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 / [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1 08:00 김삼웅

 

위정자의 덕이 없어서인가, 국민의 복이 없어서인가.

이명박 치하 4년여 동안 강원룡ㆍ박경리ㆍ김수환ㆍ노무현ㆍ법정ㆍ박완서ㆍ김대중ㆍ김준엽ㆍ정기영(건축가)ㆍ박태준ㆍ김근태ㆍ이소선… 등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각계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사이비 종교지도자, 친일파군인, 독재자, 기회주의언론ㆍ문인, 유신잔당, 변절민주화운동가, 악덕기업인, 고문기술자 등이 호의호식하면서 한 세상을 누비는 데, 왜 그들은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가.


<노자> 제70장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가.

사마천은 한무제 천한(天漢) 2년 (B.C 99년)에 이른바 ‘이능의 화’ (李陵之禍)을 당한다.
이릉은 용감한 장군으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 황제까지 나서 너나없이 이릉을 배신자라며 매도하였다. 그때 한 사람 사마천이 이릉의 사람됨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서 분연히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고 사내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말았다. 거액의 돈을 내면 방면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사마천은 수모를 견디면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열전(列傳)의 첫머리에 백이숙제의 고사를 쓰고, <노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였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옳은가 그른가!”를 거듭 물은 것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 스승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공양학을 배우면서 역사철학에 뜻을 세웠다.
스승은 “하늘은 자연의 모습을 한 유의지적(有意志的) 최고신이다. 감응의 방식은 하늘이 인간의 행위를 감찰한 뒤에 일련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배자에게 훈계나 상을 내린다” (주석 1)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하여 천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갈 만한 곳을 골라서 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삿된 길로 가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분발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앙을 당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구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하늘을 우러러 거듭 탄식했다.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날의 꿈은 교수였다. 전두환ㆍ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닉네임이 따를 만큼, 젊은 그는 행동인이기보다는 사색인이었다.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평온한 질서의 민주주의 시대였다면, 정치인 네루의 길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간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김근태,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 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의 투사로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성을 짓밟을 때 김근태는 청년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온건한 대학생이 감분(感憤)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은 군부독재세력의 야만성때문이다. 전방에 있어야할 군인들이 후방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는, 마치 고려의 무인시대와 같은 막장을 지켜보면서 저항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심했고 시련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사마천이 울분하여 <사기>를 지었다면 김근태는 감분하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고 하겠다.
어찌 김근태 뿐이었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평화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외세의 탄압으로, 독재자들의 폭압으로, 겨레와 민족이 짓밟힐 때 빼앗긴 조국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그들의 능력과 역량으로 보아 시대에 적응하고 시세를 좇았으면 크게 출세하여 부와 감투가 주어지고 대대손손 부귀광영을 누렸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배부르고 등 따뜻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래로 정도(正道)는 가시밭길이고 사도(邪道)는 풍요롭지만, 그래도 소수 나마 정도를 택한 사람이 있고, 이들로 인해 정의와 진리는 지켜지고 역사는 조금씩이나마 진보한다.

김근태는 가끔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저항하다 잡혀 죽고, 비겁한 자들은 투항해서 바빌론의 앞잡이나 개가 되고,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투항하기에는 소시민적 양심이 살아 있던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은 자들이 후에 다시 일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재건하는 중추세력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용기는 없지만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심성이 많고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근본은 선한 자들이며 때가 되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사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민중을 믿었고, 민중의 힘으로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김근태는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았지만, 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독재자 편에 섰거나 반독재 투쟁을 외면하다가 ‘무임승차’하여 정ㆍ관계의 주역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도 용서하였다. 다음은 김근태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어느 날의 ‘삽화’다.

1974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택시 합승을 했다.
뒷좌석에는 신세대 여대생들인 듯한 손님 둘이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후 김근태는 뒷좌석의 여대생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격려해주는 것을 많이 접해본 그였다. 특히 고문경감 이근안으로부터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당한 후 3년여의 옥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던 88년에는 지하철을 타면 낯선 시민들의 따뜻한 인사말에 답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상대가 신세대 여대생들인지라 속으로 괜히 흐뭇해하며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다가 예의를 차려 물어 온 말인즉슨,

“저 … 이근안 선생님 아니세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고 그가 고문당했던 재야인사라는 것도 생각나는데 그만 이름이 헷갈린 것이다. 고문 경감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물론 그날 그 자리에서 김근태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근안이 아니라 김근태’라고 정정해주지 못하고 차를 내렸다. 마음 한 켠에 휑한 슬픔마저 느끼면서….
(주석 2)

하나의 ‘삽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도 김근태는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었다.

우리 겨레가 1900년대 전반기 ‘망국노’가 되었을 때나, 1900년대 후반기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카키색 군부독재시대에 헌법상의 ‘주권자’가 되었을 때도 ‘남은 자’들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아놀드 토인비의 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역사는 어차피 ‘창조적인 소수’에 이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민주화투사들에 의해 우리는 독립을 전취하고 제도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민중의 힘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은 자’들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근태는 ‘남은 자’ 들의 역할을 믿었던 것이다.


주석
1> 풍우(馮禹)지음, 김갑수 역, <천인관계론>, 95~96쪽, 신지서원, 1993.
2> 윤석진,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이후 (<월간중앙> 표기).

 




김근태 평전 / [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1 08:00 김삼웅

 

위정자의 덕이 없어서인가, 국민의 복이 없어서인가.

이명박 치하 4년여 동안 강원룡ㆍ박경리ㆍ김수환ㆍ노무현ㆍ법정ㆍ박완서ㆍ김대중ㆍ김준엽ㆍ정기영(건축가)ㆍ박태준ㆍ김근태ㆍ이소선… 등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각계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사이비 종교지도자, 친일파군인, 독재자, 기회주의언론ㆍ문인, 유신잔당, 변절민주화운동가, 악덕기업인, 고문기술자 등이 호의호식하면서 한 세상을 누비는 데, 왜 그들은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가.


