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2 08:00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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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뿌린 악의 씨앗은 심각했다. 그의 권부 아래서 육성된 하나회 소속의 정치군인들이 1979년 12ㆍ12 군부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이들은 1980년 5ㆍ17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쿠데타로 ‘서울의 봄’을 짓밟고 제2기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이들은 박정희가 밟은 길을 재현해나갔다. 독재자가 제거되고 이제 민주주의의 밝은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이나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다시 한번 혹한의 계절을 맞게 되었다.
김근태는 짧은 ‘서울의 봄’ 기간인 1980년 4월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인재근과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78년 수배중에 가까운 가족만 모시고 결혼식을 치렀었다. 이번에는 모처럼 친척ㆍ친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주례는 서울상대 변형윤 교수가 맡았다. 수배중에도 리포트로 학점을 주고 항상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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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족이 딸린 몸이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했다. 다행이라면 박정희 체제에서 따라 붙었던 추적자들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1980년 여름부터 ‘산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80년 7월경부터 '산선'에서 노동상담역의 간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산선'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화순 목사가 동일방직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지 6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조 목사는 자신이 구속된 후 활동정지가 돼 버린 산선활동을 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실무자를 구하던 중 김동완 목사, 최영희 씨 그리고 김근태 씨와 만나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조 목사는 노동상담역을 김근태 씨에게 맡겼다. 사실 일은 맡겼지만 당국의 흑색선전과 탄압으로 노동자들은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인 실정이었다. 그래서 조 목사는 김근태 씨에게 “당신 능력껏 노동자들을 조직해보라”고 하고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주석 16)

김근태는 천성이 성실하고 근면한 편이다. 무슨 일을 맡으면 최선을 다하고 솔선수범한다. 그는 전태일과 같은 세대였다. 그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힌 일을 똑똑히 기억하였다.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되고, 박정희 시대에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육체노동을 하며 살았다. 다음은 뒷날 노동자들의 수난을 지켜보다가 현장에 뛰어들었던 김근태의 기록이다. 1988년 12월 29일 밤 11시경 서울 광장동에 있는 미국계 회사인 모토로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인 사장 봅 칼빈을 면담하러 본관 쪽으로 가던 노조원과 구사대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일어난 사고였다.
“구사대 물러가라!” 하며 대치하던 조합원 중 4명이 위협용으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맞섰는데 갑자기 누군가 붙힌 불이 그들의 몸에 확 옮아붙었던 것이다.

구사대 쪽에서 “어디 불 붙여 봐라” “신나인지 확인해 보자” 등의 비웃음소리가 나온 직후였다.
이 사고로 이강욱 씨는 깊은 화상을 입고 의식불명인 상태이고, 강문희ㆍ이종찬 씨 등 3명도 중태이다. 이런 끔찍한 사고가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합원들의 목 쉰 증언에 의하면 구사대 쪽에 있던 김모 차장이란 자의 소행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불꽃이 되어 뒹굴고 있는 4명의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불을 끄는 대신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사진을 찍어 대는 관리직 사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격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어 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시간이 긴박했다. 지금도 안에는 도충환 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11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신나통을 들고 전산실에 들어가 노조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싸고 수백 명의 구사대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명에까지 어떤 위협감이 감돌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빵과 우유를 사 들고 정문 옆 좁은 문을 통과하여 공장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인도적인 이유를 들어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답은 구사대의 시꺼먼 적대감과 추운 겨울날에 쏟아지는 소방 호스의 물세례, 물공격뿐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정면으로 소방 호스에서 쏟아지는 억센 물줄기에 맞서다가 돌아서서 등 뒤로 버티었다.

공장마당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외로움이 몰려왔다. 신나통을 들고 버티고 있을 조합원들의 고독과 함께 남영동에서 지독하게 곱씹었던 무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가 서성이는 밤거리에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주석 17)

주석
16> 이재화, 앞의 책, 160쪽.
17> 김근태, <겨울 속의 풀뿌리>, <노동문학> 창간호(1983. 3), 38~39쪽,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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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1 08:00 김삼웅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김근태는 피신중에 건축공사장의 인부, 기술학원의 강사, 그리고 조그마한 공장에 다니면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자주 옮겨다니면서 추적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쉬는 날이면 청계천 헌책방을 찾아 책을 사서 읽었다. 그가 다방면에서 박식한 것은 뒷날 긴 감옥생활과 이 무렵의 독서에서 얻은 지식의 힘이 컸다. 피신중에 행운도 따랐다. 평생의 반려이고 동지인 인재근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간에 열관리 기능사 등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77년 8월경 현재 부인 인재근 씨와 만나게 됐다. 상대 1년 후배인 장명국 씨(석탑노동연구원 원장, 현재 구속 중)의 부인인 최영희 씨(석탑출판사 사장)의 소개로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인재근 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75년부터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해왔었다. 인씨는 78년 2월부터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에서 실무 간사로 활동, 동일방직 사건에 관여하기도 했다. (주석 13)

