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재판은 엉터리로 진행되었다.
‘엉터리’의 표현에는 재판정 밖에서, 그러니까 어용화된 언론에서 ‘김근태 죽이기’의 보도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 터져 나온 것까지 포함된다. 신군부는 이른바 ‘협조’ 명목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경찰관들의 고문사실을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 재판은 언론을 동원하여 좌경으로 용공몰이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어용 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ㆍ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하였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 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 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 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되어 버린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예단과 편견 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半)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 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뉴스 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 분짜리 특집기획물까지 (나 개인에 대한 것을) 만들어 KBS는 방영하였다.
(주석 15)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 때부터 방청인수를 대폭 제한하여 민청련 회원 등의 방청을 막았으며, 그나마 허용된 방청인은 대부분 기관원으로 채우는 등 법관으로서의 기본적 양식도 지키지 않았다. 서성은 증인 심문에서도 판사의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던지곤 하였다.

김근태는 부당하게 진행되는 재판과 장외에서 전개되는 언론기관의 인격학살에 대해 하염없이 분노하면서, 공판 사이 사이에 고문의 실상과 현재의 심경을 담은 <탄원서>를 썼다. 집필 허가를 신청한 지 40일 만에 간신히 허가 통지를 받았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구치소에서는 2부를 작성하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는 데도 김근태에게는 1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쪽수가 매겨진 조서용지를 주었다. 김근태는 여차 하면 없애버릴 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집필했다. 그런데 예상대로였다. 애써 쓴 <탄원서>를 출정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일제식민통치자들보다 더한 야만의 짓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고,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쓸 수 있었다. 김근태가 여러 날 고심하여 쓴 <탄원서>는 빼앗기고 말았지만, 마지막 부문은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 넘쳐 있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 받은 제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 때 두 겹 비닐 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주석 16)


주석
15> <이제 다시 일어나>, 143쪽.
16> 앞의 책,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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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5 08:00 김삼웅

 


유신과 5공시대의 사법부는 독립성을 상실한 독재정권의 부속기관에 불과했다.
이들은 특히 민주ㆍ민족관련 사건에는 정부(검찰)의 뜻을 그대로 쫓았다. 시국사건에서 기소장과 판결문이 똑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근태 사건을 담당한 판사도 다르지 않았다. 판사는 변호인들의 증거보전청구를 간단히 기각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의 김오수 판사다.

김근태는 12월 9일 변호인 접견봉쇄가 사라질 때까지 일주일에 2~3회 정도 검찰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때마다 변호인 접견이 허용되지 않는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하고, 끝까지 묵비권으로 일관하였다.

우선 9월 26일 송치 당일 관련 검사들에게 발뒤꿈치 상처와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보이면서 조사하여 처벌을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또 진술거부를 철회하도록 종용을 받았을 때 나는 고문을 조사하여 처벌한다면, 검찰 요구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문도 조사하여 처벌해야겠지만 묵비를 중지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주석 12)

12월 29일 김근태는 구술을 통하여, 그리고 부인과 변협소속 변호사들은 정식으로 정석모 내무장관, 박배근 치안본부장, 윤재호 대공분실장 외 7명의 수사관과 김원치 등 공안부검사 4명을 불법감금과 가혹행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고소한 지 3~4개월이 지나도록 조사의 흉내도 내지 않았다. 모두 한 통속이었다. 고소에 참여한 변호사는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위원장 유택형과 부위원장 강신옥, 위원으로 변정수ㆍ강철선ㆍ조승형ㆍ조영래ㆍ홍성우ㆍ김철 등이다. 다음은 고발장이다.

1. 피해자 김근태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8.24. 서울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구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4일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이와같이 대공 수사반에 연행되어 가서 그 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 듯)의 지휘 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수부겠다”고 하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 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 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했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이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매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 경부터 13시 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 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 경부터 그 다음날(9.5) 0시 30분 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 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 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했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 (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 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들과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 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경 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 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 뒤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 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 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주석 13)

다음은 부인 인재근이 검찰에 제출한 호소문이다.

부인 인재근의 호소문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저는 민청련 초대의장이며, 자문위원인 김근태 씨의 아내입니다.
김근태 씨는 지난 9월 4일 5시 30분 경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9월 7일 국보법위반으로 구속되었고, 20여 일 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안타까워만 했던 저는 26일 오후 2시 30분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오는 남편을 본 순간 반가움과 함께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남편에게 “많이 다쳤어요”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은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를 되풀이 했습니다. 9월 4일, 8일, 13일 각각 두차례씩, 5일, 5일 각 한차례씩, 20일~26일까지 열 차례 온몸을 꽁꽁 묶어놓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 등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을 거의 재우지 않고, 고문한 날은 밥을 주지 않아 꼬박 굶었다고 합니다.

