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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3 08:00 김삼웅

 

늦봄 문익환 목사의 생전모습. 살아생전 그는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항상 있었다.ⓒ 김민수

 

김근태는 이론가이면서 전략가였다. 반군사정권, 반외세투쟁에 있어서는 명료한 이론과 함께 치밀한 조직과 연대를 통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과거의 재야ㆍ청년운동이 거칠게 조직되어 단발적으로 투쟁하다가 와해되곤 했던 경험에서 치열한 전략이 요구되었다. 그는 정책기획실장으로서 전민련의 이념과 조직을 총괄하면서 90년대초 노태우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다.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예의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다시 파쇼적인 통치로 본색을 드러냈다. 전민련 고문인 문익환 목사가 3월 25일 정경모ㆍ유원호와 함께 베이징을 경유하여 평양에 도착하고, 이에 앞서 3월 20일 작가 황석영의 방북사건 등을 공안정국의 빌미로 삼았다. 문익환은 평양공항에서 입북성명을 발표하여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정부는 문 목사 일행이 귀국하자마자 미리 발부받아 둔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여 김포공항에서 구속ㆍ수감했다. 이 사건은 공안정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4월 12일 이부영ㆍ조성우ㆍ권형택ㆍ이재오ㆍ이창복ㆍ배종렬ㆍ지선 스님 등 전민련 간부들을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14일에는 <한겨레> 논설고문인 리영희 교수를 북한 취재 계획과 관련하여 역시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5월 1일에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문익환 방북사건과 관련 혐의로 소환했다. 노태우 정권은 제1야당 총재까지 소환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위기 국면을 역전시키려 들었다.

4월 12일 전민련 의장단 등 간부들이 구속될 때 김근태는 빠져있었다.
외형상 고위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민련 창설 당시 그는 정책실장이었다. 김근태는 의장단과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흔들리자 1990년 3월 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조직을 유지하고 폭압적인 공안통치를 일삼는 노태우 정권과 맞장뜨기 위해서는 김근태가 다시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회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고난의 길이었다.

김근태의 능력과 역량, 전민련과 민주화운동 진영에서의 위상을 꿰고 있는 공안당국이 그를 방치할 리 없었다. 그들은 쇠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외부 환경은 다시 5공 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었다.

89년 대학생으로 정부의 허락 없이 평양에 갔던 임수경 씨가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와야 할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 씨와 동행해 내려오도록 파송했다. 물론 신부는 자신이 보호하던 학생과 함께 옥에 갇혀야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1989년 5월 3일 부산동의대 사태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하고, 6월 27일 평민당 소속 서경원 의원이 방북한데 이어, 6월 30일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제3국을 통해 평양 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했다. 7월 7일에는 남한의 전대협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가 남북통일을 위한 공동투쟁 등 ‘남북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다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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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2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달라진 변화의 상황에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군부정권의 향방을 주시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였다. 그는 어떠한 절망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투지를 갖고 있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지만 김근태는 유난히 ‘희망’이란 단어를 자주 거론하는 정치인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95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도 <희망의 근거>다. 그런데 익숙한 일상의 언어가 시인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듯이 김근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희망은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주석 1)

이승만에 출산되고, 박정희에 양육되고, 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진 정치 군부는, 그리고 이들에 빌붙어 실세가 되고 치부에 성공한 보수세력은 전혀 민주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989년 1월 노태우 정부는 헝가리와 수교, 동구 공산권 국가와 첫 국교를 수립하는 등 열린 외교정책을 펴는 듯 하였다. 하지만 반공냉전 의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화만이 통일을 가져오고, 평화통일만이 민중의 생존권이 보장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노태우 군부정권과 타협적인 보수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재야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을 결속하는 일이었다.

반유신, 반5공 투쟁 과정에서 청년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자ㆍ농민ㆍ여성 등 기층민중세력의 성장이 있었다. 값진 희생이 따랐지만, 그동안 소수 운동권에 머물렀던 반독재 시민저항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태우 6공 정권에서는 다양한 시민단체가 결성되고 저항운동도 그만큼 튼실해졌다.

한 평자는 전민련의 창립과 관련,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썼다.

전민련은 분열과 무기력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 땅 민중들에게 희망과 신심을 안겨줄 강력한 단합된 구국운동 조직이고, 불신과 대립을 깨끗이 청산하고 단결과 투쟁의 길에 나선 모든 애국자ㆍ애국단체들의 합일된 의지의 결실체이며, 각계각층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중운동발전의 요구에 화답한 조직적 총화이다.

