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7 08:00 김삼웅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김근태는 1965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공대가 아닌 상대를 택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지만, 가정의 가난을 극복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가 대학에 진학한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추진으로 정국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서울의 시위대는 시내 중심부까지 진출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재원을 일본에서 가져오기 위해 쿠데타 직후부터 극비리에 한일회담을 진행했다. 여기에는 아시아의 반공기지연대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1961년 6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일본 수상 이케다(池田)의 회담에 이어,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문제가 한ㆍ미ㆍ일 3국 간에 장막 속에서 은밀히 논의되었다. 대일 협상진행과정을 비밀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 와서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근태는 시국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내의 ‘순수서클’이라는 기독교서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을 뿐이다.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대일굴욕회담을 강행하면서 반대측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박정희 정권의 처사는 한 학구파의 대학생을 더 이상 캠퍼스에서만 머물러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굴욕회담 반대 시위는 야당 및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면서 반대 시위가 대학가로 번졌다.

1964년 3월 24일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대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 5월 20일의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및 5월 25일의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로 이어졌다. 6월 2일 서울시내 대학생 6,000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광화문까지 진출한 데 이어 3일에는 수만명이 "박정권 타도, 매판자본 몰수" 등을 외치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날 저녁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물리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근태는 학내 사회과학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도 없이, 돈 몇 푼에 덜컥 국교정상회의 길을 튼 박정희의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운동하는 동료들의 밝은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이 그의 운동에 뛰어든 변이다.
물론 그가 운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성장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강제퇴직, 그로 인한 가난과 소외감 그리고 행방불명된 세 명의 형들의 민족주의적 영향 등이 잠재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와 작고한 조영래 씨와 함께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서 ‘경기고 출신 65학번 트로이카’로 불린 손학규 씨는 “김근태가 학생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아주 얌전하고 데모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석 1)

박정희는 거센 국민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을 타결하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기본관계조약은 양국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인 일제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에 매듭 짓고 말았다. 액수도 문제지만 동남아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의 배상을 받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또 이 협정으로 한국의 40해리 전관수역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저인망 어선의 남획으로 우리 인근 바다에서 어족자원이 씨를 말리게 되었다.

김근태는 굴욕회담 반대 시위에는 참가했으나 아직 리더 그룹은 아니어서 계엄사태에서도 구속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상대 안에 구성된 경우회와 경제복지회 등 서클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분야의 공부에 매달렸다. 이 시기에 각종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점차 사회의식의 깊이와 지평을 넓혀 나갔다.

당시 문리대의 경우 행동을 중시한 반면 상대는 이론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상대 내에는 이른바 ‘지하서클’이 다른 대학에 비해 많았고, 사회과학 공부도 훨씬 많이 했다. 그때 공부한 서적은 주로 폴 바란, 스위지, 모리스 돕 등이 쓴 정치경제학 저서들이었다. 1학년 때는 주로 위와 같은 책들을 영어 원서로 공부하고 가끔은 청계천 고서방을 통해 어렵게 입수한 <세계사 교정>(소련 과학아카데미 발행), <조선경제사>(백남운 저) 등 이른바 ‘마분지 서적’ 등을 읽었고, 2학년이 되면서는 일어를 배워 진보적인 일어 서적을 탐독했다.
(주석 2)

김근태는 지식욕이 왕성했다.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영어와 일본어 책을 구해 읽으면서 점차 역사문제와 한국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이 생기면 청계천 헌책방을 순회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교양서적과 미군 PX를 통해 흘러들어온 양서를 구입하였다. 국내외의 문학서적도 많이 구하여 읽었다. 서클에서는 읽은 책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당시 상대 조교로 있던 안병직은 김근태가 2학년 때에 처음으로 만났다. 안병직의 증언.