검찰청 5층에서 4층 대기실까지 내려가는 동안 남편이 저에게 발뒤꿈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짓이겨진 그의 발뒤꿈치와 발등은 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옷을 입고 있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온몸에도 상처투성이고, 특히 팔꿈치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20일 이후 26일까지 치료를 하여 많이 나은 상태가 그 정도이니 그 당시 그는 사경을 헤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더욱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검찰청 5층 521호 김원치 검사실에서 남편이 검취를 받고 나오면서 전해 준 옷 보따리에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전달했던 속옷을 하나도 전달받지 못하고 겉옷 두 벌만 전달해 준 사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남편의 속옷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남편의 고문상처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가 검찰청으로 가지고 간 내의를 구치소에서만 갈아입도록 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악랄하게 고문하고 이런 사실을 감출 수 있는 허가 받은 폭력 깡패집단이 이 나라에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이 엄청난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고 떠드는 자는 누구입니까?

악랄한 고문을 통해서 죄를 조작하는 수사기관이야말로 폭력죄로 처단해야 합니다. 이는 저와 남편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고통이며 민주화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에 대한 협박이며 도전입니다.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치가 떨리는 이 고문만행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저는 이 무서운 세상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주석 14)


주석
12>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31쪽.
13> <1985년 인권보고서>, 72~73쪽.
14>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62~63쪽, 한반도재단여성위원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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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2월 20일, 그러니까 공소가 제기되고도 한달 반 이상이 지난 뒤에야 가족 면회가 이루어졌다. 검찰은 물론 담당 판사인 서성이 “죄증을 인멸할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가족 면회를 못하게 한 것이다.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남편의 고문 사실을 알고, 이것을 세상에 폭로하면서 권력층은 이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가족의 면회까지 막은 것이다.

85년 12월 13일 변호사 접견이 고의적으로 봉쇄된 것이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 딱지를 이돈명 변호인,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行刑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하여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주석 10)

김근태의 고문 상처 딱지는 그가 검찰에 출정하는 사이 교도관들이 방을 샅샅이 뒤져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던 것을 훔쳐갔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김근태의 변호인들은 증거보전신청과 아울러 증거 보전기일에 관한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하였다.

다음

1. 이 사건 증거보전의 필요성
피의자는 사법경찰관의 수사과정에서 고문 특히 10회 가량의 전기고문을 받아 현재 그 흔적으로서,

ㄱ) 양발뒷굼치에 직경 21센티 가량의 원형 피부결손 및 찰과상의 반혼. 이는 전신을 묶인 상태에서 격심한 고통 때문에 발을 한없이 비틀게 된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상혼으로 보임.

ㄴ) 양팔의 발가락 가까운 쪽 발등에 10여 개의 찔린 흔적
이는 전기쇼크를 주기 위하여 사지의 끝부분 전선에 연결된 어떠한 형태의 침을 찌를 때 생긴 상흔으로 보임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흔은 시일경과에 따라 치유되기 마련이므로 그 상흔을 검증해 보고 이와 동시에 그 상흔이 언제 생긴 것인지를 감정케하는 것이 바로 이 증거보전의 필요성입니다. 이와 같은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는 증거법 및 적법절차 문제에 관하여 피의자의 방어권행사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방법입니다.

2. 신체검증을 즉시하여야 하는 이유

(1) 이 사건 증거보전신청을 85. 10. 2. 오후에 제출한 바, 아직도 증거보전기일이 지정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사건과 같은 증거보전이야말로 절박한 것인데 피의자가 최후로 고문받았다는 날인 85.9.20. 이후 지금까지 15일이 경과된 바, 이제 며칠만 지나면 위 상흔이 치유로 인하여 없어질 우려가 매우 큽니다.

만일 신체감정을 위한 감정인 선정 때문에 시일이 지연된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 사건 증거보전기일을 선후로 나누어서 급박한 신체검증을 먼저 하고 다음으로 감정인 선정 즉시 감정을 하는 방법이 매우 긴요하게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2) 이 사건 증거보전의 필요성 및 이유를 감안하여 우선 즉시 신체검증의 기일을 지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기일통지에 관한 항변권의 포기
변호인들에 대한 기일통지 역시 서면에 의할 필요가 없어 변호인들 중 어느 1인에게라도 전화통지를 하면 이에 대하여 변호인들 전원명의의 기일통지영수증서를 작성할 것이며 이에 관한 절차상의 항변을 사전에 포기하는 바입니다.

