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5 08:00 김삼웅

 

 

 

6월 항쟁이 군사독재 세력의 청산에는 실패했으나 대통령의 5년 단임제 헌법을 마련하는 등 민주화의 제도적 장치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이후 누구도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헌정을 짓밟으면서 장기집권을 획책하지는 못하였다.

국민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특히 언론은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기’를 거론하는 조급성을 보인다.
대선을 2년 쯤 앞두고 이에 대한 여론조사 등이 실시되고 ‘예상후보’가 나타난다. 김근태는 국내외의 언론에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1998년 월간 <신동아> 8월호는 여론조사에서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로 김근태가 선정된 사실을 보도했다. 이회창ㆍ이인제 등 쟁쟁한 후보군을 제치고 ‘1위’에 뽑혔다. 기자들에게 술밥 사주고 명절 때에 촌지 주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니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 정부에 김근태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한 사건의 구제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고 있었다.

1999년 1월호 <뉴스위크(일본편)>는 “21세기를 움직일 세계의 100인”에 김근태를 선정하였다. 각계의 유망한 인물들을 제치고 그를 선정한 <뉴스위크>의 안목은 대단했다.

같은 해 4월 아시아ㆍ태평양 지도자회의(FDL-AP)의 이사에 위촉되고, 5월에는 국민회의의 당 쇄신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당 쇄신위원장은 능력과 도덕성에서 ‘쇄신’된 인물이어야 했다. 같은 달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위촉되어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양대 뿐만 아니라 경향 각 대학에서 특강의 요청을 받고 정치현안과 자신의 역사관을 강의했다. 6월에는 군부쿠데타로 실종되었던 인도네시아가 44년 만에 총선거를 실시하면서, 국제적으로 저명인사들을 ‘국제선거감시단’으로 위촉하였다. 카터 전미국대통령 등이 함께 참여 했다.

김근태는 2000년 7월 13일 (사)한국여성유권자연맹으로부터 ‘남녀평등 정치인상’을 받았다.
오래 전부터 시민사회운동 과정에서 그리고 의정활동에서 성실하게 노력해온 것이 평가되었다. 그의 도봉구 비좁은 집에는 부인과 함께 나란히 문패가 걸렸다. 2001년 4월에 ‘한반도 평화와 경제발전 전략 연구재단’(한반도재단)을 창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국회외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익히게 된 문제들을 중심으로, 당내외 인사, 사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설립한 것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던 터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그동안 국제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냉전지대 한반도가 어느 정도 해빙되어가고 있던 시점이다.

김근태는 한반도재단을 설립하면서 <희망의 한반도를 만드는 세 가지 키워드>를 천명하였다. ‘세 가지 키워드’로 평화ㆍ경제시스템ㆍ리더십을 제시한다. 다음은 주요 부문이다.

평화

지난 세기 내내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이제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 되었다. 또한 평화가 동아시아의 경제협력 방안과 연결될 때, 그 힘은 가히 폭발적일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평화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존과 발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1970년 동서독 정상의 만남이 20세기 말 동구의 민주화와 개방으로 이어졌듯이 지난해 남북 정상의 만남은 21세기 한반도 평화의 시원(始原)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협력 방안과 공동의 발전모델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과제라는 생각이다.

경제 시스템

지금은 세계화를 적극 수용하고, 정보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할 시점이다. 이제 우리가 핵심기술과 세계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제품은 살아남지 못할 만큼 세계화는 이미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길은 위기를 관리하면서 구조개혁을 지속하는 것 뿐이다.

또한 시장의 자율성을 확대해가면서, 정부 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정책의 예측성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경제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한다는 심정으로 공동의 전략과 목표를 세우고, 계획과 실행이 일치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우리는 다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리더십

새로운 시대는 그 시대 정신에 부응하는 새로운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 일관성, 민주적 포용력, 비전과 자질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바위처럼 굳세게 버티면서 국민과 함께, 국민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바로 국민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시대를 극복하고 민주적 리더십이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경제시스템의 변화에 걸맞는 ‘정치구조와 인식의 대전환’을 모색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고자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복무하는 리더십의 형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 사회의 리더십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선택된 지도자의 역량이, 그 사회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지 아니면 뒤로 물러서게 할 것인지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주석 1)


주석
1> 김근태, <한반도재단을 창립하며>, <희망은 힘이 세다>, 101~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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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10/04 08:00 김삼웅

 

 

'사랑의 집' 건설현장을 찾은 김근태 최고위원

 

2000년 4월 13일 제16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김근태는 선거구인 서울 도봉갑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손쉽게 당선되었다. 유효표의 50.9%인 34.233표를 얻어 한나라당 후보를 크게 따돌렸다. 15대 (38.9%)보다 2% 포인트를 더 득표, 유권자들이 지난 4년 동안 의정활동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여당이면서도 다수당이 되지 못했다. 총의석 273석 중 한나라당 133, 민주당 115, 자유민주연합 17, 민주국민당 2석이었다.

김대중 정부와 공동정부를 구성한 김종필의 자민련이 내각제 개헌을 둘러싸고 분열하여 ‘2여 1야’의 후보난립이 주요 패인이 되었다. 민주국민당과 민주노동당(1.2%)은 정당 존립이 무너졌다.