"김근태는 몇 년 만에 나올까말까 하는 비상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판단력,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천재’였다. 2학년 초엔 대부분 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등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그와 수 차례 이야기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보아 그때 당시부터 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 같다.” (주석 3)


주석
1> 이재화, 앞의 책, 157쪽.
2> 앞의 책, 157~158쪽.
3> 앞의 책,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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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저항의식은 이 즈음부터 가슴 한 켠에서 모락모락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쫓아낸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그것을 박정희 정권과 연계시키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5.16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께서 별안간 강제로 정년퇴직하게 되고, 그 이후 우리의 가정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나는 박정희 권력을 지지하는 쪽에 서 있었다. 고교 시절 내내 그랬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대열에 전교생이 참여했을 때도 나는 두어 명을 꼬셔서 교실에 외롭게 남아 있었고, 그 전해 그러니까 1963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도 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주장하는 박정희 쪽이었다. (주석 10)

김근태의 중ㆍ고등학교 시절은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였다.
4ㆍ19혁명으로 잠시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듯 하다가 1년여 만에 박정희의 군사쿠테타가 일어나면서 천지는 군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김근태는 가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도 사회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범생’이었다. 경기고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를 두 군데나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사회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영어회화 클럽에도 참석하는 등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고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모범생’이었다.
비록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강제퇴직을 계기로 사회가 불합리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형체를 가진 사회의식은 아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마디로 ‘친정부적 학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을 이 나라의 산업발전과 아울러 국민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쾌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박대통령의 말이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형식논리’에 속은 것이다. 그의 고교동창생들의 기억에도 김근태는 영어회화클럽에 참석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주석 11)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도 모범생이었던 김근태는 여전히 아버지에 관해 소년기의 콤플렉스와 반항심을 털쳐내지 못하였다.

미아리고개에서 살 때였는데 집 근처에 복덕방이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버지께서는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다가 나오시면서 반색을 하시곤 했다. 복덕방 노인들이 빼다 박은 듯 똑같다고 하며 웃으실 때 나도 그냥 따라 웃었지만 그것은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하고 달라요” 하는 부정의 웃음이었다. 이런 건방진 내가 마음의 빚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이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의 책, 417쪽.
11> 이재화, 앞의 책, 156~157쪽.
12> 김근태, 앞의 책, 417쪽.

 


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형들은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로 일제말기 일본에 유학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민족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지식청년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형들의 문제로 인해 김근태는 뒷날 반독재 전선에서 정보기관과 보수신문에 의해 극심한 고문과 색깔론에 시달려야 했다.
6남매 중 큰형 김홍태, 둘째형 김성태 그리고 셋째형 김영태 씨 등 위로 세 명의 형들이 한국전쟁 전후로 민족운동을 하다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외갓집의 삼촌들도 마찬가지였다.

큰형 김홍태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 해방이 되자 귀국해 진보적 운동을 했다. 그는 경기고보에 수석 입학한 ‘수재’로서 해방 당시 ‘탁월한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당시 우익운동을 했던 계훈제 씨는 말했다.

둘째형 김성태는 맏형 김홍태와 함께 원효로 적산가옥에서 자취를 하면서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역시 민족운동을 했다.

셋째형 김영태는 양정국교 5학년 때 의용군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이 날 무렵 김근태는 불과 세 살이어서 형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석 6)

6.25전쟁기에 이념적으로 갈리거나 피난 중에 이산이 된 가족이 수없이 많았지만, 김근태 가족의 아픔도 컸다. 수재 소리를 듣던 아들 셋이 6ㆍ25 동족상쟁의 와중에서 실종된 것이다. 다시 이재화 씨의 글을 인용한다.

한국전쟁 이후 형 세 명은 집안과 관계가 끊어졌다. 85년 10월 김근태가 민청련사건 (당국은 민추위 배후인물로 그를 엮으려 했다)으로 구속되면서 검찰은 “위 3명의 형들이 월북했다” 며 언론 플레이를 해, 모든 언론매체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형 국태 씨는 “큰형이 9.28수복 이후 수원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둘째형은 1ㆍ4후퇴 때 서울에서 봤다”는 풍문만 떠돌았을 뿐 확인할 길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한국전쟁 이후 김근태 씨의 집안은 쑥밭이 되어버렸다. 그의 집에는 연일 형사들이 진을 쳤고, 부모들은 소식이 두절된 아들들의 얼굴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울먹이곤 했다.
(주석 7)

어린 김근태에게 형들 특히 맏형 김홍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기고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맏형에 대한 막연한 선망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근태는 1958년 서울의 사대부중과 경복중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 충격이 컸다. 형들의 뒤를 따르고자 하여 아버지에게 1년 동안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에 재수하도록 요청했으나 가정형편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2차인 광신중학교에 “시험 한번 쳐보기나 하라”고 하여 마지못해 응했다가 수석을 했다. 이런 연유로 광신중학교를 다니면서 장학금을 받고 줄곧 수석을 하였다. 광신중학 3학년 때 학원 장학회에서 실시하는 장학금수혜자 시험에 응시하여, 고교, 대학까지 장학금 혜택을 받게 되었다.

