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

012/08/17 08:00 김삼웅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시위대 ⓒ 6월항쟁기념관

바스티유 감옥을 붓 한 자루로 깨뜨린 볼테르는 막상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다른 감옥에 갇혀 있었다.
민청련을 이끌면서 ‘전두환 바스티유’를 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김근태는 6월 항쟁기에 경주교도소 골방에 수감돼 있었다.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는 침묵하던 ‘남은 자’들까지 분노하는 계기가 되었다. 4ㆍ19가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참살이 화약고의 불이 되었듯이, 6월 항쟁은 박종철ㆍ이한열 등 대학생들의 학살이 항쟁의 뇌관을 터뜨렸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경 연세대 정문 주변에서 학생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교문 쪽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은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 않을 때…”라는 노래를 부르며 교문 밖 5미터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러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순간 SY-44 최루탄 10여 발이 학생들에게 직격으로 날라왔고, 이 중 하나가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한열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동료 학생들이 급히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의식을 잃고 몸도 차갑게 굳어져갔다. 학생들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서고, 많은 시민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이한열은 7월 5일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은 6월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부산시민 시국토론회가 열리고 있는 카톨릭센타 앞. 부산가톨릭센터는 6월항쟁의 분화구였다. ⓒ 6월항쟁기념관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것에 분노하고, 독재정권의 초강경 시위 진압을 규탄하였다. 특히 6월 18일의 집회에는 전국에서 15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한열 피격에 대한 항의 시위는 학생과 시민이 함께 하고, 서울과 지방 도시로 이어져 거대한 6월 항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9일에 있은 각 대학의 6ㆍ10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중태에 빠진 것은 6월 항쟁의 불꽃을 계속 지피는 활화산으로 승화했다. 전두환 정권의 초강경 탄압의 연속선상에서 박종철이 사망한 것이 6월 항쟁의 문턱까지 군부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투쟁을 이끌어왔고 끝내 6ㆍ10국민대회를 갖게 했는데, 또 한 학생이 중태에 빠졌던 바 박종철의 죽음과 함께 6월 항쟁 기간 내내 투쟁을 타오르게 하는 데 기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주석 1)

시위 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권력은 합법적인 정권일 수 없다. 유신권력과 5공정권은 국민의 정당한 동의를 받지 못한 권력이어서 실체적으로는 존재해도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지 못한 도당(徒黨)에 불과했다. 때문에 정체성의 위기에 몰린 5공 수뇌부는 시민의 저항에 고문과 살상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6월 10일부터 노태우의 6ㆍ29 항복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 시위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반독재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국본’은 6월 26일 평화대행진을 감행하여 전국 33개 도시, 4개 군ㆍ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이날 전두환 정부는 서울에 170개 중대 25,000명을 배치하고 전국적으로는 10여만 명을 투입해 철통 방어에 나섰으나, 해일처럼 밀려오는 시위대를 막아내지 못했다. 1919년의 3ㆍ1만세 시위와 1960년 4ㆍ19를 방불케 하는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이었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실제적인 종말을 가져왔다.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 등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전두환은 6월 18일을 전후하여 계엄을 검토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미국 측이 여러 채널을 통해 군 출동을 자제하라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의 국민항쟁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은 제한된 특정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을 출동시켜 진압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70만 인구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계엄군이 한때 외각으로 밀려났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인구 1천만이 사는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자면 수도권의 군 병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군 병력 투입으로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6월 항쟁에서 계엄령을 막는 것은 미국의 자비심도 아니요 전두환의 개과천선도 아닌 바로 한국 국민 자신의 자각과 실천의지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힘이었던 것이다. 6월항쟁이 분출한 힘은 전두환이 사용할 수 있는 군대, 경찰력을 위시한 그 모든 종류의 폭력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2)

주석
1> 서중석, <6월항쟁>, 272쪽, 돌베개, 2011.
2> 유시춘, <6월 민주항쟁>,
93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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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6 08:00 김삼웅

 

2005년 4월 서울대 교정에 세워져 있는 김세진ㆍ이재호 열사 추모비에 향불과 국화가 놓여져있다.

 

김근태는 2월 22일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면서 김세진 군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인 김세진과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 위원장 이재호는 1986년 4월 28일 관악구 신림동 4거리에서 전방입소에 반대하며 가두시위 중 분신하여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26일 각각 사망하였다.

