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7 08:00 김삼웅

 

 

5공체제에서 종교단체를 제외한 최초의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청련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입주한 다음날부터 사무실은 안기부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가 퇴거를 요구해왔다. 건물주는 집행부가 퇴근하고 나면 집기를 아스팔트바닥에 끌어내고, 다음날 집행부는 다시 들고 올라가는 일이 여러날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종로경찰서에서 현판을 떼어가고 사무실 입구를 봉쇄하면서 회원들과 충돌하였다. 경찰은 출입하려는 회원들을 폭력으로 막고 회원들은 경찰의 불법적인 처사에 강력히 대항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해찬 상임위 부위원장이 두 차례나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달 여의 공방 끝에 경찰이 철수하면서 민청련은 사무실을 확보하고 정상적인 업무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민청련은 사무실이 경찰에 노출되면서 상임위원회의 사무실을 별도로 마련하였다.초기에는 이해찬이 운영하는 출판사 사무실을 이용하다가, 서강대학교 앞 철길 건너에다가 임시사무실을 얻었다. 이 사무실도 나중에 수사기관원들이 집행부 간부들을 미행하여 알아낸 다음 심야에 침입하여 서류를 뒤지고 훔쳐가는 일이 벌어졌다.

김근태는 수사기관의 끊임없는 도청과 미행에 시달리면서도 민청련을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위기의 상황일수록 충분한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중의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당시 민청련에서 활동했던 박선숙(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

김근태 의장과 지도부는 공개하되, 의사결정구조는 비공개였어요, 비공개 의사결정구조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하되, 정치적 탄압은 공개된 지도자가 감당하도록 만든 조직이지요. 한번은 민청련 지도부 선임을 놓고 77학번, 78학번 막내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김근태 의장이 토론을 주재하여 무려 17시간 동안 회의한 일이 있어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설득의 힘을 보여준, 착하고 맑고 민주적인 사람이었죠. 민청련 선배들은 말할 자유도 주고, 말하지 않을 권리도 줬어요.
(주석 12)

민청련은 공개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운동을 전개하였다. 1983년 11월 5일 사무실에서 외부인사 초청 다과회를 갖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을 반대하는 등 민주화를 향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 대한 제언과 민주청년의 자세“를 발표하려 했으나 기관원들의 저지로 인근 음식점으로 옮겨 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김근태가 초안을 잡고 집행부의 토론을 거쳐 마련되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우리에게는 자신이 있습니다. 민주화는 세계사의 대세에 합치되며 현상적으로는 끊임없이 패배하지만 밑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쌓여가는 민주 민중역량 발전의 확인을 통해서 또한 우리에게 있는 도덕적인 정당성으로 자신이 있습니다.

1. 미소는 신냉전체제를 구조화시키면서 인류의 목숨을 담보로 전율할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2. 미소의 신냉전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켜 민족의 전멸을 가져 올 전쟁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3. 현군사독재정권은 과연 민주화, 평화적 전권교체를 할 의사가 있는가?
4. 한국의 국민경제는 대외종속적 특권적 불평등 구조를 갖고 있다.
5. 한국의 문화는 독재권력에 의해 문화제국주의에의 굴복과 노예화의 방향으로 조장되고 있다.
6.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은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재권력의 지원을 위한 것인가?
7. 민주화운동의 실천방안과 ‘우리의 제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화를 위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주석 13)

민청련은 11월 11일 한국기독학생총회연맹, 한국기독청년협의회와 공동명의로 <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 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명동성당에서 황정하의 추도식을 올렸다. 11월 16일 서울대학교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황정하 학생이 돌연히 사망한데 대한 성명서이고 추도식이었다. 민청련은 황정하 추모카드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이것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유인물을 판매하는 첫 시도였다.

민청련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안기부의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안기부는 집행부 간부들을 차례로 만나 협박하고 탈퇴를 종용하였다. 이들이 노리는 핵심은 김근태였다.

안기부에서 가장 만나려고 시도한 사람은 아무래도 김근태 의장이었다.
안기부에서 담당을 한 이는 성용욱 수사1국장이었다. 김근태 의장은 계속 만나주지 않다가 줄기찬 안기부의 협박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심리적인 부담을 감수하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11월 28일 저녁 약속장소인 신라호텔로 간 김근태 의장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언쟁이 붙어 김근태 의장이 상을 엎으며 싸움이 붙었는데, 나중에 안기부 최 수사단장이 병원에 찾아와서 대신 사과하고 치료비를 물어줬다.
(주석 14)


주석
12> 김선숙, <한겨레>, 2012년 6월 9일치, <김두식의 고백>.
13> <민주화의 길>, 제1호, 17쪽.
14>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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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6 08:00 김삼웅

 

 

민청련 조직의 준비팀은 누구를 대표로 세울 것인가를 두고 여러 사람을 접촉하였다. 안양로ㆍ조성우ㆍ장영달ㆍ조영래ㆍ장기표ㆍ최민화ㆍ장명국 등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거론되었다. 모두 유신체제에서 학생ㆍ청년운동에 앞장서온 인물들이었다. 여러날 동안의 검증과 토론, 거론 인사의 접촉 끝에 김근태를 내정하였다.

공개청년단체 준비팀이 대표를 선정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둔 점은 노동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 현장과의 유기적 연계성이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노동운동 등의 언더조직 연계가 안되면 대중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략) 대표 논의에서 김근태라는 이름이 계속 부상되자, 이해찬ㆍ이범영 등이 김근태를 직접 만나 부탁하기에 이른다. 김근태는 당시 인천산업선교회에 적을 두고 노동운동을 지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공개운동을 뒤에서 지원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양쪽에서 모두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근태는 처음 제의에서는 대표직 수락을 사양했다. (주석 7)

김근태는 민청련 대표를 맡아달라는 준비팀의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우선 그동안 어렵게 피해온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렵고, 자신에게는 과분한 자리라는 것이었다.

