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욕쟁이 시인 채광석

 

 

87 년 6 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태 전 민청련이 운동 방침으로 정한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 라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 슬로건이
점차 신민당과 재야 모든 정치 사회 단체의 주요 운동 방침으로 되고

고문에 의한 서울대생 박종철 군 사망 사건과
서울대 여학생 권인숙 양에 대한 성 고문 사건
연세대 이한열 군의 최루탄 사망 사건 등등으로

고문 추방과 직선제 개헌 투쟁을 위한 국민운동 본부가
지역과 부문과 계층을 망라해서 발족되고

마침내는 6 월 민주대항쟁의 물결을 이루어 내고
투쟁 목표를 관철해 냈던 그 해 그 달...

어느 날 저녁 어스름한 무렵...
대문밖에서 나와 혜숙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대문 열고 나가 보니 채광석이다.
채광석은 바다 풍경이 아름답고 아름드리 송림으로 이름 난 안면도 출신이다.


▲ 채광석(蔡光錫, 1948년 7월 11일~ 1987년 7월 12일)


그는 서울대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71 년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군대에 강제 입영당하고
제대하고 복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 시위 사건으로 구속되어

2 년 6 개월 동안 감옥살이 하다가 80 년 봄에 다시 복학했지만
5.18 광주 사태 이후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다시 구속되었었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시인으로 문학 평론가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터였다.

채광석은 그 날 술이 얼큰한 상태로
문밖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혜숙이 보고 싶어 왔다면서 까만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더니
소고긴데 지나오다 보니까 요 아래에 정육점이 있어서 사 왔단다.

나는 속으로 평소에 채광석의 성품으로 보아
'친구집에 소고기를 사 들고 다닐 줄도 아나?' 하고 의아스러워 했다.

" 웬 일이냐?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 안주도 할 겸 우리 혜숙 씨랑 같이 먹을려고 그런다 임마."

채광석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 박혜숙! 당신 죽으면 안돼!..."
하고 점잖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서 고기를 빨리 구어 오라고 성화다.
고기를 구어 먹으면서 광석은 " 혜숙아! 이 고기 먹고 빨리 병 나아야 돼! "
하면서 입에 넣어 주려는 시늉을 부리기도 한다.

" 혜숙이 기지배야! 죽긴 왜 죽어! 죽으면 안 돼!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한이 맺혔는데 왜 죽어! 이 기지배야!
이제 민주화가 코 앞에 닥쳐 왔는데...
우리가 얼마나 바라던 건데...
억울하지도 않냐?...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 씨부랄누무 기지배야!"

술 처먹으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장안에 욕쟁이로 유명했던 그는
이날도 혜숙을 향해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우리 주위에서는 그의 욕설과 독설적 비난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혜숙은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뻗혀 있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넘기는 상태에서
고기를 굽고 역겨운 냄새까지 피워가며 술주정이라고 한다는 소리가

혜숙이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것을 전제로
금방 죽을 사람인 것을 전제로 해서

죽지 말라고
죽긴 왜 죽냐고
죽으면 억울하지도 않냐고
바짝바짝 약을 올리고 앉았으니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며
피가 마르도록 아둥바둥 살아날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의 입장에서
심사가 좋을리 있겠는가?

내 생각에도 옆지기 편이어서가 아니라
혜숙의 심사로야 당연하지...

참다 못한 혜숙이 소리를 지른다.

" 광석이 형! 형이나 몸조심 잘 해!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야!
형이 그렇게 술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지난 번처럼 교통사고 당해서
나보다 먼저 콱 죽어버릴지 어떻게 아냐구!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니까 형이나 조심해!
형이나 조심하라구!!!....."

몇 해 전 일이다.
이신범 유인태 최 열 조성우 채광석 등 친구들 여럿이
이대 앞에서 늦게까지 모임을 갖다가
혜숙이 운영하는 약국에 들러 한 잔 더 하고 가겠다고 자리를 옮기던 중에

채광석은 지하도로 건너기가 귀찮았던지
차가 질주하는 이대 입구 사거리를 가로지르다가 택시에 들이 받혔다.

이 광경을 처음 목격한 최 열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석을 부축하고
사고 택시에 태워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채광석이 술에 취하면
어디에서 재우거나 집에까지 바래다 주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을 빗대어서 화가 난 혜숙이
채광석을 향해 독설을 퍼 부은 것이다.

그 날, 나는 채광석과 함께 근무했던 후배를 불러내어
광석을 집에까지 바래다 주도록 부탁했다.

광석은 우리 집 대문을 넘자마자 골목을 나서면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 혜숙아! 혜숙이 기지배야!... 죽지 말아!...
죽으면 안 돼 이누무 씨부럴누무 기지배야!...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제 다 돼 가는데 씨부럴녀나!!!..."

채광석은...
6 월 민주대항쟁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결국 국민에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 29 항복 선언 직후

민주화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분위기에서
그 감격, 그 감동과 흥분에 취해
후배들과 날밤을 새고 새벽녁까지 어울리다가
우리 집 근처 아현동에서 질주하는 택시에 받혀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
.
우리 집에 다녀간 지 보름 남짓 만의 일이다.
.
.
나와 함께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한

친구이자 탁월한 시인이요 문학 평론가였던 채광석은
서른 아홉 나이로 그렇게 허망하게 요절한 것이다.


채광석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안면읍에서 출생,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83년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면서 백낙청, 김사인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문학논쟁에 참가했다.


창작 주체의 계급론적 차별성 문제,

수기의 문학 장르 가능성의 문제,

집단 창작의 문제, 문학 조직의 문제 등을 문단에 던지는 등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문단 평론계의 한 맥을 형성했다.


1974년 5월 22일 소위 오둘둘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40 여 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고

〈애국가〉, 〈검은 장갑〉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저서로 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 시집 《밧줄을 타며》,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사회문화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유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이 있다.

우리 동료 선후배들과 문인들은 ' 민족문학가 고 채광석 동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성대하게 꾸려 보냈다.


▲ 1987년 7월 14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고 채광석 시인의 장례식


그리고 1 주기와 2 주기에 맞춰
그의 전집 5 권을 펴냈다.

13 주기 기일이던 2000 년 7 월 12 일에는
안면도 휴양림 길목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 이 자리를 빌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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