도피 중에 인재근을 만나게 된 것은 김근태에게 큰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산선’에서 일할 만큼 노동운동과 시대정신에 뜻을 같이 할 수 있었고, 안전한 은신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친구들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모두 수배를 받고 피신했으며, 그 1년 후 김상진 서울농대생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자결에 자극을 받아 긴급조치 9호 아래에서 서울대 5ㆍ22 사건과 명동성당 장례식 사건의 배후로 연루되어, 박정희 씨가 저격당해 죽기까지 피신을 해야 했다.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 일하기도 했고, 기술학원 강사생활도 했다. 이 기간에 집사람인 인재근을 만나 함께 활동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들 병준이도 낳았다. 아득하고 괴로운 세월이었지만 우리에게 행복할 수 있는 틈도 없지 않았다. (주석 14)

박정희의 패악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민권투쟁을 벌이며 박정희와 대결해온 장준하가 1975년 8월 17일 등산길에서 의문사를 당하고, 1976년 3ㆍ1절 55주년을 맞아 윤보신ㆍ김대중ㆍ함석헌 등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것과 관련, 이들을 정부전복 선동 혐의로 구속ㆍ입건하였다. 그리고 1978년 12월 27일에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박정희는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 공화당이 31.7%를 얻었다. 야당이 1.1%를 더 득표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폭압통치를 거듭하는 박정희 정권에게 국민은 분명하게 레드카드를 던졌다. 이처럼 민심의 이반현상이 드러났는데도 박정희는 반성하려 하지 않고 날로 광폭성이 더해갔다.

박정희는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하자 경찰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강제해산하는 과정에서 1명을 사망케하고, 공화당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등 반이성적인 야만성을 드러냈다. 마침내 10월 16~17일 부마항쟁과, 부산에 계엄령 선포, 서울 등지에서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18년 5개월 동안 1인 전제를 자행하다가 부하의 총탄으로 살해된 것이다.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박정희의 암살 소식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수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온 김근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가정적으로도 불행이 닥쳤다. 그동안 막내아들 때문에 어느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었던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어머니께서는 아들 병준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당시 암으로 쇠진할 대로 쇠진해지셔서 손자를 직접 보고 안아 보시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의 죽음으로 막내아들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확인하신 탓인지 1980년 1월 말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주석 15)


주석
13> 앞의 책, 160쪽.
14> 김근태, 앞의 책, 418쪽.
15> 앞의 책, 418~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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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형식(대구 한의대 교수)의 넋 나간 황홀경 - ‘朴비어천가’ 인용합니다.

 

"꽃 중의 꽃 근혜님 꽃! 8천만의 가슴에 피어라, 피어라, 영원히 피어라!

백두산 상상봉에 한라산 언덕 위에 민족의 꽃이 되어 아름답게 피어라!

별 중의 별 근혜님 별! 8천만의 마음에 빛나라, 빛나라, 영원히 빛나라!

저 하늘 높은 곳에 이 땅의 온누리에 아름다운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라!”

 

▲ ‘어천가’와 ‘鄧비어천가’ 핵심은 “번신물망모택동, 치부물망등소평” (飜身勿忘毛澤東, 致平)입니다.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난 건(정치적 해방) 오쩌둥 덕, 민을 먹고살게 한 건(경해방) 덩샤오핑 덕이니 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중의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마오를 ‘파(破)의 지자’, 덩을 ‘입(立)의 지도자’로 칭송하면서 주문처럼 읊조리는 문구입니다. 꼭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천편일률적’ 인식조차 곽형식의 ‘박비어천가’만큼 낯부끄러울 일도 아니고, 그저 감성에 치우쳤던 이인화(이화여대 교수)의 ‘朴비어천가’보다는 낯간지러울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소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이후 봉건적 신분제 피 말디 한번이나마 중국 인민들이 ‘정치적 자유권’을 누려본 적이나 있었습니까. 지난날 빈곤의 유는 일단 논외로 친다면, 근래 덩의 개혁개방조차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가 성취한 거와 유사한 ‘서구식 산업화’의 성공적 도정일 따름이지, 그게 어디 중국 인민들의 ‘사회경제적 기본권’ 향유나 풍요의 공유이기나 한 겁니까. 사실 이거야말로 이른바 정치민주화의 위업을 달성한 우리 대한민국이 비로소 오늘날 성취해 나가야 할, 이 시대 최고최대의 현안 과제로 생각합니다.