김근태의 꿈은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큰형이 다닌 학교에 자신도 입학하는 것도 뜻이 있었겠지만 당시 우수한 중학생들의 일반적인 소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억척같이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 입학의 꿈을 이루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에 비교적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내 평생 제일 악바리처럼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그럼에도 졸면서 공부를 했다. 불 좀 끄고 잠자라는 부모님들의 성화에 부대끼면서도 늦게까지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주석 8)

김근태가 광신중학교 3학년 때 5ㆍ16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군사반란은 김근태의 가정에도 다시 한번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대교체론의 열풍이 전개되고 별안간 정년이 60세로 낮아지면서 아버지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정년을 4년 앞둔 시점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형과 여고생 누나 그리고 중학생인 김근태까지 줄줄이 돈 들어가는 살림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심장판막증을 앓게 되고 5년 정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기고 시절 내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타교생이라는 설움도 1년 정도는 받아야했고, 학교 공부도 낯설고 또한 치열해서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반에서 1~2등 정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얼마가지 않아 다 떨어졌고 수입이라곤 형이 가정교사를 해서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참다못해 아버지께서 나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동대문시장에서 받아다가 각 학교로 다니면서 팔기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교장밖에 안 되지만 심장병으로 편찮으신 가운데 비닐가방을 들고 이 학교 저학교 다니시는 아버지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있다. (주석 9)



주석
6> 앞의 책, 154쪽.
7> 앞의 책, 155쪽.
8> 김근태, 앞의 책, 416쪽.
9> 앞의 책, 412~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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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4 08:00 김삼웅

 

김근태 고문의 학창시절.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gtcamp.tistory.com

김근태는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용과 어머니 이한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부모는 교육열이 강하여 아버지의 박봉에도 자식들 중에는 일본유학까지 보냈다.

김근태는 아버지가 번번히 전근을 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다니면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평택군에서는 청북과 진위초등학교를 다니고, 양평군에서는 원덕과 양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양수초등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김근태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이승만을 찬양하는 열변을 토했으나 3등밖에 못해 어린 마음에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상처받은 어린 시절이었고, 또한 상처받은 고향으로 경기도 평택과 양평이 나에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상처받은 고향조차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리운 양평’은 모두 유원지로 전락되어버렸고, 평택은 공업지역으로 바뀌어버려 고향을 박탈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나의 고향 또한 잠겨버린 듯하다. (주석 1)

어릴적의 잦은 이사와 전근은 김근태가 아니라도 소년의 정서에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소년은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자주 전학 다니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고문이었다. 새로 친구를 사귀면서는 텃세를 부리는 본토 애들과 싸우기도 하고 알랑방귀도 뀌어야 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관계가 이루어질 즈음해서는 어김없이 떠나야 하는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혹독한 처벌이었다. 몸살을 앓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권력자로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주어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석 2)

해방 직후에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면 당시로서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이다. 다만 교직자의 신분이어서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자식들에게는 여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매우 따뜻하신 분이었고, 어머니는 대단히 열정적이셨다. 아니 극성맞다고 해야 옳을 지 모르겠다. 두 분 다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에는 만장일치셨다”고 김근태는 회고한다.

<민족과 지평> 편집위원 이재화는 1991년 봄 김근태가 홍성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때 본인의 접견과 부인 인재근, 친형 김국태 교수(추계예술대 문예 창작과)를 비롯, 손학규ㆍ최민화ㆍ조화순ㆍ안병직ㆍ문익환ㆍ채만수 등 지인들을 만나고 <김근태의 삶과 사상>을 썼다. 그의 생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

김근태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네 차례씩이나 전학을 하는 것과 관련, “어린 김근태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분이 아니라 작고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가슴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10대를 보냈다. 자연히 성격도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형성된 구석이 많았다.” (주석 3)라고 소개하였다.

