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1 08:00 김삼웅

 

 강경대 열사의 죽음에 분노하는 학생들. 권위주의 정권의 군경에 맞아 죽은 학생은 열사란 이름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에 맞아 죽은 학생은 자살이란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이 세상은 그들이 나약했다고 꾸짖는다. 더욱이 우리 같은 '별종'들이 죽으면 관심 한번 끌어보기 위한 '쇼'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김근태가 두번째 옥살이를 하게되는 1990~1992년은 3당 야합을 계기로 한국의 보수세력이 대동 결속하여 5공 못지않게 전제를 일삼은 시점이었다. 한때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하던 노태우는 3당야합으로 거대 여당을 거느리면서 비판하는 저항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민주화를 지도해온 김영삼의 민자당 참여는 일생일대의 실책이었다. 노태우는 박정희 → 전두환에서 정치적 혈통을 이어받은 그대로를 내보였다.

1991년 4월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박광철 총학생회장이 불법으로 연행되자, 학생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강경하게 진압하였고,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경제학과 1년생 강경대는 4월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 에 동료학생 300여 명과 함께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무자비하게 휘두른 쇠파이프에 집단 구타당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박승희 열사의 영정 사진 ⓒ 김은숙

이튿날부터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대책회의)가 결성되고, 살인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격렬한 항의시위가 전개되었다. 학생ㆍ시민들은 죽음으로써 노태우폭압에 맞섰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6일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박창수 안양병원에서 변사체로 발견,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 18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와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 분신, 20일 권창수 광주에서 시위도중 전경의 폭행으로 중태, 22일 광주 정상순 분신,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경찰의 폭력시위 진압과정에서 압사 등이 잇따랐다.

이런 와중에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시론을 쓰고, 서강대 총장 박홍은 ‘어둠의 세력’ 운운하는 기자회견을 하여 국민의 분노를 샀다.

노태우 정권은 김근태를 다시 감옥에 보냈지만, 국제사회는 그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1991년 5월 미국 하원의원 17명이 김근태의 구속수감에 대해 한국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고, 12월에는 미국 하원의원 44명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김근태가 옥고를 치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민청련을 함께 조직하고 반독재투쟁의 일선에 섰던 김병곤이 위암투병 중 1990년 12월 6일 사망한 소식이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공안검사의 사형구형에 “영광입니다”고 거침없이 외칠만큼 담대한 청년지도자였다.

또 한 사람은 같은 해 12월 12일 인권변호사로, 학생ㆍ청년기에는 반독재 투사로 활동하고 <전태일 평전>을 써서 문명을 날린 조영래의 죽음이었다. 두 사람과는 너무 각별한 사이였고 동지 관계여서 이들의 부음 소식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할만큼 충격이 컸다.

김근태는 김병곤의 사망소식을 항소심 재판정에 나갔다가 돌아온 날 저녁에 어느 신문 귀퉁이에서 보았다. 충격이었다. 망연자실했다.

침이 마르고 목이 잠겼습니다. 머리속에서는 깨진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듯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고자 했지만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학생ㆍ노동자의 푸르른 죽음도 아프고, 서남동ㆍ성내운 선생님 돌아가심도 그랬지만 이것은 또 다른 아픔이었습니다. 인정될 수 없는 것이지요. 종철의 죽음 때, 석규ㆍ한열이 때 많이 울었고, 조성만의 죽음 때도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었는데, 이상하게 병곤이 기사를 보고 또 보는 데도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안절부절하면서 섰다 앉고 앉았다 일어서고 참 이상하고 곤혹스럽기도 하고 한편 내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불안불안하였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병곤이의 떠나감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절망하면서 혼란에 빠져갔습니다.

너무 많은 죽음에 부닥쳐서 이제 지쳐버린 것인가. 병곤이의 그 참혹한 모습에 정이 다 달아나고 만 것인가. 내 징역에 빠져서, 내 서러움에 갇혀서 그런 것인가. 내 뇌리를 채우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엉뚱함과 당혹 속에서 밤새 이튿날 접견실에서 인재근을 만나고 그로부터 직접 병곤이 얘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참았지만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병곤이의 캄캄한 죽음은 정서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디찬 현실에 맞부딪쳤을 때 그것을 직접 얘기로 들었을 때 파열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석 1)

 


민변, 조영래추모모임 등이 10일 인권변호사 조영래 20주기 추모 행사를 연다. ⓒ 조영래추모모임

김근태는 김병곤과 조영래의 너무 이른 죽음 앞에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고 탄식했다. 앞의 인용문은 1991년 3월 홍성감옥에서 고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우리는 정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더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인지……. “아직도 ……이니이까” 하는 성서 속의 그 절규와 신음이 가슴을 후벼파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겨울 징역을 살고 또 살고 또 더 살아야 하고, 그래야 할 것이고 …… 운동은 모두 시간 속에서 변화ㆍ발전할 터이지만 지겹게 반복되고 있는 거의 순환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좌우 편향 속에서 동요하고 있는 오늘의 이 풍경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큰 목소리로 “때가 왔다. 지금은 그때이다. 모두 일어서라”하던 그 많은 거짓 예언자들, 이론가들 그리고 뒤에서 아우성치던 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중에 몇은 이제는 “압도적으로 우리가 열세”라고 또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고 있고…….
(주석 2)


주석
1>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235쪽.
2> 앞의 책,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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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31 08:00 김삼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2011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영정사진을 모시고 빈소로 향하고 있다. ⓒ유성호

 

세상에 어느 아빠가 딸을 귀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김근태의 딸 사랑은 각별했다.
“(남편이) 딸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꼭 자기만 딸 있는 거 같아요. 시집도 안 보낼 거래요. 딸애도 아빠 앞에서는 듣기 좋으라고 시집 안 간다고 하는 데 제가 슬쩍 ‘너 어느날 갑자기 뒤통수 치고 갈 거지?’ 했더니 ‘물론이죠’ 하더라구요.”  (주석 22)할만큼 병민이를사랑했다.