 

※ 세상에 무슨 진선진미한 건 없을 겁니다. 모처럼 조선일보의 국제관계 좋은 기사 올립니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좋기사 비율이 대체로 7 : 3이라면 나쁜 기사 비율은 3 : 7 정도일 겁니다. 이하, 요지와 함께 [조선] 기사, “115년 만에 일본 제친 중국… 中華주의 부활로 주변국 긴장!” 링크시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23&aid=0002456439

 

 

⑴ 경제력 美 이어 2위의 ‘G2 시대’로… 지난 10년간 年평균 10%대 고성장…

 

후진타오가 집권한 지난 10년은 중국이 'G2(주요 2개국)'로 불릴 정도로 경제·군사 등 각 방면에 걸쳐 국력이 크게 신장. 지난 10년간 연평균 10.7%의 고성장 기록. 2010년 일본을 넘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 2002년 1135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DP지난해 5432달러로 4.7배가 돼. 전체 GDP도 같은 기간 미국의 7분의 1에서 절반 가까치솟아. 빈부·지역 격차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부 연안 지역의 상당수가 1인당 GDP 1만 달러를 넘어서는 등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높아져.

 

이런 성장은 장쩌민 시절인 2001년 이뤄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기반으로 작용. 하지만 후진타오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4조 위안(약 7200조원)의 과감한 경기 양책으로 돌파하는 등 중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끈 점을 과소평가할 수 없어. 또 3조 달러가 넘는 두둑한 외환을 쌓았고, 국가 채무가 GDP의 40%에 불과할 정도로 탄탄한 재정도 구축.

 

 

⑵ 군사력도 ‘G2' 시대로… 70년 숙원' 항공모함 첫 배치, 유인우주선 도킹도 성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군사력 강화와 우주 개발도 본격화. 중국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국방비는 2002년 225억 달러에서 2011년 899억 달러로 4배 수준으로 증가.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다는 것이 해외 연구기관들의 평가. 중국인의 70년 숙원이던 첫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호도 실전 배치.

 

2003년 첫 유인우주선을 발사한 데 이어, 올해는 우주정거장 건설에 필수적인 유인우주선 도킹기술까지 확보해 물오른 과학기술 수준을 과시. 2008년 건국 후 처음으로 개최된 베이징올림픽은 중국민이 지난 100년 치욕의 역사를 씻고, 자존심을 회복한 대형 이벤트.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이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오만과 군사적 압박으로 이어지면서, '중국 위협론'과 중화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어.

 

 

⑶ 3通으로 대만관계 획기적 개선 - 편지도 힘들었는데 이젠 관광객들 서로 왕

 

중·대만 양안 관계 개선은 후진타오의 최대 치적으로 꼽혀. 1990년대만 해도 양안 관계최악. 1995~1996년 중국군이 대만 부근 해역에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해 미국의 항모핵잠수함이 출동하는 대만 해협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후진타오는 취임 후 중앙당 내 대만 소조 조장을 직접 맡아 강온 양면책으로 대만 관계를 풀어나가.

 

대만 독립 주장에는 강경 대응을 계속하면서도, 양안 교류와 경제 협력 분야에서는 통 양보로 대만을 끌어들여. 2008년 양안 간 직항로 개설과 직교역, 서신 왕래 등 3통(通)합의됐고, 2010년에는 자유무역협정(FTA) 격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 대만인의 반중(反中) 정서가 모두 해소된 건 아니지만, 10년 전 서신 교환조차 어려웠던 양안 관계는 서로 관광객이 오갈 정도로 해빙. 지난달 4일에는 '대만 독립'을 내걸고 중국과 대립해대만 민진당의 전 주석 셰창팅(謝長廷·67)이 방중하기도. 2008년의 대만 대선 당시 현 총통 마잉주(馬英九)와 대결했던 그는 역대 중국을 방문한 최고위급 민진당 인사.

 

 

⑷ 향후 최대 숙제 - 서부 대개발 본격 추진 등으로 ‘균부’(均富) 시대 열어내

 

여전히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지만, 경제·사회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긍정적 평가를 는 부분이 있어. 후진타오는 '과학적 발전관'을 표방하면서 지역·도농 간 불균형 해소에 노력. 2000년대 후반 농업세가 전면 폐지됐고, 농촌 지역 의료·양로보험 도입. 낙후한 중부 내륙과 서부 지역 발전을 위한 '중부굴기'와 서부 대개발 정책도 그의 임기 중에 본격 추진을 시작.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먼, 중국 최대의 향후 숙제일 것.

 

2012. 11. 7. (수) / 오용석, 개방과 통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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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10 08:00 김삼웅

 

운명의 여신은 다시 한번 학구파 청년에게 학문연마의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박정희가 기획ㆍ각본ㆍ연출한 유신체제는 김근태에게 고난의 길을 강요했다. 운명의 갈림길은 극적이었다.