편지의 일부를 소개한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이 욕된 어둠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지요. 그 속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젊음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인지요.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지 말라”고 외쳤다는 세진이의 금속성 목소리에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라는 여운이 긴 메아리를 나는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젊은 생명을, 세진이, 재호, 영진이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 젊음들이 죽음의 골짜기로 몰리는 동안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나는 세진이, 재호가 정말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종철이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이 팽만한 배와 흥건하게 젖은 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어디 있습니까. 물 먹고 팽만한 배가 되어 죽어 버렸거나, 잠깐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다가 연기를 남기고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요.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세진이의 죽음 이후 두 분이 떨쳐 일어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눈물이 핑 돌면서 나는 머리를 끄덕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세진이의 부활일뿐만 아니라, 두 분의 새 생명, 우리 모두가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소선 어머니에게서 우리는 그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두 분의 일어섬을 기뻐합니다. 사망의 세계를 떨치고 일어선 두 분을 존경합니다. 후둘 후둘 하는 다리 떨림, 가슴 무너짐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요. 두 분 속에서 저는 종철이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뵈는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기대옴을 받쳐 주는 두 분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소선 어머니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석 20)

김근태는 3월 14일 경주교도소에서 <기정이 어머니의 구속 소식을 듣고> 의 편지를 썼다.
짧은 글이어서 전문을 소개한다. 구속된 자식들을 풀어놓으라고 시위한 죄로 구속된 ‘기정이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이다.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기도하고 계신가요. 기도하면 희끄무레한 먹방이 조금은 환해지던가요. 뜨거운 가슴 설운 마음 주체할 길 없어 15척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 던지고 물어뜯고 침뱉으며 사납게 사납게 소리치며 쳐들어 오셨습니다.

당신은 잠시 피하시라는 유혹 따위는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대달리려 이렇게 입성하셨습니다. 그렇게 어두움 속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외롭지 않으신가요. 우울해지지 않던가요. 기죽지 않던가요. 혹시 소리 죽여 울지는 않으셨는지요.

어머니,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추운 대관령 바람 한가운데 서 있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스름달 비껴 걸린 나무 위로 일지매처럼 날아 올라가셨었지요. 거기 앉아 담벼락 노려보면서 아들들을 불러대셨지요. 내공 깊게 무림계 고수처럼 어머니의 외침은 하늘을 뒤덮었었습니다. 그렇게 아들들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당신은 참다가 참다가 참지 못하여 아들 딸 가슴속으로, 이 설움 많은 담장 안으로 그리하여 먹방 속으로 직행해 버리셨습니다.
어머니는 —.

아, 비열한 저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주석 21)

 


2010년 MBC 노조 파업 당시, 현장을 찾아 연대사를 하다가 소녀처럼 웃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김근태는 1986년 10월 강릉교도소로 면회온 부인을 통해 구두로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우선 교도소 내의 행형제도의 철폐를 통해 재소자의 인간적 생활의 회복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소내(所內) 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직적인 옥중투쟁론이다. 이 글은 인재근이 정리하여 전국의 수형인들에게 은밀히 전달되었다.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옥중투쟁의원회(가칭)의 구성을 제안하면서, △ 양심수들의 합방ㆍ합사문제 △ 재소자에 대한 폭행ㆍ폭언근절 △ 전 재소자의 삭발거부와 소내에서 면회ㆍ서신ㆍ서책검열 등에 관해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근절해야 한다고 실천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재소자들이 결속하여 투쟁할 것을 권려했다.

주석
20> 앞의 책, 198~199쪽.
21>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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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운명에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1987년 2월, 이번에는 더 멀리 경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발화체’를 아주 멀리 격리시킨 데는 까닭이 있었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애학투) 결성대회가 전국 22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건국대학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경찰의 진입으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와 옥상에서 3박4일 동안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른바 ‘황소 31입체작전’을 벌여 1,525명을 연행했다.

검찰은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세계학생운동사에서 기록되는 가장 많은 학생을 연행하였다.
12월 5일에는 정부의 언론통제 내막을 밝히는 보도지침이 폭로되고,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김근태가 당했던 치안본부대공분실의 수사관 6명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숨졌다. 2월 7일 서울을 비롯, 전국 16개 지역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리는 등 시국은 태풍권에 들어갔다. 박종철 열사의 추모행사, 장례, 49제가 잇달아 열리면서 정국은 혁명적 열기로 가득찼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김근태를 서울에서 가장 먼 경주교도소로 이감시켰다.

<월간 말>이 폭로한 정부의 ‘보도지침’에는 “김근태 관련 단체의 이적행위 관계를 꼭 1면 톱으로 쓸 것, 주모자인 김근태의 출신 배경 등 신상에 관한 기사를 꼭 박스기사로 취급할 것”을 지시하고, 관제언론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그 때문에 김근태에게는 강성 이미지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김근태는 2월 12일 부인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박종철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뼛가루를 임진강에 뿌렸다는 사실도 알았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이미 우리는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추악한 전쟁은 어느 틈에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적인가. 적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되어버렸는가.

