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7 08:00 김삼웅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뭐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 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또 수시로 해야 했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 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면서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되었습니다.
(주석 20)

김근태는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며칠 동안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고문자들은 잠을 재우지도 않았고 밥도 주지 않았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잠을 재우지 않아 허기진 육신은 처절하게 허물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9월 6일에는 점심 식사를 주었다. 음식을 보고 배가 고픈데도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의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것으로 악몽과 같은 고문이 끝난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식사는 ‘미끼’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설명하겠다.

고문자들은 미국 워싱턴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신기섭에 대해 캐물었다. 그는 1985년 2월 김대중이 귀국할 때 함께 동행할만큼 미국에서 한국민주화를 위해 애쓴 사람이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민청련 사무소를 들렸는데, 그를 간첩으로 엮으려는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김근태가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자 대화에서 별로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내면의 외침에 -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히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을 할 수는 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주석 21)

고문자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이성이나 인간성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고문을 하다가 제풀에 지치면 김근태의 생식기를 가르키며 히죽거렸다.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는 등 인격모독을 일삼았다. 히틀러의 비밀경찰도 이러지는 않았다.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부터 또 고문이 시작되었다. 잡혀와서 3일째 되는 날이다.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너 이새끼, 배후를 안 대?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께”라고 윤재호는 소리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동안 고문대를 정현규와 최상남이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고 하고, 고문기술자는 여러 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주석 22)


주석
20> 앞의 책, 53쪽.
21> 앞의 책, 58~59쪽.
22> 앞의 책,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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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6 08:00 김삼웅

 

고문 조사실로 향하는 회전식 철제계단.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김근태는 첫번째 고문으로 이미 질식상태가 되고 말았다. 수사관들의 “항복하지, 이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라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오전 7시 반부터 시작된 고문이 낮 12시 반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5시간 동안 이같은 고문이 계속되었다.

두번째 고문은 이날 저녁 8시경부터 자행되었다. 다시 옷을 벗기고 고문대 위에 칭칭 묶었다. 그리고 오전과 같은 고문을 또 시작했다.

고문자들은 점점 크게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더군요. 당당하고 의젓하게 보이기도 하구요. 물론 무조건 고문을 하는 것이지요. 요구사항은 없었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어떻게 되는 건지 합리적 사고나 대응 같은 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학대와 능욕을 어느 만큼 가하고 나면 그러나 고문자들은 뭔가를 반드시 제기하는 것이더군요.

이번에는,
① 폭력혁명주의자임을 자백하고
②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자백하고
③ 각 민주화운동 부문에서 움직이는 핵심적 인물을 대라. 김근태와 민청련이 제일 과격하고 제일 먼저 움직여서 오늘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 우선 학생운동과 노동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을 대라.(…)

얼마 동안은 사실 끈덕지게 버텼었습니다. 허나 안 되더군요.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의 시인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고통에 못이긴 굴복에의 유혹이 머리를 쳐들더군요.

나는 인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배후가 이범영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실 나로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누군가를 꼬집어서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당시 이범영 씨는 이미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피신중이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얘기해도 별 피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 두번째 물고문도 대략 5시간 걸렸습니다. 끝난 것이 5일 새벽 1시경이었으니까요.

9월 4일의 두 번에 걸친 물고문,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인간적 주체성은 크게 동요되고 일관성 있는 인격은 와해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것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음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 만화 같은 현실에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주체성, 그것을 다 포기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두꺼운 모직 겨울 잠바, 검정색과 붉은색의 체크무늬 잠바를 남영동 그곳을 나올 때까지 줄곧 입고 있습니다.
(주석 17)

세번째 고문은 9월 5일 저녁 8시 반부터 다음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전기고문이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졌습니다. 팬티도 남김없이 날라가 버리고요. 이곳에서 무슨 수치심 그런 것을 여밀 계제는 전혀 아니었지요. 그러나 팬티조차 벗겨지고 보니까 더욱 당황케 되면서 이제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남은 것이 있고 소극적 저항의 표시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팬티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칠성대 위에 또 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습니다. 새끼 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머리에 물을 주전자로 들어부었습니다. 그때 물의 섬뜩함은 귀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문기술자는 뭔가 쉴새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을 하였는데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팬티를 벗겼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물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다만 그 강도는 물고문만 할 때보다는 못했지만 공포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은 더욱 깊어만졌습니다. 소스라쳐 놀라게 되고 머리를 힘껏 움직이게 되지요.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되어 몸에 땀이 나는 것 같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강력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다시 약해지고, 가끔씩은 발등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대기도 했습니다.
(주석 18)

전기고문은 뒷날 상처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고문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 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온몸이 저리고…”  (주석 19)

김근태는 온 몸에 전류를 받으면서 신체의 마비와 정신적 착란상태에 빠져들었다.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어느 틈에 사그라졌다.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주석
17> 앞의 책, 49~50쪽.
18> 앞의 책, 50~51쪽.
19> 앞의 책,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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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0여 명의 건장한 정사복 경찰에 이끌려 강제로 차에 태워졌다.
경찰관의 잠바로 얼굴이 덮힌 채 30~40분쯤 어디론가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5층 15호실, 이 건물 왼쪽 맨 끝방이었다. 이곳에서 야만적으로 김근태를 고문하고 지휘한 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과 과장(일명 사장) :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 경정 백남운
1과 ? : 경감(?) 고문담당 전문가
1과 상무 :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 경장 박병선
1과 부장 : 경장 ?
  (주석 13)

김근태는 자신을 체포해온 이 자들은 “무슨 열정에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이라고 뒷날 회상을 할만큼 이들은 외견상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순수하다는 인간의 본성을 믿었다. ‘수심(獸心)을 간직한 인면(人面)’ 만을 본 것이다.