민주당은 의석수에서는 약진했으나 다수당은 한나라당에 넘겨줘야 했다. 민주당 소속의원 4명이 자민련에 입당하는 ‘의원 꿔주기’ 형태로, 자민련이 간신히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DJP연대는 다시 복원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한 공동정부였다.

김근태는 15대와 16대 국회에서 두 차례 ‘백봉 신사상’을 받았다.
이 상의 첫 수상자가 된 것은 1999년 11월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라용균 전의원을 기려 제정된 상이다. 육탄과 욕설로 뒤범벅이 된 국회를 ‘신사적’으로 운영하라는 취지에서 제정돼 ‘신사적인’ 의원에게 주어진다.

김근태는 1,2회 백봉 신사상을 받고, “연속 두 번의 ‘백봉 신사상’ 수상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조금 과분한 영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다른 의원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번 제2회 백봉 신사상 수상은 신사와 대중정치인이라는 문제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주석 8)고 소회를 밝혔다.

여기에는 한국정치의 실상, 그리고 국회의 운영이 ‘신사’가 서식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깔렸다.

끊임없는 줄세우기와 편가르기, 계보만들기와 수에 의한 힘겨루기….
그래서 정책을 위한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지역 패권에 의지한 보스의 힘에 의한 독선과 오만이 리더십으로 인식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적 정치현실이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사와 정치인은 양립할 수 없다. 오랜 벗 하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백봉 신사상 계속 받으면 대중정치인으로는 낙제라는 얘기야!”

나는 이 말을 웃으며 받아넘겼지만, 옆구리에 뭔가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주석 9)

 


술잔을 나누는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과 민주당 김근태 최고의원

 

김근태에게 ‘대중정치인과 신사’는 양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대중의 눈길을 끄는 발언과 적절한 쇼맨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건 딱 질색이다. 점잖게, 신사적으로 하면 언론에 뜨지 않고, 대중의 관심을 받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신사적’ 또는 ‘영혼을 지키면서’의 심성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김근태의 딜레마는 여기가 근원인 셈이다. 강준만 교수의 뼈아픈 지적이다.

김 부총재의 경우 그런 쇼맨십이랄까 쇼에 대한 감각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 부총재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자기방어적이라는 평가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석 10)

김근태가 재선에 성공하고 집권당의 지도부가 되면서 언론과 국민 중에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이런 저런 주문이 따랐다. 역시 딜레마는 친화력은 좋은데 ‘대중성’이 모자란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치인이 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는 천성적으로 신사적이어서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시 강준만의 지적이다.

나는 김 부총재의 경우 친화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건 그의 겸손과 성실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보진 않는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용되는 ‘친화력’의 정체에 대해선 깊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기자들에게 술은 커녕 밥 한끼 사지 않아 욕을 먹는 정치인들이 적잖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정치인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기자들로부터 욕먹게 마련이고 또 그런 부정적인 평가는 언론에 그대로 반영돼 대중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모든 걸 원칙대로 하려는 정치인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반면 능력과 윤리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있어도 술 잘 마시고 마당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건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는 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문화를 거스르면서 리더가 될 수는 없으니 이게 바로 딜레마라는 것이다.
(주석 11)

김근태는 ‘신사정치인’이 되었으나 ‘대중정치인’으로 성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중성과 친화력, 쇼맨십이 부족했다. 그래선지 백봉 신사상의 의미를 바꾸었으면 하고 바랐다. 김근태가 바라는 ‘정치인상’이기도 하다.

백봉 신사상이 단지 점잖고 교양 있고 예의바른 정치인에게 주는 상에 머물지 않고,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가 속으로 암암리에 꿈꾸는 바람이다. (주석 12)


주석
8> 김근태, <정치인과 신사>, <국회보>, 2001년 1월호.
9> 앞과 같음.
10>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 제10권, 87~88쪽, 1999.
11> 앞의 책, 89쪽.
12> 앞의 책, <국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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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10/0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여당 의원으로서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과 처신의 신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1995년 정계에 입문하여 1년여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야당 의원 2년여 만에 집권당 국회의원과 부총재가 되었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이제는 그만한 위치에서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근태는 1999년 3월 장영달 의원과 이창복 전의원 등 현실정치에 뛰어든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재야의 교량 역할을 하기 위해 국민정치연구회(국정련)를 조직, 최고위원에 선임되었다. 나중에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로 확대되는 국청련에는 김근태의 정치철학과 비전을 지지하는 재야의 민주인사 다수가 참여하였다.

정치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지도급 위치에 이르면 ‘연구소’ 이름의 사조직을 만드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김대중ㆍ김영삼도 70년대 초기부터 연구소를 통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당권과 대선후보의 발판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적지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정치자금을 만들 줄 모르는 김근태에게는 연구소의 운영이 쉽지 않았다. 참여자들의 회비로 충당하였다.