이제 전민련의 건설로 대중운동 속에 확고한 구심이 마련되어 우리 구국운동이 일대 전진을 기하게 되었고, 각계 민중에게는 전민련이라는 민중운동의 견인차, 응원군이 생겨남으로 해서 더욱 날카로운 불패의 투쟁의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며, 미-노태우 독재에게는 자신들의 패퇴와 종말을 앞당길 화약고이자, 저들의 매국적 소행을 가로막을 바위산이 등장한 것이 되었다.
(주석 2)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창립대회를 열고, 상임공동의장에 이부영, 공동의장에 이창복을 선출했다. 민통련의 발전적 해체와 재야ㆍ노동자ㆍ농민 등 8개 전국단위 부문운동 단체와 전국 12개 지역단체 및 200여개의 개별단체가 참여하는 해방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구국운동조직이라는 거대 협의체였다.

이날 전민련 대의원 총 1,103명 중 726명이 참석하고, 시민ㆍ학생 등 5,00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창립대회가 열렸다. 노동운동 영역 대의원 250명, 농민운동 대의원 230명을 비롯하여 청년ㆍ교육ㆍ종교ㆍ여성ㆍ비판적 지식인 등이 다수 참여했다.

6.29선언 1주기의 ‘정치적 선물공세’의 일환으로 88년 6월 3일, 2년 10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김근태 씨는 대선을 거치면서 민통련이 자중지란을 겪다가 결국 와해되고 말자 다시 운동진영을 결집, 대중투쟁을 펼칠 상시적인 공동투쟁체 건설이 시급하다고 판단, 이부영 씨등 출소한 40대 인사들과 함께 전민련 건설논의를 해나갔다. (주석 3)

전민련은 창립대회의 결성선언문과 사업계획 발표를 통해 대북관계 및 5공청산 등 대내외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전민련은 1988년의 3가지 과제를 목표로 제시했다.
첫째, 5공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한다.
둘째,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미국과 노태우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저지한다.
(주석 4)

전민련은 이와 같은 목표 아래 5공청산과 광주학살 원흉처단투쟁, 반민주악법 개폐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 등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전민련은 창립 다음날인 1월 21일 15,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대학로에서 ‘노태우 정권의 민중운동 탄압 및 폭력테러 규탄대회’를 시작으로, 2월 18일에는 ‘광주학살 5공비리 민중생존권탄압 책임자 노태우ㆍ부시 규탄 국민투쟁 기간’을 선포하여 6공정권의 폭압에 정면 저항했다.

전민련은 2월 27일 회원 30여 명이 “부시 방한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며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미대사관 앞쪽으로 시위를 벌이다가 전원이 연행되었다. 3월 14일 전민련 주최로 8개 단체가 연합하여 ‘노정권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본부’ (공투본부) 결성식을 가진데 이어 3월 19일에는 공투본부 주최로 5,000여 명이 한양대 노천국장에서 ‘노태우정권 불신임투쟁 선포대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또 4월 2일에는 노운련ㆍ서총련 소속 회원 등 1,000여 명과 함께 동국대에서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강제진압 규탄대회’를 열었다.

1989년의 대정부 투쟁의 중심에는 전민련이 있었다. 전민련은 시민조직과 노동운동 단체들과 전두환 체포, 5공청산, 노태우 퇴진, 노동탄압 중지 등 핵심 이슈를 제시하면서 6공정권을 압박했다. 여기에는 김근태의 조직력과 정세분석에 힘 입은 바 적지않았다.

그는 “대선시기의 전술적 차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중층적 타협을 통해 신속히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이 ‘선 건설 후 내부투쟁’ 논리는 당시 운동의 통합을 요구하는 운동진영 내부의 정세와 결합하면서 강한 설득력을 가져나갔다. 그 후 전국적으로 지역민족민주협의회가 결성되면서 결국 89년 1월 전민련 발족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출소한 직후인 88년 7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 현황과 과제’ 라는 주제로 연설한 ‘2개의 전선론’은 현재까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민족민주연구소의 채만수 소장은 “그동안 추상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통일전선론을 크게 진전시킨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운동상황을 “민족민주전선, 즉 애국전선의 건설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다”고 파악하고, 애국전선의 건설에 관한 문제에서 “민족민주운동 전선의 즉각적인 건설을 주장하는 소시민적 포퓰리즘과 국민운동 수준에서의 연합을 주장하는 영향을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2개의 전선론을 폈다.

