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08/17 08:00 김삼웅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시위대 ⓒ 6월항쟁기념관
민청련을 이끌면서 ‘전두환 바스티유’를 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김근태는 6월 항쟁기에 경주교도소 골방에 수감돼 있었다.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는 침묵하던 ‘남은 자’들까지 분노하는 계기가 되었다. 4ㆍ19가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참살이 화약고의 불이 되었듯이, 6월 항쟁은 박종철ㆍ이한열 등 대학생들의 학살이 항쟁의 뇌관을 터뜨렸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경 연세대 정문 주변에서 학생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교문 쪽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은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 않을 때…”라는 노래를 부르며 교문 밖 5미터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러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순간 SY-44 최루탄 10여 발이 학생들에게 직격으로 날라왔고, 이 중 하나가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한열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동료 학생들이 급히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의식을 잃고 몸도 차갑게 굳어져갔다. 학생들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서고, 많은 시민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이한열은 7월 5일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은 6월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부산시민 시국토론회가 열리고 있는 카톨릭센타 앞. 부산가톨릭센터는 6월항쟁의 분화구였다. ⓒ 6월항쟁기념관
이한열 피격에 대한 항의 시위는 학생과 시민이 함께 하고, 서울과 지방 도시로 이어져 거대한 6월 항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9일에 있은 각 대학의 6ㆍ10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중태에 빠진 것은 6월 항쟁의 불꽃을 계속 지피는 활화산으로 승화했다. 전두환 정권의 초강경 탄압의 연속선상에서 박종철이 사망한 것이 6월 항쟁의 문턱까지 군부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투쟁을 이끌어왔고 끝내 6ㆍ10국민대회를 갖게 했는데, 또 한 학생이 중태에 빠졌던 바 박종철의 죽음과 함께 6월 항쟁 기간 내내 투쟁을 타오르게 하는 데 기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주석 1)
시위 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권력은 합법적인 정권일 수 없다. 유신권력과 5공정권은 국민의 정당한 동의를 받지 못한 권력이어서 실체적으로는 존재해도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지 못한 도당(徒黨)에 불과했다. 때문에 정체성의 위기에 몰린 5공 수뇌부는 시민의 저항에 고문과 살상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6월 10일부터 노태우의 6ㆍ29 항복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 시위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반독재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국본’은 6월 26일 평화대행진을 감행하여 전국 33개 도시, 4개 군ㆍ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이날 전두환 정부는 서울에 170개 중대 25,000명을 배치하고 전국적으로는 10여만 명을 투입해 철통 방어에 나섰으나, 해일처럼 밀려오는 시위대를 막아내지 못했다. 1919년의 3ㆍ1만세 시위와 1960년 4ㆍ19를 방불케 하는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이었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실제적인 종말을 가져왔다.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 등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전두환은 6월 18일을 전후하여 계엄을 검토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미국 측이 여러 채널을 통해 군 출동을 자제하라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의 국민항쟁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은 제한된 특정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을 출동시켜 진압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70만 인구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계엄군이 한때 외각으로 밀려났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인구 1천만이 사는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자면 수도권의 군 병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군 병력 투입으로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6월 항쟁에서 계엄령을 막는 것은 미국의 자비심도 아니요 전두환의 개과천선도 아닌 바로 한국 국민 자신의 자각과 실천의지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힘이었던 것이다. 6월항쟁이 분출한 힘은 전두환이 사용할 수 있는 군대, 경찰력을 위시한 그 모든 종류의 폭력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2)
주석
1> 서중석, <6월항쟁>, 272쪽, 돌베개, 2011.
2> 유시춘, <6월 민주항쟁>,
93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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