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5 08:00 김삼웅

 

 

김근태가 학생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재야운동을 통해 추구해온 일관된 가치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치개혁을 통해 인권이 보장되고,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서민들의 생계가 보장되어야만, 이를 통해 평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1997년 12월의 대선을 앞두고 김근태는 어느 때보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김영삼 정권의 정치ㆍ정책 실패로 국가경제가 위기에 직면해 있고, 중소상공인들과 서민생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러 구원투수가 바로 김대중 후보라고 판단하였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대통령선거 수도권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대통령선거전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회의원, 국민회의 부총재의 직위에서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리더로서 최선을 하였다. 의정활동은 제쳐두더라도 지방유세, 언론상대 토론회 등 가능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권력에 대한 야심에서가 아니라 정권교체는 시대적 당위이고 사명이라고 인식한 때문이다.

더 이상 분단ㆍ냉전ㆍ군부독재의 잔재 세력이 권력을 독식하면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민족사를 오염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김근태의 솔직한 심경이고 염원이었다. 그래서 대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지난날 깨끗하고 꿋꿋하게 살아온 행적이 많은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대선에서 표로 연결되었을 터였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선에서 국민회의는 승리했다. 김대중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초 이회창 후보가 집권여당의 프레미엄을 업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50% 이상의 승세를 잡았으나, 두 아들의 병역문제 등이 불거지고, 김영삼 정부의 경제실정으로 인한 IMF 사태가 일어나면서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운 김대중의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여 중후반 이후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제15대 대선도 과거 선거처럼 집권세력에 의한 각종 용공음해와 불법 탈법의 선거운동이 자행되었다. 특히 김대중 후보에 대한 극심한 매카시즘 공세가 전개되어 선거전을 정책대결이 아닌 색깔론으로 몰아갔다. 보수족벌 언론사는 기사와 논평을 통해 노골적으로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배척하면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시키는 등 낯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대중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대규모 청중동원의 연설회 대신에 몇차례 TV토론회가 열려서 유권자들이 후보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제위기를 맞아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김대중의 역량이 높이 평가되었다. 여기에 DJP 연합과 여당의 분열이 작용하여 정부수립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창업과 쿠데타ㆍ혁명ㆍ정변ㆍ반정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권력변환이 있었지만, 피지배 계층이 평화적 방법으로 권력을 교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60년 민주당의 집권은 4월혁명을 통해 일어난 ‘혁명과정의 선거’로 취득한 정권교체이고, 1992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은 3당 야합으로 얻어진, 군사정권의 모태에서 발생한 것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민회의의 대선 승리는 김대중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김근태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긴 세월 동안 모진 고문과 박해를 받으며 싸웠던 것이다. 평화적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은 그의 오랜 꿈이고 소망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약체였다. 국회는 여전히 한나라당이 지배하고 지난 반세기 이상 군사정권과 유착하면서 성장해 온 거대 족벌신문과 지식인 그룹, 그리고 “정권을 빼앗겼다”고 앙앙불락하는 특정지역의 기득권 세력이 버티면서 사사건건 새정부를 헐뜯었다.

‘국민의 정부’의 권력은 탄생 때부터 많은 고민을 안고 출발했다. 김 대통령은 유효 투표의 40.3%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이회창 후보보다 겨우 39만 표 앞선 것이었다. 승부를 가른 이 39만 표는 김종필 총리의 지지기반인 충청권에서 나타난 김대중-이회창 후보간 표차와 정확히 일치하는 수치다. 김 총리가 공동정권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야당으로 입장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원내 제1당으로 막강한 국회 권력을 갖고 있었다. 39만 표의 격차에서 짐작되듯 표의 동서 양분 현상은 과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지난해 6월의 지방선거와 두 차례의 재ㆍ보궐선거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말하자면 김대중 대통령의 권력은 소수정권인데다 그나마 권력이 나뉜 연합 정권의 구조적 취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주석 3)


주석
3> 전영기,
, <월간중앙 WIN>, 199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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