그 사양의 논거는 두 가지 이유였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는 학생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근 2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수배상태로 있었지만 정작 감옥은 가지 않았는데 공개운동판에 나가면 감옥을 넘나들어야 한다는 인간적 두려움이 있었고, 또한 전 민주화운동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는 과분한 자리라는 생각에 선뜻 수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표직을 사양한 김근태에게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보다 선배인 조성우, 최민화, 이명준까지도 가세하여 대표직을 수락할 것을 간청한다. 그리고 결국 김근태는 대표직을 수락하는데, 이는 매우 친한 후배였던 최민화의 강력한 주장이 가장 영향이 컸다고 본인은 술회하고 있다.
(주석 8)

2ㆍ8독립선언이나 3ㆍ1독립선언서의 서명은 고난을 각오하는 길이었다. 특히 대표자의 경우는 감옥 이상을 각오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누구나 뜻이 있다고 하여 그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위치였다. 김근태는 중의에 따라 “민주화운동 역량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조직운동으로 기반을 잡아가는 단계” (주석 9)의 민청련 대표에 피선되고, 예상했던 대로 혹독한 고난이 뒤따랐다.

민청련 결성식날 오전 준비팀은 거사를 앞두고 이승만 독재와 싸우다 희생된 4.19 민주인사들의 희생정신을 따르기를 다짐하고, 여기서 멀지 않은 산속에 자리를 잡은 무명독립군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독립운동과 4월혁명의 정신으로 싸우겠다는 행동과 마음은 비장감이 서렸다.

창립대회는 대회가 마칠 때까지 경찰이 참가자들의 입장을 막았을뿐, 대회는 방해하지 않았다. 사전에 집행부에서 경찰당국과 협상하기를 집행부 임원들이 행사 뒤 자발적으로 연행당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1919년 태화관에서 3ㆍ1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들이 자진해서 일경에 연행되었듯이 민청련 집행부는 행사 뒤 자발적으로 연행에 응했다. 연행된 19명 중 김근태와 장영달ㆍ박우섭ㆍ연성만 등 6명은 집시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날 민청련 결성대회에는 지도위원으로 내정된 함석헌ㆍ문익환ㆍ예춘호ㆍ이문영ㆍ함세웅ㆍ김승훈ㆍ권호경 등 재야 원로와 정의구현사제단의 가톨릭 신부와 기독교 목사 등 3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가택연금으로 참석이 저지되었다. 지도위원 중에는 임채정ㆍ김종철 등 동아투위 출신이 간신히 참석하였다.

연행당한 다른 사람들은 금방 풀려났으나, 집행부 6명은 며칠 조사받으며 못나왔는데, 안기부는 집요하게 김근태 의장에게 해체 성명서를 내보이며, 서명 날인하라고 강요했다. 안기부에서는 김근태 의장에게 “서명 날인하고 나가서 민주화운동을 하면 누가 뭐라고 그러겠느냐, 눈감아 주겠다. 협조하면 청와대에 훈방하기로 그렇게 보고를 했으나 끝내 서명을 안하면 재수사에 들어가 구속시키겠다” 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김 의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청련 해체는 의장이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고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결의해야 하는 일이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 면서 버텼다. 이 당시 김 의장은 속으로 “지금 내가 구속되면 안 되는 상황인데, 구속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 안 들으면 구속하겠다는 엄포에 긴장도 하고 오금도 저렸지만 한편으로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을 갖고 “구속한다면 구속되어도 좋다. 구속되어 감옥에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 고 각오를 단단히 하며 끝까지 버텼다.


그럼에도 결국 김근태 의장은 석방되었다. 민청련 사람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의장이 저렇게 버텨도 구속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용기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석 10)

 




김근태를 비롯하여 집행부 간부들은 민청련을 결성할 때 이미 구속을 각오하고 시작하였다. 그래서 인신 구속에는 별 두려움을 갖지 않았으나 조직이 와해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근태의 의연한 태도는 간부와 회원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창립대회를 ‘무사히’ 마친 민청련은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근처의 파고다빌딩 504호실을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 명의로 임대하였다. 출판사를 차린다는 이유를 댔다. 입주 및 현판식은 9월 29일 오후 회원 12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현판은 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를 상징하는 나무 재질이었다.

민청련 간부들은 결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세웠다.
두꺼비는 새끼를 가지면 낳기 전에 뱀을 약올리고 싸우다가 뱀에게 잡혀 먹는다. 두꺼비는 결국 죽게 되지만 뱃속의 새끼들이 그 뱀을 자양분으로 삼아 알을 깨고 나온다. 즉 자신을 죽여서 뱀을 죽이고 새끼를 살리는 살신성인의 정신이다. 민청련 회원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민중을 살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민청련은 깃발을 든 동학농민군에 빙 둘러쌓여 있는 두꺼비를 탱크처럼 그린 판화를 제작,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의 표지에 로고처럼 실었다.

민청련 집행부와 회원들의 ‘두꺼비 정신’은 치열했다.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살리고, 민족통일을 이루겠다는 신념이었다. 연성수의 담시에서 신념의 일단을 찾게한다. 집행부의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었던 연성수는 1986년 3월 25일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 <뱀이 두꺼비를 삼키다>라는 담시를 읊었다. 그는 결심공판을 받을 당시 폐결핵 등 여러 가지 병을 앓으면서도 10일간의 단식을 결행하면서 담시를 구상했다.

뱀이 두꺼비를 삼키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다오
봄비가 온다 봄비가 온다, 메마른 산봉우리 봉우리마다
민족해방의 봉홧불로 살맞은 가슴을 사르는 봄비가 오는데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
봄비가 온다 봄비가 와
그늘진 산골짝 골짝마다 죽음을 넘어선 사람의 사랑
분이와 돌쇠는 핏빛 진달래되어 흐드러지는데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
그날 무등산이 크게울고, 금남로가 일어서던 날
한많은 인생살이에 MI소총 꺾어들고 헬리곱터 휘어잡고
에라 데헤야
개소리엔 똥약이 최고란다
미친 개 잡는 덴 몽둥이 찜질이 최고란다
전 민중 하나되어 신명나게 휘몰아가는 데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
죽으러 들면 산다
하나로 뭉치면 산다
땅도 땅도 내땅이다, 조선땅도 내땅이다
온갖 잡것 갖은 잡것이 찝적대도 여기는 내땅
한 치도 내어줄 수 없다
땅도 땅도 내땅이다, 쪽바리 땅도 내땅이다
밥이 하늘, 사람이 하늘, 통일이 하늘
두껍아 가자 녹두장군 앞세우고 새끼민중 등에 업고
두껍아 가자, 두껍아 가자
전태일 동지 앞세우고 새끼민중 등에 업고
두껍아 가자 가자
두껍아 가자
4월투사 앞세우고 새끼민중 등에 업고
두껍아 가자, 두껍아 가자
무등신랑 앞세우고 통일꾼들 등에 업고 두껍아 가자 가자 가자
사람이 산다는 게 별거랑가
남 눈치 안 보고 오순도순 힘껏 일해 등다습고 배부르고
신명나면 그만이지
죽으려 들면 산다, 역사를 알면 산다, 하나로 뭉치면 산다
두껍아 가자, 저 압제의 총칼을 향해 개나리 따서 입에 물고
두껍아 가자
두껍아 두껍아 헌집털고 새집 짓자
(주석 11)