1985.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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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3 08:00 김삼웅

 

김근태를 간첩으로 만들고자 그의 동료들을 붙잡아다가 고문하면서 조작한 증언이 재판과정에서 속속 드러났다. 서울구치소에서 김근태는 수없이 검찰에 불려가 똑같은 조사를 받았다. 변호인단은 12월 24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 구치소 변호인 접견에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이 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 반만이다. 다음은 변호인단이 접견하고 대한변협 회장(김은호)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김근태의 증언과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변협의 보고서이기에 재록한다.

1. 피구속자는 학원안정법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혐의로 1985. 8. 24.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고, 8. 26. 경범죄 처벌법 제1조 44호 (유언비어 날조 유포금지) 위반으로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규류 10일에 유치명령 10일을 선고받아 8.26부터 9. 4까지 10일간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구류 기간이 만료되는 9.4. 5시 30분경 치안본부 직원이 서부 경찰서에 와서 피구속자를 용산구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데리고 가서 그곳 5층 건물 5층 15호실에 가두었다.(구속영장은 9. 7. 13시 30분에 발부되었다고 함)

2. 위와같이 대공수사단에 연행되어 가서 그곳에서 김 전무라고 불리우는 사람(경정 또는 경감인듯)의 지휘아래 8명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연행되던 날(9.4)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진술을 거부하겠느냐”고 묻기에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대답하자 김 전무는 “해볼테면 해보라 깨부수겠다”고 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한편 (아프지는 않게 모욕적으로)다른 직원에게 고문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약 30분간 무릎을 꿇게 했다.

이때 여러 명이 “죽여 버려라”는 등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다가 8시경부터 소위 물고문을 시작하였는데, 옷을 홀랑 벗기고 눈을 가리고 고문대 (높이 1미터 남짓되고, 길이 1미터 70~80 센티되며, 어른 어깨넓이의 바닥이 각목으로 된 평상)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다음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등 다섯 군데를 벨트로 고문대에 동여메고, 목을 약간 뒤로 저치게 하고 코와 눈을 두꺼운 수건으로 씌우고 나서 그 수건위에다 샤워기로 물을 쏟아붓기 시작하더니 물의 분량을 점점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주전자물을 함께 부었다.

이때 피구속자는 숨이 끊어질 것 같고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사뭇 견디다 못해 묶인 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팔뒤꿈치와 발뒤꿈치가 고문대의 각목 바닥에 마찰되어 살이 찢어졌다. (아직도 적갈색의 흉터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보여줌) 이러한 고문은 8시경부터 13시경까지 5시간 동안 계속됐으며 13시경 고문대에서 풀고 민청련의 결성시기, 간부 이름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굶긴 채 또 다시 19시 30분경부터 그 다음날 (9.5) 0시 30분경까지 5시간 동안 오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물고문을 하였는데 저녁 고문시에는,

첫째, 피구속자가 폭력혁명을 목적함을 시인하라.
둘째, 피구속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시인하라.
셋째, 오늘의 혼란 상황은 민청련과 피구속자 김근태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민청련과 김근태의 지시에 따라 과격하게 움직이는 선을 대라고 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3. 그 다음 날인 1985. 9.5.20시 경부터 다음날(9.6.) 1시 30분 경까지 또 다시 어제와 같이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주로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을 병행했다. 고문대 위에 뉘어서 묶어놓고 발에는 전선이 들어있는 붕대를 감고 발가락 사이에 전기코드를 꽂고 발, 사타구니, 가슴, 목, 머리에 물을 붓고 먼저 물고문을 한 다음 전기를 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전력을 약하고 시간을 짧게하다가 차츰 높은 전력을 길게 보냈으며, 이러한 고문을 의식을 잃지않을 정도로 계속하면서 폭력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시인하라고 요구하였다.

4. 1985. 9. 6.도 어제와 같은 시간에(20시부터 다음날 1시 30분 경까지) 거의 비슷한 전기 및 물고문을 하였는데 이 때에는 배후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5. 1985. 9. 8. 10시 경부터 15시경까지 5시간 동안 19시부터 24시까지 5시간 동안 전날과 같은 전기 및 물고문을 했다. 이 때에는 배후관계를 추궁하면서 북한도 다녀왔고, 북한에 있는 형도 만나고 왔다고 전혀 허무 맹랑한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므로 견디다 못해 시키는 대로 시인했다.