김근태의 남다른 딸 사랑의 편지 한 꼭지를 더 소개한다. 5월의 병민이 생일날 <드높은 자존심은 흉이 아니다>는 제목의 편지다.

병민에게
네 말마따나 병민이와 아빠는 짝꿍이란다. 병준이와 엄마가 그런만큼,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병민이 너를 좋아하고 사랑한단다.

어느 땐가 엄마가 와서 네 흉을 보던 얘기가 생각나는구나, 네가 괜히 징징거리고 짜면서 “내 편을 들어줄 아빠는 감옥에 가 있고……” 라고 하면서 꼴이 가관이라고 하더라,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콧등이 찡하면서 매캐해졌었다. 아, 우리 병민이가 이렇게 커가는구나. 이렇게 아빠가 멀리 자주 떨어져 있는 데도 잘 자라고 있고, 또 그런 식으로 기억해주고 있고 말이다.
(주석 23)

병민아. 부모들은 자식들의 변화를 보고 느끼면서 감동을 하곤 한단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자랑스러워하고 말이다.

김근태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병민이 너는 네 일을 네가 스스로 하고 또 그에 대해 책임질 줄 알기 때문에 그런 드높은 자존심은 흉이 아니라 자랑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병민이를 아빠는 자유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노예처럼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이고 대신 동정을 받는 그런 사람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독립된 사람이지. 병민이는 아빠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까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는 자유인에 벌써 한쪽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구나. 이런 의미에서도 또 병민이와 이 아빠는 정말 친구이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병민아.
(주석 24)

딸 얘기만 하다보니 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는가 하는 의문이겠지만, 역시 어느 부모가 아들, 딸 차별해서 사랑하겠는가. 이 무렵 병준이는 12살짜리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어릴적부터 가정의 풍파를 겪어서인지, 그 나이에도 무척 어른스러웠다. 김근태는 8월 16일 병준이에게 편지를 썼다. <한 줄기 바람처럼 향기로운 너의 노래>란 제목을 달았다. 병준이가 면회를 와서 불러준 노래를 듣고 감동한 것이다.

병준에게.
지난 번에 내려와 병준이 네가 불러준 노래 정말 잘 들었다. 워낙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더욱 각별한 것 같았다. 네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에 빨려 들어갔고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네 노래에 공명되어 아버지 가슴 속에서는 어떤 떨림의 물결이 일어났다.

처음 듣는 노래여서 그 가사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또 곡조의 어디에 아름다움의 무게가 집중되어 있는지 가늠이 잘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상당히 긴 노래인데도 지루하게 생각되지 않았고, 비교적 밝고 명랑하며 또 호소력도 있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노래구나라고 말이다.(……)

병준이의 시원한 한줄기 바람 같았던 노래를 생각하면서, 지난날 아버지의 어둡고 슬프고 서러웠던 노래들, 그리고 실패했던 노래 ‘사랑의 미로’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노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음악은 무엇인가도 약간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노래는, 음악은 정말 해볼 만한 것이다. 특히 병준이처럼 재능이 있는 경우에는 정말로 고려해 볼 만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물론 그 결정은 병준이 네가 하는 것이고…….

그러나 큰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경우에는 열정과 노력이 재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년엔 중학생이 되는 병준이가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일 것이다.
(주석 25)


주석
22> 인재근, <엄마가 뿔났다>, 41쪽.
23> 김근태, 앞의 책, 55쪽.
24> 앞의
책, 57쪽.
25> 앞의 책, 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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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30 08:00 김삼웅

 

김근태 부부에게는 보통사람들의 부부와는 다른 ‘비화’가 적지 않았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평생동지’인 까닭이다. 옥중에서 남편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자유’를 부인에게 주는 편지를 썼고, 이것이 ‘운동권’ 인사들에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김근태가 1차 감옥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감옥에서 아내의 두번째 생일을 맞은 ‘기념’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가 지극히 ‘황당한’ 내용이었다.

당신의 생일이어서 좋은 날인 오늘 나는 자유를 돌려드리겠소. 생일선물로서는 최상인 신발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자유말이오. 선택의 자유, 떠날 수 있는 그 자유말이오. 끝으로 당신의 생일을 재삼 축하하면서….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면서 ‘진반농반’으로 아내에게 말하곤 했다.

“징역가게 되어, 5년 이상 옥살이를 하게 되면 상대방을 결단코 자유롭게 하겠다. 무조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일체의 면회, 편지를 단절시키겠다. 부담과 동정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지 않겠다.”

그런데 공교롭게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 2년 차가 되는 아내의 생일날에 ‘신발을 거꾸로 신을 자유’를 주겠다는 편지를 쓴 것이다.

물론 징역생활 1년을 넘기고, 대법원 판결을 받은 후의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마지막 대목은 나를 열받게 만들었다.

이 편지를 받은 그 날 밤 나는 앞뒤를 모두 채운 5장의 편지를 남편에게 썼다.
주제는 신발을 거꾸로 신을 자유는 언제고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10년간 같이 살아오는 동안 어려웠던 일, 특히 섭섭했던 일 등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 특히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의 활동의 중단에 대해서 제일 많이 썼던 것 같다. 나의 이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여보! 나의 소원은 남자 파출부를 두고 사는 것이예요.”