김근태와 그의 동지들이 1999년 3월 이전의 국민정치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을 창립한 것은 운동권 출신들의 폐쇄적인 모임에서 벗어나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이를 정치적 영역에서 실현하기 위해 참여형 대중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민평련 조직은 이사장 이호웅 의원, 부이사장 최규성ㆍ홍미영ㆍ임종석 의원, 사무총장 문학진 의원, 산하조직인 민주평화아카데미 원장은 신병렬 의원, 민주평화연구소장은 유승희 의원, 정책실장은 민청련 시절의 오랜 동지 김찬이 맡았다.

민평련은 열린우리당 현역의원 32명과 당중앙위원 5명 등이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이해찬ㆍ임채정ㆍ한명숙ㆍ장영달ㆍ이부영ㆍ이상수ㆍ함세웅ㆍ지선 스님 등이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민평련은 김근태의 사조직이 아닌 ‘정치적 지향과 행보를 함께하는 재야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는’ 진보개혁의 연구모임이었다. 정책이나 의제를 치열한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민주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다. 부산ㆍ경북ㆍ대구 등 취약지에 지역조직을 결성하고 서울에도 구 단위 조직을 결성하였다.

김근태는 민평련 결성대회에서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주자들이 덩달아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고 있는데, 엄격히 따지면 ‘저작권’은 김근태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미 군정에서 문정관을 지내고 이승만과도 가까웠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정치의 특징을 ‘회오리바람형’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중앙의 상층부에서 일기 시작한 회오리바람이 일거에 정치지형을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서도 한국의 정치(정당) 구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헌정 6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10년이 되는 정당이 하나도 없을만큼 한국의 정당은 포말과 같은 운명이다. 이것은 여야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회오리바람형’ 정치변화는 여전하다.

1995년 9월 5일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2000년 1월 20일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각계의 전문가, 엘리트들을 대거 영입해 전국 정당과 개혁정당을 기치로 새천년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신당은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3대원칙을 내걸었다. 당대표에 서영훈이 선출되고, 김근태는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김근태는 신당 창당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심란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정당이 뿌리박지 못한 채 포말정당의 신세를 안타까워 한 것이다.

신당이 창당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사에서는 멀리 있는 것 같다. 나는 신당이 지금 많은 욕심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과정에 충실한 것이 필요할 것이다. 신당이 정치권 내부의 타협이나 역할 조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새로운 미래에 중점을 두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묻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따져보았으면 한다. 지금은 대안을 정치권 안에서 찾을 때가 아니고 미래와 국민으로부터 찾을 때이다. (주석 6)

김근태는 국회의원, 여당의 지도부가 되면서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의 마음으로 자성과 자계(自戒)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옷로비사건 등을 지켜보면서, 지도층의 도덕성 상실을 우려하였다.

오랜 민주화운동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의 성공, 그때 나는 감격과 함께 결심했었다. “이젠 의정활동에 전념하리라.” 민주화의 기틀은 마련되었으니 지금부터는 민주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외환위기는 극복했지만 경제는 여전히 어렵다. 정치는 흔들리고 있다. 진정으로 국민에게 다가서는 정치, 믿음이 살아 있는 정치, 그래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덕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주석 7)


주석
6> 김근태, <푸른 내일>, 제17호, 1999년 11월.
7> 김근태, <푸른 내일>, 제21호,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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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

012/10/02 08:00 김삼웅

 

 

<월간중앙WIN>은 <김근태의 정치 비전>을 “어두운 터널 속에서 찾아보는 새 희망”이란 타이틀로 다음과 같이 게재했다.

올 겨울은 라니냐현상 때문에 몹시 추울 것이라 한다. 우리 국민의 마음은 이미 97년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온통 겨울이었다.

오늘의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총론에서 우리는 합의를 이룩했다. 국제적 상황과 난관에 대한 이해와 대책에 대해서도 상당한 합의를 이뤘다. 그러나 구체적 영역에서는 갈등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것은 불가피할 지 모른다. 그러나 투쟁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위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첫째, 주체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우리가 큰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주눅들 필요는 없다. 세계화ㆍ국제화는 불가피하고 또 긍정적이다. 정보화도 서둘러 진전시켜야 한다. 하지만 세계화의 긍정적 함축과 더불어 그 무서운 위험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대비책이 분명해야 한다. 유사한 시행착오가 발생한다면 우리 국민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을 것이다.

둘째,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책임에 따르는 고통분담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공정성의 기초 위에서만 미래를 향한 강한 추진력이 용솟음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과 타협이 있어야겠다. 타협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타협은 파괴적 투쟁을 막을 수 있고, 또한 과오를 수정할 수 있는 자기교정능력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하고 싶다.

넷째,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해방이 필요하다. 과학적. 경영적, 문화적 상상력의 발현이 절실하다. 그럴 때만이 우리에게 꿈과 희망이 다가올 수 있다.

오늘의 중심적 화두는 민주, 개혁, 효율성 제고를 통한 경쟁력 확보와 한반도에서의 평화 수립과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합과정 성취 그리고 세계화ㆍ국제화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문제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불투명성을 제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를 위해 5대 재벌그룹의 구조조정을 신속하고 분명하게 해내야 한다.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개혁에 대한 신뢰를 확보해야만 개혁은 추진력을 가질 수 있다. 남미가 실패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국민으로부터 개혁에 대한 충분한 신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 경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바탕 위에서 공기업개혁ㆍ행정ㆍ관료개혁ㆍ정치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정치개혁부터 먼저 이뤄야겠다. 이 점에 대해 책임있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운 마음이다.

