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출소 직후 <월간 말>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해온 정권교체를 위한 ‘민주대연합론’을 개진하였다. 옥중에서 긴 날 동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야당의 일각까지 가세한, 수구세력을 깨는 데는 민주대연합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민주연합의 내용은 사회과학적으로는 기층민중과 중간 제계층, 그리고 민족적 입장의 자본가가 상호 동맹세력으로 재배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상적으로는 재야와 제도야권의 결합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 운동의 현단계 전략적 목표인 자주ㆍ민주ㆍ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운동의 상호 대치선은 외세와 국내 지배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재야와 제도야권의 연합세력을 한편으로 하는 대립으로 돼야 하며 이럴 때 어느 정도 승산 있는 싸움이 가능하다.

따라서 재야세력은 비제도권에서 자신의 본대를 꾸리고 이 본대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일부가 제도권에 들어가 제도야당 내부에 교두보를 확보하며, 이러한 민족민주세력의 의원단이 의회에서 민중적 대의를 널리 알리고, 대중운동을 엄호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전까지 주장해온 이른바 ‘제도야당의 민주연합당으로의 개변’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으로 민주연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민주연합당의 주도권은 역사적으로 형성돼온 제도야당의 지도부에 남아 있다. 따라서 재야는 비제도권에 공개정치 조직을 결성해 재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향후 민주연합당으로 개편되는 제도야당과 다시 연대하고 연합해 민주대연합의 완성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민주연합이란 선거과정뿐만 아니라 만일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질 경우 대중운동을 통해 국민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정치세력화’ 주장은 재야는 이미 역사적으로 정치세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도 불국하고 재야의 일부가 제도권내에 어떻게 자기의 교두보를 구축하는가의 문제를 정치세력화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실천적인 패배를 겪었다. 따라서 과거 “독자정당결성이 올바르냐 틀리냐, 지금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로 논쟁한 것은 전제부터가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주석 5)

김근태의 ‘민주대연합론’은 많은 재야인사와 진보적 정당세력에서 크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재야 중에서는 제도정치권의 참여를 사갈시하는 부류가 있었고, 제도권에서도 이들의 참여를 못마땅해 하는 부류가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더 멀리는 일제강점기에 친일 협력자들을 모체로 하여 인적ㆍ물적 기반을 구축해온 보수기득권 세력에 맞서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재야와 양심적 제도야당의 연대가 필수적이었다.

김근태는 혁명주의자이기보다는 개혁론자이다. 의회를 통해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대연합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인터뷰 기자가 물었다.

“87년 김대중 씨를 지지했는데 지금은 통합민주당과 김대중 대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민주당의 성격은 중간 제계층, 민족자본가 일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는 분단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출발했지만 지난 시기 지배세력의 일방적인 탄압 때문에 압박을 받아 반독재투쟁에 나섰고, 따라서 지배세력을 이탈한 국민들의 기대가 한때 제도야당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87년 야권분열로 민주정부 수립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중은 야당에 대한 실망이 재야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기대로 모아졌는데, 재야는 불행히도 전민련 시절 관념적 조급성으로 인해 선배운동가들을 분리시켜내고 운동을 내부의 분화를 분열로 처리해버리는 정치력의 빈곤을 증명해보이고 말았다.

결국 87년 대선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재야에 대해 국민들도 지지를 철회해버렸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중이 공적 영역에서의 책임을 철회하고 사적 이해관계의 축으로 옮겨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파시즘의 물적 기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광역선거 전후 나타난 무서운 침묵과 정치적 무관심은 유신 중후기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난해 평민ㆍ민주당의 통합으로 일부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대선 승리의 묘수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또 이대로 가면 패배한다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마지못해서 후보를 선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대연합의 최대주주인 민주당의 김대중 대표는 이러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배세력이 조장한 지역패권주의에 의해 분열된 대중의 힘을 이끌어내려면 이런 교착국면에서 지도자의 도덕적인 결단과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대중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승리하는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져 수권의 준비가 다 이루어졌다는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선 대선승리를 위한 김대중 대표의 자기희생이 결국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주석 6)

김근태는 ‘민주대연합의 최대주주’인 김대중의 존재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도덕적 결단과 자기희생론”을 완곡한 표현으로 제기하였다. 향후 진로와 관련해서는 “민주대연합을 위해 동지들과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다시 활동에 나섰다. 그의 위상은 이미 재야의 중진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론과 전략 그리고 투쟁 면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석
5> 김택수, 앞의 책, 48쪽.
6> 앞의 책, 50~51쪽.





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0 08:00 김삼웅

 

김근태가 2년 여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할 때는 그의 나이 어느새 45세의 중년이었다. 30~40대를 온통 수배와 고문, 옥고를 치루느라 청춘을 박해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의 출옥 뒤에 실시된 제14대 총선(3월 24일)에서 민자당이 과반수 의석에 실패했다.
민자당 149, 민주당 97, 국민당 31, 무소속 21석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국은 대통령 선거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주영이 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참여한 데 이어 대통령후보에 나서고, 당권투쟁 끝에 김영삼이 민자당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통합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이 입후보하였다.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국면으로서 삼복 무더위를 무색케하는 선거 열기로 달아올랐다.