주석
7>앞의 책, 201~202쪽.
8> 앞의 책, 202쪽.
9> 앞의 책, 203쪽.
10> 앞의 책, 208~209쪽.
11> 김재희 엮음, <심장에 새기는 이야기>, 182~183쪽, 녹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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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5 08:00 김삼웅

 


1983년 9월 30일 저녁 서울 성북구 돈암동 소재 가톨릭 상지회관에서는 경찰의 삼엄한 포위속에서 진보적인 지식청년 59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청련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저녁 7시를 전후하여 150여 명의 회원들이 상지회관 주변에 모였으나 상당수가 성북경찰서로 연행되고, 59명만 참석이 가능했다.

마치 1919년 2월 8일 오후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김상덕 등 유학생들이 2ㆍ8 독립선언대회를 할 때 왜경의 포위속에서 행사를 거행했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64년의 시차를 두고 왜경과 국립경찰로 저지 권력이 달랐을 뿐이다.

대회는 의장으로 내정된 김근태가 <민청련 창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막이 올랐다.

“고통과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억압받는 제3세계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족사의 전진에 앞장서야 할 청년으로서 (중략) 민주ㆍ통일을 위한 민주정치 확립, 민주자립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 체계의 형성, 냉전체제해소와 핵전쟁방지”라는 내용의 선언문으로, 김근태의 낭독 뒤에 채택되었다.

창립선언문(요지)은 다음과 같다.

―. 민족통일의 대과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된 민주정치는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
―. 평등하고 인간적인 생활을 위한 민주자립경제가 이룩되어야 하며, 부정부패 특권경제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 역동적이고 건강한 민중의 삶을 위하여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 국제평화와 민족 생존을 위해 냉전체제의 해소와 핵정잰의 방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주석 2)

창립총회는 김근태가 작성한 민청련 발기문을 부의장으로 내정된 장영달이 낭독하였다.

“민청련은 투쟁성의 회복을 첫번째 과제로 제시”하며,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ㆍ종교인ㆍ정치인ㆍ노동자ㆍ농민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건설에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주석 3)는 내용이었다.

대회는 이어서 전문 21조의 민청련 규약을 통과시키고 임원진을 선출하였다.

집행위원회 : 의장 김근태 / 부의장 장영달 / 총무과장 박우섭 / 홍보부장 박계동 / 사회부장 연성수 / 재정부장 홍성엽

상임윈원회 : 위원장 최민화 / 부위원장 이해찬

민청련이 출범하기까지에는 학생ㆍ노동운동출신 지식청년들의 숨은 노력이 배어 있었다.

“1983년 5월부터 60년대 후반에서 72학번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김경남ㆍ문국주ㆍ송진섭ㆍ이해찬ㆍ장영달ㆍ정문화ㆍ정화영ㆍ조성우ㆍ황인성 등은 최민화의 집에서 매주 한 차례씩 회동을 가졌다. 이를 OB모임이라고 했고, 72학번부터 70년대 후반 학번까지는 별도로 만나 회동을 가졌는데, 이를 YB라 불렀다.” (주석 4)


민청련을 태동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범영ㆍ이해찬ㆍ조성우 등이었다.

83년 봄, 이범영은 우선 날조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2년 반의 징역을 살고 1982년 12월에 출소한 이해찬을 만나 공개 정치투쟁 단체를 만드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사실 이해찬은 또 운동한다고 잡아가겠느냐는 심기도 있었고, 설사 또 잡아가면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에 방패막이 역할로 적합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잡혀가면 몇 년 더 감옥에 갔다온다는 각오로 청년단체를 만드는 일에 열심히 뛰어다녔다.

또한 이해찬과 같이 조성우에게도 83년 1월, 이범영이 찾아와 청년단체를 만들자는 제의를 하자, 역시 흔쾌히 동참을 한다. 조성우는 1978년 결성된 민주청년운동헙의회(민청협) 회장을 역임한 터라, 공개투쟁을 담당하는 청년단체 건설이 당면관제라는 것에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고문을 많이 당해 건강이 많이 약해져 있는데다가 당시 운동권의 한계였던 해외정보의 취약점을 보완하고자 내심 일본출국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청년단체 준비과정에서 여러 대학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주도하면서 깊이 관여하기는 했으나 이후 청년단체의 중심축에는 서지 않았다.

마침 이즈음 일부 민주화운동세력에서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를 우선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사연인즉슨, 이전 1979년 3월에 결성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5.17 이후 와해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직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마침 제기되고 있던 터였다. 장기표ㆍ박우섭 등이 중심이었는데, 그러나 어른단체 건설이 난관에 봉착하여 생각보다 여의치 않자 이를 준비하던 박우섭은 청년단체 건설에 합류한다.

이로써 이범영ㆍ이해찬ㆍ조성우가 논의를 시작하고, 박우섭ㆍ박성규ㆍ설훈 등이 호응하고 이후, 후배인 권형택ㆍ이우재ㆍ서동만ㆍ연성만ㆍ유기홍 등이 합류하며 청년운동 조직화는 외연이 넓어지고 있었다.
(주석 5)

하지만 민청련의 조직은 쉽지가 않았다. 5공의 독기가 여전히 서릿발치고 청년층에까지 패배주의가 만연해있었다. 이런 속에서 일군의 지식청년들은 마치 일제감정기의 독립운동가들처럼 경찰과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청년조직을 추진하였다. 8월 15일 경기도 양수리 근처 동막이라는 계곡에서 야유회를 하는 양 동지들이 모여 청년단체결성에 합의했다. 이날 모임에는 40여 명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이전 민청협 출신과 복학생협의회, 노동운동 그룹 등을 주축으로, 서울대에서 김경남ㆍ이해찬ㆍ박우섭ㆍ김정환ㆍ박성규ㆍ김도연ㆍ황성진ㆍ이범영ㆍ문국주ㆍ권형택ㆍ이을호 등 72~74학번을 주축으로, 75~77학번인 연성만ㆍ이우재ㆍ서동만ㆍ김종복ㆍ오세중 등도 참석했고, 대학별 대표는 고려대는 조성우, 연세대는 최민화ㆍ홍성엽, 중앙대는 이명준ㆍ이석표, 서강대는 김선택, 한신대는 김희택, 이화여대는 최정순, 명지대는 김준묵 등이 그 면면이다. (주석 6)