백남운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몰려서이기도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구요. 아직 한창 남은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 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 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 거부를 잘 한다지, 여기서도 할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 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 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하였다.”하자 “그렇다면 그 몸으로 견딜 수가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하였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석 14)

‘수심(獸心)’들은 김근태의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긴 채 무릎을 꿇렸다. 거부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넓은 밴드로 눈을 가렸다. “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라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 “김근태는 고문 초입의 심경을 이렇게 그렸다. 그는 낭만파 시인이었다. 그리고 순간,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에 갇혀 고문 당한 유태인들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김근태는 이때까지도 저들이 정말 고문을 감행하지는 못할 것으로 믿었다. 겁주기 위한 협박 정도로 인식하고 어떤 협박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였다. 그는 순결한 휴머니스트였다.

김근태가 이 당시 남영동 인간 도살장에서 당한 고문은 많이 알려졌다. 해외에는 국제인권단체를 통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의 잔혹성,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다시 살피고,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이 참담한 고문을 어떻게 견뎌 왔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추상을 벗고, 구체적인 실상을 추적한다.

나치독일의 비밀경찰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을 고문 집단학살하면서 고전음악을 듣거나, 일요일에는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가족과 약속했듯이, 한국의 고문 기술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왈츠를 듣거나, 군대 나간 아들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 대학진학을 앞둔 자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등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던 점에서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였다.
(주석 15)

‘악의 평범성’은 히틀러 독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의 한국에서도 벌어진 현상이었다.

김근태는 1985년 9월 4일부터 22일 동안 10차례에 걸쳐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되는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1) 군을 고문으로 죽였다.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이 고문살해범이다. 김근태 고문 뒤에라도 야수적인 고문이 근절되었다면 박종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칠성대 위에 올려져 눕혀진 나는 순식간에 완전 결박되었습니다. 머리가 핑 하면서도 “저, 그래 견뎌 보자. 견디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라고 각오했던 바가 아니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저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던 그것이 오고 있는 것이다”라고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별 설득력이 없더군요. 목이 쉰 것 같기만 하구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해. 결국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고 말걸. 이걸 너희들도 알고 있을거야. 클라이맥스에 중지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대화니 화해니 말해온 것을 싹 지울 수는 없지. 오리발을 내밀어도 유분수지”라고 떠올리고, 여기에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여지없이 뚝 끊어졌습니다. 협박자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물고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백남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따라 얼굴에, 눈이 가려져 있는 내 얼굴에 수건이, 노란 세수수건이 덮어 씌어지고, 세상은 희뿌옇게, 누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 양쪽으로 정현규와 최상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수도 꼭지를 틀어 샤워기 아가리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영두가 그 샤워꼭지를 잡고서 사정없이 물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는 한편 주전자에 물을 담아 동시에 쏟아 붓고 또 쏟아 부었습니다.

처음에는 칼을 갈면서 견디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은 견딜 수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을 어떻게 몰아쉬고 또 안 쉬고 또 몰아쉬고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신 냄새 나는 짙은 껌껌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슥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에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솟고 콧속으로 불길이 솟고요. 온몸을 버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이고 하여 칠성대로 기우뚱하였지요.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 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습니다.
(주석 16)


주석
13> 앞의 책, 38~39쪽.
14> 앞의 책, 42쪽.
15>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91쪽, 한길사, 2006.
16> 앞의 책,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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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

012/07/24 08:00 김삼웅

 

고문(Torture)은 '몸을 비틀다'라는 라틴어 ‘torquere'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고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짐승의 행위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마ㆍ야만의 행위다. 그래서 국제법과 국내법은 고문을 금지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간에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 세계인권선언 제1조.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 대한민국헌법 제11조 2항.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좌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력 또는 가혹행위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 대한민국 형법 제125조.

전두환 정권의 들러리 국회라는 평이 따르는 제11대 국회는 1983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14조 2항에서 “고문을 하여 사람을 치상케 한 때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치사케 한 때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국제엠네스티는 1973년 <고문폐지를 위한 국제엠네스티선언>에서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고문의 사용은 인간의 자유 및 생명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간주된다.
2. 고문은 여하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고문을 통한 효력의 폭력은 누증적 악순환을 초래한다. 고문은 전염병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퍼져 나간다. 고문은 고문당한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고문하는 사람을 야수화한다.
3. 인류의 양심에 부합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이러한 악을 근절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의무이다. 우리는 모든 정부가 고문을 금지하는 국내법과 국제법을 존중하고 또한 이를 개선할 것과 유엔결의 3059호를 수호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또한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및 직업상의 책무를 가진 제 인사 및 조직들이 전세계적인 고문폐지운동에 대하여 능동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를 요청한다.

한국에서는 대한제국 말기의 <형법대전>에 따르면 죄인에게 채찍(볼기를 치는 작은 대)과 혁편(革鞭, 종아리를 치는 가죽띠)을 사용하는 정도의 고문이 있었다. 그러다가 국권을 빼앗기면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여 수많은 항일지사들을 죽였다. 병탄 초기의 105인사건과 일제말기 한국어학회사건 등이 대표적인 고문 사례로 꼽힌다.