국민의 관심은 1980년에 이어 1987년의 대선에서 다시 분열하였던 ‘민주화의 동지’ 김영삼ㆍ김대중이 두 번째 맞붙어 자웅을 겨루는 상황에 모아졌다. 달라진 것이라면 김영삼이 군부세력과 협력하여 창당한 여당의 후보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김근태는 그가 3당 야합으로 군부세력과 손을 잡을 때부터 크게 실망하면서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달리하게 되었다.

김근태가 옥중에 있을 때 남북관계를 비롯, 대 공산권 관계에서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990년 7월 20일 노태우의 ‘남북간의 민족대교류를 위한 특별선언’의 발표에 이어, 9월 14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고, 9월 30일 소련과 국교를 수립했다.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이어서 ‘남북비핵화선언’도 채택되었다. 바야흐로 남북 간에는 대화가 진척되고, 한국은 동서냉전 틈바구니에 갇혔던 공산권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역행하기 어려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김근태는 출소 6일 뒤인 8월 18일 서울 외신기자클럽 초청으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의 길로>란 기조연설에 이어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노태우정권의 투옥이 정치보복이라고 밝혔다.

90년 1월, 3당 야합으로 민자당이 만들어진 이후 부동산가격 인상, 물가폭등, 민주화의 정체, 개혁정책의 폐기 등으로 초래된 총체적 난국 속에서 항의하는 민중을 침묵시키려고 결행된 탄압이다. 독자정당 창당에 반대하며, 민자당 야합에 대응하기 위해 내가 구속된 후 시도되었던 평민당, 민주당, 재야 3자의 통합된 수권민주정당(야당) 창설 추진에 대한 권력의 사전 예방적 정치보복이었다. (주석 2)

이 연설문은 김근태가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각을 거듭해온 민족문제, 민주주의, 민중생활 등 담론과 90년대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년여 동안 다듬어진 시국관이고 정치철학이다.

1. 머리말
①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관심과 지지
② 정치적 탄압

2. 한국의 인권상황
① 한국의 사법현실 - 한국판 드레퓌스사건, 유서대필 조작 강기훈 사건
② 민주주의의 허구화
③ 민주화가 아닌 권위주의의 상대적 완화일 뿐

3.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의 통일
① 화해와 협력 분위기의 확대
② 남북합의서는 경제적 민족공동체의 중요한 기초
③ 통일의 기본원칙은 민족자주
④ 통일한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4.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정부 수립의 길
① 민족통일의 원동력은 민주주의 실현
②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의 길로
③ 국민회의를 통한 재야의 통일ㆍ단결 실현
④ 이번 대통령 선거에 민주대연합 후보를 내세워야
⑤ 분열을 배제한 선택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

5. 맺음 말 
(주석 3)

이 연설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김근태는 운동가에서 정책ㆍ평론가의 모습을 보인다. 어느 대목에서는 경륜과 철학도 제시한다. 5년 여의 옥중에서 지적으로 연마한, 그리고 깊은 사유의 산물이다. 다음의 몇 대목에 주목해보자.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임수경 대표 등은 단순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사람을 접촉했다는 이유 때문에 중형으로 처벌되고, 권력층 인사나 재계인사들은 아무런 법적 구속없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 사람을 접촉하고 있는 이런 이중적 상황은 법치주의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다.

비록 개인적 자유의 신장, 인권의 부분적 개선이 있고, 총선거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전이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니며, 고압적 권위주의로부터 상대적으로 완화된 권위주위로 변화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실현은 지금도 우리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누구도 침해하고 간섭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권리이다. 아직 통일방안, 과정, 절차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각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주한미군의 존재와 그 지위에 대한 검토 또한 의미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기본합의서, 그리고 남쪽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북쪽 정부의 고려연방제안을 토대로 하여 그 공통점, 접근 가능한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본다면 잠정적으로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연방제 성격을 가미한 국가연합과 국가연합적 성격을 가미한 연방제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통일방안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소극적으로 본다면 지역의 세력관계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일본의 민주세력과 더불어 지역내의 민주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의 경제성장과 발전을 얼마만큼 도울 수도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개발독재식의 지나친 경제주의적 편향을 수정하고 극복하는 것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권의 승리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만이 민주주의 실현을 전면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과 조건에서 이것은 민주당의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민자당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대통령선거에서 행정권의 광범한 개입을 이미 추구하고 고무하고 있는 셈이다. 언론에 대해서도 협조요청이라는 이름으로 광범한 개입과 간섭이 본격화되고 있다.