주석
2> <민주화의 길> 창간호, 표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1984년 3월.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07쪽, 2007.
4> 앞의 책, 199쪽.
5> 앞의 책과 같음.
6> 앞의 책,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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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4 08:00 김삼웅

 

고은은 시인의 감수성으로 인물을 내다보는 독특한 안목을 갖고 있다. 1

986년부터 간행한 <만인보 12>에는 김근태에 관해 썼다.

김근태

그는 70년대에는 물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인천 어딘가
후덥지근한 이 공장 저 공장에 스며들어가
자격증 네 개 다섯 개 땄다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장 따위 던져도 좋았다
공장에서
떳떳한 호모 파베르였다

하얀 양초 같은 얼굴
하연 염소 같은 얼굴
그러나 노란 눈동자 안에는
어떤 동요도 없이
몇십 년을 한 뜻으로 가는 의지
슬쩍 내비쳤다가 숨어버린다.

평생 노동자와 일치하리라고 결심한 이래
그는 70년대에는
몇몇 친구들밖에는 몰랐다
무서운 청년시절을 다 바쳐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 떨치는 것
나서는 것
그것이야 뒤로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죽기 직전까지
그 자신의 고문을 의식 속에 기록한
결사적인 또 하나의 그 자신이야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주석 1)

1980년대는 한국현대사에서 보기드문 격동의 시대였다. 쿠데타와 살육, 저항과 연대가 동시적으로 혹은 비동시성으로 나타났다. 김근태는 격동기의 청년운동 중심부에 들어가 역량을 키우고, 아직 광주의 핏자국이 선명한 5공 초기에 반독재투쟁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강경한 광주 시위진압. ⓒ5.18 기념재단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정치사는 두 차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첫번째는 1960년대 초 4월혁명으로 이승만 백색 전제에 짓밟혔던 민주주의를 살려내서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국민의 자유선거에 의해 민주당이 집권하였다. 혁명 뒤끝이라 다소 소란이 있었지만 장면 정부는 인내심을 갖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 출신 박정희가 주동하는 군 일부의 반란으로 민주당정부는 8개월 만에 붕괴되고 18년 5개월의 박정희 1인 독재가 자행되었다.

두번째는 1979년 10월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면서 대한민국은 모처럼 ‘서울의 봄’을 맞아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듯 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본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반란을 일으켜 가녀린 민주주의의 새싹을 짓밟고 광주학살에 이어 정권을 찬탈했다. 민주주의는 다시 생명력을 잃고 대한민국은 제2기 군사독재 시대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온갖 패악을 그대로 전수받은 전두환 5공정권은 새로 개발한 수법까지 동원하여 포악성이 더욱 심했다. 광주학살의 피를 뿌리고 등장한 5공의 포학성은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데 가히 광적이었다. 반유신 투쟁을 벌여온 학생ㆍ재야ㆍ야권은 1980년 5ㆍ17사태로 풍비박산, 초토화를 면치 못했다.

80년대 초반 한국사회는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적막강산이 되고, 사체를 훔치는 인면(人面)의 여우ㆍ승냥이 무리만이 성세를 누렸다.

한민족이 ‘반도국가’로 정착된 이래 그런 속에서도 지배세력은 사대주의를 국책으로 삼고서 권세를 누려왔지만, 민중은 민족자존과 자주정신을 잃지 않았다. 옛적의 일은 접어두고라도 근대에 이르러 동학 농민혁명을 시발로 하여 의병운동, 독립운동, 3.1운동, 의열투쟁, 의열단활동, 광복군 창군, 4월 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시위로 이어지는 면면한 저항의 전통을 지켜왔다.

한국의 전통적인 양심세력은 “일의 성패를 문제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다”, “시작과 끝은 오직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다”는 양명학(陽明學)의 정신으로 무장하였다.

전제군주, 외세, 독재세력과의 싸움이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격이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기에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해온 것이다. 한말 의병이 그랬고,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다. 해방 뒤 독재와 맞선 민주화운동도 다르지 않았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라는 백범 김구의 경구에서 의미가 집약된다고 하겠다.

전두환 일당의 폭압속에서도 저항의 활화산은 멈추지 않았다. 민중의 지층에서 저항의 용암이 다시 꿈틀거렸다. 단절될 수 없는 양심세력의 맥락이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앞장섰다. 반유신의 학생운동 출신과 5공의 만행에 침묵할 수 없는 학생들이 일어섰다.

1982년 3월 18일 김부식ㆍ김은숙 등 부산 고신대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묻고자 벌인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학생들에게 만연된 패배감을 털고 다시 분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사건을 횃불로 하여 대학가에서는 산발적이나마 반정부 시위가 일기 시작했다.

1982년 하반기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학생운동은 1983년을 맞아 더욱 강화되었다.
이 해 연초 나까소네 일본총리의 방한 반대를 이슈로 하여 방학 중인데도 대학생들과 운동권에서는 반대 집회가 열리게 되고, 이는 반정부 투쟁의 시위로 연계되었다.