“현재 민족민주운동은 기층의 민중운동 역량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운동은 보수야권으로 불리는 제도정치권 그리고 재야운동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이 양자는 민주화 실천목표와 운동방식에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의 운동에는 명백한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민족민주전선과 국민전선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민족민주전선이 기본모순, 국민전선이 현시기 주요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강연은 향후 전민련의 위상과 발전전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주석 5)

주석
1> 정혜신, <희망의 근거가 됨직한 사람>, <신동아>, 2001년 9월호.
2> 이무명,
<애국민주운동론>, 270쪽, 녹두, 1989.
3> 이재화, 앞의 책, 166쪽.
4>
<민주화운동사연표>, 518쪽.
5> 이재화, 앞의 책,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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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21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86년 6월 30일 2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경주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가석방이었다. 그가 출소하게 된 데는 정치적 지형변동에 따른 조처였다. 정부는 6ㆍ29선언 2주년의 은사라고 생색을 냈다.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총선은 노태우의 민자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평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순위로 3야당이 일정한 의석을 갖고 포진하였다.

정국은 모처럼 야당이 주도하는 가운데 5공 청산과 민주화 추진이 진행되었다.
야당들은 사안에 따라 연대 혹은 합종을 택해가면서 경쟁적으로 정치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제24회 서울 올림픽으로 정치 현안은 스포츠 제전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김근태는 세월의 변조 속에서 모진 고문과 3년여의 옥고로 망가진 건강을 추스르는 한편 다시 행동에 나섰다. 첫 발언은 10월 22일 서울대 민추위위원장 문용식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이었다.

 


문용식과 박문식 등은 1984년 10월 7일 민주화추진위원회(일명 깃발 그룹)를 결성, 문용식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엇다. 민추위는 하부조직의 건설에 나서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고려대 등의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주학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민주학련 소속 대학생들은 11월 14일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 농성을 시작하면서 민중생존권 보장과 14개 항의 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또 민정당재집권저지투쟁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독재투쟁을 벌였다. 공안 당국은 1985년 5월 23일 민족통일ㆍ민주쟁취ㆍ민중해방투쟁위원회 소속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민추위가 배후 조종한 것으로 판단하고, 문용식 등을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다. 김근태가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폭로한 것이다.

김근태가 석방되었을 때에는 민청련은 정치상황의 변화와 주요 간부들의 장기 구속 등으로 거의 활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김근태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었으나 시대 상황의 변화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5ㆍ3 인천항쟁 이후 주요 간부 구속과 수배로 민청련의 역량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반면에 6ㆍ29선언으로 독재정권의 폭압적 성격이 약화됨으로써 열려진 공간은 엄청난 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탄압시기에 보여왔던 민주화운동진영에서의 선도적ㆍ지도적 역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86년 초에 회원들이 대거 탈퇴한데다가 김근태 전의장, 김병곤 전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 간부가 장기간 구속상태에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5ㆍ3인천항쟁을 빌미로 한 민통련을 비롯한 민주화운동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11월의 건국대 항쟁의 대학생 대량 구속 사태 등 탄압국면 속에서 공개정치투쟁을 표방하는 민청련의 활동 입지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9)

김근태는 민청련의 쇄락에 실망하면서도 절망하진 않았다.
새로운 희망을 걸었다. 먼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고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문 경찰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이 시급했다. 12월 15일 서울 고법의 제정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근안 전 경감이 수배되기에 이르렀다. 역시 정치지형의 변화때문이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정국은 일해재단 청문회를 시작으로 5공비리 청문회로 이어졌다.
노량진 수산시장 비리 사건으로 전두환의 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그리고 전두환의 처남 이창석이 공금 횡령 혐의로 각각 구속되었다. 11월 23일 전두환ㆍ이순자 부부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로 유배되었다.

새로운 정치질서가 잡혀가고 전두환이 몰락하면서, 세상의 관심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와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의 이른바 ‘3김’에 쏠렸다. 그리고 반독재 투쟁을 ‘적당히’ 했던 운동권 출신들이 야당에 들어가 ‘투사’가 되었다. 이 무렵 김근태의 심경은 할프단 라스무센의 다음의 싯구대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고문가해자도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몸도 아니다
죽음을 가져오는 라이플의 총신도
벽에 드리운 그림자도
땅거미 지는 저녁도 아니다
희미하게 빛나는
고통의 별들이 무수히 달려들 때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의
눈 먼 냉담함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이 해 9월 말 도서출판 중원문화를 통해 고문과 옥중기록을 묶어 <남영동>을 간행하였다. 독재정권의 야만적인 고문실상, 옥중 편지와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썼던 주요 논설 등을 실었다. 한국민주화운동사와 고문의 야만성을 폭로한 5공시대의 대표적 고발문학으로 꼽히는 책이 되었다.

이 책은 문익환의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의 서시에 이어,
제1부 :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① 예고되고 계획된 구속 ② 인간 도살장 남영동, 그곳에서 있었던 한 맺힌 내력 ③ 서울 구치소 ④ 지식인이여, 법관들이여 ⑤ 나는 처벌받을 수 없다.