<노자> 제70장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가.

사마천은 한무제 천한(天漢) 2년 (B.C 99년)에 이른바 ‘이능의 화’ (李陵之禍)을 당한다.
이릉은 용감한 장군으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 황제까지 나서 너나없이 이릉을 배신자라며 매도하였다. 그때 한 사람 사마천이 이릉의 사람됨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서 분연히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고 사내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말았다. 거액의 돈을 내면 방면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사마천은 수모를 견디면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열전(列傳)의 첫머리에 백이숙제의 고사를 쓰고, <노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였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옳은가 그른가!”를 거듭 물은 것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 스승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공양학을 배우면서 역사철학에 뜻을 세웠다.
스승은 “하늘은 자연의 모습을 한 유의지적(有意志的) 최고신이다. 감응의 방식은 하늘이 인간의 행위를 감찰한 뒤에 일련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배자에게 훈계나 상을 내린다” (주석 1)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하여 천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갈 만한 곳을 골라서 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삿된 길로 가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분발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앙을 당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구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하늘을 우러러 거듭 탄식했다.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날의 꿈은 교수였다. 전두환ㆍ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닉네임이 따를 만큼, 젊은 그는 행동인이기보다는 사색인이었다.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평온한 질서의 민주주의 시대였다면, 정치인 네루의 길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간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김근태,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 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의 투사로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성을 짓밟을 때 김근태는 청년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온건한 대학생이 감분(感憤)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은 군부독재세력의 야만성때문이다. 전방에 있어야할 군인들이 후방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는, 마치 고려의 무인시대와 같은 막장을 지켜보면서 저항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심했고 시련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사마천이 울분하여 <사기>를 지었다면 김근태는 감분하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고 하겠다.
어찌 김근태 뿐이었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평화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외세의 탄압으로, 독재자들의 폭압으로, 겨레와 민족이 짓밟힐 때 빼앗긴 조국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그들의 능력과 역량으로 보아 시대에 적응하고 시세를 좇았으면 크게 출세하여 부와 감투가 주어지고 대대손손 부귀광영을 누렸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배부르고 등 따뜻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래로 정도(正道)는 가시밭길이고 사도(邪道)는 풍요롭지만, 그래도 소수 나마 정도를 택한 사람이 있고, 이들로 인해 정의와 진리는 지켜지고 역사는 조금씩이나마 진보한다.

김근태는 가끔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저항하다 잡혀 죽고, 비겁한 자들은 투항해서 바빌론의 앞잡이나 개가 되고,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투항하기에는 소시민적 양심이 살아 있던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은 자들이 후에 다시 일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재건하는 중추세력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용기는 없지만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심성이 많고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근본은 선한 자들이며 때가 되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사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민중을 믿었고, 민중의 힘으로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김근태는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았지만, 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독재자 편에 섰거나 반독재 투쟁을 외면하다가 ‘무임승차’하여 정ㆍ관계의 주역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도 용서하였다. 다음은 김근태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어느 날의 ‘삽화’다.

1974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택시 합승을 했다.
뒷좌석에는 신세대 여대생들인 듯한 손님 둘이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후 김근태는 뒷좌석의 여대생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격려해주는 것을 많이 접해본 그였다. 특히 고문경감 이근안으로부터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당한 후 3년여의 옥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던 88년에는 지하철을 타면 낯선 시민들의 따뜻한 인사말에 답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상대가 신세대 여대생들인지라 속으로 괜히 흐뭇해하며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다가 예의를 차려 물어 온 말인즉슨,

“저 … 이근안 선생님 아니세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고 그가 고문당했던 재야인사라는 것도 생각나는데 그만 이름이 헷갈린 것이다. 고문 경감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물론 그날 그 자리에서 김근태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근안이 아니라 김근태’라고 정정해주지 못하고 차를 내렸다. 마음 한 켠에 휑한 슬픔마저 느끼면서….
(주석 2)

하나의 ‘삽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도 김근태는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었다.

우리 겨레가 1900년대 전반기 ‘망국노’가 되었을 때나, 1900년대 후반기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카키색 군부독재시대에 헌법상의 ‘주권자’가 되었을 때도 ‘남은 자’들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아놀드 토인비의 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역사는 어차피 ‘창조적인 소수’에 이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민주화투사들에 의해 우리는 독립을 전취하고 제도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민중의 힘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은 자’들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근태는 ‘남은 자’ 들의 역할을 믿었던 것이다.

주석
1> 풍우(馮禹)지음, 김갑수 역, <천인관계론>, 95~96쪽, 신지서원, 1993.
2> 윤석진,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이후 (<월간중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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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근씨에게


병준이가 크레용으로 쓴 '우리 아버지'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나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고,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오.
어제로 우리 곁을 떠나신지 꼭 20년이 되었구료.

 

그동안 아버지는 제사상 위의 사진에서, 사진틀속의 사진에서 나를 만났고, 평상시 생활에서는 그 무게가 점점 작아져 갔었지.
어렴풋한 추억 속으로 아버지는 떠밀려 간 것이겠지요.
그러나 언제쯤부터인지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팠던 상처들, 삶의 그늘에 대해서 눈을 떠가게 되었소.

 

어제는 눈이 부실정도로 환한 날이었지.
그런데도 바람이 거세게 불고, 때때로 흙먼지 날리고, 차가움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았어.
이상스럽게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고 내 가슴 속에 황황히 바람이 일어나더군.


그 속에서 나는 아버지 모습을 보았어.
움푹 패여 그늘진 어깨, 말라서 길어진 목 뒤 모습, 그리고 허벅지께부터 바람에 날려 휘감기던 바지 가랑이,

바지 가랑이의 허전함이 목을 메이게 했다오.