그런데 임진강에 뿌려진 그 원통한 죽음을 저들은 어떻게 인정했는가. 나는 그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뭔가 빼도 박도 못할 사정이 있었는가. 아니면 은폐하는 뒤처리 과정에서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는가. 지금은 크게 후회하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금수처럼 당하고도 또 징역을 살아야 하는 권양, 그 흐느낌의 어디에 저들의 양심 같은 것이 끼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아닌 것이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하였다고 주장되는 우종환 서울대생, 남쪽 머언 시골 어느 야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청년, 죽어서 말이 없으니까 뭐라해도 상관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산 앞바다에서 풍덩 빠져 종적을 감췄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우리 앞에 나타났던 그 청년의 시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애초부터 목에 시멘트 돌덩이를 스스로 매달고 뛰어들어 자살했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 이것 뿐이리오만은 이 수상쩍은 죽음들이야말로 진정 모를 일이다. 알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분노의 불길이었던 죽음, 항의의 폭탄이었던 죽음, 박영진, 이재호, 김세진 등과 거기에 수상쩍은 죽음이 겹쳐지면서 광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광주, 간단없이 지속되는 그것에 나는 넌덜머리가 나면서 무감각해져 버리고 말았는가.
  (주석 18)

김근태는 잇달은 젊은학생들의 부음 소식에 분노하고 사지육신이 떨렸다. 도저히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갇힌 몸이라 어찌하기 어려웠다. 분노는 창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 뽈 엘뤼아르의 <통금通禁>과 같은 심사였다.

통 금

어쩌란 말이냐 문에는 감시병이 서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갇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길은 막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사면초가인데
어쩌란 말이냐 그녀는 굶주려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린 무기를 빼앗겼는데
어쩌란 말이냐 밤이 오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김근태는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소식을 전해 듣고 옥중에서 단식을 결행했다. 곡기를 끊고 절규해도 메아리조차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신라의 옛 고도 외곽에 자리한 감옥은 공동묘지처럼 스산했다. 감시병들만 없으면 공동묘지 그대로였다. 3월 12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잘 잡히지 않는구려,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리면서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 것이었소. 항의도 하거니와 내 마음을 모으기 위해 단식을 한 것이었소. 이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을 듣자마자 분노의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사흘 째부터는 꽤 고통스러웠소. 얼굴 표정도 아마 찌그러졌었을 것이오. 건강이 안 좋고, 또 자신감까지 없고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오. 공포심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더니 달걀귀신처럼 자꾸만 커지는 것이었소. 몸과 마음을 비우고, 그 젊은 죽음을 가슴에 받아들여 서로 교감하고자 했던 당초 의도는 힘없이 밀려 버리고 말았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소. 배고픈 고통과 공포, 부끄러운 생각 등의 혼란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부각되어 온 것은, 날카롭게 찔러온 것은,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소. 이 염치없는 끈적끈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지 않았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소.
(주석 19)

역사는 의로운 죽음에는 반드시 피값을 요구한다. 일제는 안중근ㆍ이봉창ㆍ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죽인 피 값으로, 이승만은 김구ㆍ조봉암ㆍ김주열ㆍ4.19 희생자들의 피값으로, 박정희는 조용수ㆍ장준하ㆍ인혁당 등의 피 값으로 무너졌다. 전두환도 수많은 청년들을 죽이고 분신ㆍ자결ㆍ투신으로 몰아가고 있어 무너지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 김근태는 믿었다.

주석
18> 앞의 책, 192~193쪽.
19> 앞의 책,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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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석 소설가

지난해 겨울, 나는 김근태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의 삶을 정리할 기록자로 호출을 받았다. 병상에서 고통을 견디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힘들다고, 못 견디게 고통스럽다고, 차라리 비명이라도 질렀다면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그토록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끝내 견디려고 애썼고, 견디다 떠났다. 그는 영원한 진술 거부에 들어가 버렸고 나는 서사의 주인공을 잃어버렸다. 한해 가까이 실명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의 집필에 매달렸다.

 

1주기를 앞두고 책을 내게 되어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덜었다고 여기던 차에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란 책의 출판기념회를 언론을 통해 보았다. 출판기념회 장소에 걸린 현수막이 경악스러웠다. ‘경축 이근안 선생 출판기념회’. 일찍이 자신의 고문 행위를 ‘예술’이라고 표현했던 사람답게 이근안은 당당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김근태 의장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말할 수가 없기에 그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밝혀두어야겠다.

 

김근태 의장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그를 만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 의장은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하는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진심인지 의심스러웠다고 했다. ‘의심스러웠다’는 김근태의 표현은 일반적인 어법으로 바꾸면 ‘전혀 아니었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진심이라면 눈물 한 방울은 흘려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김근태 의장은 이근안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어했지만 이근안이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근안을 만나고 와서 김근태 의장은 밤잠을 설쳤다. 혹시 자기가 옹졸해서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오래 고민하고 괴로워했다고 했다. 김 의장의 고민을 들은 한 성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는 하느님의 몫이지 당신의 몫이 아니다. 김 의장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이근안이 정말 반성한다면 용서받는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용서를 받고, 받지 않고는 그 자신의 몫이다.