사회운동으로 진출하려니 막막했고 사회과학적 이론을 더 쌓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리고 내심 수배가 아니기를 확인해보고 싶은 복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석 10)

김근태는 홍성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면회 온 이재화에게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서릿발치는 유신 초기에 ‘사회운동의 진출’은 그가 아닌 누구라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여 대안으로 택한 것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사태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형 국태 씨에게 전화를 해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내게 했고, 입학시험 당일에 다시 형에게 전화를 해 “수험표를 갖고 시험장에 나와 달라. 혹시 시험장에 수사기관원이 나와 있을 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부탁한 대로 시험장에 수험표를 갖고 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수사관이 쫙 깔려 있었고, 시험이 시작되었는데도 김근태 씨의 모습은 끝끝내 보이질 않았다. 형 국태 씨는 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동숭동 소재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곧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 발치에서 형을 보고 있었다. 수사기관원들이 나와 있어서 나가지 않았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대학원 진학은 좌절되고 말았다. (주석 11)

보통 사람들의 운명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손에 결정되는지 몰라도, 한 시대 지도자들의 운명은 시대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근태가 당시 대학원 진학이 가능했다면 그의 생애는 평탄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되고 학문의 업적을 남겼을 지 모른다.

김근태는 평탄한 길을 접고, 저항의 길에 들어섰다. 운명적인 측면도 있지만, 피 속에 전하는 형들과 가족사의 DNA(유전인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동지들의 고난과 박정희 체제의 광폭성이 젊은 지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서게 하는 ‘시대정신’도 끼었을 터였다.

박정희의 권력욕구는 자제력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의 필수적인 야당, 언론, 사법부 등이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유신쿠데타를 자행하면서부터 그는 모든 비판을 불허하는 신격화의 존재처럼 행세하였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하는 김대중을 납치해오고, 1974년 1월 8일에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 유신 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 논의를 금지시키면서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 세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판적인 언론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하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1973년 3월 30일 전남대의 <함성> <고발>등 유신반대 유인물 살포 사건, 5월 20일 기독교인들의 유신과 박정희 반대의 <신앙선언문>사건, 9월 6일 서울 제1교회 박형규 목사 중심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 등 반유신ㆍ반박정희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신 선포 이후 대학가 최초의 반유신운동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문리대 비상학생총회 소속 250여 명이 자유민주체제 회복을 요구하는 내용의 선언문 낭독과 시위였다. 반유신의 횃불은 4일의 법대생 시위에 이어 5일에는 상대생 300여 명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과 대일예속 청산, 자립경제 확립, 중앙정보부 해체, 학원자유 보장 등을 촉구하는 선언문 낭독과 시한부 농성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유신 선포 1년 만에 박정희는 다시 대학생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서울대생들을 스타트로 하여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다시 반정부 투쟁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박정희는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좌경의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3월 들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빈발하는 한편 전국 대학의 반독재 연합시위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폭력혁명을 시도한다고 날조하면서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주모자라 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구속자 중에는 윤보선ㆍ지학순ㆍ박형규ㆍ김찬국ㆍ김지하를 비롯하여, 이른바 인혁당재건 관련자 21명, 일본인 2명이 포함되었다. 김근태의 동료 중에서도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

1975년 3월 28일 수원의 서울대 농대 학생총회는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원자유 보장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한데 이어 4월 2일에는 박정희에게 학원과 사회 제반 사태를 타개할 일대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4월 4일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을 벌였다. 이때 한국학생운동에 커다란 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11일 학내에서 벌어진 자유성토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김상진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발표하고 할복, 다음날 사망하였다.

김상진의 할복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학생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생 4,000여 명은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일어난 최초의 시위였다. 80여 명이 연행되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김근태는 서울대생 시위와 명동성당의 김상진 장례식을 주도하여 더욱 수배가 강화되었다.

김근태는 이번에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또 다시 그의 친구들을 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기재하였다. 당국은 김근태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용케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수배중 자신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하고자 한 사회과학 공부를 함과 동시에 운동가가 가져야 할 철저한 규율을 몸소 실천했다. 수배중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생활했는가에 대해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중이었던 손학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민청학련 관련으로 수배중인 나와 장기표ㆍ김승균ㆍ심재권ㆍ신동수 등과 5ㆍ22사건으로 수배된 김근태는 수배중에도 가끔씩 만나곤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수배중에 있었던 주변 이야기를 하거나 동료들에 대한 근황을 물어보곤 했는데, 유독 김근태만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방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과 같음.
11> 앞과 같음.
12> 이재화, 앞의 책, 159~160쪽.

 



 

병준, 병민에게

 

병준아, 병민아 잘 있었니.


오랫동안 너희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구나.
아버지는 이사를 하였고, 유난히 마음상하는 일이 있어 그렇게 되었단다.
우리 병준이, 병민이가 씩씩하게 자라는 것은 엄마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엄마편지와 함께 날아 온 너희들의 그림을 재미있게 들여다 본단다.
엄마, 아빠를 그린 병준이 그림, 병민이 그림 모두 잘 그렸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병준아, 학교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린 네 그림 속에서 금방 병준이가 "아버지!" 하면서 뛰어나올 것 같구나.
학교생활이 신나고, 동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그 그림에 배어 있구나.
하늘에는 해가 환하게 웃고 있고 말이다.