재야는 이제 자신의 오만했던 점과 분열을 반성하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전체 재야세력의 통일ㆍ단결을 곧 국민회의 결성을 통해 실현해 낼 것이다. 나는 여기에 겸허하게 그러면서 책임 있게 결합할 작정이다. 하지만 국민회의가 성과 있게 결성되더라도 지난 시기와 비슷한 정치적 영향력은 되찾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통합된 기초 위에서 우리가 노력한다면 일정한 부분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석 4)


주석
2> 김근태, <희망의 근거>, 106쪽, 당대, 1995
3> 앞의 책, 목차.
4> 앞의 책, 107~114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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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09 08:00 김삼웅

 

 

짙은 어둠이 깔린 1992년 2월 12일 0시 30분,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옥문이 열리고 2년 3개월 옥살이를 한 김근태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 홍성교도소 문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재근과 가족이 함께하였다.

김근태가 2년 실형선고를 받고도 3개월을 더 산 것은 이른바 ‘미결통산’을 제외한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의 철저한 보복이 자행된 것이다. 양심수의 경우 수형 일수가 줄어든 경우는 있어도 늘어난 일은 없었다.

환영객들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빗속에서 더욱 비장감으로 들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서울ㆍ부산ㆍ광주ㆍ대구ㆍ청주에서 밤길을 달려온 선후배와 동료 150여 명이 그의 출소를 지켜보았다. 환영객 중에는 김병걸ㆍ고광석ㆍ지선ㆍ최민화ㆍ김희택ㆍ유기홍ㆍ장기표 등 재야의 동지와 장영달ㆍ이해찬ㆍ원혜영ㆍ신계륜 등 민주당 관계자, 손학규ㆍ정운찬 등 학계인사가 포함되었다. 특별 환영객 미국인 에드워드 베이커의 모습도 눈에 띠었다.

우중에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최민화 소장의 사회로 한밤중의 ‘김근태 석방 환영대회’가 열렸다. 교도소 당국은 그의 석방에 전국에서 민주인사들이 몰려 올 것을 우려하여 출감 시간을 꼭두 밤중을 택했지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빗속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김근태 선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민족의 품으로 돌아와 기쁘다. 역시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말로 확실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기필코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큰 역할을 해 주시길 바란다. - 지선 스님.

너무 기뻐서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우리 생애에 이처럼 감격스럽고, 또 이처럼 기쁜 날이 언제 있었겠는가. 김근태 선생이 지금 이 어둠의 벽을 박차고 나타났다. 함박웃음을 웃으며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뛰어오른다. 그럼에도 한편 우리는 언제까지 이 어둠의 역사를 헤쳐가야 하는지, 민족의 비극을 노래해야 하는지 한없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항상 어둠 저편에 밝은 빛이 있으며 구름에 가려도 하늘은 늘 푸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김근태 선생과 더불어 민주화와 통일의 한 길로 나가자. - 소설가 김병걸.

자연인 김근태를 사랑하고 운동가 김근태를 존경하는 재외 교포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과 우정을 전한다. 김근태를 따르는 모임은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교포, 양심적 외국인까지 많이 있다. ‘김근태 석방위원회’는 이 자리에 참석한 에드워드 베이커를 포함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쿠우모 뉴욕주지사, 투투 주교, 오갈 하벨, 그레고리 팩 등 전 세계 16개국 61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있다. 나는 이 분들을 대신해 인사를 전하며, 김근태 씨의 민주화운동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재미 언론인 신기섭.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고 이룰 수 있는 민주정부 수립의 전기를 맞고 있다. 지난 시절 우리 운동의 어려움은 김근태 동지가 없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김근태 동지의 석방을 기점으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예비하자. - 장기표.

 


1990년 2월 11일, 28년 간의 감옥생활에서 풀린 넬슨 만델라를 환영하기 위해서 5만의 군중이 로벤섬 연안에 모였다. 그는 웃고 있었고 “자유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돌이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남아공 정부는 아무리 정적이라도 한밤중에 풀어주는 따위의 꼼수는 부리지 않았다.

김근태는 답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멈출 수가 없다”고, 여전히 자신에 찬 소신을 밝히고, 감옥에서 생각했던 소회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우리 운동에 고통을 가져다 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관념적인 운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련ㆍ동구의 붕괴 등 세계적 규모의 변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하게는 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전술상의 착오가 우리 운동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고 본다. 나는 ‘남북합의서’ 의 발표를 전후해서 통일의 현실적 가능성이 높아지자 비교적 올바른 관점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조차도 “통일 다 됐다”, “통일운동 끝났다”는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것은 지배세력이 통일의 실현가능성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거나 지배세력이 통일의 가능성을 선동적으로 부추기는데 도취되어 비교적 실현가능성이 있는 통일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같다. 나는 통일의 궁극적인 이상형만을 제시해 그것에 이르는 아무런 전술적 대안도 없이 민중적 통일운동이라는 것에 경도되는 상황에 대해 경고하고 싶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어진 인사말에서 “문익환ㆍ임수경ㆍ문규현 등 통일운동과 민주화ㆍ노동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는 분들을 남겨 둔 채 석방되어 이들에게 송구스럽다” 면서, 정부에 이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였다. 목이 메어 간간히 연설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그는 옥중에서 더욱 단련되고 다듬어진 언어를 통해 출감소감을 밝혔다.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주석
1> 김택수, <출소 인터뷰 김근태>, <월간 말>, 199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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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8 08:00 김삼웅

 

 

김근태가 온전히 서정시인 또는 서사시인인 것 같지만, 다음의 대목을 보면 ‘민중론’의 치열한 사회학자의 모습이다.