정치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순간 정쟁은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흐트러져버리고 말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부담은 김대중 정부와 여권이 감당해야 한다.

1백년 전 우리 민족은 근대화라는 엄청난 역사적 도전에 직면했다. 21세기를 앞둔 오늘 벅찬 현대화의 과정에 부닥쳐 우리는 휘청거리고 있다. 하지만 계곡이 깊으면 산이 높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어둡고 추운 계곡을 벗어나 다시 산등성이에 오를 것을 우리는 느낀다. (주석 5)


주석
5> 앞의 책, <월간중앙WIN>, 78~87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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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10/01 08:00 김삼웅

 

패널 : 재야세력이 김 대통령과 차별성이 없는 것보다 오히려 지금은 김 대통령을 많이 못 도와줘서 문제가 아닌가.

김근태 : 그렇다. 단적인 예를 들어 DJ를 싫어하는 것은 좋다. 또 권력과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갖고자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DJ개혁이 이번에 실패하게 되면 그 다음 한국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때 당신들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패널 : ‘마지막 재야’로 불렸던 김 부총재에게 요즘 과격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가.

김근태 : 폭압의 시대에는 지식인으로서 싸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과격하다는 것은 억울하다. 국회에 들어와 처음 상임위를 선택할 때 재경위를 희망했다. 전반기에는 당내 사정이 있어 외통위에 있었고 후반기에 내 뜻대로 됐다. 내가 경제학과 출신이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단순히 과격한 사람이 아니라 정책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대안세력으로 동의받고 싶어서였다.

패널 : 김 부총재는 재야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민주대연합론을 주장해왔다. 그것은 재야에서 민주당에 입당할 때의 명분이기도 했다. 그뒤 현 김 대통령의 정계복귀와 함께 민주당이 깨지고 국민회의가 만들어졌을 때 그것을 비관하기보다 따라갔는데 30년 이상 주장했던 민주대연합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김근태 : 국민회의를 만드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회의행 마지막 차를 탔다. 그런 선택이 정당하지 않다는 비판의식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감옥에 가는 것에 버금가게 고통스러웠다. 재야운동의 주류는 비판적지지론 (87년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과 함께 재야의 3가지 대선전략 중 하나)이었다. 이를 지지했던 사람 중 다수가 국민회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간관계가 우선 옥죄어왔다.

두 번째는 그래도 야당은 그곳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민주당에 부총재로 참여해 6ㆍ10지방선거에서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과정을 보면서 이렇게 해서는 정권교체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다. 앞에 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하게 됐다.

(김 부총재는 당시 “권력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 나서 ‘민주당에 남으면 사면복권 시키고 국민회의에 가면 안 시키겠다’고 회유하고 협박했던 사실을 털어놨다. 정치인에게 사면복권 여부는 선거 출마자격과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문제다. 김 부 총재는 사면복권을 포기하고 결국 국민회의에 참여했지만 뜻밖에 곧 사면복권됐다. 이에 대해 김 부총재는 “YS의 직접 요청으로 미국 케네디가의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면서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탄식했다)

패널 : 밉건 곱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경제성장을 주도해왔다. 재벌 중심이 아닌 21세기 산업구조 모델을 구상해 본 적이 있는가.

김근태 : 대만과 홍콩은 외환위기가 없었다. 대만에는 한국과 같은 재벌그룹이 없다. 재벌그룹이 지금 무너지면 한국 경제에는 큰 타격이 온다. 하지만 기업 경영방식의 변화가 반드시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쟁력 있는 대기업으로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개발독재의 유효성은 80년 초에 끝났다고 본다. 10년 이상 지연된 것으로 막대한 코스트를 지금 지불하고 있다. 위기에 직면해 지불해야 할 코스트가 더 늘고 있는 상황에서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는 없다. 대만 모델도 있고, 독자적인 중소기업과 조립산업 중심의 대기업을 양립시키는 모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패널 : IMF체제로 들어선 이후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한 실업사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고 보나.

김근태 : 지금까지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하면서 한 직장을 그만둬도 다른 직장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어 사실은 사회적 충격이 별 것 아니었다. 그런데 실업률 8%에 2백만 명의 실업사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다. 이들 가족까지 연계돼 나중에 어떤 분노로 나타날지 두렵다. 이들에 대한 약속이 제도화될 수 있도록 전문가들에 의해 대안이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도대체 그 2백만 명이 누군지부터 실업자들의 면면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미국식 개념으로 벤처기업을 몇 만개 만들어 몇 십만 명을 금방 취업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환상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유럽식의 해결방법밖에 없는데 우리는 이에 대한 경험이 없다. 문제를 알면서도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좌절감이 깊다.

 



패널 : 김 부총재는 자신에게 반인권적 고문을 자행했던 이근안 전 경감을 이제는 용서하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용서하고 싶더라도 고문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근태 : 날씨가 안 좋으면 감기몸살이 쉽게 찾아온다. 그때 고문의 후유증이다. 우선은 원한이 나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 자신 네 번에 걸쳐 도합 7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봤다. 그 피신생활 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럽다. 사실상 처벌이다. 이근안 씨가 만 10년을 피신하면서 겪은 고초는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세 번째는 이근안 씨도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써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남아공의 만델라처럼 진실로 화해했으면 한다. 그리고 국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정치인으로서 과거에 대한 복수로 한계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였다.

