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0 08:00 김삼웅

 


9월 11, 12, 13일 오후까지는 ‘무사’히 지나갔다.
육체적인 고문이 없었다는 뜻이다. 13일 저녁식사가 들어와 막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을 때 복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정현규가 들어와 밥그릇을 빼앗아갔다. 다시 고문을 가하겠다는 신호였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라고. 이에 대해 악마의 날이라고 하니까 조소하면서,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의 최후의 만찬날이다. 각오하라” 하였습니다. 고문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날은 팔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 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고 끊임없이 모욕하였습니다. (주석 30)

김근태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자백까지 하면서 한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에는 이미 기력을 잃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을 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 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해 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이튿날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 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부터 5시 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자백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석 31)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악마들은 민청련의 재정문제에 대해 더욱 잔혹성을 보였다. 앞서 소개된 재미 교포 언론인 신기섭이 한국민주화운동의 성금으로 준 기금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된 것을 불순자금의 유입으로 엮으려 한 것이다.

김근태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마지막 의지를 가다듬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180만 원과 지도위원 40여 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 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임을 사실대로 말했다.
악마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불순자금의 실상을 밝히라고, 다시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의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 때까지 본인은 밥을 못 먹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로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줄기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더군요.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고,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주석 32)


주석
30> 앞의 책, 75쪽.
31> 앞의 책, 76쪽.
32> 앞의 책,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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