6. 1985. 9. 10. 9시부터 12시 경까지 전기봉 고문 (전기가 몸에 직접 통하지 않고 발에 통증만 오게 한다) 물고문을 하면서 이제까지 허위자백한 것을 복습시켰다.

7. 1985. 9. 13.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 30분간 그리고 새벽 3시부터 6시 경까지 3시간 전기봉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서 재정문제와 배후관계를 추궁하였다. 9.13, 밤 고문시에는 오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했다. 견디다 못하여 함세웅 신부가 배후 인물이라고 진술하자 그러면 함세웅 신부를 배후인물로 하자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8. 1985. 9. 20. 20시 경부터 24시 경까지 4시간 동안 9.5에 있었던 것과 같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였다. 이 때에는 그 동안에 허위진술한 것을 총복습하였다.

9. 1985. 9.25. 아침 5시 김 전무라는 사람이 문용식과의 관계를 묻기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부인하자 팔꿈치로 10여 차례 가슴을 가격하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해 문용식의 자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10. 1985. 9. 4.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피구속자의 진술에 의한 것이므로 과연 그러한 수사기관이 틀림없는지는 알 수 없음)에 연행되어 가서 1985. 9. 26.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피구속자 김근태가 당하였다는 고문의 실상은 이상과 같은 바, 그는 고문 휴유증으로 9.13.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어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있으며, 온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한다고 하며 교도관의 말도 김근태는 몸이 불편하여 잘 걷지도 못하여 감방에서 변호인 접견실까지 나오자면 30분도 더 걸린다고 함. 그리고 피구속자의 전술 태도로 보아서 그의 진술은 보탬도 없고 꾸밈도 없는 진실로 인정됨.

11. 변협 조사위원은 이상과 같이 보고 하는 바, 이 나라에 명색이 법이 있고, 인권옹호를 그 직무로 한다는 검찰과 법원이 있으며,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한다는 변호사 단체들이 엄연히 있는 마당에 어떻게 독재 국가나 팟쇼 정권 아래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러한 잔인 무도한 가혹행위가 사법경찰에 의하여 자행될 수 있는 것인지 몸서리 처지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임(더구나 1985. 9. 4.부터 9. 6까지의 고문은 구속영장도 없는 불법구속 상태에서 자행된 것임) 직접 고문을 자행한 경찰관에 대하여는 직권 남용(형법 제125조 소정의 폭행, 가혹행위죄)으로 고발해야 할 것이고, 검찰이 사후에 이를 알고도 형사 입건하지 아니하고 고문 경찰을 묵인하였다면 담당검사에 대하여는 직무유기죄로 고발하여야 할 것이며, 경찰 최고책임자에 대하여도 단호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됨. (주석 9)


주석
9> 앞의 책, <1985년 인권보고서>, 62~65쪽.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2 08:00 김삼웅

 

피의자에 대한 변호사의 접견과 가족의 면회는 법으로 보장된 정당한 권리다.
그럼에도 서울구치소 당국은 김근태가 수감되고 3개월여 동안이나 변호사의 접견을 막은 것은 물론 가족 면회까지 차단했다. 국가기관이 공공연하게 위법을 저지른 것이다. 남영동의 가혹한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실상이 세상에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덮자는 수작이었다.

홍성우ㆍ황인철ㆍ신기하 등 변협 소속 변호사들이 1985년 10월 14일부터 수차례 서울구치소에 찾아와 김근태의 접견을 신청했으나, 그때마다 검찰출정을 이유로 거부당했다. 변협의 보고서다.

△ 본인들은 1985. 11. 30. 9시 30분 서울구치소에 가서 집견원을 제출하였던 바 벌써 검찰에 출정하였다는 이유로 접견을 거절하므로 구치소장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더니 구치소장은 피구속자 김근태는 매일 아침 일찍 검찰에 불려갔다가 오후 5시 이후에야 돌아오기 때문에 도저히 접견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므로 어쩔 도리없이 접견을 못하고 돌아왔음.

△ 본인들은 1985. 12. 2. 오전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정구영을 찾아가서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의 고문실태조사에 협력해 달라고 하면서 피구속자 김근태의 접견을 요청하였던 바, 검사장은 위 피구속자는 지금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그의 진술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진술을 듣고자 매일 아침 일찍 검찰에 출정시키고 있으며, 아직 사선 변호인들에게도 접견을 시키지 아니하였는데 사선 변호인들보다 먼저 대한변협의 조사위원에게 접견을 시킬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머지않아 사선 변호인들에게 접견의 기회를 주고자하니 대한변협의 조사위원은 그 다음에 접견을 해달라고 말하므로 그대로 돌아왔음.