 



패널 : 국가인권위원회 구성을 두고 논란이 많다. 과거에 대표적인 인권 피해자로서 누구보다 관심이 높을 것으로 보는데 어떤 입장인가.

김근태 : 지금 국민회의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된 국가기구로 하자는 안을 내놓고 있다. 로마시대 호민관이 독립성을 가졌던 것처럼 그 방향이 유엔의 권고에 비춰보더라도 합당한 것이다. 법무부안이 아니라 당안이 통과되기를 기대한다. 이에 대해 사회단체뿐 아니라 국민의 관심도 좀더 높아졌으면 한다. 야당도 적극 참여해주기를 바라는데 아직 참여하고 있지 않다. 야당이 참여하면 국민회의 당안도 부분적으로 수정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상 자체는 국가기구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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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30 08:00 김삼웅

 

원내에 진입하면서 오래잖아 그는 곧 차세대 정치유망주로 떠올랐다. 한국정당정치연구소와 <월간중앙WIN>은 1998년 11월호부터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인" 4명을 골라 검증토론을 벌이고, 매월 이를 잡지에 실었다. 시민과 정가의 뜨거운 관심을 불렀다.

집권당이 된 국민회의에서는 노무현과 김근태, 한나라당에서는 손학규와 이부영이 각각 선정되었다. 이들은 모두 현역 의원이었다. 김근태 관련 기사는 1999년 1월호 <월간중앙WIN>에 "폭넓은 대중정치로 사회 패러다임 변화추구"란 제목으로 실렸다. 기사는 중진 정치인, 차세대 주자의 일원이 된 김근태는 먼저 "이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향해"란 기조발표문을 읽은 다음, 사회자와 4명의 전문 패널리스트로부터 집중 질문을 받고, 자신의 정책과 철학, 비전을 밝혔다. 이 기획은, 사회 정대화(한국정당정치 연구소 부소장), 패널 김행(중앙일보 전문기자), 박상병(인하대 강사), 조흥이(서울대 교수), 최배근(건국대 교수), 진행 정리 윤석진(월간중앙WIN 기자)이 참여했다.

패널의 질문과 김근태의 철학, 신념을 밝히는 주요 부문을 발췌한다.

패널 : 3당통합을 통해 태생적 한계처럼 김대중 정권도 자민련과 연합이라는 준태생적 한계 때문에 민주주의의 내용을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근태 :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런데 YS정부의 태생적 한계는 한국사회 집권세력의 정권 재창출인데 그 대표주자를 바꿨다는 의미뿐이었다. 이에 비해 DJ정부는 야당의 집권이기 때문에 보다 정통성이 높다.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몇가지의 난제가 있다. 자민련과의 연대에 따른 ‘준태생적 한계’라는 지적 못지않게 더 중요한 제약요건이 있다.

첫째, 지금의 우리 사회는 경제위기뿐 아니라 패러다임의 위기다. 그런데 지난 시기의 기득권 세력을 중심으로 위기의 순간을 미봉하자는 바람이 굉장히 강하다.

두 번째는 김대중 정부의 주류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피해를 본 세력들이다. 획기적으로 주류의 폭을 넓히고 싶지만 DJ는 손을 잡을 수 있는 상징적 정치인이 없다. YS는 이미 실패한 세력이어서 손을 잡기 힘들다. 나는 80년대 이후 민주대연합을 주장해왔고 이를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다만 근래에서 방향을 좀 바꿨다. 21세기라는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가진 전문가들의 역할이 간절하게 요청된다.

패널 : 정권교체 이후 지역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김 부총재도 현정권에 대한 ‘영남지역의 악화된 정서’에 관해 듣고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김근태 : 한국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큰 장애물이다. 나는 한국에서 구조적으로 보면 주류이다. 경기도 출신이고 학력은 이른바 KS(경기고ㆍ서울대) 마크다. 그러나 행태는 비주류였다. 그 이유는 실천적으로는 정권교체를 하자는 것이었다. 보다 현실정치적으로 얘기하면 지역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이었다. 지역주의 문제는 대략 세 가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나는 패권성, 둘째는 대외적 배타성, 셋째는 대내적 독점성의 문제다. 영남 중심의 지역패권주의는 정권교체를 통해 일정하게 붕괴된 것 아닌가. 이제 지역주의 문제는 대외적 배타성과 대내적 독점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로 시각을 좁혀야 한다. 지적대로 영남쪽의 소외감, 상실감이 상당히 크다. 이 문제는 단기적으로는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본다.

패널 : 당내 개혁세력이 지난 1년 동안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 김부총재는 김 대통령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김근태 : 민주화운동세력이 국민대중으로부터 평가받으면서도 전폭적 신뢰를 받지 못하는 근거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군사독재의 폭압이 깊었을 때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계승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는 꿈이 필요했다. 꿈은 관념적이다. 관념성을 동반한 꿈은 실제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두 번째는 탄압이 심할 때는 인격의 연속성이나 아이텐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모든 힘을 발휘해 저항해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방을 철저히 부정할 수밖에 없다. 파괴적인 권위주의세력 아래서 고통받은 사람들 가슴 속에는 상처가 있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자기정화 노력이 필요하다. 억울하지만 그렇다.