때마침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5월 18일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26일간 단식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가 미국에서 이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내에서는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이 동조단식에 들어가는 등 정계와 원로그룹의 움직임은 한동안 움츠렸던 지식청년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주석
1> 고은, <만인보 12>, 150~151쪽. 창작과 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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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3 08:00 김삼웅

 

김근태의 노동자ㆍ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담긴 글이다. 다시 인천 지역 산선의 노동상담역 시대로 돌아가 보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인천에서, 그것도 당국의 탄압으로 황무지가 되어버린 산업선교회에서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공장 근처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선술집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들과 사귀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선천적으로 말수가 적은 그는 노동자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대중적 감각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김동완 목사로부터 유행가를 배우기도 하고 레크리에이션을 익히기도 했다. (주석 18)

김근태가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신산한 삶을 보내고 있을 때 전두환 일당은 광주의 살육을 거쳐 양심적 언론인을 축출하고, 정치정화법 제정 등을 통해 야성 정친인들을 묶으면서 5공체제를 굳혀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양심적 정치인ㆍ학자ㆍ종교인들을 묶어서 투옥하였다. 하지만 철벽같았던 유신체제가 허물어지듯이, 5공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신호로 그동안 움츠렸던 학생운동이 다시 저항의 횃불을 높이 들면서 도전에 직면했다. 김근태는 아직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만난 노동자들은 모두 그에게 매료됐다고 조 목사는 말한다.
그는 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소한 인간사에까지 진지하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대해, 노동자들에게 ‘성실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늘 당하면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흔히 지식인 출신 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을 운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인격체로 대해준 그와 오빠나 형처럼 가깝게 지내며 존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근태 씨가 일을 한 지 불과 1년 만에 산선엔 다시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노동자와 약속을 하면 단 1분도 늦은 적이 없다는 것이 당시 그와 함께 그룹 활동을 했던 노동조합 간부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
(주석 19)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인 듯 하다.
전두환 절대권력이 채 2년이 못되어 전두환의 친인척인 이철희ㆍ장영자의 ‘개국 이래 최대 어음 사기사건’으로 5공의 성벽에 구멍이 뚫렸다. 민주인사ㆍ학생ㆍ노동자들의 가혹한 고문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기도 했다. 김근태는 분노를 삭이면서 여전히 인천에서 노동자들의 상담과 교육에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당시 그에 대한 평가다.

조 목사는 김근태 씨를 통해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조 목사는 그로부터 감동을 받은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만나 교육할 때 하루 한 시간 이상씩 늘 준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는 너무 바빠 미처 준비는 하지 않고 노동자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목사님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은 뭔가를 배우겠다고 장시간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귀한 시간을 소홀히 생각했습니다.”하며 반성한 적이 있다. 풍부한 지식,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특별히 교육 준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그였는데, 이처럼 노동자를 마치 보석을 대하듯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산선 활동 과정에서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3년 가까이 함께 활동한 조 목사가 그가 ‘탁월한 이론가’라는 사실을 그로부터 몇 년 후인 85년 재판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할 만큼 산선시절 그의 모습은 헌신적이고 성실한 ‘일꾼’이었다.
(주석 20)


주석
18> 이재화, 앞의 책, 160~161쪽.
19> 이재화, 앞의 책, 161쪽.
20> 앞의 책과 같음.


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2 08:00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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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뿌린 악의 씨앗은 심각했다. 그의 권부 아래서 육성된 하나회 소속의 정치군인들이 1979년 12ㆍ12 군부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이들은 1980년 5ㆍ17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쿠데타로 ‘서울의 봄’을 짓밟고 제2기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이들은 박정희가 밟은 길을 재현해나갔다. 독재자가 제거되고 이제 민주주의의 밝은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이나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다시 한번 혹한의 계절을 맞게 되었다.
김근태는 짧은 ‘서울의 봄’ 기간인 1980년 4월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인재근과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78년 수배중에 가까운 가족만 모시고 결혼식을 치렀었다. 이번에는 모처럼 친척ㆍ친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주례는 서울상대 변형윤 교수가 맡았다. 수배중에도 리포트로 학점을 주고 항상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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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족이 딸린 몸이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했다. 다행이라면 박정희 체제에서 따라 붙었던 추적자들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1980년 여름부터 ‘산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80년 7월경부터 '산선'에서 노동상담역의 간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산선'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화순 목사가 동일방직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지 6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조 목사는 자신이 구속된 후 활동정지가 돼 버린 산선활동을 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실무자를 구하던 중 김동완 목사, 최영희 씨 그리고 김근태 씨와 만나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조 목사는 노동상담역을 김근태 씨에게 맡겼다. 사실 일은 맡겼지만 당국의 흑색선전과 탄압으로 노동자들은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인 실정이었다. 그래서 조 목사는 김근태 씨에게 “당신 능력껏 노동자들을 조직해보라”고 하고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주석 16)

김근태는 천성이 성실하고 근면한 편이다. 무슨 일을 맡으면 최선을 다하고 솔선수범한다. 그는 전태일과 같은 세대였다. 그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힌 일을 똑똑히 기억하였다.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되고, 박정희 시대에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육체노동을 하며 살았다. 다음은 뒷날 노동자들의 수난을 지켜보다가 현장에 뛰어들었던 김근태의 기록이다. 1988년 12월 29일 밤 11시경 서울 광장동에 있는 미국계 회사인 모토로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인 사장 봅 칼빈을 면담하러 본관 쪽으로 가던 노조원과 구사대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일어난 사고였다.
“구사대 물러가라!” 하며 대치하던 조합원 중 4명이 위협용으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맞섰는데 갑자기 누군가 붙힌 불이 그들의 몸에 확 옮아붙었던 것이다.

구사대 쪽에서 “어디 불 붙여 봐라” “신나인지 확인해 보자” 등의 비웃음소리가 나온 직후였다.
이 사고로 이강욱 씨는 깊은 화상을 입고 의식불명인 상태이고, 강문희ㆍ이종찬 씨 등 3명도 중태이다. 이런 끔찍한 사고가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합원들의 목 쉰 증언에 의하면 구사대 쪽에 있던 김모 차장이란 자의 소행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불꽃이 되어 뒹굴고 있는 4명의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불을 끄는 대신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사진을 찍어 대는 관리직 사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격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어 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시간이 긴박했다. 지금도 안에는 도충환 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11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신나통을 들고 전산실에 들어가 노조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싸고 수백 명의 구사대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명에까지 어떤 위협감이 감돌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빵과 우유를 사 들고 정문 옆 좁은 문을 통과하여 공장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인도적인 이유를 들어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답은 구사대의 시꺼먼 적대감과 추운 겨울날에 쏟아지는 소방 호스의 물세례, 물공격뿐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정면으로 소방 호스에서 쏟아지는 억센 물줄기에 맞서다가 돌아서서 등 뒤로 버티었다.

