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6 08:00 김삼웅

 

2005년 4월 서울대 교정에 세워져 있는 김세진ㆍ이재호 열사 추모비에 향불과 국화가 놓여져있다.

 

김근태는 2월 22일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면서 김세진 군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인 김세진과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 위원장 이재호는 1986년 4월 28일 관악구 신림동 4거리에서 전방입소에 반대하며 가두시위 중 분신하여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26일 각각 사망하였다.

편지의 일부를 소개한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이 욕된 어둠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지요. 그 속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젊음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인지요.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지 말라”고 외쳤다는 세진이의 금속성 목소리에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라는 여운이 긴 메아리를 나는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젊은 생명을, 세진이, 재호, 영진이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 젊음들이 죽음의 골짜기로 몰리는 동안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나는 세진이, 재호가 정말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종철이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이 팽만한 배와 흥건하게 젖은 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어디 있습니까. 물 먹고 팽만한 배가 되어 죽어 버렸거나, 잠깐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다가 연기를 남기고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요.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세진이의 죽음 이후 두 분이 떨쳐 일어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눈물이 핑 돌면서 나는 머리를 끄덕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세진이의 부활일뿐만 아니라, 두 분의 새 생명, 우리 모두가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소선 어머니에게서 우리는 그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두 분의 일어섬을 기뻐합니다. 사망의 세계를 떨치고 일어선 두 분을 존경합니다. 후둘 후둘 하는 다리 떨림, 가슴 무너짐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요. 두 분 속에서 저는 종철이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뵈는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기대옴을 받쳐 주는 두 분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소선 어머니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석 20)

김근태는 3월 14일 경주교도소에서 <기정이 어머니의 구속 소식을 듣고> 의 편지를 썼다.
짧은 글이어서 전문을 소개한다. 구속된 자식들을 풀어놓으라고 시위한 죄로 구속된 ‘기정이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이다.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기도하고 계신가요. 기도하면 희끄무레한 먹방이 조금은 환해지던가요. 뜨거운 가슴 설운 마음 주체할 길 없어 15척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 던지고 물어뜯고 침뱉으며 사납게 사납게 소리치며 쳐들어 오셨습니다.

당신은 잠시 피하시라는 유혹 따위는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대달리려 이렇게 입성하셨습니다. 그렇게 어두움 속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외롭지 않으신가요. 우울해지지 않던가요. 기죽지 않던가요. 혹시 소리 죽여 울지는 않으셨는지요.

어머니,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추운 대관령 바람 한가운데 서 있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스름달 비껴 걸린 나무 위로 일지매처럼 날아 올라가셨었지요. 거기 앉아 담벼락 노려보면서 아들들을 불러대셨지요. 내공 깊게 무림계 고수처럼 어머니의 외침은 하늘을 뒤덮었었습니다. 그렇게 아들들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당신은 참다가 참다가 참지 못하여 아들 딸 가슴속으로, 이 설움 많은 담장 안으로 그리하여 먹방 속으로 직행해 버리셨습니다.
어머니는 —.

아, 비열한 저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주석 21)

 


2010년 MBC 노조 파업 당시, 현장을 찾아 연대사를 하다가 소녀처럼 웃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김근태는 1986년 10월 강릉교도소로 면회온 부인을 통해 구두로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우선 교도소 내의 행형제도의 철폐를 통해 재소자의 인간적 생활의 회복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소내(所內) 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직적인 옥중투쟁론이다. 이 글은 인재근이 정리하여 전국의 수형인들에게 은밀히 전달되었다.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옥중투쟁의원회(가칭)의 구성을 제안하면서, △ 양심수들의 합방ㆍ합사문제 △ 재소자에 대한 폭행ㆍ폭언근절 △ 전 재소자의 삭발거부와 소내에서 면회ㆍ서신ㆍ서책검열 등에 관해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근절해야 한다고 실천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재소자들이 결속하여 투쟁할 것을 권려했다.

주석
20> 앞의 책, 198~199쪽.
21>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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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운명에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1987년 2월, 이번에는 더 멀리 경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발화체’를 아주 멀리 격리시킨 데는 까닭이 있었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애학투) 결성대회가 전국 22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건국대학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경찰의 진입으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와 옥상에서 3박4일 동안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른바 ‘황소 31입체작전’을 벌여 1,525명을 연행했다.

검찰은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세계학생운동사에서 기록되는 가장 많은 학생을 연행하였다.
12월 5일에는 정부의 언론통제 내막을 밝히는 보도지침이 폭로되고,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김근태가 당했던 치안본부대공분실의 수사관 6명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숨졌다. 2월 7일 서울을 비롯, 전국 16개 지역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열리는 등 시국은 태풍권에 들어갔다. 박종철 열사의 추모행사, 장례, 49제가 잇달아 열리면서 정국은 혁명적 열기로 가득찼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김근태를 서울에서 가장 먼 경주교도소로 이감시켰다.

<월간 말>이 폭로한 정부의 ‘보도지침’에는 “김근태 관련 단체의 이적행위 관계를 꼭 1면 톱으로 쓸 것, 주모자인 김근태의 출신 배경 등 신상에 관한 기사를 꼭 박스기사로 취급할 것”을 지시하고, 관제언론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그 때문에 김근태에게는 강성 이미지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김근태는 2월 12일 부인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박종철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뼛가루를 임진강에 뿌렸다는 사실도 알았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이미 우리는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추악한 전쟁은 어느 틈에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적인가. 적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되어버렸는가.