그 후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면회를 가려고 노력했고,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대관령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남편을 찾아갔다. 아이들을 데려가면 특별면회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나는 남편을 보자마자 “아니 그 자유가 누구 자유인데 되돌려주고 말고 해. 김근태 씨!”라고 쏟아냈다.
남편은 쑥스러워 하면서 “당신이 너무 바빠서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까봐 알려줬어!”하며 웃었다.
(주석 19)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인병준과 인병민에게’ 쓴 편지를 살펴보자.
빨래하면서 느낀 생각을, 아이들에게 서스럼없이 적었다.

여기서 이번 징역살이는 밝고 명랑하게 살려고 하고 있단다. 그러나 얘들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 지내다보면 가슴에는 설움이 고이곤 하는구나. 너희들이 보고싶고, 너희들을 껴안고 싶고, 그리고 자유로운 공기도 실컷 마시며 저 높은 하늘로 힘껏 머리를 제껴 바라보고 싶구나. 너희들하고 엄마와 함께 말이다.

바로 그런 기분이 될 때 이럴 때쯤 나는 빨래를 한다. 정신없이 빨래를 하다보면 비누거품과 함께 헹구는 물과 함께 눈물처럼 고여 있던 슬픔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보너스처럼 그와 함께 노곤함, 유쾌한 피곤함도 몰려오고 말이다. 이러고 나면 며칠 동안 랄랄라........ 하면서 산단다. 아주 쾌활하게 말이다.

그러나 빨래는 쉬운 것이 아니다. 쪼그려 앉아서 하니까 허리가 아프고, 또 빨래가 많으면 어깨쭉지와 등도 뻑쩍찌근할 때도 있고 심한 경우 특히 담요 같은 것을 빨고 난 다음에는 몸살기 같은 것으로 인해 드러눕게 되기도 할 때가 있다.
(주석 20)

 



김근태는 빨래하는 일을 통해 아이들에게 남녀차별 문제와 남녀평등을 가르친다.

아빠가 남녀차별 문제, 여자평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한 것은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보다 밝고 사랑스럽고 눈물과 한숨 그리고 원한이 없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또한 이런 방향으로 아빠가 많이 나아가게 된 것은 엄마에게 잘해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함께 결혼해 살면서 너희들 남매가 그렇듯이 엄마와 아빠도 서로 대립갈등하면서 타협하고, 물러서고 하면서 배우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또 그런 생각에서 할머니도 생각해보고, 지금 부천에 살아계시는 엄마의 엄마, 방순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마음과 자신에 찬 생활을 보면서 한층 깊어진 것이다.
(주석 21)

주석
19> 앞의 책, 53쪽.
20>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50쪽.
21> 앞의 책,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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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29 08:00 김삼웅

 

 

인도의 독립운동가 네루가 감옥에서 편지를 통해 딸에게 세계사 교육을 시켰듯이 김근태도 홍성교도소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대지기’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어둠을 뚫고 새날을 열고자한 인물들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러나 역시 등대지기는 사람이어서 밀려드는 외로움을 어쩔 수 없어 이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통해 우리로부터 위로의 말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병준아, 병민아. 조금만 더 아버지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래의 ‘등대지기’는 실제의 등대지기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희망과 믿음의 불빛을 살구고자 애태우고, 그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지금도 하고 있는 귀중한 사람들,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봉화를 들었던 그 사람들 모두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구나. 김병곤 아저씨, 전태일 아저씨 등이 그렇고 너희들이 잘 아는 문익환 할아버지 또한 우리 모두의 등대지기라고 생각되는구나.

지난 백 여년 동안 그러니까 너희들이 보지 못한 친할아버지가 1901년에 태어나셨는데, 그 한 20~30 여년 전부터(1870년경부터) 지금까지 우리 7천만 겨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 왔단다. 자존심이 짓밟히고, 노예 비슷하게도 되고 매맞고, 죽고, 헤어지고…… 참을 수 없는 지옥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일부 먼저 제 맘대로 하는 왕을 쫓아내고 민주 사회를 이룬 나라들, 그와 더불어 공장을 세우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힘센 군대를 만든 나라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그만 교만해져 다른 나라, 다른 겨레를 짓밟고, 쳐들어가고 하여 미움과 전쟁이 그치지 않은 추악하고 혼란스런 백 여년이었다.

이 백 여년 동안 우리 겨레의 등대지기가 되었던 분들이 유관순 누나, 안중근 의사, 신채호, 한용운, 홍범도 장군이다. 또 있구나. 전봉준ㆍ김옥균 선생 등이 그 분들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중국의 손문ㆍ인도의 네루와 간디 등도 그렇다. 이런 분들의 등대지기 역할로 우리 민중의 배가 암초에, 세계 인류가 증오로 인해 죽고 죽이는 참혹한 지옥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주석 17)

김근태는 현재의 ‘등대지기’를 김병곤ㆍ전태일ㆍ문익환을 들고, 근현대사에서는 유관순ㆍ안중근ㆍ신채호ㆍ한용운ㆍ홍범도ㆍ전봉준ㆍ김옥균, 외국인으로는 중국의 손문, 인도의 네루, 간디를 예시하였다. 어린 자식들에게 쓴 편지여서 김근태의 역사철학이 담긴 것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역사관의 일면이 드러난다.

