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그의 은폐, 학대행위 등, 이 사건의 본질을 구성하는 정치군부의 범죄행위에 대해
원심법원은 제대로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에서 마치 실체적 진실은 저멀리 따로 있고,
정치군부의 범죄행위는 단순히 소송법적 사실로서 자유로운 증명의 대상일 뿐이라고 여겨 판단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이른바 실체적 진실은 고문과 그 은폐 속에, 그 위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국가형벌권의 실현'이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다가, 피로 물든 더러운 손에 의해 강행된 정치적 소동이다.
이 사건은 중세시대의 저 악명높은 마녀재판 소동과 유사한 것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꼭 같은 것은 아니겠고.....
1심 재판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고문자들을 적극적으로 두둔한 것이었고, 고문이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었다.
지난 4월초순경 이념서적 사건으로 구속된 청년들 중 김상복이라는 사람이 또다시 전기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소아마비로 불구자인 이 청년에게 전기고문을 가한 사람은 바로 나를 고문했던 백남은이라고 한다.
1심 재판부는, 판사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것이라고 발뺌하고 말아버릴 것인가.
이 사건은 피고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최소한도의 권리보장조차 박살내 버린 것으로서
헌법적 요구인 적정절차에 대한 전면적 거부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처벌될 수 없으며, 처벌되어서는 안 된다.'
원심법원은 '공소제기 절차가 법령을 위반했으므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나와 변호인의 주장을 이유도 밝히지 않고 배척했다.
현 헌법은 상세하고도 명확한 형사절차상의 인권규정을 갖고 있다.
즉 적정절차를 확고히 보장한 것이다.
헌법은 전체 모든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형사소송의 모든 문제는 헌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하강 과정적 방법에 의하여 해결을 기도해야 한다.
즉 헌법과 형사소송법규에 따라서 이 사건이 수많은 정치군부의 불법범죄행위에 의해 공판에까지 이르는 것이 명백한데도
유죄를 선고한 것은 원심법원이 법리를 오해한 것이다.
나아가서 위법, 불법범죄행위를 통해서 또한 그것에 의해 공소제기된 이 사건은
마땅히 공소기각 판결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붙이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영향을 미친 잘못을 범했다.
나는 85년 6월 24일 불법적으로 체포된 이후, 특히 9월 4일 남영동으로 강제연행당한 이후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유린당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완전히 짓밟혔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빼앗겼다.
특히 신체의 자유는 박탈당한 정도가 아니라 마구 짓밟혀 묵사발이 되어버렸다.
짐승처럼 매 맞았고 동물처럼 능욕을 당했다.
8월26일부터 9월4일까지 구류를 살고, 그 후 즉시 또 구속된 것은 별건 구속으로서 영장주의에 위반되며,
9월 25일 밤 9시반까지는 영장을 제시받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불법적 구금상태에 있었던 것이며,
인치장소로 영장에 명시된 용산경찰서 유치장에는 송치당일 오전 3시20분부터 오전 9시까지만 있었을 뿐이다.
85년 9월 당시, 남영동 공작1과 과장이었던 총경 윤재호의 직접지휘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전기, 물고문을 10차례 당했다.
대엿새 정도의 끼니는 제공되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고문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우유에 빵을 녹여서 겨우 허기를 메워 나갔다.
밤을 꼴깍 새운 날도 부지기수였고, 고문 받은 날은 잠을 좀 재웠는데 4시간 내지 4시간 반 정도였다.
참혹한 고문에 의해 강제된 것을 그대로 베껴 쓰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수집된 증거와 고뇌, 비명과 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그에 더 잡아 이리저리 꿰매어 모은 2차 수집증거에 의해 공소제기에 이르렀다.
남영동에서는 물론 검찰청에 뻔질나게 들락거릴 때도, 그리고 공소제기되고 나서 제1회 공판기일에 불과 10일 전까지
변호인과의 접견, 교통이 악마적으로 봉쇄되었다.
또한 85년 12월 13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법원에 고문증거로 제출하려던 상처딱지를 구치소에서 폭력적으로 탈취당했다.
이처럼 갖가지 위법한 절차에 의해 헌법적 형사소송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도전하는 절차에 의해 취득된 증거
또는 그에 뿌리박은 2차 증거를 원심법원이 증거로 허용함으로써 법원 스스로 위법한 절차를 옹호하고 승인한 결과가 되었다.
이는 사법의 염결성에 반하는 것이며, 또한 적정절차 보장을 통한 재판의 공정성 유지라는 대원칙을 붕괴시켜 버린 것이다.
사실과 법리가 이러한데도 원심법원이 아무런 이유의 제시없이 공소기각 판결을 배척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원심법원은 사실을 인정함에 있어서 증거의 요지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법령을 위반했다.
판결에서는 어떤 증거에 의해 어떤 사실을 인정했는지가 명백해야 하는데도 원심은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판결에 이유를 붙이고 증거의 요지를 명시토록 한 것은 법관의 자의를 배제함으로써 재판의 공정을 담보하고,
재판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피고인을 납득시키고자한 것인데, 원심판결은 이에 실패함으로써 법령을 위반한 잘못을 범했다.
특히 정치적 보복인 이 사건에서 증거의 요지를 밝히지 않은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미국 홈즈 대법원 판사의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공판정에서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사용될 수 없다"는
저명한 판결을 환기시킴으로써 이 부분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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