그런데 임진강에 뿌려진 그 원통한 죽음을 저들은 어떻게 인정했는가. 나는 그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뭔가 빼도 박도 못할 사정이 있었는가. 아니면 은폐하는 뒤처리 과정에서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는가. 지금은 크게 후회하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금수처럼 당하고도 또 징역을 살아야 하는 권양, 그 흐느낌의 어디에 저들의 양심 같은 것이 끼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아닌 것이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하였다고 주장되는 우종환 서울대생, 남쪽 머언 시골 어느 야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청년, 죽어서 말이 없으니까 뭐라해도 상관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산 앞바다에서 풍덩 빠져 종적을 감췄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우리 앞에 나타났던 그 청년의 시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애초부터 목에 시멘트 돌덩이를 스스로 매달고 뛰어들어 자살했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 이것 뿐이리오만은 이 수상쩍은 죽음들이야말로 진정 모를 일이다. 알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분노의 불길이었던 죽음, 항의의 폭탄이었던 죽음, 박영진, 이재호, 김세진 등과 거기에 수상쩍은 죽음이 겹쳐지면서 광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광주, 간단없이 지속되는 그것에 나는 넌덜머리가 나면서 무감각해져 버리고 말았는가.
  (주석 18)

김근태는 잇달은 젊은학생들의 부음 소식에 분노하고 사지육신이 떨렸다. 도저히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갇힌 몸이라 어찌하기 어려웠다. 분노는 창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 뽈 엘뤼아르의 <통금通禁>과 같은 심사였다.

통 금

어쩌란 말이냐 문에는 감시병이 서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갇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길은 막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사면초가인데
어쩌란 말이냐 그녀는 굶주려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린 무기를 빼앗겼는데
어쩌란 말이냐 밤이 오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김근태는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소식을 전해 듣고 옥중에서 단식을 결행했다. 곡기를 끊고 절규해도 메아리조차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신라의 옛 고도 외곽에 자리한 감옥은 공동묘지처럼 스산했다. 감시병들만 없으면 공동묘지 그대로였다. 3월 12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잘 잡히지 않는구려,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리면서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 것이었소. 항의도 하거니와 내 마음을 모으기 위해 단식을 한 것이었소. 이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을 듣자마자 분노의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사흘 째부터는 꽤 고통스러웠소. 얼굴 표정도 아마 찌그러졌었을 것이오. 건강이 안 좋고, 또 자신감까지 없고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오. 공포심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더니 달걀귀신처럼 자꾸만 커지는 것이었소. 몸과 마음을 비우고, 그 젊은 죽음을 가슴에 받아들여 서로 교감하고자 했던 당초 의도는 힘없이 밀려 버리고 말았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소. 배고픈 고통과 공포, 부끄러운 생각 등의 혼란 속에서 점점 선명하게 부각되어 온 것은, 날카롭게 찔러온 것은,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소. 이 염치없는 끈적끈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지 않았구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소.
(주석 19)

역사는 의로운 죽음에는 반드시 피값을 요구한다. 일제는 안중근ㆍ이봉창ㆍ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죽인 피 값으로, 이승만은 김구ㆍ조봉암ㆍ김주열ㆍ4.19 희생자들의 피값으로, 박정희는 조용수ㆍ장준하ㆍ인혁당 등의 피 값으로 무너졌다. 전두환도 수많은 청년들을 죽이고 분신ㆍ자결ㆍ투신으로 몰아가고 있어 무너지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 김근태는 믿었다.

주석
18> 앞의 책, 192~193쪽.
19> 앞의 책,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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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4 08:00 김삼웅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과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등에서 교수를 지낸 제임스 에머슨은 고통과 고난을 분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통은 피할려면 피할 수 있지만, 고난은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이란 이유다. “옳은 일을 위해 감옥에 가는 일”은 피할 수 있는데도 받아들이는 고난이라는 뜻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결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현대사의 아픔, 통증을 자신과 역사ㆍ민중의 통증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피하지 않고 민주화의 전위가 되었다. 무더위 속의 옥살이를 하면서 아내와 지인들이 보내 준 책을 열심히 읽었다. 옥살이의 시간이 더해갈수록 내면의 더께도 그만큼 깊어갔다.

영등포구치소에서 6월 19일 처음으로 어린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 없이도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애비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왔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그도 평범한 아버지였다.

병준아, 병민아 잘 있었니.
오랫동안 너희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구나. 아버지는 이사를 하였고, 유난히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단다. 우리 병준이, 병민이가 씩씩하게 자라는 것은 엄마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엄마 편지와 함께 날아 온 너희들의 그림을 재미있게 들여다 본단다. 엄마, 아빠를 그린 병준이 그림, 병민이 그림 모두 잘 그렸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병준아, 학교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네 그림 속에서 금방 병준이가 “아버지!” 하면서 뛰어 나올 것 같구나. 학교생활이 신나고, 동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그 그림에 배어 있구나. 하늘에는 해가 환하게 웃고 있고 말이다.
(주석 14)

이어지는 다음의 내용을 보면 평범한 30대 후반의 부정(父情)을 흠뿍 느끼게 된다.