 

우리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그런 분은 아니었어.
이렇다할 깊은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차라리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작은 가슴을 가진 분이셨지.
이 때문에 나는 사실 아버지를 별로 존경한 적이 없었고, 어떤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를 멀리서 소문으로 얘기들으면서

실망하고 짜증부리기도 하였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따뜻한 품을 가지고 계셨어.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아버지의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아늑하고 유쾌해졌지. 이럴때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고.


조금씩 크면서 나는 아버지 품을 넘치기 시작했고, 생물, 과학 등을 배우면서

아버지 체온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높은 체질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오.
이렇게 하면서 아버지 품을 나는 영영 떠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멀리 떠나가신 것이지.

 

20년 동안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 가셨던 우리 아버지가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해가 벌겋게 공중에 떠 있던 어제 나에게 되돌아오고 계셨다오.
아니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그 삶의 고뇌를 똑똑히 보게된 것일게야.


고난과 치욕의 이 겨레 20세기의 한귀퉁이에서 당신에게 몰아쳐왔던 그 절망과 부담에 짓눌려 겁먹은 채 살아가셨겠지.
버티느라고 부르르 부르르 떠시면서 말이요.
버티는 것이 힘겨워 몸에 늘 미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가려 주느라고 속으로 미열을 내며 앓으셨던 그런 삶이였을 거요.

 

3.1운동 때 아버지는 19살이셨다오.
읍내시장에는 못나가시고 뒷동산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셨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도의 숨은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않으셨을까" 하며 투덜거리던 내 국민학생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구료.

 

유관순 누나같은 아버지가 아닌 것이 창피한 적도 있었지.
심약한 아버지를 가볍게도 생각하고. 


그러나 나 이제 우리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오.
작은.... 그런 아버지. 그 삶을 이 철창 안에 들어 앉아서 말이요.

 

저들의 뻔뻔한 짓에 두 발로 버티면서, 부르르 떨면서 나는 우리 아버지를 되돌아 오시도록 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내가 다시 우리 아버지의 그 고뇌에 참여하면서, 그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소.
혹시 내 삶을, 절망을, 아버지가 먼저 사셨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그리하여 남겨지고 이어지는 그 삶을, 그런 치욕과 중압을 오늘 여기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불길하게 바람이 불고 뻘겋던 어제, 나는 우리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면서 목이 메어졌다오.
아버지처럼 두근거리는 작은 가슴을 가져 자꾸 겁을 먹으면서 말이요.
그러나 나 이제 작지만 끈질긴 가슴이 되는 것 같다오.
겁먹고 겁먹고서 다시 버티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이요.

 

병준이는 아버지인 나를 보면서 멀지않아 이 두근거리는 내 가슴을 알게 되겠지.
두려워 밀리는 것에 실망도 하겠지.
하여 조금씩 상처를 입으면서 이 세상 깊은 곳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가게 될 병준이, 병민이가 될 것이지.

 

난 사실 병준이, 병민이 아버지이어야 하는 것에 은근히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소.
그저 휘청거리면서 버텨 나가는 이 모습에서 어떤 것을 그 애들은 배우게 되고 흉내내게 될 것인지 말이요.
혹시 '별 볼일없는 삶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하며 실망할지 모르는 것도 조바심칠 일이지만,
그 애들 가슴에 맺힐지 모르는 상처들, 검은 그림자들의 드리움, 그것이 걱정이 된다오.

 

그러나 병준이 엄마의 따슨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지.
애들이 그 속에서 몰아쳐 올지 모르는 어떤 것도 견뎌낼 것을 나는 믿는 것이요.
그러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또 그 애들 자신의 삶으로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1986년 1월.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유난히 올 겨울의 추위가 더욱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고, 무섭게 만드는구료.

속 의를 입을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 매서운 추위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잘 모를 것이요.

어깨를 내리찍어 웅크리게 만드는 이 추위를 나도 60년대 중반 이후 한 20여 동안 잊어버리고 살다가 뜻밖에 여기서 다시 부딪치게 되었소.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그 구절이 가슴을 치는구료.

여기는 오는 곳이 아니라 가는 곳이 틀림없소.

잿빛 그늘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그런 입구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말이오.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는 한숨과 눈물이 그렁그렁 쌓이고,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 때문에 목을 가누는 것이 어색한 것 같구료.

하지만 저녁 사 후가 되면 별안간 활발해진다오.

다가오는 어스름 속에서 용기도 생기고 목청을 조용히 뽑아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들로 생기가 살아난다오.

 

야릇한 흥분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요새 대중가요를 익히느라고 제법 바쁘다오.

특히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는 이제 수준급에 올라섰는데 이걸 들려줄 기회가 없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구료.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이제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하지만 그것은 어느 밤 달그림자 진 건물 모퉁이에서 왔다갔다 서성대는 이곳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

그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료.

그 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 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그러나 요사이 나는 행복한 것 같구료.

목요일의 따스함을 안고 주말을 보내고 일주일을 보낸다오.

반가운 얼굴, 귀에 익은 목소리들의 수군거림이 나를 여간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오.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마음을 들뜨게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오.

당신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구료.

9월말 그 때 기적같은 만남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한 것이오.

그 후 당신의 노고가 가히 짐작이 되어,때로는 허둥허둥도 했을 것이지만 훌륭히 견뎌 낸 것이요. <후략>

 


-1986년 1월 26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 씨에게 보낸 편지-

 

[자료 2] 1심 최후진술

 

 

민주화를 위한 결단

 

 

먼저 본인과 본인의 사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치군부에게 당한 고문과 범죄행위에 대해 규탄, 항의한 국내의 민주인사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민주인사, 종교계인사, 양심수 가족들, 언론인들, 그리고 외국인과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격려로

본인은 남영동에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인간으로 회생하여 복귀하게 됐습니다.