그 해는 하늘에 있지만, 병준이 마음 속에도 있을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병준아, 뛰어놀다 보면 가끔 넘어지고, 넘어져 무르팍이 깨지기도 하지.
또 피가 나 울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신나고 재미있는 생활 속에 가끔 걸림돌이 나타나고 어떤 때는 방해꾼조차 쫓아와 괴롭히기도 하는 것을

병준이 너도 어렴풋이나마 알리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학교생활, 새로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 만나는 것이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기쁨으로 너에게 다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긴장들도 왔을 것이다.
쉽고 재미있는 공부와 숙제도 있지만, 따분하고 몹시 귀찮은 것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란다.
여기에 걸려 넘어져 무르팍 깨져 피가 나듯이 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적도 있을 것이다.


넘어져 한바탕 울고나서는 또 동무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병준이는 놀지. 그렇단다.
놀다가 넘어져 다치는 것이 무서워 놀지 않는 것은 너희들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바보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니.
그건 지는 것이란다.

병준아, 너는, 가슴에 태양을 안고 있는 너는 넘어지는 것을 상처입는 것을 훌륭하게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아버지는 믿는다.
있잖니, 너희들을 떠난 뒤 어떤 사람이 딴지를 걸어 아버지도 넘어졌단다.


심하게 다치기도 했었다.
외롭고 무서워 울기도 했다.
꾹꾹 눌러 속으로 울었단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일어났다.
엄마, 큰엄마, 큰아버지가 도와주고 엄마, 아버지 친구들이 어깨를 빌려줘 저 컴컴한 어두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병준이 그림 속의 태양을 보면서, 아버지도 그런 밝음을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병민아, 네 생일을 축하한다.
뒤늦게야 축하하고, 너한테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언니들, 오빠들 하고 네 생일을 축하하면서 즐거워했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병민이처럼 튼튼하고 마음이 고운 아이가 딸인 것이 아버지는 무척 자랑스럽다.
욕심장이로서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의견이 따로 있는 네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옷도 혼자 입고 그 선택도 네 스스로 하고, 또 엄마와 함께 집안 청소도 한다지.


병민아, 네 손을 잡고 놀이터에도 가소 약수터에도 가게 될 날을 아버지는 기다린다.


병민아, 역곡 일두아파트 뒤에 있던 약수터 기억하고 있니?
거기에 네 손을 잡고 노래부르면서 오빠, 엄마와 함께 갔던 것 나는 그리워한단다.
약수터 가는 논길에서는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가 병민이을 반겨주었고, 앞쪽 산 숲에서는 뻐꾸기가 뻐꾹, 뻐꾹, 뻐어꾹 소리내면서

다시 한번 약수터에 가자.
그래서 개구리도 만나고 뻐꾸기도 만나고 말이다.


참 병민아, 너는 엄마보고 "재근아, 재근아" 그런다며.
엄마가 네 친구여서 이름을 부른다지.
엄마는 조금 난처하면서도 재미가 있는 모양이더라.


병민아, 너는 배짱이 센 놈이로구나.
그래, 엄마, 아버지는 병민, 병준이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단다.
그런데 진짜 친구가 된다는 것은 너 스스로 생활에 책임을 질 때 가능한 것이란다.

 

그건 쉽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병민이가 더욱 애쓰고 엄마, 아버지가 돕도록 하자,
이 얘기는 어려워서 다음 기회에 자세히 얘기하자꾸나.


잘 있어라


(1986년 6월 19일, 영등포구치소에서 아들 병준, 딸 병민에게 보낸 편지)

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09 08:00 김삼웅

 


대학가에서는 4ㆍ27 대통령 선거의 부정ㆍ불법에 항거하여 대규모적인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1971년 5월 27일 서울대 공대ㆍ문리대ㆍ상대ㆍ약대ㆍ의대ㆍ치대생 등 900여명과 서강대생 200여명은 구속학생 석방, 학원자유 수호, 교련반대 등을 외치며 교내 시위에 이어 가두에 진출했다. 김근태는 이 시위에 앞장섰다.

정부는 이날 서울대 문리대ㆍ법대ㆍ상대ㆍ사대에 휴업령을 내리고 교문을 폐쇄했다.
9월 30일에는 수도경비사 장교들이 고려대학에 난입하는 폭거가 자행되기도 했다. 김근태는 1971년 11월,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의 신세가 되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했다”면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서울대 법대 4년), 장기표(서울대 법대 3년), 조영래(사법연수원생), 김근태(서울대 상대 3년) 등을 구속했다. 이들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ㆍ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 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기능 정지 후 정부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주석 7)

정부가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꾸며 구속한 것은 날로 격화되어가는 학생시위를 저지하려는 정치적 책략에서였다. 특히 4ㆍ27 대통령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학생연맹)을 겨냥하는 처사였다.

‘학생연맹’은 1971년 4월, 13개 대학 학생 대표로 구성되어 4ㆍ27 대통령 선거 참관을 실시하는 한편 소속 대학의 시위를 주도하는 등 반정부 학생운동의 핵심 서클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보복적인 집중 타격을 가한 것이다.