김근태가 5월 중순에 두 자식에게 쓴 <빨래를 하다보면>은 특이하다면 특이한 서신이다. ‘인병준과 인병민에게’라고 아들과 딸에게 엄마의 성씨를 붙힌 것이다. 최근에야 부모의 성씨를 함께 쓰는 사람이 많지만, 90년대 초에 자식들에게 어머니의 성씨를 쓰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대단한 남녀평등주의자였다.
아내에게도 꼭 경어를 사용하고, 국회의원ㆍ장관이 되었을 때에도 젊은 비서ㆍ여직원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다음은 앞에서 인용한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연극인 손숙과의 인터뷰 대목이다

 



손 : 아내를 인재근 씨라고 호칭하세요?
김 : 기분이 나면 ‘재근아’ 그러고, 보통은 ‘인재근’ 그러죠.
인 : 저는 김근태 씨라고도 하고, 누구아빠 하기도 하고, 화나면 ‘김꼰대’ 그래요. (웃음)애들도 그렇게 들어서 인지 그냥 엄마라고 안하고 인재근 엄마 그래요.
(주석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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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앞의 책,44~45쪽.
18> 인재근, <엄마가 뿔났다>,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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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8 08:00 김삼웅

 

 

교도소 규칙에 따라 면회의 시간이 제한되었다.
먼 길을 달려 병준이와 병민이는 엄마와 함께 홍성교도소에까지 아빠를 만나러 왔다가 잠깐 만나고 되돌아가야만 했다. 옥중의 아비는 되돌아 가는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면서 옥문의 쇠창살을 붙잡는다.

양심수들에게 감옥은 때로는 시인이 되게 하고, 때론 학자가 되게 한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쓰는 편지에는 시적인 감상과 철학적인 심오함이 담기기 일쑤였다.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김근태는 어느 때는 역사학자가 되었다. 3월 27일 홍성교도소에서 쓴 <너의 망설임을 이해한다>는 편지의 몇 부문이다.

병준이, 병민이에게,
어제 돌아가는 길에 비 맞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저녁께부터 부슬비가 소리도 없이 내려 땅거죽을 촉촉이 적시더구나. 이 비가 걷히고 나면 완연한 봄이 우리 앞에 다가설 듯하구나. 땅 위에 조금씩 고여 있는 물 위로 소곤소곤 내리는 빗줄기를 쳐다보면서 이곳에서 너희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혼자서 불러보았다.

이번에는 ‘라 구카라차’, 지난번에는 ‘등대지기’였지. 경쾌하지만 약간 부르기는 어려운 ‘라 구카라차’를 잘도 부르더구나. 아버지는 가사도 잊어버리고 박자도 놓쳐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너희들은 배짱 좋게 주욱 앞으로 나갔지.

그런데 이번보다는 지난번 불렀던 ‘등대지기’가 더 마음에 들더구나. 그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가지 느낌이 아버지 가슴에 담겼단다. 그중에 몇 가지만 얘기해보겠다.

우선 그런 노래를 너희들과 함께 부르게 되었다는 것의 확인이 상당히 신나는 일이다. 언젠가 너희들이 엄마와 아버지에게 축복으로 와 태어난 후 포대기에 쌓여 배고프다고 “음매음매”, 똥 쌌다고, 오줌 쌌다고 “음매음매” 하다가 참으로 별안간 너희들 입에서 “엄마” “아빠”하는 부름이 외쳐졌을 때 우리는 상기되었다.

신기하고 그리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면서 진짜 아버지가 이젠 되었구나 의식하게 되면서 책임감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느낌에다가 너희들이 이렇게 컸구나 하는 대견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목소리로 노래를 하면서도 또 그것이 서로 함께 어울리도록 신경쓰는 데에서 보이는 동료감, 그것을 너희들과 함께 노래로서 확인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여간한 뿌듯함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버지가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데도 너희들이 스스로 밝게 커가는 모습이 보여 고맙고 기뻤단다.

얘들아. 아버지도 너희들만 했을 때 등대지기를 좋아해서 자주 불렀고, 그 후 커 어른이 된 뒤에도 외롭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단다. 그 노래 분위기는 명랑하지 않고 약간 슬프지 않니. 너희들은 어떠냐.

멀고 험한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배에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등대의 번쩍이는 불빛은 분명히 희망이겠지. 고난과 절망 속에서 한줄기 날카로운 희망일게다. 그런데 그 희망의 불빛을 지켜주는 등대지기는 여간 외로운 것이 아니란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뚝 떨어져 참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란다.

그렇게 참으면서, 외롭게 살면서도 견뎌낼 수 있는 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그래서 그만큼 훌륭한 일이지. 그러면 이러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너희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아름답고도 큰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주석 16)


주석
16> 앞의 책, 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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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7 08:00 김삼웅

 

김근태는 해가 바뀐 1월 15일 두번째로 병민이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가족이 면회온다는 소식에 가슴 두근거리며 그날을 기다린다고 했다. 1월 하순경에 김근태는 충남 홍성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우리 조잘이 아가씨에게.
보통 사람들은 자기 별명을 부르면 싫어하는데 병민이 너는 스스로 “나는 조잘인데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해서 더욱 귀엽고 예쁜 아가씨란다.

너의 조잘거림은 아빠에겐 종달새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란다. 이건 나뿐만 아니고, 엄마는 물론 큰아버지, 할머니, 고모 그리고 지은, 하정이, 정은이 언니들 모두에게 그렇단다. 네가 보내준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거기에 너의 조잘거림과 깔깔대는 웃음이 배어 있는 것 같아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되는구나, 병민아!

“할 얘기가 많은 데 편지만 쓰면 뭔지 모르겠어”라고 하는 네 표현은 너무나 절절하게 아버지 가슴에 메아리를 치는구나, 그래 자신의 생각, 하고 싶은 말, 느낌을 마치 살아 있는 듯이 글로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다. 가끔 신경질이 날 정도로 막힐 때도 있지.

