 사정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국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더욱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조국의 분단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6ㆍ25전쟁은 왜 발생한 것이며, 그리고 그 이후 현재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오고 있느냐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간과했었던 많은 사실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석 8)

김근태 부부는 특히 미국의 광주사태와 관련된 부문에 이르러서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곁들여서 ‘인권상’은 자신들보다 훨씬 큰 희생을 바친 동지들에게 돌려져야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부부는 여러 날 고뇌 끝에 결국 이 상의 수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미국 대통령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를 추모하는 사업으로서 제3세계 인권운동가에게 주어지는 상의 케네디 재단은 비교적인 양심 세력이 이끌고 있어서 이 재단의 일을 연대 지지하는 입장이 배려되었다. 또한 한국 민주화운동에 깊은 관심과 격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수상을 결정하고도 11월 20일 워싱턴에서 거행되는 시상식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김근태는 옥중에 있었고, 인재근은 노태우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해 4월 로버트 케네디 추모사업회에서 이 상을 주기 위해 방한하기로 했지만, 정부는 그들의 비자발급을 거부하여 이것도 무산되었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듯 하자 정부는 뒤늦게 이들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고, 1988년 5월 4일 가톨릭센터 강당에서 수상식이 거행되었다. 김근태는 여전히 옥고중이어서 인재근 혼자 상을 받았다. 만감이 교차되는 수상이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으로 김근태는 국제적인 양심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석
7>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한반도재단 여성위원회, 54쪽, 2012.
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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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19 08:00 김삼웅

 

직선제 헌법이 마련되고 대선 일정이 잡히면서 대선 후보가 속속 등장했다.
집권당의 노태우와 야권에서 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의 이른바 ‘1노3김’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노력하고 다수 국민도 이것을 바랐으니,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이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야권은 분열상을 드러냈다.

재야ㆍ시민단체들도 분열되었다. 후보 단일화와 독자후보 출마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념ㆍ노선에 따라 각자도생에 나서기도 하였다.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민청련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옥중투쟁을 조직해냈으며 또한 바깥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월항쟁을 직시했으며 그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운동권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의 옥중 메시지는 87년 12ㆍ16대선을 앞두고 세 차례 나왔다.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부인 인재근 씨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받아쓰게 했다. 10월 16일과 28일, 11월 4일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10월 26일의 첫 메시지에서 그는 김대중 씨를 ‘범국민적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씨의 비판적 지지 천명으로 그는 출옥 후 상당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김근태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당시 어떤 입장이 옳았는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그것은 판단될 것이다." (주석 6)

김근태는 대단히 함축적인 발언을 하였다. 양김 중에 자신의 김대중 지지를 두고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근태의 메시지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6월항쟁을 이끈 핵심적 재야연합세력인 민통련에서는 회원 투표를 거쳐 압도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핵심재야세력은 김대중을 선택적으로 지지하고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5공정권의 각급 부정과 관권동원, 야권후보의 난립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의 실망은 컸다.
5공 폭압세력이 교활한 정치적 술책으로 6ㆍ29를 제의하고, 야권과 재야가 이를 덜컹 받아들이면서 국민의 혁명적 열기가 체제내로 순화되고, 후보 난립으로 군부독재 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주석
6> 이재화, 앞의 책, 165쪽.



<나의 18대 대선 후기 1> / 유창선 (시사평론가)

“뻔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해야 아는 어리석은 자들...”

안철수가 사퇴했던 날 밤. 부산에서의 대선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 있던 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채 페이스북에 그렇게 글을 남겼다. 나에게 18대 대선은 그날 밤 그렇게 끝났다. 안철수를 저렇게 퇴장시키고서 민주당과 문재인이 박근혜를 이긴다? 나는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아주 명백한 표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날 밤, YTN과 MBC, KBS의 해직자들이, 그리고 쌍용차의 노동자들, 철탑에서 고공농성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이야 정권교체 못하더라도 자신들의 금뱃지를 간직하며 야당권력을 누리면 되겠지만, 다시 고통이 연장되는 민중들의 아픔은 어찌하란 말인가....