이승만의 친일파 중용으로 일제의 악질 경찰이 그대로 국립경찰로 들어오면서 고문의 악습이 전해지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특무대 요원, 경찰 등 3천명을 뽑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면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기술은 이들을 통해 오롯이 5공으로 전수되었다.

김근태가 서부경찰서에서 잠을 깬 것은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반, 9월의 이 시각은 아직 미영(未明)이다. 이 시간 이후 김근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 악마들에게 사지가 찢기고 영혼이 파괴되는 한 마리 희생양이 되었다. 출감 뒤 그가 생생하게 기록한 <남영동>을 대본으로 그가 당한 고문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이 부문은 좀 지루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었으면 한다. 오늘 우리가 이 정도나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김근태 등 민주인사들의 희생과 투쟁의 댓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근태와 이근안을 착각하는 세대는 이것이 ‘신화’가 아닌 불과 30여년 전의 현실이었음을 인식했으면 싶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 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끼어 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7차례의 유치장 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난 2년 동안의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다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여다보고, 바람 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되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주석 11)

혁명가들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많은 편이다. 계산하고 타산에 밝은 사람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속된 이해와 이문을 따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낭만주의자들은 물질적 셈법보다 하늘의 별을 헤고, 호수의 포말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가망이 없는 혁명도 꿈꾸게 된다. 반독재 민주화운동가 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김근태의 심중에도 낭만성이 켜켜이 쌓였다. 학창시절 그는 문학서적을 끼고 살았다.

신새벽 의경의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서도 김근태는 자신이 풀려나는 것으로 알았다. 여전히 짐승들이 지배해온 5공의 권력 구조를 자세히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에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해지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고무풍선이 바늘에 찔려 별안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 한 사람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하거나 추하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주석 12)

주석
11> 앞의 책, 40쪽.
12> 앞의 책, 40쪽.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3 09:50 김삼웅

 

 

신변의 위기를 느낀 김근태는 제5차 민청련 총회도 참석하지 않고 은신하다가 8월 24일 옷을 갈아 입고, 민통련 이창복을 만나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서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의 미행을 당했다. 오랜 세월 수배 과정에서 피신에 이골이 난 김근태는 지하철을 타면서 경찰을 따돌리고, 민청련 사무실에 들렸다가 장충체육관 근처 커피숍으로 이창복을 만나러 갔다.

커피숍 근처에서 김근태는 미리 배치된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 등 1개 소대 병력에 의해 연행되기에 이르렀다. 민청련 의장을 사임한지 14일 만이다. 정보기관은 김근태와 이창복이 만나는 장소를 정확히 알고 경찰을 배치했다가 체포한 것이다. 전화를 도청한 것이다.

연행된 김근태 전 의장은 당시 위기감을 느끼고 도망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8월 26일 즉결심판에서 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한 유언비어 혐의로 구류 10일을 선고받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복역 중, 9월 4일 새벽 5시 30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이첩되어 6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구류 기간 중 집권세력의 강경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사하라는 명령과 지시를 경찰에 내리고, 이후 이첩시킨 대공분실에서 엄청난 고문을 자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주석 6)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의 체포와 함께 집행부 구속, 사무실 압수수색 등 민청련을 압살하고자 했다.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이 체포된 데 이어 9월 8일 중부서에 의해 사무실이 수색당하고, 9일에는 김희택 부의장과 서원기 집행국장이 긴급 수배되었다. 또 10월 1일에는 김종복 청년부장과 김희상 대변인 연행, 2일에는 최민화 부의장, 7일에는 권형택 사회부장이 각각 연행되었다. 이들에게는 집시법 정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이 적용되고, 10월 14일에는 체포하지 못한 민청련 임원진 전원에 대해 전국수배령이 내려졌다. 임원진의 가족들에게도 정보과 형사와 강력계 형사들이 동원되어 미행하였다.

5공 정권은 10월 29일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 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청련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주석 7)

정부당국의 날조된 발표는 순치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어용신문들은 “학내외 시위와 노사분규를 배후 조종”한 “자생적 사회주의 집단”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김근태의 정체가 ‘적색분자’라고 매도하였다.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언론에 의해 인격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빨갱이, 용공좌경, 종북, 적색분자라는 낙인은 사회적 매장을 의미하는 사형선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밖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질하는 시간에 김근태는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망적인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청련 활동 중에 여러 차례 정보기관의 간부와 요원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기관지 <민주화의 길>이 대학근처 서점을 통해 학생들 손으로 들어가고, 학생운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 민청련의 성명서와 선언문 내용이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 노동문제에 너무 자주 그리고 깊이 개입한다는 등의 이유였다. 김근태는 그럴 때마다 당당하게 해명하면서 민청련의 활동을 늦추지 않았다.

여러 통로를 통하여 다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의 대표였던 사람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김병곤 씨나 황인하 씨 경우처럼 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오히려 깊게 하는 시기로 삼자는 은밀하면서도 야무진 계획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주석 8)

김근태는 5공세력의 야수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 체제의 국군보안사 출신 전두환과 그 일당이 저지른 12ㆍ12하극상, 광주학살, 삼청교육대, 양심적 언론인, 정치인 탄압 등 잔인무도함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셈이다.