병민아, 역곡 일두아파트 뒤에 있던 약수터 기억하고 있니? 거기에 네 손을 잡고 노래부르면서 오빠, 엄마와 함께 갔던 것, 나는 그리워 한단다. 약수터 가는 논길에서는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가 병민이를 반겨 주었고, 앞쪽 산숲에서는 뻐꾸기가 뻐국, 뻐어꾹 하고 울어 댔었지. 아버지가 병민이한테 가는 날 우리 모두 뻐국, 뻐어국 소리내면서 다시 한번 약수터에 가자. 그래서 개구리도 만나고 뻐꾸기도 만나고 말이다. (주석 15)

김근태는 이 해 8월 다시 강릉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계속하여 고통을 주려는 당국의 뜨거운 ‘배려’였다. 시국이 점차 가열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운동권의 ‘발화체’를 가급적 먼 지역으로 격리시키려는 전략이었다.

8월 28일 모처럼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결코 약하지 않은 사람이라면서 “매맞고, 갇히고, 모욕당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거요. 피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핑계를 대서 모면하는 것이 인간의 심정일 것”이라 토로한다.

김근태가 믿는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고난을 거부하지 않았다. 가톨릭신자 김근태 역시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역사의 소명이라면 거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아, 고백 그것이 필요한 것 같소. 우리들의 망설임과 흔들림,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치욕스런 굴종을 강제당할 때, “아니오” 하면서 고개를 바짝 쳐드는 것은 확실히 어렵고 두려운 일이오. 하지만 노예에의 길에 대한 거부의 대가로 틀림없이 찾아드는 매맞고 짓밟힘, 자유의 박탈, 이것은 속병 들게 하는 것이고 한이 맺히게 하는 것이요. 이 갈구, 이 목마름은 그 박탈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네 목마름과 외로움은 너무 깊어서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해도 일단 자유의 냄새가 한번 풍겨지면 송두리째 흔들려 버리고 말 것이지요. 위로 또한 있어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게요. 매맞고 갇힌 자들이 남은 자들 되어 꿈을 깊게 꿀 수 있는 것은 이런 고뇌와 흔들림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오.
(주석 16)

김근태는 외롭고 고통이 심하여 마음이 흔들릴 때면 일제강점기 어려웠던 시기에 고통을 감내하며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젊은 학생들의 통곡소리에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찾곤 하였다.

저 30년대 일본제국주의가 더욱 강성해지고 운동가들 일부가 대열에서 교묘한 논리로 이탈하고 일반대중은 체념 속에서 일상생활로 매몰되어 가던 그 시기는 우리 민족에겐 아주 깜깜한 어둠이었을게요. 그런 어둠 속에서도 일제와 강경하게 싸워 나갔던 민족해방운동가의 맘은 어땠을까 상상해 보면 내 숨이 막혀 버리는 것처럼 답답해지는 것이오.

그런 자랑스런 선조, 선배 동지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오. 그 분들은 역사발전 법칙에 대한 명확한 파악과 분석을 했을 것이요. 그 위에 고뇌의 슬픔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신념, 흔들림 속에서도 결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걸음걸음이 있었을게요. 아니 이것만이 전부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것 없는 어떤 것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요.

내 가슴에 패이는 상처를 보면서, 나는 젊은 학생들의 통곡소리를 듣는 것이라오. 저 소리 죽인 흐느낌 말이요.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맘인데, 이렇게 약한 소리만 할 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와지는구료. 하지만 말이요, 이런 흔들림에 대한 고백 속에서 어김없이 다시 일어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일 것이요. 이것을 굳게 믿고 싶은 바이요.
(주석 17)


주석
13> 제임스 에머슨 지음, 송우용 감수, <고난, 행복한 선택>, 22쪽, 가치창조, 2002.
14>
<이제 다시 일어나>, 184~185쪽.
15> 앞의 책, 185쪽.
16> 앞의 책,
187쪽.
17> 앞의 책, 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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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

012/08/13 08:00 김삼웅

 

김근태가 서울구치소에서 부인에게 쓴 많은 편지 중 마지막 시기는 1986년 1월이다.
이후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일곱 살짜리 아들 병준이가 크레용으로 써 보낸 ‘우리 아버지’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자기 아버지를 그리면서 쓴 글이다.

김근태의 아버지는 여늬 아버지들처럼 초라하고 소심한 분이셨다. 어릴적에 아버지가 3ㆍ1운동 당시 읍내 시장에는 못나가고 뒷동산에 올라가 혼자 만세를 불렀다는 말을 듣고는 심약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이제 30대 후반이 되어 감옥에 앉아서 20년 전에 떠난 아버지의 그 따뜻했던 품속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했던 자신의 철부지를 자책한다.

20년 동안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가셨던 우리 아버지가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해가 벌겋게 공중에 떠 있던 어제 나에게 되돌아오고 계셨다오. 아니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그 삶의 고뇌를 똑똑히 보게 된 것일 게야. 고난과 치욕의 이 겨레 20세기의 한 귀퉁이에서 당신에게 몰아쳐 왔던 그 절망과 부담에 짓눌려 겁먹은 채 살아가셨겠지. 버티느라고 부르르 부르르 떠시면서 말이요. 버티는 것이 힘겨워 몸에 늘 미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가려 주느라고 속으로 미열을 내며 앓으셨던 그런 삶이였을 거요. (주석 10)

김근태는 작고한 아버지를 그리면서 일곱 살 아들과 네 살짜리 딸 (병민)의 모습이 겹쳤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족이나, 해방 뒤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민주화ㆍ통일운동가의 가족은 매 한가지였다. 일제 때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온갖 감시와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고, 해방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좌경ㆍ용공 ㆍ간첩ㆍ종북’으로 색칠당하면 온전한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딸 병민이는 1982년에 태어났다.