△ 이상과 같은 경위로 피구속자 김근태에 대한 고문실태조사는 못하고 말았는 바, 그동안 18회에 걸친 사선 변호인들의 접견을 허용하지 아니하고 본 조사위원들의 접견 또한 허용하지 아니한 처사는, 고문 여부는 잠시 제쳐놓더라도 그 자체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인권침해이며, 신체고문에 대하여도 매우 짙은 의심을 갖게 하는 것임.
(주석 6)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인권이나 법질서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비판자에 대한 탄압과 보복으로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었다. 출범 과정에서부터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도당적(徒黨的) 행태였다. 검찰은 김근태를 국가보안법(국보법) 위반혐의로 기소하고, 매일 검찰청에 호송하여 조사하였다. 남영동에서 받은 조사가 되풀이 되었다. 김근태는 변호사 접견을 막는 한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말하고 이를 지켰다.

민청련을 이적 단체로 규정한 김근태의 공소장은 다음과 같다.(요지)

1985년 3월 하순 경기도 시흥군 소재 속칭 작은자리 건물 회의실에서 민청련 간부들과 만나 1985년도의 정세전망 및 사회운동권 단체 통합문제에 관한 토의를 하였다. 피고인은 보고를 통하여 운동단체 통합과정에서 CD(시민민주주의), ND(민족민주주의), PD(민중민주주의) 등의 이념적 차이를 드러냈는데 CD와 PD의 입장을 절충하는 ND의 이념이 가장 적절하다는 취지로 설명하여 전원이 이에 동의, 위 이념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단체를 구성했다.
(주석 7)


검찰의 공소장대로라면 “CD와 PD의 입장을 절충하는 ND의 이념이 가장 적절하다”는 취지의 설명이 북한을 이롭게 하여 국보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알려진대로 국보법은 제정과정에서부터 ‘반대세력 제거용’이라는 비판이 따르면서 그동안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괴롭혀왔다. 이것이 김근태를 묶는 쇠사슬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하수인들은 김근태를 간첩으로 몰고자했다. 그래서 민청련 등 민주화운동단체들이 북한과 접선된 불순단체로 색칠을 하려한 것이다. 김근태와 민청련에서 함께 일하다가 구속된 문용식의 공판기록이다.

그들은 고문을 하며 어거지로 질문했는데 “7월 이후 도피하여 평양으로 갔지? 접선장소는 어디였어?” 이런 질문을 하며 옷을 발가벗겨 칠성판 위에 눕힌 후 안전벨트로 손가락, 발가락만 움질일 수 있도록 묶고 실신할 때까지 물을 부어 마치 몸을 묶고 물 속에 빠뜨려 놓은 상태에서 "DJ를 만나 지시받았지? 장기표를 만나 삼민투지시를 받았지?" 등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김대중 씨를 한 번이라도 만났더라면 “네, 그랬습니다”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수없이 실신하고 똥물까지 게워낸 후 하룻밤이 지나 인내가 극히 한계에 다다를 때 "김근태 의장 만났지, 지시 받았지" 하고 물어 “네, 지시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 의장 얼굴을 제가 아는 게 죄였겠지요. “만나서 뭐했어?”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총회 때…”, “네 이놈, 이제 풀렸어”하며 고문하면 “네 2~3번 만났습니다”로 됩니다. 그리고 그들 마음대로 날짜가 정해집니다. 또한 미문화원 전에 김근태 의장을 만나 5월투쟁과 미문화원 점거 지시를 받은 걸로 조서가 작성 됩니다.…그리고 그들은 계속 “김근태는 간첩이다. 이북에 있는 형이 남파되어 접선했는데 너도 그것을 알았지?” 라는 엄청난 질문을 해 저는 “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간첩인지 몰랐다”고 밝히는 데 급급했습니다.

자신이 희미하게 아는 것을 글로 쓸 때는 명확히 쓰게 되었습니다. 즉 치안본부에서 자술서를 쓸 때마다 틀려져서 논리적으로 살이 붙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CNP는 치안본부에서 비로소 성립된 것입니다.
(주석 8)


주석
6> 대한변호사협회, <1985년 인권보고서>, 60쪽.
7>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ㆍ민족민주운동연구소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10대 조직사건>, 84쪽, 아침, 1980.
8>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장 김근태씨 제8차공판기록>(1986년 2월 17일), 문용식의 변호인반대신문사항,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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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1 08:00 김삼웅

 

옛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역사관)와 그 너머로 인왕산이 보인다. 사진은 보림재블로그에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모지락스런 권력의 하수인들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의병ㆍ독립운동가ㆍ통일운동가ㆍ민주화운동가들이 거쳤던 ‘정규과정’이었다. 한말 이인영 의병대장, 총독암살 미수의 강우규 의사를 시작으로 3ㆍ1운동 민족대표. 유관순 열사, 의열단원, 서로군정서, 대한광복군 등 수많은 지사들이 수감되고 더러는 처형되었다.