본인이 당한 끔직한 것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 자신을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핀으로 본인을 과녁에 고정시켜 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칼날을 소리없이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왔던, 반드시 불온ㆍ불순의 거대한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주석 9)

김근태는 5공 권력이 자신을 정치적 ‘과녁’으로 삼는 이유를 대강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게 그리고 민주화운동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협과 양보가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팍하게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의한 표적으로서 희생양으로서 본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주석 10)


주석
6> 앞의 책, 234쪽.
7>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1980년대편 2권>, 313쪽, 인물과 사상사, 2003
8> 김근태, <남영동>, 29~30쪽.
9> 앞의 책, 30쪽.
10> 앞의 책,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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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2 12:06 김삼웅

 

민청련은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전초기지가 되고 김근태와 간부, 회원들은 전위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민청련의 투쟁이 강화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가중되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집행부의 연행 횟수가 늘어나고, 사무실 압수ㆍ수색도 잦았다. 정부는 각 부문운동 단체들과 연대투쟁의 발원지가 민청련이란 사실을 알고 강도 높은 탄압을 자행하였다.

1985년 10월 14일 민청련 지도위원 (계훈제ㆍ백기완ㆍ이우정ㆍ고은ㆍ김병걸 등 32인)들은 <민청련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다-모든 민주세력과 더불어 민청련 파괴음모를 저지할 것을 결의하며>란 결의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민청련 탄압ㆍ파괴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다음은 요지.

우리 지도위원들은 전두환 정권에게 엄숙히 경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애국적인 학생ㆍ노동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 중 극히 일부분만을 뽑아서 용공으로 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난 2년여 동안 공개적으로 활동해온 민청련을 학생들의 배후로 조작하여 탄압하려는 한심스런 작태에 우리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배후 및 용공조작이 애국적인 청년ㆍ학생들을 탄압하려는 명분의 조작일 뿐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단계적으로 분리, 탄압하려는 간교한 술책임을 직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그것은 전체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군사독재정권의 전면적 파괴공작의 명백한 신호로 간주하고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공동대처를 모색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전두환 정권에게 간곡히 충고한다.
민청련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고 광주민중학살을 비롯한 자신의 과오를 분명히 시인하면서 스스로 퇴진하는 길만이 민족사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주석 3)

김근태가 주도하는 민청련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던 그동안 금기사항이 된 문제를 제기했다.
‘광주학살진상규명과 전두환 책임추궁’을 이슈화한 것이다. 그리고 겸양과 포용 정신으로 각급 부문운동 그룹과 연대하여 5공정권과 대결하면서 전두환 세력을 코너로 몰았다. 그렇지 않아도 2ㆍ12총선 국면과 제12대 국회에서 야당의 활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던 참이었다. 청년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를 찍었다.

총선의 패배로 휘청거리던 5공 정권은 점차 활성화되어 가는 학생, 재야, 민중운동의 도전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시 탄압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타겟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의 연결고리인 민청련이었다.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려다가 국내의 반발과 미국의 불승인으로 철회돼, 정치적 위신이 실추된 전두환 정권은 그 제물로 민청련과 김근태를 선택한 것이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김근태 전 의장을 서부경찰서에서 구류 만기일인 9월 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참혹한 고문을 했다. (주석 4)

민청련은 1985년 8월 10일 마포구 신수동 소재 신촌교회에서 제5차 총회를 열었다. 여기서 김근태가 물러나고 새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한경남 전 부의장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은 최민화 전 부의장, 김희택 전 운영위원장, 구속 중인 김병곤 전 상임위원장을 선출하는 등 임원진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당시 김근태 의장은 2년 간의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심신이 지쳐있었는데다가, 김병곤 상임위원장의 경고 쪽지 (김병곤은 검찰에 구속 중에 곧 김근태를 체포할 것 같다는 쪽지를 통해 알려 왔다 - 필자)와 같이 구속된 황인화 한국기독청년협회(Eye) 총무부장 선을 통하여 전달된 기독교권의 우려의 목소리로 인해 이미 표적이 된 사실과 함께, 탄압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민청련 단체를 보호하려면 의장직에 있을 수 없다는 판단에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주석 5)

김근태의 운명 앞에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 왔다. 지금까지는 용케 피해 오고, 민청련을 이끌면서는 몇 차례 집시법 위반 정도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궁지에 몰린 5공 학살자들에게는 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압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래 그 시대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를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삼았다. 거기에는 이성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려는 배제의 효과도 고려된다. 역대 독재정권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처지가 되면 어김없이 공안사건을 날조하여 국민을 속이고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럴 때면 제물이 필요했다.


주석
3> <민주화의 길> 제11호, 2~3쪽, (발췌)
4> 김재하, 앞의 책, 164쪽.
5>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33쪽.

 



김근태 평전/[5장] 남영동 인간도살장에서 당한 모진 고문

2012/07/21 09:50 김삼웅

 

 


2ㆍ12총선 결과는 정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국민은 관제야당이라는 민주한국당(민한당) 대신 김대중ㆍ김영삼이 급조한 신생야당 신민당을 제1야당으로 선택하였다. 두 김씨가 아직 정치규제에서 풀리지 않았으나 신민당의 ‘대부’가 되어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마침내 정국은 5ㆍ17 쿠데타 5년여 만에 5공세력과 새로 결집된 구야권세력이 팽팽하게 대결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동안 민청련을 비롯하여 학생ㆍ청년ㆍ재야ㆍ노동계의 치열한 반독재 투쟁의 결과로 5공의 철벽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진영은 민청련의 결성을 필두로 1984년 1월 6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같은 해 4월 14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동년 5월 18일 민추협, 동년 6월 29일 민민협을 각각 결성하였다. 이와 함께 재야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포괄하는 민주통일국민협의회(민통협)이 결성되면서 민민협과 민통협의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김근태는 민민협의 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민주세력의 연대를 통해 투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뼈저린 인식때문이었다. 그동안 청년ㆍ노동ㆍ재야 단체들의 개별 활동으로 인해 효율적인 투쟁 성과를 갖지 못한 채 진행된 고립된 폐쇄상태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민청련은 각 민주화ㆍ노동단체를 묶어 협의체 건설에 나서 1984년 6월 29일 상지회관에서 민민협 창립대회를 열었다.