이분들의 격려와 항의로 정치군부의 음모의 그물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 뜨거운 관심과 격려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민주화 실현을 위한 역군으로 다시 회생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본인에 대한 이 사건은 두 개의 잘못된 가정과 정치군부의 보복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오늘날의 민주화 열기가 김근태와 민청련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둘째,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정치군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배후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은 분명히 김근태일 것이라는 단정적인 가정 하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만들어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와 은폐행위가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재판부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본인의 사건과 고문 및 은폐행위를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면,

또한 실체적 진실과 이러한 범죄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헌법과 법률위반 및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담당하고 있는 책무를 사법부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며,

계속 이러한 시각을 갖게 된다면 이는 고문자를 옹호하고 고문을 장려할 뿐 아니라

정치군부에 반대하고 민주화 실현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대의를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시대를 10 여년 이상 지내며 살아왔는데,

당시 독재자들은 이른바 국가안보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와 감옥, 고문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법원과 법관은 이를 합리화시키고 추인, 협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80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암담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좌절과 공포로 보낼 때도

정치군부는 또다시 이른바 국가변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도소로 보냈으며,

그 때도 법원과 법관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추인하고 협력했습니다.

 

85년 중반 이후 본인이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2백 여 명 이상의 많은 수인들로 꽉 찼는데,

이 나이어린 학생들이 본 구치소에 구속된 것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서입니다.

며칠 전 면회 장소에서 나이어린 학생을 만났기에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대학 1학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상황에 우리는 매우 슬프고, 이것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법원과 법관,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정치군부와 법관의 정치적, 물적 독립성를 파괴하는 그 귀결점에 결국 나이어린 학생들이 감옥에 갇히면서도

정치군부에 반대해야 되는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오늘 또다시 낳았던 것입니다.

 

나는 본 사건을 시대의 불행 중 하나라고 봅니다.

입장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 동안 이 공판에 참여하고 고충과 어려움을 겪어온 재판부, 변호인들, 검찰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서 우리가 같은 공감대를 갖고 통곡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이 이 공판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민주화실현을 위해 국민으로서,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민주화를 향해 나가는데 기여하고 자극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희망합니다.

 

본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웠는데, 그 분들 중의 일부가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인해

좌절하고 일제의 폭거에 침묵하고 나아가 그들의 주구배가 된 것에 인간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갔었습니다.

 

또한 70년대 암흑과 같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항거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옥되고 박해받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당시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왜 극복하지 못할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과 그 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지배자들의 조직적 폭력과

박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되며 용기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나아가 본인은 이러한 70년대에 한번 투옥되면 원스타, 세번 투옥되면 쓰리스타가 되는,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는 이러한 민주인사들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꼭 마땅하게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적 박해와 폭력적 탄압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고 쓰리스타, 포스타 나아가서 원수로 칭송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 인간은 정치군부의 폭력적 탄압에 굴복하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체포된 이래 수많은 굴종을 강요당했습니다.

 

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아니 고통 없이 죽여 달라고 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또다시 저들에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지금, 본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가 있기 때문에

다시 민주화대열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근태 개인은 앞으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김근태가 민주화 대열에서 당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서 열 명, 그리고 새로운 백여 명의 민주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창출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민주화운동은 이미 폭력적 탄압 아래서 굴복하고 좌절해 가는 사람 숫자를 열 배, 스무 배로 보충하고도 남을 충분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배후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80년 5.17과 광주사태 이후 우리사회에 새로운 민주화열기를 고조시키고

물러설 수 없는 민주화실현의 몇 단계를 진행해 온 것만 봐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은 인류의 위대한 각성의 시대입니다.

20세기의 수치라던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에서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다양성과 합의와 토의를 통해 민주적 사회로 진행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70년대에 신흥공업국으로서 국제무대에서 뻐기고 많은 경제발전 국가들에 의해서 칭송을 받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에서도

적과 동지, 폭력적 대응 이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던 군사정권으로서는, 이른바 국가안보는 물론

경제발건과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졌고,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군사정권은 퇴진하고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이른바 통치는 물러나고 정치의 사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 필리핀에서 지금 위대한 민주화의 승리의 나팔이 울리고 있습니다.

민주화 승리와 민중승리의 깃발이 올려졌습니다.

아키노 상원의원의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 뜨거운 피로써 차디찬 시신 위에서 그리고 필리핀 민중의 결단과 투쟁에 의해서

오늘 필리핀 민중의 승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정치군부는 이른바 국가안보를 운위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특권유지와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을 비운 채 서울로 진격했으며,

국민의 군대의 보안을 유지해야 될 보안사령부가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적 질서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장치로 기여하고 역할을 한

정치군부가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군부는 헌정질서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참모총장 공관과 국방부에 총질을 하여 민주적 기본질서를 유린한 자들이 얘기하는 헌정질서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군부의 특권에 대한 보호를, 정치군부에 대한 이의제기를 짓밟고

오직 굴종과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장치적 언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료 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의장 김근태 제1차 공판기록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일 시 : 185. 12. 19(목) 오전 10시

장 소 : 서울 지방법원 118호 법정

 

 

재판장 : 서성 부장판사

변호인 : 홍성우, 김상철, 이돈명, 황인철, 장기욱, 조준희(이상 참석자), 신기하, 목요상

담당검사 : 김원치

 

 

민청련 전의장 김근태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등 사건 첫 공판이 19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 심리로 열렸다.

공판은 재판부의 인정심문에 이어 변호인들이 방청 제한을 항의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인정심문이 끝난 후 변호인단의 장기욱 변호사는 "재판공개원칙은 절대로 필요하며 확신범이나 정치범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고,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공개는 가족만 방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방청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방청의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20 여 명에 이르는 교도관들을 내보내고 차라리 일반인들의 방청을 허용해야 한다"고 재판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때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김근태씨의 부인도 방청제한으로 이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이어 김원치 검사가 5분 가량 공소사실 요지를 낭독하는 동안 방청권을 얻지 못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 친지, 민주단체인사,

민청련 회원 등 30 여 명은 법정 입구에서 출입문을 손으로 치며 "김근태, 재판받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때 김상철 변호사는 "재판부기 공판에 앞서 방청객 수를 예정해 방청을 원하는 사람 모두가 방청할 수 있도록

큰 법정으로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해서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5분간 휴정).