해방 뒤에는 조봉암과 인혁당 간부들이 처형되었다.
함석헌ㆍ장준하ㆍ김대중ㆍ리영희ㆍ송건호 등이 거쳐가고 민청학련사건의 학생들에 이어 김근태도 1985년 9월 26일 이곳에 수감되었다. 일제가 침략하면서 이곳에 감옥을 지을 때는 경성감옥이었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고, 해방되던 해 서울형무소로,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부터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구 현지동 101번지, 민족의 한이 서린 이곳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김근태가 수감될 당시의 이름은 서울구치소였다. 5공권력의 핵심에 찍힌 김근태는 수감번호 14번을 달고 서대문구치소 중에서도 가장 추운 외진 방에 수감되었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껌뻑거리며 들어오게 되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감옥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이었고, 그것은 우이독경일 뿐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 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주석 1)

김근태가 이처럼 감옥 중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 수감된 것은 권력핵심의 지침과 아울러 검찰청사에서 잠깐 만난 부인에게 전한 남영동의 고문사실이 알려지게 된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인권위원회 소속 홍성우ㆍ황인철ㆍ신기하 변호사 등이 진상규명 활동에 나서면서 김근태는 가족 면회와 변호사 접근이 금지되고, 가장 추운 방으로 수감되는 보복으로 나타났다. 변협 소속 변호사들의 활동은 뒤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서울구치소의 실상을 더 살펴본다.

남영동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김근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식사를 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은 뒤에는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도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주석 2) 그래서 간수에게 죽을 부탁하여 오랫동안 천천히 먹었다. ‘먹었다’기 보다는 그냥 삼켰다.

그나마 남영동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편이었다. 며칠 뒤부터는 간신히 삼켰던 죽도 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상부 지시라 했다. 굶어죽으라는 처사였다.

별안간 밥이 나와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이야기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시받은 담당은 복도 내방 옆에 몰래 붙어서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 확인하는 숨길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주석 3)

김근태는 자신이 수감된 건너편 7방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간부에게 전방(轉房)을 요청했다. 8방은 하루종일 햇볕을 볼 수 없으나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빛이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어 있는 방인데도 전방을 거부하고 굳이 9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9방은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곳이었고, 정신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쇠철판으로 작은 창문을 밀봉해 놓은 상태였다. 김근태는 12월 말경에 쇠철판을 뜯어내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내는 조건으로 9방으로 옮겼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病舍)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 큰 체 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주석 4)

김근태에 대한 권력의 학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 해 12월 중순 경부터 서울구치소 위층 15~16개 방에는 모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유독 김근태 방만은 제외시켰다.

아픈 분들 방에 나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번 나도 난로 좀 놔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 준다면 전 사동(舍棟)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주석 5)

혹독한 고문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축이 없이는 걷지도 못한 상태의 중환자, 그래서 서울구치소의 병동에 수감하고서도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차별 대우는 변호인 접견과 가족 면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주석
1> 김근태, <이제 다시 일어나>, 105쪽, 중원문화사, 1987.
2> 앞의 책, 108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106~107쪽.
5> 앞의 책,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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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1 08:00 김삼웅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권우성

 

마지막 고문은 9월 20일 저녁 8시경부터 밤 10시 반경까지 전기ㆍ물고문의 합동고문이었다. 김수현ㆍ김영두ㆍ정현규ㆍ박병선ㆍ최상남, 또 한 사람이 고문에 가담했다. 이제까지의 ‘자백’과 ‘번복’의 되풀이였다. 민청련이 반국가단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고문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아,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절망하고, 마구 눈물을 흘렸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의 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 되는 각본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량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주석 33)

이후에도 고문과 모욕은 그치지 않았다. 반주검 상태가 된 김근태는 9월 26일 오후 3시경 인간 도살장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게 되었다. 악마들은 ‘자백’을 통해 일건 서류를 충분히 마련했고, 더 오래 잡아두었다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사후 처리문제가 귀찮았을 것이다.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한 지 22일 만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이 기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들에게 도합 열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고문자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죽이지 않고 고문하는, 고도의 기술자들이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방에서 앉아서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이 저주받을 인간들이, 악마같은 자들이 내 생사 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하였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이 끔찍한 지옥을 All Mighty처럼 덮쳐왔던 것을….”
(주석 34)

지난 5월29,30일 열린 태안아버지학교에서 이근안씨는 특별강사로 초청돼 자신의 재소자시절을 얘기했다.