DJ와 내가 차별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더 외곽에서 돌게 될지도 모르겠다. (웃음) 우리 정치의 다음 단계 모습은 정책노선에 따른 재결집이 될 것이다. 이것을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누가 또는 어떤 집단이 해낼 것인가가 문제다. 현재 우리 정치는 최고의 리더십을 빼놓고는 각종 정보가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판단과 모색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협소하다. 이를 제도화하는 것은 다음 단계 리더십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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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

012/09/29 08:00 김삼웅

 

 

김근태 : 지금 문제가 여러가지 있지만 작은 것은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장관께서 말씀하신 대로 IMF관리체제 3년차에 들어가면서 개혁에 대한 피로가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거시경제지표는 괜찮은데 나만 손해보는 것 아닌가 하는, 주관적인 왕따 정서가 각 계층에 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보상을 요구하게 되는 심리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총론적으로 우리 국민들은 대체로 개혁과 구조조정에 동의하는데 내 영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다, 주관적으로는 지난 2년 동안에 모두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제 지역구가 도봉구인데 그쪽을 보면 재래시장은 형편없이 죽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형 할인점이 들어 와서 거기는 아주 잘 됩니다. 서민이 보면 백화점 이상의 고객들은 잘 나가는데 우리는 뭐냐 이런 위화감이 상당한 정도 생기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통합시키지 못하면 중대한 난관에 부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다시 어떻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를 얻을 것인가, 그것을 추진해야 되는 재경부가 국민적 신뢰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 이것이 핵심적인 초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무적인 부분이나 또 구체적인 금융시장의 취약성문제 이런 점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재경부장관을 비롯한 경제부처 관계장관들이 보다 어떻게 하면 국민적 신뢰를 끌어 모을 것인가 이 과정에서 스케줄이라든지 또 경제관련부처 장관들 사이에 단단한 협력이라든지 또 발언의 메시지의 통일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장관께서도 절실하다고 생각하시지요? (2000년 5월 18일 제211회 국회재정경제위원회 회의록)

김근태 : 또 하나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이 공적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냐? 장관이 걱정 하시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정말 비효율적으로 쓰일 뿐 아니라 모럴 해저드가 금융기관에 퍼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구심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걱정되는 것은 재경부나 행정부에서 30조를 조성하면 적어도 10조는 내년으로 이월되고 올해 20조 이것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공적자금 투입하는 곳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비하고 지금 재사용한다든지 여러가지 방식으로 하지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겠다, 저는 이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행정부가 혹시 국회에 추가적인 공적자금을 요청을 하면 국회에서 정치적인 논쟁이 발생될 가능성이 있고 그것이 부담스러우니까 좀 옆길로 가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의구심도 있습니다. (2000년 5월 18일, 제211회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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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8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제15대 국회 후반기 2년은 재정경제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전문성이 인정되어 상위가 배정된 것이다. 6월항쟁 이후 국회운영이 상임위 중심이 되면서 의원들의 상임위 역할이 활발해졌다. 김근태의 주요 정책질의 몇 가지를 살펴본다.

김근태 : 이 시점에서 OECD가입에 대해서 우리 재경부는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를 정리해서 얘기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OECD가입에 대해서 유보적이거나 신중해야 된다는 보고서가 있으면 그 보고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저는 OECD가입에 대해서 그 방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동의를 했습니다. 다만 과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 주장을 했습니다. OECD가입이 되어서 저는 우리사회, 국민경제에 굉장한 부담이 왔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잘못된 것은 메시지가 우리 국민경제가 이미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됨으로써 국민들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내부의 충실도를 이루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은행뿐만 아니라 기업 또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재경부 입장이 어떤지, 나아가서 정부의 입장은 현재 어떤지에 대해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IMF문제를 얘기하겠습니다.

IMF의 근래의 보고서,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온 것이 해지 펀드 투기성 자본의 급격한 이동, 이것 또한 계기가 되었지만 그 못지않게 이른바 외화누락(外貨漏落)이 IMF 얘기에 의하면 80억 달러가 넘고 그것에 대해서 재경부나 한은 주장은 50억 달러가 좀 넘는 수준으로 지금 얘기가 되고 있는데 국내자본이 이탈된 것이 그 못지않은 이유였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국내 자본이탈은 명백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재경부는 이것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재정부는 이것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세력들에 의해서 국내에서 자본이 이탈했는지, 이것이 우리 외환위기를 충격과 부담을 주는데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1998년 10월 1일, 제198회 재정경제위 1차 회의록)