큰아버지가 소설가잖니. 우리 사는 얘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쓰는 것이 소설인데, 그것을 쓰는 것이 피가 마르는 듯한 일이라고 하는 말 너 들어본 적 없니. 그런데 넌 말이야, 편지에 아주 짧은 문장으로 아빠가 잘 알아듣게 그리고 껄껄거리게 그렇게 썼구나. ‘뭔지 모르겠어’ 하는 말은 결과적으로 괜한 소리가 된 것 같구나.(…)

너희들 껴안아보지 못하는 것 빼고는 이 안에서 나름대로 바쁘게 그리고 보람 있게 지내고 있단다.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병민아, 옛날 엄마하고 연애할 때처럼 너희들이 온다고 하니까 기다려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했단다. 예쁜 병민아.

그래 잘 있어라, 추운 날씨에.
(주석 14)

김근태는 전날 아내와 두 자식과 면회하고, 1월 29일, <너희들이 흘렸던 눈물 속에는>란 제목을 붙여 편지를 썼다. 홍성교도소의 제1신이다.

거꾸로 불러볼까, 병민아, 병준아!
어제 되돌아가는 너희들, 풀죽은 모습이었냐, 아니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고무풍선처럼 탱탱해졌었냐. 틀림없이 병민이는 풍선처럼 되어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을 것 같고, 병준이는 아버지처럼 입이 쭉 빠져 댓발쯤 나오지 않았을까.

너희들이 여기까지 내려올 줄 몰랐다. 지난 일요일 엄마가 면회 왔을 때 수요일에 오겠다고 했지만 너희들 얘기는 없었거든.

어제는 전혀 몰랐다가 엄마가 사 넣어준 음식물을 보고서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혈압이 올라 씩씩거리다가 겨우 가라앉히고 책상 모서리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그래 그것은 좌절감이다. 팍팍한 거부의 손길은 마음을 아득하게 하지. 그리고 분노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지.

병준아, 병민아. 사람은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경멸받아 마땅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다만 일정한 절제와 냉정한 판단을 동반하면서 그렇게 해야 하겠지. 그렇게 되면 큰 힘이 거기서 솟아나게 마련이란다. 그럴 때 우리 삶 앞에 가로놓여 있는 암초와 매복적 기습에 쓰러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거기에 새로운 창조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란다.

쓰다 두었다가 며칠 후 다시 펜을 잡게 되었다. 그 사이 어저께 (27일) 엄마가 내려왔다 갔다. 그 편에 너희들이 흘렸던 눈물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들이 흘렸던 눈물 속에는 슬픔과 절망도 있었겠지만 또한 분노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병민이의 눈물은 분함이었고 병준이의 눈물은 가슴 아픔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은 너희들이 이미 부딪친 바 있던 어두움이었을 것이라고…….

여기까지 내려왔던 너희들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 가슴 쓰리고 또한 아쉽구나, 하지만 바로 저 담벼락 바깥에 여전히 남아 있을 너희들 흔적과 마음을 느끼고자 하며, 그로써 이 겨울추위 속에서 가슴에 온기를 품고자 한다.
(주석 15)


주석
14> 앞의 책, 34쪽.
15> 앞의 책,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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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6 08:00 김삼웅

 

 

“자유는 한번 싹트면 엄청난 속도로 자라는 나무” - (조지 워싱턴)라고 한다는데, 한국의 경우는 예외인 것 같다. 또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 (제퍼슨)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것 같다.

4월혁명, 반유신투쟁,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가에서 한국(인)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최근 북아프리카, 중남미 일부 아랍 국민들의 항쟁을 제외하면 한국의 민주화투쟁은 반세기 이상 앞선다. 다시 구속된 김근태는 결연한 자세로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한번은 검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10년 정도 손아래였을 그 검사는 이름이 문성우였던가. 신문조서를 받겠다고 했다. 진술거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우선 포승과 수갑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더니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고 자기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검사실 내에서 지휘권은 당신에게 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서의 임의성 성립을 위해서 수갑과 포승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으니 되풀이하여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라고만 했다. 그 전에 이 검사방에 왔을 때는 언제나 수갑과 포승을 풀었는데, 위에서 한번 본떼를 보여주라는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술을 거부한다. 이것을 고지한 이상 퇴거할 자유가 없다. 이렇게 포박한 상태로 진술을 거부하고 있는 나에게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 것은 피고인에 대한 학대행위라고 하면서 신랄한 말싸움을 1시간 정도 벌였다. 그후 다시는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도저히 재판을 받을 수가 없었다. 첫 공판에 나가 모두진술을 통해 이것은 정치적 보복이기 때문에 나는 ‘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와버렸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7년 구형에 3년 선고였다. 거의 같은 죄목(?)으로 재판받았던 이부영 씨 10월, 이창복 씨 1년에 비해 중형이었다. 재판 거부에 대한 보복이었다.
(주석 12)

김근태는 1990년 5월 9일 민자당반대 시위 및 전민련 결성과 관련하여 구속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검사의 기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이 복사품과 같은 재판에서 7년 구형에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와 상고심에서 2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검사와 판사가 과격, 급진, 선동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미국 작가 마이클 무어의 “진실은 선동적인 것처럼 보이고, 상식은 급진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안양교도소에서 두번째 옥살이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국보법 7조 1항과 집시법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김근태의 서울상대 한참 선배이기도 하는 민족경제학자 박현채는 “역사에 충실한 삶이란 오늘에 있어 보상받지 아니하고, 오늘에 있어 보상받길 원하지 않는 삶이다.”고 다짐하면서 ‘역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정계진출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첫번째는 민청련에, 두번째는 전민련의 활동에 충실하다가 다시 갇힌 신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서울과는 그리 멀지 않아서 부인과 동지들이 면회오는데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별 두 개가 되면서 옥살이의 이력도 붙고, 수사ㆍ재판과정에서 육체적 고문은 없어서 그냥저냥 견딜만 했다.