김근태는 동료들이 구속될 때 용케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검찰은 이들을 구속기소하면서 김근태는 ‘공소외’로 표기하여 별명의 하나가 되었다. 정보부 요원과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피신하고 있을 때 구속된 심재권ㆍ이신범ㆍ장기표ㆍ조영래 등은 수사 기관에서 가혹한 구타를 당하고, 검찰은 9월 5일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이들에게 징역 10년씩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9월 11일 징역 10년 6월과 2년, 집행유예 3년 등을 각각 선고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 공소사실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드러나 크게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 이 사건은 선고 공판에서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음모 부분은 무죄, 기타 부분은 유죄가 인정된다. 당초 검찰이 발표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의 허구가 밝혀진 것이다. 김근태는 이 때부터 길고 긴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 수배자들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고, 숨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5공 때는 그마저 불가능했다.

김근태는 변형윤 교수 등의 배려로 수배 중에 시험 대신 우편으로 리포트를 제출하여, 1972년 2월 가까스로 서울상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피신 생활 중에 택한 방편에는 가명으로 취업하는 길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위장취업자’라 하여 회사ㆍ공장을 뒤져 찾아다가 처벌하였다. 노동자들을 ‘의식화’ 시킨다는 이유였다.

이 때부터 그는 길고 긴 수배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간간이 수배로부터 ‘사실상 해제’된 상태도 없지 않았으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피신을 하던 그는 피신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한 방편으로 일신산업(일신제강의 전신)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수출 업무를 맡아 약 11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의 45년 생애(인터뷰 시점-필자)에 넥타이를 매고 월급봉투를 만져 본 유일한 기간이었다.
(주석 8)

김근태가 일신산업에서 월급쟁이 노릇을 하고 있을 때는 ‘학생연맹’의 친구들이 옥살이를 하고, 박정희가 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이어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법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키면서 영구집권의 길목으로 치닫고 있는 시점이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마침내 군부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유신쿠데타를 감행하였다.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자신들이 우려했던 한국판 총통제가 ‘유신’의 이름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그야말로 국체변혁의 내란행위였다. 김근태는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신쿠데타로 양심적인 야당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노동운동가들이 속속 구속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한국사회는 11년 전 5ㆍ16쿠데타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김근태는 이런 상황에서 남들처럼 넥타이 메고 출퇴근하면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는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가 더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였다. 성격상 ‘햄릿적’이어서 그의 고민의 심도는 깊어갔다. 이때의 고민은 그리고 결과는 인간 김근태가 고난의 길을 걷게 하는 ‘민주주의자’의 선택이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 후 그는 회사생활이 자신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판단, 사회운동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갈 것인가 고민하던 중 대학원 진학의 길로 마음을 정하고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주석 9)


주석
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226쪽, 2006.
8> 이재화, 앞의 책, 159쪽.
9> 앞의 책,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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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8 08:00 김삼웅

 

박정희는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두번째 제치고 재선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박정희는 이때 이미 3선 개헌을 구상하면서 6ㆍ8총선거를 관권 부정선거로 치뤘다. 3ㆍ15를 방불케 하는 공개ㆍ대리투표 등 부정 타락선거였다. 야당은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학생들은 연일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다.

김근태는 이때 3학년이었다. 상대 대의원회 의장에 선출될 만큼 동료들의 신임을 받았다. 민주주의 기초인 선거의 부패ㆍ타락상을 지켜보면서 침묵할 수가 없었다. 6월 10일 김근태는 상대생들을 이끌고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6월 15일에는 전국 21개 고교와 5개 대학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21일에는 서울대ㆍ연세대ㆍ성균관대ㆍ건국대 등 학생 대표들이 모여 ‘부정부패 일소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정선거규탄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후에도 6월 내내 서울시내 대학생들은 ‘학원주권 수호’와 ‘부정선거 규탄’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6월 15일 서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강압적으로 학원시위를 봉쇄하려 했지만,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김근태는 연일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앞장섰다. 학생운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보복이 따랐다. 학교 당국은 김근태를 상대생 시위 주동을 이유로 권고처분에 이어 제적이라는 ‘극형’에 처했다. 한 달 뒤에는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때부터 시위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는 이른바 ‘강제징집’을 자행하였다. 정부는 교련을 거부한 학생들에게 35개 대학에서 13,505명에게 병무신고를 하게 하고 그 중 5,000명에게 집병영장을 발부했다. 데모 주동으로 제적된 학생 중 71명에게 1차로 영장이 발부되고 이들을 징집열차에 태웠다.

