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7 08:00 김삼웅
입주한 다음날부터 사무실은 안기부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가 퇴거를 요구해왔다. 건물주는 집행부가 퇴근하고 나면 집기를 아스팔트바닥에 끌어내고, 다음날 집행부는 다시 들고 올라가는 일이 여러날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종로경찰서에서 현판을 떼어가고 사무실 입구를 봉쇄하면서 회원들과 충돌하였다. 경찰은 출입하려는 회원들을 폭력으로 막고 회원들은 경찰의 불법적인 처사에 강력히 대항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해찬 상임위 부위원장이 두 차례나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달 여의 공방 끝에 경찰이 철수하면서 민청련은 사무실을 확보하고 정상적인 업무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민청련은 사무실이 경찰에 노출되면서 상임위원회의 사무실을 별도로 마련하였다.초기에는 이해찬이 운영하는 출판사 사무실을 이용하다가, 서강대학교 앞 철길 건너에다가 임시사무실을 얻었다. 이 사무실도 나중에 수사기관원들이 집행부 간부들을 미행하여 알아낸 다음 심야에 침입하여 서류를 뒤지고 훔쳐가는 일이 벌어졌다.
김근태는 수사기관의 끊임없는 도청과 미행에 시달리면서도 민청련을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위기의 상황일수록 충분한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중의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당시 민청련에서 활동했던 박선숙(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
김근태 의장과 지도부는 공개하되, 의사결정구조는 비공개였어요, 비공개 의사결정구조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하되, 정치적 탄압은 공개된 지도자가 감당하도록 만든 조직이지요. 한번은 민청련 지도부 선임을 놓고 77학번, 78학번 막내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김근태 의장이 토론을 주재하여 무려 17시간 동안 회의한 일이 있어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설득의 힘을 보여준, 착하고 맑고 민주적인 사람이었죠. 민청련 선배들은 말할 자유도 주고, 말하지 않을 권리도 줬어요. (주석 12)
민청련은 공개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운동을 전개하였다. 1983년 11월 5일 사무실에서 외부인사 초청 다과회를 갖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을 반대하는 등 민주화를 향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 대한 제언과 민주청년의 자세“를 발표하려 했으나 기관원들의 저지로 인근 음식점으로 옮겨 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김근태가 초안을 잡고 집행부의 토론을 거쳐 마련되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우리에게는 자신이 있습니다. 민주화는 세계사의 대세에 합치되며 현상적으로는 끊임없이 패배하지만 밑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쌓여가는 민주 민중역량 발전의 확인을 통해서 또한 우리에게 있는 도덕적인 정당성으로 자신이 있습니다.
1. 미소는 신냉전체제를 구조화시키면서 인류의 목숨을 담보로 전율할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2. 미소의 신냉전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켜 민족의 전멸을 가져 올 전쟁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3. 현군사독재정권은 과연 민주화, 평화적 전권교체를 할 의사가 있는가?
4. 한국의 국민경제는 대외종속적 특권적 불평등 구조를 갖고 있다.
5. 한국의 문화는 독재권력에 의해 문화제국주의에의 굴복과 노예화의 방향으로 조장되고 있다.
6.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은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재권력의 지원을 위한 것인가?
7. 민주화운동의 실천방안과 ‘우리의 제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화를 위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주석 13)
민청련은 11월 11일 한국기독학생총회연맹, 한국기독청년협의회와 공동명의로 <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 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명동성당에서 황정하의 추도식을 올렸다. 11월 16일 서울대학교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황정하 학생이 돌연히 사망한데 대한 성명서이고 추도식이었다. 민청련은 황정하 추모카드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이것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유인물을 판매하는 첫 시도였다.
민청련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안기부의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안기부는 집행부 간부들을 차례로 만나 협박하고 탈퇴를 종용하였다. 이들이 노리는 핵심은 김근태였다.
안기부에서 가장 만나려고 시도한 사람은 아무래도 김근태 의장이었다.
안기부에서 담당을 한 이는 성용욱 수사1국장이었다. 김근태 의장은 계속 만나주지 않다가 줄기찬 안기부의 협박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심리적인 부담을 감수하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11월 28일 저녁 약속장소인 신라호텔로 간 김근태 의장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언쟁이 붙어 김근태 의장이 상을 엎으며 싸움이 붙었는데, 나중에 안기부 최 수사단장이 병원에 찾아와서 대신 사과하고 치료비를 물어줬다. (주석 14)
주석
12> 김선숙, <한겨레>, 2012년 6월 9일치, <김두식의 고백>.
13> <민주화의 길>, 제1호, 17쪽.
14>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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