1991년 1월 초 안양교도소에서 딸 병민이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병민이는 어느새 아홉 살 소녀가 되었다.

귀여운 우리 아가씨, 병민아!
편지가 늦어서 미안하다. 너한테서 온 두 통의 편지는 받았고, 하나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란다. 그 동안 서울에서 안양으로 아버지가 이사를 해서 그렇단다. 주로 아버지의 게으름 탓 때문이지만 지난 6개월 여의 교도소 생활중 이 편지가 내가 쓰는 첫 번째 편지이다.

있잖니, 병민아, 사람이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속이 텅 비고 메마르게 되는 법인데, 지난 2년 동안 아버지는 끊임없이 말을 해야 했고, 그것도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했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침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영향이 너에게까지 가고 말았구나. 답장을 안 한다고 네가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지금 부랴부랴 방에 돌아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해해줄 수 있겠니, 병민아.

네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 ‘예감’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사용한 네 글을 보면서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러웠단다. 면회 때 엄마와 아버지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마구 웃었단다. 그랬더니 모두 속으로는 아버지의 기분을 알아주면서도 그러는 나보고 “푼수” “얼간이”라고 놀려대더라. 아마 다른 경우에 이런 얘기 들으면 언짢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아버지는 낄낄대고 웃었다.

병민아, 그래 네 예감대로 아버지는 올해 안에는 못 나갈 것 같다. 너와 네 오빠 병준이, 엄마 등 사랑하는 우리끼리 함께 얼굴 보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슬픔이지.

자상한 아빠가 귀염둥이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보통사람의 꿈이 배인다. 그 무렵 병민이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근태의 편지는 이어진다.

그런 이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네가 차와 부딪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떠했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니. 막막함이었다. 뒷머리가 뻗뻗해지고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사람의 생명은 정말로 귀중하다. 그것은 절대 자체이고 거기에 부담을 주고 위해를 가하는 모든 것은 악이고, 우리는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 네 말대로 네가 옳았다고 아버지는 믿으며 운전기사가 잘못한 것이겠지만 이와 같은 일이 비슷하게라도 앞으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병민아, 교통질서는 사람간의 약속인데도 서로 갈 길이 바쁘다고 때로 욕심을 내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다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네가 미리 방비하도록 해야 된단다.

병민아, 시험을 잘 봤다면서.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너의 두 번째 편지의 맨 앞에 시험 얘기가 있었지. 그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일을 책임있게 해야 한다고 너희들에게 말했던 일, 어쩌다가 너희들을 야단쳤던 일, 그리고 몇 번인가 때리기조차 했던 일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너희들이 아버지의 얘기를 시험점수 잘 따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싶어 착잡해졌다. 이런 말 저런 말이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학교 공부를 우습게 생각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시험점수 잘 받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친구들과도 잘 안 놀고 미워하기까지 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도 모두 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버지는 정말로 반대한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651쪽.
13>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33쪽,
한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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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25 08:00 김삼웅

 

노태우 정권은 방북인사들을 용공으로 매도하고, 족벌신문ㆍ어용방송들이 덩달아 붉은 색칠을 하면서 한국사회는 살얼음판의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음모가들에게는 일을 꾸밀 절호의 기회였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내키지 않는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선 패배와 더불어 총선에서도 제2야당으로 밀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제3야당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던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공안분위기를 틈타 야합하면서, 정계는 다시 한번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노무현 의원.

 

1990년 1월 22일 이들 세 사람은 3당 야합을 통해 거대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
6월 항쟁으로 어렵게 돌린 역사의 물굽이가 다시 역류하는 반동이었다. 3당야합은 정치지형의 변개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민주화의 역류와 보수화를 불러왔다.

5공청산은 물건너가고 부동산가격 폭등사태, 물가고, 증시침체, 토지공개념 후퇴와 금융실명제 보류 등 경제난국이 가속화되었다. 거대 여당으로 변신해 오만불손해진 민자당 정권은 임시국회에서 방송법, 국군조직법, 광주관련법, 추경예산 등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일당독재식 국정운영으로 일관하였다.

전민련은 안팎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1989년 4월부터 몰아닥친 공안정국의 탄압과, 영등포을구 재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하고, 5월부터 이른바 ‘합법정당논쟁’이라는 내부적 혼란에 빠져든 것이다. 합법정당논쟁은 전민련 내부 각 정파간에 이해와 불신을 불러왔다. 이우재ㆍ장기표ㆍ조춘구 등은 전민련에서 합법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1989년 9월 26일 전민련 2차 중앙위원회에서 전민련을 탈퇴하고, ‘새정당창건을 위한 임시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서 민중정당 건설의 주체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연락사무소는 이미 1989년 9월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진보적 대중정당건설을 위한 준비모임’과 통합, ‘진보정당결성을 위한 정치연합’을 발족시켰다.

이후 전민련 2차 대의원대회에서 합법정당 건설안이 부결된 후 1990년 3월 12일 계훈제ㆍ박형규ㆍ이소선ㆍ백기완 등 전민련 고문 4인이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 결성을 제안, 3월 21일 진보정당 준비모임 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민연추 결성에 동참할 것을 발표함으로써 4월 13일 447명의 민연추 추진위원이 참가, 백기완ㆍ이우재ㆍ고영구 등 공동대표를 선출하는 등 공식적인 체계를 갖추고 출범했다. 이로써 전민련은 분열되고 말았다.