민중은, 그리고 대중은 사회와 역사의 주인이고 또 더욱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민중이, 대중이 이미 자동적으로 그러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주인이 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 비판적이고 회의적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원인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장애를 타고 넘어 스스로 사회와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그 책임은, 그 과제는 민중 자신에게 짐 지워져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그것을 매개하고 안내하는 그 역할이 바로 운동과 활동가의 임무인 것이지요. 여기에 민중과 활동가, 대중과 운동 사이에 팽팽하고 긴장되면서 창조적인 변증법적 통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호는 필요하지만, 단순한 그것의 반복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주석 19)

그런가 하면 김근태는 격렬한 혁명가다. 혁명가 중에는 시인의 품성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김근태는 낭만주의적인 변혁운동가, 또는 사회혁명가이다.

그러나 나는 약간 달리 판단하고, 달리 주장했습니다. 단지 1단 기사로 나거나 아니면 뭉개져 버렸던 투쟁의 소식이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와 같은 탄압의 시기에 모든 투쟁은 자기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거기엔 높은 도덕성이 살아 있다. 우리는 대중의 마음속으로 전파하고 전염시켜야 된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한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며, 민주 변혁의 시작은 오직 그럴 때 그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의 민생 문제 접근은 자칫하면 협소하게 될 수도 있고, 의도와는 다르게 민중을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차원에 붙박아 놓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주장하였습니다. (주석 20)

 



김근태 역시 여리고 흔들리는 연약한 자연의 산물인 보통사람이다. 시대가 그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떼어 철창에 가두었고, 내세우기는 공화제인데도 실제로는 전제자들이 독재를 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앞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수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의 본성은 순하고 선한,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웃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일생동안 거침없이 자기의 십자가를 메고 늠름하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에 겨워 쓰러져 무르팍 깨지고 하염없이 눈물 흘릴 때가 있고, 외로운, 지독히 외로운 곳에 넘어져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감옥에 갇힐 때마다 나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는 다른 분들도 대충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우리는 서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 취약함을 고백하는 속에서의 약함의 연대가 함께 할 때마다 우리의 강한 연대인 신념과 이상이 오만과 허위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 앞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야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석 21)


주석
19> 앞의 책, 270쪽.
20> 앞의 책, 271쪽.
21> 앞의 책,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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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7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대단한 문장가다. 편지 글의 면면을 읽다보면 ‘투사’로서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문장이 곳곳에 널려 있다. 행간에는 리얼리즘 문학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구절이 글의 품격을 높여준다.

‘겨울감옥’ 추위의 정황을 그린 대목이다.

인재근 씨에게.
정월 추위를 타는 모양입니다. 손이 다시 시렵고, 손이 자꾸만 허리춤 사이로 들어갑니다. 더욱 묘한 것은 해가 훤하게 밝은데도 바람이 팽팽해서 어수선하고 약간 불안한 듯한 분위기입니다.

긴밤은 참으로 뒤숭숭했습니다. 한숨이 두껍게 내려쌓여 있는 4동 뒤 좁은 마당을 돌개바람이 사납게 휘저었고 비닐 창문을 쉬지 안하고 덜컹덜컹 흔들어댔습니다. 바람으로 어수선한 밤에 넓은 방에 늦도록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청승맞을 듯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침낭 속으로 잠 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한 밤중에 바람소리, 창문 덜컹거리는 소리로 인해 나의 얄팍한 잠에서 끌려나왔습니다. 어사무사한 경계에서 버둥대다가 결국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마침 아랫배도 탱탱하게되어 더 버티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깨고나서 다시 잠이 들지 못해 머리가 띵한 상태입니다.
(주석 14)

다음은 신 새벽 감옥 담장위로 치솟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느낀 소회다. 마치 잘 다듬은 한 편의 산문과 같다.

새벽 미명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니루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곳의 풍경은 매일 좋구려, 거치른 시멘트 선, 건물의 사나운 직각이 시야를 찢고 들어오지만 거기에 별로 신경 쓰여지지는 않는구려. 때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담장 훨씬 위로 까마득하게 치솟아 올라간 20여 년 이상 묵은 나무들이 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가 없소,

마치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는 체하고 내 방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오.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크면서도 미루나무처럼 본때 없이 그리하여 허전하고 허망하게 길다란 그런 모습이 아니고, 희끄무레한 새벽하늘을 뒤로 하고 약간씩 구불텅구불텅 틀면서 다시 올가가고 그러다가 줄기를 내어 함께 위로 솟구쳐 오른, 빙 둘러쳐진 나무들 모습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는구려.