남영동에서 김근태에게 살인적인 고문을 총지휘한 자는 90kg이 넘는 거구의 이근안이다.
처음에는 가명이어서 몰랐으나 뒷날에야 그가 이근안임을 알았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경찰에 입문하여 1972년부터 대공분야에 근무하면서 악질적인 ‘고문기술자’의 역할로 특진과 승진을 거듭하여 1984년에는 경감에 올랐다. 그에게서 고문을 당한 인사들의 증언대로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가학성을 지닌 인물이다.

1979년 <조선일보>가 청룡봉사상을 준 것을 시작으로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 육군 제9사단장 표창, 1986년 전두환 정부에서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이를 지휘하는 이근안의 인상착의를 입력했다가 뒷날 이재오ㆍ이선근ㆍ박문식 등 그로부터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과 함께 사진 속의 인물이 이근안임을 밝혀냈다.

김근태의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규탄과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10월 17일 민청련에서는 ‘고문 철폐를 위한 투쟁위원회’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 위원회’(고문 공대위)가 결성되고, 민통련ㆍ민추협ㆍ신구교 성직자ㆍ불교 승려ㆍ주요 사건 구속자 가족 등이 참가했다. ‘고문 공대위’는 정부의 고문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서 11월 11일에는 김대중ㆍ김영삼 등 60여 명이 참석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김근태는 남영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9월 26일 오후 검찰청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이날 검찰청에서 호송되는 순간 부인 인재근을 만났다. 그동안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당일 검찰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중 해후한 것이다. 짧은 순간에 부인에게 발뒤꿈치의 고문당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김근태의 고문실상이 세상에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기적이었다.

계단을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부축해 내려가면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 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고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문제도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 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달리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된 이 만남은 본인에 대한 영원한 기적일 것입니다.
(주석 35)


주석
33> 앞의 책, 83쪽.
34> 앞의 책, 86~87쪽.
35> 앞의 책, 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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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30 08:00 김삼웅

 


9월 11, 12, 13일 오후까지는 ‘무사’히 지나갔다.
육체적인 고문이 없었다는 뜻이다. 13일 저녁식사가 들어와 막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을 때 복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정현규가 들어와 밥그릇을 빼앗아갔다. 다시 고문을 가하겠다는 신호였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라고. 이에 대해 악마의 날이라고 하니까 조소하면서,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의 최후의 만찬날이다. 각오하라” 하였습니다. 고문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날은 팔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 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고 끊임없이 모욕하였습니다. (주석 30)

김근태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자백까지 하면서 한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에는 이미 기력을 잃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을 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 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해 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이튿날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 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부터 5시 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자백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석 31)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악마들은 민청련의 재정문제에 대해 더욱 잔혹성을 보였다. 앞서 소개된 재미 교포 언론인 신기섭이 한국민주화운동의 성금으로 준 기금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된 것을 불순자금의 유입으로 엮으려 한 것이다.

김근태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마지막 의지를 가다듬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180만 원과 지도위원 40여 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 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임을 사실대로 말했다.
악마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불순자금의 실상을 밝히라고, 다시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의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 때까지 본인은 밥을 못 먹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로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줄기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더군요.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고,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주석 32)


주석
30> 앞의 책, 75쪽.
31> 앞의 책, 76쪽.
32> 앞의 책,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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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

012/07/29 08:00 김삼웅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권우성

 

일곱번째 고문은 9월 10일 저녁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자행되었다.
이번 고문은 처음 행한 방법이었다. 전기봉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통을 가하는 방법이었다. 지휘자는 김영두이고 김수현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박병선ㆍ최상남ㆍ정현규ㆍ경북출신의 경찰이 번갈아가며 고문을 하였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 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러나 이 전기봉고문은 그래도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습니다.
(주석 28)

악마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김근태를 압박했다. 일종의 심리전이다.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끼니 때가 되어도 밥을 주지 않으면서, 곧 고문의 순간이 도래한 것처럼 인식케 하여 심리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방식이었다. 악마들은 다른 무슨 자백을 받아내거나 자신들이 무슨 일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이 방식을 썼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이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하였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하였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덜덜 떨면서 나는 시키는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이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주석 29)

수사기관은 양심수나 확신범을 체포해다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기간에 지내온 일을 빠짐없이 기술하라고 다그친다. 몇 차례 되풀이 하여 쓰고 나면 우선 기가 빠진다. 나중에는 왜 앞의 내용과 다르냐고 후려친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수년 전의 일시, 만난 사람이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 김근태에게 대학시절, 제대 뒤 복학 때의 친구 관계,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행한 행사 등을 캐묻고, 빛바랜 사진을 들고 와서 자신과의 관계를 쓰라고 겁박했다.


