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사람 사람들 ㅡ 올곧은 사나이 설 훈

 


이 글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기록한 내용들을
가만히 되돌아 보니

내가 감옥에서 출소한 날부터
어린이 날까지...

그러니까 22 일 동안에 벌어 진
파란만장한 편린들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끝도 한도 없을 것 같다.

한 장면 한 장면 모두가
소중한 느낌이고 경험들이지만

이제 잊을 것은 잊고
지울 것은 지우고
버릴 것은 버려야겠다.

많은 이들이 혜숙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소식을 전하고 직접 찾아 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주위 분들에게
우리 집에 방문하는 일을
삼가하도록 부탁했다.

혜숙이 온종일
풍욕과 냉온욕, 마고약 찜질 등에
열중하고 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꺼려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데는 어쩌랴...

아주 지워 버릴 수만은 없는
방문객 두 경우만 더듬어 기록해 본다.

5 월 중순 경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있는 설 훈이
연락도 없이 집으로 찾아 왔다.


▲ 국회의원 설훈


설 훈은 마산 출신으로 70 년대 후반
고려대에 재학 중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9 호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그 후 80 년 5 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또다시 구속되었다.

함께 연루된 이들 가운데 나이가 어려 막내뻘이던 설 훈은
그 서슬퍼런 군법회의 법정 재판 과정에서 주눅들지 않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을 향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강렬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사나이 설 훈은
지역 연고와 배경 등이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부터 김대중 총재 비서와 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오로지 한 길로 향해 왔다.

설 훈은 1983 년 고려대 출신을 대표해서 나와 함께 민청련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고
내가 맡고 있던 운영위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85 년 2 월 12 일에 실시되는 제 12 대 국회의원 선거 대응 방침을 둘러싸고
견해 차이로 문제가 생겼다.

당시에 전두환 정권은 한 선거구마다 두 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 제도에서
집권 정당인 민정당이 목표하는 의석수를 무난하게 달성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야당이었다.
제 1 야당인 민한당은 정치 지도력이 애매모호하고 선명성도 부족했다.
전두환 정권과 집권 민정당의 2 중대라 불리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영삼 씨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김대중 씨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정치 사회적으로 절망적인 풍토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많은 후배들과 학생운동 진영에서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민주화보다도 혁명적 변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박정희의 5. 16 쿠데타와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 쿠데타가 10. 26 사건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12. 12 와 5. 18 로 이어지는 전두환 군부 중심의 쿠데타가 우리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적 권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적 절차를 가장한 국회의원 선거가 역사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일제 강점기 36 년 해방 이후 1 년도 채 안 되는 장면 정권을 빼고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30 년 여 독재 권력... 이어서 계속되는 전두환의 군부 독재 권력을
과연 민주적 절차로, 평화적으로 바꿔 낼 수가 있겠느냐는 거다.

한편으로 김영삼 김대중 씨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민우 씨를 총재로 내세워 신민당을 창당하고 후보 전술을 통한 절차적 변화를 모색 해 갔다.

신민당의 출현과 김영삼 김대중 씨의 정치 지원 활동으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대결의 분위기가 크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청년 운동을 대표하던 민청련에서는
후보 전술에는 반대하는 대신 군사 독재 정권을 물리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 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정치 사회 세력과
함께 연대해서 싸워 나가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 때 신민당에서는 설 훈에게 서울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분들도 설 훈에게 출마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설 훈은 고심하던 끝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민청련에서는 설 훈의 출마를 반대했다.


민족민주 운동의 정통성과 도덕성 선명성을 대표하는 민청련의 중요 간부가
정당에 가입하고 정치 일선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설 훈은 이에 맞서 민주화 운동 세력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해서
대중 정치 역량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민청련에서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설 훈을 제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당시에 나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새벽에 설 훈을 만나 설득했다.
그 날 아침 민청련은 사의를 받는 형식으로 설 훈을 면직시켰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전략 선거 지역이었던 성북구에는 설 훈 대신 이 철이 출마하게 되고
설 훈은 내게 퍼붓던 말 그대로 이 철을 당선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발벗고 나서서 열성을 다 했다.


서울 성북구에서는 민정당 김정례, 민한당 조윤형, 신민당 이철이 출마했다.
김정례는 여성계의 대표적인 이물로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조윤형은 해방정국과 자유당 정권 때의 정치 거물 조병옥의 아들로 민한당의 중진이었다.


이에 맞서는 이철은 나와 함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었다.
이철은 자신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심하던 중
선거 포스터 문구를 "돌아온 정치 사형수"로 했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이 문구에 의해 이철에게는 신민당이라는 참신한 정당 소속에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의로운 투사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저항의 불씨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이민우는 정대철을, 이철은 조윤형을 물리쳤다.


이는 유권자들이 당시 제1야당인 민한당을 버리고

신민당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서울 전체를 보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은 전원 당선되었다.

반면 민한당은 강남구 단 1곳에서만 당선되는데 그쳤다.

강남구에서는 민정당이 낙선하고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되었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득표율이 민정당보다 15% 더 많았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압도적인 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민정당은 35.2% 신민당은 29.3% 민한당은 19.7% 국민당은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민한 두 야당의 득표율이 집권 여당보다 14% 앞섰다.
내용적으로는 민정당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 지각변동의 첫 파도는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여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이었다.


민한당은 결국 단 3명이 남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다음 13대 총선에서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철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당당하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때 어쨋거나
설 훈의 정치적 등장과 성장의 기회를
다치고 잘라 내는 악역을 맡았던 셈이다.

설 훈이 우리 집에 문병 오던 때
그는 동교동 자택에서 기관원에 둘러 싸여 연금 중이던
김대중 선생의 비서역을 맡고 있었다.

설 훈은 김대중 선생과 이희호 여사께서 형수가 위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계시고
" 병마에 쓰러지지말고 싸워서 꼭 쾌유하기를 바란다"
는 말씀을 전해 달라셨면서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나는 김대중 선생이 오랜 세월 투옥과 망명과 가택연금으로 생활 형편도 그리 만만치 않으실텐데
성의는 고맙게 받겠지만 봉투는 도로 가져가서 더 요긴한데 쓰시도록 해 달라고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설 훈은 보내신 분 뜻도 있는 거니까 약소하지만 형수님 치료비에 보태셔서
건강을 빨리 회복해야 될 꺼 아니냐면서 다시 내민다.

이 때 곁에 있던 혜숙이 느닷없이 소리를 지른다.

" 훈이 씨! 내가 암이라고 곧 죽을 것 같애?...
나 이 돈 없어도 안 죽어!...
나 그냥 내버려 두고 이거 필요없으니까 도루 가져가라구!..."

설 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이없어 한다.
그러다가 이게 웬 봉변이냐 싶던지 무안해 어쩔줄 몰라 한다.

" 형수요! 뭔 말을 그리 하요! 이 돈이 무슨 더러운 돈이요?
도둑질한 장물인 줄 아냔 말요!
보낸 분 성의도 있는 건데 이러믄 됩니꺼?!"

매사에 솔직 대담하고 직설적인 성품을 지닌 설 훈은
역시 자기 감정을 숨김없이 쏟아 붓는다.

이렇듯 혜숙은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갔다.
건강한 것을 공연히 미워했고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저주한다.
동정어린 관심에 증오를 품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가슴 속 깊이 배어 있는 동지애를
서로가 진하게 느끼면서 나는 설 훈에게 양해를 구했다.
설 훈이 던져 놓고 간 봉투 속에는 무려 100 만 원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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