 


난 사실 병준이, 병민이 아버지이어야 하는 것에 은근히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소. 그저 휘청거리면서 버텨 나가는 이 모습에서 어떤 것을 그 애들은 배우게 되고 흉내내게 될 것인지 말이요. 혹시 별 볼일없는 삶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하며 실망할 지 모르는 것도 조바심칠 일이지만, 그 애들 가슴에 맺힐 지 모르는 상처들, 검은 그림자들의 드리움, 그것이 걱정이 된다오.

그러나 병준이 엄마의 따슨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지. 애들이 그 속에서 몰아쳐 올지 모르는 어떤 것도 견뎌 낼 것을 나는 믿는 것이오. 그러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또 그 애들 자신의 삶으로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주석 11)

김근태는 1986년 6월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양심수들은 특히 권력이 ‘국사범’처럼 지목하는 수인들은 감옥을 자주 옮긴다. 그들의 용어대로 ‘불순분자’들과 차단하기 위해서다. 또 자주 이감을 시켜서 ‘신참’으로 고통을 주려는 보복성도 따른다.

김근태가 서울구치소에서 이감하는 6월 3일 같은 병동에 수감되었던 문익환 목사는 면회온 인재근에게 쪽지 하나를 은밀히 전했다. 다음의 시였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밤새 죽은 듯이 쓰러져 있다가
아침이면 꿈틀꿈틀 일어나 앉아
눈을 빛내던 방이란다.

해파리처럼 풀어진 몸
인재근의 고운 얼굴 아른거리지 않았으면
물거품처럼 아주 풀어졌을 몸으로
죽음을 깔아뭉개어 되살아난
근태의 방이란다.

민주주의의 손톱끝에만은 남아있어
곤두박히는 허무 나락을 쥐어뜯으며 솟구친
서울구치소 병사 10호실 근태의 방이란다.

1986년 5월 31일 토요일 근태를 이감시키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고 벽돌을 새로 페인트칠을 했단다.
그러나 어쩌리요 창문틈에 남아 있는 근태의 손톱자국을
철창에서 풍겨오는 그의 입김을
푸른 하늘에서 우뚝 솟아나는
근태의 웃는 얼굴을.

눈만 감으면 나는 바람으로 풀어져 신나게 펄럭인다.
근태가 휘두르던 민중의 깃발, 승리의 깃발로.
(주석 12)

영등포구치소에서 다시 ‘신참’이 된 김근태는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여름 뙤약볕에서 겹 옥고를 치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기 어려웠던 그에게 4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수인이 되어 잦은 이감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주석
10> 앞의 책, 183쪽.
11> 앞의 책, 184쪽.
12> 앞의 책,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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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2 08:00 김삼웅

 

 

네번째 편지는 3월 20일 역시 서울구치소에서 쓴 것이다.
이 날은 온종일 비가오고, 빗속에 싸라기 우박이 섞여 쏟아졌다. 편지 제목을 <겸재(謙齊)를 생각하며>라 달았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 ~ 1759)은 사실주의 기법으로 한국의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김근태는 눈 비오는 날 감옥에서 왜 겸재를 떠올리며 아내에게 편지를 썼을까.

거리에 캐롤 울릴 때쯤이었을까. 눈덮힌 산 그 아래 뾰족 첨탑 보이고 사슴이 끄는 썰매 탄 산타 할아버지 눈에 어른거렸네, 언제부턴가 생활 속으로 슬쩍 들어와 버린 카드 속 그림 닮은 그런 산, 그런 건물, 썰매, 그런 아이들 상상하였네.

난 그만 실소하고 말았지.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로렐라이 언덕,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어디쯤 있을 황태자 첫사랑의 그 맥주집에 몸살나는 이 시대 교양인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 몸 자지러지는 저 대중들. 그 중에 하나일까, 나도. 겸재(謙齊) 생각했지, 부끄러워 하면서.
(주석 7)

김근태는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중국적 봉건질서에 예속되어서 화가는 상상속의 중국의 산과 강을 그리고, 식자들은 공맹(孔孟)의 길에서 허우적거릴 때 펄펄 살아 뛰는 우리 강산을 유려한 필치로 그린 조선화가 겸재를 그리워한다.

오늘은 어떤가. 혹시 진서 대신 원서가, 한문대신 영어가, 중국 대신 서양이 또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꼬부랑 관념과 감수성, 글씨 몇 개 아는 지식인들 지배계층에 끼여들고 그렇게 제도화되어 있고, 그 아랫사람들 열심히 흉내내고, 흉내바람은 사회적 강제가 되고,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여.