 

 

변호사 : 기소된 후 20 여 차례에 걸친 피고인 접견신청을 했으나 출정 등의 이유로 접견이 거부되어

첫 공판 10일 전인 12월 9일에야 첫 접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그동안의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재판부에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피고인에 대해 출정이라는 이유로 접견이 금지된 것이 실제 검찰청으로 출정을 해서 그런지와

기소된 이후에도 출정한 것이 타당한지 먼저 충분한 사실의 조회가 있기를 요구합니다.

 

 

검 사 : 경찰조서의 20개 항의 조사사실 중 피고인의 진술거부로 인하여 9개항 만을 기소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11개항을 조사하기 위해 기소 후에도 피고인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피고인을 접견하기를 원했다며 출정과 겹치지 않도록 검사에게 요청할 수도 있었는데

한번도 그러한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변호사 : 접견 허락을 검사에게 받아야 된다는 이야긴데 지금까지 그러한 전례가 과연 있었습니까?

또한 일반적으로 기소된 후에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출정하는 것은 상례가 아닙니다.

 

 

기소 후 계속 피고인을 조사한 것은 기소된 사실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소 이후에 검찰조사를 목적으로 출정을 계속시킨 것은 공소권의 남용입니다.

공소의 제기가 수사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재판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차문제를 먼저 처리함으로써 이 재판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재판장 :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사실 여부에 대해 피고인이 직접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피고인이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재판진행에 대하여 피고인의 의견을 진술하시오.

 

 

김근태 : 지금 검찰과 변호사 간에 있었던 공방에 대하여 본인이 자세하게 증명을 한다면 보다 더 좋은 증명을 할 수 있겠지만,

이것보다 더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검사 제지) 본인의 이 사건은 지난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있었던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그리고 동물적인 능욕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가해졌던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러한 고문이 조사되고 색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당 재판부에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경위에 대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그 다음, 9월 한달 동안 가해졌던 고문의 후유증이 현재 본인에게 상당한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보행이 불편하고 머리가 대단히 아프고 등이 아픕니다.

소화가 되지 않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한달 동안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정신적인 상처입니다.

본인의 인간적인 자존심과 주체성은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졌습니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은 짓밟혀졌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남아 있고 이것이 당 재판부에 조사를 요청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본인이 변호인을 만난 것이 재판 시작일에서 불과 열흘 전 밖에 안됩니다.

이것은 방어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가해졌던 용서할 수 없는 고문행위를 은폐하려는 기도였습니다.

 

 

9월 26일 기소가 된 후 10월 초순 내지는 중순 쯤 변호인이 접견을 요청할 시기에 검찰측은

여러차례에 걸쳐 오후3시30분 내지 5시에 출정을 요구해왔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출정을 나갔을 때 검찰관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온 경우가 네 차례나 있었고,

또한 검찰청에 도착했을 때 검찰관이 없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과 당시의 여러 사정을 미루어 보아 이것은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흔적,

그것을 은폐하려는 기도가 검찰과 정치권력 사이에 긴밀한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이 명백했다고 보여집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은폐기도와 더불어 본인에게 가해지고 있는 안전에 대한 위협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어지러운 듯 난간을 붙들고 숨을 몰아쉼)

담요 위임에도 불구하고 발뒤꿈치가 짓뭉개졌습니다.

그 발뒤꿈치 상처가 딱지로 아물면서 지난 10월 말 내지 11월 중에 딱지가 떨어졌습니다.

 

 

이 딱지를 본인은 당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보관해 왔습니다.

지난 12월 13일 오전 4시경 이돈명 변호사, 목요상 변호사, 조승형 변호사 세 분이 접견을 오셨길래 하도 반가와서,

그리고 형사소송법에 공판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수거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해서 세 분에게 보여드리고

그것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교도관 세 명의 제지에 의해서 이것이 전달되지 못했고 예측했던대로 본인이 병사에 돌아가자마자 서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의 지휘 아래 10 여 명이 달려들어서 불편한 본인의 몸을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탈취해갔습니다.

본인도 "이러면 증거인멸의 죄에 해당한다"고 주지시키고 또한 "이러지 말라"고 애원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증거인멸뿐만 아니라 본인의 안전이 아직도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행위에 대해서 명백하고 엄정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이제 간략하게 9월 한달 동안 남영동에서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때 검사가 제지하고자 이의신청을 하였고 이에 대해서 방청석에서 '놔 둬, 도둑놈들' 이라고 아우성이 터짐).

지난 9월 한달 동안 참혹한 고문행위에 대해서 이제 간략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본인은 이 기억을 되살리며 치떨리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낍니다.

 

 

우선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항복'입니다.

항복을 받기 위해서 깨부수겠다고 이야기했고 또한 그와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더 많이 깨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국가보안사건과 관련된 본인의 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치게 하여, 좀더 일찍 체념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본인에게 자신을 포기할 계기를 주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번째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될 때면 언제나 고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네번째는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시키고 학습시키고 복습을 시켰습니다.

 

 

본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은 준비되고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 분명합니다.

(지친 듯 잠깐 중단함) 이러한 과정에서 고문자들이 본인에게 요구했던 것은 첫 번째로 폭력혁명주의자인 것을 자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본인의 사상이 사회주의자다.

세 번째로 민청련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첫 깃발을 80년대 이후에 올렸고. 그리고 각계각층에 작용하는 선과 인물을 대라.