제2부: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⑥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⑦ 민주주의를 향한 진군

발문 : 김근태 동지를 알자 / 문익환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원래 1987년 9월 김근태가 아직 경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즈음 민청련에서 <김근태 고문 및 옥중기록 - 이제 다시 일어나>란 제목으로 중원문화원에서 출판한 것을 제목을 바꾸어 재간한 것이다. 민청련은 서문에서 “고문이 남긴 육체적ㆍ정신적 폐허상태를 추스르며 다시 깨어 일어나는 한 인간의 희생과 재기의 처절한 과정을 그의 기록을 통해 밝혀내고자” 간행했다고 밝혔다. 서문은 이어진다.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 동지는 다른 어떤 점보다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이다. 한 단체의 대표로서, 남편으로서,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그의 절실한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김근태 동지의 이러한 진실성을 통하여 참 용기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주석 11)

주석
9> <6월항쟁을 기록하다(1)>, 247쪽.
10> 할프단 라스무센,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2>, 21쪽, 역사비평사, 2007.
11> <이제 다시 일어나>,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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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20 08:00 김삼웅

 

 

6월 항쟁의 열기 속에서 인재근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후보자로 남편과 함께 추천된 사실을 알았다. 그런 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그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이었다.

김대중 선생 비서진들에게서 얼핏 들으니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후보자로 우리 부부가 추천되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그 상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추천하는 정도로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어렵게 전화로 김대중 선생께 사양하는 뜻을 전했다. (주석 7)

인재근은 옥중의 남편과 이 상의 수상 여부를 놓고 상의했다. 부부는 미국이 그동안 한국에서 자행한 여러 가지 범죄적 행위에 미국인이 주는 상을 받는 데 대해 거부감이 생겼던 것이다. 분단과 국민의 반대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가장 잘 순종해주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을 지지해주고 “한국민들은 들쥐와 같다”는 따위의 망언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광주학살과 관련 미국의 행위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6월항쟁으로 따낸 대통령 직선제로 인해 대통령후보 단일화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우리 본부가 우리의 주체 역량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김대중 씨 비판적 지지를 표명할 당시 공교롭게 이 상의 수상자로 우리가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국내에 이러한 사정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국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더욱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조국의 분단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6ㆍ25전쟁은 왜 발생한 것이며, 그리고 그 이후 현재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오고 있느냐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간과했었던 많은 사실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석 8)

김근태 부부는 특히 미국의 광주사태와 관련된 부문에 이르러서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곁들여서 ‘인권상’은 자신들보다 훨씬 큰 희생을 바친 동지들에게 돌려져야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부부는 여러 날 고뇌 끝에 결국 이 상의 수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미국 대통령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를 추모하는 사업으로서 제3세계 인권운동가에게 주어지는 상의 케네디 재단은 비교적인 양심 세력이 이끌고 있어서 이 재단의 일을 연대 지지하는 입장이 배려되었다. 또한 한국 민주화운동에 깊은 관심과 격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수상을 결정하고도 11월 20일 워싱턴에서 거행되는 시상식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김근태는 옥중에 있었고, 인재근은 노태우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해 4월 로버트 케네디 추모사업회에서 이 상을 주기 위해 방한하기로 했지만, 정부는 그들의 비자발급을 거부하여 이것도 무산되었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듯 하자 정부는 뒤늦게 이들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고, 1988년 5월 4일 가톨릭센터 강당에서 수상식이 거행되었다. 김근태는 여전히 옥고중이어서 인재근 혼자 상을 받았다. 만감이 교차되는 수상이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으로 김근태는 국제적인 양심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석
7>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한반도재단 여성위원회, 54쪽, 2012.
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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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19 08:00 김삼웅

 

직선제 헌법이 마련되고 대선 일정이 잡히면서 대선 후보가 속속 등장했다.
집권당의 노태우와 야권에서 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의 이른바 ‘1노3김’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노력하고 다수 국민도 이것을 바랐으니,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이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야권은 분열상을 드러냈다.

재야ㆍ시민단체들도 분열되었다. 후보 단일화와 독자후보 출마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념ㆍ노선에 따라 각자도생에 나서기도 하였다.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민청련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옥중투쟁을 조직해냈으며 또한 바깥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월항쟁을 직시했으며 그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운동권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의 옥중 메시지는 87년 12ㆍ16대선을 앞두고 세 차례 나왔다.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부인 인재근 씨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받아쓰게 했다. 10월 16일과 28일, 11월 4일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10월 26일의 첫 메시지에서 그는 김대중 씨를 ‘범국민적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씨의 비판적 지지 천명으로 그는 출옥 후 상당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김근태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당시 어떤 입장이 옳았는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그것은 판단될 것이다." (주석 6)