김근태는 이와 관련 부친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부인 인재근에 따르면, 남편은 “정열적인 면은 ‘기가센’ 어머니를 닮았고, 자상하고 섬세한 부분은 아버지를 닮았다” 고 전한다. 김근태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또는 반항심은 더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아버지 나이 19살이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읍내시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뒷동산에 혼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못했을까” 하며 투덜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교과서에 나오는 유관순 누나같이 당당하지 못한 것이 창피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처럼 소심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고 모든 면에서 항상 최고여야 만족하는 성격이 형성되어 갔다.
(주석 4)

소년 김근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반항심은 성장하면서 반독재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발산되었다. 어릴적에 “마음씨는 좋지만 무능하여” 늘 지방으로 옮겨다니는 아버지로 인해, 토박이 아이들 속에서 막 뿌리를 내릴 때쯤이면 다시 전학을 가야 하는 ‘뿌리뽑히는’ 고통을 어린 김근태의 가슴에 ‘약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서울에 올 ‘빽도 없고’ 돈을 모을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주석 5)

김근태가 태어난 1947년은 해방 2년차로서 미군정 시절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분단에 이어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7년 2월 5일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고,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고 12월 2일에는 장덕수가 피살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ㆍ3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에 상이한 두 개의 정권이 서게 되었다. 해방 3년만의 결과였다.

김근태는 동시대의 아이들처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어서 혼란시기에서도 생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전란기에 가족사에 불행이 겹쳤다. 김근태가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데는 이때의 가족사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주석
1> 김근태, <희망의 근거>, 415쪽, 당대, 1995.
2> 앞의 책과 같음.
3> 이재화, <김근태의 삶과 사상>, <민족지평> 제3호(1991.봄여름), 153쪽.
4> 앞의 책, 153~154쪽.
5> 앞의 책,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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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3 08:00 김삼웅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유성호

 

김근태는 흔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그래서 2011년 말 별세했을 때, 생자(生者)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민주주의자’ 라는 헌사를 붙이고, 장례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렀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는 모든 성원에게 주어지는 보통명사일 터인데도 유독 김근태에게 주어졌다. 이 헌사가 돋보이고, 그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한 것은,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파행과 불구성을 말해준다.

그가 성장하여 활동한 기간에 겪은 군부독재 30년은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유린되는 반이성, 야만이 지배하는 몰상식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김근태는 결코 관념적인 민주주의론자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파수꾼이고 수호자 노릇을 하였다. 그래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긴 세월을 병마에 시달리다가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고 압제와 싸웠다. 청년들을 조직하고 동지들과 연대하면서 바빌론의 철옹성에 불을 질렀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담력이 남달랐다. 무인(武人)의 기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때문이었다.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 ⓒ권우성

 

짧다고도 길다고도 하기 어려운 64년의 생애, 특히 청년기와 중년시절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기간이었다. 동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그만큼 치열하게 싸우고, 처절하게 육신이 망가진 ‘민주인사’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신ㆍ투신ㆍ자결ㆍ의문사 등 숱한 의열사들과 같은 반열에서 김근태를 ‘민주화의 화신’ 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김근태에게는 ‘햄릿’ 말고도 몇 가지 별명이 따랐다. ‘공소외(公訴外)’ ‘국제신사’ ‘김진지’가 그것이다. ‘공소외’는 독재시대 조영래ㆍ장기표ㆍ심재권 등과 반정부 시위를 도모하다가 이들은 체포되고 용케 피신했을 때 검사의 기소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된 ‘백봉 신사상’의 단골 수상자일만큼 언행이 신사적이다. 일반적으로 투사와 신사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가능했다. 독립운동가 중에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은 투사이면서 신사의 이미지를 갖는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면,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차서 / …”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찬 김근태는 투사와 신사의 모습이 불편하지 않게 공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세속의 KS출신에 민주 투사이면서도 뽐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험한 말이나 함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진중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진지하였다. ‘김진지’ 의 별명은 ‘햄릿’과도 연관이 닿는다. 행동하지 않는 진지함이란 자칫 햄릿이 되기 쉽지만, 누구도 그를 일러 실천성 없는 관념론자라 말하지 않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장례위원을 맡은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공보실장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지난 1988년 9월 3일 서남 민청련 창립대회에 참석한 고인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은 고인이 창립대회에서 민중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연하는 모습). ⓒ유성호