여기에 끼지 못하는 건 처벌이고 소외인 거야. 세련됨, 모던함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 그러기 위한 훈련, 학습, 교양 갖으려고, 한 마디로 간판 따려고 우리 모두 서둘러 왔던 것 같지. 서양의 문화, 문물, 예술 모두 암암리에 보편적인 것 되고, 특히 진정한 그 내용이나 진리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 어떤 형식이나 약간의 흉내가 오히려 기승 부려 진짜 인류의 보편적 발전방향은 목졸라 버리는 것 같고, 그것으로써 우리 자신의 주체성과 주인의식은 잊어버려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성 구현을 위한 발전방향과 진리는 서양의 특수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리고, 역사는 반복할 것인가.

수치스럽게도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며 더욱 중국적이었던 조선, 또 다시 개명한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자신을 서양보다 더욱 서양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진리 냄새피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이 시대에.
(주석 8)

김근태의 이 서한은 그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을 가늠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검열자의 시선을 감안하면서 쓴 것임을 생각하면, 운동가ㆍ투사 김근태의 깊은 내면의 일단을 살피게 한다. 주인의식을 상실한 채 ‘민족허무주의’에 빠진 지식인들을 김근태는 조선시대 식자들과 대비하고 있다.

재판에 임하면서 참 묘한 느낌이 들었었다오. 그 중에 하나가 판검사, 변호사들과 만났을 때 나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동류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지. 말씨나 절차 그것에서도 상호 느낄 수 있었고 말이오. 물론 서 있는 입장이 다르면서도.

우린 한국 사회의 지배계층임을 아니 적어도 상류계층임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러다가 구치소로 돌아와 특히 자신의 감방에 들어가 갇혀질 때면 최하 천민계층으로 급락하는 것이었소. 부자유 그건 능멸받아 마땅한 것이오. 옛날 노예가 살아 있는 도구라고 짓밟혔던 그림자 아직도 여기에 살아 있는 거요. 여하튼 이런 차이를 반복하여 느끼면서 나는 사실 꽤 당황하였다오. 정서적으로 묘한 혼란도 오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얄팍한 마음도 생기고 말이오.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고, 이것 모두 쓰잘 데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요.
(주석 9)


주석
7> 앞의 책, 179~180쪽.
8> 앞의 책, 180~181쪽.
9> 앞의 책, 181~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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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서울구치소 병사 10호실에 수감되어 항소심 재판을 받으면서 1986년 1월 6일 부인 인재근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검열 때문에 깊은 속내는 털어놓을 수 없지만,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오는 곳이 아니라 여기는 가는 곳이 틀림없소. 쟂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요,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식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고.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 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주석 3)

김근태는 당시 한참 유행중이던 대중가요 ‘사랑의 미로’를 흥얼대면서 아내를 생각하는 연모의 마음을 담았다. 더불어 결기를 보인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 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 가히 짐작이 되오. 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오.
  (주석 4)

서울구치소 검열관은 김근태의 옥중서한의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를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걷게 되는 문장으로 ‘오독’하고 그대로 내보냈다.

이 대목은 건강상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김근태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양심수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김근태의 이런 뜻을 헤아린 민청련은 1987년 9월 그의 고문 실상과 옥중기록을 묶어 책으로 내면서 <이제 다시 일어나>를 제목으로 뽑았다.

김근태는 최진희가 불러 히트한 ‘사랑의 미로’를 열심히 연습하여 아내의 생일날 면회를 왔을 때 접견실에서 이 노래를 불러 선물하였다. 외국의 경우는 몰라도 한국에서 양심수가 아내의 생일선물로 노래를 불러준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와 관련 뒷날 김근태 부부의 인터뷰 한 대목이다.

김근태 : 이근안 씨한테 고문을 받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윤동주가 이렇게 해서 옥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시인도 아니고 여기서 옥사하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며 중심을 잡았지요. 아내에게 “나 지금 괜찮다. 흔들리지 않는다”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그 노래가 약간 트로트 비슷해서 나한테는 통 안 맞는데 그땐 그게 기분이 또 맞더라구요. 인재근은 깔깔대고 웃고….

인재근 : 그때는 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았어요. 노래도 못하면서 노래 선물을 한다고 그러냐면서….
(주석 5)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가족 면회와 편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봉함엽서에 편지 쓰는 것이 그나마 행복한 순간이다.

김근태는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두 번째로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쪼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측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비켜설 수 있게 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오.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를 핥는 것이었다오. 그러나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나는 이 때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하였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하였던 것이오.
(주석 6)

김근태는 이 편지 말미에서 감옥 안 마루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쥐들의 ‘사랑의 언어’에서, 자신의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리게 된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를 확인했다고 썼다.

주석
3> <이제 다시일어나>, 175쪽.
4> 앞의 책, 176쪽.
5> <레이디경향>,
2005년 12월호.
6> 앞의 책,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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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0 08:00 김삼웅

 

사마천은 <사기>의 <임안(任安)에게 드리는 글>에서 사람은 “지면에 옥(獄)을 그려놓아도 그것을 피하고,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를 만들어도 그것과 대면하기 싫어한다”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이승의 감옥이 저승의 지옥”이란 말을 남겼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불의의 시대에 의인이 갈 곳은 감옥”이라 말하고, 함석헌은 “자유는 감옥에서 새끼를 친다”고 설파하였다.