김근태는 대단히 함축적인 발언을 하였다. 양김 중에 자신의 김대중 지지를 두고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근태의 메시지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6월항쟁을 이끈 핵심적 재야연합세력인 민통련에서는 회원 투표를 거쳐 압도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핵심재야세력은 김대중을 선택적으로 지지하고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5공정권의 각급 부정과 관권동원, 야권후보의 난립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의 실망은 컸다.
5공 폭압세력이 교활한 정치적 술책으로 6ㆍ29를 제의하고, 야권과 재야가 이를 덜컹 받아들이면서 국민의 혁명적 열기가 체제내로 순화되고, 후보 난립으로 군부독재 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주석
6> 이재화, 앞의 책, 165쪽.



<나의 18대 대선 후기 1> / 유창선 (시사평론가)

“뻔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해야 아는 어리석은 자들...”

안철수가 사퇴했던 날 밤. 부산에서의 대선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 있던 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채 페이스북에 그렇게 글을 남겼다. 나에게 18대 대선은 그날 밤 그렇게 끝났다. 안철수를 저렇게 퇴장시키고서 민주당과 문재인이 박근혜를 이긴다? 나는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아주 명백한 표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날 밤, YTN과 MBC, KBS의 해직자들이, 그리고 쌍용차의 노동자들, 철탑에서 고공농성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이야 정권교체 못하더라도 자신들의 금뱃지를 간직하며 야당권력을 누리면 되겠지만, 다시 고통이 연장되는 민중들의 아픔은 어찌하란 말인가....

결국 민주당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지난 4.11 총선 패배에 이어, 국민의 65% 이상이 정권교체를 열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권교체를 무산시키는 주역이 되고 만 것이다.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욕심을 낸 결과이다. 지난 1년 동안 박근혜에게 줄곧 뒤졌던 후보가, 지난 1년 동안 박근혜를 변함없이 이겼던 후보를 밀어내고 자신이 단일후보 자리를 차지했던 상황은 재앙의 출발점이었다. 과연 정당의 후보이기에 자신들이 단일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정권교체의 대의를 뒷전으로 밀어버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민주당은, 문재인 후보는, 야당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이미 노회해진 486정치인들은, 민주당보다 더 민주당스러운 시민사회 출신 정치인들은, 팬덤문화에 빠져있는 그 지지자들은 하나로 똘똘 뭉쳤다. 그리하여 박근혜를 이기는 길을 막아버리고 박근혜에게 지는 길로 국민을 이끌고 갔다. 그것은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이길 능력도 없고 이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믿고 따라오면 이길 수 있다고 한 것, 그것은 거짓이었다....

시종일관 열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도 민주당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박근혜에 줄곧 뒤지는 판세를 민주당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노 핵심들의 백의종군 선언도, 문재인 후보의 의원직 사퇴도 끝내 없었다. 내가 거론한 이해찬 정계은퇴 선언 같은 것은 아예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는 모습일 뿐이었다. 단일후보 자리를 차지했으면 모든 것을 던지고서라도 이길 수 있는 길을 만들었어야 했거늘,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거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분한 것이다.

이제는 분명해졌다. 민주당은 정권교체의 장애물이다. 지금의 민주당이 그대로 있다면 이 나라는 새누리당이 장기집권하는 나라, 새누리당이 2014년 광역선거와 2015년 총선에서도 모두 승리하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무모한 욕심으로 정권교체를 무산시킨데 대해 가장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 천년만년 야당을 하며 야당권력을 놓으려하지 않는 세력은 이제 그만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하기에는 그들 스스로가 이미 너무도 기득권화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민주당이 스스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국민의 힘으로 민주당을 무너뜨리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적 야당을 만들어내는데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안철수는 그 과정에서 구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과정에서 안철수는 여러 가지로 정치적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진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능성있는 대안으로 살아있다. 국민의 힘이 모인다면 기득권 세력화 되어버린 민주당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야권의 구심체는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좌절된 국민의 정권교체와 새 정치 염원은 아직도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012/08/18 06:50 김삼웅

 