1971년 입영열차 오르는 강제징집 대학생들. 사진은 http://cafe.daum.net/asssuplee

 

박정희 정권은 국방의무를 반정부 학생들을 처벌하는 형벌로, 그리고 군복무를 유배지로 악용한 것이다. 김근태는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1967년 9월의 일이다. 3학년 2학기가 개학하기도 전에 제적을 당하고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한 언론인은 징집 학생들이 강제 입영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제적학생들이 첫번째로 입영하던 10월 26일, 이미 동대문경찰서에 신병이 확보된 서울대 대의원회의장 김재홍(문리대 정치학과 3년)과 최대철(법대 행정과 3년) 등 10명의 학생들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경찰에 인솔되어 용산역으로 나가기 전 배웅나온 서울법대 박병호 학생과장과 김치선 교무과장을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오후 4시경부터 용산역 앞 광장에는 입영학생들의 학우와 교수 및 가족 등 5백여명이 모여 교가, 응원가,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이들을 전송했다.

이날 입영한 학생은 서울대 9명(법대. 문리대ㆍ상대 각 3명), 고대 5명, 연대 5명, 성대 3명, 서강대 2명, 건대 2명, 서울시립농대 2명, 강원대 1명, 명지대 1명 등 모두 30명이었다.
(주석 4)

이 기사의 ‘서울대 9명’ 중에는 김근태도 끼어 있었다.
‘강제징집’된 학생들은 훈련과정이나 부대 배치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의 불이익이 따랐다.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군의 처사는 대단히 적대적이어서 훈련 중 심한 구타가 일쑤이고 대부분 최전방 부대로 배치되었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소속 부대는 물론 방첩대의 감시로 책 한 권, 편지 한 통 맘 놓고 보고 쓰기 어려웠다.

3년여 만에 육군병장으로 제대한 김근태는 1970년 8월에 복학하게 되었다.
김근태가 군에 복무하고 있을 즈음에 국내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정부는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서울침투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 창설(4월 1일), 중앙정보부의 통일혁명당사건 발표(8월 24일), 국민교육헌장 선포(12월 5일), 공화당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1969년 9월 14일), 개헌안 국민투표(10월 17일), 3선개헌반대 학생시위 격화(6월 19일~12월) 등 박정희의 국가안보를 빙자한 장기집권 책략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3선개헌을 강행하면서 이미 장기집권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어섰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보 문제를 적절히 활용하고, 공화당 내의 개헌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1인독재의 길을 열었다. 이승만이 장기집권 끝에 쫓겨난지 9년, 민주정부를 쿠데타로 타도하고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의 헌법을 만든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1970년 9월 전당대회에서 40대 후보들의 치열한 대결 끝에 비주류의 김대중이 주류의 지원을 받은 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11월 13일에는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여, 1970년대 노동운동의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969년부터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 대학에 군사교련을 실시하였다. 향토예비군이 제대를 한 청장년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교련은 재학생들을 한 묶음으로 엮으려는 준군사조직이었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대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1969년부터는 교련이 대학의 정규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교련은 대학이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 지식의 생산과 토론이라는 교육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과목이었다. 교련 교육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대학의 교양교육 및 학사운영 전반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학내에서의 토론이나 의사수렴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교련은 형식상 대학의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대학의 학문적인 공동체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었고 교수들의 영역과는 무관하게 군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것이었다. (주석 5)

박정희 정권이 전국의 대학에서 교련을 실시한 것은 대학의 병영화를 통해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의 의도를 꿰뚫은 학생들은 교련 철폐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근태가 참여한 서울대 총학생회는 1971년 <교련철폐 투쟁선언>을 발표하고, 다음날 서울대 사회학과생들은 <교련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교련 철폐를 주장했다. 이것이 대학가 ‘교련철폐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전체 국가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관권을 총동원하고서도 어렵게 승리하였다. 김대중 후보와의 표차는 95만여표에 달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사실상 패배하였다. 박정희는 3선에 만족하지 않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가장 저항이 심한 김대중과 대학을 더욱 심하게 탄압했다.

김근태가 속한 서울상과대학 교수들은 1971년 8월 21일 <대학자치선언>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대학 간섭을 비판하였다.

“오늘날 우리 대학은 내외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그 위기의 근본요인은 대학운영의 비자치성에 연유한다.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가 망라됨으로써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대학의 본질에 비추어 대학의 운영이 상부기관의 자의에 좌우되는 현실적 제도하에서 대학의 대학다운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주석 6)고 완곡하게 나마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로 완벽하게 1인전제 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대학은 자율성을 잃게 되었다. 교수 중에는 어용 교수도 많았지만, 학자적 양심을 지키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선 학생들을 음으로 양으로 보호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주석
4> 이경재, <유신쿠데타>, 167~168쪽, 일월서각, 1986.
5>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교수 민주화운동 50년사>, 66쪽, 1997, 서울대학교 출판부.
6> 앞의 책,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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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대로 기자 =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의 부인 김정숙 여사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 부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가 3일 나란히 빈곤층 대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야권후보 단일화를 놓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이뤄진 터라 두 사람의 만남에 정치권 안팎의 눈길이 쏠렸다.