감옥은 묘한 곳이어서 강한 사람은 더욱 강하게 만들고, 약한 사람은 허물어지게 한다.
감옥은 육신이 묶여도 생각까지 묶을 순 없어서 인류 지성사에 샛별과 같은 많은 명저들을 남겼다. 볼테르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앙리아드>를 쓰고, 존 번연은 베드포드 군형무소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다. 세르반테스는 왕실 감옥에 갇혀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하고, 마르코 플로는 포로로 갇혀 <동방견문록>을, 오 헨리는 옥중에서 <점잖은 약탈자>를, 네루는 <세계사편력>을 썼다. 이밖에도 사례를 들자면 수없이 많다.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니다. 김대중은 진주감옥에서 <옥중서한>을, 신영복은 전국의 여러 감옥을 전전하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정수일은 비슷한 처지에서 <소걸음으로 천리길을 가다>는 옥중기(편지)를 남겼다. 하나같이 옥중문학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도 문익환ㆍ김남주 등 수없이 많다.

감옥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유배문학, 망명문학도 지성사의 보배로 남는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추사 김정희의 불멸의 그림 한 폭 <세한도>는, 정작 당사자들의 피눈물과 고투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소중한 민족문화 유산으로 전한다.

서울구치소의 수인이 된 김근태는 차분한 마음으로 옥살이를 각오했다. 고문경찰과 조선총독부의 사법부, 나치의 사법부, 유신체제의 사법부와 다르지 않는 5공체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검ㆍ판사들의 행위에 분노가 치밀고, 고려 최씨 무신정권기 지식인들처럼 글을 쓰는 어용언론ㆍ지식인들에 하염없는 연민을 느끼면서, 그래도 성서의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으면서 옥살이를 시작했다.

육신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망가졌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었다.
자신이 갇힌 방 근처 어딘가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뒤에도 조봉암 선생과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날조된 인혁당사건 희생자 등 한을 품고 이곳에서 처형당한 선열들에 비하면 행운이라 여기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독일 출신으로 반나치 저항운동을 하다 국적이 박탈되고 긴 망명생활을 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브레히트가 이 시를 쓴 시기와는 42년의 시차가 있었으나 처지와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주석 1)

브레히트가 이 시에서 지적한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슈테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콕흐 등이다. 모두 반 나치 저항지식인들이다.

김근태의 고문폭로는 전체 민주화운동권이 노선을 초월하여 정부의 용공조작에 맞서 재결집하게 되고 더욱 강력한 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재판을 거쳐 서울구치소에서 수형생활에 들어간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사회는 5공 파쇼정권 타도를 위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김근태는 이를 수용하려 하지 않겠지만, 그가 뿌린 민주화의 씨앗이 청년ㆍ학생들을 움직이게 하는 큰 역할을 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가 결성되고, 6월 24일 효성물산ㆍ가리봉전자ㆍ선일섬유 등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동맹파업, 11월 4일 서울대 등 시내 7개 대학생 14명의 주한 미상공회의소 점거농성, 11월 18일 14개 대학생 191명의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결성, 1986년 2월 12일 신민당과 민추협 대통령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 돌입, 2월 26일 서울대생들 졸업식장 집단퇴장, 3월 17일 박영진 열사 분신, 3월 29일 구국학생연맹 결성, 4월 28일 이재호ㆍ김세진 열사 분신, 5월 3일 인천항쟁,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 6월 4일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사건 등 파쇼 정권의 만행과 이를 타도하기 위한 거대한 민중저항이 전개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막장으로 치달았다. 5공의 인권유린의 한 상징이 된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남은 자’ 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직장인ㆍ가정주부들까지 분노의 대열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인천 5ㆍ3항쟁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 진영은 다양한 종류의 헌법개정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정권안보 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5ㆍ3항쟁의 배후를 색출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구속ㆍ수배ㆍ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권인숙은 1985년 6월 4일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조사관들은 권인숙에게 공문서위조 혐의 외에 인천 5ㆍ3항쟁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문귀동 형사는 권인숙을 수사계 수사실로 데리고 가 6월 6일과 7일에 걸쳐 조사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귀동은 성고문과 협박과 공갈을 하였다.
(주석 2)

비교적 완곡하게 기술한 내용이지만, 이날 문귀동은 용납할 수 없는 성고문을 자행하였다.
5공 수뇌부의 도덕적ㆍ정치적 타락상이 일선 경찰에 의해 여과없이 자행된 것이다. 남영동의 고문기술자들과 한 통속의 타락 정권의 하수인들이었다. 권인숙은 교도소 면회 과정을 통해 성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곧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성고문 사실을 부정하면서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타락한 경찰관들의 악행도 문제이지만, 이를 은폐하면서 민주화운동세력을 매도하는 검찰의 언동에 국민은 더욱 분개하였다.


주석
1> 브레히트 시선, 김광규 옮김,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17쪽, 한마당, 1985.
2>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461쪽.

 




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9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정연한 논리와 감동적인 진술은 그러나 군부정권의 하수인격인 판ㆍ검사들에게는 우이독경이 되었다. 그들은 이같은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국민이 알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 넘기면 책임을 면하고, 승진도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서성 판사는 김근태에게 국보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군”, “창피한 줄 여기시오”라는 방청석의 야유를 귓전에 흘리면서 총총 자리를 떴다.

판사의 유죄판결의 이유 중에는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 책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검찰이 <내외문제연구소>라는 관변 단체의 김영학에게 이 책의 감정을 의뢰하고, 그의 감정서를 바탕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김영학은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 등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기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서, 돕의 저서가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한국이었다. 모리스 돕은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이론경제학, 경제사, 사회주의경제학, 후진국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저작을 발표한 세계적 학자다.