5일 저녁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로비에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부미방)의 주범으로 위암을 앓고 있는 김은숙씨를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에서 윤민석씨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다.ⓒ유성호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의 수구보수세력은 노도와 같은 민중의 궐기 앞에 넋을 잃고 있다가 간신히 노태우의 6ㆍ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등으로 국면을 호도하고자 하였다. 부마항쟁 등 반유신 투쟁이 10ㆍ26사태로 가라앉고 말았듯이, 6월 민중항쟁도 6ㆍ29선언으로 혁명적 비등점에서 국면의 전환을 보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군부와 이들과 한 패가 된 보수세력은 정치적 술수가 대단히 발달돼 있다. 그들은 강경국면과 유화국면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정권을 계속 유지한다.
노태우의 6ㆍ29선언은 위기 탈출을 위한 유화책이었다. 야당과 재야가 6ㆍ29선언을 받아들이면서 6월항쟁의 국민적 민주화 열기는 체제내로 수용되고,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직선제 개헌안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정국은 급속히 제13대 대통령선거 국면으로 바뀌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 같았다. 폭압과 살륙의 시대가 어느새 대화와 타협의 시대로 변하는 듯하였다. 야당이 속속 창당되고 기회주의 언론은 온통 차기 대권과 대선의 향방관련 기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죽은 자들과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양심수들은 잊혀지고, 산 자와 갇히지 않은 사람들이 제각기 이념과 이해와 입지를 쫓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전히 경주교도소에 갇힌 김근태는 6월항쟁을 주도한 민중의 위대한 역량을 믿으면서도 바깥 소식에,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희망과 좌절, 안도와 비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8월 28일 아내에게 <자유ㆍ석방 앞에서 의연함, 태연함은 태풍 속의 낙엽이지요>라는 제하의 편지에서 심중의 일단을 밝히고 있다.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움, 바깥소식이 동반하는 설레임과 안타까움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탓도 있겠지만, 이 높은 담벼락 안에서의 삶이 영혼을 무척 피폐케 만드는 것 같소. 이 시대의 징표인 적나라한 폭력, 제도화된 폭력과 경멸이 한껏 도드라지고 있는 이곳에서의 살아냄, 그리고 분노와 항거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긴장될 것을 요구해왔고, 그 때문에 꽤 바빴던 것도 같구려. 지난 2년 말이오.(…)

나갈 것 같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이 상태, 이런 우리 마음을 뭐라 말해야 할지요. 지난 7월 10일과 8ㆍ15의 내 심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소. 내 차례는 아직 안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자신에게 타일러 왔는데도, 열렸다 허무하게 도로 닫히는 교도소 정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휘청거리는 것 같았소. 곧 몸져 드러누울 지경이었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버티었지만 말이오.
(주석 3)

이 대목에 이르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7월 10일과 8ㆍ15에 양심수와 일반범에 대한 정부의 감형ㆍ출소 조처가 있었다. 김근태도 대상자의 명단에 오르내렸으나 끝내 배제되었다. 수인들에게 3ㆍ1절과 광복절이 특히 기다려지는 것은 특사라는 ‘성은’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취임식 연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전직 대통령들. 왼쪽부터 김영삼 전대통령, 노태우 전대통령, 전두환 전대통령, 최규하 전대통령.ⓒ주간사진공동취재단

 

노태우의 6ㆍ29선언에는 직선제 개헌과 더불어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관련 사범 석방’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쳐 ‘시국사범’의 석방이 있었지만 김근태는 비껴갔다.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어른답게 해내지 못했다오. 결국 나는 못 나가고 말았구나 라는 그 냉엄한 사실에 짓눌려 허둥대고 만 것이지요.

이번은 아니지만 여하튼 나가는 것이 가까웠으니 여러 가지를 미리 깊이 생각해두고자 하면서 이 민주화의 변화는 무엇인가,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리고 나는 무엇이고 참된 민주화와 민족자주를 위해서 우리는 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등을 헤아리느라고 무척 바빴었다오.

간혹 생각이 엉키거나 잠자리에 들 때 쯤이면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여 빨리 나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은 아닐까 하며 조바심 치고 가슴 저려 하다가 자신을 돌아보곤 실소도 하였었소. 시계는 네편이야, 대범해야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었다오.

그러나 말이오. 자유ㆍ평등ㆍ석방 앞에서 의연함, 대범함, 어른다움 등은 한낱 태풍 속의 낙엽이었을 뿐이었소. 여러 가지 논리적인 숙고 과정 속에서 진짜 커지고 커져왔던 것은 폭발할 듯한 해방에의 갈망, 자유에의 그리움이었소.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고 그냥 원색적인 해방에의 욕구만 있었던 것이오. 나가고 싶은 것이오. 이곳을 떠나가고 싶었던 것이오. 뻔히 예상되었던 것인데도 이런 강렬한 욕구가 차단되었던 그때의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소. 나는 통째로 교환되었던 것이오.
(주석 4)

이 대목에 이르면 김근태의 소박한 인간적 감성을 만나게 된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누군들 감옥에서 풀려나길 바라지 않겠는가. 행여나 하며 ‘조바심 치고’, ‘가슴 저려’하는 수인의 모습에서 투사 김근태가 아닌 보통사람 김근태가 눈에 선하다. 그는 혁명가나 투사이기 전에 평범한 인간이었다.