여기에 갇혀져 있던 사람들의 한과 한숨이 저렇게 나무를 구비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오. 당신과 만나서 살아온 지난 날들이 미명에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저 나무처럼 여겨지는구려. 짧지 않은 세월을 저렇게 쭉 밀고 올라왔고, 그러면서 정답고 또한 구불텅한 구비와 옹이도 없지 않았던 세월이었지요.
(주석 15)

다음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다.

꿈결처럼 다가오는 뿌연 저 인왕산 중턱의 색깔 변화가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구려. 우리 어머니는 피리를 잘 불었다오. 버들피리, 보리피리 모두 말이오. 봄은 어머니의 피리소리를 타고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새끼손가락만하게 하고, 입에 무는 부분은 껍질을 살짝 벗긴다오. 먼저 만든 것은 나를 주시고, 또 하나를 만들어 입에 무셔서 적절한 위치를 잡으시는 것이오.

그 곡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입 속과 귓가에서는 뱅뱅 돌고 있지. 끊어질 듯 이어지고, 또 뭔가를 호소하고 거듭 호소하면서 반복되고, 변주도 되는 것 같았소. 그럴 때 어머니 표정,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오. 눈길은 아득히 먼 곳으로 가버리고, 몸은 점점 야위어가는 듯싶고, 그러면서도 생기가 도는 우리 어머니였다오. 이때의 어머니를 제일 사랑했던 것이오.
(주석 16)

다음은 ‘진눈깨비’에 관한 단상이다. 국어사전에는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라고 풀이한다. 김근태의 해석은 철학적이다.

며칠 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리는 모양도 그렇지만, 이름부터가 약간 재미있고 짓궂은 듯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귀가 안 맞고 김빠지는 느낌이 듭니다. 눈이 질다는 것이 형용 모순이면서도 말이 되는 것이 재미있고, 도대체 ‘깨비’라고 붙은 것들이 몽조리 약간은 체신 머리 없고, 방정을 떠는데 그러면서도 악의나 잔인함은 상당히 배제되어 있는 듯이 여겨집니다. 방아깨비, 허깨비, 도깨비, 같은 것들이 그것들인데 이 반열에 진눈깨비도 끼어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철 늦은 진눈깨비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은 재미있다든지 장난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산한 느낌이었습니다. 쇠창살에 갇혀 제압당하고 그 쇠창살 위에 다시 촘촘히 그물눈의 쇠철망을 덮씌워 시원스런 시야도 차단당하여 내리고 있는 진눈깨비를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마침내 가물가물해지는 짜증스러움이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습니다.
(주석 17)

 



다음은 김병곤의 셋방을 찾아가서 함께 민청련의 일을 하자고 약속하면서, 그 집안의 풍경과 뒷날 닥치게 될 고난의 상념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의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 때였습니다. 마루엔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 씬 식사 준비한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결리는 듯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 보려고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곤이가 과연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 날 문숙 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주석 18)


주석
14> 앞의 책, 223쪽.
15> 앞의 책, 723쪽.
16> 앞의 책, 73쪽.
17> 앞의 책,230쪽.
18> 앞의 책,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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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6 08:00 김삼웅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근태는 1992년 1월 황인철 변호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민변소속으로 반독재투쟁의 재야ㆍ청년ㆍ학생ㆍ노동자들의 변론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다음은 편지의 뒷부분이다.

지금은 아직 우리에겐 겨울입니다. 지난 시기처럼 지독히 캄캄한 겨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뿌우연 그러나 봄은 머지않은 아니 이미 봄이 우리를 향하여 어느 정도 와있는 겨울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그런 겨울의 짓누름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연합해야 하겠지요.

그런 새로운 관계, 이것은 우리 내부에서의 상호의 힘의 관계, 그러나 적대적이지 않고, 제한적으로만 경쟁적이며 기본적으로는 우호적인 토대 위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 위에서 구축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꼬일 수 있는 것이지만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오늘의 위기적 상황에 직면케 된 것이고 다가오고 있는 총선ㆍ대선에서 만일 우리의 연합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의 것보다 훨씬 크고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이 유동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의 민족 역사에 민중의 삶에 그리고 이 지역 평화와 인류 진보에 큰 부담과 정체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굴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서둘러야 하는데 정말로 서둘러야 하는데 하며 마치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초조함을 안고 지금 저는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이런 부담은 누가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선배님들, 황 선배님을 포함한 선배님들에게 부과되고 요구되어지고 있는 엄중함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후배들이 뒷받침해드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주석 12)

김근태는 비슷한 시점에 홍성우 변호사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 역시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시절 민주인사들을 변론하고, 김근태 사건도 맡았었다. 홍성우는 이 무렵 조영래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라는 글모음집을 발간하여 신문에 광고가 실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근태도 홍성우가 보내준 이 책을 읽은 터였다.