다시 말하면 본인이 한국의 민주화운동, 반군사독재운동에 있어서의 지휘자, 슈퍼맨이 될 것을 자백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예컨대 학생, 노동자, 현실정치인, 재야, 개신교, 가톨릭, 심지어 미국의 사업가 또는 현 정치권력 내부에서

누구와 민주화운동을 의논해서 해나가는지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슈퍼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랬더니 무조건 요구하는 대로 자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은 이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는 자들에게 인간적 절망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곳에서 그 사람들은 본인에게 절대전능한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본인은 9월 한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매일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부터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습니다.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날 각 5 시간 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 금요일 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네 장례 날이다"라는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검사가 이의제기하자 방청객에서 "조용히 해", "계속해"라고 외침)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몇가지 증언을 하면, 이 고문자들은 고문을 가하면서, 예컨데 8일날에는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란 자가

10시에 5층 15호실, 본인이 고문을 받았던 그곳 실내로 들어와서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버리겠다,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본인에게 납득시키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습니다.

 

 

델시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넣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는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해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X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로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리고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는 것을 보니 '새로운 광주사태가 발생하거나 준비되고 있구나'하고 생각을 하며

본인은 여기에서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한 결심을 고문 담당자에게 말하자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굴복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본인에 대한 고문은 진술거부 때문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분노나 흥분의 빛이 없이 냉담하게 미소까지 띠우고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한 인간의 고뇌와 죽음의 몸부림 앞에서 저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

는 등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본인에게 집단폭행을 가한 후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9월 26일날, 포니 자동차를 타고 서부역을 지날 때 낯익은 거리,

푸른 하늘이 아직도 있구나, 푸른하늘이 나에게 다시 왔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제 처를 만났습니다.

 

 

대기실에서 짓뭉개진 본인의 발뒤꿈치를 제 처와 이을호 씨 부인 최정순 씨가 보았습니다.

그때 대기실 건너편 옥상에서는 인부 10여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의 땀과 창조가 저렇게 계속되고 있구나, 저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구나.

그래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을 새로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치소로 이송된 이후 현재까지도 협박적인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사건의 실제적 진실 - 사법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의 요구가

보장되고, 현재 양심수나 재소자의 인간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위의 사실이 충분히 조사되기를 바랍니다.

 

 

변호사 : 본 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문에 의해 공소가 제기되었다면 이 공소사실은 무효입니다.

따라서 공소의 적법여부, 고문 및 용공조작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딱지'를 강제 압수한 서대문구치소 보안과장 송선홍 과장에게 증인심문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현재 피고인의 몸에 남아있는 고문 흔적에 대한 확인을 신청합니다.

 

 

검 사 : 사실 심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부 : 공소내용의 1항이라도 오늘 진행합시다.

 

 

김근태 : 심문은 다음 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방어권에 대한 기본적인 봉쇄와 방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변호사와 공소내용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공소사실에 대한 재판은 다음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변호사(김상철) : 그동안 변호사 접견이 20여 차례나 거부되는 등 피고의 방어권이 침해당한 상태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이 공소사실에 대해 한 마디의 이야기도 안 해본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공소내용에 대한 심문은 다음기회로 연기되었으면 합니다.

 

 

재판부 : '고문흔적에 대한 확인'과 '수사과정에 대한 조사신청'을 구두로 접수합니다.

다음 재판일자는 86년1월9일 오전10시 118호 법정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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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

 

원심법원이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라는 책 소유를 유죄로 인정한 것은

현 개명한 20세기 후반의 건전한 사회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사실 이처럼 점잖게 말하고 싶지 않다.

상스럽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달라.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서로 침을 퉤퉤 뱉고 돌아서는 편이 피차간에 차라리 솔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프고 기가 막히고 놀라서 어질어질 하기도 하지만, 정치군부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우리 사회를 정말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군부의 부릅뜬 눈아래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겁쟁이,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판사, 검사의 모습이 정치군부보다도 더

인류사회와 민족사회의 발전속도에 저만치 뒤떨어져 있는 집단이 어디에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겠지.


김영학 씨의 증언과 감정서를 유죄의 증거로 한 원심법원의 판결은 수치스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들으면서, 들여다보면서 절간에 간 색시처럼 얌전하게 공판에 임해 왔던 나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도대체 정치적 사건이란 게 그런 재판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농담이고 장난임을 이 이상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으리라.

도대체 '내외 문제연구소'라는데가 아리송할 뿐만 아니라 미안한 얘기지만, 경제학에 대한 소양이 나보다 없음은 물론,

돕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책 이름조차 잘 모르고, 그 책이 어떻게 다른지는 물론 모르고,

도무지 헷갈리는 이런 사람의 증언과 감정서를 증거로 하여 유죄로 인정하는 이 철면피의 뻔뻔스러움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져 기억되야할 것이다.


이것은 김영학 씨 개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을 게며 모독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3~4일 전에 검찰로부터 감정 부탁을 받은 후

책을 받고 책을 읽고 감정서를 썼다는 이런 주장을 믿어주어야 하는가.

뭐 이것 뿐만은 아니지만, 거짓말과 사기는 쉬지 않고 줄을 지어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이것은 한낱 사기일 뿐이라고.

검찰청에 뻔질나게 불려 다닐 때 나는 담당검사에게 공소제기된 사실에 대해 모두 말했다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판장에서 한 말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돕의 주저에 대해서, 그런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에 대해서, 또한 문제된 이 소책자가

'자본주의 발전연구'의 한 장을 조금 손대어서 정리하여 강연한 것이라는 것을 검사에게 말했다.

김영학씨는 아마도 그것을 검사한테서 듣고 앵무새처럼 외우려했던 것 같은데, 아주 서툴렀던 것이다.

반대심문의 기회가 왔을 때 분노가 아닌 슬픔이 밀려와 나는 김영학씨에 대한 심문을 포기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라는 돕의 주저가 근대 경제학의 추세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출간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유죄를 인정한 것은 법리를 오해하고 위법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것은 나의 법적 이익을 깡그리 박탈하는 것으로 자빠진 놈 한 번 더 밟아주자는 것인가.

이것은 법 앞의 평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형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또한 지성인의 한사람으로서, 경제학도로서 학문의 자유 그리하여 연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참으려 해도 속이 느글느글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한마디 하겠다.