김 여사는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너른들판에서 열린 '가난을 이긴다' 전국자활대회 행사에 참석해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는 사회, 실패한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가 바로 문재인 후보가 꿈꾸고 만들고 싶은 '사람이 먼저인 나라'"라며 문 후보의 정견을 소개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경제규모나 국력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너무 취약하고 부모님이 가난하면 자식도 가난할 수밖에 없고 한 번 넘어지면 일어설 수가 없다"며 "이제는 나라가 가난을 극복할 수 있게 지원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미경 교수도 이 행사에 참석해 "국가는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분들이 두 발로 굳건히 설 때까지 기본적인 생계에 책임을 다 해야 한다"며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 후보의 꿈은 국민을 보듬는 따뜻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라며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나라가 그의 꿈"이라고 안 후보의 정책을 설명했다.

da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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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

012/07/07 08:00 김삼웅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김근태는 1965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공대가 아닌 상대를 택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지만, 가정의 가난을 극복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가 대학에 진학한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추진으로 정국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서울의 시위대는 시내 중심부까지 진출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재원을 일본에서 가져오기 위해 쿠데타 직후부터 극비리에 한일회담을 진행했다. 여기에는 아시아의 반공기지연대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1961년 6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일본 수상 이케다(池田)의 회담에 이어, 11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문제가 한ㆍ미ㆍ일 3국 간에 장막 속에서 은밀히 논의되었다. 대일 협상진행과정을 비밀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 와서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근태는 시국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내의 ‘순수서클’이라는 기독교서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을 뿐이다.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대일굴욕회담을 강행하면서 반대측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박정희 정권의 처사는 한 학구파의 대학생을 더 이상 캠퍼스에서만 머물러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굴욕회담 반대 시위는 야당 및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면서 반대 시위가 대학가로 번졌다.

1964년 3월 24일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대학생 시위로부터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 5월 20일의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및 5월 25일의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로 이어졌다. 6월 2일 서울시내 대학생 6,000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광화문까지 진출한 데 이어 3일에는 수만명이 "박정권 타도, 매판자본 몰수" 등을 외치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날 저녁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물리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근태는 학내 사회과학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도 없이, 돈 몇 푼에 덜컥 국교정상회의 길을 튼 박정희의 처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운동하는 동료들의 밝은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이 그의 운동에 뛰어든 변이다.
물론 그가 운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성장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강제퇴직, 그로 인한 가난과 소외감 그리고 행방불명된 세 명의 형들의 민족주의적 영향 등이 잠재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와 작고한 조영래 씨와 함께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서 ‘경기고 출신 65학번 트로이카’로 불린 손학규 씨는 “김근태가 학생운동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아주 얌전하고 데모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석 1)

박정희는 거센 국민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을 타결하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기본관계조약은 양국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인 일제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에 매듭 짓고 말았다. 액수도 문제지만 동남아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의 배상을 받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또 이 협정으로 한국의 40해리 전관수역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저인망 어선의 남획으로 우리 인근 바다에서 어족자원이 씨를 말리게 되었다.

김근태는 굴욕회담 반대 시위에는 참가했으나 아직 리더 그룹은 아니어서 계엄사태에서도 구속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상대 안에 구성된 경우회와 경제복지회 등 서클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분야의 공부에 매달렸다. 이 시기에 각종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점차 사회의식의 깊이와 지평을 넓혀 나갔다.

당시 문리대의 경우 행동을 중시한 반면 상대는 이론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상대 내에는 이른바 ‘지하서클’이 다른 대학에 비해 많았고, 사회과학 공부도 훨씬 많이 했다. 그때 공부한 서적은 주로 폴 바란, 스위지, 모리스 돕 등이 쓴 정치경제학 저서들이었다. 1학년 때는 주로 위와 같은 책들을 영어 원서로 공부하고 가끔은 청계천 고서방을 통해 어렵게 입수한 <세계사 교정>(소련 과학아카데미 발행), <조선경제사>(백남운 저) 등 이른바 ‘마분지 서적’ 등을 읽었고, 2학년이 되면서는 일어를 배워 진보적인 일어 서적을 탐독했다.
(주석 2)

김근태는 지식욕이 왕성했다.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영어와 일본어 책을 구해 읽으면서 점차 역사문제와 한국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이 생기면 청계천 헌책방을 순회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교양서적과 미군 PX를 통해 흘러들어온 양서를 구입하였다. 국내외의 문학서적도 많이 구하여 읽었다. 서클에서는 읽은 책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당시 상대 조교로 있던 안병직은 김근태가 2학년 때에 처음으로 만났다. 안병직의 증언.

"김근태는 몇 년 만에 나올까말까 하는 비상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판단력,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천재’였다. 2학년 초엔 대부분 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등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그와 수 차례 이야기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보아 그때 당시부터 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 같다.” (주석 3)


주석
1> 이재화, 앞의 책, 157쪽.
2> 앞의 책, 157~158쪽.
3> 앞의 책,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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