창립대회는 대표위원으로 김승훈 신부, 김동완 목사,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을 추대하고 서기에 김근태 의장을 선출하였다. 이밖에 감사, 중앙위원회 위원, 상임위원회 위원을 각각 선출, 위촉하였다.

민민협은 각 민주화운동 단체가 그간 합법 영역에서 축적한 역량을 토대로 구축한, 조직운동의 힘이 결집된 형태였다. 이후 민민협은 8월 11일, 종로 1가 서울빌딩 703호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10월 1일에는 민민협 소식지 <민중의 소리>를 창간한다. 한편 재야에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상징적 정치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10월 16일 출범하게 되고, 민민협과 국민회의는 1985년 3월 29일 민주ㆍ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통합한다. (주석 1)

80년대 한국사회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청년학생, 노동자, 재야, 여성들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와 노동자생존권 보장, 민족자주를 요구하며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이 시기 민청련의 투쟁은 괄목할만 했다. 김근태는 항상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 시기 민청련의 주요 활동을 일지로 정리한다.

1984년
4월 7일 - 2차 총회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선언문 채택, 침묵 가두시위
19일 - 4ㆍ19묘지 참배, 경찰의 집단 폭행으로 회원 다수 부상
5월 1일 - <모든 양심수 전원 석방>요구하는 성명서 발표
14일 - 광주 망월동 묘소 참배, 광주 도청 앞에서 가두시위
19일 - 광주항쟁 희생자 추도식, 광주항쟁 자료집 발간
6월 14일 - 노동자 복지협회 등과 택시기사 파업시위 관련 가두홍보
8월 15일 - 민족해방기념식 행사 경찰 방해로 무산되자 가두시위
8월 28일 - 일본 각료 방한 반대 성명 발표
0월 20일 - 제3차 총회(홍사단 강당)
11월 17일 - <민정당사 농성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 기자 회견

1985년
3월 1일 - 국민회의 등 6개 단체와 흥사단에서 3ㆍ1절 기념행사 경찰지지로 성명서 발표 뒤 파고다 공원에서 행사
3월 2일 - 국민회의 등과 <현정권의 야만적인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한다>는 공동성명 발표
3월 21일 - 제4차 총회, 결의문 채택, ‘광주사태 진상규명 위원회’ 발족
4월 2일 - <부당한 철거정책 중단하라>는 전단 살포
11일 - 15개 단체와 공동으로 <옥중에서 신음하는 민주인사 구출하자>는 성명 발표
12일 - <전두환 씨 방미 철회>성명 발표
19일 - 민통련 등과 수유리에서 4ㆍ19혁명기념식 거행
5월 1일 - 전국 32개 민주단체와 기자회견, <5월 광주 민중항쟁 5주년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 발표
5월 3일- ‘광주학살 진상규명위원회’(민청련 소속) 주최, ‘광주민중항쟁 진혼굿’ 개최
10일 - 경찰, 사무실 압수ㆍ수색, 유인물, 책 등 압수, 김근태 등 연행
17일 - <광주사태 책임자 처단 촉구대회>가두 시위 참가
18일 - 기자회견 <5ㆍ18이후 계속되는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규탄하라>는 성명 발표.
19일 - 경찰, 사무실 수색ㆍ압수
25일 - 민통련 등과 <서울 미문화원 농성투쟁 지지>성명 발표
29일 - 전학련 등과 종로 2가에서 ‘광주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 개최
30일 - 경찰 폭력 규탄하는 성명발표
6월 7일 - 9개 단체와 서울대에서 국민토론대회 개최
12일 - 민청련 여성부 등 10개 단체, 17개 여학생 대학연합, ‘성도섬유 부당해고 여성 노동자 추진위’ 결정, 간부 3명 연행
22일 - 김근태 의장 중부서로 연행
26일 - 11개 단체와 <현정권의 말기적 노동운동 탄압규탄> 성명
8월 10일 - 5차 총회, 의장 한경남, 부의장 최민화 등 선출
(주석 2)

주석
1>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19쪽.
2> <민주화의 길>, 1~12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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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20 07:33 김삼웅

 

김근태와 민청련이 치열하게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을 즈음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84년 2월 25일 정부는 정치활동 규제자 202명을 추가 해제하고, 이를 계기로 5월 18일 김영삼 상도동계와 김대중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발족하였다.

민청련의 활동이 야권 정치인들을 각성케 하고 민추협 발족에 영향을 주었다. 민추협의 발족으로 5.17사태 이후 쑥대밭이 되었던 야권은 새로운 구심점을 찾고 진영을 갖추게 되었다.