결국 민주당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지난 4.11 총선 패배에 이어, 국민의 65% 이상이 정권교체를 열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권교체를 무산시키는 주역이 되고 만 것이다.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욕심을 낸 결과이다. 지난 1년 동안 박근혜에게 줄곧 뒤졌던 후보가, 지난 1년 동안 박근혜를 변함없이 이겼던 후보를 밀어내고 자신이 단일후보 자리를 차지했던 상황은 재앙의 출발점이었다. 과연 정당의 후보이기에 자신들이 단일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정권교체의 대의를 뒷전으로 밀어버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민주당은, 문재인 후보는, 야당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이미 노회해진 486정치인들은, 민주당보다 더 민주당스러운 시민사회 출신 정치인들은, 팬덤문화에 빠져있는 그 지지자들은 하나로 똘똘 뭉쳤다. 그리하여 박근혜를 이기는 길을 막아버리고 박근혜에게 지는 길로 국민을 이끌고 갔다. 그것은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이길 능력도 없고 이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믿고 따라오면 이길 수 있다고 한 것, 그것은 거짓이었다....

시종일관 열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도 민주당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박근혜에 줄곧 뒤지는 판세를 민주당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노 핵심들의 백의종군 선언도, 문재인 후보의 의원직 사퇴도 끝내 없었다. 내가 거론한 이해찬 정계은퇴 선언 같은 것은 아예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는 모습일 뿐이었다. 단일후보 자리를 차지했으면 모든 것을 던지고서라도 이길 수 있는 길을 만들었어야 했거늘,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거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분한 것이다.

이제는 분명해졌다. 민주당은 정권교체의 장애물이다. 지금의 민주당이 그대로 있다면 이 나라는 새누리당이 장기집권하는 나라, 새누리당이 2014년 광역선거와 2015년 총선에서도 모두 승리하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무모한 욕심으로 정권교체를 무산시킨데 대해 가장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 천년만년 야당을 하며 야당권력을 놓으려하지 않는 세력은 이제 그만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하기에는 그들 스스로가 이미 너무도 기득권화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민주당이 스스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국민의 힘으로 민주당을 무너뜨리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적 야당을 만들어내는데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안철수는 그 과정에서 구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과정에서 안철수는 여러 가지로 정치적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진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능성있는 대안으로 살아있다. 국민의 힘이 모인다면 기득권 세력화 되어버린 민주당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야권의 구심체는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좌절된 국민의 정권교체와 새 정치 염원은 아직도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18 06:50 김삼웅

 

5일 저녁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로비에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부미방)의 주범으로 위암을 앓고 있는 김은숙씨를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에서 윤민석씨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다.ⓒ유성호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의 수구보수세력은 노도와 같은 민중의 궐기 앞에 넋을 잃고 있다가 간신히 노태우의 6ㆍ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등으로 국면을 호도하고자 하였다. 부마항쟁 등 반유신 투쟁이 10ㆍ26사태로 가라앉고 말았듯이, 6월 민중항쟁도 6ㆍ29선언으로 혁명적 비등점에서 국면의 전환을 보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군부와 이들과 한 패가 된 보수세력은 정치적 술수가 대단히 발달돼 있다. 그들은 강경국면과 유화국면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정권을 계속 유지한다.
노태우의 6ㆍ29선언은 위기 탈출을 위한 유화책이었다. 야당과 재야가 6ㆍ29선언을 받아들이면서 6월항쟁의 국민적 민주화 열기는 체제내로 수용되고,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직선제 개헌안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정국은 급속히 제13대 대통령선거 국면으로 바뀌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 같았다. 폭압과 살륙의 시대가 어느새 대화와 타협의 시대로 변하는 듯하였다. 야당이 속속 창당되고 기회주의 언론은 온통 차기 대권과 대선의 향방관련 기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죽은 자들과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양심수들은 잊혀지고, 산 자와 갇히지 않은 사람들이 제각기 이념과 이해와 입지를 쫓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전히 경주교도소에 갇힌 김근태는 6월항쟁을 주도한 민중의 위대한 역량을 믿으면서도 바깥 소식에,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희망과 좌절, 안도와 비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8월 28일 아내에게 <자유ㆍ석방 앞에서 의연함, 태연함은 태풍 속의 낙엽이지요>라는 제하의 편지에서 심중의 일단을 밝히고 있다.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움, 바깥소식이 동반하는 설레임과 안타까움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탓도 있겠지만, 이 높은 담벼락 안에서의 삶이 영혼을 무척 피폐케 만드는 것 같소. 이 시대의 징표인 적나라한 폭력, 제도화된 폭력과 경멸이 한껏 도드라지고 있는 이곳에서의 살아냄, 그리고 분노와 항거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긴장될 것을 요구해왔고, 그 때문에 꽤 바빴던 것도 같구려. 지난 2년 말이오.(…)