박정희가 짓밟은 헌정을 다시 짓밟고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5공의 독기가 시퍼렀던 1983년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살인 정권에 도전장을 보냈다. 민청련의 조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5공체제 등장 이후 최초의 공개적인 반정부 청년조직이었다. ‘김진지’와 그의 동지들은 오랜 진지한 사유 끝에 민청련의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걸었다. 양서 동물로서 독성이 강한 두꺼비는 뱀에게 잡히면 죽지만 뱀 역시 두꺼비의 독성 때문에 죽는다. 하지만 두꺼비 새끼들은 그 안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실제로 민청련은 5공이라는 뱀파이어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그 대신 독사의 뱃속에 들어간 김근태는 남영동의 지옥에서 오랜 ‘짐승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일찍이 죽음을 대면했던 사람이다.

그는 민족모순과 시대모순이 활개치는 시절에 젊음을 보내면서, 그리고 ‘제도적 약탈’에 민중의 삶이 고통받는 시대를 살면서 뜨겁게, 불꽃같이 저항하였다. 작은 체구에서 불같은 열정이 치솟았다. 혁명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독재시대 그의 삶에는 비장감이 서렸다.

김근태는 3선 국회의원, 원내대표, 당대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계에 투신한 이래 세속적인 출세를 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다지는 큰 역할을 하였다.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노인요양보험을 제정하고 암환자 진료의 본인부담률을 10%로 낮추는 등 민주주의, 통일 등 거대 담론과 함께 서민들의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는 본디 서민출신이고 서민과 함께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꿈이 채 영글기도 전에 ‘민간 독재자’가 나타나서 역사를 87년 이전 체제로 되돌리고, 그는 병마에 쓰러졌다.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1년 12월 30일 눈을 감았다.
송건호ㆍ리영희 등이 겪었던 그 증상이었다.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 6개월에 걸친 두 차례의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과 수배 …. 망국기 독립운동가들이나 겪었던 험난한 길을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겪게 되었다.

김근태는 대단히 겸손하고 성실한 품성이었다. 공사 생활에서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인이었다. 지극히 가정적이고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재산을 모을 줄 몰라 부인은 항상 생활에 쪼들리고,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그 흔한 자동차 한 대 굴리지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그는 야권의 누구보다 개혁성이 강한 진정성의 지도자였다. 장준하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는 어디서나 허투루 말하지 않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언론플레이용 강성 발언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의회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진짜배기 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으로부터 군부독재 그리고 민간독재에서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국가보안법 등 악법을 폐기하고, 외세가 갈라놓은 조국의 분단을 이어보려는 큰 꿈을 간직했던, 우리 정계에서 흔치 않은 한반도의 미래를 구상하는, 진정성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던 그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ㆍ중동의 아랍국가에서 민중들이 독재자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반독재 민주화의 ‘원조(元祖)’ 격인 한국에서는 ‘민간독재’가 극성을 부렸다. 여기에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초혼제’가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박정희의 호화판 기념ㆍ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경상도 어디선가는 ‘전두환공원’이 만들어졌다.

벤 알리(튀니지 전 대통령), 무바라크(이집트 전 대통령), 카다피(리비아 전 대통령)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쫓겨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비슷한 시각, 한국에서는 60여 년 전과 30여 년 전에 죽은 독재자들의 망령이 부활하는 모습을 병상에서 지켜보면서 김근태는 “그동안 헛 살아오지 않았는가!” 라는 자괴감을 갖게 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김근태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피울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갔다. 그리고 지역구민들은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의회로 보냈다. 김근태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국민이 때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다. 그의 많은 동지와 후배들이 빈소에서,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유지를 잇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발리바르는 조국해방전선에 나서면서 선서하였다.