이곳 감옥은 바깥의 역사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역사의 흐름과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면제될 수 있으며, 또한 그에 대한 승인거부, 그리하여 유보도 일종의 특권처럼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저는 이 특권에 집착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데도 추모집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연이어 광고로 나오고 그리로 시선도 자꾸 갔습니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지면서 화들짝 놀라 눈길을 서둘러 돌리곤 했습니다. 저도 결국 다 읽긴 읽었습니다. 그러나 광고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 한 구절 또 한 구절 이렇게 보았는데 그걸 다 읽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기막힌 슬픔”이라고 하셨지요.
“영래의 손때 묻은 글 줄”이라도 만져서 감당하기 어려운 허전함, 상실감을 메우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지요. 생명의 불꽃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직접 보셨을 홍 선배님에겐 정말로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희망없음에 대한 생각은 선배님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이고, 또 그런 원인들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더 큰 좌절과 캄캄함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타개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시급하게 그리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초조감도 생깁니다.

홍 선배님을 비롯한 선배님들이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그렇게 되도록 여건이 마련될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통일된 재야가 다시 시급히 꾸려지고, 그것과 통합야당이 민주대연합의 원칙아래 발전적 차원에서 다시 결합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저도 한 역할을 하고 싶지만 그래 봐야 현재로선 별 소용없는 일이고, 바깥에 대한 기대로, 안타까운 희망으로 까치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 속에도 더 이상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래나 병곤이의 죽음은 결국 지난 번 우리의 좌절과 실패의 결과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244쪽.
13> 앞의 책,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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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감옥에서 민청련의 동지 장영달, 변호사 황인철과 홍성우에게도 편지를 썼다. 사적인 관계로부터 역사관, 시국관이 담기고, 변론으로서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았다.

 


2012년 8월, 장영달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은 '밀양 송전철탑 반대'하는 문구와 그림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다. ⓒ 윤성효

민청련 부의장 등을 맡아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장영달에게 보낸 편지에는 1991년 2월 7일자의 소인이 찍혔다. 먼저 부인과 아들 ‘돌민’이의 안부를 묻고 ‘본론’으로 이어진다. 편지의 뒷부분이다.

제도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광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명백히 그럴 만한 이유도 또 그들의 한계도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대중이 재야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할까요. 지금도 지배세력과 비판적 제도언론이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대중의 정치 불신은 우리가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결단을 통해 저기 보이는 희망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 30년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파시즘의 대중정서 동원으로 활용될 여지도 충분히 있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아니 1989년도 공안정국 이래 지금까지 오히려 지배세력의 그런 조작이 외세와의 협조와 국내 일부세력의 오류 때문에 상당한 성공을 보여 온 것이 사실 아니겠어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이런 경고를 하고 다니자 상당히 여러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저어기 저처럼 발전하는 대중운동을 왜 못 보는가 하고 준엄하게 반박하곤 했지요. 그것을 못 본 게 아니라 그것을 진정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튼튼한 힘으로 전진시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활동가들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포퓰리즘 편향에 크게 휘둘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획득했던 대중의 신뢰의 상당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이제 우리는 냉정히 돌아보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또 함께 해야겠지요. 도덕성, 과학성, 힘 등 전차원에서 심각한 되돌아봄이 다급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제 지자제와 임투기간 직후 전면적 실천평가에 기초하여 새로운 편제를 발전시켜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장 선생도 나도 노력하기로 하십시다.

지금 창 밖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온 뒤 섣달 마지막 추위가 제 모습을 보이면서 달려들겠지요. 제법 대응력이 생겼지만 이 징역에서의 추위 앞에는 가끔 “속절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 속절없음 속에서 견뎌내는 끈질김을 다시 가슴 속에 품으려하고 있습니다.

장 선생의 따스한 마음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일이지요. 바쁜중에도 편지 주고, 책도 부쳐주고, 재판정까지 와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외상값은 내가 여기서 튼튼하게 지내는 것으로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장 선생!
끝으로 부인에게 꼭(!) 인사 좀 전해주시오.
그리고 돌민이에게도 얘기해주고……. (주석 11)

주석
11> 앞의 책 221 ~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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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김병곤을 ‘지혜 있는 용기’의 인물로 평가한다. 백범 김구의 천 길 낭떨어지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는 용기를 일컽는다. 김근태와 김병곤 등 민청련 집행부는 ‘죽는 것이 사는 길’, 곧 지사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대중운동은 기본적으로 전투적이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그것은 전략적으로 그래야 되고, 전술적으로는 용기와 더불어 정말로 지혜있는 유연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더 높은 도덕성과 명분은 지난 시기에 투쟁을 통해서, 아니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왜 우리가 이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지를 지혜롭게 대중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하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또한 벌써 지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있는 지도자라 할까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던가요. 서(書)는 어떨까요만, 나머지에 관한 한 정말 뚜렷하게 두드러졌습니다. 요새 정치군인들인 별자리들과는 전혀 달리 진짜 장군의 피가 흐르는 번듯한 허우대와 기상에서 그것은 넉넉히 엿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보스 기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열려 있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견 또한 분명하고, 줏대 없이 그리고 대책없이 흔들리는 경우란 없고, 그리고 결정을 내려야 될 때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고 결정된 것은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병곤이었죠.