공장마당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외로움이 몰려왔다. 신나통을 들고 버티고 있을 조합원들의 고독과 함께 남영동에서 지독하게 곱씹었던 무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가 서성이는 밤거리에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주석 17)

주석
16> 이재화, 앞의 책, 160쪽.
17> 김근태, <겨울 속의 풀뿌리>, <노동문학> 창간호(1983. 3), 38~39쪽,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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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1 08:00 김삼웅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김근태는 피신중에 건축공사장의 인부, 기술학원의 강사, 그리고 조그마한 공장에 다니면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자주 옮겨다니면서 추적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쉬는 날이면 청계천 헌책방을 찾아 책을 사서 읽었다. 그가 다방면에서 박식한 것은 뒷날 긴 감옥생활과 이 무렵의 독서에서 얻은 지식의 힘이 컸다. 피신중에 행운도 따랐다. 평생의 반려이고 동지인 인재근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간에 열관리 기능사 등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77년 8월경 현재 부인 인재근 씨와 만나게 됐다. 상대 1년 후배인 장명국 씨(석탑노동연구원 원장, 현재 구속 중)의 부인인 최영희 씨(석탑출판사 사장)의 소개로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인재근 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75년부터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해왔었다. 인씨는 78년 2월부터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에서 실무 간사로 활동, 동일방직 사건에 관여하기도 했다. (주석 13)

도피 중에 인재근을 만나게 된 것은 김근태에게 큰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산선’에서 일할 만큼 노동운동과 시대정신에 뜻을 같이 할 수 있었고, 안전한 은신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친구들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모두 수배를 받고 피신했으며, 그 1년 후 김상진 서울농대생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자결에 자극을 받아 긴급조치 9호 아래에서 서울대 5ㆍ22 사건과 명동성당 장례식 사건의 배후로 연루되어, 박정희 씨가 저격당해 죽기까지 피신을 해야 했다.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 일하기도 했고, 기술학원 강사생활도 했다. 이 기간에 집사람인 인재근을 만나 함께 활동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들 병준이도 낳았다. 아득하고 괴로운 세월이었지만 우리에게 행복할 수 있는 틈도 없지 않았다. (주석 14)

박정희의 패악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민권투쟁을 벌이며 박정희와 대결해온 장준하가 1975년 8월 17일 등산길에서 의문사를 당하고, 1976년 3ㆍ1절 55주년을 맞아 윤보신ㆍ김대중ㆍ함석헌 등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것과 관련, 이들을 정부전복 선동 혐의로 구속ㆍ입건하였다. 그리고 1978년 12월 27일에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박정희는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 공화당이 31.7%를 얻었다. 야당이 1.1%를 더 득표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폭압통치를 거듭하는 박정희 정권에게 국민은 분명하게 레드카드를 던졌다. 이처럼 민심의 이반현상이 드러났는데도 박정희는 반성하려 하지 않고 날로 광폭성이 더해갔다.

박정희는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하자 경찰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강제해산하는 과정에서 1명을 사망케하고, 공화당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등 반이성적인 야만성을 드러냈다. 마침내 10월 16~17일 부마항쟁과, 부산에 계엄령 선포, 서울 등지에서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18년 5개월 동안 1인 전제를 자행하다가 부하의 총탄으로 살해된 것이다.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박정희의 암살 소식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수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온 김근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가정적으로도 불행이 닥쳤다. 그동안 막내아들 때문에 어느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었던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어머니께서는 아들 병준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당시 암으로 쇠진할 대로 쇠진해지셔서 손자를 직접 보고 안아 보시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의 죽음으로 막내아들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확인하신 탓인지 1980년 1월 말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주석 15)


주석
13> 앞의 책, 160쪽.
14> 김근태, 앞의 책, 418쪽.
15> 앞의 책, 418~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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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10 08:00 김삼웅

 

운명의 여신은 다시 한번 학구파 청년에게 학문연마의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박정희가 기획ㆍ각본ㆍ연출한 유신체제는 김근태에게 고난의 길을 강요했다. 운명의 갈림길은 극적이었다.

사회운동으로 진출하려니 막막했고 사회과학적 이론을 더 쌓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리고 내심 수배가 아니기를 확인해보고 싶은 복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석 10)

김근태는 홍성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면회 온 이재화에게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서릿발치는 유신 초기에 ‘사회운동의 진출’은 그가 아닌 누구라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여 대안으로 택한 것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사태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형 국태 씨에게 전화를 해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내게 했고, 입학시험 당일에 다시 형에게 전화를 해 “수험표를 갖고 시험장에 나와 달라. 혹시 시험장에 수사기관원이 나와 있을 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부탁한 대로 시험장에 수험표를 갖고 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수사관이 쫙 깔려 있었고, 시험이 시작되었는데도 김근태 씨의 모습은 끝끝내 보이질 않았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동숭동 소재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곧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 발치에서 형을 보고 있었다. 수사기관원들이 나와 있어서 나가지 않았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대학원 진학은 좌절되고 말았다. (주석 11)

보통 사람들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손에 결정되는지 몰라도, 한 시대 지도자들의 운명은 시대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근태가 당시 대학원 진학이 가능했다면 그의 생애는 평탄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되고 학문의 업적을 남겼을 지 모른다.

김근태는 평탄한 길을 접고, 저항의 길에 들어섰다. 운명적인 측면도 있지만, 피 속에 전하는 형들과 가족사의 DNA(유전인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동지들의 고난과 박정희 체제의 광폭성이 젊은 지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서게 하는 ‘시대정신’도 끼었을 터였다.

박정희의 권력욕구는 자제력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의 필수적인 야당, 언론, 사법부 등이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유신쿠데타를 자행하면서부터 그는 모든 비판을 불허하는 신격화의 존재처럼 행세하였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하는 김대중을 납치해오고, 1974년 1월 8일에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 유신 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 논의를 금지시키면서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 세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판적인 언론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하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1973년 3월 30일 전남대의 <함성> <고발>등 유신반대 유인물 살포 사건, 5월 20일 기독교인들의 유신과 박정희 반대의 <신앙선언문>사건, 9월 6일 서울 제1교회 박형규 목사 중심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 등 반유신ㆍ반박정희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신 선포 이후 대학가 최초의 반유신운동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문리대 비상학생총회 소속 250여 명이 자유민주체제 회복을 요구하는 내용의 선언문 낭독과 시위였다. 반유신의 횃불은 4일의 법대생 시위에 이어 5일에는 상대생 300여 명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과 대일예속 청산, 자립경제 확립, 중앙정보부 해체, 학원자유 보장 등을 촉구하는 선언문 낭독과 시한부 농성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유신 선포 1년 만에 박정희는 다시 대학생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서울대생들을 스타트로 하여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다시 반정부 투쟁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좌경의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3월 들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빈발하는 한편 전국 대학의 반독재 연합시위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폭력혁명을 시도한다고 날조하면서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주모자라 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구속자 중에는 윤보선ㆍ지학순ㆍ박형규ㆍ김찬국ㆍ김지하를 비롯하여, 이른바 인혁당재건 관련자 21명, 일본인 2명이 포함되었다. 김근태의 동료 중에서도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

1975년 3월 28일 수원의 서울대 농대 학생총회는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원자유 보장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한데 이어 4월 2일에는 박정희에게 학원과 사회 제반 사태를 타개할 일대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4월 4일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을 벌였다. 이때 한국학생운동에 커다란 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11일 학내에서 벌어진 자유성토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김상진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발표하고 할복, 다음날 사망하였다.