“나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과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내 마음과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 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김근태의 <남영동> 표지 ⓒ중원문화

남한의 반독재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감옥에서 다짐하였다.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려. 그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지도자 문익환 목사는 1980년대 중반에 이미 <김근태 동지를 알자>고 광야에서 목메이게 외쳤다. 아직 대중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 시점이다.

김근태 동지는 이제 나이가 겨우 마흔을 갓 넘었지만 그는 이미 우리가 깊이 알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80년대 민족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나아가 90년대 민족사를 구상하고 전망하는 데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이미 그는 민족사의 핵심에 서 있고, 앞으로도 그는 그 핵심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난날의 투쟁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날의 투쟁을 미루어 앞으로 전개될 민족사에 그가 담당할 몫을 생각하면서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미래의 인물가운데 그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석 6)


주석
6> <김근태씨의 고문 및 옥중기록 남영동>, 277쪽, 중원문화, 1987.(이후 <남영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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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2 08:00 김삼웅

 


지금까지 한국에서 실시해온 각종 선거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계층은 기권을 많이 하고, 부자들은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그리고 가난한 계층에서는 부자 정당(보수정당)을 더 선호한다는 최근의 여론조사도 나타났다. 그래서 부자들의 대변자가 다수 당선되는 역설이 진행된다. 앞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의 화신’과 ‘고문의 화신’을 환치시키는 경우가 낯설지 않았다. 이를 소급하면 친일파가 ‘건국의 주역’이 되고, 현재화하면 독재세력이 민주인사들을 ‘종북주의자’로 내모는 꼴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혹독한 고문과 끝없는 감시, 정보기관의 용공조작과 족벌신문들의 흠집내기에도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고 버틴 데에는 역사에 대한 낙관때문이었다. 앞의 ‘남은 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는 민중(국민)을 믿었고,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그가 겪은 고통, 특히 육신의 고통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다.

최후진술을 통해 밝힌 고문의 한 대목이다.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절반쯤 됩니다.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델시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셔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해라’ 이런 참혹한 얘기를 하며 동물적 능욕을 가했습니다.

제 생식기를 가르키며 ‘이것도 잎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머리와 가슴ㆍ사타구니에 전기고문이 잘되게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했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며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습니다.
(주석 3)

여기서 나오는 ‘이재문’은 남민전사건에 끌려가 고문 당해 죽은 사람을 말한다. 숱한 사람이 저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애국자들이 겪었던 고문과 비슷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하면서 일제의 고문 기술자들이 살아남고,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에는 그 후예들이 ‘고문기술’을 전수받았다. 다음은 1912년 ‘105인사건’ 당시 심한 고문을 당했던 선우훈의 기록이다.

네 놈이 밤낮 30여일간 혹형을 계속했다. 묻는 말을 부인할 적마다 네 놈이 달려들어 때리고 찼다. 두 엄지손가락을 포승으로 결박하고 한편 팔은 앞으로 돌려 어깨위로 올리고 한편 팔은 뒷등으로 돌려 두 손이 서로 닿을 만큼 하고 매어다니 몸이 오척 가량 공중에 달렸다. 두 놈이 두 자 가량 되는 대막대기 두 개를 마주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쭉쭉 훑드니 몸이 두 동강이 되는 듯 하체의 힘은 쭉 빠지고 전신의 기력이 없어진다. 다른 놈이 채찍으로 머리부터 다리까지 숨쉴 틈 없이 난타하니 땀은 낙숫물 같이 쏟아지고 호흡은 하늘에 닿고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훅훅 쏱아진다.

금시 목숨이 끊어질 듯 사지가 떨리고 눈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하다. 이러기를 약 20분 만에 전신은 동태같이 얼고 감각도 없어졌다. 눈은 곧아지고 혀를 빼어 물고 숨소리가 사라지자 이 때는 맥박도 끊어져 죽는 것 같이 되는 때라 한다.
(주석 4)