이 해 6월 29일 민청련은 민중운동단체들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을 결성하였다. 청년ㆍ노동자ㆍ농민ㆍ재야ㆍ종교계 등 사회 각 민주세력이 그동안 합법영역에서 축적한 역량을 토대로 연대한 것이다. 민민협 결성을 주도한 김근태는 <민주화의 길> 제4호 <민주화의 깃발을 메고 힘차게 나가자>는 시론을 통해, 결성의 의미와 투쟁방향을 천명했다.

김근태는 “민민협 창립은 민주화운동의 일대 진전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화운동의 실현, 그것은 민민협을 통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민민협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할 것이며, 동시에 민청련운동의 강화를 통해 민민협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는 전제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약)

민주화의 깃발을 메고 힘차게 나가자!

1. 민민협은 무엇을 하려는 운동인가.

청년ㆍ노동자ㆍ농민 및 지식인운동 등 각 부분운동의 역량을 더욱 빠른 속도로 증대시키는 데에 기여하여야 한다. 민중 민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 증가는 물론 올바른 운동방향 정립과 통일성 획득ㆍ투쟁성 제고, 운동규율 강화 등에 일보 전진을 이뤄내야 한다.

민주화 대의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조직운동단체가 대중적 신뢰를 얻는 것은 대단히 귀중하지만, 그 성과가 어떤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어 혹시는 민중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교만함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교만함은 운동에서도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이는 분열과 파쟁, 그리고 대의로부터의 타락을 결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민민협 창립의 성과는 무엇인가.

민주화운동의 통일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을 구체적으로 형성한 점이다. 현재 국면에 대한 여러 해석 상의 차이와 부분운동의 내적 특수성이 따른 강조점의 차이, 이에 따른 역량배치에 대한 견해 차이를 각 부분 내에서 극복하고, 진지한 검토와 상호비판을 통해 방향을 수립하면서 양보 속에서 민민협의 창립이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의 민주화운동이 개인적 관계를 넘어서 집단화되고 있으면서도 각 집단의 특수성에만 매달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민민협에는 농민ㆍ노동운동 부문과 양심적인 지식인운동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민중운동으로부터 지식인 양심운동세력은 기층대중 생활의 고난과 참을 수 없는 소외의 아픔과 그러면서도 끈질기며 위력적인 민중운동 발전 가능성을 배우고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민민협 운동이 갖고 있는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민민협 내부에서 어떤 의사결정과정의 복잡함과 국민 대중 속에서의 저명함을 부족으로 인해 대표성이 미흡한 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를 오히려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하여 조직운동의 발전과 집단적 지도력의 발전계기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민민협은 앞으로 한 발자욱씩 더욱 빠른 속도로 전진해 나갈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 민청련은 이에 적극 기여하고자 한다.
(주석 18)

김근태는 이 성명에서도 밝혔듯이 민주화운동 조직ㆍ단체가 “특정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개인 우상화를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는 5공시대 최초로 공개적인 반정부 단체를 이끌면서, 청년민주화운동의 리더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속에서 특정개인의 명망성으로 단체가 귀속되는 것을 한사코 막았고, 그런 전범을 보였다. 그리고 민주화운동가들의 겸손한 처신을 강조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이 실시될 때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이 민청련의 투쟁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김근태 의장에게 종로 출마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김근태는 민청련의 성과를 자기 혼자서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아직 청년운동의 역할이 남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하였다. 그의 언행일체와 겸손함이 묻어나는 ‘비화’다

이즈음, YS는 김근태 의장을 외교구락부에서 만나 종로에서 출마해달라고 권유를 했다.
이때 김근태 의장은 고마운 제의이기는 하나 아직 때가 아니고 나중에 집단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이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김근태 의장은 대신에 조영래 변호사를 추천했으나 조영래 변호사도 후보제의를 고사했다.

김근태 의장과 YS의 회동은 공개되지 않았는데, 이는 김근태 의장이 당시 지위와 역할을 감안해 본다면 순수성의 훼손과 더불어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그랬던 것이다.
(주석 19)


주석
18> 앞의 책, 제4호, 2~3쪽.
19>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29쪽.



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9 08:00 김삼웅

 


김근태와 민청련 회원들은 광주항쟁 4주년을 앞두고 5월 14일 버스 두 대로 광주로 내려가 오후 2시 망월동 묘소에 분향하고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김근태는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란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추도식을 마친 일행은 광주 금남로를 따라 스크럼을 짜고 <5월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많은 광주시민들이 지켜보고,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에 새로운 충격과 분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청련은 5월 19일 오후 서울 흥사단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라는 주제로 광주민주화운동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진혼굿과 더불어 광주항쟁의 사진ㆍ판화전을 열었다. 또 광주시민 학살 사진과 함께 수기와 일지 등을 담은 자료집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제작 배포하였다. 광주학살 사진 전시와 자료집 발간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날 추모식이 끝난 뒤 30여 명의 참석자가 경찰의 폭력으로 부상당하였다.

광주 망월동 묘소에서 발표한 김근태의 추모사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영령들이시여.
금남로에도, 무등산에도, 여기 당신들께옵서 몸과 혼을 눕힌 망월산 언덕에도, 봄은 다시 찾아와 푸르른 들빛 빛나고 있건만, 술과 흥분제로 마비된, 저 잔학무도한 군사팟쇼의 하수인들의 미친 총칼에 찢기고 잘리운 상처 아물릴 길 없어 이 푸르른 봄에도 상처마다에서 피를 뚝뚝흘리며 살점을 뜯기우며, 목을 비틀리우며, 우리의 이 아픔, 이 원한, 이 신음을 풀어달라 끝없이 뒤채이며, 누워계신 영령들이시여.