 

김근태 의장은 이근안을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는 원수를 용서하는 통 큰 인물로 포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용서를 구하는 것을 알면서 이근안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였기에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아우라픽쳐스 제공

 

나는 김근태 의장이 고문에 가담했던 여덟명 중 한 사람을 뒷날 진심으로 용서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근안과 달리 김 의장에게 ‘정말 죄송하다’며 눈물로 사과한 그 고문자는 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를 김 의장은 분명히 용서하고 위로했다. 그러나 이 사실도 김근태 의장은 생전에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을 늘 기억했다.

 

‘고문으로 인생이 파괴되고,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누구로부터도 사과받지 못한 채 고통을 받고 있다. 내가 고문을 용서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나.’

 

독재정권에 희생당한 마지막 한 사람이 사과를 받고, 고문을 자행했던 야만세력이 다시는 발붙일 수 없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 김근태 의장은 고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대통령을 뽑을 권리도 빼앗아버렸던 박정희의 딸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박정희에 맞서 10년 동안 수배자로 살며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운 김근태는 출마하지 못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은 투표한다. 김근태는 투표하지 못한다. 슬프다.

 

방현석 소설가

 

등록 : 2012.12.17 19:13 수정 : 2012.12.18 10:0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57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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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세계는 격동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그리스 구제금융으로 상징되는 잔혹한 유럽의 여름, 월가를 점령하자는 뉴욕의 가을, 그리고 월가점령에 대한 다른 도시들의 공감, 급기야 10월 15일 전 세계 곳곳에서 월가점령 시위 동참......월가점령 시위가 확산되자 미국의 언론, 학계,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보수 쪽에서는 폭도라는 말까지 사용해가면서 월가점령 운동을 폄하하고 있고, 진보 쪽에서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알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역사의 순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월가점령에 나선 사람들이 폭도로 여겨지지도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당장 붕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양 진영의 주장이 워낙 강력하고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관계로 자칫 생각과 판단의 길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월가점령 운동에 대한 양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차분히 묻고 냉철하게 대답해야 한다. 우선 미국인들은 왜 월가를 점령하자고 외치고 있을까.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왜 월가점령에 공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금융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월가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티파티의 압력에 굴복해 길을 잃은 공화당과 의회에 대한 절망의 몸짓이기도 하다.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티파티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맞서 어깨에 어깨를 걸고 있다.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냉혹해서 그들이 공화당을 장악한 티파티 정도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감세가 중지되거나 약간 다시 오르거나 다음 선거에서 오바마가 재선되거나 일뿐이다. 이런 사실을 2008년 촛불집회를 했던 우리는 너무 잘 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한다.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는 아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미국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처럼 경선에 뛰어들어 직접 후보를 내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해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정치결사체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전자가 쉽고 확률도 높다. 비호감일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2011년 10월

김근태

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4 08:00 김삼웅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과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등에서 교수를 지낸 제임스 에머슨은 고통과 고난을 분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통은 피할려면 피할 수 있지만, 고난은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이란 이유다. “옳은 일을 위해 감옥에 가는 일”은 피할 수 있는데도 받아들이는 고난이라는 뜻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결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현대사의 아픔, 통증을 자신과 역사ㆍ민중의 통증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피하지 않고 민주화의 전위가 되었다. 무더위 속의 옥살이를 하면서 아내와 지인들이 보내 준 책을 열심히 읽었다. 옥살이의 시간이 더해갈수록 내면의 더께도 그만큼 깊어갔다.

영등포구치소에서 6월 19일 처음으로 어린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 없이도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애비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왔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그도 평범한 아버지였다.

병준아, 병민아 잘 있었니.
오랫동안 너희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구나. 아버지는 이사를 하였고, 유난히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단다. 우리 병준이, 병민이가 씩씩하게 자라는 것은 엄마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엄마 편지와 함께 날아 온 너희들의 그림을 재미있게 들여다 본단다. 엄마, 아빠를 그린 병준이 그림, 병민이 그림 모두 잘 그렸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병준아, 학교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네 그림 속에서 금방 병준이가 “아버지!” 하면서 뛰어 나올 것 같구나. 학교생활이 신나고, 동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그 그림에 배어 있구나. 하늘에는 해가 환하게 웃고 있고 말이다.
(주석 14)

이어지는 다음의 내용을 보면 평범한 30대 후반의 부정(父情)을 흠뿍 느끼게 된다.

병민아, 역곡 일두아파트 뒤에 있던 약수터 기억하고 있니? 거기에 네 손을 잡고 노래부르면서 오빠, 엄마와 함께 갔던 것, 나는 그리워 한단다. 약수터 가는 논길에서는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가 병민이를 반겨 주었고, 앞쪽 산숲에서는 뻐꾸기가 뻐국, 뻐어꾹 하고 울어 댔었지. 아버지가 병민이한테 가는 날 우리 모두 뻐국, 뻐어국 소리내면서 다시 한번 약수터에 가자. 그래서 개구리도 만나고 뻐꾸기도 만나고 말이다. (주석 15)

김근태는 이 해 8월 다시 강릉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계속하여 고통을 주려는 당국의 뜨거운 ‘배려’였다. 시국이 점차 가열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운동권의 ‘발화체’를 가급적 먼 지역으로 격리시키려는 전략이었다.