1984년 당시 병곤이가 역할을 맡고 있었던 상임위는 정치, 경제, 국제, 운동론 등을 연구, 분석, 토의하는 모임과 기층 대중 운동을 연구하고 부분적으로 그와 연계되는 모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치 최전선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괜찮은 조건이기도 하였지만, 상임위의 활동이 그처럼 매우 활발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병곤이의 그런 지도력, 지혜있음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석 8)

김근태의 ‘김병곤회고’는 더 이어진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얘기는 자주 들어서인지, 오래 전 일이기 때문인지, 그러고 어쩌면 지나치게 신화가 되어서인지, 병곤이의 ‘용기 있음’을 예증하는데 설득력과 감동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당시 재판정이 극단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즉자적인 반발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혐의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점도 있는 것 같구요.

병곤이가 민청련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9월 경부터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청련이 발족하여 움직인 지 1년 여가 지나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간부 역량이 부족하여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곤이의 참여를 요청하게 되었지요.

이유는 또 있습니다. 1980년의 공간에서도 전술 구사를 둘러싸고 일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심각해져 갔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학생 운동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쪽의 대표적 선배 활동가가 병곤이었습니다. 1980년 광주 이후, 그리고 1983년 공간에서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부분이 그 영향만큼, 또 기대되는 만큼 활발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를 타개하는 계기로서,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러한 것은 촉발하는 뇌관으로서 병곤이의 적극적 활동이 기대되었습니다.
(주석 9)

김병곤의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근태는 깨달았다. 그것은 사형구형에 대한 ‘영광’이라는 반응보다 살얼음판 같은 5공 초기에 청년조직을 기획하고, 맨 앞에 서서 압제자들과 싸운 용기를 더욱 평가한 것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김병곤은 그처럼 허망하게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뜻과 행동에서 분신과 같았던 김근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김근태가 그의 영원한 동지에게 바치는 헌사는 다른 누가 김근태에게 바쳐도 손색이 없겠다. 김근태의 ‘헌사’는 이어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되는 것은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가 아니고, 병곤이의 바로 이 점, 자신의 의견과는 달리 내려진 공적 결정일 경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이구요.(……)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가 병곤이 보고 “눈 감고 고이 잠드소서.” 라고 말할 때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적 과제 앞에 더 큰 힘으로 개입해야 되는 분명한 이유가 이처럼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곤이를 떠나보내지 않았고, 또한 떠나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병곤이는 우리의 가슴 속에, 눈빛 속에, 그리고 오늘의 이 역사 속에 타오르는 불길로, 불꽃으로 여전히 타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석 10)

주석
8> 앞의 책, 269 ~ 270쪽.
9> 앞의 책, 266~267쪽.
10> 앞의 책, 269 ~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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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이 해 12월 18일 역시 홍성교도소에서 <고 김병곤회고집, 영광입니다>의 편찬위원회로부터 청탁을 받고 <지혜 있는 용기>라는 제목의 회고담을 다시 썼다. 11쪽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하룻만에 다 썼다. 그만큼 고인에 대한 사랑, 동지애, 생전의 역할, 빈자리의 공허함, 천도의 무심 등이 배인 까닭이었다.

지금도 어쩌다가 잡지나 신문에서 병곤이의 사진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상당히 긴장을 하게 됩니다. 흘끔 쳐다보고 딴청을 부리다가 또 쳐다보고, 그러다가 시선을 돌리는 것이지요. 병곤이의 안경 너머 그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이렇게 여전히 나의 눈과 가슴에 친구, 동지들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는 병곤이가 이젠 죽었고,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난 것이며, 생동하는 오늘과 내일에서 그 큰 손을 뗀 것이라는 그 얘기를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병곤이의 떠났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 그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주석 5)

먼저 떠나간 동지에 대한 절절한 아픔이 서린다. 혈육이나 부부 중 상처의 경우에 사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성과 같은 ‘골육지정’의 발로였다.

지난 1960년대 이래, 1970년대, 1980년대 내내 올곧은 청춘들 상당수가 감옥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을 때, 그 한 가운데서 병곤이는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나아갔습니다. 캄캄한 어둠이 짙게 내리누를 때는 물론이고,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실현에 대한 기대가 다시한번 산산이 부숴져 내렸을 때, 그리하여 폐허 같은 잿빛이 온통 사방을 휘둘러 감고 비통한 침묵에 빠져 우리 모두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그는 또 분연히 일어나 맨 앞에 서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참을 수 없는 허망함과 분노, 그리고 고뇌를 부둥켜안고 버티다가 치명적인 암에 걸렸던 병곤이. 그런 그의 감옥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그리고 전국의 많은 양심수들이 어떻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병곤이를 순순히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는커녕 그 큰 허우대로 되살아나 지금의 위기 상황에,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기회인 이 오늘과 내일에 철저히 개입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병곤이의 민청련 시대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병곤이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이제는 거의 신비가 되어 있는 “사형을 받아서 영광입니다.”라는 말 속에서 지금도 그의 담대함과 용기의 힘찬 꿈틀거림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교도관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일단 사형 선고를 받으면 그 누구든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멍한 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픽 하고 옆으로 쓰러지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곤이는 그 아득함과 답답함을 딛고 일어서 그렇게 맞서 외쳤던 것입니다. ‘용기’ 이외에 어떤 말로 이것을 지칭할 수 있겠습니다.
(주석 6)