김상진의 할복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학생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생 4,000여 명은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일어난 최초의 시위였다. 80여 명이 연행되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김근태는 서울대생 시위와 명동성당의 김상진 장례식을 주도하여 더욱 수배가 강화되었다.

김근태는 이번에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또 다시 그의 친구들을 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기재하였다. 당국은 김근태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용케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수배중 자신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하고자 한 사회과학 공부를 함과 동시에 운동가가 가져야 할 철저한 규율을 몸소 실천했다. 수배중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생활했는가에 대해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중이었던 손학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민청학련 관련으로 수배중인 나와 장기표ㆍ김승균ㆍ심재권ㆍ신동수 등과 5ㆍ22사건으로 수배된 김근태는 수배중에도 가끔씩 만나곤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수배중에 있었던 주변 이야기를 하거나 동료들에 대한 근황을 물어보곤 했는데, 유독 김근태만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방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과 같음.
11> 앞과 같음.
12> 이재화, 앞의 책, 159~160쪽.

 



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09 08:00 김삼웅

 


대학가에서는 4ㆍ27 대통령 선거의 부정ㆍ불법에 항거하여 대규모적인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1971년 5월 27일 서울대 공대ㆍ문리대ㆍ상대ㆍ약대ㆍ의대ㆍ치대생 등 900여명과 서강대생 200여명은 구속학생 석방, 학원자유 수호, 교련반대 등을 외치며 교내 시위에 이어 가두에 진출했다. 김근태는 이 시위에 앞장섰다.

정부는 이날 서울대 문리대ㆍ법대ㆍ상대ㆍ사대에 휴업령을 내리고 교문을 폐쇄했다.
9월 30일에는 수도경비사 장교들이 고려대학에 난입하는 폭거가 자행되기도 했다. 김근태는 1971년 11월,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의 신세가 되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했다”면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서울대 법대 4년), 장기표(서울대 법대 3년), 조영래(사법연수원생), 김근태(서울대 상대 3년) 등을 구속했다. 이들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ㆍ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 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기능 정지 후 정부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주석 7)

정부가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꾸며 구속한 것은 날로 격화되어가는 학생시위를 저지하려는 정치적 책략에서였다. 특히 4ㆍ27 대통령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학생연맹)을 겨냥하는 처사였다.

‘학생연맹’은 1971년 4월, 13개 대학 학생 대표로 구성되어 4ㆍ27 대통령 선거 참관을 실시하는 한편 소속 대학의 시위를 주도하는 등 반정부 학생운동의 핵심 서클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보복적인 집중 타격을 가한 것이다.

김근태는 동료들이 구속될 때 용케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검찰은 이들을 구속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표기하여 별명의 하나가 되었다. 정보부 요원과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피신하고 있을 때 구속된 심재권ㆍ이신범ㆍ장기표ㆍ조영래 등은 수사 기관에서 가혹한 구타를 당하고, 검찰은 9월 5일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징역 10년씩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9월 11일 징역 10년 6월과 2년, 집행유예 3년 등을 각각 선고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 공소사실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드러나 크게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 이 사건은 선고 공판에서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음모 부분은 무죄, 기타 부분은 유죄가 인정된다. 당초 검찰이 발표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의 허구가 밝혀진 것이다. 김근태는 이 때부터 길고 긴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 수배자들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고, 숨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5공 때는 그마저 불가능했다.

김근태는 변형윤 교수 등의 배려로 수배 중에 시험 대신 우편으로 리포트를 제출하여, 1972년 2월 가까스로 서울상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피신 생활 중에 택한 방편에는 가명으로 취업하는 길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위장취업자’라 하여 회사ㆍ공장을 뒤져 찾아다가 처벌하였다. 노동자들을 ‘의식화’ 시킨다는 이유였다.

이 때부터 그는 길고 긴 수배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간간이 수배로부터 ‘사실상 해제’된 상태도 없지 않았으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피신을 하던 그는 피신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한 방편으로 일신산업(일신제강의 전신)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수출 업무를 맡아 약 11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의 45년 생애(인터뷰 시점-필자)에 넥타이를 매고 월급봉투를 만져 본 유일한 기간이었다.
(주석 8)

김근태가 일신산업에서 월급쟁이 노릇을 하고 있을 때는 ‘학생연맹’의 친구들이 옥살이를 하고, 박정희가 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이어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법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키면서 영구집권의 길목으로 치닫고 있는 시점이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마침내 군부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유신쿠데타를 감행하였다.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자신들이 우려했던 한국판 총통제가 ‘유신’의 이름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그야말로 국체변혁의 내란행위였다. 김근태는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신쿠데타로 양심적인 야당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노동운동가들이 속속 구속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한국사회는 11년 전 5ㆍ16쿠데타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김근태는 이런 상황에서 남들처럼 넥타이 메고 출퇴근하면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는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가 더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였다. 성격상 ‘햄릿적’이어서 그의 고민의 심도는 깊어갔다. 이때의 고민은 그리고 결과는 인간 김근태가 고난의 길을 걷게 하는 ‘민주주의자’의 선택이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 후 그는 회사생활이 자신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판단, 사회운동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갈 것인가 고민하던 중 대학원 진학의 길로 마음을 정하고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주석 9)


주석
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226쪽, 2006.
8> 이재화, 앞의 책, 159쪽.
9> 앞의 책,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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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8 08:00 김삼웅

 

박정희는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두번째 제치고 재선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박정희는 이때 이미 3선 개헌을 구상하면서 6ㆍ8총선거를 관권 부정선거로 치뤘다. 3ㆍ15를 방불케 하는 공개ㆍ대리투표 등 부정 타락선거였다. 야당은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학생들은 연일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다.