8월 28일 모처럼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결코 약하지 않은 사람이라면서 “매맞고, 갇히고, 모욕당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거요. 피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핑계를 대서 모면하는 것이 인간의 심정일 것”이라 토로한다.

김근태가 믿는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고난을 거부하지 않았다. 가톨릭신자 김근태 역시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역사의 소명이라면 거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아, 고백 그것이 필요한 것 같소. 우리들의 망설임과 흔들림,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치욕스런 굴종을 강제당할 때, “아니오” 하면서 고개를 바짝 쳐드는 것은 확실히 어렵고 두려운 일이오. 하지만 노예에의 길에 대한 거부의 대가로 틀림없이 찾아드는 매맞고 짓밟힘, 자유의 박탈, 이것은 속병 들게 하는 것이고 한이 맺히게 하는 것이요. 이 갈구, 이 목마름은 그 박탈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네 목마름과 외로움은 너무 깊어서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해도 일단 자유의 냄새가 한번 풍겨지면 송두리째 흔들려 버리고 말 것이지요. 위로 또한 있어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게요. 매맞고 갇힌 자들이 남은 자들 되어 꿈을 깊게 꿀 수 있는 것은 이런 고뇌와 흔들림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오.
(주석 16)

김근태는 외롭고 고통이 심하여 마음이 흔들릴 때면 일제강점기 어려웠던 시기에 고통을 감내하며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젊은 학생들의 통곡소리에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찾곤 하였다.

저 30년대 일본제국주의가 더욱 강성해지고 운동가들 일부가 대열에서 교묘한 논리로 이탈하고 일반대중은 체념 속에서 일상생활로 매몰되어 가던 그 시기는 우리 민족에겐 아주 깜깜한 어둠이었을게요. 그런 어둠 속에서도 일제와 강경하게 싸워 나갔던 민족해방운동가의 맘은 어땠을까 상상해 보면 내 숨이 막혀 버리는 것처럼 답답해지는 것이오.

그런 자랑스런 선조, 선배 동지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오. 그 분들은 역사발전 법칙에 대한 명확한 파악과 분석을 했을 것이요. 그 위에 고뇌의 슬픔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신념, 흔들림 속에서도 결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걸음걸음이 있었을게요. 아니 이것만이 전부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것 없는 어떤 것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요.

내 가슴에 패이는 상처를 보면서, 나는 젊은 학생들의 통곡소리를 듣는 것이라오. 저 소리 죽인 흐느낌 말이요.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맘인데, 이렇게 약한 소리만 할 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와지는구료. 하지만 말이요, 이런 흔들림에 대한 고백 속에서 어김없이 다시 일어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일 것이요. 이것을 굳게 믿고 싶은 바이요.
(주석 17)


주석
13> 제임스 에머슨 지음, 송우용 감수, <고난, 행복한 선택>, 22쪽, 가치창조, 2002.
14>
<이제 다시 일어나>, 184~185쪽.
15> 앞의 책, 185쪽.
16> 앞의 책,
187쪽.
17> 앞의 책, 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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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

012/08/13 08:00 김삼웅

 

김근태가 서울구치소에서 부인에게 쓴 많은 편지 중 마지막 시기는 1986년 1월이다.
이후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일곱 살짜리 아들 병준이가 크레용으로 써 보낸 ‘우리 아버지’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자기 아버지를 그리면서 쓴 글이다.

김근태의 아버지는 여늬 아버지들처럼 초라하고 소심한 분이셨다. 어릴적에 아버지가 3ㆍ1운동 당시 읍내 시장에는 못나가고 뒷동산에 올라가 혼자 만세를 불렀다는 말을 듣고는 심약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이제 30대 후반이 되어 감옥에 앉아서 20년 전에 떠난 아버지의 그 따뜻했던 품속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했던 자신의 철부지를 자책한다.

20년 동안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가셨던 우리 아버지가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해가 벌겋게 공중에 떠 있던 어제 나에게 되돌아오고 계셨다오. 아니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그 삶의 고뇌를 똑똑히 보게 된 것일 게야. 고난과 치욕의 이 겨레 20세기의 한 귀퉁이에서 당신에게 몰아쳐 왔던 그 절망과 부담에 짓눌려 겁먹은 채 살아가셨겠지. 버티느라고 부르르 부르르 떠시면서 말이요. 버티는 것이 힘겨워 몸에 늘 미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가려 주느라고 속으로 미열을 내며 앓으셨던 그런 삶이였을 거요. (주석 10)

김근태는 작고한 아버지를 그리면서 일곱 살 아들과 네 살짜리 딸 (병민)의 모습이 겹쳤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족이나, 해방 뒤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민주화ㆍ통일운동가의 가족은 매 한가지였다. 일제 때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온갖 감시와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고, 해방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좌경ㆍ용공 ㆍ간첩ㆍ종북’으로 색칠당하면 온전한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딸 병민이는 1982년에 태어났다.