김근태는 ‘합법정당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잔류를 선언하였다.
“신식민지 파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민족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는 합법정당의 건설이 아니라 민족민주전선의 강화와 제도정치 공간에서 공개정치부대를 구축, 단일한 민주연합당을 추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합법정당을 주장한 그룹은 대의원대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민련을 박차고 나가 민중정당을 결성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40대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자주ㆍ민주ㆍ통일을 목표로 출범한 전민련 지도부는 김근태, 그만 ‘외롭게’ 남게 되어버린 것이다. 전민련 잔류를 선언한 그는 그 후 어수선한 조직을 재정비,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던 도중 당국에 의해 구속되고 만 것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남은 자’들과 5월 9일 전국 18개 지역에서 회원ㆍ시민 20만여 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민자당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국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 21개 도시에서 1,192명이 연행되고 그 중 55명 구속, 79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날 저녁 김근태는 전민련 주최로 제주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뒤늦게 전민련 결성 선언문과 사업계획서가 국보법 위반이란 혐의였다. 노태우 정부가 갑자기 김근태를 구속한 것은 그가 평민당ㆍ꼬마민주당ㆍ재야가 통합하여 거대 민자당에 대항하려는 민주 연합체의 구성 준비 작업 때문이었다. 당시 김근태는 이 작업에 몰두하여 상당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민자당 합당의 야합성을 규탄하고 흔들리는 민생문제를 효과적으로 제기하기 위해서 전민련 결성 이후 성장하고 있던 각급 대중단체를 전민련의 주도로 국민연합에 결집시켰다. 전교조ㆍ전농ㆍ전노협ㆍ전대협 등이 두루 포괄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 국민연합 조직을 갖고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맞서기 시작했다. 상당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일부 간부들이 나감으로써 위상이 저하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 정치적 영향력이 전민련에 남아 있었다. 당시 나는 재야 일부의 역량과 평민당, 작은 민주당이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민주연합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전민련 내부의 정치역량을 우선 설득하고 전민련 바깥에 있는 민주대연합을 찬성하는 분들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함께 참여하도록 말이다. 또한 독자정당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다.(…)

머지않아 비공식적으로나마 각 부문의 합석이 기대되는 시점에서 권력은 나를 구속했다. 이런 논의의 진전 자체를 차단하고자 했다. 1990년 5월 공안정국에서 나는 이처럼 다시 구속되었던 것이다.
(주석 11)

김근태가 ‘합법정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고 전민련에 잔류한 것은 타협을 모르는 외곬수이거나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완고성 때문이 아니었다. 노태우 군부정권의 본질과 보수야당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별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강력한 재야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6공화국의 공간에서 특히 3당 야합으로 인한 거대 민자당이 지배하는 ‘1점반 정당체제’에서, 전민련 이탈파들이 추진한 ‘합법정당론’ 은 설 자리가 없었다. 실제로 ‘민중당’과 ‘한겨레민주당’ 등 진보정당들은 원내 진출에 실패하면서 존재가치 이외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전민련은 반신불수가 되고 공안정국과 19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역량의 분산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1990년 4월 9일, <월간 말>이 주최한 <민족민주운동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란 주제의 긴급토론에서 현 시국을 대단히 위기로 분석했다. “지금 우리 운동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지배세력은 부분적인 의사개량화조치를 통해 민족민주운동의 전투적인 부분과 변혁적, 원칙적 관점을 유지하는 운동에 대해 집중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 탄압 앞에서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략계획조차 크게 동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라고 분석ㆍ평가하였다.

그의 분석은 정확했고 현실로 나타났다.


주석
10> 이재화, 앞의 책, 167쪽.
11> 김근태, <아직도 벗지 못한 공안의 굴레>, <분단시대의
피고들-한승헌선생화갑기념 논집>, 46~47쪽, 범우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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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4 08:00 김삼웅

 

현대판 민족개조론자

김근태는 1989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노동문학>에 알맹이 있는 칼럼 몇 편을 썼다.
노동운동 출신으로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있던 그로서는 짧은 칼럼이지만 열성을 다한 글이다.

4월호에는 ‘민주운동가’ 란 직함으로 <현대판 민족개조론자>란 제목의 칼럼이었다.
이 책에는 고은ㆍ노무현ㆍ신경림ㆍ박현채ㆍ윤구병ㆍ이호철ㆍ이오덕ㆍ유시춘 등 낯익은 필자들이 함께하였다. 김근태의 글은 민족의식, 민족자주의 얼이 깃든 보기드문 격문이다.

반미감정은 열등감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한국민을 대표하여 미국에 가 있는 대사도 한몫 끼고 있다. 미국 텔레비전에 나가서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분명히 말하자면 이렇다. 반미 감정은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격렬한 정서이며, 또한 우리에게 열등감을 강요하고 강제해 온 외세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다. 그에 대한 올바르고 과학적인 인식의 출발인 것이다. 이른바 반미 감정은 한때 유행하는 그런 감정이 아닌 것이다. 무차별한 농ㆍ축산물 수입 개방 압력 앞에 맞서 싸우는 근로농민 계층, 가파른 원화 절상 압력으로 고통 받는 중소기업주들,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비열하게 탄압하는 미국 자본에 맞서 분노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렇게 여기에 굳세게 모여 있지 않은가.