김근태의 이 편지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대목이 있다. 이른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김부식ㆍ김은숙ㆍ김현장 등이 경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게 된 심경이다.

내가 이곳 경주에 와서 꽤 괜찮아했던 가장 큰 이유 하나는 은숙이가 여기서 살다가 나갔다는 사실이었소.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묘한 안도감과 구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었소. 어찌보면 얄팍하고 뻔뻔스런 것일 수 있는데 은숙이가 고생하던 그곳에서 나도 고생 좀 했다는 사실이 성립하게 된 것이오. 나중에 나가서 은숙이, 부식이, 현장이를 볼 때 말을 틀 건덕지가 생겨준 것이지.

그네들이 결단을 내리고 투쟁할 때, 갇히고 매맞고 외로워할 때, 앞 세대로서 선배로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소. 광주사태 이래로 눈물 많은 사내가 되어 쥐죽은 듯 엎어져 있었을 때 그네들은 일어섰고, 나는 또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소.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조그만 꼬투리가 우연히 생기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왔소. 이 경주에 와서 말이오.
(주석 5)


주석
3> 김근태 옥중서간집,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202~203쪽, 한울,
1992.
4> 앞의 책, 203~204쪽.
5> 앞의 책,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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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8장] 6월 항쟁기 외로운 옥중에서 2

012/08/17 08:00 김삼웅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시위대 ⓒ 6월항쟁기념관

바스티유 감옥을 붓 한 자루로 깨뜨린 볼테르는 막상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다른 감옥에 갇혀 있었다.
민청련을 이끌면서 ‘전두환 바스티유’를 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김근태는 6월 항쟁기에 경주교도소 골방에 수감돼 있었다.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는 침묵하던 ‘남은 자’들까지 분노하는 계기가 되었다. 4ㆍ19가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참살이 화약고의 불이 되었듯이, 6월 항쟁은 박종철ㆍ이한열 등 대학생들의 학살이 항쟁의 뇌관을 터뜨렸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경 연세대 정문 주변에서 학생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교문 쪽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은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 않을 때…”라는 노래를 부르며 교문 밖 5미터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러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순간 SY-44 최루탄 10여 발이 학생들에게 직격으로 날라왔고, 이 중 하나가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한열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동료 학생들이 급히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의식을 잃고 몸도 차갑게 굳어져갔다. 학생들은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서고, 많은 시민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이한열은 7월 5일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은 6월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부산시민 시국토론회가 열리고 있는 카톨릭센타 앞. 부산가톨릭센터는 6월항쟁의 분화구였다. ⓒ 6월항쟁기념관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것에 분노하고, 독재정권의 초강경 시위 진압을 규탄하였다. 특히 6월 18일의 집회에는 전국에서 15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한열 피격에 대한 항의 시위는 학생과 시민이 함께 하고, 서울과 지방 도시로 이어져 거대한 6월 항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9일에 있은 각 대학의 6ㆍ10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중태에 빠진 것은 6월 항쟁의 불꽃을 계속 지피는 활화산으로 승화했다. 전두환 정권의 초강경 탄압의 연속선상에서 박종철이 사망한 것이 6월 항쟁의 문턱까지 군부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투쟁을 이끌어왔고 끝내 6ㆍ10국민대회를 갖게 했는데, 또 한 학생이 중태에 빠졌던 바 박종철의 죽음과 함께 6월 항쟁 기간 내내 투쟁을 타오르게 하는 데 기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주석 1)

시위 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권력은 합법적인 정권일 수 없다. 유신권력과 5공정권은 국민의 정당한 동의를 받지 못한 권력이어서 실체적으로는 존재해도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지 못한 도당(徒黨)에 불과했다. 때문에 정체성의 위기에 몰린 5공 수뇌부는 시민의 저항에 고문과 살상을 가리지 않는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6월 10일부터 노태우의 6ㆍ29 항복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 시위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반독재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국본’은 6월 26일 평화대행진을 감행하여 전국 33개 도시, 4개 군ㆍ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이날 전두환 정부는 서울에 170개 중대 25,000명을 배치하고 전국적으로는 10여만 명을 투입해 철통 방어에 나섰으나, 해일처럼 밀려오는 시위대를 막아내지 못했다. 1919년의 3ㆍ1만세 시위와 1960년 4ㆍ19를 방불케 하는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이었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실제적인 종말을 가져왔다.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 등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전두환은 6월 18일을 전후하여 계엄을 검토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미국 측이 여러 채널을 통해 군 출동을 자제하라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의 국민항쟁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은 제한된 특정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을 출동시켜 진압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70만 인구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계엄군이 한때 외각으로 밀려났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인구 1천만이 사는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자면 수도권의 군 병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군 병력 투입으로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6월 항쟁에서 계엄령을 막는 것은 미국의 자비심도 아니요 전두환의 개과천선도 아닌 바로 한국 국민 자신의 자각과 실천의지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힘이었던 것이다. 6월항쟁이 분출한 힘은 전두환이 사용할 수 있는 군대, 경찰력을 위시한 그 모든 종류의 폭력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2)