주석
28> 앞의 책, 69쪽.
29> 앞의 책,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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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8 08:00 김삼웅

 

악마들은 김근태에게 ‘자백’할 것을 강요하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정권 핵심에서 내려보낸 시나리오대로 간첩과 접선한 것으로 만들려는 각본이었다. 처음에는 배후를 대라고 족치고, 다음에는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을 자백하라고 고문하였다.

“남민전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 지 알아? 전노련 이태복 얘기 너도 들었을 거다. 이재문이는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서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하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날은 남영동에서 고문받았던 중에서 최악의 고통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가장 혹독하고 긴 고문을 받았습니다. (주석 23)

유신이나 5공체제에서 고문을 당해 본 사람들은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지만, 밀폐된 수사기관에 갇혀 저승사자들에게 몇 차례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보면 항우 장사라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당장 연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다.

남한 사회에서 ‘간첩’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데도 수사관이 불려준대로 자신이 간첩이었다고 진술서에 서명하게 된다. ‘살기 위해 죽을 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원은 이 ‘자백’을 근거로 사형 등 중형을 선고한다. 재판정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호소해도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고 ‘자백’만을 근거로 제시한다. 근래에 재심을 통해 더러는 무죄가 밝혀지기도 하지만,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김근태는 결국 ‘자백’을 했다.
야수들은 심지어 월북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어떻게 월북했느냐고 추궁하니까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했다. 80년 광주사태 당시 어느 동지가 삼천포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려 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였다. 남파된 형들에게 돈을 받았느냐니까, 받았다고 했다.

“간첩과의 접선은 본인에게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덮쳐 누르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고통을 우선 모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석 24)

억지로 ‘자백’을 받아낸 악마들은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상부 보고용, 재판에 필요한 대본이 필요한 것이다.

그랬더니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증거를 요구하더군요. 돈을 받았느냐고 해서 100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74년도에 쌍문동 집 근처에서 한번 만났고 84년도에 역곡에서 한번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고문자들 참 좋아하더군요. 좋아서 미쳐 날뛰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습니다. 김수현은 합리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달밤에 먹이를 앞에 놓고 질질 침을 흘리고 있는 털 빠진 승냥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서 얘기를 하니까 고문자들이 거들어 주고 수정을 하고 해주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놓여진 본인과 고문자 사이의 협력과 토의수정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해 나가며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주석 25)

김근태는 ‘자백’을 하자 악마들이 히히덕거리며 너무 좋아하고 분위기가 다소 풀린듯 하자, 용기를 내어 “사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번복했다. 그랬더니 고문자들은, 악귀가 되어 날뛰면서 다시 고문을 시작하고, 김근태는 또 ‘고백’하는 일이 몇 차례 되풀이 되었다. 이때 김근태는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고 생각했다.

부정했지만 결국은 또 인정하게 되구요. 도대체 몇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도록 고문하고 강요했는지 모릅니다. 거기다 또 말이 왔다 갔다 한다고 고문을 해대고 말입니다. 아. 이처럼 눈물나는 희극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구나.
희극의 시대이구나. 이 저주받을 희극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월북과 간첩과의 접선 얘기는 대충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후에는 필요할 때는 위험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이 문제에 관한한 어떤 진지함을 고문자들은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주석 26)

악마들은 김근태가 자주 ‘자백’을 번복하자 ‘악질’로 단정했다.
그리고 더 가혹하게 고문을 자행했다. 8일 오후 1시 반경에 오전의 고문을 끝냈다가 저녁 7시경 또 전기고문을 시작해서 밤 12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민청련 조직의 배후를 대라는 것이었다.
배후 같은 것은 없고 자생적인 조직이라면 다시 고문을 하였다. 결국 재야 운동권과 종교계 인사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여 되는 대로 이름을 댔다. 결국 함세웅 신부와 권호경 목사로 압축되는 시나리오였다. 이들에게는 참으로 안 되는 일이지만 악마들의 각본을 인정해주어야 했다.
(주석 27)

 

주석
23> 앞의 책, 62쪽.
24> 앞의 책, 63쪽.
25> 앞의 책, 63쪽.
26> 앞의 책, 64쪽.
27> 앞의 책,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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