우리를 깔보고 모욕하고 괴롭히며 때로는 때리기까지 하는 저들에 대항하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이태원 밤거리에 2천여 명의 시민이 모여 노래를 그토록 비장하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행패 부리는 미군 병사들에 대해, 그들을 싸안고 도는 경찰들에 대해 새벽 2시 이태원 거리에서 그렇게 애국가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김근태는 화성군 사례 등을 예시하고 곧 ‘본론’으로 진입한다.

이런 우릴 보고도 여전히 위컴은 들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 박정희 군사 파쇼 시대에, 전두환의 초기에 우리는 들쥐처럼 눈을 내리깔고 어깨는 축 늘어뜨린 채 그렇게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결단코 더 이상 들쥐일 수는 없게 만든 장본인이야말로 위컴이고 글라이스틴이며 그러그러한 양키들인 것이다. 80년 서울의 봄의 좌절에서, 광주사태에서 드러났던 추악한 그들의 모습이 우리 내부의 자존심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우리는 부시 방한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들쥐로 고정시키려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민중을 억누르고 빼앗는 정치 군부, 특권적 관료 집단이 그들이다.
프란츠 파농이 비웃어 주었던 검은 피부, 흰 가면과 똑같은 누런 피부, 흰 가면을 쓰고 있는 집단들이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자치를 구걸하고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반민족세력의 후예인 것이다. 민족의 절대독립을 외치고 실천했던 위대한 애국자와 민중을 배반했던 수치스런 매국노들의 후예이다. 현대판 민족개조론자로서 여전히 “아직 우리는 열등합니다. 제발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꼴불견을 더 이상 봐 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안 될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석 6)


우리, 일어서야 한다


김근태는 이 해 6월호에는 다시 <우리, 일어서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 노태우 정권이 유화책을 내걸면서 이면에서는 수많은 청년학생, 민주인사, 노동자들을 구속한 사례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에게 89년 5월은 80년 5월이 되고 있다. ‘광주’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광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철규 형제의 처참한 죽음 속에서 ‘광주’는 저처럼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80년 합수부처럼 89년의 합수부는 우리에게 ‘광주’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귀 틀어막고 눈 내리깔고 비겁자처럼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김근태는 이 글에서 ‘이철규 변사사건’을 언급한다.
1989년 5월 1일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와 관련, 전남지역 합수부의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교지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과 4년)가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정국은 타살이냐 실족사냐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정부는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학생들을 대량 검거하였다.

이철규 형제의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의 광주’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광주, 항쟁하는 광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플랑크톤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우리에게 머뭇거림을 강제해 오는 저들의 시꺼먼 의도를 단호히 거부해야 된다.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수백 수천 명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 다시 나아가야 한다. 공장과 농촌에서 학교ㆍ교회ㆍ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거리거리에서 광범한 대중집회와 시위를 조직해 내야 한다. 특히 공장과 농촌에서 또한 거리에서 노동자와 근로농민이 주동이 되어 일어서야 한다.

광주와 이철규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그 책임자 처벌을 관철시키는 힘은 여기에 있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근원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지배권력의 탐욕과 증오심을 분쇄하는 곳에서만 승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가. 절대로 가능하다. 누가 감히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진하고 있는 민주의 저 굳센 발자국 소리가, 우렁찬 함성이 저렇게 파도치고 있지 않은가.
(주석 7)

<민족민주운동> 창간호 발언

김근태가 석방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인 1988년 9월 민청련은 부설기관으로 ‘민족민주운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민족민주운동의 과학적 이론정립과 정책수립역량의 제고에 보탬이 되고”,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후원 하에 연구소를 설립한다” 고 취지를 밝혔다.

연구소는 1989년 4월, <민족민주운동>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한국경제의 성장과 민족민주운동의 진로>를 탐색하는 기획좌담을 머릿기사로 실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신철영(서울 노동운동단체협의회 사무국장), 정태윤(진보정치연합 공동대표), 채만수(민족민주운동연구소 소장, 사회)가 참석했다. 주제는 ‘경제성장과 민민운동의 진로’였으나 토론 내용은 한국경제의 실상과 자본문제ㆍ노동ㆍ농민문제의 심각성,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민민운동의 역할 등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이 좌담에서 김근태는 대단히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상과대학출신으로서 한국경제의 실상을 전문가답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부분적인 획득, 몇가지 개량화 조치, 이런 것들이 남한사회의 현재 조건에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 속에서 현재의 상부구조ㆍ하부구조의 실제적인 조건에 비춰 봐도, 그런 단계적인 개량을 통해서 민중들의 삶이 향상되고 인간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는, 그런 길로 나갈 수 있는, 그런 길로 나갈 수 있다고는 볼 수 없고, 그렇게 봐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개량주의이고, 그런 개량주의는 우리의 조건 속에서 불가피하게 파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8)

김근태는 현 시국(당시)을 수구세력의 전략적 개량화 조치로 평가하면서 대단히 불안한 국면으로 인식한다. 한 대목을 더 발췌한다.

지배세력이 결정적인 궁지에 몰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의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을 획기적으로 역전시킬 필요가 있겠는가의 문제인데,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민중운동이 몇가지 개량조치 속에서 변혁운동 쪽으로 이끌려 올 것인지 아니면 체제내화되는 개량주의적운동으로 갈지가 아직 모호한 상태에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둘러싼 쟁투가 지금 실제로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지 않느냐 하는 판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린 공간에서는 탄압을 대비해야 되고 탄압시기에는 열림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균형된 자세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주석 9)


주석
6> <노동문학>, 1989년 4월호.
7> <노동문학>, 1989년 6월호.
8> <민족민주운동> 창간호, 28쪽, 아침, 1989.
9> 앞의 책,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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