 


난 사실 병준이, 병민이 아버지이어야 하는 것에 은근히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소. 그저 휘청거리면서 버텨 나가는 이 모습에서 어떤 것을 그 애들은 배우게 되고 흉내내게 될 것인지 말이요. 혹시 별 볼일없는 삶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하며 실망할 지 모르는 것도 조바심칠 일이지만, 그 애들 가슴에 맺힐 지 모르는 상처들, 검은 그림자들의 드리움, 그것이 걱정이 된다오.

그러나 병준이 엄마의 따슨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지. 애들이 그 속에서 몰아쳐 올지 모르는 어떤 것도 견뎌 낼 것을 나는 믿는 것이오. 그러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또 그 애들 자신의 삶으로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주석 11)

김근태는 1986년 6월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양심수들은 특히 권력이 ‘국사범’처럼 지목하는 수인들은 감옥을 자주 옮긴다. 그들의 용어대로 ‘불순분자’들과 차단하기 위해서다. 또 자주 이감을 시켜서 ‘신참’으로 고통을 주려는 보복성도 따른다.

김근태가 서울구치소에서 이감하는 6월 3일 같은 병동에 수감되었던 문익환 목사는 면회온 인재근에게 쪽지 하나를 은밀히 전했다. 다음의 시였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밤새 죽은 듯이 쓰러져 있다가
아침이면 꿈틀꿈틀 일어나 앉아
눈을 빛내던 방이란다.

해파리처럼 풀어진 몸
인재근의 고운 얼굴 아른거리지 않았으면
물거품처럼 아주 풀어졌을 몸으로
죽음을 깔아뭉개어 되살아난
근태의 방이란다.

민주주의의 손톱끝에만은 남아있어
곤두박히는 허무 나락을 쥐어뜯으며 솟구친
서울구치소 병사 10호실 근태의 방이란다.

1986년 5월 31일 토요일 근태를 이감시키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고 벽돌을 새로 페인트칠을 했단다.
그러나 어쩌리요 창문틈에 남아 있는 근태의 손톱자국을
철창에서 풍겨오는 그의 입김을
푸른 하늘에서 우뚝 솟아나는
근태의 웃는 얼굴을.

눈만 감으면 나는 바람으로 풀어져 신나게 펄럭인다.
근태가 휘두르던 민중의 깃발, 승리의 깃발로.
(주석 12)

영등포구치소에서 다시 ‘신참’이 된 김근태는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여름 뙤약볕에서 겹 옥고를 치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기 어려웠던 그에게 4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수인이 되어 잦은 이감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주석
10> 앞의 책, 183쪽.
11> 앞의 책, 184쪽.
12> 앞의 책,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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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2 08:00 김삼웅

 

 

네번째 편지는 3월 20일 역시 서울구치소에서 쓴 것이다.
이 날은 온종일 비가오고, 빗속에 싸라기 우박이 섞여 쏟아졌다. 편지 제목을 <겸재(謙齊)를 생각하며>라 달았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 ~ 1759)은 사실주의 기법으로 한국의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김근태는 눈 비오는 날 감옥에서 왜 겸재를 떠올리며 아내에게 편지를 썼을까.

거리에 캐롤 울릴 때쯤이었을까. 눈덮힌 산 그 아래 뾰족 첨탑 보이고 사슴이 끄는 썰매 탄 산타 할아버지 눈에 어른거렸네, 언제부턴가 생활 속으로 슬쩍 들어와 버린 카드 속 그림 닮은 그런 산, 그런 건물, 썰매, 그런 아이들 상상하였네.

난 그만 실소하고 말았지.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로렐라이 언덕,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어디쯤 있을 황태자 첫사랑의 그 맥주집에 몸살나는 이 시대 교양인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 몸 자지러지는 저 대중들. 그 중에 하나일까, 나도. 겸재(謙齊) 생각했지, 부끄러워 하면서.
(주석 7)

김근태는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중국적 봉건질서에 예속되어서 화가는 상상속의 중국의 산과 강을 그리고, 식자들은 공맹(孔孟)의 길에서 허우적거릴 때 펄펄 살아 뛰는 우리 강산을 유려한 필치로 그린 조선화가 겸재를 그리워한다.

오늘은 어떤가. 혹시 진서 대신 원서가, 한문대신 영어가, 중국 대신 서양이 또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꼬부랑 관념과 감수성, 글씨 몇 개 아는 지식인들 지배계층에 끼여들고 그렇게 제도화되어 있고, 그 아랫사람들 열심히 흉내내고, 흉내바람은 사회적 강제가 되고,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여.