나갈 것 같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이 상태, 이런 우리 마음을 뭐라 말해야 할지요. 지난 7월 10일과 8ㆍ15의 내 심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소. 내 차례는 아직 안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자신에게 타일러 왔는데도, 열렸다 허무하게 도로 닫히는 교도소 정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휘청거리는 것 같았소. 곧 몸져 드러누울 지경이었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버티었지만 말이오.
(주석 3)

이 대목에 이르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7월 10일과 8ㆍ15에 양심수와 일반범에 대한 정부의 감형ㆍ출소 조처가 있었다. 김근태도 대상자의 명단에 오르내렸으나 끝내 배제되었다. 수인들에게 3ㆍ1절과 광복절이 특히 기다려지는 것은 특사라는 ‘성은’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취임식 연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전직 대통령들. 왼쪽부터 김영삼 전대통령, 노태우 전대통령, 전두환 전대통령, 최규하 전대통령.ⓒ주간사진공동취재단

 

노태우의 6ㆍ29선언에는 직선제 개헌과 더불어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관련 사범 석방’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쳐 ‘시국사범’의 석방이 있었지만 김근태는 비껴갔다.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어른답게 해내지 못했다오. 결국 나는 못 나가고 말았구나 라는 그 냉엄한 사실에 짓눌려 허둥대고 만 것이지요.

이번은 아니지만 여하튼 나가는 것이 가까웠으니 여러 가지를 미리 깊이 생각해두고자 하면서 이 민주화의 변화는 무엇인가,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리고 나는 무엇이고 참된 민주화와 민족자주를 위해서 우리는 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등을 헤아리느라고 무척 바빴었다오.

간혹 생각이 엉키거나 잠자리에 들 때 쯤이면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여 빨리 나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은 아닐까 하며 조바심 치고 가슴 저려 하다가 자신을 돌아보곤 실소도 하였었소. 시계는 네편이야, 대범해야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었다오.

그러나 말이오. 자유ㆍ평등ㆍ석방 앞에서 의연함, 대범함, 어른다움 등은 한낱 태풍 속의 낙엽이었을 뿐이었소. 여러 가지 논리적인 숙고 과정 속에서 진짜 커지고 커져왔던 것은 폭발할 듯한 해방에의 갈망, 자유에의 그리움이었소.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고 그냥 원색적인 해방에의 욕구만 있었던 것이오. 나가고 싶은 것이오. 이곳을 떠나가고 싶었던 것이오. 뻔히 예상되었던 것인데도 이런 강렬한 욕구가 차단되었던 그때의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소. 나는 통째로 교환되었던 것이오.
(주석 4)

이 대목에 이르면 김근태의 소박한 인간적 감성을 만나게 된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누군들 감옥에서 풀려나길 바라지 않겠는가. 행여나 하며 ‘조바심 치고’, ‘가슴 저려’하는 수인의 모습에서 투사 김근태가 아닌 보통사람 김근태가 눈에 선하다. 그는 혁명가나 투사이기 전에 평범한 인간이었다.

김근태의 이 편지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대목이 있다. 이른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김부식ㆍ김은숙ㆍ김현장 등이 경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게 된 심경이다.

내가 이곳 경주에 와서 꽤 괜찮아했던 가장 큰 이유 하나는 은숙이가 여기서 살다가 나갔다는 사실이었소.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묘한 안도감과 구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었소. 어찌보면 얄팍하고 뻔뻔스런 것일 수 있는데 은숙이가 고생하던 그곳에서 나도 고생 좀 했다는 사실이 성립하게 된 것이오. 나중에 나가서 은숙이, 부식이, 현장이를 볼 때 말을 틀 건덕지가 생겨준 것이지.

그네들이 결단을 내리고 투쟁할 때, 갇히고 매맞고 외로워할 때, 앞 세대로서 선배로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소. 광주사태 이래로 눈물 많은 사내가 되어 쥐죽은 듯 엎어져 있었을 때 그네들은 일어섰고, 나는 또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소.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조그만 꼬투리가 우연히 생기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왔소. 이 경주에 와서 말이오.
(주석 5)


주석
3> 김근태 옥중서간집,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202~203쪽, 한울,
1992.
4> 앞의 책, 203~204쪽.
5> 앞의 책,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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