하려면 이정도로 화끈하게 오로지임을 보여주는게 마땅할 것이다.

출세를 하라. 출세를 하라. 그리하여 출세를 하라.

 

 

그래도 못다한 말 한가지

 

행방불명된 나의 탄원서에 대하여.


다 아는 바와 같이 1심 공판정에서 탄원서 집필허가 문제에 대해 나는 네번 문제를 제기하였고, 마침내 재판거부 선언에까지 이르렀었다.

집필신청을 한 지 만 40일 후인 2월 5일 오후 3시 반 경에 허가통지를 받았다.


탄원서 집필문제를 가지고 이처럼 격렬하게 싸운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나는 '탄원서'라는 이름으로 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을 낱낱이 밝히고자 했던 것이며,

정치군부는 그것을 체면불구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공판 사이사이에 나는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탄원서를 썼다.

보통 구치소에서 두 부 작성하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달리, 오직 한 부만을 작성하도록 미리 페이지가 매겨진 조사용지를 공급받아 썼다.

나는 그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소심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것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이제 탄원서 내용을 간략히 얘기하자.
고문준비, 계획은 어떻게 되었으며, 누가, 왜 했고, 어떻게 했으며, 그 때 고문자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에 대해 나는 어떻게 견디고 또 굴복했는지, 그 고문대 위에서 또 아래에서 내 심정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다.

여기서 우선 고문자들의 이름을 밝혀 두겠다.

이 탄원서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기록이다.


총경 윤재호(남부경찰서장),

경정 김수현(전무),

경정 백남은(전무),

경감 장의사 둘째주인(고문 전문기술자),

경위 김영두,

경장 정현규,

경장 박병선,

경장(경북사람) 등


검찰은 피로 적셔 있는 남영동 기록을 증거서류로 제출했다.

공판정에서 고문사실과 그에 의해 강제된 것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고발하였는데도 검찰은 이를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었는데 서성 판사는 그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할 수도 있고 유리할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이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갔지만, 나는 이 탄원서에서 남영동 증거서류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고문은 물론 그 때 고문자들이 요구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며 반박했다.

그런데 이를 절취하여 숨겨버린 것이다.


영화 '25시'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강제수용소 철조망 안에 갇혀 있는 한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적은 글(아마도 성명서-적절한 이름은 아니지만)을 손에 들고 보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긴장이 고조되다가 보초가 들고 있는 총에서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총알이 튀어 나왔고 그 지식인은 거기서 퍽 꺾여졌다.

종이는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면서 땅에 떨어지고 쓰러진 몸뚱아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적셔지고....

그 종이는 어쩐지 그 사람의 입에 물려졌던 것 같은 착각이 자꾸 들었다.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한 채 쓰러져 피 흘리며, 속으로 울고 웃으면서 쓴 것이다.

그런 탄원서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검찰이나 법원 둘 중에서 어디선가 꽉 틀어쥐고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직후 서성 판사에게 열람등사를 요청하였더니 "이미 발송했다"고 하며 역시 훌륭하게 따돌렸다.

검찰에 가서 확인하니 "서성 판사가 틀림없이 갖고 있다"고 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이고, 거짓말이고......


지금 이 탄원서는 어디쯤에서 강철상자 쯤에 들어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아 그러나 이것은 언제 끝날 것인가.


맨 끝으로 고문을 당하며 속으로 통곡하고 지내온 지난 겨울,

이 가막소에서 나는 애정이 넘쳐 나는 수많은 학생, 그리고 버림받은 재소자들의 격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때 두 겹의 비닐창문을 때리는 북풍에 견디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되뇌고 되뇌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느이들 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봐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11. 슈퍼맨이 되지 못한 죄

 

 

나 중심으로 얘기하면 이렇다.

혼란과 당혹 속에 검찰에 넘겨진 세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절박함의 우선 순위에 따라 움직여 나를 검찰에 내주고,

그리하여 법관의 손에 넘겨주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아무런 다른 선택이 없던 것이다.

오직 마련된 길을 따라 등 떠다밀려갈 수밖에 없었으며, 누구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검찰에 갇힌 사람들이 부닥치는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우선 고문기관인 남영동 상급기관으로서 갖는 위엄과 그로 말미암은 위협감, 답답함이 가슴을 조이게 만들고

이런 사건이 모두 '괘씸죄'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잘 대처하고 따지게 되면 오히려 손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 되어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고 싶어 몸이 비비꼬일 지경이다.

나보고 '또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고, 또 그 얘기를 수긍할 수 있지만,

'또라이' 같은 얘기, 그러나 그때 내 심정이 그토록 어지러웠던 것을 말해 보겠다


나를 이대로 밀고 나가 결국은 죽이려고 하는가.

합법을 가장한 이러저러한 절차를 밟아서, 그리고는 분업화된 과정으로

아무도 큰 심리적 부담 내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교살하려고 하는가.

 

저 고문 남영동은 확실히 그런 방향이었고, 이 검찰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난데없이 KBS 방영이니 연합통신의 기승은 뭐란 말인가.

 

헷갈리고 또 헷갈리고, 돈다.

세상이 돌고, 내가 돌고.

 

나는 검찰의 손에 무릎꿇어 구애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어지러웠다.

제법 딴에는 점잖은 체면이어서 호모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된다고 굳게굳게 결심했기 때문에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차단된 상태에서 검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병적인 애정구걸 같은 심리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검찰에서 '피고인은 당시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느냐' 고 준엄한 얼굴로, 노기띤 음성으로 법정에서 꾸짖는다.

담당검사는 이렇게 하여 비열한 거짓말쟁이로 피고인을 입증해 내고, 그렇게 해서 증거가 발딱 일어나고,

판사는 유죄의 심증을 거기서 형성하고, 우습고 웃기고 웃겨서 웃기는 장난이 된다.