여기에 끼지 못하는 건 처벌이고 소외인 거야. 세련됨, 모던함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 그러기 위한 훈련, 학습, 교양 갖으려고, 한 마디로 간판 따려고 우리 모두 서둘러 왔던 것 같지. 서양의 문화, 문물, 예술 모두 암암리에 보편적인 것 되고, 특히 진정한 그 내용이나 진리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 어떤 형식이나 약간의 흉내가 오히려 기승 부려 진짜 인류의 보편적 발전방향은 목졸라 버리는 것 같고, 그것으로써 우리 자신의 주체성과 주인의식은 잊어버려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성 구현을 위한 발전방향과 진리는 서양의 특수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리고, 역사는 반복할 것인가.

수치스럽게도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며 더욱 중국적이었던 조선, 또 다시 개명한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자신을 서양보다 더욱 서양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진리 냄새피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이 시대에.
(주석 8)

김근태의 이 서한은 그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을 가늠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검열자의 시선을 감안하면서 쓴 것임을 생각하면, 운동가ㆍ투사 김근태의 깊은 내면의 일단을 살피게 한다. 주인의식을 상실한 채 ‘민족허무주의’에 빠진 지식인들을 김근태는 조선시대 식자들과 대비하고 있다.

재판에 임하면서 참 묘한 느낌이 들었었다오. 그 중에 하나가 판검사, 변호사들과 만났을 때 나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동류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지. 말씨나 절차 그것에서도 상호 느낄 수 있었고 말이오. 물론 서 있는 입장이 다르면서도.

우린 한국 사회의 지배계층임을 아니 적어도 상류계층임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러다가 구치소로 돌아와 특히 자신의 감방에 들어가 갇혀질 때면 최하 천민계층으로 급락하는 것이었소. 부자유 그건 능멸받아 마땅한 것이오. 옛날 노예가 살아 있는 도구라고 짓밟혔던 그림자 아직도 여기에 살아 있는 거요. 여하튼 이런 차이를 반복하여 느끼면서 나는 사실 꽤 당황하였다오. 정서적으로 묘한 혼란도 오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얄팍한 마음도 생기고 말이오.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고, 이것 모두 쓰잘 데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요.
(주석 9)


주석
7> 앞의 책, 179~180쪽.
8> 앞의 책, 180~181쪽.
9> 앞의 책, 181~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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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서울구치소 병사 10호실에 수감되어 항소심 재판을 받으면서 1986년 1월 6일 부인 인재근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검열 때문에 깊은 속내는 털어놓을 수 없지만,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오는 곳이 아니라 여기는 가는 곳이 틀림없소. 쟂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요,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식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고.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 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주석 3)

김근태는 당시 한참 유행중이던 대중가요 ‘사랑의 미로’를 흥얼대면서 아내를 생각하는 연모의 마음을 담았다. 더불어 결기를 보인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 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 가히 짐작이 되오. 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오.
  (주석 4)

서울구치소 검열관은 김근태의 옥중서한의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를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걷게 되는 문장으로 ‘오독’하고 그대로 내보냈다.

이 대목은 건강상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김근태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양심수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김근태의 이런 뜻을 헤아린 민청련은 1987년 9월 그의 고문 실상과 옥중기록을 묶어 책으로 내면서 <이제 다시 일어나>를 제목으로 뽑았다.

김근태는 최진희가 불러 히트한 ‘사랑의 미로’를 열심히 연습하여 아내의 생일날 면회를 왔을 때 접견실에서 이 노래를 불러 선물하였다. 외국의 경우는 몰라도 한국에서 양심수가 아내의 생일선물로 노래를 불러준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와 관련 뒷날 김근태 부부의 인터뷰 한 대목이다.

김근태 : 이근안 씨한테 고문을 받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윤동주가 이렇게 해서 옥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시인도 아니고 여기서 옥사하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며 중심을 잡았지요. 아내에게 “나 지금 괜찮다. 흔들리지 않는다”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그 노래가 약간 트로트 비슷해서 나한테는 통 안 맞는데 그땐 그게 기분이 또 맞더라구요. 인재근은 깔깔대고 웃고….

인재근 : 그때는 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았어요. 노래도 못하면서 노래 선물을 한다고 그러냐면서….
(주석 5)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가족 면회와 편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봉함엽서에 편지 쓰는 것이 그나마 행복한 순간이다.

김근태는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두 번째로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쪼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측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비켜설 수 있게 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오.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를 핥는 것이었다오. 그러나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나는 이 때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하였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하였던 것이오.
(주석 6)

김근태는 이 편지 말미에서 감옥 안 마루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쥐들의 ‘사랑의 언어’에서, 자신의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리게 된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를 확인했다고 썼다.

주석
3> <이제 다시일어나>, 175쪽.
4> 앞의 책, 176쪽.
5> <레이디경향>,
2005년 12월호.
6> 앞의 책,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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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0 08:00 김삼웅

 

사마천은 <사기>의 <임안(任安)에게 드리는 글>에서 사람은 “지면에 옥(獄)을 그려놓아도 그것을 피하고,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를 만들어도 그것과 대면하기 싫어한다”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이승의 감옥이 저승의 지옥”이란 말을 남겼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불의의 시대에 의인이 갈 곳은 감옥”이라 말하고, 함석헌은 “자유는 감옥에서 새끼를 친다”고 설파하였다.