김근태는 이때 3학년이었다. 상대 대의원회 의장에 선출될 만큼 동료들의 신임을 받았다. 민주주의 기초인 선거의 부패ㆍ타락상을 지켜보면서 침묵할 수가 없었다. 6월 10일 김근태는 상대생들을 이끌고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6월 15일에는 전국 21개 고교와 5개 대학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21일에는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건국대 등 학생 대표들이 모여 ‘부정부패 일소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정선거규탄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후에도 6월 내내 서울시내 대학생들은 ‘학원주권 수호’와 ‘부정선거 규탄’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6월 15일 서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강압적으로 학원시위를 봉쇄하려 했지만,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김근태는 연일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앞장섰다. 학생운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보복이 따랐다. 학교 당국은 김근태를 상대생 시위 주동을 이유로 권고처분에 이어 제적이라는 ‘극형’에 처했다. 한 달 뒤에는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때부터 시위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는 이른바 ‘강제징집’을 자행하였다. 정부는 교련을 거부한 학생들에게 35개 대학에서 13,505명에게 병무신고를 하게 하고 그 중 5,000명에게 집병영장을 발부했다. 데모 주동으로 제적된 학생 중 71명에게 1차로 영장이 발부되고 이들을 징집열차에 태웠다.

1971년 입영열차 오르는 강제징집 대학생들. 사진은 http://cafe.daum.net/asssuplee

 

박정희 정권은 국방의무를 반정부 학생들을 처벌하는 형벌로, 그리고 군복무를 유배지로 악용한 것이다. 김근태는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1967년 9월의 일이다. 3학년 2학기가 개학하기도 전에 제적을 당하고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한 언론인은 징집 학생들이 강제 입영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제적학생들이 첫번째로 입영하던 10월 26일, 이미 동대문경찰서에 신병이 확보된 서울대 대의원회의장 김재홍(문리대 정치학과 3년)과 최대철(법대 행정과 3년) 등 10명의 학생들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경찰에 인솔되어 용산역으로 나가기 전 배웅나온 서울법대 박병호 학생과장과 김치선 교무과장을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오후 4시경부터 용산역 앞 광장에는 입영학생들의 학우와 교수 및 가족 등 5백여명이 모여 교가, 응원가,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이들을 전송했다.

이날 입영한 학생은 서울대 9명(법대. 문리대ㆍ상대 각 3명), 고대 5명, 연대 5명, 성대 3명, 서강대 2명, 건대 2명, 서울시립농대 2명, 강원대 1명, 명지대 1명 등 모두 30명이었다.
(주석 4)

이 기사의 ‘서울대 9명’ 중에는 김근태도 끼어 있었다.
‘강제징집’된 학생들은 훈련과정이나 부대 배치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의 불이익이 따랐다.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군의 처사는 대단히 적대적이어서 훈련 중 심한 구타가 일쑤이고 대부분 최전방 부대로 배치되었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소속 부대는 물론 방첩대의 감시로 책 한 권, 편지 한 통 맘 놓고 보고 쓰기 어려웠다.

3년여 만에 육군병장으로 제대한 김근태는 1970년 8월에 복학하게 되었다.
김근태가 군에 복무하고 있을 즈음에 국내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정부는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서울침투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 창설(4월 1일), 중앙정보부의 통일혁명당사건 발표(8월 24일), 국민교육헌장 선포(12월 5일), 공화당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1969년 9월 14일), 개헌안 국민투표(10월 17일), 3선개헌반대 학생시위 격화(6월 19일~12월) 등 박정희의 국가안보를 빙자한 장기집권 책략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3선개헌을 강행하면서 이미 장기집권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어섰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보 문제를 적절히 활용하고, 공화당 내의 개헌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1인독재의 길을 열었다. 이승만이 장기집권 끝에 쫓겨난지 9년, 민주정부를 쿠데타로 타도하고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의 헌법을 만든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1970년 9월 전당대회에서 40대 후보들의 치열한 대결 끝에 비주류의 김대중이 주류의 지원을 받은 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11월 13일에는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여, 1970년대 노동운동의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969년부터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 대학에 군사교련을 실시하였다. 향토예비군이 제대를 한 청장년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교련은 재학생들을 한 묶음으로 엮으려는 준군사조직이었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대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1969년부터는 교련이 대학의 정규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교련은 대학이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 지식의 생산과 토론이라는 교육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과목이었다. 교련 교육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대학의 교양교육 및 학사운영 전반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학내에서의 토론이나 의사수렴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교련은 형식상 대학의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대학의 학문적인 공동체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었고 교수들의 영역과는 무관하게 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것이었다. (주석 5)

박정희 정권이 전국의 대학에서 교련을 실시한 것은 대학의 병영화를 통해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의 의도를 꿰뚫은 학생들은 교련 철폐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근태가 참여한 서울대 총학생회는 1971년 <교련철폐 투쟁선언>을 발표하고, 다음날 서울대 사회학과생들은 <교련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교련 철폐를 주장했다. 이것이 대학가 ‘교련철폐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전체 국가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관권을 총동원하고서도 어렵게 승리하였다. 김대중 후보와의 표차는 95만여표에 달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사실상 패배하였다. 박정희는 3선에 만족하지 않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가장 저항이 심한 김대중과 대학을 더욱 심하게 탄압했다.

김근태가 속한 서울상과대학 교수들은 1971년 8월 21일 <대학자치선언>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대학 간섭을 비판하였다.

“오늘날 우리 대학은 내외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그 위기의 근본요인은 대학운영의 비자치성에 연유한다.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가 망라됨으로써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대학의 본질에 비추어 대학의 운영이 상부기관의 자의에 좌우되는 현실적 제도하에서 대학의 대학다운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주석 6)고 완곡하게 나마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로 완벽하게 1인전제 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대학은 자율성을 잃게 되었다. 교수 중에는 어용 교수도 많았지만, 학자적 양심을 지키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선 학생들을 음으로 양으로 보호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주석
4> 이경재, <유신쿠데타>, 167~168쪽, 일월서각, 1986.
5>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교수 민주화운동 50년사>, 66쪽, 1997, 서울대학교 출판부.
6> 앞의 책,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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