김근태 : 다음은 세계 경제상황 특히 국제금융시장은 대단히 불안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롱펌캐피털 매니지먼트라든지 크리미아 메일, 근래에는 또 다른 해지펀드들이 도산위험에 봉착하면서 미국에서도 재정적 지원을 받는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경제운용 기조는 근본적으로는 보수적이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너무 과감한 재정정책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국제경제가 이렇게 불안정하기 때문에 정책협조가 되는 측면도 있지만 특히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경상수지 흑자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고, 그래서 외환보유고를 증가시켜야 되고 단기외채를 축소시켜야 되는데, 충분히 대응하고 있는 것인지 지난번 재경부 보고에 의하면 차환율(差換率)이 4월달에 102%에서 9월달에 82%로 떨어졌는데 10월 추세가 회복되지 못하거나 더 떨어진다고 하면 굉장히 위험한 신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10월달 차환율이 어떻게 예상되고 만약 플래트하게 82%로 가게 되면 우리가 대책을 세워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재정부장관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상황이 상당히 어려운 것을 우리가 다 압니다. 투자나 성장이 다 마이너스이고 소비가 급격하게 위축되어서 저는 다소 의구심이 있습니다마는 소비가 미덕이다 라는 구호까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경기순환적인 요인 때문에 온 것만이 아니라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용위기 때문에 왔다,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면서 모두가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하고 전망을 제대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방어적인 소비와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신용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래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경부장관이 여러 차례 얘기한 대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분명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장질서를 형성하고 그 시장질서를 안정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재경부가 지향하고 있는 시장질서가 어떤 것인지, 예를 들면 미국식 시장인지 아니면 유럽식 시장인지, 아니면 지난 시대에 우리가 했던 개발독재모델에 약간의 수정을 한 시장모델인지, 그 시장이 어떤 모델인지에 대해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1998년 10월 20일, 제198회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회의록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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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

012/09/27 08:00 김삼웅

 

 

김근태 : 그 다음에 미국무성 대변인이 북한은 소요의 시기다, 이렇게 얘기를 했고 카트만 부차관보가 이것을 부인을 했습니다. 현재 미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다고 부총리께서는 생각을 하시는지?
왜 그렇게 미국 정부가 대외적인 발표에서 혼선이 발생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이것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쭉 한꺼번에 몇 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는 아까 국민의 동의의 수준과 범위에 따라서 정책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이렇게 우리가 말로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통일정책의 기본적인 전략은 연착륙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이쪽에서 전술을 선택할 수 있는 범위나 수준은 영향을 받고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정의하실 수 있는 것인지. 만약에 이렇게 정의가 된다고 하면 그 다음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임시국회의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의 질문과정에서는 오늘의 국면에서는 북한을 더 이상 대등한 관계로 보는 것을 수정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렇게 발언을 했습니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정당의 대표로서 발언한 정치적 질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것이 혹시 행정부의 현재의 속마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상황이 이렇게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까 김상우 의원이 질의한 것 중에서 권영해 안기부장이 오프 더 레코드로 얘기한 이런 것 하고 연결되어서 실지로는 연착륙이라고 그러지만 사실은 다른 방향을 불가피하다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느낌들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관계책임자로서 부총리께서 좀 말씀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외무부장관이나 또 부총리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조화와 병행의 원칙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냐,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북한과 미국의 국교수립이나, 미국의 북한에 대한 평범한 경제제재, 완화에 대해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서 동의한다는 얘기냐, 기본적으로 이 방향은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그러면 조화와 병행의 원칙이라는 것은 이것이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해라 이런 얘기인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점진적으로, 어떻게 단계적으로 할 것을 우리는 원칙과 방향을 갖고 있고 구체적인 안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선언적 원칙으로서만 현재 존재하는 것인지 이 점을 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북한에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현재 존재하는 것인지, 아까 개혁의 문제에 대해서 유치원생 수준이라고 그랬는데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황장엽비서 망명사건을 보면서 북한에도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으로 봐야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개혁을 둘러싼 문제로 봐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정치적으로 강경파와 온건파가 존재하는 것인지, 또 개혁이 현재 유치원생 수준으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가 소프트랜딩쪽으로 전략적인 방향을 결정했다고 그러면 지금 우리 정부 우리 정책당국은 현재의 수준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고 있는지 이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제183회, 1997년 3월 7일 속기록)

김근태 : 알겠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반복해서 부총리께 질의하는 것은 지난 카터 전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 우리 정부가 취했던 태도가 참으로 일관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다행스러웠지만, 북한 핵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그 출발과 단초가 열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긍정적이기는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일관성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은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그것을 수락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곤혹스러운 상황이 발생을 했었습니다.

지적을 하면 카터 전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은 0.1%도 없다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국민들 속에서 기억되고 있고, 그 때도 그렇고 카터 전대통령의 정치적 비중으로 봐서 북한을 방문했다가 북한의 축하사절 정도로 끝난다, 아마 이것은 절대로 수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경험도 그렇고 카터 전대통령의 정치적 비중을 봐서 명백한 메시지를 갖고 서울을 방문할 가능성이, 우리 정부를 방문할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타협 가능성이 있는 어떤 제안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정보파악은 물론이고 예상되는 메시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국민들에게 바로 공개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통일원 또 통일안보조정회의 여타의 통일정책 수립 집행의 최종 책임자로서 부총리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준비를 하셔야 되고 또 국민에게 여러 가지 심리적으로 준비하고 대처할 수 있는 과정을 선취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 만약 카터 전대통령에게 어떤 열할이 있다고 그럴 때 그 역할이 어떤 정치인의 특정한 정치적 성과로 오지 않고 한반도에 있어서 평화를 전진시키는 것으로 올 것이고, 그 성과 또한 우리 정부나 우리 국민에게 공유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우리의 분단체제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참으로 우리사회 우리 나라에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북한이 군사적인 긴장을 유발시키거나 정치적인 긴장을 유발시켰습니다.