이 땅의 민중들이 민주주의의 햇살 아래 통일된 반도의 남북을 자유로이 오가는 생기찬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이 땅의 민중들이 폭력도 착취도 외압도 없는 해방과 평화의 땅에서 서로 어울려 즐거이 일하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혼백이나마 고이 잠들게 하여 달라, 즐거이 누워있게 하여달라고, 오늘도 그날의 그 피묻은 하소연을 금남로여, 광화문이여, 우금치며, 공장이며, 학교며, 농촌이며, 바닷가며, 산골이며, 이 강산 골골을 원혼으로 떠돌며 부르짖고 계신 영령들이시여, 투사들이시여, 전사들이시여.

영령들이시여, 5월의 투사들이시여, 민족의 전사들이시여, 저희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저 창칼 앞에 굴복하여 복된 삶을 영위하기 보다는 당신님들이 보여주셨듯이 결단코 저 창칼에 맞부딪혀 싸우다가 쓰러지는 영광의 삶을 택할 것입니다. 창칼의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교활하면 교활할수록, 폭력적이면 폭력적일수록, 저희들의 싸움 또한 가열되어 갈 것입니다.

천지신명이시여, 하늘과 땅의 모든 바른 영령들이시여, 부디 여기 망월산 언덕의 5월의 피묻은 원혼들께서 고히 눈감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5월의 영령들이시여, 천지신명들이시여, 저희들이 행여 눈이 어두워져 제 앞에 바르게 가리지 못할 때면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 되어주시옵고, 저희들이 행여 폭력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면 이를 떨치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의 비결이 되어주시옵고, 행여 저희들이 사사로운 욕망과 다툼이 민주장정의 앞길을 가로막을 때면 이를 과감이 척결하고 나아갈 수 있는 통합력의 샘물이 되어주시옵고, 언제나 저희들이 작은 허물과 비겁을 나무라시기 전에 저 잔학무도하고 교활한 폭력과 폭력자들과 폭력구조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 저 미친 하수인들까지도 평생 죄책감을 느끼게는 하시되, 그들의 인간됨만은 너그러이 감싸안아 주시옵고, 이들과 저희들이 그 함정에서 분연히 벗어나도록 도와주시옵고, 대신 폭력의 원흉들이 그들 자신이 만든 폭력의 함정에 영겁토로 갇혀 신음하도록 함으로써 이 땅 이 세상에 폭력을 생산하고 조성하는 구조가 영원히 절멸되도록 도와주시옵길 비옵니다.

영령들이시여, 민족의 전사들이시여.
당신들은 편히 누우신 그대로 저희들과 민족의 앞길을 밝히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힘과 빛으로 되어 계시오니, 원컨대 이제는 떠도는 원혼을 거두시고, 피흘림을 멈추시고 편히 쉬옵소서. 평안하소서. 안락하옵소서. 영령들이시여.

살아있는 저희들은 살아있는 동안 언제까지나 부끄럽고 죄스러울 것이옵니다만, 저희들의 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조금씩 씻어가는 모습을 부디 믿고 지켜봐 주시옵고, 지금도 이토록 작고 초라한 터에서 여러모로 불편하시고, 폭력의 난무가 귓전을 어지럽혀 고정하시기 힘든 형편이겠지만 이같은 저희들의, 이 민중의, 이 민족의 작은 노력들이 뭉쳐나가는 그 끝에 당신님들께서 영원히 평안스럽게 잠드실 수 있는 세상이 기필코 올 것임을 믿으시고 불편하시더라도 평안히 잠드시옵소서. 부디 안락하소서.
(주석 17)


김근태의 망월동 추모사는 민청련 의장의 입장에서이기도 하지만 개인 김근태의 5월 광주항쟁과 이들에 대한 학살, 그리고 전두환 세력의 폭력구조, 어떠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자기신념의 확신을 밝힌 글이다.

“저희들이 행여 눈이 어두워져 제 앞을 가리지 못할 때면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 되어주시옵고, 저희들이 행여 폭력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면 이를 떨치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비결”이 되어 달라고 광주의 영령들에게 빌고 다짐하였다. 김근태는 2011년 말 사망할 때까지, 이 다짐을 잊지 않았고, 남영동의 혹독한 폭력(고문)에도 굳건하게 버티면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망월동의 다짐’ 때문이었다.

주석
17> 앞의 책, 제3호, 2~3쪽, 1984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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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8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민청련 의장을 맡으면서 점차 정치 투사가 되어갔다.
온순했던 성격도 적극적 야성으로 변해지고, 안기부 수사국장의 술상을 뒤엎을만큼 담대해졌다. 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해지고 대정부 투쟁방법도 여러 방향으로 확대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기관지 발행이었다.

당시 제도언론은 이미 언론의 정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대거 군사정권에 쫓겨난 언론계는 독재정권에 부역하면서 정관계 진출과 치부에 눈이 먼 신문ㆍ방송인들이 많았다.

민청련은 반독재투쟁의 홍보전략으로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정론부재의 언론상황에서 대안언론의 기능을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84년 3월 11일 “관제언론이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이 어두움을 뚫고 민주화운동의 앞길을 열어가는 횃불로서 대중언론의 깃발을 높이 들 것”을 선언하며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창간했다.