우리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는 스스로 고난을 택한 많은 독립지사와 민주인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민족ㆍ민주제단에 바쳐진 ‘제물’이었다.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독립된 국가에서 친일파들과 군사독재의 후예들이 다시 주역이 되는, 가치전도의 세상이 되었다. 김근태는 홍성감옥에서 김병곤을 추모하면서 민청련 시대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절실한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당시 민청련을 대표하는 공개 운동에 대해 “소영웅주의적이며, 결국 저들의 아가리에 운동역량을 똘똘 말아 처넣고 말게 될 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는 비판과 비난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좌절과 패배,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덮쳐 온 공포 아래서 있을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사실 당시도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 패배주의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보신을 가장 중시하는 비겁한 비열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연성수가 ‘두꺼비’를 들고 나와 민청련의 상징으로 하자고 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동의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비겁함에, 비열함에 반대하면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지도 않을 것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지금은 죽는 것이 바로 몇 배로 되살아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미 저명한 활동가이고 많은 수난과 고난을 겪어 온 병곤이가 다시 적극적으로 이러한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 저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논리, 심한 경우 “머리카락 보일라 꽁꽁 숨어라.”는 이른바 안테나론을 결정적으로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병곤이는 참으로 선선히 수락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대답을 가슴에 담아 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그 모든 것에 부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생활의 타성에 묶이지 않고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는 그것은 그 밑바탕에 큰 용기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요.
(주석 7)

주석
5> <고 김병곤회고집, 영광입니다>, 264쪽, 거름, 1992.
6> 앞의 책, 264 ~ 265쪽.
7> 앞의 책,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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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2 08:00 김삼웅

 

김병곤 약전. 푸른나무에서 출판.

김병곤은 유신과 5공시대 그리고 1987년 12월 16~18일 노태우 당선자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에 항의 농성 중 경찰 백골단의 무차별 폭력행사로 심한 구타를 당해 몸이 망가지고 이로 인해 병세가 도져 신음하다가 젊은 나이에 숨졌다.

다섯 번인가요, 여섯 번인가요. 병곤이가 체포되어 구속된 것이. 그것은 대치의 최전선에 늘 서 있었다는 증거지요. 더러 몸을 빼고 싶은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이것은 그러한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당당하게 언제나 맞섰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지요.

마라톤을 비롯, 장거리 달리기할 때 맨 앞에 서는 것이 힘들고 외롭다지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웃었습니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다소 감상적이고 과장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대치의 최전선에서 맞서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런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지요. 그것이 얼마나 아픈 진실인가를. 그럼에도 이렇게 맞서는 자신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 얼마나 엄청난 피곤과 외로움이 몰려오는지 운동은 이런 대치와 대치 속에서만 전진하지만 개인개인들은 이 과정에서 지치고 소모되고 낙오되는 것이 아직 우리 운동의 현주소이지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 과정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개인들이 아직 대량으로 등장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병곤이 또한 피곤했을거고,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 내용, 민중이 주인이라는 그 믿음이 실현되어 나타나지 않는 그 안타까움에 허전해 하고 허망해하기도 했을거예요.
(주석 3)

김근태는 김병곤의 부인을 위로하면서 “병곤이의 삶은 승리이고 완성이었다”라고 위로하였다.
김병곤과 조영래 그리고 유신ㆍ5공ㆍ6공의 폭압에 저항하다가 고문사ㆍ의문사ㆍ투신ㆍ할복ㆍ분신 등으로 자기몸을 던진 민주화의 의열사들은 하나같이 ‘승리이고 완성’된 삶이었다. 김근태 자신까지 포함하여.

이런 생각입니다. 병곤이의 삶은 승리이고 완성이었다. 그의 떠나감에서 이런 우리의 주장은 격심하게 동요되고 무효화될 지경에까지 나아갔지만 승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연약함, 부스러지기 쉬움이 그 완성 속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승리, 반성과 연약함과 치명적 취약성은 서로 대립되면서 통일되는 것이다. 병곤이는 승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치열함과 의지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또한 그런 연약함을 통해 겸손함, 겸허, 되돌아봄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나 자신도 아직 완전히 설득되고 있지는 않지만 대강은 이렇습니다. 그렇게 달래고 있지요. (주석 4)

주석
3> 앞의 책, 232~233쪽.
4> 앞의 책,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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