감옥은 묘한 곳이어서 강한 사람은 더욱 강하게 만들고, 약한 사람은 허물어지게 한다.
감옥은 육신이 묶여도 생각까지 묶을 순 없어서 인류 지성사에 샛별과 같은 많은 명저들을 남겼다. 볼테르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앙리아드>를 쓰고, 존 번연은 베드포드 군형무소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다. 세르반테스는 왕실 감옥에 갇혀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하고, 마르코 플로는 포로로 갇혀 <동방견문록>을, 오 헨리는 옥중에서 <점잖은 약탈자>를, 네루는 <세계사편력>을 썼다. 이밖에도 사례를 들자면 수없이 많다.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니다. 김대중은 진주감옥에서 <옥중서한>을, 신영복은 전국의 여러 감옥을 전전하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정수일은 비슷한 처지에서 <소걸음으로 천리길을 가다>는 옥중기(편지)를 남겼다. 하나같이 옥중문학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도 문익환ㆍ김남주 등 수없이 많다.

감옥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유배문학, 망명문학도 지성사의 보배로 남는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추사 김정희의 불멸의 그림 한 폭 <세한도>는, 정작 당사자들의 피눈물과 고투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소중한 민족문화 유산으로 전한다.

서울구치소의 수인이 된 김근태는 차분한 마음으로 옥살이를 각오했다. 고문경찰과 조선총독부의 사법부, 나치의 사법부, 유신체제의 사법부와 다르지 않는 5공체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검ㆍ판사들의 행위에 분노가 치밀고, 고려 최씨 무신정권기 지식인들처럼 글을 쓰는 어용언론ㆍ지식인들에 하염없는 연민을 느끼면서, 그래도 성서의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으면서 옥살이를 시작했다.

육신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망가졌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었다.
자신이 갇힌 방 근처 어딘가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뒤에도 조봉암 선생과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날조된 인혁당사건 희생자 등 한을 품고 이곳에서 처형당한 선열들에 비하면 행운이라 여기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독일 출신으로 반나치 저항운동을 하다 국적이 박탈되고 긴 망명생활을 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브레히트가 이 시를 쓴 시기와는 42년의 시차가 있었으나 처지와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주석 1)

브레히트가 이 시에서 지적한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슈테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콕흐 등이다. 모두 반 나치 저항지식인들이다.

김근태의 고문폭로는 전체 민주화운동권이 노선을 초월하여 정부의 용공조작에 맞서 재결집하게 되고 더욱 강력한 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재판을 거쳐 서울구치소에서 수형생활에 들어간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사회는 5공 파쇼정권 타도를 위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김근태는 이를 수용하려 하지 않겠지만, 그가 뿌린 민주화의 씨앗이 청년ㆍ학생들을 움직이게 하는 큰 역할을 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가 결성되고, 6월 24일 효성물산ㆍ가리봉전자ㆍ선일섬유 등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동맹파업, 11월 4일 서울대 등 시내 7개 대학생 14명의 주한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 11월 18일 14개 대학생 191명의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결성, 1986년 2월 12일 신민당과 민추협 대통령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 돌입, 2월 26일 서울대생들 졸업식장 집단퇴장, 3월 17일 박영진 열사 분신, 3월 29일 구국학생연맹 결성, 4월 28일 이재호ㆍ김세진 열사 분신, 5월 3일 인천항쟁,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 6월 4일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사건 등 파쇼 정권의 만행과 이를 타도하기 위한 거대한 민중저항이 전개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막장으로 치달았다. 5공의 인권유린의 한 상징이 된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남은 자’ 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직장인ㆍ가정주부들까지 분노의 대열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인천 5ㆍ3항쟁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 진영은 다양한 종류의 헌법개정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정권안보 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5ㆍ3항쟁의 배후를 색출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구속ㆍ수배ㆍ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권인숙은 1985년 6월 4일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조사관들은 권인숙에게 공문서위조 혐의 외에 인천 5ㆍ3항쟁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문귀동 형사는 권인숙을 수사계 수사실로 데리고 가 6월 6일과 7일에 걸쳐 조사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귀동은 성고문과 협박과 공갈을 하였다.
(주석 2)

비교적 완곡하게 기술한 내용이지만, 이날 문귀동은 용납할 수 없는 성고문을 자행하였다.
5공 수뇌부의 도덕적ㆍ정치적 타락상이 일선 경찰에 의해 여과없이 자행된 것이다. 남영동의 고문기술자들과 한 통속의 타락 정권의 하수인들이었다. 권인숙은 교도소 면회 과정을 통해 성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곧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성고문 사실을 부정하면서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타락한 경찰관들의 악행도 문제이지만, 이를 은폐하면서 민주화운동세력을 매도하는 검찰의 언동에 국민은 더욱 분개하였다.


주석
1> 브레히트 시선, 김광규 옮김,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17쪽, 한마당, 1985.
2>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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