김근태는 항소심을 거쳐 5년 장기수가 되어 서울구치소에서 수형생활에 들어갔다. 전두환 군부독재가 마지막 독기를 뿜어내는 1986년 봄이었다. 김근태는 인간도살장 남영동에서 풀려나 서울구치소에 수감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설마 "5년 장기수"가 될 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인왕산 언덕배기에 피어 있는 노랑 개나리와 검붉은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감상에 젖었다. 그는 서정시인이었다.

얕은 골짜기 여기저기 띄엄띄엄 응달진 곳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 노랑천지 속에 얼핏 보이는 저것은, 불그스레한 그 번짐은 무엇일까. 이제는 까맣게 멀어져 간 4월의 함성이 이 봄에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는가. 부릅 뜬 눈으로 아직은 절대로 잠들 수 없는 피맺힌 5월이, 아스팔트에 낭자하게 쏟아졌던 피, 그 피가 은연중 배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작년 9월. 아! 그 남영동에서 내가 토해냈던 울부짖음의 파편이 튀어서 저리 붉게 피어나는가. 물고문에, 불고문에 바스라졌던 내 넋의 한 조각이 다시 새롭게 물올라 한 무데기 진달래로 피었는가. (주석 18)

김근태가 군사정권과 온몸을 던져 싸우며 재판을 받고 있을 즈음 그가 산모 역할을 했던 민청련의 <민주화의 길> 제12호에는 강성준이 "다시 우리 시작하자 김근태 형 재판에 부쳐"란 시를 실었다.


기나긴 바람타고
곤고한 발걸음
여기 이렇게 모여들었구나
아직 살아 있음을 더듬어 보는
여윈 손과 부르튼 입술
다하지 못한 사랑 그리워
서로 안고 뒹구는 구나
어디쯤 왔을까
얼마나 가야할까
짓이겨진 육신 높다랗게 걸어두고
남영동의 그 비명만 이리로 보낸
아름다운 이여
우리 어린 자식들의 웃음소리
언제나 되찾을까.

그러나 우리
살아 있음을 서로 부끄러워 함으로,
죽음을 건너 그이가 건진
노동의 힘찬 망치질 소리
우리 가슴 다긋히 두들김으로
해방의 모진 뚬은
곤고한 발길을 멈추지 않는구나
지친 깃발들 일으켜 세우는 구나

다시 시작하자
부르튼 입술 부벼대며
다시 시작하자
짓이겨진 육신 서로 안아 세우며
다시 시작하자
다시 우리 시작하자
(주석 19)

주석
18> 앞의 책, 103쪽.
19> <민주화의 길>, 제12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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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

012/08/08 08:00 김삼웅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것은 정치군부로서, 국민은 정치군부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른바 30인 위원회 등으로 해서 민주화운동이 지도자, 국민을 협박하고 다시 70년대 긴급조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던 저 학원안정법 망령 속에서 우리는 정치군부의 국민들에 대한 협박을 명백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정치군부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중지해야만 한다.
민주화운동은 소수 개인 몇 사람에 의해서 조속히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올바른 방향일 뿐 아니라 이러한 운동을 더욱 격화시키고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정치군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정치군부는 이제 본래 자기 집으로, 군대로 병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민주화의 최소한도의 필요조건은 군부의 정치적 중립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민간권력의 창출이 요청되는 것이다. 정치군부가 자기의 특권적 이해관계를 계속 주장하는 한 이러한 자신의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 모든 혼란의 가장 중심적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군부는 더 이상 국민의 군대를 출동시켜서, 이른바 지휘계통을 발동시켜서 국민의 뜨거운 민주화 열정을 그리고 국민의 붉은 가슴에, 빈가슴에 총칼을 겨누는 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국민의 군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군대이다. 그리고 군대의 대부분의 구성원은 정치군부가 아니라 국민의 형제 자매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시 국민의 군대를 출동시켜서 국민의 맨가슴에 적대행위를 명령한다면 군대는 복종하지 않고 저항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하였으며,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두 다시 반성해야 되고 이러한 민주화 실현을 위해 그 누구도 면제되고 제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화가 이룩되는 날, 우리는 “나는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당신은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서로 반문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5년, 해방이 된 사회에서 어느 친일도배는 “잔악한 일제 치하에서 일제에 부역하지 않은 사람이 그 누가 있느냐?”고 얘기했는데, 민주화가 실현되는 날 우리는 이러한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결단하고 실천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먼저 우리는 단순한 심정적 이해와 동조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모두가 우리의 의무, 책무이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국민 모두는 실천대열에 나서야 한다. 본인은 체포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저 시켜서 하는 거죠. 밥을 먹고 살려니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고충을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등의 얘기를 들었다. 바로 그런 속에서 정치군부는 자신의 이익과 이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더 이상 그러한 얘기가 나오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국민 각계각층에서는 각자 자기 있는 곳에서 정치군부의 퇴진과 민주제 개헌을 위한 조직과 선전에 참여해야 한다. 민주화는 몇몇 전위대열에 선 운동가에게 돌아가는게 아니라 모두의 자유와 안전을 획득하는 길이므로 모두의 의무이며, 운동과 조직에의 참여가 유일한 길이다.