주석
1> 서중석, <6월항쟁>, 272쪽, 돌베개, 2011.
2> 유시춘, <6월 민주항쟁>,
93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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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7장] ‘이제 다시 일어나’, 결연한 옥중기

2012/08/16 08:00 김삼웅

 

2005년 4월 서울대 교정에 세워져 있는 김세진ㆍ이재호 열사 추모비에 향불과 국화가 놓여져있다.

 

김근태는 2월 22일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면서 김세진 군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인 김세진과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 위원장 이재호는 1986년 4월 28일 관악구 신림동 4거리에서 전방입소에 반대하며 가두시위 중 분신하여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26일 각각 사망하였다.

편지의 일부를 소개한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이 욕된 어둠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지요. 그 속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젊음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인지요.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지 말라”고 외쳤다는 세진이의 금속성 목소리에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라는 여운이 긴 메아리를 나는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젊은 생명을, 세진이, 재호, 영진이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 젊음들이 죽음의 골짜기로 몰리는 동안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나는 세진이, 재호가 정말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종철이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이 팽만한 배와 흥건하게 젖은 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어디 있습니까. 물 먹고 팽만한 배가 되어 죽어 버렸거나, 잠깐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다가 연기를 남기고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요.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세진이의 죽음 이후 두 분이 떨쳐 일어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눈물이 핑 돌면서 나는 머리를 끄덕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세진이의 부활일뿐만 아니라, 두 분의 새 생명, 우리 모두가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소선 어머니에게서 우리는 그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세진이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두 분의 일어섬을 기뻐합니다. 사망의 세계를 떨치고 일어선 두 분을 존경합니다. 후둘 후둘 하는 다리 떨림, 가슴 무너짐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요. 두 분 속에서 저는 종철이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뵈는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기대옴을 받쳐 주는 두 분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소선 어머니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석 20)

김근태는 3월 14일 경주교도소에서 <기정이 어머니의 구속 소식을 듣고> 의 편지를 썼다.
짧은 글이어서 전문을 소개한다. 구속된 자식들을 풀어놓으라고 시위한 죄로 구속된 ‘기정이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이다.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기도하고 계신가요. 기도하면 희끄무레한 먹방이 조금은 환해지던가요. 뜨거운 가슴 설운 마음 주체할 길 없어 15척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 던지고 물어뜯고 침뱉으며 사납게 사납게 소리치며 쳐들어 오셨습니다.

당신은 잠시 피하시라는 유혹 따위는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대달리려 이렇게 입성하셨습니다. 그렇게 어두움 속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외롭지 않으신가요. 우울해지지 않던가요. 기죽지 않던가요. 혹시 소리 죽여 울지는 않으셨는지요.

어머니, 어머니, 기정이 어머니. 추운 대관령 바람 한가운데 서 있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스름달 비껴 걸린 나무 위로 일지매처럼 날아 올라가셨었지요. 거기 앉아 담벼락 노려보면서 아들들을 불러대셨지요. 내공 깊게 무림계 고수처럼 어머니의 외침은 하늘을 뒤덮었었습니다. 그렇게 아들들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당신은 참다가 참다가 참지 못하여 아들 딸 가슴속으로, 이 설움 많은 담장 안으로 그리하여 먹방 속으로 직행해 버리셨습니다.
어머니는 —.

아, 비열한 저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주석 21)

 


2010년 MBC 노조 파업 당시, 현장을 찾아 연대사를 하다가 소녀처럼 웃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김근태는 1986년 10월 강릉교도소로 면회온 부인을 통해 구두로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우선 교도소 내의 행형제도의 철폐를 통해 재소자의 인간적 생활의 회복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소내(所內) 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직적인 옥중투쟁론이다. 이 글은 인재근이 정리하여 전국의 수형인들에게 은밀히 전달되었다.

김근태는 민주화운동옥중투쟁의원회(가칭)의 구성을 제안하면서, △ 양심수들의 합방ㆍ합사문제 △ 재소자에 대한 폭행ㆍ폭언근절 △ 전 재소자의 삭발거부와 소내에서 면회ㆍ서신ㆍ서책검열 등에 관해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근절해야 한다고 실천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재소자들이 결속하여 투쟁할 것을 권려했다.

주석
20> 앞의 책, 198~199쪽.
21>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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