이게 모두 두려움에 얼어버린 채 남영동에서 검찰로 왔을 때, 끊임없이 교양있는 검사를 짝사랑하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혹시 버티다가 재차 남영동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하며 저려온다.

한편 그래도 끔찍한 고문을 안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때로는 슬쩍 가족 얼굴을 보게 해주고

따스한 입김이 볼에 닿게 해줄 때 우리들의 검사님은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어찌 이 하늘같은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배덕자, 패륜아의 짓이고, 인간이면 검사님의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하고, 요구와 기대에 알아서 부응해야하는 것이다.


"오호 통재로다. 이것이 올가미구나."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인 것이다.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고. 우리들의 눈이 크게 열려 올바로 보게될 때는.

그러나 언젠가 온다.

 

검찰은 남영동 서류를 굳게 믿는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공격적 충동을 기르고 길러 내서 피묻은 남영동 서류조차 별 양심의 가책없이 믿도록 감시는 인도된다.

조종된다.

 

공소유지 의무와 더불어 정치적 사건에서의 기여도에 따라서 정치군부는 평가하여 훈장을 주고 처벌을 한다.

인사정책을 통해서, 검사는 이렇게 해서 검사가 되는 것이다.

 

나도 검찰에서 얘기할 것 다 얘기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더 버틸 마음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다만 글로, 조서로 남기지 않았을 뿐이다.


내겐 기적같은 만남이었다.

은혜처럼, 성령처럼, 비둘기같은 성령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검찰청 청사 그 계단에서 내 처 인재근을 만난 것은.

 

그리하여 김상철 변호인을 만난 것은 나에겐 축복이었다. 구원이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나도 틀림없이 남영동에서 두드려서 훌륭하게 만들어 낸 모든 것을 검찰 신문조서에,

자술서에 올리고 손도장을 꽝꽝 찍어댔을 것이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만남이 발생하여 거기에 기대어 나는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검사의 도발적 언사 한마디가 계기가 되어 화를 낼수있는 기력이 되돌아와준 것이다.


법정에서는 명백히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그렇게 이용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고 예견하면서도 진술한 것이 많이 있다.

검찰에서 이미 모두 말했던 것들이다.

그것을 잘라서 얘기하거나 수정 변경하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째째해지지 않기로 결심했고, 검찰한테서 비웃음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건 자존심이었을게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법관을, 법원을 믿으려 했고 검찰의 기본적 양심을 믿으려고 했던 시기였다.

어떤 신뢰를 저버리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재판에, 그 결과에 아주 자신하였던 것이다.


아, 그러나 재판이 무엇인지 나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재판은 한낱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특히 정치적 사건에서는 그렇다는 소문을,

나의 사전 인식은 아마도 지나친 단순화이고 편견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사 또는 판사 그 개인들과 은근히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모종의 분위기, 어떤 관계에 나는 취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개인적 관계를 확대해서 재판을 보려고 했다.


나는 반쯤 눈이 멀었던 것이다.

참담한 결과가 올 수밖에 없었다.

 

논리학 교과서 첫 부분 어딘가에 나오는 확대적용의 오류를 그래도 뒤집어써 버린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 모순은 작고 미미하지만, 좋은 나라인 민주화운동세력과 나쁜 나라인 정치군부 사이 속에서

그것은 아주 심각하고 격렬한 불신과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라는 것을 말끔히 잊어버렸었다.

 

아니다. 그 간극을 사실의 증명격과 지식인으로서 판, 검사들의 양식이 메꾸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집단)'라는 책의 어떤 페이지들이 떠오른다.


판사, 검사 중에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군부 체제 아래에서 이러저러한 재판을 하는 판사들, 검사들은

주관적 선의와 상관없이 군사독재의 옹호자이며 방위자로서 역할을 틀림없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중에게는 마땅히 존경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래 알고 있었던 그대로가 맞는 것이었다.

사물과 사건 속에 휘말려 어지러웠고 직접성에 노출되어 피곤하였으며, 심약해진 마음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눈을 잃었던 것이다.

단어가 너무 격렬하고 선동적이어서 쓰고 싶지 않지만, 군사독재 지속에 단단히 한 역할하면서도 태연스러운 위선자들은 틀림없이 있다.

이 사건 재판에 관계했던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는지 자꾸만 따져보게 된다.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남영동에서 고문에 끝까지 버텨 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5층 15호실, 그 방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그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굴복하고 말았지만, 다시 그런 경우에 부딪쳐도 역시 무릎꿇겠지만, 누구도 나처럼 당하면 결국 꺾일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만일 내가 끝까지 버텼더라면 나는 거기서 살해되었을까, 아니면 그것으로써 사건은 끝나 버렸을까.


"남영동에서 누가 당신더러 굴복하고 인정하라고 했는가.

더구나 그럴듯하게 꿰어 맞추도록 협조도 하고, 증거가 될 것이라고는 말뿐임을 피차 진작 눈치챈 것이니,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 홰까닥 엎지 못하도록 요리조리 꿰어 맞추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예측 가능한데도 그것에 코 꿰어 끌려간 당신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이제와서 고문을 당해서 그랬느니, 어쨌느니 해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다.

딱 잘라서 말하면 그건 당신 사정이고, 그러니 찧고 까불며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피차 지저분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나는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다. 모두 내 탓이로소이다.

 

능히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나한테 죄가 있는 것이지, 강제로 정치군부가 가두고 때리고 짓밟고 한 그것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슈퍼맨이 되지 못한 내 죄가 톡 튀어나와 누구 눈에도 아주 잘 보이도록, 극적 대비가 되도록 하기위해서 고문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어쩐지 시력이 나쁜 판, 검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흔들리는 팔로 꽝꽝 유죄를 내리 찍을 수 있도록 고문을 활용한 것뿐이니까.

내가 오해를 했었던 것이다. 오해, 오해, 해오, 해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결국 힘에 진 것이니까.


모든 깨달음은 위대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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