바로 작년에 있었던 4ㆍ11 총선에 있어서도 판문점 비무장지대에 병력을 출동시켜서 당시 예민한 선거국면에서 국민을 긴장시켰고, 이것이 정당간의 날카로운 쟁점, 의구심, 불신과 오해를 발생시키는데 명백하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난 총선뿐만 아니라 거의 매번의 선거에 있어서…… 저는 이렇게 판단을 하고 있고, 그런데 북한은 우리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정인 선거과정에 직접적으로 막심한 영향력을 결과적으로 미쳤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행정부의 부총리로서 북한 당국에서 앞으로 12월 18일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생각하면서 민주절차나 과정에 있어서 핵심인 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군사적인 도발이나 긴장유발, 정치적인 도발이나 긴장유발 이런 것을 하지 않도록 메시지를 보낸다든지 또는 이런 의견을 발표할 의사가 부총리가 갖고 있는지, 말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185회, 1997년 9월 22일 속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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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6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성정이 곱고 성실한 사람이다. 지나칠 만큼 꼼꼼하고 세심하여 의정활동에서도 품성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그가 발언에 나서면 국무위원들과 정부 인사들이 긴장하고, 기자들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여야 동료 의원들도 그의 식견과 학식에 경의를 표하였다. 신한국당 의원들은 강경 재야출신으로 강성발언이나 일삼을 줄 알고 잔뜩 경계하다가 지극히 합리적인 언행에 오히려 경애심을 갖게 되었다.

김 부총재는 ‘마지막 재야’출신으로 과격할 것이란 선입견과는 달리 뛰어난 정책대안 제시 능력으로 국민의 주목을 받고 있는 초선의원이다. (주석 4)

김근태는 정권교체로 여ㆍ야가 바뀐 이후 처음 맞은 1998년 국정 감사에서 ‘의회발전 시민봉사단’ 및 피감기관이 선정한 재정경제위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되었다. 여당이면서도 야당의원보다 더욱 철저하고, 공정하게 국정을 감사한 것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김근태는 제15대 국회 전반기 2년은 통일외무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당시는 야당 의원이었다. 이 분야 전문가는 아니었으나 끈기와 노력으로 공부하여 상임위의 가장 비중 있는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동료 의원들과 출입 기자들로부터 ‘베스트의원’에 선정되었다. 2년 동안 재경위의 많은 대정부질의 중에서 정책 관련 몇 가지를 소개한다.

김근태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 좀 확인하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 진실규명을 해야 된다는 말씀의 취지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일부 식자들이나 여론이 한국에서 돈을 달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고자 하는 공세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강조의 언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난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당시의 일본공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연행된 이른바 정신대위안부는 명백히 일본 제국주의국가의 국가범죄다, 하는 인식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고 김 대통령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확인해서 답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이것은 국가의 범죄이기 때문에 국가가 배상해야 되지만 국가의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앞의 취지가 법적으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그러니까 국가배상권이 소멸됐다는 것인지, 국가배상권이 우리에게 있기는 하지만 국가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으로서의 결단인지 이 점을 답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국제법학자들의 일부는 이것은 대통령의 권한 밖의 일이다, 또는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국제법 학자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무부의 업무현황보고에 나온 대로 UN인권소위 권고에 의하면 이것이 국가범죄이고 또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아까 차관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인적 차원에서의 배상 이것은 권리가 살아있는 것이고 정당한 것이다 라는 의견을 우리 외무부 또한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통일외무위원회 제180회, 1996년 7월 23일 속기록)

사진은 김용한 시민기자.

김근태 ㅡ 많은 위원들이 이런 배경 아래에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독도문제에 대해서 사실은 저는 자주 상임위원회에서 거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과정에서 여러가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다만 외무부 쪽에서 좀 주의를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입니다.
법리적으로나 실효적 지배에 있어서나 정치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고 따라서 일본이 자기의 영토임을 주장해 왔다. (조어대)와 달리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시기에 선거를 의식하면서 독도에 군함을 파견하고 비행기를 동원한 것은 참으로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일본) 자민당 쪽에서 총선의 공약을 거는 유발 효과를 가져왔고 자민당 단독정권을 형성을 해서 이것이 참으로 우려할 방향으로 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오늘 이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에서 아시아 실업인들과 유럽의 실업인들에게 질문한 결과 유럽의 실업인들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알고 있는 것이 66%인가로 제가 보았던 것 같고, 동남아시아 실업인들도 55%나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국제적으로 다른 지역의 국민들이나 주민들이 우리의 주장과 객관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는 것에 대해서 뭔가 대책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것을 정면으로 제기하는 것이 꼭 좋은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런 것을 방치할 수도 없고 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 혹시 차관께서 좋은 방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
4>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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