1988년 케리 케네디 대표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받은 인재근씨와 자녀들. (출처 - 김근태 블로그) ⓒgt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일본군출신 박정희 정권과 그의 충복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체포하여 잔인한 고문을 하였다. 그 중에서 김근태는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하수인은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한국의 대학생 중에는 김근태와 이근안을 분별하지 못하고, 6월항쟁과 김대중ㆍ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을 거친 뒤에 나타난 이명박 정권에서는 철거민들이 경찰의 공격으로 불에 타서 숨지고, 대통령의 측근들이 국무총리실에 아지트를 설치, 민간인을 사찰하는 야만의 세상으로 되돌아 갔다.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열을 받고, 하나회출신이 국회의장이 된다. 독재자의 딸은 집권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이고, 5공의 대표적 조작시국사건인 ‘학림사건’의 판사는 집권당 대표, 배석판사는 헌법재판소 소장이 되었다. 역사는 가끔 반복되기도 한다지만, 이처럼 잔혹사가 단기간에 되풀이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김근태는 5공의 폭압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조직하여 전두환 세력과 전면에서 싸웠다. 1983년의 민청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정신을 닮았을 것이었다. 일제가 그랬듯이, 5공 정권의 보복은 혹독했다. 김근태는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살인적 고문으로 ‘지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꺾이지 않고 옥살이 끝에 출감해서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하여 청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김근태는 감옥에서 부인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갇힌 몸이라 수상은 뒷날로 미뤄졌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또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뤄야했다. 그 시대에도 동기생 중에는 고시를 하여 법관이 되거나 5.6공에 참여하고, 선량이 되기도 하였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그의 지명도를 사서 김영삼이 종로 출마를 제의했으나 “지금은 군부독재와 싸우는 재야의 결집된 힘을 약화시키고 개인적 지위상승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때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5선, 6선은 따놓은 당상이 되었을 것이고,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설 때와 머무를 때를 알았고, 어느 때에 어느 쪽에 서는 것이 정도인 지를 알았다. 백범 김구의 “정도냐 사도냐”를 늘 가슴에 새겨왔다.

그는 뒤늦게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을 꿈꾸며 정치에 참여했다.
1991년 출감했을 때 김대중이 신민당의 부총재를 제의하여, 44세에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원외의 부총재, 그것도 임명직 부총재의 지위는 별로 힘을 쓰기가 어려웠고, 성격상 ‘정치적’이지도 못하였다. 한국의 정계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숙한 정상배들이 들끓었고, 정도보다는 사도가 정치의 능력으로 평가되었다. 더욱이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5공세력과 일부 야당이 야합한, 3당 야합 세력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김근태는 도전 끝에 제15대 국회의원이 되고, 이후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으며, 참여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가 별세했을 때 어느 신문의 사설처럼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권력 정치나 심지어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신에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주석 5) 김근태는 ‘정치공학’에는 서툴렀으나 진정성 있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정치인이다.

김근태는 정치에 입문하고서도 도덕성과 순결성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마키아벨리즘이 판치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로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도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좌절을 겪어야 했던 그런 길이었다. 한마디로 김근태는 정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순결한 지성인이었다.


주석
3> 김근태,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1심 최후진술.
4>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65쪽, 사람과 사람, 1998.
5> <한겨레> 사설, 2011년 12월 31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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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 / [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1 08:00 김삼웅

 

위정자의 덕이 없어서인가, 국민의 복이 없어서인가.

이명박 치하 4년여 동안 강원룡ㆍ박경리ㆍ김수환ㆍ노무현ㆍ법정ㆍ박완서ㆍ김대중ㆍ김준엽ㆍ정기영(건축가)ㆍ박태준ㆍ김근태ㆍ이소선… 등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각계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사이비 종교지도자, 친일파군인, 독재자, 기회주의언론ㆍ문인, 유신잔당, 변절민주화운동가, 악덕기업인, 고문기술자 등이 호의호식하면서 한 세상을 누비는 데, 왜 그들은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가.


<노자> 제70장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가.