<민주화의 길>은 반독재 투쟁의 전위 역할을 하게 되고, 이후 각급 단체의 기관지발행의 효시가 되었다. 김근태는 창간사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들며>에서 민청련 기관지의 ‘다섯 가지 임무’를 제시했다.

첫째, 민주화운동의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민주화운동은 올바른 운동론하에서 전개되어야 하며, 올바른 운동론은 치열한 논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민주화의 길>은 민주화 열망을 수렴하는 광장이 될 것입니다.

둘째, 정확한 정세분석입니다. 기본적인 정보의 결핍과 와전 때문에 우리 주변은 주먹구구식의 판단이 만연하여 있습니다. 사실의 집적만으로 과학적 판단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 사실의 확인이야말로 올바른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입니다.

셋째, 우리 내부의 동질성 확보입니다. 우리 내부의 분열이나 갈등은 불필요한 오해나 편견 때문에 일어납니다. 정보와 의견이 보다 신속ㆍ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면 우리 내부에 인식의 동질성은 확보될 것이고, 더 나아가 실천의 방향을 일치시키기도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넷째,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 관제언론에 의해 가리워졌지만 특히 민주화운동에 의미 있는 사건을 힘닿는 대로 알릴 것입니다.

다섯째, 다른 운동권과의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운동권의 소식은 물론, 지면을 할애하여 제언을 실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주석 15)

그동안 제도 관제언론에 식상해 온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길>은 시원하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수가 되었다. 제도언론(인)에도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이를 접하는 국민이 소수에 불과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많이 알려졌다.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신선한 대안언론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지면의 기사와 정세분석은 상황인식과 민주화운동의 지침 역할을 하였다. 창간호에는 문익환 목사의 격려사 <자유-생존-평화>와 신경림 시인의 격려시 <아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가 권두를 장식하고, <한반도 주변정세와 한국의 정치ㆍ경제>의 분석, 학원ㆍ노동ㆍ농촌ㆍ재야ㆍ종교계의 소식을 실었다. 하나같이 제도언론에서는 보기 드문 뉴스와 분석이었다. 또 ‘두꺼비’란에 <통일문제 사건을 보면서>라는 시론, 민청련의 활동 경과보고, 시사만평, 민청련의 규약 등을 소개하였다. 기관지는 4~6배판의 20쪽에 불과했지만 내용은 알찼다. 발행인 김근태, 편집인 박계동 체제의 기관지였다.

제2호는 4.19특집호로 제작하여 1984년 4월 25일자로 발행하였다. 2호의 권두논설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 기만적 화해정책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실천>은 내부에서 많은 토론을 거쳐 작성한 민청련의 상황인식과 실천방향을 제시한 글이다. 이 시기 김근태의 시국인식을 살피게 한다. 이 논설은 오랫동안 청년학생운동의 담론이 되고 더러는 ‘지침’이 되었다.

하나의 칼이라 함은 국민대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이다. 즉 대중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대중의 삶 속에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중에 대한 선전을 강화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부정부패의 폭로와 국민대중을 무시하는 제 분야 정책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현 정권의 폭력성과 매판성 및 부도덕성을 철저히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방패는 각 부문운동의 조직력을 강화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쓰라린 시련에 무릎꿇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는 관념론이나 준비론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투쟁을 통해서 고난을 감수하면서 추진될 때에만 비로소 실질적 성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은 고립되어 있는 단위 조직의 개별적 강화가 아니라 운동의 통일성을 기하는 시각에서 조직력의 발전과 통합을 이룩해나가야 한다.

또 다른 방패는 기층 대중과의 구체적인 연대다. 지식인들이 관념적 대중운동 토론에 머무르는 것을 반대하고 기층 민중과의 정서적 동질성을 형성하여 우리는 지식인 노동ㆍ농민운동 참여가 갖는 정당성과 합법성을 쟁취해야 한다.
(주석 16)

제2호는 ‘해직언론인’ 명의로 <권언복합체의 매카시즘>이란 시론, 김정환 시인의 <그날>, 김승균 지도위원의 <4.19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무기명으로 <4월 혁명의 현재적 의미>, 김병걸 지도위원의 <70년대의 몹쓸 유산>, 정세분석으로 <최근의 정치ㆍ경제ㆍ사회상황>, 민청련에서 의욕적으로 신설한 <여성부 발족에 부쳐>, 운동의 노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등이 실렸다.

회원들은 기관지가 나오면 시내 중심가에 나가 배포하였다.
격려해주는 시민들도 많았으나 외면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1984년 3월 14일 오후 7시경 김근태는 종로 2가 4거리에서 배포하다가 종로경찰서 정보계장이 진두지휘하는 사복경찰에 의해 옷이 찢기고 땅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영장도 없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근태는 불법적인 물리적 강제 동행을 거부하다가 경찰관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하고, 3월 16일 즉결재판소로 넘겨져 구류 3일을 선고받았으나, 당일 석방되었다. 민청련은 김 의장의 강제 연행에 항의ㆍ폭력경찰을 고발하는 성명을 내고, ‘내무ㆍ법무장관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폭거에 항의하였다.

민청련은 5개 청년단체들과 연합하여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보고서>의 발표에 이어, 8개 청년단체와 공동으로 <더 이상 이 땅에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는 제하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전두환 정권에서 자행된 인명살상과 인권유린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주석
15> <민주화의 길>, 창간호, 3쪽.
16> 앞의 책, 제2호,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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