셋째,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불행과 고통에 대해 서로 격려하여 낙오되지 않게 해야 한다. 구치소에 많은 사람이 투옥되어 있는데 앞으로 전국의 교도소가 민주화운동에의 참여로 가득 찰 지도 모르며 가득차는 날 민주화가 실현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단하고 일어서야 한다.

끝으로 미국 행정부가 80년 5월의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고를 보내야 한다.
80년 5월의 미국의 정책은 명백한 과오이며 우리 사회 민주화 실현을 저해하는 일이었음을 전달하고 미국에 있는 양심적 인사들과 연대, 지원하여 공통의 목표실현을 확인해야 한다.

이제 본인은 징역을 산다.
높은 담과 부자유, 징역의 외로움과 슬픔을 뚫으며 살 것이다. 쇠창살 너머 하늘의 별에서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만나며 이 징역을 살 것이다. 85년 9월 정치군부의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징역을 살 것이다. 80년 5월 부릅 뜬 눈으로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아스팔트에 쓰러졌던 망월동 시민들의 원혼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징역을 살 것이다. 이 징역 속에서 민주화의 그날을 꿈꾸며 징역을 깨면서 살 것이다. (주석 17)

주석
17> 앞의 책, 164~171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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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6장] 엉터리 재판 5년 징역형 선고

2012/08/07 08:00 김삼웅

 

엉터리 재판은 진행되어서 1986년 3월 16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178호 법정에서 1심 공판이 열렸다. 여전히 방청인은 제한되고, 언론은 외면하거나 정부발표문만을 받아 쓰는 상태였다.

김근태는 최후진술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다른 기록은 훔쳐가고 날조해도 법정의 최후진술만은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군부의 하수인이 된 법원이 양심껏, 소신껏 판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긴 감옥살이를 각오하면서 당당하게, 준열하게 진술하였다. 결기 넘치는 진술이었다. 주요 부문을 발췌한다.

본인의 이 사건은 두 개의 잘못된 가정과 정치군부의 보복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오늘날의 민주화 열기가 김근태와 민청련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둘째, 광범하게 발생하고 있는 정치군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배후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은 분명히 김근태일 것이라는 단정적인 가정하에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만들어 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와 은폐행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본인의 이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본인의 사건과 고문 및 은폐행위를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면, 또한 실체적 진실과 이러한 범죄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시대를 10여년 이상 지내며 살아왔는데, 당시 독재자들은 이른바 국가안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와 감옥, 고문장으로 보냈다. 그 때 법원은, 법관은 이를 합리화시키고 추인, 협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지난 80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암담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좌절과 공포로 보낼 때도 정치군부는 또 다시 이른바 국가변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로 보냈으며, 그 때도 법원과 법관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추인하고 협력하였다.

85년 중반 이후 본인이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200여명 이상의 많은 수인들로 꽉 찼는데, 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본 구치소에 구속된 것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서이다.

본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웠는데, 그런데 그 분들 중의 일부가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인해 좌절하고 일제의 폭거에 침묵하고 나아가 그들의 주구배가 된 것에 인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의심이 갔었다.


또한 70년대 암흑과 같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옥되고 박해받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당시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왜 극복하지 못할까?’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과 그 후의 마음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지배자들의 조직적 폭력과 박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며 용기 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본인은 이러한 70년대에 한번 투옥되면 원 스타, 세번 투옥되면 쓰리 스타가 되는,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꼭 마땅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박해와 폭력적 탄압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 인간은 정치군부의 폭력적 탄압에 굴복하고 좌절할 수도 있다. 본인은 체포된 이래 수많은 굴종을 강요당했다. 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아니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또 다시 저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다시 지금 본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에 다시 민주화 대열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

그러나 김근태가 민주화 대열에서 당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서 열 명 그리고 새로운 백여 명의 민주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창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민주화 운동은 이미 폭력적 탄압 아래서 굴복하고 좌절해 가는 사람 숫자를 열 배, 스무 배로 보충하고도 남을 충분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배후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80년 5ㆍ17과 광주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새로운 민주화 열기를 고조시키고 물러설 수 없는 민주화 실현의 몇 단계를 진행해 온 것을 봐서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군부는 이른바 국가안보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자신들의 특권유지와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을 비운 채 서울로 진격했으며 국민의 군대의 보안을 유지해야 될 보안사령부가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적 질서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장치로 기여하고 역할을 한 정치군부가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정치군부는 헌정질서를 얘기할 자격이 없다. 참모총장 공판과 국방부에 총질을 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기본적으로 유린한 자들이 얘기하는 헌정질서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군부의 특권에 대한 보호를, 정치군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짓밟고 오직 굴종,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정치적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


세번째, 정치군부는 이른바 법의 지배와 폭력적 파괴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80년 5ㆍ17 이후 저 광주에서 빈손, 맨주먹과 맨가슴의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총탄을 퍼 부은 자들이 어떻게 법과 평화의 지배를 애기할 수 있겠는가?

네번째, 정치군부는 민생의 문제나 경제건설 문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
79년 12.12, 80년 5ㆍ17 이후 현 정치군부는 전대미문의 권력형 부정부패를 점철시켜 왔고, 이른바 장영자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부정부패 속에 휩싸여 왔으며, 이외에도 갖가지 소문과 풍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반민중적인 작태가 진행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민생문제와 경제건설을 위해서 민주화를 유예하고 연기해야 된다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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