사마천은 한무제 천한(天漢) 2년 (B.C 99년)에 이른바 ‘이능의 화’ (李陵之禍)을 당한다.
이릉은 용감한 장군으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 황제까지 나서 너나없이 이릉을 배신자라며 매도하였다. 그때 한 사람 사마천이 이릉의 사람됨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서 분연히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고 사내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말았다. 거액의 돈을 내면 방면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사마천은 수모를 견디면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열전(列傳)의 첫머리에 백이숙제의 고사를 쓰고, <노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였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옳은가 그른가!”를 거듭 물은 것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 스승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공양학을 배우면서 역사철학에 뜻을 세웠다.
스승은 “하늘은 자연의 모습을 한 유의지적(有意志的) 최고신이다. 감응의 방식은 하늘이 인간의 행위를 감찰한 뒤에 일련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배자에게 훈계나 상을 내린다” (주석 1)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하여 천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갈 만한 곳을 골라서 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삿된 길로 가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분발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앙을 당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구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하늘을 우러러 거듭 탄식했다.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날의 꿈은 교수였다. 전두환ㆍ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닉네임이 따를 만큼, 젊은 그는 행동인이기보다는 사색인이었다.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평온한 질서의 민주주의 시대였다면, 정치인 네루의 길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간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김근태,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 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의 투사로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성을 짓밟을 때 김근태는 청년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온건한 대학생이 감분(感憤)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은 군부독재세력의 야만성때문이다. 전방에 있어야할 군인들이 후방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는, 마치 고려의 무인시대와 같은 막장을 지켜보면서 저항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심했고 시련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사마천이 울분하여 <사기>를 지었다면 김근태는 감분하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고 하겠다.
어찌 김근태 뿐이었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평화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외세의 탄압으로, 독재자들의 폭압으로, 겨레와 민족이 짓밟힐 때 빼앗긴 조국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그들의 능력과 역량으로 보아 시대에 적응하고 시세를 좇았으면 크게 출세하여 부와 감투가 주어지고 대대손손 부귀광영을 누렸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배부르고 등 따뜻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래로 정도(正道)는 가시밭길이고 사도(邪道)는 풍요롭지만, 그래도 소수 나마 정도를 택한 사람이 있고, 이들로 인해 정의와 진리는 지켜지고 역사는 조금씩이나마 진보한다.

김근태는 가끔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저항하다 잡혀 죽고, 비겁한 자들은 투항해서 바빌론의 앞잡이나 개가 되고,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투항하기에는 소시민적 양심이 살아 있던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은 자들이 후에 다시 일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재건하는 중추세력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용기는 없지만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심성이 많고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근본은 선한 자들이며 때가 되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사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민중을 믿었고, 민중의 힘으로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김근태는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았지만, 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독재자 편에 섰거나 반독재 투쟁을 외면하다가 ‘무임승차’하여 정ㆍ관계의 주역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도 용서하였다. 다음은 김근태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어느 날의 ‘삽화’다.

1974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택시 합승을 했다.
뒷좌석에는 신세대 여대생들인 듯한 손님 둘이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후 김근태는 뒷좌석의 여대생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격려해주는 것을 많이 접해본 그였다. 특히 고문경감 이근안으로부터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당한 후 3년여의 옥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던 88년에는 지하철을 타면 낯선 시민들의 따뜻한 인사말에 답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상대가 신세대 여대생들인지라 속으로 괜히 흐뭇해하며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다가 예의를 차려 물어 온 말인즉슨,

“저 … 이근안 선생님 아니세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고 그가 고문당했던 재야인사라는 것도 생각나는데 그만 이름이 헷갈린 것이다. 고문 경감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물론 그날 그 자리에서 김근태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근안이 아니라 김근태’라고 정정해주지 못하고 차를 내렸다. 마음 한 켠에 휑한 슬픔마저 느끼면서….
(주석 2)

하나의 ‘삽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도 김근태는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었다.

우리 겨레가 1900년대 전반기 ‘망국노’가 되었을 때나, 1900년대 후반기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카키색 군부독재시대에 헌법상의 ‘주권자’가 되었을 때도 ‘남은 자’들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아놀드 토인비의 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역사는 어차피 ‘창조적인 소수’에 이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민주화투사들에 의해 우리는 독립을 전취하고 제도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민중의 힘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은 자’들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근태는 ‘남은 자’ 들의 역할을 믿었던 것이다.

주석
1> 풍우(馮禹)지음, 김갑수 역, <천인관계론>, 95~96쪽, 신지서원, 1993.
2> 윤석진,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이후 (<월간중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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